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만   중국   일본 
메인 | 國防日報 國防日報
企劃 軍事 大韓帝國의 軍人들

愛國啓蒙運動 限界 直面…國外 武官學校 세우기로

入力 2024. 05. 03   15:48
업데이트 2024. 05. 06   10:52
0 댓글

大韓帝國의 軍人들 - 43. 愛國 武官들의 集結處 新民會 

島山 安昌浩 主軸 結成 祕密結社團體
無關 李甲·유동열·이동휘 等 創立委員
各地에 學校·會社 세워 敎育·資金蓄積
1910年 ‘獨立戰爭戰略’ 武裝鬪爭 轉換
韓日竝呑·資金調達 難航으로 計劃 蹉跌
新民會 創設 主役들 美·中·러 亡命길

(왼쪽부터) 이갑 참령. 출처=독립기념관, 도쿄 세이조학교 재학 시절의 유동열. 출처=김정렬 장군 회고록, 강화진위대장 시절의 이동휘 참령. 출처=이동휘기념사업회
(왼쪽부터) 李甲 參領. 出處=獨立記念館, 도쿄 세이조學校 在學 時節의 유동열. 出處=김정렬 將軍 回顧錄, 江華鎭衛隊腸 時節의 이동휘 參領. 出處=이동휘記念事業會


大韓帝國 時節 수많은 團體가 明滅했다. 日本이 全國의 山林과 荒蕪地 開拓權을 要求하자 이에 猛烈하게 反對했던 保安會(1904年 7月), 近代的인 立憲 議會制度 樹立을 目的으로 創設한 憲政硏究會(1905年 5月), 憲政硏究會를 擴大해 發足한 民衆 啓蒙團體 大韓自彊會(1906年 4月) 等이다. 抗日鬪爭을 目標로 했던 이들 團體는 모두 公式的인 組織이었다.

그런데 1907年 4月에 祕密結社團體가 誕生했다. 新民會(新民會)였다. 祕密結社라는 말에 걸맞게 그만큼 隱密하고 正體性이 確實한 團體였다. 新民會가 祕密結社體로 組織된 理由는 그 以前에 活動했던 公式的인 團體로는 愛國啓蒙運動을 本格的으로 펼칠 수 없어서다. 가장 決定的인 理由는 예전의 團體들에 親日派가 많이 浸透하는 바람에 제 役割을 다하지 못했다는 反省이 있었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新民會를 組織한 主役은 島山 安昌浩였다. 하지만 資金을 대고 實務를 맡았던 中心人物은 李甲과 유동열이었다.

1878年 平安南道 講書에서 出生한 安昌浩는 1897年 獨立協會에 加入하고 民衆 啓蒙運動에 뛰어든 熱血 靑年이었다. 그는 弱冠의 나이에도 不拘하고 거침없는 雄辯으로 수많은 聽衆에게 感動을 안겨 준 名演說家였다.

故鄕 江西에 韓國 最初의 男女共學인 漸進學校(漸進學校)를 세우는 等 活潑한 啓蒙 活動을 펼치던 安昌浩는 1902年 新學問을 배우기 위해 美國 留學길에 올랐다. 安昌浩는 留學 中에도 샌프란시스코에서 共立協會(共立協會·1905年 4月)를 만들어 同胞들의 權益 保護에 힘썼다. 그러던 中 祖國에서 을사늑약이 締結됐다는 悲報를 接하고 다시 故國으로 돌아온 靑年 先覺者였다.

1907年 2月 20日, 安昌浩가 서울에 나타났다. 그가 나타나자마자 李甲 參領이 찾아갔다. 李甲과 安昌浩는 처음 만나는 瞬間부터 意氣投合했다. 當時 이갑의 나이는 30歲, 安昌浩는 29歲였다. 게다가 두 사람은 모두 平安道 出身이었다. 以後 두 사람은 平生 同志가 된다.

安昌浩는 隨時로 이갑의 집을 드나들었다. 相當한 財力家이기도 했던 이갑의 집은 愛國啓蒙運動을 하는 無關·支社들이 모여 救國의 方案을 討論하는 場所였다. 安昌浩가 歸國한 지 2個月 만인 1907年 4月 20日頃, 李甲과 安昌浩가 主導해 祕密結社組織人 新民會를 創立했다. 新民會에 參與한 사람들은 크게 다섯 勢力으로 分類된다.

첫 番째는 안창호·李堈 等 美洲에서 活動했던 共立協會 勢力이었고, 두 番째는 양기탁·박은식·신채호 等 ‘大韓每日申報’를 中心으로 活動했던 勢力이었다. 세 番째 勢力은 상동교회와 附設機關인 相同청년학원을 中心으로 하는 전덕기·이동녕·이회영·李儁 等이었고, 네 番째는 이승훈·안태국 等 平安道 地域의 商人과 實業인 集團이었다. 다섯 番째는 유동열·李甲·이동휘 等 武官 出身 勢力이었다. 


新民會의 創立委員은 各 勢力을 代表하는 7名이었다. 安昌浩, 李甲 參領, 유동열 參領, 이동휘 豫備役 參領, 言論人 양기탁, 敎育事業家 이동녕, 基督敎 전덕기 牧師가 그들이었다. 이들 中 無慮 세 사람이 전·현직 武官이었다. 以後 노백린 精靈, 金希宣 定位, 曺盛煥 參尉 等의 無關들도 新民會에 合流하게 된다.

7名의 創立委員은 自身들의 影響力 아래에 있는 人士들을 新民會에 加入시켜 勢力을 넓혀 나갔다. 그 結果 1910年頃에는 會員 數가 800餘 名에 達하는 全國的인 規模의 愛國啓蒙團體로 成長하게 된다.

民族系列 新聞인 皇城新聞(皇城新聞)의 主筆로 活動한 張志淵과 신채호, 儒學者이며 皇城新聞 主筆이었던 박은식, 平安道의 資産家인 李昇薰과 안태국, 平壤 大成學校 校長 최광옥, 咸鏡道의 資産家인 이종호, 이회영·이시영 6兄弟 等 新民會 會員은 當時 信望 깊은 人士들을 網羅하고 있었다.

新民會의 目的은 네 가지였다.

첫째, 國民에게 民族意識과 獨立思想을 敎育한다. 둘째, 뜻있는 同志를 確保해 力量을 蓄積한다. 셋째, 各地에 敎育機關을 設置해 靑少年을 敎育한다. 넷째, 各種 商業機關(會社)을 經營해 國民的인 財産을 蓄積한다.

이에 따라 新民會는 平壤에 大成學校, 平安北道 井州에 五山學校 等 各地에 學校를 設立했다. 또한 平壤에 마산동(馬山洞) 陶瓷器 會社를 세운 것을 비롯해 協成凍死(協成同事)·常務凍死(商務同事)·朝鮮實業會社 等의 會社를 設立했다. ‘大韓每日申報’를 機關誌로 活用했으며, 平壤·서울·大邱 等에 太極서관(太極書館)이라는 書店을 經營했다.

하지만 新民會의 活動에는 限界가 있었다. 1909年 들어 新民會 首腦部는 더 以上 國內에서는 國權回復運動이 不可能하다는 判斷을 내리게 된다. 1909年 봄, 新民會 首腦部가 啓蒙運動에 注力했던 路線을 武裝鬪爭으로 바꾸기로 論議했다.

이 論議가 本格化한 건 1910年 3月이었다. 新民會 首腦部가 ‘獨立戰爭戰略’을 採擇하고, 國外에 獨立運動基地와 武官學校를 設立하기로 한 것이다. 卽 靑年들을 國外의 武官學校에 보내 士官 訓鍊을 받게 하고, 軍隊를 만들어 日本과 戰爭을 해야 한다는 結論에 到達했다. 이를 爲해 新民會는 幹部들을 亡命팀과 國內 殘留팀으로 나눴다. 한 팀은 國外로 亡命해 이 事業을 擔當하고, 다른 팀은 國內에 남아 資金을 마련하기로 한 것이다.

1910年 4月 李甲, 안창호, 유동열, 이동휘, 金希宣, 신채호, 이종호, 이종만, 김지간 等 新民會 幹部들이 隱密하게 亡命길에 올랐다. 無事히 脫出해 中國 칭다오(靑島)에 모인 이들은 獨立運動의 方法을 論議했다. 이들은 滿洲에 獨立運動基地와 武官學校를 設立하기로 合意하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移動했다.

하지만 途中에 韓日竝呑 消息을 들은 新民會 人士들은 땅을 치며 大聲痛哭했다. 엎친 데 덮친 格으로 滿洲에 獨立運動基地와 武官學校를 만들려는 計劃에도 蹉跌이 생겼다. 資金을 내기로 했던 이종호가 무슨 理由에선지 約束을 飜覆한 것이다.

武官學校 設立計劃이 霧散되자 亡命 人士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新民會의 創設 主役이었던 유동열은 베이징(北京)으로, 이甲은 러시아 首都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安昌浩는 다시 美國으로 亡命하고 만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國外에 獨立運動基地와 武官學校를 設立하기로 한 新民會의 計劃은 다음 해에 實現된다. 1911年 5月 西間島 지린(吉林)省 류허(柳河)縣에서 이회영 6兄弟, 이상룡, 김동삼 等 新民會 幹部들이 僑民 自治團體인 耕學社(耕學社)와 武官學校人 新興講習所를 設立한 것이다.

 

필자 김선덕은 32년간 국방일보 기자, 국군영화 감독, 국방TV PD로 봉직한 군사연구가. 현재 공군 역사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실록 대한민국 국군 70년』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筆者 김선덕은 32年間 國防日報 記者, 國軍映畫 監督, 國防TV PD로 奉職한 軍事硏究가. 現在 空軍 歷史諮問委員으로 活動하고 있다. 『實錄 大韓民國 國軍 70年』 等 多數의 著書가 있다.

 



< 著作權者 ⓒ 國防日報, 無斷轉載 및 再配布 禁止 >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記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