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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PRESS] 30살에 放出되고 41살에 傳說로 隱退할 때까지...이동국이 傳한 '選擇의 이야기'(一問一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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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PRESS] 30살에 放出되고 41살에 傳說로 隱退할 때까지...이동국이 傳한 '選擇의 이야기'(一問一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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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풋볼

[인터풋볼=신동훈 記者(西大門)] K리그와 全北 현대, 그리고 大韓民國 蹴球 歷史上 가장 偉大한 選手 中 하나인 이동국의 이야기를 仔細히 들어볼 수 있는 時間이었다.

이동국은 27日 西大門에 位置한 한 카페에서 『結果를 아는 選擇은 없다』의 出刊記念 記者懇談會를 進行했다. 이동국은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最年少 出戰을 記錄하면서 華麗하게 登場했다. 浦項 스틸러스에서 뛰며 秀麗한 外貌와 華麗한 實力으로 K리그 興行을 이끌었다. 2002 韓日 월드컵, 2006 獨逸 월드컵에선 아쉽게 脫落을 하면서 苦杯를 마셨지만 2010 남아공 월드컵에 가면서 월드컵 꿈을 이뤘다. 미들즈브러에서 뛰며 프리미어리그를 經驗하기도 했다.

미들즈브러에서 돌아온 後 城南FC에 있던 이동국은 나이를 理由로 放出을 當했다. 全北 현대로 간 이동국은 K리그 傳說을 썼다. 늦은 나이에 全北으로 갔는데 無慮 12시즌을 뛰면서 수많은 트로피를 들었다. K리그 歷史上 最高의 選手로 남게 됐고 全北이 只今의 位置까지 오르는데 赫赫한 功을 세운 No.1 레전드로 불린다. 2020시즌을 끝으로 隱退를 할 때 이동국이 달았던 20番은 永久缺番으로 남게 됐다.

出版記念會에 作家로 나선 이동국은 選手 生活을 돌아보고 포인트가 되는 事件에 對해 仔細히 이야기를 했다. 隱退 以後에 삶도 말을 하면서 蹴球選手 이동국이 아닌 人間 이동국 第2의 삶을 言及했다.

[이동국 出版記念會 記者會見 一問一答]

인터풋볼

-選手 때 이미 한番 冊을 냈는데, 隱退 後에 다시 冊을 냈다.

13年度에 처음 冊을 냈다. 그때는 이런 行事를 하지 않았다. 隱退를 準備하면서 冊을 냈었는데 以後로 7年을 더 뛰었다. 그 7年 동안의 이야기, 또 隱退 以後 이야기도 傳하고 싶었다.

-蹴球와 關聯된 寫眞이 題目, 表紙에 보이지 않는다.

처음 冊을 냈을 때 이동국 冊인 거 같이 만들었다. 이番엔 色다르게 에세이이긴 하지만 누구든지 負擔 없이 가지고 다닐 수 있게 만들었다. 題目 選擇도 自敍傳이나 에세이는 가르치려는 느낌이 있는데 이 冊은 다시 한番 생각을 하는 느낌을 가졌으면 했다. 디자인이 예쁜데 이동국이 썼네 느낌으로 느꼈으면 좋겠다.

-막내 (李)試案이 나이 때(4學年) 蹴球를 始作했다.

確實한 건 (李)시안이는 4學年의 나보다 더 잘한다. 공 리프팅度 못하던 나였는데 시안이는 더 많이 찬다. 어릴 때 공을 가지고 논 게 도움이 되는 듯하다. 只今 蹴球選手로서 꿈을 가지고 하고 있다. 시안이가 蹴球를 안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어려운 길을 選擇해서 成功을 하더라도 '아버지의 遺傳子가 좋아서' 이런 말이 붙을 것이다. 本人의 努力이 묻히고 '아버지가 이동국이니까' 이런 게 붙을까봐 걱정이 됐다.

차두리가 隱退를 할 때 "차범근의 아들로 살아가는 게 힘들었다"고 했었다. 그런 느낌 때문에 蹴球를 안 하길 願했는데 시안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도우려고 한다. 蹴球를 하면서 생각하는 꿈과 길을 應援하려고 한다.

-選擇에 對한 이야기가 繼續 나온다. 大學 進學 代身 프로 直行을 選擇한 게 最初의 選擇인데.

只今은 高等學校 卒業하고 프로로 가는 게 當然하다. 내가 뛸 때만 해도 프로 直行은 中學校, 高等學校를 가지 않고 社會生活을 하는 느낌이었다. 난 延高戰에 뛰는 게 꿈이었다. 當時 스승님께서 그 말을 듣고 魂을 내시며 "蹴球選手로서의 成功을 하기 위해선 프로로 가 먼저 社會生活을 經驗하라"고 하셨다.

20살에, 浦項에 入團했다. 나보다 15살 많은 兄들이 있었다. 프로에서 뛰며 나도 모르게 成長했다는 느낌이 있었다. 프로에서 適應을 하고 運도 따랐다. 황선홍 先輩의 빈자리를 내가 메웠다. 내게 주어진 時間에 좋은 結果를 냈다. 차범근 監督님이 最終 엔트리에 넣었다. 新聞을 통해 엔트리를 確認하던 時代였는데 아침에 電話가 불이 나게 와서 新聞을 봤다. 내가 월드컵에 最終 엔트리에 들었다. 깜짝 놀랐다. 그 以後로 프랑스 월드컵을 가면서 蹴球選手로서 많은 걸 얻었다.

인터풋볼

-當時 월드컵 네덜란드戰 映像을 보면 캐스터 분이 김동국이라고 하더라. 그만큼 無名이었다.

一般 사람들이 모르는 選手였다. 空港에 나갈 때 배웅하러 팬들이 오셨는데 浦項 骨髓 팬들 3名만 내게 應援했다. 쭈그리고 앉아 있으니 그 팬들이 와 잘 갔다오라고 하셨다. 갔다가 왔는데 人生이 바뀌었다. 프랑스에서 갈 때와 왔을 때, 삶이 180度가 달라졌다. 차범근 監督님이 中途에 更迭이 됐고 韓國 雰圍氣를 몰랐다. 兄들이 "鷄卵을 맞아도 네가 맞아야 되지 않겠냐"라고 하며 機首를 들고 먼저 空港에 나가보라고 했다. 팬들이 3000名 程度 있었는데 歡迎을 해줬다. 金浦空港 出國門이 열리는 瞬間, 내 蹴球人生度 새로운 世界로 갔다.

-프랑스 월드컵 以後 이동국 酷使의 時期를 보냈다.

靑少年, 올림픽, 成人 代表팀을 오갔다. 무릎 狀態가 안 좋았는데도 選手로서 뛰고 싶다는 생각에 여기 저기 불려 다니면서 競技를 했다. 冊을 쓰면서 돌아가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라고 생각해봤는데 똑 같이 했을 것 같다. 참고 뛰는 게 選手의 道理라고 생각하며 所屬팀에는 罪悚하지만 代表팀을 돌아다녔다.

當時는 K리그 日程 調整이 없었다. 代表팀을 뛰면서 所屬팀에 많은 寄與를 하지 못한 건 아쉬웠다. 2002年 월드컵을 向해 달려갔다. 助力者가 있었으면 切除를 하고 그랬을 텐데 아쉬움이 있다.

인터풋볼

-韓日 월드컵에 가지 못했다. 상무에 入隊했는데 人生의 轉換點이라고 하던데.

韓日 월드컵에 當然히 갈 거라고 봤다. 아시안게임 脫落으로 상무에 갔다. 바닥이라고 느꼈을 때 突破口가 必要하다고 느꼈다. 能力에 비해 過한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해 軍隊 入隊를 選擇했다. 들어가서 다른 他 스포츠 選手들이 4年에 1番 있는 올림픽에서 熱心히 하는 걸 보고 내 自身이 부끄럽다고 생각했다. 運動을 熱心히 하는 분들과 어울리면서 2006 월드컵을 準備했다.

敗者로 入隊를 했다가 除隊를 할 때는 代表팀 1順位 스트라이커로 나왔다. 80分 程度 뛰면 相對는 지치는데 나는 힘들지 않았다. 하루하루 내가 가진 거에 最善을 다하다 보니 體力이 完璧해졌다. 90分이 다 됐는데도 힘들지 않았다. 準備가 됐으니 可能했다.

-월드컵 2個月을 앞두고 十字靭帶 破裂 負傷을 當했다.

월드컵 두 달을 남기고 競技를 했는데 1-0으로 이기고 있었다. 롱패스가 나왔고 全力疾走를 했다. 공을 잡기 위해 方向을 틀다가 十字靭帶 負傷을 입었다. 新婚旅行에서도 運動을 할 程度로 월드컵을 準備했는데 한瞬間에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 希望을 가지고 病院을 갔는데, 醫師 3名이서 월드컵을 갈 수 있는지 確實하게 이야기를 안 했다.

獨逸로 診斷을 받으러 갔다. 診療 後에도 30分間 말을 돌렸다. 2006 월드컵엔 너의 자리는 없을 거라고 했다. 手術이 不可避하다고 했다. 2002 월드컵 탈락했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結果를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再活로 4年 동안 準備한 걸 2個月에 再活로 하면 出戰할 수도 있다고 했는데 스스로 그러는 건 不可能하다고 생각했다.

結果를 받아들이는 過程이 相當히 重要하다고 느꼈다. 2002 韓日 월드컵은 單 1競技도 보지 않았지만 2006 獨逸 월드컵은 應援했다.

-프리미어리그 進出 後 이야기를 한다면.

韓國에서 英國으로 가는 첫 番째 케이스였다. 十字靭帶 復歸 後 2競技 交替를 뛰고 英國으로 갔다. 競技 感覺은 不足했으나 좀처럼 올 수 없는 機會이니 進出 選擇을 했다. 1시즌 半 뛰며 蹴球選手로 삶은 失敗했지만 그 속에서 많은 걸 얻었다. 家族이나 생겼고 職業이 蹴球選手이지 蹴球가 내 人生 全部는 아니라고 느꼈다. 些少한 日常生活에 幸福을 느꼈다.

-城南FC 復歸 後 30살 나이를 理由로 放出 通報를 받았다.

성남에서 6個月 있었다. 김학범 監督님이 나가고 신태용 監督님이 오셨다. 베테랑 選手들을 整理한다고 말하셨는데 그때 하와이 旅行에서 放出 通報를 들었다. 契約이 있는데 나가라고 하니 挫折感을 느꼈다. 나이가 問題라고 하니 堂堂하게 다시 한番 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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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희 監督 說得으로 全北으로 갔다.

全北이랑 다른 한 팀이 提案했다. 다른 팀 條件이 더 좋았다. 年俸도 全北보다 2倍였다. 그 곳으로 가기로 했는데 최강희 監督님이 面談을 要請하셨다. 내게 "네가 꼭 必要하다. 네 能力을 끄집어 낼 수 있는 監督이 나다. 疑心을 하겠지만 내가 도와주겠다. 손 들고 날 빼달라고 할 때까지 널 起用하겠다"고 하셨다.

엄청난 信賴에 全北으로 마음을 돌렸다. 復活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轉地訓鍊에서 無得點을 하고 돌아왔는데 監督님은 날 믿었다. 眞正한 리더는 사람을 믿어주고 따라가게 하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以後 全北에서 12年 있었고 트로피를 연이어 들었다.

-全北 王朝를 이끌었다.

當時 全北은 選手들끼리 잘 어울렸다. 난 베테랑으로서 새로 들어온 選手들 適應을 돕는 役割을 했다. 競技를 못 뛰는 選手들도 챙겼다. "監督님이 널 데리고 온 건 쓰려고 그런 것이다"라고 慰勞를 했다. 그러면서 選拔, 벤치 할 것 없이 不滿이 없었고 더 剛해졌다. 그야말로 원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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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살에 다시 國家代表가 됐다. 월드컵 豫選에만 뛰라고 要請을 받았는데.

2018 러시아 월드컵 最終豫選 2競技를 앞두고 신태용 監督님이 電話가 와서 베테랑 選手가 必要하다고 했다. 本選에 가도 데리고 갈지는 모르겠다고 하셨다.

城南에 있을 때 30살에 베테랑이라고 내치더니, 38살에 다시 내가 必要하다고 하다니 참 異常했다. 그래도 월드컵 本選行을 이끌고 싶었고 監督님 要請을 受諾했다. 기쁜 마음으로 名單에 들어갔다. 이란戰 終了 2分 戰을 앞두고 날 부르더라. 交替 待機 中일 때 觀衆席에서 웅성대면서 날 應援했다. 들어가는 瞬間, 그때의 感情을 잊을 수가 없다. 팬들이 拍手를 쳐주고 내 이름을 連呼했다. A매치 100競技를 뛰었어도 그 2分은 잊을 수 없다. 그 2分을 위해 只今까지 달려왔다고 느꼈다. 이란戰 以後 우즈베키스탄戰이 끝나고 월드컵 本選으로 갔다. 그 以後로 國家代表로 갈 수 없었지만 잊을 수 없는 瞬間이었다.

인터풋볼

-滿 41歲에 隱退를 했다. 더 뛸 수 있을 거 같은데 왜 隱退를 했는지.

김상식 監督이 그 다음 해에 內定이 됐다. 1年 더 하라고 이야기를 하셨다. 하지만 내려놓기로 했다. 김상식 監督과 어렸을 때 같이 했고 監督으로 만나면 껄끄러울 것 같았다(웃음). 事實 精神的으로 내려 놓아야 한다고 느꼈다. 早急함을 느꼈고 2020年 20番을 단 이동국이 隱退를 하는 것도 意味가 있어 보였다.

언제 隱退를 해도 異常하지 않았다. 더 할 수는 있었지만 내려놓는 게 가장 맞다고 느꼈다.

-앞으로의 計劃은?

隱退가 없는 일을 하고 싶었다. 競爭도 하기 싫었다. 무얼 잘할 수 있는지 3年 동안 經驗했다. 解說, 放送 等 안 해본 것들을 했다. 蹴球 外 生活을 하면서 社會 經驗을 했다. 사기도 한 2番 當했다. 只今도 배워가는 時期다.

-차범근 監督님이 推薦辭를 써주셨다.

推薦辭를 한 名만 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최강희 監督님이라고 많은 분들이 생각하셨는데 월드컵 代表를 시켜주신 차범근 監督님이 생각났다. 많은 反對에도 責任을 지고 날 데리고 오신 분이었다. 어린 나이에 車範根賞을 타게 된 因緣도 있었다. 推薦辭를 付託드리니 欣快히 해주셨다.

-全北에 있을 當時 모든 基準點이 '동국이 兄'이었다. 生活부터 甚至於 車까지 이동국에게 맞췄다. 本人도 리더를 맡았고 그 役割을 알고 있을 텐데.

리더는 시키는 것보다 먼저 그 役割을 하는 사람이 리더였다. 選手들에게 믿음을 주고 그 마음을 理解하는 게 重要했다. 車 같은 境遇는 當然히 全北 選手면 現代車를 타야 한다고 생각했다. 생각보다 몸으로 實踐하는 게 眞正한 리더라고 본다.

-隱退 後 3年間 다른 人生을 찾는 中이라고 하셨는데 人生 2幕 目標는?

잘 쉬고 재미있게 보냈다. 마지막에 내가 있어야 할 곳은 蹴球 關聯 業務라고 생각했다. 準備가 되고 決定을 하는 것과, 그 反對는 다르다고 생각을 해 앞으로 P級 라이선스도 들어가고, 테크니컬 디렉터 敎育도 받고 있다. 끈을 놓지 않고 努力 中이다.

인터풋볼

-指導者의 꿈을 말해주시고, 危機의 全北과 韓國蹴球에 對해서 말해달라.

뒤에서 全北을 보며 안타깝게 느꼈다. 只今 김두현 監督이 들어가서 잘 해낼 거라고 본다. 그 前에 있던 監督의 力量이 아쉬웠다고 생각한다. 選手들에게 물어봐도 指導力에 對해 안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全北에 있어본 사람이 와야 한다고 느꼈다. 김두현 監督이 왔다고 들었을 때 歡迎했다.

國家代表度 팬들은 기다려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염기훈 監督이 自進辭退를 하면서 팬들의 力量이 너무 커버린 世上이 왔다. 팬들이 더 以上 못 기다려준 것 같지만, 그러면 누가 와도 팬들이 나가라고 하면 指導者는 그냥 나가야 한다. 蹴球를 좋아하시는 팬들의 水準은 相當히 올라갔지만 指導者가 選任됐을 때 約束을 지키고 時間을 지켜 보시면 하는 바람이 있다.

代表팀은 當場 臨時 監督이 指揮를 하신다. 김도훈 臨時 監督이 새로운 選手가 많이 뽑혔다. 그 選手들은 새로운 機會를 얻었다.

인터풋볼

-讀者분들에게 이야기.

다 읽어봤는데 冊이 재미가 있더라. 蹴球를 하면서 수많은 選擇을 했다. 잘못된 選擇이 나오더라도 내가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結果가 달라질 수 있다고 느낀 게 많다. 讀者들도 그런 것을 보면서 생각을 해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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