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飜譯 : 詐欺/權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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銀本紀(殷本紀) [ 編輯 ]

은(殷)나라의 宣祖 [ 編輯 ]

은(殷)의 (始祖인) 설(契)의 어머니는 奸賊(簡狄)으로 유융氏(有?氏)의 딸이며 啼哭의 둘째 비였다. 세 사람이 沐浴을 갔다가 玄祖(玄鳥, 제비)가 떨어뜨린 알을 報告는 奸賊이 주워 삼키고는 妊娠하여 說을 낳았다. 說은 長成해서 禹의 치數에 功을 세웠다. 제순이 설에게 “百官이 親睦夏至 않고 五倫이 어지러우니 그대가 사도(司徒) 벼슬을 맡아 五倫을 가르치되 敬虔하고 너그럽게 하시오”라고 命했다. 賞(商) 땅에 봉하고 姊氏(子氏)라는 姓을 내렸다. 說은 唐堯, 虞舜, 待遇 때 興하여 百姓들에게 工業을 드러내니 百姓이 平安했다.

설이 죽자 그의 아들 疏明(昭明)李 卽位했다.

疏明이 죽자 아들 相토(相土)가 卽位했다.

床土가 죽자 아들 瘡藥(昌若)李 卽位했다.

瘡藥이 죽자 아들 造語(曹?)가 卽位했다.

祖語가 죽자 아들 名(冥)李 卽位했다.

名이 죽자 아들 陳(振)李 卽位했다.

津이 죽자 아들 美(微)가 卽位했다.

美가 죽자 아들 補正(報丁)李 卽位했다.

補正이 죽자 아들 步을(報乙)이 卽位했다.

步乙이 죽자 아들 步兵(報丙)李 卽位했다.

步兵이 죽자 아들 主任(主壬)이 卽位했다.

主任이 죽자 아들 主計(主癸)가 卽位했다.

탕(湯) [ 編輯 ]

主計가 죽자 아들 천을(天乙)이 卽位했는데, 이가 成湯(成湯)이다.

成湯 때 설에서 成湯에 이르기까지 여덟 番 遷都했다. 湯은 처음에 朴(?)에 居住했는데 先王이 居住한 곳을 따른 것이다.「제고(帝誥)」를 지었다.

湯이 諸侯 征伐에 나섰는데, 갈(葛)의 우두머리 갈백(葛伯)이 祭祀를 올리지 않아 湯이 그를 먼저 征伐했다. 湯은 “내가 ‘사람이 물을 보면 모습을 볼 수 있고, 人民을 보면 제대로 다스려지고 있는지를 볼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라고 하자 利潤(伊尹)李 “명명하십니다! 남의 말을 귀담아 듣고 따르면 道德이 發展할 것입니다. 나라의 君主가 人民을 子息처럼 여기면 좋은 사람들이 王의 官職에 있게 됩니다. 努力하십시오, 努力하십시오”라고 했다. 湯이 갈백에게 “그대가 千命을 공손히 받들지 않으면 내가 큰 罰을 내릴 것이고 赦免은 없다”라고 했다. 「탕정(湯政)」을 지었다.

利潤의 이름은 亞型(阿衡)이다. 阿兄이 湯을 만나고자 했으나 口實이 없었다. 이에 유신氏(有莘氏)의 幣帛인 孕身(?臣)李 되어 솥과 도마를 메고 와서는 飮食의 맛으로 遊說하여 王道에 이르게 했다. 或者는 “利潤은 處事였다. 湯이 사람을 시켜서 그를 招聘하려 했으나 다섯 番이나 退字를 놓은 다음 承諾하고 湯에게 가서 소왕(素王, 帝王의 資質)과 救主(九主, 아홉 가지 類型의 君主)에 對해 이야기했다”라고 했다. 湯은 그를 薦擧하여 國政을 맡겼다. 利潤이 湯을 떠나서 下로 들어가서 下가 이미 衰落했음을 보고 다시 朴(?)으로 돌아왔다. 北門으로 들어오다가 여구(女鳩)와 餘芳(女房)을 만났기에 「如舊」와 「餘芳」을 지었다.

湯이 出他했다가 野外에서 四方에 그물을 치고 “天下 四方으로부터 모두 내 그물로 들어오너라”라고 祝願하는 사람을 보았다. 湯은 “허, 다 잡으려고 하다니”라며 그물의 세 面을 거두게 하고는 “왼쪽으로 가려는 것은 왼쪽으로 가게 하고, 오른쪽으로 가려는 것은 오른쪽으로 가게 하소서. 命을 듣지 않는 것만 내 그물로 들어오라”고 祝願했다. 諸侯들이 이 말을 듣고는 “湯의 德이 至極하시구나! 禽獸에까지 미치다니”라고 했다.

當時 下걸이 暴惡한 政治와 荒淫한 짓을 일삼자 諸侯 곤吳氏(昆吾氏)가 叛亂을 일으켰다. 이에 湯이 軍隊를 일으켜 諸侯를 統率하고 利潤이 탕을 따라 나섰다. 湯은 큰도끼를 들고 곤오를 征伐하고 마침내 걸을 征伐하러 나섰다. 湯은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모두들 와서 모두 朕의 말을 들으시오. 보잘것없는 내가 敢히 亂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고 下가 罪가 많고 여러분들이 河氏에게 罪가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喪制가 두려워 敢히 바로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只今 下에게 罪가 많아 하늘이 그를 죽이라고 命하셨소이다! 只今 여러분들 누군가는 ‘우리 君主가 우리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가 農事를 버리고 戰爭에 나왔으니 政事를 어찌 돌본다는 것인가’라고 말하고, 또 누군가는 ‘罪가 있다는데 어찌 할 것인가’라고 말합니다. 하왕은 사람들의 힘과 나라를 모조리 빼앗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게을러지고 서로 不和합니다. 그래서 ‘저 놈의 해는 언제 없어지나? 내가 저놈과 함께 죽으리라’고들 합니다. 下衣 德이 이와 같으니 只今 짐이 반드시 가야만 합니다. 여러분이 함께 하늘의 뜻을 代身합시다. 여러분들 疑心하지 마십시오. 짐은 飾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오. 내가 하늘의 懲罰을 代身하게 도와준다면, 여러분에게 큰 賞을 내릴 것이오. 여러분은 내 말을 믿으시오. 짐은 飾言하지 않소. 여러분들이 이 盟誓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나는 決코 容恕하지 않고 여러분과 妻子息을 奴婢로 삼거나 죽일 것입니다!”

이 일을 擔當官에게「탕서(湯誓)」로 짓게 했다. 이에 湯이 스스로 武勇(武勇)이 뛰어나다고 했기에 武王(武王)이라 불렀다.

걸이 유융(有?)의 옛땅에서 敗했다. 걸은 明朝(鳴條)로 도망쳤고, 下衣 軍隊는 敗하여 무너졌다. 이어 湯이 三種(三?)을 征伐하여 寶物들을 얻자 의백(義伯)과 중백(仲伯)李 「保全(寶典)」을 지었다. 湯이 下에게 勝利하고 그 祠堂을 옮기려 했으나 옮기지 못하자 「下士(夏社)」를 짓고 이를 利潤이 公布하자 諸侯가 모두 服從했다. 湯이 이에 天子 자리에 올라 天下를 平定했다.

湯王이 돌아오다가 跆拳道(太卷陶)에 이르러 衆籟가 布告文을 지었다. 湯은 下衣 토이를 끝내고 泊으로 돌아와서 「탕고(湯誥)」를 알렸다.

“3月에 王이 東쪽 郊外에 이르러서 諸侯들에게 ‘人民에게 功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니 各自의 일에 있는 힘을 다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그대들에게 큰 罰을 내릴 것이니 나를 怨望하지 마라’라고 하였다. 또 ‘옛날 우와 고요는 오랫동안 밖에서 수고하여 人民에게 功을 세우니 人民들이 平安해졌다. 東으로 長江, 北으로 祭需, 서로 黃河, 南으로 回收의 네 江을 잘 다스려 萬民이 定着하게 되었다. 后稷은 씨 뿌리는 것을 가르쳐 百曲을 農事지었다. 三貢이 모두 人民에게 功을 세웠기에 그 後孫들을 諸侯로 세웠다. 지난 날 치우가 大富들과 百姓에게 亂을 일으켰으나 上帝가 돌보지 않았다는 記錄이 남아 있다. 先王의 말씀은 힘써 따르지 않으면 안 되오’라고 했다. 또 ‘道를 行하지 않으면 나라가 없을 것이니 그대들은 나를 怨望하지 마시오’라고 했다.”

以上으로 諸侯에게 命하니 利潤이 「함유일德(咸有一德)」을 짓고, 고단(咎單)李 「命車(明居)」를 지었다.

이에 湯은 曆法을 改正하고, 服色을 바꾸어 흰色을 崇尙하였으며 낮에 朝會를 열게 했다.

外兵(外丙), 重任(中壬), 胎甲(太甲) [ 編輯 ]

湯이 世上을 떴으나 太子 태정(太丁)李 오르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태정의 동생 外兵(外丙)李 卽位했다. 이가 除外病이다.

除外病이 卽位 3年 만에 世上을 뜨고 外兵의 동생 重任(中壬)이 卽位했다. 이가 第重任이다.

第重任이 卽位 4年 만에 世上을 뜨자 利潤은 태정의 아들 胎甲(太甲)을 擁立했다. 胎甲은 成湯(成湯)의 嫡長子 後孫인데 이가 제태갑이다.

第胎甲 元年에 利潤은 「이훈(伊訓)」, 「使命(肆命)」, 「조후(?后)」를 지었다.

제태甲이 卽位 3年 동안 賢明하지 못하고 暴惡해져 湯의 法을 지키지 않아 德을 어지럽혔다. 이에 利潤이 그를 東宮(桐宮)으로 내쫓았다. 3年 동안 利潤이 나라를 맡아 攝政하면서 諸侯의 朝會를 받았다.

제태甲이 東宮에서 3年을 지내며 自身의 잘못을 뉘우치고 善하게 돌아왔다. 이에 利潤은 제태甲乙 맞이하여 政權을 돌려주었다. 제태甲이 德을 닦으니 諸侯가 모두 銀으로 되돌아오고 百姓은 安寧을 되찾았다. 利潤이 이를 가쁘게 여겨 「胎甲勳(太甲訓)」 세 篇을 3篇을 지어 제태甲乙 稱頌하고 太宗(太宗)이라 불렀다.

옥정(沃丁), 태경(太庚), 소甲(小甲), 甕器(雍己), 殆無(太戊) [ 編輯 ]

太宗이 世上을 뜨자 아들 옥정(沃丁)李 卽位했다. 第옥정 때 利潤이 죽었다. 利潤을 泊에 葬事지내고 고단(咎單)은 利潤의 私的을 가르치기 위해 「옥정(沃丁)」을 지었다.

第옥정이 世上을 떠나자 동생 태경(太庚)이 들어섰다. 이가 제태頃이다.

第태경이 世上을 뜨고 아들 소甲(小甲)李 卽位했다.

提訴甲이 世上을 뜨자 동생 甕器(雍己)가 卽位했다. 이가 제옹記이다. 銀의 道가 衰退해져 諸侯가 人事를 드리러 오지 않는 일이 있었다.

第甕器가 世上을 뜨고 동생 殆無(太戊)가 卽位했다. 이가 제태무이다. 제태巫歌 卽位하여 二隻(伊陟)을 宰相으로 세웠다. 박에서 뽕나무와 닥나무가 한 몸에서 자라 하룻밤 만에 한 아름만큼 커진 일이 發生했다. 제태巫歌 무서워 이척에게 물었다. 이척은 “神이 듣기에 요사스러움은 德을 이기지 못합니다. 임금의 政治에 不足한 것은 없어진지요? 임금께서는 德을 닦으십시오”라고 말했다. 殆無가 이를 따르자 뽕나무가 말라서 죽었다. 이척은 誣陷(巫咸)을 稱讚했다. 誣陷은 王家의 일을 잘 다스렸고, 「函愛(咸艾)」와 「殆無(太戊)」를 지었다. 제태巫歌 宗廟에서 이隻을 稱讚하면서 臣下로 對하려 하지 않자 이隻이 辭讓하며 「原名(原命)」을 지었다. 은이 다시 復興하여 諸侯가 돌아왔으므로 中宗(中宗)이라 불렀다.

中庭(中丁), 外任(外壬), 下端甲(河亶甲), 조을(祖乙), 조신(祖辛), 玉匣(沃甲), 調整(祖丁), 南京(南庚), 量甲(陽甲) [ 編輯 ]

中宗이 世上을 뜨고 아들 第중정(中丁)李 卽位했다. 第중정이 吳(?)로 遷都했다. 下端甲(河亶甲)은 上(相)에 머물렀고, 조을(祖乙)은 兄(邢)으로 遷都했다.

第중정이 世上을 떠나자 동생인 外任(外壬)이 卽位하니 이가 除外임이다. 「中情(仲丁)」은 글에 빠진 곳이 있어 穩全치 않다.

除外임이 世上을 뜨고 동생 下端甲(河亶甲)李 卽位했다. 이가 題下單甲이다. 下端甲 때 은이 다시 衰退했다.

下端甲이 世上을 뜨고 아들 製造을(祖乙)이 卽位했다. 製造을 임금이 卽位하니 은이 復興했다. 무현(巫賢)李 政治를 맡았다.

조을이 世上을 떠나고 아들 第調信(帝祖辛)李 卽位했다.

第조신이 世上을 떠나고 동생 玉匣(沃甲)李 卽位했다. 이가 第玉匣이다.

第玉匣이 世上을 뜨고 玉匣의 兄 調信의 아들 調整(祖丁)李 卽位했다. 이가 第調整이다.

第調整이 世上을 떠나자 玉匣의 아들인 南京(南庚)李 卽位했다. 이가 弟男頃이다.

第南京이 世上을 뜨고 第調整의 아들인 量甲(陽甲)李 卽位했다. 이가 제양갑이다. 第量甲 때 은이 衰退했다.

중정 以來로 赤字 繼承이 廢止되고 兄弟와 兄弟 아들들이 卽位하니 서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싸웠다. 이로써 9歲 동안 혼란스러웠고 諸侯가 朝會를 하지 않았다.

半徑(盤庚), 所信(小辛), 소을(小乙), 무정(武丁) [ 編輯 ]

第양갑이 죽고 동생 半徑(盤庚)李 卽位했다. 이가 第半頃이다. 第半徑 무렵 銀은 河北에 都邑하고 있었다. 第半徑이 河南으로 건너와 成湯의 옛 居住地로 다시 가려고 했는데 이미 다섯 次例나 옮겨 다니면서 定해진 居處가 없었다. 銀의 人民들은 서로 歎息하고 모두들 怨望하며 옮기려 하지 않았다. 이에 半徑은 諸侯와 大臣들에게 “옛날 고후(高后) 成湯과 그대들의 先祖들이 함께 天下를 平定하고 만든 法을 받들어야 하지 않겠소? 이를 버리고 努力하지 않고 德政을 어떻게 이룰 수 있겠소”라고 했다. 이에 드디어 河南으로 건너가 박을 다스리고 湯의 政治를 施行했다. 以後 百姓은 安寧을 찾았고 銀의 道가 復興했다. 諸侯는 照會드리러 왔다. 成湯의 德政을 따랐기 때문이다.

第半徑이 世上을 뜨고 동생 所信(小辛)李 卽位했다. 이가 第所信이다. 第所信이 卽位한 後 은이 다시 衰退해졌다. 百姓이 半徑을 생각하며 「半徑(盤庚)」 세 篇을 지었다.

第所信이 世上을 뜨고 동생 소을(小乙)이 卽位하니, 이가 提訴乙이다.

提訴乙이 世上을 뜨고 아들 무정(武丁)李 卽位했다. 제무정이 卽位해 銀을 부흥시킬 생각을 가졌으나 도와 줄 사람을 얻지 못했다. 3年 동안 말을 하지 않고 總裁에게 情事의 決定을 맡긴 채 나라의 氣風을 살폈다. 無情이 밤 聖人을 만나는 꿈을 꾸었는데 이름을 열(說)이라 했다. 꿈에서 본 成人을 臣下들과 百官들에서 찾았으나 모두 아니었다. 이에 백공들을 시켜 在野에서 찾게 하여 符驗(傅險)이란 곳에서 熱(說)을 얻었다. 이때 熱은 罪를 짓고 符驗에서 城을 쌓고 있었다. 무정에게 보이니 無情이 “맞다”라고 했다. 얻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果然 聖人이었다. 宰相으로 薦擧하니 殷나라가 크게 다스려졌다. 符驗으로 性을 삼고 部熱(傅說)이라 불렀다.

제무정이 成湯에게 祭祀를 올린 다음날 꿩이 날아와서 세발솥 政(鼎)의 손잡이에 앉아 울었다. 無情이 두려워하자 早期(祖己)가 “王께서는 念慮마시고 먼저 政事를 돌보십시오”라 했다. 이에 조기는 王에게 이렇게 訓戒했다. “무릇 하늘이 天下를 살필 때는 道義를 模範으로 삼습니다. 하늘이 내려주는 壽命에 길고 짧음이 있으나 하늘이 人民의 命을 짧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自身이 그 名을 中間에 끊는 것입니다. 人民이 德이 없고 잘못을 認定하지 않으면 하늘이 命에 따라 그 德을 바로 잡는 것입니다. 그제서야 ‘어찌 할꼬’합니다. 아, 王께서 人民을 위해 일하는 것이야말로 하늘의 뜻을 이어받는 것입니다. 祭祀는 禮儀나 道에 어긋나서는 안 됩니다.” 無情이 政治를 바로잡고 德을 行하니 天下가 모두 기뻐하고 銀의 統治가 復興했다.

造景(祖庚), 爪甲(祖甲), 늠新(?辛), 警正(庚丁), 무을(武乙), 태정(太丁) [ 編輯 ]

제무정이 世上을 뜨고 아들 製造頃(帝祖庚)가 卽位했다. 조기는 무정 때 꿩이 세발솥의 손잡이에 앉아 울던 일을 契機로 삼은 일을 기리기 위해 廟號를 高宗(高宗)이라 하고 「高宗융日(高宗?日)」과 「高宗지훈(高宗之訓)」을 지었다.

第造景이 世上을 뜨고 동생 爪甲(祖甲)李 卽位했다. 이가 第甲이다. 第甲이 淫亂瑕疵 은이 다시 衰退해졌다.

第甲이 世上을 뜨니 아들 늠新(?辛)李 卽位했다.

제늠신이 世上을 뜨자 동생 警正(庚丁)李 卽位했다. 이가 제경情이다.

第警正이 世上을 뜨고 무을(武乙)李 卽位했다. 銀은 다시 朴을 떠나서 河北으로 옮겼다. 제무乙은 하늘의 道를 몰라 偶像을 만들어 天神(天神)이라 불렀다. 天神과 試合을 했는데, 사람에게 審判을 보게 하여 天神이 지면 侮辱을 주었다. 또 피를 가득 채운 가죽 주머니를 만들어 높이 매달아 활을 쏘았는데, 하늘을 쏜다는 意味에서 泗川(射天)이라 불렀다. 제무乙이 黃河와 衛戍 사이로 사냥을 나갔다가 갑작스러운 천둥소리에 놀라 죽었다.

아들 태정(太丁)李 卽位했다.

制을(帝乙), 週(紂) [ 編輯 ]

第태정이 世上을 뜨자 아들 制을(帝乙)이 卽位했다. 第乙이 卽位하자 銀은 더욱 衰退해졌다.

第乙의 큰아들은 미자계(微子啓)였다. 系의 어머니가 微賤했기 때문에 後繼者가 되지 못했다. 작은아들 新(辛)의 어머니가 整備였기 때문에 神이 繼承者가 되었다.

第乙이 世上을 뜨자 아들 神이 卽位했다. 이가 祭神이고, 天下를 그를 株(紂)라 불렀다.

濟州는 대단히 敏捷하고 뛰어난 資質을 타고났다. 힘도 남달라 맨손으로 猛獸와 싸울 程度였다. 知識은 忠告를 물리치고도 남을 程度였고, 말재주는 잘못을 감추고도 남을 程度였다. 臣下들에게 才能을 誇示하길 좋아했고, 天下에서 自身의 名聲이 누구보다 높다고 생각하여 모두를 自己 밑이라 여겼다. 술과 音樂에 빠졌으며 特히 女色을 밝혔다. 달기(?己)를 寵愛하여 달기의 말이면 무엇이든 다 들어주었다. 事緣(師涓)에게 淫亂한 曲을 作曲하게 하고, 北쪽의 低俗한 춤과 頹廢的인 音樂에 빠졌다. 무거운 稅金을 거두어 그 돈을 녹대(鹿臺)에 채우고, 鉅狡(鉅橋)를 穀食으로 채웠다. 여기에 개와 말 그리고 物件들을 宮室에 覺得 채웠다. 沙丘(沙丘)의 원臺(苑臺)는 더 넓혀 온갖 짐승과 새를 잡아다 풀어놓았다. 鬼神도 우습게 알았다. 沙丘에다가는 樂工과 광대를 잔뜩 불러들이고, 술로 蓮못을 채우고 고기를 매달아 숲을 이루어 놓고는 벌거벗은 男女로 하여금 그 사이를 서로 쫓아다니게 하면서 밤새 술을 마시고 놀았다.

百姓들이 怨望하고 諸侯는 등을 돌렸다. 이에 주는 刑罰을 더 세게 하여 炮烙(?烙)이라는 刑罰을 만들었다. 鉏白菖(西伯昌), 구후(九侯), 惡後(鄂侯)를 三貢으로 삼았다. 구후는 예쁜 딸을 州에게 들여 보냈다. 구후의 딸이 淫蕩함을 좋아하지 않자 주는 怒하여 그女는 죽이고 구후는 죽여서 脯를 떠서 소금에 절였다. 惡後가 이에 對해 强力하게 抗議하며 辯論하자 그마저도 脯를 떠서 죽였다. 서백창이 이를 듣고는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숭後號(崇侯虎)가 이를 알고는 株에게 일러 바쳤고, 주는 서백을 有利(?里)에 가두었다. 서백의 臣下인 굉요(?夭) 等이 美女와 珍奇한 物件, 마을 救해 州에게 바치자 週는 곧 서백을 赦免했다.

서백이 나와 落水 西쪽 땅을 바치며 炮烙型을 없애길 請했다. 州가 이를 許諾하고 활과 화살 그리고 큰 도끼를 내려서 周邊을 征伐할 수 있게 하고 서백으로 삼았다. 比重(費中)을 起用하여 政治를 맡겼는데 比重은 阿附를 잘 하고 利益만 밝혀서 은 사람들이 가까이 하지 않았다. 株價 또 오래(惡來)를 起用했는데, 오래는 날 헐뜯길 좋아 하여 諸侯가 이 때문에 갈수록 멀어졌다. 서백이 돌아와 音으로 德을 닦고 善을 行하자 많은 諸侯가 株를 배반하고 서백에게서 가서 몸을 맡겼다. 서백이 漸漸 커지고 주는 이로써 權力을 차츰 잃었다. 王子 비간(比干)李 諫言을 했지만 듣지 않았다.

常用(商容)은 賢者로서 百姓이 그를 아꼈으나 주는 그를 버렸다. 서백이 旗國(饑國)을 征伐해 멸망시켰다. 注意 臣下인 조이(祖伊)가 이를 듣고는 株(周, 서백)를 나무라고, 두려워 州(紂)에게 달려가 “하늘이 이미 우리 銀의 命을 끊으시려는지 形勢를 아는 者가 거북占을 쳐보아도 吉한 卦가 나오지 않습니다. 先王들께서 後孫을 돕지 않으시려는 것이 아니라 王이 暴惡하게 굴어 스스로 하늘의 뜻을 끊으려 하기 때문에 하늘이 우리를 버리려는 것입니다. (百姓을) 便히 먹이지도 않고, 하늘의 뜻도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先王의 法度도 따르지 못했습니다. 只今 우리 人民들은 모두들 網하길 바라면서 ‘하늘이 어찌하여 威嚴을 보이지 않으며, 큰 天命은 어째서 이르지 않는가’라고 말합니다. 이제 王께서는 어찌하시렵니까”라고 告했다. 주는 “내가 태어난 것이 命이 하늘에 있다는 뜻 아닌가”라고 했다. 조이가 돌아가서는 “주는 바른 말이 안 통한다”고 했다. 서백이 죽고 週(周) 武王(武王)李 東邦을 征伐하러 나서 盲進(盟津)에 이르자, 銀을 배반하고 主로 모여든 自家 800이었다. 諸侯가 모두 “主를 征伐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武王은 “그대들은 아직 天命을 모르오”라 하고는 다시 돌아갔다.

紂王은 갈수록 淫亂해져 그칠 줄 몰랐다. 미자(微子)가 여러 次例 간했으나 듣지 않자 太史(太師), 素砂(少師)와 模擬해서 마침내 떠났다. 비간은 “臣下된 者는 죽음으로 諫하지 않을 수 없다”며 州에게 强力하게 간했다. 朱哥 성이 나서 “내 듣기에 聖人의 心臟에는 구멍이 일곱 個 나있다고 하더라”면서 非肝을 갈라 그 心臟을 보았다. 記者(箕子)는 두려워 미친 척하고 奴婢가 되었다. 주는 그를 가두었다. 銀의 太史와 소사는 祭祀 그릇과 樂器를 들고 週(周)로 달아났다. 이에 朱 武王이 諸侯를 거느리고 株(紂)를 討伐하러 나섰다. 主導 軍隊를 일으켜 牧野(牧野)에서 맞섰다.

甲子日 注意 軍隊가 敗했다. 주는 도망쳐 들어와 녹대에 올라가서는 寶物과 玉으로 된 옷을 입고 불 속으로 뛰어들어 죽었다. 朱 武王이 드디어 注意 목을 베어 크고 힌 旗발에 매달았다. 달기를 죽였다. 갇힌 記者를 풀어주고, 비간의 무덤에 封墳을 덮었으며 商用의 마을에 賞을 내렸다. 注意 아들 무경(武庚), 綠步(祿父)를 봉하여 銀의 祭祀를 잇게 하면서 半徑의 政治를 다시 行하도록 命令하니 銀의 人民이 크게 기뻐했다. 이에 朱 武王이 天子가 되었다. 그 後孫들은 第(帝)라는 稱號를 깎아내려 王(王)으로 불렀다. 銀의 後裔를 諸侯로 봉해 州에 屬하게 했다.

朱 武王이 世上을 뜨자 武經(武庚), 管叔(管叔), 채숙(蔡叔)李 亂을 일으켰다. 聖王(成王)은 住公(周公)으로 하여금 그들을 討伐하게 하고 미자를 송(宋)에 봉해 銀의 後代를 잇게 했다.

司馬遷의 論評 [ 編輯 ]

太史公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宋(頌)」에 依據해 說의 私的을 順序대로 整理했고, 成湯 以後는 『徐(書)』와 『詩(詩)』에서 取했다. 설의 姓은 자(子)였으나, 그 後孫들이 封紙를 받아 나를 姓으로 삼으니 殷氏(殷氏), 內氏(來氏), 宋氏(宋氏), 共同氏(空桐氏), 치氏(稚氏), 北殷氏(北殷氏), 목李氏(目夷氏)가 그들이다. 孔子(孔子)께서는 ‘銀에 노(路)라는 좋은 수레가 있었다’라고 하셨다. 흰色을 崇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