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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世界 大百科事典/宗敎·哲學/韓國의 宗敎/韓國의 佛敎/韓國佛敎의 歷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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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佛敎의 歷史〔開設〕 [ 編輯 ]

韓國佛敎-歷史〔槪說〕

印度에서 紀元前 5世紀頃에 일어난 佛敎는 스리랑카·미얀마·타이 等地로 傳해지면서 南前(南傳)佛敎를 이루었고, 西北 印度 카슈미르에서 티베트·中國·韓國·日本 等地로 傳해져 북전(北傳)佛敎를 形成하였다.

南前佛敎는 佛敎의 正統을 繼承한다고 해서 스스로 根本佛敎라 믿고 있으며, 북전佛敎는 佛敎精神의 發展을 以上으로 하여 大勝(大乘)佛敎라고 自處하게 되었다.

三國時代 [ 編輯 ]

三國時代

우리나라에 佛敎가 처음 들어온 것은 高句麗 小獸林王 2年(372)으로 되어 있다. 辰王(秦王) 苻堅(符堅)이 使臣과 僧侶 順道(順道)를 보내어 佛像과 經典을 傳한 데서부터 始作된다.

2年 뒤 阿道(阿道)가 왔고 그 이듬해(375) 性(初)文士(省<肖>門寺)와 伊不蘭寺(伊弗蘭寺)를 세웠다. 이것이 우리나라에 佛敎가 傳來된 公式記錄이다. 그러나 이것은 國家的인 公認일 뿐, 事實은 그보다 먼저 傳해졌으리라는 것을 <梁高僧傳(梁高僧傳)> 等의 文獻에 나타난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佛敎가 그 發祥地인 人道에서 直接 들어오지 않고 中國을 거쳐 들어왔다는 것은, 그리고 8∼9世紀라는 時間的인 間隔을 두고 들어 왔다는 것은 本來의 純粹한 宗敎 形態에 얼마쯤의 變形이 있었으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斟酌케 하는 일이다. 中國에는 紀元前 2年頃에 傳來됐던 것이다. 그때의 佛敎가 어떤 性質의 것이었는지는 仔細히 알 수 없으나, 그 前까지 民間에서 믿어 온 固有信仰이나 道敎(道敎)와 별다른 摩擦 없이 融合되었다.

高句麗는 고국양왕 8年(391)에 "不法을 믿고 받들어 福을 求하라"는 校誌를 내렸고, 다음 광개토왕 2年(392)에는 平壤에 9社(寺)를 세웠다. 이 밖에도 舊法(求法)과 全校(傳敎)의 高僧들이 나라 밖에까지 나가 많은 活動을 하였다.

승랑(僧朗)은 三論(三論)을 깊이 硏究하여 그 學籍인 體系를 完成, 中國에 三論宗(三論宗)의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 慧灌(惠灌)은 수(隋)의 吉藏(吉藏, 549∼623)에게 三論의 깊은 뜻을 배우고 돌아와 日本으로 가서 僧正(僧正)이 되었고, 三論宗을 널리 펴서 日本 三論宗의 始祖가 되었다. 高句麗의 曇徵이 日本에 건너가 法隆寺의 壁畫를 그렸다는 事實도 익히 알려진 일이다. 또한 惠諒(惠亮)은 551年 新羅로 가 僧統(僧統)이 되어 新羅佛敎를 일으키는 데 커다란 役割을 했다.

百濟의 佛敎는 高句麗보다 12年 늦게 들어왔다. 枕流王 1年(384) 引渡의 勝 摩羅難陀(摩羅難陀)가 바다를 건너 東進(東晋)으로부터 오니, 王은 歡迎하여 宮中에 머물게 하고 例로써 恭敬하였다. 다음 해 閑散(漢山)에 절을 짓고 僧侶 10名을 養成했다. 그 뒤 140年쯤 지나 26代 聖王(聖王) 때에 이르러 佛敎는 크게 繁昌했다.

王은 謙益(謙益)을 印度에 보내어 戒律을 硏究하게 했는데, 526年 梵本(梵本)의 <律藏(律藏)>을 가지고 돌아오자 國內의 高僧들을 불러 謙益을 도와 飜譯하게 하고 註釋書를 짓게 했으며, 王이 몸소 序文을 썼다고 한다. 聖王 23年(545)에 丈六(丈六) 佛像을 造成, 모든 衆生들이 다 같이 解脫하기를 祈願했다. 桐 30年(552)에는 佛敎를 日本에 傳播했으며, 이것이 日本에 佛敎가 傳해진 始初이다. 그때 百濟는 여러 가지로 日本에 많은 影響을 끼쳤는데, 佛敎를 傳함으로써 백제의 僧侶와 藝術家와 技能工들이 건너가 日本의 文化를 크게 일으켜 준 것이다.

29代 法王 1年(599)에는 나라 안에 殺生을 禁하는 令을 내리고 널리 放生(放生)을 했으며, 고기 잡고 사냥하는 延長을 모두 불태워 버리게 하였다. 이듬해 首都 附與에 王興寺(王興寺)를 세웠고, 武王때에 彌勒寺(彌勒寺)를 創建하고 巨大한 塔을 造成했는데, 백제에는 僧侶와 斜塔(寺塔)李 많았었다는 事實이 中國의 文獻에도 傳해지고 있다.

高句麗와 백제에는 별다른 抵抗이 없이 佛敎가 받아들여졌지만, 半島의 東南쪽에 자리잡아 大陸과의 疏通도 없고 文化的으로 뒤떨어진 新羅에는 백제보다 數十年 늦은 訥祗王(在位 417∼458) 때 傳해졌다. 그러나 그 傳來는 頑固하고 排他的인 執權階層의 反對에 부닥쳐 커다란 抵抗을 받았다. 新羅에 佛敎를 傳한 사람은 阿道(阿道)인데, 그는 高句麗로부터 들어와 一線郡(一善郡:只今의 善山)에 있는 佛敎 信者 모례(毛禮)의 집을 中心으로 隱密히 敎化를 폈다.

法興王은 佛敎를 百姓들의 福을 가져오게 하고 나라에 利益이 된다고 確信, 卽位 初부터 國家的인 信仰으로 받아들이려 했으나 臣下들의 反對로 苦心했다. 그러다가 佛敎 信者요 젊은 臣下인 異次頓(異次頓)의 殉敎로 인해 王 14年(527) 비로소 佛敎가 公認된 것이다.

王은 佛敎를 일으켰을 뿐 아니라 政治的으로도 管制를 整備하고 律令을 恐怖, 年號(年號)를 세우고 文物을 開發하는 等 後날 新羅가 三國을 統一할 수 있는 基礎를 닦은 英特한 王이었다. 그는 佛敎 信仰을 통해서 百姓들이 善良한 國家的 觀念을 가질 수 있고, 新羅의 文化가 向上·發展될 수 있다고 내다보았던 것이다.

법흥왕에 依해서 始作된 新羅佛敎가 特色을 지니게 된 것은 진흥왕(在位 540∼576)때부터로, 이는 王 自身의 信仰心과 佛敎政策에 依해서였다. 眞興王 5年(544에 先王때부터 짓기 始作한 興輪寺(興輪寺)가 落成되고, 그해 3月에는 뜻이 있는 者는 僧侶가 되어 自由롭게 信仰生活을 할 수 있도록 一般에게 出家를 許諾하였다.

晩年에는 王 自身도 出家하여 法雲(法雲)이라 이름짓고 修道하였으며, 王妃도 永興寺(永興寺)에 들어가 女僧이 되었다. 王은 또 佛敎理念에 依해서 靑少年 修養團體人 花郞道를 創設, 國民 精神의 涵養을 위해 크게 이바지했다.

新羅는 第30代 文武王때에 이르러 唐나라의 援助를 받아 마침내 三國統一의 大業을 成就했다. 겉으로는 黨 나라를 模倣한 듯했지만, 안으로는 平和가 깃들여 太平聖代를 謳歌했고 文化는 눈부시게 뻗어갔으며, 佛敎도 크게 隆盛했다.

新羅의 僧侶들은 뒤를 이어 唐나라에 들어가 그곳의 佛敎 敎學을 배워 왔다. 그래서 우리나라 佛敎思想 類例가 없는 黃金時代를 가져오게 되었다.

여기에서 新羅佛敎는 수많은 學僧(學僧)을 輩出하여 大勝(大乘)의 宗派와 敎學이 크게 일어나게 된 電氣(前期)와, 이와 같은 학해佛敎(學解佛敎) 다음에 實踐活動으로서의 禪佛敎(禪佛敎), 特히 中國의 達磨選(達摩禪)李 傳來, 盛行하게 된 後記(後期)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35代 景德王(在位 742∼765) 때에까지 活潑했던 新羅佛敎는 그 後 漸漸 沈滯되어 갔다. 이 무렵에 直切 簡明한 線(禪)佛敎가 中國에서 들어오게 되었다. 이 새로운 禪風(禪風)은 中國에서 菩提達磨(菩提達磨, ?∼528) 以來 宗風이 確立되어 獨特한 腺腫(禪宗)으로 成立·發展된 것이다. 中國의 禪宗이 6兆(六祖) 慧能(慧能)에 이르러 南北으로 나뉘면서 그 氣勢가 極盛할 무렵 新羅 學僧들의 旋法을 배워 온 것이다. 북선(北禪)은 痕跡만 남을 程度로 미미했지만, 6條의 南銑(南禪)은 크게 일어나 新羅의 船種을 形成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 傳해진 旋法은 6條의 後孫들에 依해서라고 할 수 있다. 그 첫 戰法者가 度의(道義)이다. 그는 선덕왕(宣德王) 5年(784)에 黨으로 가서 마調(馬祖) 도일(道一)의 高弟子 書堂(西堂) 支障(智藏)에게서 法을 얻고 현덕왕 23年(831)에 歸國, 旋法을 일으키고자 했으나 新羅에서는 그것을 理解하지 못하고 오히려 麻舌(魔說)이라고 拒否했다. 그래서 道義는 雪嶽山에 隱居, 그 法을 弟子 簾車(廉居)에게 傳하니 簾車는 다시 替徵(體澄, 804∼880)에게 法을 傳했다. 이렇게 해서 9山先文(九山禪門)李 이루어지기 始作했다.

高麗時代 [ 編輯 ]

高麗時代

高麗 太祖는 新羅 末期에 出現한 道詵(道詵, 826∼898)의 圖讖說, 卽 佛敎의 善根功德(善根功德) 思想에 道敎의 陰陽五行과 風水地理를 加味한 過渡期的인 思想에 影響을 받아 島山의 死後에도 그를 崇拜했다. 王은 佛敎 信仰에 依해 民心을 收拾, 國運의 加護를 얻으려고 했다. 그래서 佛敎 外濠(外護)에 힘쓰고 절을 짓고 法會를 열었다. 松島(松都)에 護國圖章(護國道場)으로 10個의 절을 짓고 書經(西京)에 9層石塔을 세우며, 몸소 佛敎를 널리 펼 것을 發源하는 글을 썼다. 特히 繼繼承承 王家에서 佛敎를 믿도록 하기 위해 <勳요10조(訓要十條)>를 만들고, 八關會(八關會)와 함께 燃燈會(燃燈會)를 열 것을 當付했다. 佛敎의 意識과 法會에 依해서 나라를 保護하려는 太祖의 念願은 高麗佛敎의 性格과 方向을 開國 初부터 굳혀버린 것이다.

高麗朝 全體를 통하여 이와 같이 固定化되어 버린 속神的(俗信的) 祈福(祈福)의 低俗性은 國民思想을 救濟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時代精神을 先導할 力量을 敎壇에서도 잃어버렸다. 그런 中에도 國家를 위한 神佛(信佛) 思想은 <高麗大藏經>이란 巨大하고 燦然한 民族文化 事業을 이루어 놓았다.

太祖는 佛敎를 外護하는 데 있어서 宗派에 差別을 두지는 않았으나, 自身의 武人的인 性格에서 自然 禪宗을 좋아하여 禪僧(禪僧)에게 귀의, 王사(王師)와 局社(國師) 制度는 이때부터 始作됐다, 958年 管理登用을 위해 科擧制度를 쓴 데에 견주어, 僧侶의 位階秩序를 가리려고 僧科(僧科)를 設置했다.

이것은 僧侶를 尊敬하는 것 같으면서도 한便 그들을 統制하려는 意圖였던 것이다.

新羅 末期에 形成되기 始作한 9山先文은 高麗에 와서 利嚴(利嚴, 866∼932)의 須彌山派의 成立으로 마침내 完成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旋法의 影響으로 여러 宗派의 敎學이

빛을 잃은 듯했으나 華嚴敎學만은 그 勢力을 잃지 않았다. 統一新羅時代에 衣裳이 華嚴을 널리 펼친 以來 끊임없이 硏究되어 高麗에 繼承된 것이다. 華嚴敎學은 高麗朝 全體를 통해 禪宗이나 敎宗을 莫論하고 널리 硏究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大乘菩薩의 實踐的 行動을 强調한 思想이었기 때문이다. 均如(均如, 923∼973)의 <普賢十願歌>度 이 華嚴敎學에서 빚어진 것이다. 高麗時代에는 王子들의 出嫁가 많았는데, 義天(義天:大覺國師, 1055∼1101)은 文宗의 第4王子로 11歲에 出家, 영통사의 王사 난원(爛圓)에게서 華嚴을 배웠다. 그는 송(宋)에도 留學하였으며, 그때 千太學(天台學)을 傳受받고 歸國 後에는 天台敎館(敎觀)을 널리 講說했다. 그는 또 敎藏都監을 設置, 國內外의 論著(論著)를 널리 蒐集하여 <續藏經(續藏經)>을 出版했다.

考慮는 初期부터 선(禪)이 성하였으나 天台敎學이 들어온 뒤부터 中期에는 在來의 腺腫(6條의 影響을 받은 曹溪宗)은 甚히 不振하게 되었다. 이때 高僧 知訥(知訥, 1158∼1210)이 나와 阼階禪宗의 中興을 이루었다. 많은 禪僧이 끊이지 않고 排出되어 高麗佛敎의 後期는 腺腫 日色이 되었는데, 知訥은 9山先文의 敎理를 綜合하여 우리나라 佛敎의 正統인 曹溪宗을 確立하기에 이르렀다.

高麗時代에 特記할 것은 亦是 <高麗大藏經>이 板刻이다. 이 <高麗大藏經>은 量과 質에 있어서 世界 모든 大藏經의 標本이 되고 있다.

이와 같이 文化遺産을 남긴 佛敎이지만 高麗末에 이르러서는 國權의 衰退와 함께 기울어졌다. 그런 中에도 印度에서 온 地空(指空, ?∼1363)과 太古(太古, 1301∼1382)·백운(白雲, 1299∼1375)·懶翁(懶翁, 1320∼1376) 等 4先勝은 高麗末을 裝飾한 燦爛한 별들이었다.

朝鮮時代 [ 編輯 ]

朝鮮時代

朝鮮 500年의 佛敎는 國家의 崇儒排佛(崇儒排佛)政策에 依해 抑壓과 受難으로 點綴된 法難(法難)의 時代였다. 高麗末부터 일어나기 始作한 儒生(儒生)들의 排佛(排佛)運動은 佛敎를 邪敎(邪敎) 異端視하기까지에 이르렀다. 政權이 바뀌어 執權하게 된 文身이나 政客들은 儒敎를 드러내고 佛敎를 攻擊하는 것을 마치 그들 自身의 名聲을 높이고 立身出世하는 길처럼 여기고 있었다. 鄭道傳(鄭道傳) 等의 峻烈한 攻擊은 朝鮮의 苛酷한 排佛(排佛)思想을 誘導했던 것이다. 이러한 狀況 아래서 新羅나 高麗에서 보여주던 旺盛한 敎學的·宗敎的 活動의 意欲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와 같이 苛酷한 試鍊을 겪어야 했던 佛敎界에서는 太祖의 創業에 적지 않은 影響을 끼쳤다는 舞鶴(無學, 1327∼1405)을 비롯하여 많은 高僧들이 나오기는 했으나, 敎學賞 或은 善理(禪理)上 獨創力을 發揮하지는 못하고 말았다.

朝鮮時代 全體를 통하여 그와 같이 끈질긴 法難을 겪으면서도 僧侶들은 抵抗할 줄을 몰랐다. 이런 點에서는 印度나 中國의 境遇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中葉에 와서 오직 한 사람의 糾彈自家 있었으니 그는 玄宗 때의 白麯(百谷) 처능(處能)이었다. 너무나 苛酷한 國家의 排佛政策에 憤慨한 그는 8萬餘 言(言)의 上疏文 <間廢石筊簫(諫廢釋敎疏)>로써 斥佛(斥佛)政策을 糾彈했다. 그러나 抑佛策(抑佛策)은 늦추어지지 않고 僧侶들은 山中으로 들어가 都城(都城) 안에는 발도 디딜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라가 위태로울 때에는 목숨을 바쳐 救國의 길에 앞장을 서기도 했던 것이다.

太祖 自身은 開國功臣인 鄭道傳과 조준 等의 進言으로 抑佛政策을 쓰면서도, 역성(易姓)革命으로 인한 많은 人命을 殺傷한 罪業을 두려워하고 開國 初의 民心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全時代의 信仰을 尊重하려 하였다. 卽位 初에 海印寺 古塔을 重修하고 <大藏經>을 引出하여 塔 속에 安置, 國利民僕(國利民福)을 꾀하였다. 太祖 6年(1397)에는 王后 康氏를 위해 興天寺를 세우고, 水陸齋를 베풀어 高麗 王氏들의 冤魂을 달래기도 했다. 그러나 太宗은 卽位하자 곧 佛敎 彈壓에 着手, 宗派를 倂合하고 寺院의 數를 줄이고 僧侶를 强制로 還俗시켰으며, 査察 土地를 沒收하고 王師와 國史의 制度를 撤廢하였다. 世宗도 太宗의 排佛政策을 繼承, 더욱 强行하였다. 이러한 抑佛策 때문에 世宗 1年과 3年에 僧侶들이 明나라로 가서 國內의 甚한 迫害를 呼訴한 일도 있었다.

世宗때에는 여러 宗派들을 線(禪)·敎(敎)의 兩宗으로 廢合하고 城 밖의 僧侶에게 城안 出入을 禁하게 하였다.

한便 世祖는 일찍부터 辛未(信眉)·學祖(學祖) 等은 當時 高僧들을 가까이 하였다. 그는 王位에 오르자 好不政策(護佛政策)을 썼다. 僧侶들에게는 다시 都城 出入을 자유롭게 許容하고 出嫁도 制限을 받지 않았으며, 官屬들이 함부로 査察에 侵入하는 것을 禁했다. 그 中에도 世祖의 業績으로는 刊經都監(刊經都監)을 設置, 佛經의 飜譯과 刊行에 힘쓴 일을 들 수 있다. <月印釋譜> 等을 刊行하고 <大藏經>을 引出했다. 世祖의 호불(護佛)이 있은 뒤 成宗·演算·中宗을 거치는 동안 佛敎는 다시 迫害를 받게 되는데, 13代 明宗이 卽位하자 文定王后 尹氏가 攝政을 하면서 佛敎는 暫時 復興의 기운을 보았다. 王后는 儒生들의 猛烈한 反對에도 굽히지 않고 廢止되었던 線·敎 兩宗制(兩宗制)를 부활시켜 허응(虛應) 保佑(普雨)를 禪宗判事, 수진(守眞)을 敎宗判事로 삼아 勝과(僧科)를 다시 施行케 했다. 朝鮮 佛敎의 거승(巨僧) 休廷(休靜)과 使命(泗溟) 等이 모두 이때 勝과 出身들이었다. 休廷과 그의 同門 扶携(浮休)는 朝鮮 一帶의 高僧이었으며, 그들의 門下는 繁昌하여 선(禪)·교(敎)의 名僧들이 多數 排出되어 한때 長官을 보였다. 休廷의 弟子 使命은 1604年 日本에 강화사(講和寺)로 건너가 任務를 完遂, 捕虜로 잡혀갔던 同胞 3500名을 데리고 돌아왔다. 瑞山과 使命이 없었던들 朝鮮佛敎는 寂寞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崇儒排佛(崇儒排佛)의 受難으로 朝鮮의 僧侶들은 깊숙한 山寺에 묻혀 個人의 首都에 專念할 수밖에 없었다. 宗敎의 臺(對)社會的인 機能 같은 것은 全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高宗 32年(1895) 4月 入城(入城) 禁止令이 해재되었다. 그것도 日本 僧侶들의 要求에 依해서였다. 그때 日本의 僧侶들은 마음대로 城안 出入을 하는데 정작 自國의 僧侶들은 出入을 금지당한 矛盾을 보고 日本의 一連種(日蓮宗) 僧侶 私奴(佐野)가 總理大臣 金弘集에서 相서, 高宗의 許諾을 받게 된 것이었다. 오랜 歲月 동안 발을 들여놓지 못하던 城(城) 안에 자유로이 傳敎할 수 있게 되자 暗澹했던 佛敎는 겨우 숨을 돌리게 되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一齊(日帝)에게 나라가 송두리째 넘어가고 말았다. 이때는 日本의 各 宗派 僧侶들이 드나들면서 傳道에 從事하고 있었다. 政府에서도 뒤늦게서야 排佛政策을 止揚하고 管理署(管理署)를 두어 國家的인 管理를 꾀하게 되고, 1899年 東大門 밖에 원흥사(元興寺)를 세워 國內 數査察(首寺刹)을 삼고, 13度에 各各 1個의 搜査(首寺)를 두어 寺刹의 事務를 總括하게 하였다. 佛敎界 自體에서도 全國 寺刹의 統合을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1908年 3月에 全國 僧侶 代表者 52人이 원흥사에 모여 그동안 宗名(宗名)마저 없어져 버린 韓國佛敎를 慨歎하고 元宗(圓宗)이라고 種名을 議政(議定)했다. 그때 海印寺 住持이던 이회광(李晦光)을 代宗正으로 推戴했다. 1910年에 覺皇寺(覺皇寺)를 創建, 中央會 事務室 兼 中央布敎所로 삼았다. 이회광이 그해 가을 日本 曹洞宗과 任意로 聯合條約에 合意하자, 國內 敎界에서는 크게 反撥, 改宗逆調(改宗易祖)의 매교行爲라고 糾彈하였다. 박한영·진진홍·韓龍雲 等이 蹶起하여 1911年 1月 嶺南과 湖南의 僧侶를 모아 松廣寺에서 總會를 열고 臨濟宗(臨濟宗)을 세웠다. 그러나 이와 같은 對立도 1911年 6月 總督府가 寺刹令(寺刹令)을 公布하자, 佛敎도 國運의 衰退와 함께 植民地 統治 아래 들고 말았다. 이때 全國 査察을 30本山으로 나누어 有機的인 關係를 斷絶해 놓았다.

이 무렵 '佛敎靑年會' 및 '佛敎維新會'가 생겨 寺刹令의 廢止와 政敎(政敎) 分離를 主張하는 運動을 展開하였다. 이때부터 敎壇은 敎育의 必要를 切感하고 1906年 靑年 僧侶들의 敎育을 위해 원흥사에 最初로 '명진學校'를 세웠다. 뒤이어 各 地方에도 學校를 設立하여 新學問을 가르쳤다. 1910年부터 各種 雜誌를 發刊하고 經典의 飜譯事業을 통해 佛敎의 布敎와 啓蒙에도 이바지하였다. 己未獨立運動 때는 한용운·백상규 等을 비롯하여 各 地方에서도 日帝에 抗拒했으며, 그것은 宗敎의 社會參與에 對한 自覺運動이기도 했던 것이다.

光復 以後 韓國佛敎는 敎壇의 淨化運動을 起點으로 宗敎人의 姿勢와 臺(對)社會的인 機能에 對해서 自覺을 하게 되었다. 敎壇 自體의 矛盾과 宗敎 外的(外的)인 壓力으로 인해 陣痛을 겪으면서 暗中摸索을 하고 있는 實情이다. 非人間化된 技術文明社會의 解毒劑로서 佛敎의 大社會的인 機能이 그 어느 때보다 切實해진 現實 앞에 마주선 것이다.

<法 頂>

三國時代의 佛敎 [ 編輯 ]

승랑 [ 編輯 ]

僧朗

搖動(遼東) 出身의 高句麗 高僧. 高句麗의 長壽王(長壽王:在位 413∼491) 後期에 태어났다고 생각되며 그의 沒年(沒年)이나 出家 時期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일찍이 中國에 들어가 鳩摩羅什(鳩摩羅什:Kum rajiva) → 乘組(僧肇)로 이어지는 三論學(三論學)을 배웠다. 當時의 三論學은 誠實論(成實論)이란 小乘的(小乘的) 油思想(有思想)에 影響을 받고 있어 本來의 三論學의 眞意(眞意)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다. 승랑은 이런 思想鳥類를 脫皮하여 새로운 三論(三論)을 設立하게 되었으니 그의 出現에 따라 過去의 三論學을 高三論(古三論)이라 부르고, 그의 純粹三論學을 新三論(新三論)이라 부르게 되는 三論學의 分水嶺을 이루었다.

이러한 그의 學問的 力量은 中國 河西(河西)地方에 널리 알려져 下서대랑(河西大朗)·독보하서(獨步河西)라는 稱號를 받기까지 하였다. 三論의 吳의(奧義)를 깊이 攄得한 승랑은 中國 南方으로 떠나 會稽山 江山使(岡山寺)에 머물렀고, 宗山(鐘山) 超黨舍(草堂寺)에 와서는 그곳에 隱退해 있던 朱翁에게 三論學을 가르쳐 그로 하여금 <三從론(三宗論)>이란 冊을 著述케 했다. 晩年에 섭山(攝山) 徐下士(棲霞寺)로 와서 그의 스승이며 住持였던 法度畫像(法度和尙)의 地位를 繼承(500)하였다.

兩廡制(梁武帝)는 그의 學德을 높이 評價하여 天監(天監) 11年(512)에 優秀한 學僧(學僧) 10名을 選拔하여 승랑의 門中(門中)에서 工夫를 시켰으니 그때 學僧 가운데 끼어 있던 勝戰(勝詮)은 스승의 學問을 繼承하여 섭山(攝山, 或은 攝嶺)에 머물렀고, 또 勝戰을 繼承한 琺瑯(法朗)은 興黃沙(興皇寺)에 있었으므로 승랑의 三論學 學統(學統)을 섭령흥황(攝嶺興皇)이라 부른다. 이렇게 繼承된 그의 三論學은 後日 琺瑯의 弟子인 길長(吉藏, 549∼623) 때에 와서 獨立된 세 宗派인 三論宗(三論宗)으로 成立되었다. 三論宗에서 7對上昇(七代相承)이라 하며 내세우는 人物은 鳩摩羅什(鳩摩羅什)·勝숭(僧嵩)·法도(法度)·승랑(僧朗)·승전(僧詮)·법랑(法朗)·길장(吉藏)의 7社(師)를 말하는데, 이 7人의 正統派 가운데서 승랑이 中樞的인 役割을 하였다. 길腸은 그의 著述인 <대승현론(大乘玄論)>·<移替의(二諦義)> 等에서 승랑을 恒時 引用하면서 섭令大使(攝嶺大師)·섭山大使(攝山大師)·臺랑法師(大朗法師)·낭大使(朗大師)라고 推仰을 하였으니, 승랑은 中國에 佛敎를 가르친 最初의 人物이었으며 中國 불學界에 미친 그의 影響은 至大한 바 있다.

謙益 [ 編輯 ]

謙益

人道에서 戒律(戒律)을 배워온 百濟의 高僧. 그의 生沒(生沒)連帶는 未詳이나 百濟(百濟) 聖王(聖王) 4年(526)에 印度에서 돌아왔다. 그는 중인도(中印度) 商家나사(常伽那寺)에서 산스크리트(Sanskrit:梵語)와 戒律을 硏究한 後 人度僧 배달다삼장(培達多三藏)과 함께 歸國했다. 歸國時 人道에서 梵本(梵本) 아비담牆(阿毘曇藏)과 五部律文(五部律文)을 가지고 돌아와 國內의 高僧 28名과 함께 이 律文(律文)을 飜譯하고, 그 밖에 律賦(律部) 72卷을 飜譯하여 백제 律宗(律宗)의 鼻祖(鼻祖)가 되었다.

謙益이 가져온 아비담牆(阿毘曇藏)은 <阿毘達磨俱舍論(阿毘達磨俱舍論)>·<阿毘達磨잡집론(阿毘達磨雜集論)> 等 一連의 논서(論書)들을 指稱하는 말로서 어느 한 警(經)에 對한 名稱이 아니다. 따라서 그가 어떤 것을 가져왔는지 알 수 없다. 또한 五部律文(五部律文) 亦是 小乘(小乘)의 5學派에서 使用하는 <四分律(四分律)>·<오분率(五分律)>·<十悚慄(十誦律)>·<마하勝機율(摩詞僧祇律)>·<살바다浮費니비바사(薩婆多部毘尼毘婆沙)> 等을 統稱하는 것으로 이 가운데 어느 一部를 가져왔는지 或은 全部를 가져왔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謙益의 律賦(律部)의 傳來로 昇段(僧團)의 紀綱과 秩序가 비로소 成立될 수 있는 重要한 契機를 맞았다. 以後 담욱(曇旭)과 惠人(惠仁)은 율소(律疏) 36卷을 著述하는 等 백제의 戒律學은 꽃을 피웠고, 이것이 또한 백제 佛敎의 戒律主義的 性格을 규정짓는 役割을 하였다.

高句麗佛敎의 日本 傳來 [ 編輯 ]

高句麗佛敎-日本傳來

高句麗 僧侶로 日本에서 布敎活動을 한 最初의 人物은 慧便(惠便, 584)이었다. 그는 日本 敏達(敏達) 13年(584) 소아마자(蘇我馬子)의 要請으로 사마달(司馬達)의 딸인 善神(善信)과 그밖에 船長(禪藏)·혜선(慧善)의 세 女子를 比丘尼로 출가시켰으며, 日本 貴族들의 尊崇을 받았다. 이것이 日本 佛敎思想 比丘尼 出家의 嚆矢가 되었다.

영양왕 6年(595)에 日本에 건너간 惠慈(惠慈)는 日本 歷史上 偉大한 業績을 남긴 성덕太子(聖德太子) 風總(豊聰)의 스승이 되었으니, 日本 <書記(西記)>는 같은 해 백제에서 건너온 惠聰(惠聰)과 더불어 惠慈는 日本 佛敎의 棟梁(棟梁)이 되었다고 傳한다. 혜자는 三論學(三論學)을 爲始하여 <法華經(法華經)>·<維摩經(維摩經)>·<勝萬頃>과 같은 爛熟한 發達을 보인 大乘經典을 가르쳤으니 後日 성덕太子가 佛敎精神을 뒷받침으로 한 政治를 베풀 때 이러한 佛敎精神이 統治 理念으로 重要한 役割을 하였을 뿐 아니라 日本 文化 發展에도 큰 轉換點을 가져다 주었다.

같은 嬰陽王 때 道일(渡日)한 曇徵(曇徵)은 佛敎學은 勿論 5景(五經)에도 能通하였고 彩色(彩色)·紙墨(紙墨)·工藝(工藝)에 能하여 日本 美術史의 先驅的 役割을 하였으며, 그가 그린 法隆寺(法隆寺) 金堂壁畫(金堂壁畵)는 不朽의 名作으로 傳해 온다. 이 밖에 그는 맷돌 製造法도 가르쳐 日本의 文物 開花(開花)에 寄與한 바 크다.영류왕(榮留王) 8年(625)에 日本에 건너간 慧灌(慧灌)은 일찍이 수(隋)의 吉藏(吉藏, 549∼623) 밑에서 三論學(三論學)을 배운 다음 日本에 건너갔다. 그는 日本 佛敎 僧正(僧正)이 되었고 三論宗(三論宗)을 가르쳐 日本 三論宗의 始祖가 되었다. 같은 왕대(王代)의 度等(道登)도 일찍이 黨(唐)나라 吉藏 밑에서 三論을 배운 다음 日本에 건너가서 三論을 강술(講述)하였다고 傳한다. 그리고 도현(道顯)도 日本에 가 代案社(大安寺)에 머무르면서 敎授(敎授)하는 한便 <일본세기(日本世紀)>라는 冊子를 몇 卷 지었다고 傳한다. 또한 記錄에 나타난 僧侶들의 이름 以外에도 忘却된 高僧들이 많았으리라 斟酌되며, 高句麗佛敎가 日本에 끼친 影響은 宗敎的인 次元을 넘어선 文化 全般에 걸친 廣範한 것이라고 믿어진다.

百濟佛敎의 日本 全數 [ 編輯 ]

百濟佛敎-日本傳授

日本에 佛敎를 처음 傳한 때는 聖王(聖王) 30年(552)이었다. 達率(達率) 奴唎斯致契(奴唎斯致契)를 派遣하여 琴童釋迦上(金銅釋迦像)과 彌勒石佛(彌勒石佛) 및 번개(幡蓋)·經論(經論)을 보낸 것이 日本 佛敎의 發達이 되었다. 처음 日本 群臣들은 이를 믿으려 하지 않았고 소아마자(蘇我馬子)만이 이를 禮敬(禮敬)하였는데, 石泉가(石川家)에 불傳(佛殿)을 만들고 이를 모셨으나 그 用途나 意味는 몰랐다.

그때 日本(日本)에 와서 있던 高句麗 僧侶 慧篇(惠便)을 發見하여 그의 가르침을 받아 세 사람의 女子 僧侶(尼僧)를 輩出하였고, 소아마자(蘇我馬子)는 사마달과 함께 最初의 日本 佛敎信者가 되었다. 곧이어 2年 後 聖王은 담혜(曇惠) 等 9人이 僧侶를 日本에 派遣하여 都心(道深) 等 7人과 交替하게 하였다. 따라서 都心을 爲始한 7人의 백제 僧侶가 集團的으로 이미 日本에 들어가 布敎活動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 위덕왕(威德王) 24年(577)에 經論(經論)과 律士(律師)·善射(禪師)·比丘尼(比丘尼)·呪噤師(呪禁師)·佛供(佛工)·社長(寺匠) 等을 日本에 派遣하였고, 日本에서는 그들을 맞아 難破(難波)의 大別王社(大別王寺)에 머무르게 하였다.

위덕왕 30年(583)에는 日羅(日羅)라는 僧侶가 日本에 건너가 觀音信仰(觀音信仰)을 크게 일으키고 또 東(同) 35年에는 佛舍利(佛舍利)와 沙工(寺工)·化工(畵工)·瓦匠(瓦匠) 等을 보냈으며, 日本(日本)에서는 小兒마자(蘇我馬子)가 百濟(百濟) 僧侶(僧侶)를 請하여 水系(受戒)하는 法을 묻는 等 백제와 日本 間의 交流는 頻繁하였다. 이때 日本 最初의 比丘尼(比丘尼)인 善神니(善信尼) 等이 百濟로 건너와 3年 동안 戒律을 배우고 돌아갔으며, 같은 해(588)에 惠聰(惠聰)·영근(令斤)·혜식(惠寔) 等 沙門(沙門)과 함께 佛舍利(佛舍利)를 日本에 보냈다. 이 一行 가운데 惠聰은 戒律에 精通하여 그곳 大臣인 소아마자에게 수제를 하였다. 이밖에도 當時 도일(渡日)韓 僧侶로는 英祖(聆照)·營爲(令威)·慧中(惠衆)·惠宿(惠宿)·度嚴(道嚴)·영개(令開) 等을 들 수 있다.

武王(武王) 3年(602)에는 觀勒(灌勒)李 天文(天文)·地理·曆書(曆書)·遁甲(遁甲)·方術(方術)冊을 日本에 傳했지만 그는 本來 三論(三論)의 學長(學匠)으로 그곳에서 日本 最初의 僧正이 되어 昇段의 紀綱을 定하는 等 佛敎界의 支柱가 되었다. 그는 또 日本醫學의 始祖로도 불린다. 그後 혜미(惠彌)·度欠(道欽)·犄角(義覺)·圖章(道藏)·道녕(道寧)·多相(多常)·圓角(願覺)·遠世(圓勢)·防除(放濟) 等 많은 僧侶가 日本에 건너가 日本 아스카 文化時代(飛鳥文化時代)를 꽃피운 人物들이 되었다.

圓光 [ 編輯 ]

圓光( ? ∼630)

新羅의 高僧. 佛敎的 生活倫理(生活倫理)인 世俗五戒(世俗五戒)를 만들어 社會淨化와 國民道德 昂揚에 貢獻한 高僧이다. 佛敎에 歸依하기 前부터 遊學(儒學)에 깊은 素養을 지녔던 圓光은 진지왕(眞智王) 3年(578)에 陳(陳)나라로 留學을 가, 金陵(金陵:南京) 莊嚴社(莊嚴寺)에서 <涅槃經(涅槃經)>·<誠實論(成實論)>을 受學하고 쑤저우(蘇州)의 虎口社(虎丘寺)로 옮겨 <阿含經(阿含經)> 敎義(敎義)를 배웠으며, 다시 長安(長安) 흥선사(興善寺)로 옮겨가 當時 한창 일어나고 있던 섭論學派(攝論學派)의 논서(論書)들을 硏究하였다. 그의 生命은 이미 中國 佛敎學界에 널리 알려져 있어 그의 說法(說法)은 恒常 關心의 對象이 되었었다.

眞平王 22年(600)에 歸國한 後 <如來藏社(如來藏私記)>·<大方等如來장경소(大方等如來藏經疏)>를 撰述하는 한便 敎化活動에 힘써 國民道德 및 社會倫理를 宣揚하는 일을 圖謀하였다. 그 代表的인 것이 바로 世俗오계(世俗五戒)의 制定이니 그는 貴山(貴山)과 추항 두 靑年에게 佛敎精神을 바탕으로 한 倫理綱領(倫理綱領)을 가르쳐 當時 新羅 靑少年들이 지켜야 할 實生活의 倫理를 提示하였다. 世俗오계는 ① 事君以忠(事君以忠), ② 事親以孝(事親以孝), ③ 敎友維新(交友有信), ④ 臨戰無退(臨戰無退), ⑤ 殺生有擇(殺生有擇)이며, 이 德目들은 後에 花郞(花郞)의 實踐德目이 되어 新羅가 三國을 統一하게 되는 精神的인 큰 契機를 마련해 주었다. 特히 殺生은 佛敎 理念에 違背되는 條項이지만, 當時 高句麗의 끊임없는 侵略을 받고 百濟와 抗爭을 繼續하던 新羅社會로서는 必要不可缺한 行動倫理가 要請되었을 것이니, 圓光의 現實主義的 佛敎觀의 一端을 나타내는 것이 되고 있다. 眞平王 30年(608) 高句麗 征伐을 위해 數(隋) 煬帝(煬帝)에게 援兵을 請하는 <걸辭表(乞師表)>를 原鑛으로 하여금 짓게 했을 때도 그는 "남을 없애며 自身이 산다는 것은 僧侶의 本分이 아니지만 大王의 나라 안에서 먹고 사는 處地로서 그 名을 어길 수 없다"고 하며 걸辭表를 지었다. 이는 그가 聖職者로서 분명한 態度를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一面이면서 또 現實을 無視하지 않은 大勝倫理의 實踐者임을 말해주는 一面이기도 하다.

자장 [ 編輯 ]

慈藏

新羅의 高僧이며 小版武林(蘇判茂林)의 아들로 眞骨(眞骨) 出身의 貴族이었다. 宣德王 5年(636) 45歲의 나이로 弟子 실勝(實僧) 等 10餘 因果 함께 入黨(入唐)하였다. 그는 戒律學(戒律學)의 中心地인 終南山(終南山)에서 오랜 硏究와 修行을 닦아, 後에 戒律主義적(戒律主義的) 佛敎觀을 樹立했다. 唐나라에 있을 때에는 黨 太宗으로부터 國賓으로 禮遇(禮遇)를 받고 宮中에서 <華嚴經(華嚴經)> 講義를 하는 等 活潑한 活動을 하였다. 入黨 7年 만에 王命에 依해 新羅로 歸國하여 大國統(大國統)이란 非想職(非常職)을 맡아 新羅 佛敎界의 總帥(總帥)가 되었다.

歸國 後 그는 <攝大乘論(攝大乘論)>·<菩薩戒本(菩薩戒本)> 等 大乘의 經律(經律)을 講義하고 <四分律羯磨師機>·<十悚慄목次期(十誦律木叉記)> 等 戒律에 對한 註釋書를 내는 한便, 戒律의 實踐을 통해 新羅 佛敎界의 紀綱을 세우는 데 專念하였다. 受戒(受戒) 意識을 整備하고 砲살(布薩:Upavasatha)이라는 懺悔意識(懺悔儀式)을 통해 敎壇을 整備·統合하고 佛敎를 生活化하는 데 自身의 大國統이란 地位를 十分 發揮하였다.

그는 또 佛敎의 理想國家(理想國家) 理念을 政治的인 目的과 결부시켰으니 新羅는 過去世(過去世)부터 佛敎와 因緣 깊은 나라이고, 新羅 國王은 引渡의 刹帝利(刹帝利:K

atriya) 種族이며, 皇龍寺(皇龍寺)에 9層塔을 쌓으면 周邊 9個國으로부터 朝貢을 받게 되니 이는 新羅가 佛國土로 豫定받은 地域이기 때문이라는 主張을 하여 護國佛敎의 理念을 確立시켰다. 이 밖에 煮醬은 整備된 黨의 文物制度를 받아들이는 데 先導的인 役割을 하였으며, 新羅의 官服(官服)을 黨制(唐制)에 따르게 하였고 黨의 年號(年號)를 使用케 하는 等 親堂政策(親唐政策)을 써 新羅와 黨의 外交的 紐帶를 强化하는 데 큰 몫을 擔當하였다.

眞興王과 佛敎政策 [ 編輯 ]

眞興王-佛敎政策

新羅에 처음 佛敎가 公認된 것은 法興王 때부터였으나 佛敎를 振興, 발전시켜 國家宗敎로까지 이끈 것은 진흥왕에 依해서였다. 眞興王은 新羅 第24代 王으로 法興王의 조카이고 性은 金氏, 이름은 삼맥종(三麥宗) 或은 審脈種(深麥宗)이라 하였다. 그의 治世中의 佛敎 振興을 위한 業績은 刮目할 만한 것이었으며, 自身도 佛敎를 熱烈히 信奉하여 末年에 沙門(沙門)李 되어 號를 法雲(法雲)이라 하였고 夫人 亦是 永興寺에서 比丘尼가 되었다.

그의 在位 동안의 佛敎 業績은 다음과 같이 簡略히 要約할 수 있다.

(1) 王 5年(544) 興輪寺(興輪寺)가 完工되었고, 3月에 비로소 出家僧니(僧尼)가 되는 것을 國法으로 許諾하였다. (2) 皇龍寺(皇龍寺)·知院事(祗園寺)·실제사(實際寺) 等 여러 寺院들을 繼續 새로 세웠으며, 王 27年(566)에 落成된 皇龍寺는 13年 동안에 걸쳐 造成된 巨刹(巨刹)이었다. (3) 王 10年(549) 봄 覺德(覺德)을 爲始한 留學僧(留學僧)들이 繼續 歸國하였고, 이때 佛舍利(佛舍利)와 함께 經典(經典)을 들여왔다. (4) 王 11年(550)에 大暑性(大書省)과 少年書省(少年書省)을 設置하여 佛敎의 諸般 業務를 管掌케 하였으며 鞍裝法社(安藏法師)를 大暑性으로 삼았다. 王 12年에는 新羅로 歸化한 高句麗僧 惠諒(惠亮)을 僧統(僧統)으로 任命, 敎壇을 地圖·育成케 하고 이 僧統 밑에 大島유나(大導唯那)·都維那랑(都唯那娘) 等을 두고 勝管制(僧官制)를 整備하였다. (5) 王 12年(551)에 僧統(僧統)인 惠諒(惠亮)에 依해 仁王百高座法會(仁王百高座法會)와 八關會(八關會)가 始作되었다. 仁王百高座法會는 <仁王護國般若經(仁王護國般若經)>의 內容에 따라 國家의 安胎(安泰)를 祈願하고 內亂(內亂)과 外換(外患)을 消滅시키기를 비는 法會이며, 八關會는 本來 하루하나의 界(戒)를 닦는 法會였으나, 新羅에서는 戰歿將兵을 위한 慰靈祭였다는 點에서 仁王百高座法會와 함께 八關會는 國家의 現實的인 意圖와 利益에서 베풀어진 法會들이었다. (6) 王 26年(565) 陳(陳)나라 使臣 有史(劉思)와 勝 名官(明觀)李 歸國할 때 1700餘 卷의 經典을 들여왔다. (7) 王 35年(574) 皇龍寺 章陸尊像(丈六尊像)을 主星(鑄成)하였다. (8) 王 37年(576)에 안홍법사(安弘法師)가 中國에서 돌아올 때 人度僧 飛馬라(毘摩羅)·농가타(農伽陀)·불타승가(佛陀僧伽) 等이 그를 따라 入國하였고 이때 <楞伽經>·<勝萬頃> 等 發展된 大乘經典을 王에게 바쳤다. 이 밖에도 진흥왕 再爲始 新羅 國民思想의 總和를 이룬 畫廊도(花郞道)를 制定하여 三國統一의 基盤을 닦았다.

이러한 一連의 佛敎振興冊은 진흥왕으로 하여금 政敎一致(政敎一致) 政策을 써서 불國土(佛國土)를 新羅 社會에 現實化시키려 했고, 王 自身도 정法(正法)으로 世上을 다스리는 轉輪聖王(轉輪聖王)의 理念에 心醉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으므로 新羅 社會에서의 佛敎 發展은 眞興王과 不可分의 關係에 있었다.

圓測 [ 編輯 ]

圓測(613∼696)

新羅 高僧이며 唯識學(唯識學)의 大家. 新羅 王손(王孫)으로 眞平王 35年(613)에 모량리(牟梁里)에서 태어났으며 휘(諱)는 文雅(文雅), 者(字)가 圓測(圓測)이다.

일찍이 3歲에 出家, 15歲에 이미 唐나라로 留學하고 法上(法常)·勝便(僧辨) 밑에서 受學하여 唯識學(唯識學)을 爲始하여 舊私學(俱舍學)·誠實學(成實學) 等의 大勝(大乘)·少僧을 通曉(通曉)하였다. 그는 天性이 뛰어났고 特히 梵語를 비롯한 外國語에 能熟하여, 學名(學名)이 中國 佛敎界에 널리 알려져 黨(唐) 太宗(太宗)으로부터 度牒(度牒)을 받기까지 하였다.

드디어는 勅命(勅命)에 依해 署名社(西明寺)의 大德(大德)李 되었으며 이때 現場(玄奬)李 印度에서 돌아와 驛長(譯場)을 열고 厖大한 飜譯事業을 벌이자 그곳에 參與하여 增의(證義)의 일을 맡아보았다.

그러나 現場의 學統(學統)을 잇는 자은(慈恩) 窺基派(竅基派)의 嫉視를 받아 그가 屬해 있던 署名사파(西明寺派)의 唯識學은 異端視되고 排斥을 받았다. 그것은 圓測이 窺基보다 빨리 唯識學을 攄得하였고 그의 講論(講論)은 恒常 뛰어난 것이었기 때문에 생긴 雜音이었다. 그의 <解深密經疏(海深密經疏)>가 當時 自由로운 學問 雰圍氣를 造成하고 있던 邊方地帶人 간저우(甘州) 地方에서 流行했던 事實은 그러한 事情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 住所(註疏)는 티베트語(語)로 飜譯되어 <署長大藏經(西藏大藏經)> 속에 編入되기까지 하였다. 오늘날 그의 <解深密經疏> 第10卷과 8卷 一部가 滅失되어 傳해지지 않으나, <署長大藏經> 속의 解深密經疏는 完全하여 그의 著述을 빠짐없이 接할 수 있게 된 것은 기연(奇緣)이라 할 수밖에 없다. 正統派로 自處하던 窺基의 唯識說이 引渡의 호법(護法)의 설을 繼承했음에 비해, 圓測은 안혜(安慧)의 說을 이어받은 것이므로 印度 唯識學을 보다 充實하게 傳한 것으로 評價되고 있다.

그의 名聲을 듣고 新羅의 신문왕(神文王)은 數次 歸國시킬 것을 則天武后(則天武后)에게 請하였으나 無後는 이것을 拒否하고 印度에서 高僧이 入國하면 반드시 院側에게 接待케 하였다. 그의 著書로 現存하는 것은 <解深密經疏(解深密經疏)> 10卷,<般若波羅蜜多心經贊(般若波羅蜜多心經贊)> 1卷,<仁王般若經소(仁王般若經疏)> 6卷이 있으나 目錄만 알려진 著述은 23部(部) 108卷이나 된다.

元曉 [ 編輯 ]

元曉(617∼686)

新羅의 가장 偉大한 高僧. 眞平王 39年(617) 압량군(押梁郡) 불支村(佛地村)에서 태어나 神文王(神文王) 6年(686)에 涅槃(涅槃)할 때까지 70年 동안을 新羅가 낳은 가장 偉大한 僧侶이며 思想家·著述家·敎育者·文章家로서 큰 業績을 남겼다.

이름을 書堂(誓幢)이라 하였고 出家한 後 元曉(元曉)라 하였는데, 自己 집을 절로 만들어 초개사(初開寺)라 하였다. 元曉는 스스로 經典(經典)을 硏究하고 首都에 精進하다가 當時의 風潮에 따라 同僚勝 衣裳(義湘)과 함께 都堂(渡唐)의 길을 떠났다. 이때가 그의 나이 34歲때였다. 그러나 陸路(陸路)로 高句麗를 통해 가다가 途中에 高句麗軍(軍)에게 붙잡혀 道路 歸還되었다.

그 뒤 10年이 지나 다시 衣裳과 함께 偕老(海路)를 통해 唐나라로 들어가려 하였으나(661), 旅行 途中에 骸骨의 물을 마시고 "眞理는 決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自己 自身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攄得하고 홀로 돌아왔다.

以後 그는 超人間的인 奔放한 活動을 展開하였다. 어느 때는 民衆敎化를 위해 自身을 燒成擧事(小姓居士)라 부르고 거리를 떠돌며 庶民들과 同苦同樂의 生活을 했고, 어느 때는 조용한 곳에 앉아 首都와 著述의 時間을 보냈다. 現存하는 그의 著述은 20部 22卷이나 되며 目錄에 나타난 咀嚼名만 해도 100與否 240卷이나 된다. 特히 그의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는 中國 高僧들度 解凍소(海東疏)라 하며 즐겨 引用하였고, <金剛三昧經論(金剛三昧經論)>은 引渡의 馬鳴(馬鳴)·用水(龍樹)와 같은 高僧이 아니고는 얻기 힘든 논(論)이라는 名稱을 받은 著作으로 그의 世界觀을 알려주는 大抵(大著)이다.

그는 學僧(學僧)으로 높이 評價될 뿐 아니라 民衆 敎化가(敎化家)로서도 많은 逸話를 남겼으며, 요석公主와의 사이에 破戒(破戒)를 하고 아들 薛聰을 낳은 뒤로는 無㝵박을 치면서 거리를 돌며 佛敎의 大衆化에 힘썼다.

그의 이러한 行爲는 當時 王室 中心의 귀족화된 佛敎를 깨뜨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또 宗派主義的人 方向으로 달리던 佛敎理論을 高次元的인 立場에서 會通(會通)시키려 하였으니 그것을 오늘날 元曉의 화쟁思想(和諍思想)이라 부르며, 이것은 그의 一心史上(一心思想)과 함께 元曉의 思想을 가장 特徵的으로 나타낸 것으로 評價되고 있다.

衣裳 [ 編輯 ]

義湘(625∼702)

新羅의 高僧. 眞平王 47年(625)에 誕生하여 20歲때 出家하여 26歲 때 元曉大師와 함께 都堂(渡唐)의 길에 올랐다가 失敗하고 36歲 때 다시 黨 留學의 길에 올랐다. 元曉는 途中에 깨달은 바가 있어 돌아왔으나 衣裳은 初志(初志)를 굽히지 않고 入黨(入唐)하여 後에 中國 華嚴宗의 第3條(祖)가 된 賢首法藏(賢首法藏, 643∼712)과 함께 第2朝인 至嚴(智儼, 602∼668)의 弟子가 되었다. 終南山(終南山) 지상사(至相寺)에서 至嚴에게 師事한 지 7年 만에 <華嚴經>의 法界圓融(法界圓融)의 眞理를 깨달았다. 文武王 11年(671)에 黨(唐) 高宗(高宗)의 新羅 遠征을 알리기 위해 歸國함으로써 그는 해동華嚴初祖(海東華嚴初祖)가 되었다. 그가 歸國할 때 入黨 以來 그를 思慕하던 線描女(善妙女)가 몸을 바다에 던져 龍(龍)으로 和解 그를 도왔다는 說話는 이때 發生한 것이다.

貴國의 目的이 唐나라의 侵略 情報를 提供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衣裳은 政治에도 깊은 關與를 하였다. 文武王이 築城(築城)을 爲해 國民을 動員하려 하자 그는 王에게 上疏를 하여 選定을 베풀 것을 進言했다. 곧, "精巧(政敎)가 밝으면 初球(草丘)로 땅을 그어 姓(城)을 삼을지라도 百姓이 敢히 넘지 못하고, 精巧(政敎)가 밝지 못하면 비록 將星(長城)을 쌓아도 災害(災害)가 消滅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喪主하여 王이 歷史(役事)를 抛棄하게 하였다.그는 文武王 17年 王命을 받아 太白山에 浮石寺(浮石寺)를 創建하고 火엄일승(華嚴一乘)의 종지(宗旨)를 세우고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라는 著述을 하였다. 이 華嚴宗은 特히 貴族的 趣向에 符合되는 思想으로 貴族社會에서 歡迎받던 敎學이었다. 그의 弟子에는 오진(悟眞)·지통(智通)·표훈(表訓) 等이 있었으며, 著述로는 <화엄일승법계도> 外에 <백화圖章發願文(白化道場發願文)> 等이 傳해지고 있다.

印度 舊法巡禮勝의 活動 [ 編輯 ]

印度求法巡禮僧-活動

백제의 謙益(謙益)李 三國時代에 求法(求法)巡禮를 위해 印度를 訪問한 以來 많은 僧侶들이 佛敎의 本고장인 印度로 떠났다. 三國 統一期를 전후하여 이들 留學僧(留學僧)의 數는 急激히 增加되었으나 그들은 거의 本國으로 歸還하지 못하고 一部는 人道에서, 一部는 歸國 途中 中國에서 世上을 떠났다.

아리나발마(阿離那跋摩)는 黨(唐) 鼎冠年間(貞觀年間, 627∼649)에 長安을 떠나 中央아시아를 거쳐 印度에 들어갔다. 當時 佛敎學의 最高學部인 印度 나란타사(那爛陀寺:Nalanda)에 머물면서 硏究하다가 70餘 歲로 그곳에서 世上을 떠났다. 慧業(慧業)도 같은 時期에 나란타사에 머물다가 歸國하지 못하고 60餘 세로 一生을 마쳤다. 玄覺(玄恪)은 唐僧(唐僧) 玄祖(玄照)와 함께 印度로 들어가 대각사에서 工夫하다가 40歲를 겨우 넘어 病으로 죽었다. 또 現態(玄太)는 黨 靈휘年間(永徽年間, 650∼655)에 티베트 方面을 통해 중인도(中印度)에 들어가 부처님이 對角(大覺)을 얻은 부다가야(Buddhagaya:佛陀伽耶)의 菩提樹를 參拜하고 이어서 그곳 대각사(大覺寺)에서 硏究를 한 다음 다시 唐土(唐土)로 돌아왔다. 그러나 唐나라에서 그後 무엇을 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한便 혜륜(惠輪)은 梵語(梵語:Sanskrit)에 能했던 분으로 黨(唐) 인덕(麟德) 3年(666)에 印度에 들어가 信者社(信者寺)에서 10年間 留學을 마친 다음 토카라 地方(Tokharistan:現 Balkh)의 寺院으로 옮겨갔다는 記錄이 있다.

以外에도 舊法巡禮 途中 수마트라(Sumatra)섬 西海岸 파로사국(婆魯師國:Baros)에서 病死한 2人의 新羅 留學僧이 있었다는 記錄이 傳해지나, 그들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大凡(大梵)은 新羅 武烈王(在位 654∼661) 때 引渡 대각사에서 硏究를 하고 다시 唐나라로 돌아가 中國 佛敎界를 위해 貢獻하였다. 元標(元表)는 景德王 때 入黨(入唐)韓 後 黨 千步年(天寶年)에 다시 印度로 들어가 聖地(聖地)를 巡禮하고 黨으로 돌아왔다. 歸國時 그는 <華嚴經(華嚴經)> 80卷을 가지고 왔으며 지除算(支提山) 石室(石室)에 들어가 苦行(苦行)과 硏究를 繼續했다.

<往五天竺國傳(往五天竺國傳)>의 著者로 有名한 慧超(慧超)는 일찍 唐나라에 들어가 當時 印度에서 나와 있던 高僧 金剛砥(金剛智:Vajrabodhi)에게서 四史(師事)하다가 印度로 들어갔다. 그는 벵골灣(Bengal灣)에 있는 니코바르 群島(Nicobar群島)를 거쳐 印度에 들어갔고, 거기서 갠지스江(Ganges江) 流域 비하르(Bihar) 地方의 마가다국(Magadha國), 釋尊(釋尊)의 涅槃地(涅槃地)인 쿠시나가라國(Kusinagara國), 聖徒地(成道地) 부다가야 等 聖地를 巡訪하고 중인도·南印度를 거쳐 서인도·북인도를 두루 巡訪하고 나서 토카라國을 거쳐 아무다리아강(Amudafia江)을 지나 사마르칸트(Samarkand) 地方으로 들어갔다. 다시 파미르(Pamir) 高原을 넘어 동투르케스탄(東Turkestan)을 거쳐 타슈켄트(Tashkent)까지 들어갔다가 다시 黨(唐) 안서都護府(安西都護府)가 있는 쿠차國(Kucha:龜慈國)으로 돌아왔으니 이때가 黨 開元(開元) 15年(727) 11月 상순이었고 新羅 聖德王(聖德王) 26年이었다. 黨으로 돌아온 後 慧超는 金剛砥(金剛智)와 그의 弟子 불공(不空:Amoghavajra)에게 密敎(密敎)를 배우며 密敎 經典을 飜譯하다 끝내 故國에 돌아오지 못하고 唐土(唐土)에서 죽었다.

慧超의 이 記錄은 프랑스의 동양학자인 펠리오(P.Pelliot)에 依해 1910年 둔황(敦惶) 名士山(鳴沙山) 千佛洞(千佛洞) 石室(石室)에서 劇的으로 發見된 그의 <往五天竺國傳>에 依해 알려지게 된 것이다. 慧超의 이 紀行記는 東西 文化交涉社의 貴重한 資料로서, 當時의 印度는 勿論 中央아시아의 宗敎·風習·人種을 알려주는 稀貴한 文獻 中 하나가 되었다.

新羅院과 赤山 法華院 [ 編輯 ]

新羅院-赤山法華院

統一新羅時代 黨(唐)과 交易이 성하던 산둥半島(山東半島)와 장쑤省(江蘇省) 等 新羅人의 往來가 頻繁한 곳에 設置되었던 新羅人 集團居住地를 新羅坊(新羅坊)이라 하며 이곳에 세운 寺刹을 新羅院(新羅院)이라 한다. 新羅院은 齋堂(在唐) 新羅人의 信仰 依支處이자 航海의 安全을 祈願하던 禮拜處였고, 흥덕왕(在位 826∼836) 때 場보고(張保皐)가 산둥半島 적산촌(赤山村)에 세운 法華院(法華院)은 特히 有名했던 新羅院이다. 이 法華院은 海外 布敎院(布敎院) 役割을 한 外에 新羅 乃至(內地)와의 連絡機關 구실도 하여 新羅의 度唐僧(渡唐僧)은 勿論 日本(日本) 僧侶(僧侶)들이 이곳을 거치며 많은 도움을 입었다. 日本 天台宗(天台宗) 僧侶 原因(圓仁)은 그 좋은 例다.

赤山 法華院은 많은 財力(財力)을 갖고 있었으며 淡票(曇表)·琺靑(法廳)·養賢(諒賢)·聖林(聖琳) 等 30餘 名의 僧侶들이 常住하였고, 그 中에는 軌範(軌範)·혜각(惠覺)·法行(法行)·忠臣(忠信) 等의 船社(禪師)들도 있었다. 年中行事로서 新羅의 例를 따라 8月 15日을 전후하여 3日間의 祝祭를 열고 또 定期的인 강경회(講經會)를 여는 等 活潑한 佛敎行事를 行하였다.

新羅時代의 寺院經濟 [ 編輯 ]

新羅時代-寺院經濟

寺院 運營을 위한 財源(財源)은 信徒들의 財物(財物) 施納(施納)에 依存하였으며, 이를 基盤으로 寺院經濟가 形成되었다. 寺院의 財産 形態는 土地와 奴隸가 있고, 土地는 國家에서 주는 辭典과 一般 信徒들이 氣盡(寄進)하는 裝塡(莊田)이 大部分을 차지하였다. 그 外에도 査察은 移植(利殖)을 圖謀하여 대곡(貸穀)의 形式으로 財源을 增大시켰고, 한便 寺院에서 施主된 土地는 國家에서 免稅措處를 받을 수 있어 수많은 田畓이 寺院에 氣盡되었다. 이러한 要因들은 寺院經濟를 肥大하게 만들었고 相對的으로 國家의 財源을 枯渴시켰다. 또 移植(利殖)의 增大를 위한 대곡第(貸穀制)는 農民들에게 큰 負擔을 주어 가난에 허덕이게 하였다.

이러한 弊端은 이미 文武王 4年(664)에 財貨(財貨)와 電池(田地)를 不辭(佛寺)에 施主하는 일을 禁하는 영(令)까지 내리게 하였으나 電池(田地)의 施納(施納)은 繼續되어 효소왕(孝昭王) 2年(693)에 栢栗寺(柏栗寺)에 1만경(頃)의 電池가 施主되었고, 혜공왕(惠恭王) 15年(779)에 取禪師(鷲仙寺)에 30結(結), 헌강왕(憲康王) 5年(879)에는 鳳巖寺(鳳巖寺)에 500結의 電池가 施納되었다. 한便 社員側에서 多量의 田畓을 買入한 事實도 있어 그 買入文書가 남아 傳해 오고 있다. 이와 같이 하여 佛敎 寺院은 有力한 土地所有者로 君臨하게 되었고 寺院經濟는 國家經濟와 直結되는 政治的인 問題를 提起하여 君臣들로 하여금 數次에 걸친 田畓 施主 禁止의 上疏를 올리게 하였으며, 佛敎側으로는 內部的인 腐敗를 招來하는 하나의 契機가 되었다.

社員 奴婢 [ 編輯 ]

寺院奴婢

新羅時代의 寺院에 居住하던 非僧侶(非僧侶)로서, 史乘(寺僧)을 도와 社員의 經營 및 諸般 業務에 從事하던 身分. 이들은 後代에 와서 그 身分이 備薦해졌지만 처음에는 農奴制(農奴制) 社會에 있어서의 奴婢와는 따른 性格을 지니고 있었다.

性別에 따라 男子는 사노(寺奴), 女子는 私費(寺婢)라 불리었는데 그 成分은 다음 세 種類로 區分되었다. (1) 王族宮척(王族宮戚) ―― 法興王이 沙門(沙門)李 되어 興輪寺에 들어갈 때 弓尺들을 사예(寺?)로 査察에 施主하였다. 그後 한동안 사예는 王손(王孫)이라 呼稱되었다. (2) 貴族身分 ―― 貴族의 子女가 스스로 不辭(佛寺)에 몸을 바쳐 社員 奴婢가 되었다. 太宗 武烈王 때 宰相 김량度(金良圖)는 自己의 두 딸 화개(花開)·年譜(蓮寶)를 私費(寺婢)가 되게 하였다. (3) 罪人 ―― 逆賊이나 罪人의 一族을 奴婢로 삼았으니 太宗 武烈王 때 疫神(逆臣) 모척(毛斥)의 家族을 奴婢로 삼았다.

勝管制度 [ 編輯 ]

僧官制度

新羅時代 寺院(寺院) 및 敎團(敎團) 統制(統制)를 위한 僧職制度(僧職制度). 이 制度가 언제 누구에 依해 設置되었으며 그 職務가 무엇인지는 詳細히 알 수 없으나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에 나타난 斷片的인 記錄을 통해 다음과 같은 直系(職制)가 存立했었음을 알 수 있다.

(1) 국桶(國統) ―― 僧統(僧統) 또는 社主(寺主)라고도 하며 그 始初는 眞興王(眞興王) 12年(551)에 高句麗에서 온 惠諒法師(惠亮法師)를 국통으로 삼은 데서 비롯된다. 後에 선덕왕(善德王) 때 慈藏律師(慈藏律師)를 大國統으로 삼았으며 이로부터 大國統의 名稱이 새로 생겼다. 국桶이나 大國統은 昇段의 最高 統率者로서 前 僧尼(僧尼)의 紀綱과 規範을 세우고 그에 따라 모든 僧侶들을 統率하고 昇段의 諸般 行政業務를 主管하였다.

(2) 大暑性(大書省)

―― 그 技能은 알 수 없으나 眞興王 11年(550)에 鞍裝法社(安藏法師)를 大暑性으로 삼았다는 것이 最初의 記錄이다. 처음에는 한 사람이었는데 진덕왕 元年(647)에 한 사람을 더하여 두 사람을 두었다.

(3) 小暑性(小書省)

―― 少年書省이라고도 하며 두 사람을 두었는데 원성왕(元聖王) 3年(787)에 惠永(慧英)과 범여(梵如)의 두 法師를 임명하였다.

(4) 大島유나(大都維那)

―― 眞興王 12年(551) 國通過 함께 設置한 職位로서 보량法師(寶良法師)를 임명하였다. 처음에는 한 사람이었으나 진덕왕 元年(647)에 한 사람을 더 두었다.

(5) 都維那랑(都維那娘)

―― 大島유나와 함께 둔 것으로 아니(阿尼)로서 그 職務에 임명하였다 한다.

(6) 州統(州統)

―― 全國 9週(州)에 州統을 1名씩 임명하였다.

(7) 郡統(郡統)

―― 州統 밑에 郡統을 2名씩 두어 18名의 郡統을 두었다.

이 밖에 국桶 밑에 郡僧正(軍僧正)이 있어 헌강왕(憲康王) 10年(884)에 연훈(連訓)李 靈巖郡 僧正(靈巖郡僧正)으로 있었다. 또 9名의 州統과는 달리 節酒桶(節州統)이 있어 皇龍寺勝(皇龍寺僧)李 이에 任命되었고 港窓(恒昌)과 各名(覺明)도 다 같이 節酒通으로 任命된 적이 있다.

원성왕(元聖王) 元年(785)에 定款(政官, 或은 政法典)이 設置되었고 그 場(長)을 政法司(政法事)라 하였는데, 이들 僧官(僧官)은 行政事務를 館長(管掌)하는 한便 國民敎化의 指導者로서의 職分도 附與받았으며, 또 軍事的인 機能까지도 지닌 것으로 생각된다. 그밖에 四天王寺(四天王寺)를 비롯한 7個 寺院에는 그 寺刹의 運營과 映宣(營繕)을 맡아보는 사성전(寺成典)을 두었다.

卽, 四天王寺成典(四天王寺成典)·봉성사成典(奉聖寺成典)·奉恩寺成典(奉恩寺成典)·靈廟寺成典(靈妙寺成典)·永興寺聖戰(永興寺成典)李 그것이다. 이들은 景德王 때 改稱되어 감四天王寺部(監四天王寺院)·水營봉성사원(修營奉聖寺院)·水營感恩寺원(修營感恩寺院)·水營靈廟寺원(修營奉德寺院)·水營봉은사원(修營奉恩寺院)·水營靈廟寺원(修營靈妙寺院)·감永興寺官으로 불리다가 다시 혜공왕(惠恭王) 12年(776)에 옛 名稱으로 還元되었다. 이 사성전의 場(長)에는 大槪 眞骨(眞骨) 身分의 人物이 任命되었고 그 機構 亦是 厖大한 規模로 많은 官吏들을 두었다.

密敎의 傳來 [ 編輯 ]

密敎-傳來

新羅에 密敎(密敎)가 처음 들어온 것은 明朗法司(明朗法師)가 黨에서 歸國하면서부터이다(善德王 4年:635). 그는 勝 煮醬(慈藏)의 外叔(外叔)으로 宣德王 元年(632)에 唐나라에 들어갔다가 歸國할 때 新人祕法(神印秘法) 或은 門두루祕法(文頭婁秘法:Mantra)이라는 方位神(方位神)을 信仰 對象으로 삼는 呪術的(呪術的)인 信仰을 들여왔다. 密敎는 大乘佛敎를 爛熟하게 발달시켜 打力信仰(他力信仰)을 强調하다 派生된 信仰形態로서, 呪術(呪術)을 통해 病鬼(病鬼)와 惡鬼(惡鬼)를 쫓고 超自然的 힘을 驅使하여 外敵을 물리치는 等 實利的 效果를 目的으로 하는 敎派이다. 明朗은 이러한 密敎를 新羅에 처음 傳來하여 神印宗(神印宗) 宗祖가 되었고, 같은 時代의 密本(密本)도 祕密法(秘密法)을 통해 宣德王의 疾病을 治癒하여 密敎 傳播에 貢獻하였다.

그後 惠通(惠通)은 黨에서 引渡 密敎勝 善無畏(善無畏)에게 密敎 敎義를 배운 다음 文武王 5年(665)에 歸國하여 크게 校風(敎風)을 일으켰다. 後代에 惠通을 眞言宗(眞言宗)의 調査로 삼을 程度로 그의 密敎 電波에 對한 功勞는 큰 것이었다. 그러나 이 때까지 傳來된 密敎는 잡密敎(雜密敎)여서 呪術的인 面이 强調되지만 靈廟寺勝(靈妙沙僧) 不可思議(不可思議)는 純密敎(純密敎)를 처음 新羅에 傳하여 태장法(胎藏法)과 錦江法(金剛法)에 依해 佛敎의 吳의(奧義)를 攄得하는 길을 열었다. 新羅 後代의 佛敎信仰은 迷信과 結付된 呪術的 密敎信仰이 橫行하여 本來의 彈力을 잃고 墮落的인 樣相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高麗時代의 佛敎 [ 編輯 ]

太祖와 佛敎 [ 編輯 ]

太祖-佛敎

王建(王建)은 高麗의 太祖가 되어 王位에 오르자 고려국의 建設은 不法(佛法)의 加護(加護)라고 믿어 佛敎에 歸依(歸依)하게 되었다. 따라서 國運의 繁榮을 위해 많은 寺塔(寺塔)을 세우고 不辭(佛事)를 크게 일으키며 佛敎 擁護에 힘썼다. 太祖는 卽位 元年(918)에 八關會(八關會)를 베풀었고, 이것을 年例行事로 삼았다.

桐 2年에는 松嶽(松嶽:開城)에 遷都하고 城內에 法王寺(法王寺)·자운사(慈雲寺)·내帝釋원(內帝釋院) 等의 10大社(十大寺)를 세웠으며, 많은 斜塔을 새로 改修하였다. 高僧을 맞아들여 四史(師事)하였고, 또 自己의 옛집을 광명사(廣明寺)라는 절로 만들었으며, 沙門(沙門) 홍경(洪慶)李 黨에서 大藏經 1部를 싣고 禮成江에 이르렀을 때 王은 親히 이를 맞이하여 제석원(帝釋院)에 安置하였다.

그後 太祖 23年(940) 開泰寺(開泰寺)를 세우고 落成華嚴法會(落成華嚴法會)에 왕이 素問(疏文)을 짓기도 했다. 또한 無遮大會(無遮大會)를 年例行事로 베풀었고, 그의 第5代 王子 憎痛國家(證通國師)는 出嫁까지 시켰다. 그 外에도 王은 經由(慶猷)와 沖澹(忠湛)을 王師로 삼고 현휘(玄暉)를 國使로 삼았으며, 新羅가 9層塔을 세워 3國을 統一한 故事를 본떠서 統一의 大業을 이룩鼓子 開城에 7層塔, 平壤에 9層塔을 세웠다. 개국사(開國寺)를 지을 때는 兵士들을 動員하였으며 倂記(兵器)를 建築資材에 充當하였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그의 信心(信心)을 斟酌할 수 있다. 더구나 그는 500의 寺院을 세웠으며 佛像과 塔을 모두 合하면 3,500餘 所나 된다고 한다.

高麗時代 佛敎의 宗派 [ 編輯 ]

高麗時代佛敎-宗派

5敎宗(五敎宗)과 9山先文(九山禪門)李 이미 新羅時代에 形成되었다고는 하지만 中國에서처럼 뚜렷한 종지(宗旨)를 갖고 宗派를 이루지는 못했다.

佛敎 宗派의 記錄을 보여주는 가장 오랜 資料는 大覺國師墓誌銘(大覺國師墓誌銘) 일 것이다. 肅宗 6年(1101)에 찬(撰)한 開城 興王寺(興王寺)·大覺畫像 墓地(墓誌)에는 戒律宗(戒律宗)·法相宗(法相宗)·涅槃宗(涅槃宗)·法性宗(法性宗)·圓融種(圓融宗) 船積種(禪寂宗) 等 6種(宗)의 이름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大覺國師 當時의 學佛子(學佛者)鐘(宗)이라고 분명하게 記錄되어 있다. 이렇게 보면 高麗 初期에 6種이 있었음을 斟酌할 수 있으며, 新羅 時代에 形成되었다는 根據는 없다.

大覺國師 以後 高麗 末에 이르기까지는 7種으로 되어 왔다. 大覺國師가 天台宗(天台宗)을 開創함으로써 6種이 7種으로 되고 그 名稱도 좀 달라졌다. 南山宗(南山宗:戒宗)·慈恩宗(慈恩宗:法相)·中道宗(中道宗)·華嚴宗(華嚴宗:圓融)·始興宗(始興宗)·曹溪宗(曹溪宗:禪寂)·天台宗(天台宗) 等 7種이다. 7鐘時代에는 5橋 9山으로 統稱했으나 7鐘時代에는 5敎兩宗(五敎兩宗)이라고 불렀다. 5敎兩宗이란 5敎宗과 양선종(兩禪宗)이란 뜻으로서, 양선종이란 曹溪宗과 天台宗을 가리킨다. 天台宗은 中國에서 瘡腫된 것으로 敎宗의 하나였으나 高麗에서는 禪宗의 하나로 取扱되었다. 曹溪宗은 知訥(知訥)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지만 明確한 根據는 없다.

天台宗의 成立 [ 編輯 ]

天台宗-成立

新羅에도 현광(玄光)이나 鉛鑛(緣光) 같은 天台敎學에 밝은 學僧(學僧)은 있었으나 天台宗이 成立된 것은 大覺國師가 國淸寺에서 天台敎學을 講義한 뒤부터이다(1097). 肅宗 4年(1099)의 式年(式年)에는 第1回 天台宗의 乘船(僧選)을 行하였다. 이로부터 天台宗은 公認(公認)된 한 種이 된 것이다.

國淸寺를 天台宗의 根本道場(根本道場)으로 하고 千太學을 講義하여 많은 僧侶들이 모여들었는데, 그 中에는 9山先文이나 華嚴宗의 僧侶도 많았다.

이리하여 根本度量人 國淸寺 外에도 全國에 6大本山(六大本山)을 두어 宗風(宗風)을 크게 떨쳤다.

當時 佛敎는 선(禪)과 敎(敎)가 서로 自己만이 옳다고 主張하는 弊端을 갖고 있었는데, 이러한 弊端을 打破하고 全(全)佛敎가 大同團結하는 綜合的이고 理論的인 體系를 樹立하여 敎官兼修(敎觀兼修)의 統一的 思想을 展開한 것이 天台宗이었다.

校長寵祿 [ 編輯 ]

敎藏總錄

이 冊은 外製(外題)를 <新編諸宗敎藏總錄(新編諸宗敎藏總錄)>이라고 하였다. 閣圈의 內制(內題)에 <解凍類本現行록(海東有本現行錄)>이라 하였고, 略稱으로는 義天目錄(義天目錄) 또는 醫天籙(義天錄)이라 하였다. 이것은 印度·中國을 통하여 警(經)·율(律)·논(論) 三藏(三藏)의 正本(正本) 以外의 註釋書인 場所(章疏)만을 蒐集하여 目錄을 編纂한 것으로, 文宗(文宗) 27年 <大勢者집校長發元素(大世子集敎藏發願疏)>를 지은 以後 腺腫(宣宗) 7年 8月까지 25年間 長久한 時間을 두고 國內는 勿論 송(宋)·요(遼)·日本(日本) 等地에까지 散在한 註釋書를 最大限으로 蒐集한 것이다.

그 內容은 賞·中·下의 3卷으로 되었다. 商圈은 京義 場所 561部(部) 2,586卷, 中卷은 律儀 場所 142部 467卷, 下卷에는 論議 場所 307部 1,687卷이 各各 收錄되었으므로 모두 1,010部 4,740卷이다. 敎藏都監(敎藏都監)에서 이 目錄에 依하여 刊行된 것이 바로 <考慮續藏經(高麗續藏經)>이다. 義天(義天)은 序文에서 目錄을 編成한 理由를 "一般大藏經(大藏經)의 目錄은 開元釋敎錄(開元釋敎錄) 같은 完全한 것이 있어 그 遺傳에 不安이 없으나,경전의 小噍類(疏抄類)는 없어질까 念慮하여 目錄을 作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조계종지의 成立 [ 編輯 ]

曹溪宗旨-成立

曹溪宗이란 말이 正確하게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確實하지 않으나 조계종지가 成立된 것은 知訥(1158∼1210)에서부터였다. 知訥은 일찍이 <육조단경(六祖壇經)>과 이통현(李通玄)의 <화엄론(華嚴論)>에서 體用(體用)李 곧 정혜(定慧)라는 것과 華嚴圓頓紙(華嚴圓頓旨)와 선지(禪旨)가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고 <대혜語錄(大慧語錄)>에서 힘을 얻은 바가 있었다.

이와 같이 그는 華嚴·天台·禪學 等을 정혜兼修(定慧兼修)로써 包括하고, 그 위에 頓悟漸修(頓悟漸修)를 提唱하였다. 當時 9山先文은 모두 이 종지(宗旨)의 影響을 받아 韓國 선종사(禪宗史)에 劃期的인 飛躍을 가져왔다.

知訥은 또 선(禪)의 立場에서 念佛門(念佛門)을 吸收하여 慈心彌陀(自心彌陀)의 道理를 밝혔다. 善과 校歌 저마다의 主張에 치우친 偏見을 是正하여 禪敎一致(禪敎一致) 思想을 主張하고, 정혜兼修를 提唱하여 曹溪山 수선사(修禪社)를 創設하고 宗風(宗風)을 樹立했다.

知訥 [ 編輯 ]

知訥(1158∼1210)

시호(諡號)는 普照國師(普照國師)이다. <육조단경(六祖壇經)>으로 善理(禪理)를 얻고 <화엄론(華嚴論)>으로 圓頓關門(圓頓觀門)을 깨달아 一家(一家)를 大成한 뒤 定慧雙修(定慧雙修)를 提唱하고 선(禪)과 敎(敎)가 一切불이(一體不二)한 聯動(聯動)의 墓(妙)가 宇宙의 眞理라고 하였다.

그의 著書로는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수심결(修心訣)> 等이 있고, 문하(門下)에 正刻(靜覺)·원진(圓眞) 等 16局社(國師)가 있었다.

九山禪門의 統合 [ 編輯 ]

九山禪門-通合

高麗 末에 이르러 僧侶가 墮落하고 社員의 規範이 무너져 昇段(僧團)은 腐敗하기 始作했다. 이 機會를 타서 維新(儒臣)들은 排佛(排佛)하기 始作하였다. 知訥에 依한 曹溪宗으로 내면적 統一은 되었다 하지만, 9山의 門派(門派)가 列立(列立)하여 各各 自己의 散文(山門)을 子婦(自負)하고 彼此의 優劣을 論하기를 能事(能事)로 삼았다.

그때 보우(普愚)는 9山先文의 病弊를 憂慮하고 서로間의 優劣을 없애기 위하여 曹溪宗이란 이름으로 9山을 統合하고자 그 趣旨를 恭愍王에게 獻言(獻言)하였다. 恭愍王은 광명사(廣明寺)에 圓融府(圓融府)를 設置하고 9山을 統合할 것을 許諾하였다. 이렇게 하여 普照國師에 依하여 韓國 特有의 종지가 確立되어 내면적인 統一이 되었고, 공민왕 5年 太古(太古) 普愚(普愚)에 依하여 外面的으로 統一된 曹溪宗이 이루어졌다.

普愚 [ 編輯 ]

普愚(1301∼1382)

高麗 末의 高僧. 그는 선(禪)을 닦아 個當(開堂)하고 恭愍王의 請으로 王師(王師)가 되었으나, 辛旽(辛旽)의 慘害(讒害)를 避하여 法住寺(法住寺)에 隱居하다가 다시 禑王(祐王)의 局社(國師)가 되었다.

大覺國師가 置先(痴禪)이라고 喝破한 9山(九山)을 統合하고 口耳之學(口耳之學)을 止揚(止揚)하고자 圓融府(圓融府)를 建立하고 船社(先師)의 품法(稟法)으로 全(全) 佛敎를 總攝(摠攝)하여 社會 秩序를 維持하고자 했다.

대장경 組版 [ 編輯 ]

大藏經雕板

高麗 時代에 있어서 <大藏經>의 組版은 戰後 두 番에 걸쳐 있었다. 처음은 顯宗(顯宗, 1009∼1031) 때이고, 다음은 高宗(高宗, 1213∼1259) 때이다. 이것을 超조장경(初雕藏經)>·<再조장경(再雕藏經)>이라 한다.

超조장경 [ 編輯 ]

初雕藏經

顯宗 2年(1010)에 거란(契丹)의 成宗(聖宗)李 쳐들어와서 義州(義州)·先天(宣川)을 빼앗고 平壤을 包圍하였다. 이때 法諺(法言) 等 僧侶들도 敵兵을 물리치고자 싸웠으나 敵軍은 首都까지 陷落시켰다.

이에 王은 羅州(羅州)로 避亂하면서 國難을 克服하고 外敵을 물리치기 위하여 <大藏經> 板木의 曹操(雕造)에 着手하였다. 왕이 <大藏經> 組版을 始作한 것은 敵을 물리쳐 國難을 克服하고자 不法(佛法)에 祈願한 것이었지만, 한便으로는 父母의 冥福까지도 빌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그뒤 적은 물러가고 이어서 德宗(德宗)과 正宗(靖宗)을 거쳐서 文宗(文宗)에 이르기까지 戰後 約 40年에 걸쳐 <大藏經> 組版을 完成하였다. 이 <大藏經>은 1,106部 5,048卷으로 考慮 <구장경(舊藏經)> 또는 <超조장경>이라 한다.

이 大藏經板을 八公山(八公山) 符仁寺(符仁寺)에 奉安하여 國家를 진호(鎭護)하게 하고 國民의 信仰이 集中되게 하였다. 그러나 高宗 19年에 蒙古病이 쳐들어와서 符仁寺의 藏經板과 皇龍寺(皇龍寺)의 9層塔을 태워버렸다.

再조장경 [ 編輯 ]

再雕藏經

高宗 18年(1231)에 蒙古病이 侵入하여 이듬해 王은 江華島로 遷都(遷都)하고 國難을 克服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洞 23年(1236)에 大藏都監(大藏都監)을 設置하고 <大藏經> 在朝에 着手하였다. 이것은 앞서 玄宗이 大將을 曹操(雕造)하여 外敵을 退治시키고자 한 것처럼 온 國民이 一致團結하여 불타(佛陀)의 加護(加護)를 빌기 위함이었다.

高宗은 全國의 學者와 技術者를 動員하여 資料를 蒐集하고, 强化(江華)에 大藏都監 本社(本司)를 두고 晋州(晋州)에 分社(分司)를 두어 國力을 기울여 16年間이나 걸려 王 38年(1251)에 完成을 보았다. 總 81,258版을 兩面에 새겼으므로 162,516面이나 된다. 여기에 收錄된 驚異 1,512部 6,791卷이다. 當時 各種 이板(異板)들과 大橋(對校)하여 情密히 校正했기 때문에 各國에서 개판(開板)된 어떤 대장경 中에서도 가장 優秀한 漢譯 大藏經이며 우리 文化의 支保이다. 現在 海印寺(海印寺)에 奉安되어 있는데 이 판(板)을 <高麗大藏經(高麗大藏經)>이라 하며 俗稱 八萬大藏經이라고도 한다.

高麗時代 寺院經濟 [ 編輯 ]

高麗時代寺院經濟

寺院經濟의 構成要素는 人的資源(人的資源)으로서의 各種 奴婢(奴婢)의 增大 및 그들 奴婢에 依한 다양한 勞役(勞役)과 物的資源(物的資源)으로서의 王室貴族(王室貴族) 等에 依한 社如前(賜與田)·施納展(施納田), 良民(良民)에 依한 投託田(投託田), 기타 占奪(占奪)에 依한 電池(田地)의 增大 等이 基礎가 되었다.

이러한 財源(財源)을 土臺로 社員 內의 僧侶들은 各種 手工業(手工業)과 商業을 振興시켜 私財(寺財)의 充實을 期하였다. 寺院의 特權的 地位는 司令內(寺領內)의 田土(田土)에 對한 免稅權(免稅權) 行事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 貴族 및 良民들은 自己 所有의 土地를 寺院 名義로 하여 課稅(課稅)를 면하려 하였으며, 또 政府의 走狗(誅求)를 避하기 위하여 電池를 投託(投託)함으로써 寺院의 小作人이 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寺院은 穀物(穀物)과 酒類(酒類)를 釀造하고 또는 鹽田을 經營하여 그것을 販賣함으로써 私財(寺財)를 擴充시켰다.

이와 같은 傾向은 한便으로 僧侶의 私生活을 호화롭게 할 뿐만 아니라 劇團의 奢侈生活을 營爲하게 하였으며, 本來의 使命을 忘却한 僧侶들의 數가 늘어나자, 歲인(世人)의 半減과 怨聲이 높아지고 維新(儒臣)들의 排佛論(排佛論)이 擡頭하기에까지 이르러 國家 發展에 障害를 주기도 하였다.

敎壇의 紊亂 [ 編輯 ]

敎團-紊亂

지나치게 煩雜한 佛敎行事는 高麗 社會에 많은 弊端을 가져왔다. 斜塔(寺塔)의 濫設(濫設)과 行事(行事)의 번다로 國家經濟와 國民生活은 極度로 窮乏하였으며, 또한 兵役(兵役)의 義務를 避하여 出嫁를 假託(假託)하는 者가 많아 僧侶의 質이 低下되었다.

高宗(高宗) 때에 와서는 權臣(權臣) 崔瑀(崔瑀)의 庶子 勝(僧) 만종(萬宗)·萬全(萬全)李 惡僧(惡僧)을 모아 食貨(殖貨)로써 業(業)을 삼아 金銀穀帛(穀帛)을 쌓았으며, 그 門도(門徒)들은 各 寺院에 分散되어 甚한 橫暴를 부렸다. 忠烈王(忠烈王) 때는 元祖(元朝)의 威壓(威壓)이 컸으며 吐蕃勝(吐蕃僧:西藏僧)들이 人心을 誣惑(誣惑)하였고, 또 라마의 迷信은 信仰界를 흐려 놓았다. 特히 妖術(妖術)로 士女(士女)들을 誘惑하고 社說(邪說)로 人心(人心)을 어지럽히는 事例가 많았다.

排佛論의 擡頭 [ 編輯 ]

排佛論-擡頭

佛敎의 지나친 腐敗와 墮落은 必然的으로 儒生들 사이에 排佛論(排佛論)이 擡頭되게 하는 結果를 가져왔다.

成宗(成宗) 때 崔承老(崔承老)의 相서(上書)를 비롯하여 갖가지 佛敎의 弊端과 腐敗를 指彈하고 是正을 促求하는 上疏가 있었으며, 文宗(文宗) 10年에는 王이 詔勅을 내려 "戒律(戒律)을 어기고 營利와 飮酒, 노래와 춤으로 法度를 어기니 紀綱을 바로잡으라"고 하였다.

恭愍王(恭愍王) 때의 國子監 生員(國子監生員) 異色(李穡)과 吏曹判書(吏曹判書) 강회백(姜淮伯)은 造佛組塔(造佛造塔)으로 國家財政이 蕩盡되는 弊端을 是正하도록 促求하기도 하였다. 昌王(昌王) 때의 조인옥(趙仁沃), 恭讓王(恭讓王) 때의 김자수(金子粹)·金貂(金貂)·鄭道傳(鄭道傳)·朴硝(朴礎) 等의 上疏는 佛敎의 弊害를 隙間(極諫)한 것이었다.

勝課題度 [ 編輯 ]

僧科制度

僧侶의 選拔을 國家에서 實施하는 試驗制度로서 高麗時代부터 始作되었다. 僧侶의 先發制度로서는 國家的인 僧科制度에 앞서 해回(海會)라는 것이 太祖(太祖) 4年(921)에 있었으나, 國家的인 制度로서 僧科가 實施된 것은 4代 光宗(光宗) 以後이다. 確實한 名門은 없으나 光宗 9年(958) 以後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卽, 光宗 9年에 國家에서 管理의 登龍門(登用門)으로 科擧制度를 實施하였는데, 이때 一般 過去法을 따라서 僧侶도 選拔·登用하고자 勝과(僧科)를 實施하였다고 볼 수 있다.

僧科에는 從船(宗選)과 大選(大選)의 區別이 있었다. 從船은 叢林線(叢林選)이라고도 하였으며, 各 宗派 內에서 實施하는 것으로 여기에 合格하면 大選에 凝視하게 된다. 大選은 國家에서 行하는 것으로 禪宗大禪(禪宗大選)과 敎宗大選(敎宗大選)의 區別이 있다. 禪宗大禪은 主로 광명사(廣明寺)에서 善終(禪宗)의 僧侶에게 實施하였고, 敎宗大選은 王輪寺(王輪寺)에서 敎宗(敎宗)의 僧侶에게 施行하였다.

線이나 校나 다 같이 大選(大選)에 合格하면 大選이라는 初級法階(初給法階)를 주어 次例로 昇進하게 하였다. 禪宗法界는 大選·대덕(大德)·臺詞(大師)·重大事(重大師)·三重大師(三重大師)·善射(禪師)·大禪師(大禪師)의 差等이 있었고, 敎宗法階는 大選·대덕(大德)·臺詞(大師)·重大事(重大師)·三重大師(三重大師)·首座(首座)·僧統(僧統)의 次例였다.

이와 같은 法階를 밟아 올라가서 各種(各宗) 모두 三重大師 以上, 卽 船種은 船社·大禪師, 敎宗은 首座·僧統의 法界에 이르면 王사(王師)와 局社(國師)로 받들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僧科制度는 高麗朝에는 勿論 李朝時代 中葉까지 繼續되었다.

僧錄司 [ 編輯 ]

僧錄司

僧錄司란 佛敎의 諸般 事務를 맡아보기 위해 中央에 둔 官廳이다. 新羅時代에도 있었던 듯하나 仔細하게 傳하는 것이 없다.

高麗에 와서는 初期부터 關聯의 記錄이 보이고 있다. 兩家(兩街)라든가 座街僧錄(左街僧錄)·우가승록(右街僧錄) 또는 左右兩家도승록(左右兩街都僧錄)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모두 僧錄司 또는 그 一部의 職制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 亦是 詳細한 內容을 傳하는 記錄이 없으므로 機能과 役割, 構成組織 같은 것을 알기는 힘들다. 다만 表面上의 記錄과 名稱에 依하면 僧錄司에는 左右 兩家(兩街)가 있어서 그 兩家에 各各의 승록이 있었다.

僧錄은 그 가(街)의 僧侶와 敎團의 諸般事를 管理하고 모든 佛敎行事를 主管하였던 것 같다. 兩家의 僧錄 위에 도승록(都僧錄)이 있어 全(全)僧錄司를 代表하고 兩家를 總括하여 管掌하였던 것으로 斟酌된다.

諸宗法會 [ 編輯 ]

諸種法會

高麗時代의 法會는 種類와 名稱을 다 셀 수 없을 程度로 많다. 이 法會들은 法會(法會)·법석(法席)·大會(大會)·圖章(道場)·再(齋) 等으로 나눌 수 있다. 百高座法會(百高座法會)·八關會(八關會)·燃燈會(燃燈會) 等은 모두 新羅에서부터 傳해 온 것으로서 百高座法會와 八關會는 護國的(護國的)인 佛敎行事였다.

太祖때 華嚴法會(華嚴法會)·無遮大會(無遮大會)를 創設한 데서부터 始作하여 毘盧遮那懺悔法會(毘盧遮那懺悔法會)·無遮水陸會(無遮水陸會)·長徑圖章(藏經道場)·所在圖章(消災道場)·氣象영복圖章(祈祥迎福道場)·金光明經圖章(金光明經道場)·五百羅漢圖腸(五百羅漢道場)·金剛經圖章(金剛經道場)·人王圖章(仁王道場)·盂蘭盆齋(盂蘭盆齋)·金鑛법석(金光法席)·五敎법석(五敎法席) 等이 있었다. 이들 法會意識이 지닌 性格과 內容을 分類하면 祈福(祈福)·洋裁(穰災)·進兵(鎭兵)·値域(治疫)·試食(施食)·杞憂(祈雨)·祈晴(祈晴) 等으로 나눌 수 있다.

朝鮮時代의 佛敎 [ 編輯 ]

太祖와 佛敎 [ 編輯 ]

太祖-佛敎

太祖는 創業(創業) 以前부터 佛敎와 因緣이 깊었으며 佛敎 信者였다. 그는 卽位하기 前에 이미 太古(太古)·懶翁(懶翁) 等 高僧들에 四史(師事)하였으며, 特히 無學大師(無學大師)와는 關係가 깊었다. 그리고 그의 創業에 電氣(轉機)를 가져다 준 威化島(威化島) 回軍(回軍) 때에는 僧將(僧將) 新潮(神照)의 도움이 컸으며 登極(登極) 後에는 곧 無學을 王師(王師)로 삼고 어려운 建國事業(建國事業)을 完成코자 하였다.

太祖는 卽位 初에 軟輻射塔(演福寺塔)을 中窓(重創)하고 문수회(文殊會)를 베풀었으며, 海印寺(海印寺) 古塔(古塔)을 中搜(重修)하고 <大藏經>을 塔 속에 安置하여 國家의 利益과 國民의 繁榮을 빌었다.

太祖 3年(1394)에는 天台宗의 조구(祖丘)를 局社(國師)로 삼고 勝(僧) 100名을 內戰(內殿)에서 反射(飯食)하였다. 6年(1397)에는 興天寺(興天寺)를 세워 阼階禪宗(曹溪禪宗)의 本社(本寺)가 되게 하였고, 이듬해에는 强化(江華) 禪源寺(禪源寺)에 있던 大藏經板을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 이 밖에도 建國經讚事業(建國慶讚事業)으로 <大藏經> 인경(印經)과 金銀字死境(金銀子寫經)을 하게 하였다. 實錄(實錄)에 傳하는 佛敎行事만 해도 인경(印經) 12回, 소재회(消災會) 14回, 不辭법석(佛事法席) 35回, 半勝(飯僧) 9回 等을 들 수 있다.

周圍 輿論이 僧尼(僧尼)를 도태시키고 寺院(寺院)을 革罷(革罷)해야 한다고 했으나 太祖는 個國(開國) 初期부터 그렇게 할 수 없다 하여 斥佛(斥佛)에 휩쓸리지 않았다. 정도전(鄭道傳)·照準(趙浚) 等도 斥佛을 主張했으나 太祖의 神佛(信佛)은 變함이 없었다. 그는 字號(自號)를 송헌擧事(松軒居士)라 하였고, 王位를 떠난 뒤에도 念佛三昧(念佛三昧)로 晩年을 보냈다.

排佛政策 [ 編輯 ]

排佛政策

佛敎 自體의 腐敗와 儒生들의 斥佛(斥佛)은 太宗이 卽位하면서부터 政治的으로 排佛政策을 斷行하게 하였다. 卽, ① 宗派(宗派)를 倂合하고 寺院(寺院)數를 줄이며 僧侶를 還屬(還俗)시키고, ② 査察 土地를 國有(國有)로 沒收하고 寺院에 딸린 奴婢(奴婢)를 軍政(軍丁)에 充當하며, ③ 度牒制(度牒制)를 嚴하게 하고 王사·國事를 廢止하며, ④ 陵寺(陵寺)의 制度(制度)를 禁하였다.

太宗 2年(1402)에 王은 書雲觀(書雲觀)의 上言(上言)에 좇아 京外(京外)의 70社(寺)를 除外한 모든 社員의 토戰(土田)·租稅(租稅)를 君子(軍資)에 永續케 하고 奴婢를 祭祀(諸司)에 分速(分屬)시켰다. 桐(同) 5年 11月에는 議政府(議政府) 尙書에 좇아 開城(開城)과 神經(新京:서울)에 各種(各宗)의 寺院 1社(寺)씩, 목(牧)과 部(府)에는 禪宗査察 하나와 敎宗 査察 하나, 各(各)郡縣(郡縣)에는 腺腫·敎宗 가운데서 1社(寺)씩만 두고 다른 寺院은 모두 없애게 하였으며, 奴婢의 數도 大幅 줄이고 土地는 國家에서 沒收하였다. 그러나 燕京使(衍慶寺)·華藏寺(華藏寺)·神光寺(神光寺)·釋王寺(釋王寺)·洛山寺(洛山寺)·性謄寫(聖燈寺)·津寬寺(津寬寺)·상원사(上元寺)·堅巖社(見岩寺)·觀音窟(觀音窟)·檜巖寺(檜巖寺)·반야사(般若寺)·萬儀寺(萬義寺)·甘露寺(甘露寺) 燈만은 奴婢(奴婢)와 土地를 감(減)하지 않았다.

이듬해 太宗 6年 3月에는 議政府(議政府)의 계청(啓請)에 좇아 全國에 남겨둘 寺刹의 數를 定하였다. 卽, 曹溪宗(曹溪宗)과 摠持宗(摠持宗)을 合해서 70社, 天台疏字宗(天台疏字宗)과 法師種(法事宗)을 合해서 43社, 華嚴宗(華嚴宗)과 도문종(道門宗)을 合해서 43社, 慈恩宗(慈恩宗) 36社, 中道宗(中道宗)과 神印宗(神印宗)을 合해서 30社, 南山宗(南山宗) 10社, 始興宗(始興宗) 10社를 定하였으며 이밖의 寺院은 모두 廢止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神·區 陽經(兩京)에는 腺腫·敎宗의 各 1社(寺)에 200結(結)의 速戰(屬田)과 100名의 奴婢로써 100名의 僧侶를 商羊(常養)하게 하고 그外 境內(京內) 各司는 速戰 100結에 奴婢 50人으로 50名의 僧侶를 相讓케 했으며, 角度 樹冠紙(首官地)에는 선·교 中에서 1社에 100結의 速戰과 50名의 奴婢로써 50名의 僧侶를, 各 官邑內(官邑內)의 者複寫(資福寺)에는 急錢(給田) 20結에 奴婢 10名으로써 僧侶 10名을, 邑外(邑外)의 各司에는 急錢 60結에 奴婢 30名으로써 僧侶 20名을 相讓케 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苛酷한 政府의 處事에 석성민(釋省敏) 等이 數百 名의 僧侶를 이끌고 申聞鼓(申聞鼓)를 쳐서 復舊를 呼訴하였으나 貫徹되지 못하였다.

世宗(世宗) 亦是 抑佛政策(抑佛政策)을 强行하려 하였으나, 世宗 元年과 3年에 僧侶들이 明(明)나라에 가서 命題(明帝) 聲調(成祖)에 呼訴한 事實에 依해서 世宗의 排佛은 緩和되었다. 그러나 世宗 6年에 宗團을 廢合하여 선(禪)·교(敎) 兩宗(兩宗)으로 하고 太宗에 依하여 全國 242個 寺刹로 縮小되었던 것을 다시 36個社로 줄였으며, 城外(城外) 僧侶에게 城內(城內) 出入을 禁하였다. 다음 文宗(文宗)도 亦是 僧侶의 旺盛(王城) 出入을 禁하고 民間人의 出家(出家)를 막았다.

成宗(成宗)은 一般이 賞(喪)을 當했을 때 佛僧(佛僧)에게 公裁(供齋)하는 風習을 嚴禁하고 國王의 誕辰日에 臣下가 寺院에 가서 設齋(設齋)하는 일을 禁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度僧法(道僧法)의 廢止와 僧侶의 還俗으로 僧侶의 數가 줄어들었다. 연산군(燕山君)은 腺腫(禪宗)의 本社(本寺)인 興天寺(興天寺)와 敎宗 本社인 興德寺(興德寺)·대원각사(大圓覺寺)를 廢하고 公害로 삼았다. 三角山 各 寺刹의 僧侶를 쫓아내어 빈 절로 만들고, 城內(城內)의 尼寺(尼寺)를 헐고 니승(尼僧)은 宮房(宮房)의 비(婢)로 삼았다. 또 僧侶를 還俗시켜 官奴(官奴)로 삼거나 娶妻(娶妻)하게 하였으며, 四史(寺社)의 土地를 모두 官府(官府)에 沒收하였다. 이때 勝과(僧科)도 中止되고 兩宗(兩宗) 本社(本寺)도 없애버렸다.

中宗(中宗)은 僧科를 完全히 廢止시키고 慶州(慶州)의 洞佛像(銅佛像)을 부수어 軍器(軍器)를 만드는 한便 원각사(圓覺寺)를 헐어 그 木材를 燕山君 때 헐린 民家(民家)의 再築(再築) 自在로 나누어 주었다. 이리하여 佛敎는 겨우 그 命脈만을 維持해 오게 되었다.

宗團의 變遷 [ 編輯 ]

宗團-變遷

太宗 6年(1406) 3月의 議政府(議政府) 상계(上啓)에는 曹溪宗(曹溪宗)·摠持宗(摠持宗)·天台疏字宗(天台疏字宗)·天台法師宗(千台法事宗)·華嚴宗(華嚴宗)·도문종(道門宗)·慈恩宗(慈恩宗)·中道宗(中道宗)·神印宗(神印宗)·南山宗(南山宗)·始興宗(始興宗) 等 11種(宗)의 名稱이 보이는데, 다음 해 議政府 鷄西(啓書)에는 曹溪宗·華嚴宗·慈恩宗·中神宗·摠南宗·始興宗의 6種名만 보인다. 이에 依하면 太宗 6年 3月까지는 11種이 있었으나 곧 摠持宗과 南山宗을 합쳐서 摠南宗으로 만들고, 中道宗과 神印宗을 合하여 中神宗으로, 天台疏字宗과 法師鐘을 合쳐 天台宗으로 만들어 7種으로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世宗 6年 禮曹(禮曺)의 啓請(啓請)에 依하여 7種이던 宗團을 廢合하여 2種으로 하였으니, 卽 曹溪宗·天台宗·摠南宗을 腺腫(禪宗)으로 하고 華嚴宗·慈恩宗·中神宗·始興宗을 合하여 敎宗(敎宗)으로 하여 선·교 兩宗(兩宗)으로 만든 것이다. 이리하여 兩宗 各各 18個社, 合하여 36個社만 남기고 모든 寺院을 廢止하였다.

이와 같이 寺刹의 數와 宗派를 縮小시킴으로써 많은 私財(寺財)와 奴婢를 沒收하고 財政的인 利得을 取하려는 政治的 目的과 排佛(排佛)의 意圖에 依하여 그 廢合이 이루어졌다.

世祖의 興불政策 [ 編輯 ]

世祖-興佛政策

世祖는 本來 神心(信心)李 敦篤하였다. 平素에 辛未(信眉)·수미(首尾)·설준(雪峻)·홍준(弘濬)·曉雲(曉雲)·支海(智海)·海草(海超)·夏至(斯智)·瘧熱(學悅)·學祖(學祖) 等 高僧과 가까이 하며 그들에게 師事했다. 그리하여 그는 佛敎를 좋아했고 또 잘 알고 있었다.

그는 王位에 오르자 好不政策(護佛政策)을 썼다. 그리하여 僧侶의 城內(城內) 出入이 자유롭게 되고 出家의 制限도 받지 않았다. 犯罪의 嫌疑를 받은 僧侶라도 먼저 國王에 계청(啓請)해서 許可를 받고 新聞(訊問)하며, 官屬(官屬)李 함부로 査察에 侵入하는 것을 嚴禁하였고, 都承宣視(度僧禪試)의 法을 定하여 <經國大典(經國大典)>에 明記(明記)하여 子孫으로 하여금 準據(準據)하게 하였다.

王은 只今의 파고다公園 터인 興福寺(興福寺) 자리에 원각사(圓覺寺)를 세우고 佛像과 種과 塔을 세웠다.

그 外에도 海印寺(海印寺)·상원사(上院寺)·月精寺(月精寺) 福泉庵(福泉庵)과 金剛山·五臺山의 名刹(名刹)을 찾아 供養하고 佛事(佛事)를 일으켰다.

王은 또 불傳(佛典)의 國譯(國譯)과 인경(印經) 事業을 奬勵했다. 海印寺의 <大藏經>을 引出(印出)하였으며, <月印釋譜(月印釋譜)>를 刊行하였다.

<月印釋譜>는, 앞서 世宗때 王命에 依하여 自身이 編纂한 <釋譜詳節(釋譜詳節)>을 世宗이 報告 불타(佛陀)의 功德을 讚揚한 것이 <月印千江之曲(月印千江之曲)>이라 하여, 各各 別冊으로 刊行되었던 이 두 가지를 世祖 5年(1459)에 合하여 하나의 體制로 刊行한 것이다. 또 世祖 6年(1460)에는 佛敎音樂 靈山會上曲(靈山會相曲)을 作曲하였으며, 世宗 4年에 廢止한 바 있는 都城經行(都城經行)을 부활시켰다. 이듬해 6月에는 刊經都監(刊經都監)을 設置하고 佛經을 國譯·刊行하였다.

世祖의 興불政策을 크게 나누면, ① 僧侶의 權益 擁護와, ② 寺院 中興·삼보(三寶) 崇奉 等에 依한 不辭 振興, ③ 佛經의 力諫(譯刊) 等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刊經都監 [ 編輯 ]

刊經都監

佛經을 國譯(國譯)하기 위해 國立機關으로 世祖 7年(1461) 6月에 設置하였다. 이때 訓民正音으로 飜譯하여 刊行한 <法華經(法華經)>·<首陵엄경(首楞嚴經)>·<金剛經(金剛經)>·<圓覺經(圓覺經)>·<心境(心經)>·<靈駕集(永嘉集)> 等의 經典은 世祖 魚蜴(御譯)으로 當時 高僧(高僧) 辛未(信眉)·수미(守眉)·홍준(弘濬) 等과 代身(大臣) 윤사로(尹師路)·황수신(黃守身)·김수온(金守溫)·한계희(韓繼禧)·成任(成任) 等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文定王后와 普雨 [ 編輯 ]

文定王后-普雨

世祖의 興불政策이 있은 後 成宗(成宗)·燕山君(燕山君)·中宗(中宗)을 거치는 동안 佛敎는 다시 말할 수 없는 迫害를 받았다.

13代 明宗(明宗)이 卽位한 뒤 그의 母后(母后) 文定王后의 攝政이 始作되었다. 文定王后는 中宗의 排佛政策에도 不拘하고 佛敎를 獨身(篤信)하여 僧侶의 權益을 擁護하려고 努力하였다. 그리하여 明宗 6年(1551) 雪嶽山 百潭寺(百潭寺)의 허응당 보우(普雨)를 맞이하여 佛敎를 일으키고자 努力했다. 當時 儒生들의 反對에도 굽히지 않고 봉은사(奉恩寺)에 船種을, 奉先寺(奉先寺)에 敎宗을 두어 兩宗制(兩宗制)를 부활시켰다.

普雨를 判禪宗師 臺導船士(判禪宗事都大禪師) 봉은사 住持(住持)로 삼고 수진(守眞)을 判敎宗師 都大師(判敎宗事都大師) 奉先寺(奉先寺) 住持로 삼았으며, 度僧制(度僧制)와 勝과(僧科)를 다시 施行하였다.

明宗 6年에 勝과 豫備試驗을, 7年(1552)에 본(本) 試驗인 僧科를 行하여 敎壇은 活氣를 띠고 有能한 人物이 모여들었다. 西山大師 休廷(休靜)도 이때의 勝과 出身이었으며, 敎宗判事·禪宗判事를 歷任한 바 있다.

四溟堂 惟政(惟政) 亦是 그後에 僧科에 登用되었다. 이때 四方에서 보우 打倒의 上疏가 빗발치듯 하였고, 成均館 儒生(儒生)들은 管(館)까지 비우고 示威를 하기도 했다.

그後 明宗 20年(1565) 4月에 文定王后가 世上을 떠나자 興불 事業은 中途에서 꺾어지고, 普雨를 妖僧(妖僧)으로 몰아 濟州島로 귀양을 보내고 끝내 牧師(牧使) 辯協(邊協)으로 하여금 장살(杖殺)하게 하였다. 또다시 拜佛이 始作되어 明宗 21年에 兩宗과 僧科가 廢止되고 度僧法度 禁止되었다. 그러나 15年間의 興불事業은 敎界에 有能한 人物을 排出시켜 佛敎의 命脈을 維持하고 國難(國難)을 求하는 役割을 하게 하였다.

의승 [ 編輯 ]

義僧

宣祖 25年(1592) 4月 壬辰倭亂이 일어나게 되자 公州 甲寺(甲寺)의 청련암(靑蓮庵)에 있던 基허당(騎虛堂) 영규(靈圭)는 500∼600名의 의승군(義僧軍)을 이끌고 청주성(淸州城)의 倭軍(倭軍)을 무찔러 勝利를 거두었다. 義州(義州)까지 避難을 갔던 國王은 이 消息을 듣고 영규에게 堂上(堂上)의 職(職)과 옷을 내렸다. 그러나 王의 이 上士(賞賜)가 到着하기도 前에 영규는 義兵將(義兵將) 趙憲(趙憲)과 함께 다시 錦山(錦山)의 倭敵을 치다가 壯烈하게 戰死했다.

이때 妙香山에 있던 西山大師(西山大師) 休廷(休靜)은 王命으로 8度都摠攝(八道都摠攝)의 職銜을 받고 全國 僧侶에게 檄文(檄文)을 보내 前佛子(全佛子)가 모두 일어나 敵을 치는 일에 加擔할 것을 呼訴했다. 스스로 1,500名의 醫僧兵을 거느리고 73歲의 老齡으로 巡按(順安) 法興寺(法興寺)에서 全國의 僧軍 最高領導者로 일어섰다. 그의 弟子 四溟堂(四溟堂) 惟政(惟政)은 金剛山에서 일어나 關東(關東)을 中心으로 800餘 名, 뇌묵당(雷默堂) 처영(處英)은 智異山에서 일어나 湖南을 中心으로 1,000餘 名의 僧軍을 거느리고 呼應하니 各處에서 일어난 依僧軍의 總帥는 5,000餘 名이나 되었다.

人組(仁祖) 때의 丙子胡亂(丙子胡亂)에는 碧巖(碧巖) 覺醒(覺性)李 3,000의 僧軍을 모았으며, 허백(虛白) 明朝(明照) 等의 依僧將(義僧將)이 많은 活躍을 하였다. 이를 전후한 高僧大德(高僧大德)들은 國家의 危機를 救濟했을 뿐만 아니라 荒廢하던 敎界(敎界)에 새로운 氣風을 振作하여 衰退 一路의 佛敎界를 다시 살리게 하였다.

休廷 [ 編輯 ]

休靜(1520∼1604)

號는 西山大師(西山大師) 또는 淸虛(淸虛)라 한다. 僧科에 及第하여 先·敎 兩宗判事(禪·敎兩宗判事)의 僧職을 가지고 교강(敎綱)을 바로 잡고 門도(門徒)를 養成하였다. 때마침 倭兵의 侵入으로 國亂을 當하게 되자 70老軀로 全國 査察에 檄文(檄文)을 띄워 僧軍(僧軍)을 募集하고 參戰하여 功을 이루니 宣祖(宣祖)가 宣敎都摠攝浮腫修交(禪敎都摠攝扶宗樹敎)의 四號(賜號)를 내렸다.

特히 그의 著書인 <禪家龜鑑(禪家龜鑑)>은 宣示佛心(禪是佛心)·校時佛語(敎是佛語)를 提唱하여 宣敎의 胴體 2面(同體二面)을 主張하고, 佛敎 總和에 努力하였다.

유정 [ 編輯 ]

惟政(1544∼1610)

號는 四溟堂(四溟堂). 休廷의 門下로서 壬辰亂에 僧兵(僧兵)을 統率하여 功을 이루었고, 戰後에는 강화사(講和使)로 日本에 가서 많은 成果를 거두었다.

나라를 救하고 國民을 살렸다는 公的으로 報祭生靈 홍제尊者(普濟生靈弘濟尊者)라는 法號(法號)를 받았고, 李朝 佛敎 中興의 基礎를 마련했다.

間廢石筊簫 [ 編輯 ]

諫廢釋敎疏

李朝 一帶(一代)의 斥佛冊(斥佛策)과 배佛事床을 論破(論破)韓 唯一한 所聞(疏文)이다. 當時 顯宗(顯宗)이 卽位하여 抑佛策(抑佛策)을 强行하였다. 顯宗 4年에는 서울 長安의 니승(尼僧)을 城밖으로 逐出하고 文定王后의 內願堂(內願堂)으로서 5,000의 니승을 收容했던 自首(慈壽)·引受(仁壽) 두 니원(尼院)을 廢하였으며, 모든 査察 所屬의 奴婢와 位戰(位田)을 本社(本司)에 돌리게 하고 僧尼를 嚴重히 團束하였다. 이때 白麯(百谷) 처능(處能, 1617∼1680)李 佛敎의 彈壓에 抗議하는 소(疏)를 올린 것이다. 이 所聞은 朝鮮時代를 통틀어 가장 긴 上疏文(上疏文)이기도 하며, 오직 한 番뿐인 斥佛의 不當함과 佛敎의 正當性을 諫爭(諫諍)韓 所聞이다. 그러므로 처능의 <間廢石筊簫>는 佛敎史의 重要한 資料이다.

선문수경과 先론 [ 編輯 ]

禪文手鏡-禪論

<선문수경>은 백파(白坡) 亘璇(亘璇, 1767∼1852)의 著述로서 禪學(禪學) 硏究의 한 指針書가 되었으며, 새로운 先론(禪論)이 일어나게도 하였다. 그는 <선문수경>에서 선(禪)에 3種(三種)을 세워 調査船(祖師禪)·如來禪(如來禪)·義理禪(義理禪)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草衣(草衣) 意恂(意恂, 1786∼1866)은 反論을 폈다. 意恂은 그의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辯漫語)>에서 義理禪(義理禪)·格外禪(格外禪)·如來禪(如來禪)·調査船(祖師禪)·殺人劍(殺人劍)·活人劍(活人劍)·眞空(眞空)·묘유(妙有)의 4辯(四辯)으로 白波의 線論을 反駁하였다. 또 우담(優曇) 弘基(洪基, 1822∼1881)도 白波의 <선문수경>이 고석(古釋)에 어긋나서 그것을 고쳐 바르게 한다는 뜻으로 <先聞贈呈錄(禪門證正錄)>을 지어 白波의 線論에 反對했다.

이에 對하여 白波의 文人(門人)이며 法孫(法孫)인 舌頭(雪竇) 類型(有炯, 1824∼1889)은 <先원소류(禪源溯流)>를 지어 意恂의 <선문사변만어>와 弘基의 <先聞贈呈錄>을 番朴(飜駁)하였다. 그後 西進하(徐震河, 1861∼1926)는 <선문재정록(禪門再正錄)>을 지어 白波의 <선문수경>과 意恂·弘基·類型의 모든 線論에 對하여 論述하였다. 여기서 그는 白波의 설에 對해 饌·反 意見을 開陳하고 있으나 線論을 集大成(集大成)하고 總整理하지는 못하였다.

이와 같이 白波의 線論을 중심하여 不立文字(不立文字)를 종지로 하는 線에 奇石(記釋)과 理論의 爭辯(諍辯)이 있었던 것은 朝鮮 末期 佛敎의 特徵이다.

未妥信仰 [ 編輯 ]

彌陀信仰

統一新羅 後期에도 未妥信仰이 성하였으나 淨土宗(淨土宗)의 成立을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朝鮮 末期에 와서 寺刹은 念佛堂(念佛堂)을 두어 萬日會(萬日會)를 베풀고 淨土往生(淨土往生)을 念願하였다. 乾鳳寺(乾鳳寺)의 萬日會는 前後 3回에 걸쳐 大法會를 가졌었다. 처음은 順調(純祖:在位 1801∼1834) 때 容許(聳虛)가 始作하여 마쳤고, 두 番째는 哲宗(哲宗:在位 1850∼1863) 때 壁誤(碧梧)가, 세 番째는 漫畫(萬化)가 高宗(高宗) 18年(1881)에 始作하여 隆熙(隆熙) 2年(1908)에 마쳤다.

理判僧과 事判僧 [ 編輯 ]

理判僧-事判僧

朝鮮의 抑佛政策에 依하여 僧侶는 社會에서 가장 賤人 待遇를 받았다. 그리고 流域(油役)·地域(紙役)·慧驛(鞋役)·雜役(雜役) 等의 千臺가 極甚했다. 이에 견디기 어려워 荒廢한 寺院이 많이 생겼으며, 이때 理判僧과 事判僧의 두 有別(類別)이 생기게 되었다.

當時 遂行에 專念하는 有能한 僧侶들은 山中으로 들어가고, 工夫와는 距離가 멀고 多少 無識한 僧侶들이 寺院을 맡아 그 實務를 보며 지켜왔다.

그러나 이들이 朝鮮 末期 敎團의 혜명(慧明)을 維持하고 甚한 官街(官家)의 주구(誅求)와 雜役을 堪當하며 社員을 지켜온 공은 컸다. 이때부터 수도(修道:參禪·看經·念佛)에 從事하는 僧侶를 理判僧이라 하고, 社員의 運營 實務를 맡아 보는 僧侶를 事判僧이라 했다.

僧侶 入城의 解禁 [ 編輯 ]

僧侶入城-解禁

高宗 32年(1895) 4月에 僧侶의 入城(入城) 禁止令(禁止令)李 解除되었다. 그때 日本 一連種(日蓮宗) 僧侶 私奴(佐野)는 韓國의 僧侶가 城內에 들어오지 못함을 보자 總理大臣(總理大臣) 김홍집(金弘集)에 上書하고 다시 金弘集이 高宗(高宗)에 尙州(上奏)하여 비로소 僧侶 입성이 許可되었다.

그 뒤 3年이 지나서 光武(光武) 2年(1898)에 또다시 성안의 僧侶를 逐出하는 영(令)李 내려져 僧尼의 入城을 禁하였으나 이것은 實行되지 않고 解除되었다.

이리하여 오랫동안 발을 들여놓지 못하던 僧侶의 城內 出入이 자유롭게 許容되었으나, 오래지 않아 國家의 管理를 받게 되었고 또 日帝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昇段의 國家管理 [ 編輯 ]

僧團-國家管理

光武(光武) 3年(1899)에 東大門 밖에 원흥사(元興寺)를 세워 國內 數査察(首寺刹), 卽 韓國 佛敎의 總宗務所(總宗務所)로 삼고 13度(道)에 各各 하나씩의 搜査(首寺)를 두어 全國 寺刹의 事務를 總括하였다.

이와 같이 査察 統一의 뜻을 貫徹하고 나아가 國家 管理로 하기 위하여 光武 6年(1902)에는 宮內府(宮內府) 所屬으로 管理署(管理署)를 設置하였다. 이에 管理署에서는 私私管理細則(寺社管理細則), 卽 寺刹令(寺刹令) 36條를 發砲하고 全國 寺刹 및 僧侶에 關한 一切 事務를 맡아 보았다. 이리하여 管理署에서 大法山(大法山)과 重법산(中法山) 制度를 實施하여 全國 査察을 管理했다. 원흥사가 國內 搜査刹로서 大法산이 되고, 中法山은 各 道內 數査察로 16個 寺刹이 있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오랫동안 關心 밖으로 放置되었던 國內의 査察 및 僧侶는 이제 國家行政의 範圍 안에 들게 되었다. 그러나 그後 管理署와 大法酸度 오래 가지 못하고 光武 8年(1904) 1月에 廢止되어, 管理署의 所管事務는 內部官房(內部官房)에 옮겨졌다가 同年 2月에 勅令 第15號로써 四史(寺社)에 關한 事務는 內部地方局(內部地方局)의 主管으로 되었다.

佛敎硏究會 [ 編輯 ]

佛敎硏究會

管理署가 廢止된 뒤 光武 10年(1906) 2月에 洪月初(洪月初)·이보담(李寶潭) 等이 佛敎硏究會를 創立하여 원흥사에 本部를 두고 地方 各 寺刹에 支部를 두었다. 이 佛敎硏究會는 日本 淨土宗(淨土宗)의 影響을 받아 設立된 것으로서 淨土宗을 宗旨(宗旨)로 하였다.

그러나 이 膾가 명진學校(明進學校)를 設立, 새로운 佛敎 敎育機關을 이 땅에 만들었다는 것은 큰 功績이 아닐 수 없다. 初代 會長은 洪月初, 그 뒤를 이어 이보담이 會長이 되고 명진學校 校長(校長)을 兼職하였다.

元宗의 成立 [ 編輯 ]

圓宗-成立

隆熙(隆熙) 2年(1908) 3月 全國 僧侶代表者 52人이 원흥사에 모여 會議하고, 元宗 宗務員(圓宗宗務院)을 세웠다. 排佛政策으로 말미암아 宗名(宗名)마저 없었던 一部 佛敎界에서는 日本 佛敎 各 宗派(宗派)의 活動에 刺戟을 받아 宗名(宗名)을 밝힐 必要를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全國僧侶代表者會議를 열어 元宗(圓宗)이라 決意하고 代宗正(大宗正)으로 이회광(李晦光)李 推戴되었다. 隆熙 4年에는 覺皇寺(覺皇寺)를 創建하여 朝鮮佛敎中央會議所 兼 中央布敎所(中央布敎所)로 하였다. 理解 가을 宗正 이회광은 日本으로 가서 日本 曹洞宗(曹洞宗) 館長(管長) 이시가와(石川素童)를 만나 原從과 日本 曹洞宗의 聯合體猛(聯合締盟)에 合意를 보고 7條의 條約을 締結했다.

그러나 이것은 國內 敎系와 아무런 議論도 없이 單獨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므로 그 條約이 朝鮮佛敎를 日本에 팔아먹는 매교行爲(賣敎行爲)라는 反對運動이 일어났다.

臨濟宗 [ 編輯 ]

臨濟宗

元宗이 日本의 操縱種과 聯合한 데 反對하여, 박한영(朴漢永)·진진응(陳震應)·韓龍雲(韓龍雲) 等이 蹶起하여 이듬해 1911年 1月 英·湖南 僧侶를 모아 順川 松廣寺(松廣寺)에서 總會를 열고 臨濟宗을 세웠다. 臨濟宗 臨時宗務所를 松廣寺에 두고, 館長으로 仙巖寺(仙巖寺) 김경운(金擎雲)을 選定하였다.

그러나 年老하여 韓龍雲이 代理로 宗務(宗務)를 맡게 되었으니 光州 等地에 布敎堂을 設置하고 原從과 對峙하여 朝鮮 佛敎의 正統을 堅持하려 하였다. 그러나 1911年 6月 總督府는 寺刹令 7條를 發砲하고, 7月에 寺刹令施行規則 8條를 發砲하여 모든 寺院과 僧侶의 問題를 規制하였다. 이리하여 原從과 臨濟宗은 모두 저절로 없어지게 되었다.

寺刹令과 敎團의 體制 [ 編輯 ]

寺刹令-敎團-體制

1911年 6月 3日 寺刹令이 制定·發砲되고, 同年 7月 8日에 寺刹令施行規則이 發砲(發布)됨으로써 敎團은 朝鮮佛敎 30本山(1924年에 華嚴史家 昇格되어 31本山으로 됨)으로 形成되어 30個 敎區驛(敎區域)으로 나누어졌다. 이 寺刹令에 依하여 同年 11月부터 30本山의 第1代 주지(住持)를 次例로 認可하였으며 이듬해(1912)부터는 寺刹令에 依한 體制가 갖추어져 갔다. 또한 朝鮮 佛敎를 선(禪)·교(敎)·양종(兩宗)이라 하여 只今까지의 宗論(宗論)을 統一하고 5月에 覺皇寺(覺皇寺)를 中央布敎堂으로 하여 30本山 會議所를 設置했다. 그리고 30本社(本寺)는 各各 司法(寺法)을 制定하여 總督의 認可를 얻고 各 寺刹에 施行함으로써 寺刹令의 趣旨를 實現하게 되었다.

司法(寺法)은 各 寺刹에서 各各 制定하였으며 모두 總則(總則)·射擊(寺格)·住持(住持)·直射(職司)·會計(會計)·財産(財産)·法式(法式)·僧規(僧規)·布敎(布敎)·褒賞(褒賞)·懲戒(懲戒)·攝衆(攝衆)·雜則(雜則)의 13張(章)으로 하였고 그 內容도 거의 같았다.

30本産聯合會 [ 編輯 ]

三十本山聯合會

1915年 30本産에서는 布敎 및 敎育의 一元化를 위해 本社 住持들이 會議를 하여 30本山聯合制規(聯合制規)를 制定하고, 覺皇寺(覺皇寺)에 <30本産聯合事務所>를 두었다.

委員長은 30本山의 住持 가운데서 選定하여 聯合事務를 맡게 하였다. 이것은 30本山이 敎區로 成立되고 總督의 支配를 받게 되어 有機的인 關係가 缺如됨으로 인해 이를 是正하기 위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全國 査察을 總括하고 前 僧侶를 統制하지는 못하였다.

總務院과 宗務員 [ 編輯 ]

總務院-宗務院

朝鮮 佛敎界에 對한 日帝의 干涉과 統制가 漸漸 심해지자, 新進 所長 僧侶들이 主動하여 神聖한 宗敎가 行政官廳의 指示를 받는 것은 옳지 않다고 主張하고 全國僧侶大會를 열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依하여 1921年 覺皇寺에 '朝鮮佛敎 禪敎兩宗 中央總務院'을 設置하고 全國 査察을 總括하는 機構로 삼고자 하였다. 그러나 30本社 住持 中에서 反對하는 意見이 생겨, 이듬해(1922)에 '朝鮮佛敎 禪敎兩宗 中央敎務院'을 亦是 覺皇寺에 設置했다. 이리하여 같은 建物에 두 個의 看板을 걸고 서로 正統임을 主張하였다. 1925年 마침내 總務院과 宗務員 사이에 妥協이 이루어지고 兩院(兩院)은 하나로 뭉쳐 '財團法人 朝鮮佛敎 中央敎務院'으로 되었으며, 敎團은 統一的인 中央宗務機構를 갖게 되었다.

曹溪宗의 成立 [ 編輯 ]

曹溪宗-成立

日帝 治下의 韓國 佛敎 敎團은 그 宗名(宗名)을 '朝鮮佛敎 宣敎良種'이라 하였다. 그러나 보다 鮮明한 終命이 必要하였고 有機的인 中央統制的 體制가 要求되었다. 이리하여 太古史(太古寺)를 세워 總本山을 삼고 種名을 '曹溪宗'으로 決定하여 1941年 4月 23日附로 朝鮮佛敎曹溪宗 總本司 太古史 司法(寺法) 前16張 130條의 認可를 얻었다. 第1代 宗正에 한癌(漢岩) 中院(重遠)을 推戴하고 種會法·僧規法을 次例로 制定, 發砲하였다.

佛敎誌의 刊行 [ 編輯 ]

佛敎誌-刊行

新文化의 影響을 받아서 韓國의 佛敎界가 最初로 雜誌를 發刊한 것으로는 1910年 12月의 <元宗(圓宗)>을 들 수 있다. 그러나 願종지는 元宗 宗務員의 機關紙(機關誌)이며 겨우 2戶로서 種間(終刊)되었다.

佛敎文化의 綜合誌이며 文化機構로서의 本格的인 佛敎雜誌는 1912年 2月에 發刊된 <朝鮮佛敎月報(朝鮮佛敎月報)>부터라고 할 것이다. <朝鮮佛敎月報>(編輯 兼 發行者 權相老)는 1913年 8月에 19號로 終刊되었다. 同年 11月에 <解凍불보(海東佛報)>(편집 兼 發行者 朴漢永)가 發刊되었다가 1914年 6月에 8號로 終刊되었다.

1915年 3月에는 <佛敎振興會月報(佛敎振興會月報)>(編輯 兼 發行者 李能和)가 發刊되었다가 同年 12月에 9號를 내고 終刊되었다. 1916年 4月에 <朝鮮佛敎界(朝鮮佛敎界)>(編輯 兼 發行者 李能和)가 發刊되었으나 겨우 3號를 내고 同年 6月에 終刊되었으며, 1917年 3月<朝鮮佛敎總報(朝鮮佛敎叢報)>(編輯 兼 發行者 李能和)가 發行되어 1920年 5月에 21號를 내고 終刊되었다. 1924年 7月에는 <佛敎(佛敎)>(編輯 兼 發行人 權相老)가 發行되어 10年을 續刊하다가 1933年 6月에 107號를 내고 停刊되었으며, 또 1937年 3月에 <佛敎>지가 다시 續刊되어 이를 <佛敎神(佛敎新)>이라 하였는데 解放 前까지 繼續되었다.

이 밖에도 1914年에 東京 留學生들이 發刊한 <金剛杵(金剛杵)>와 1920年에 通度寺(通度寺)에서 發刊한 <聚散보림(鷲山寶林)>, 또 同年에 朝鮮佛敎靑年回 通度寺支會(支會)의 <調音(潮音)>, 1924年 7月에 朝鮮佛敎回 發行人 <佛日(佛日)>, 同年에 北京 佛敎留學生會에서 發行한 <荒野(荒野)>, 1935年 發刊된 <佛敎時報(佛敎時報)>, 佛敎傳受學校 校友會에서 發行했던 <日光地(一光誌)> 等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