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世界 大百科事典/宗敎·哲學/世界의 宗敎/불 校/佛敎의 歷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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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敎의 歷史〔開設〕 [ 編輯 ]

佛敎-歷史〔槪說〕

佛敎는 紀元前 6世紀頃 고타마 부다(Gautama Buddha)에 依해 現 네팔과 印度 東北部地方 마가다(Magadha) 王國을 中心으로 勃興하였다. 고타마 부다의 出生地는 룸비니(Lumbini)였고, 그의 成長地는 가비라성(迦毘羅城:Kapilavastu)이었으나 佛敎가 宗敎로서의 要件(要件)을 갖추고 歷史에 記錄을 남기기 始作한 것은 마가다 王國에서였다. 그의 宗敎 活動인 수도(修道)·정각(正覺)·포교(布敎)는 現 印度 비하르(Bihar) 地方에 該當되는 마가다를 中心으로 展開되었기 때문에 그의 出生地나 成長地보다는 이 마가다 王國이 佛敎發生의 中心地로 생각된다. 불타는 迦毘羅 星州(城主) 슈도다나(

uddhodana)王을 父親으로 하고 摩耶(Maya) 婦人을 어머니로 하여 태어났다. 그의 家計(家系)는 사키野(Sakya:釋迦)族에 屬하는 크샤트리아 階級이고 性(姓)은 고타마(Gautama), 이름은 싯다르타(Siddhartha)라 하였다. 後에 '깨달음(覺)'을 얻은 後 고타마 부다라 불렀다. 또 사키야족의 聖者라는 데서 釋迦牟尼(釋迦牟尼:

akyamuni) 或은 釋尊(釋尊)이라고도 불렀다.

佛敎 成立의 時代的 背景 [ 編輯 ]

佛敎成立-時代的背景

佛敎가 일어날 當時 印度의 宗敎界는 다른 古代民族과 마찬가지로 애니미즘(animism)的 傾向을 띤 原始信仰이 支配하고 있었고 베다(Veda)와 <우파니샤드(Upanisad)>에 根據를 둔 브라마니즘이 支配하는 社會였다. 個人에 內在 (內在) 하는 原理인 아트만(

tman)을 上程(想定)하고, 宇宙의 窮極的 根源으로 브라만(Brahman)을 設定하여 이 두 原理는 同一한 것(梵我一如)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또 人間의 行爲는 前生(前生)의 業(業:Karma)에 依해 支配된다고 하였고, 現在의 行爲의 結果는 未來의 行爲를 決定한다는 輪廻思想(輪廻思想)을 지니고 있었다. 이 輪廻에서 解脫(解脫)하는 것을 當時 思想家나 宗敎家들은 理論이나 實踐遂行을 통해 主張하였다. 業(業)·輪廻·解脫의 思想은 後代 印度思想의 骨格을 이루는 것으로 佛敎 亦是 이러한 印度의 傳統的 宗敎·哲學思想을 根底로 하여 새로운 宗敎思想으로 頭角을 나타냈던 것이다.

佛陀도 '깨달음(無上正等覺:Anuttara­samyak­sam)'을 얻기 前까지는 이러한 宗敎的 風土 속에서 브라마니즘의 修行 方法을 따랐다. 그가 29歲에 婦人인 耶輸陀羅(耶輸陀羅:Ya

odhara)와 아들 라후라(Rshula)를 버리고 出家(出家)하여 擇한 길이 選定(禪定)과 苦行(苦行)이라는 當時 流行되던 修行 方法이었다. 알라라 칼라마 (

lara Kalama)와 禹다카 라馬푸打 (Uddaka Ramaputta)에게 師事하다가 滿足치 못하여 스승을 버리고 5名의 修行者와 함께 苦行의 길을 떠났다. 6年의 苦行 끝에 부다가야(Buddhagaya)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이 깨달음의 內容이 4體(四諦)·12延期(緣起)이고 그것을 克服하는 方法으로 提示된 것이 8程度(八正道)이다. 佛陀가 깨달은 眞理를 法(法:Dharma)이라 하며 그는 이 法을 펴기 위해 비나레스(Benares)의 鹿野苑(鹿野園:Migadaya, 現 Sarnath)으로 가서 다섯 修行者에게 最初의 說法(說法)을 하고(初轉法輪) 그들을 弟子로 삼았다. 이로써 佛敎는 비로소 하나의 宗敎로서 敎祖(敎祖)·敎理(敎理)·敎團(敎團)을 갖추고 傳播되기 始作하였다.

아쇼카왕과 佛敎의 興隆 [ 編輯 ]

A

oka王-佛敎-興隆

불타는 45年間 敎化(敎化) 活動을 하며 僧團(僧團)을 이끌다가 80歲가 되는 BC 544年 入滅(入滅)하여 涅槃(涅槃)에 들고 昇段은 摩訶迦葉(摩訶迦葉:Mahaka

yapa) 等이 中心이 되어 佛陀의 율(律)과 法(法)을 維持하게 되었다. 그리고 佛滅後(佛滅後), 곧 佛陀의 敎法(敎法)을 整理하게 되었으니 佛陀에 依해 隨機說法(隨機說法)된 것을 結集(結集)을 통해 聖戰(聖典)으로 編輯하였다. 이것을 '第1回 結集'이라 한다.

王舍城(王舍城)에 500名의 比丘(比丘)들이 모여 摩訶迦葉을 司會者로 하고 優婆離(優波離:Upali)가 율(律)을, 아난(阿難:

nanda)李 法(法)을 暗誦하여 不屑(佛說)을 停電化(正典化)한 것이다. 그後 佛敎는 마가다를 根據地로 여러 都市의 王后(王侯)와 一般 庶民의 歸依를 얻으며 各地로 傳播되어 갔다.

BC 317年頃 찬드라 굽타(Chandra Gupta)에 依해 印度 最初의 統一國家人 마우리아(Maurya) 王朝가 成立되고 이 王朝 第3代 王 아쇼카(Aoka:阿育)가 卽位한 後 佛敎는 飛躍的인 膨脹을 보아 캐시미르, 간다라 地方을 비롯한 印度 各 地域과 박트리아의 그리스人 植民地, 스리랑카(실론)·버마 等 國外로까지 傳播되었다. 特히 스리랑카에는 아쇼카왕의 아들 마힌다(Mahinda)를 보내 傳播했다. 아쇼카왕은 熱烈한 佛敎 信徒로서 '法(法)인 眞理'에 依한 統治를 指導理念으로 삼는 等 佛敎 發展에 많은 貢獻을 한 王이었다.

部派佛敎 時代 [ 編輯 ]

部派佛敎時代

佛敎의 急速한 膨脹과 流通(流通)은 一面 敎壇 自體의 秩序面에서 많은 問題를 提起하였고, 그것은 드디어 敎派分裂을 招來하였다. 佛滅 後 100年頃 戒律(戒律) 解釋을 놓고 傳統的 保守派와 進步的 自由波가 對立되어 두 個의 剖破(部派)를 낳았다. 前者를 上座部(上座部:Theravada)라 하였고 後者를 大衆部(大衆部:Mahasamghika)라 한다. 剖破 發生의 原因은 佛陀의 敎說을 받아들이는 姿勢와 敎團秩序 確立에 對한 意見 差異에서 由來되었다. 佛滅 後 100年頃 베샬里(Vai

ali:毘舍離)에서 比丘戒(比丘戒)로 10社(事)를 두고 合法(合法)을 主張하는 側과 祕法(非法)이라고 反對하는 側이 對立되어 分裂된 것이다. 祕法을 主張하는 側이 700名의 比丘를 모아 集會를 열었으니 이것을 '第2回 結集'이라 한다.

크게 둘로 갈라진 剖破는 繼續 分裂되어 西曆紀元을 전후하는 時期에는 各各 18∼20個 程度의 剖破를 形成하였다. 剖破 發生의 發端은 戒律 解釋의 學說上 差異에 있었지만, 學說보다는 指導的 長老(長老)를 中心으로 한 體制가 달랐거나 地理的으로 너무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剖破를 形成하는 일도 생겼다. 代表的 剖破로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雪山部(雪山部)·독자부(犢子部)·火支部(化地部)·음광부(飮光部)·經量部(經量部) 等이 存在했다. 이 時期를 部派佛敎 時代라고 指稱하는데 이와 같은 佛敎의 不派的 展開는 外的(外的) 擴大와는 달리 불타 當時와 같은 純粹性 乃至 潑剌性을 잃고 율(律)·警(經)에 對한 訓詁學的인 柱石學(注釋學)에 빠졌다. 곧 阿毘達磨(阿毘達磨) 佛敎의 發達을 보게 되었으니 佛敎는 僧院(僧院) 中心, 出家(出家) 中心의 學問佛敎(學問佛敎)로 變化하고, 따라서 大衆性을 잃었다. 또 一部에서는 低級한 迷信的 信仰에 親和感을 갖게 되어 佛敎는 本來의 彈力을 잃고 말았다. 이러한 傾向에 對해 佛敎 本來의 모습으로 復歸하려는 運動이 일어났고 그러한 運動은 進步的 立場을 代表하던 大衆部 및 裁可(在家)佛敎徒가 主動이 되었다. 이것을 大乘佛敎(大乘佛敎)運動이라고 한다.

大乘佛敎의 興氣 [ 編輯 ]

大乘佛敎-興起

大乘佛敎가 興起한 것은 BC 1世紀頃이나 이 움직임의 胎動은 그보다 훨씬 前부터 始作되었다고 생각된다. 大乘佛敎의 擡頭로 인하여 以前의 6世紀間에 걸친 佛敎를 統稱하여 小乘佛敎(小乘佛敎)라 불러 大乘佛敎와 함께 오늘날까지 佛敎의 性格을 規定하는 2代(二大) 流派로 看做하게 되었다. 그러나 大乘佛敎의 大斗로 小乘佛敎는 衰退·消滅의 길을 달린 것이 아니라 서로 正統을 主張하며 繼續 不派的 發展을 보았고 그러한 勢力은 실론을 爲始한 南方 帝國(諸國)으로도 퍼져갔다. 스리랑카의 境遇 4∼5世紀間 부다다타(Buddhadatta)·부다高샤(Buddhaghosa)와 같은 一旦(一團)의 學者들에 依해 수많은 주석서들이 만들어지고 이것이 바탕을 이루어 미얀마·타이·캄보디아·라오스 等地의 小乘佛敎와 함께 南方佛敎 文化圈을 形成하였다.

小乘에 對해 對立的 姿勢를 取하며 일어난 大乘佛敎는 從來의 觀點을 革新하였다. 修行觀(修行觀)에 있어서 自己 形成을 主張하는 代身 大衆의 救援을 先行시킬 것을 主張하였다.

涅槃의 狀態에 安住해 버리는 阿羅漢(阿羅漢:Arhan) 代身에 菩薩(菩薩)이라는 새로운 理想的 人間像을 提示하였고 또 이미 涅槃에 들어간 歷史的 불타 代身에 未來의 超越的 不信館(佛身觀)을 내세웠다.

이러한 變化는 자타카(Jataka:本生譚)·아바다나(Avadana:譬喩文學) 및 阿毘達磨의 宇宙論의 發達과 더불어 漸進的으로 形成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思想이 組織的으로 綜合되면서 새로운 經典(經典)들이 만들어졌다. 大乘經前의 成立이 그것이다.

1世紀 後半에 쿠샨(Kusan:貴霜) 王朝가 成立되고 그 3代 王인 카니시카(Kania)가 卽位한 後 佛敎는 또 한次例 興旺기를 맞게 된다. 그는 푸르샤푸라(Pursapura), 現(現) 페샤와르(Peshawar)에 首都를 定하고 북인도의 大部分과 서인도 北半(北半), 中央 아시아와 아프가니스탄을 包含하는 廣大한 地域을 支配하였다. 王은 國內 各地에 佛塔·査察을 建立하고 積極的인 佛敎 保護政策을 썼다. 이때 佛敎는 파르티아(Parthia)·속디아(Sogdia) 地方에까지 普及되었고 이 時期로부터 이곳의 學僧(學僧)들이 中國으로 건너가 佛殿(佛典) 飜譯에 從事하기에 이르렀는데 쿠샨 王朝의 領土가 印度와 中國을 잇는 役割을 하였기 때문이다.

간다라 地方에서 마투라(Mathura) 地方에 이르는 地域에는 아직 部派佛敎가 强力한 勢力을 갖고 있어 설일체유부를 爲始하여 大衆部·음광부·법장부·火支部 等 여러 剖破가 竝立한 狀態에 있었는데 그中 설일체유부가 가장 큰 勢力을 가지고 있었다. 이 派가 中心이 되어 阿毘達磨 佛敎를 더 한層 발전시켜 그 結果 有婦(有部) 學說의 叢書人 <大毘婆娑論(大毘婆沙論)>이 캐시미르 地方 學僧들의 손에 依해 編纂되었고 이 논서를 中心으로 한 學問 傾向이 盛行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部派佛敎的 傾向이 支配的인 時期에 大乘運動은 繼續 活潑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리하여 BC 1世紀에서 紀元 3世紀에 이르는 사이 大乘運動의 結實로 수많은 大乘經前들이 出現했다. 初期 大乘經典 가은데 重要한 것들은 <般若經(般若經)>·<維摩經(維摩經)>·<法華經(法華經)>·<阿彌陀經(阿彌陀經)>·<十地頃(十地經)> 等이다.

이 가운데 <般若經>은 大乘經典을 代表하는 經典으로, 이 經典에 실린 工事上(空思想)은 大乘佛敎의 基本的 敎理로서 佛敎思想의 根本 思潮를 이루었다. 工事上의 基礎를 닦은 代表的 人物은 南印度 出身의 用水(龍樹:Nagarjuna)로서 그의 <중론송(中論頌):Madhyamaka → karika)>은 部派佛敎가 지닌 誤謬를 決定的으로 論駁하였다. 用水 以後에 <勝萬頃>·<解深密經(解深密經)>·<楞伽經> 等이 나타나고 있으며 特히 <解深密經>의 唯識說(唯識說:

layavij

ana)은 270∼480年 사이에 彌勒(彌勒:Maitreya)·無着(無着:Asanga)·世親(世親:Vasubandhu) 等에 依해 體系的으로 整理된 思想으로, 용수의 工事上과 함께 佛敎思想의 2大 潮流를 形成하는 學說이 되었다.

中觀史上(中觀思想)과 唯識思想(唯識思想)은 世親 以後 有力한 學派를 形成하였고 7世紀에 이르러 이 두 學派는 印度 大乘佛敎의 主要한 學派로 君臨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中觀學派는 用水 以來 不好(佛護:Buddhapalita, 470∼540)의 系統과 靑便(淸辨:Baviveka, 490∼570景) 系統으로 나뉘었고 前者는 월칭(月稱:Candrak

rti, 600∼650景)과 謫遷(寂天:

antideva, 650∼760景)李 繼承하였으며, 後者는 適好(寂護:

antaraksita, 680∼740景)·연화界(蓮華戒:Kamalasila, 700∼750景)가 繼承하였다.

唯識學派는 世親을 繼承한 진나(陳那:Dinnaga, 400∼480景) 系統과 德惠(德慧:Gunamati, 420∼500景)와 안혜(安慧:Sthiramati, 470∼550景)의 系統으로 나뉘었고 前者는 호법(護法:Dharmapala, 530∼561)·法稱(法稱:Dharmak

rti, 643∼673)李 繼承하였다. 이 時期는 佛敎思想에 있어 爛熟한 發達을 보인 時期였는데 이들은 佛敎 內部에서 相互間에 活潑한 論戰을 벌였을 뿐 아니라 外部의 힌두敎나 字이나(Jaina)교의 宗派들과도 論爭을 벌였다.

印度 佛敎는 이렇게 大乘佛敎의 學派들을 形成하여 發展을 繼續하였으며 그 學問的 全勝을 위해 那爛陀(那爛陀:Nalanda) 社員이 國際 大學으로서의 役割을 하였으며 발라비(Valabhi) 社員도 佛敎學의 中心地가 되었다. 그러나 宗敎的 熱情은 減退되기 始作하여 宗敎生活은 那爛陀·발라비·비크라마시라와 같은 大學으로 集中되었고 所謂 昇段 中心의 佛敎는 衰退의 길을 걷기 始作하였다.

密敎의 成立 [ 編輯 ]

密敎-成立

7世紀 中葉에서 末葉에 이르는 時期에 새로운 佛敎의 擡頭를 보게 된다. 곧 密敎(密敎)의 發興이다. 密敎思想은 불타 當時부터 州法(呪法)으로 傳해오던 것으로 주구(呪句)·진언(眞言:Mantra)·다라니(陀羅尼:Dharani)를 松枝(誦持)하여 그것으로 마음을 統一하고 구경의 境地에 到達하여 불(佛)이 되는 것을 目的으로 한 佛敎의 一派였다. 7世紀 中葉에 이르러 이러한 思想이 組織 綜合되어 <大日經(大日經)>·<金剛頂經(金剛頂經)>과 같은 文獻으로 나타남으로써 密敎의 基礎가 確立되었다.

이 密敎道 大勝으로 分類되고 있으나 大乘佛敎의 退嬰的 一面을 드러내는 思想으로 評價된다. 그 發生 理由는 世親 以後 大乘佛敎가 지나친 哲學的·理論的 傾向으로 흘러 一般 大衆과 遊離되어 마치 阿毘達磨 佛敎가 빠진 것과 同一한 狀況에 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 當時 印度에서 탄트라 文學이 流行되었고 그 風潮에 따라 佛敎의 密敎的 展開가 促進된 것이다. 中觀 思想도 密敎化되었으며 따라서 密敎는 힌두 社會에서 歡迎받아 急速히 普及되었다. 8世紀 後半에 와서는 密敎가 大衆化됨과 同時에 低級한 儀禮를 導入하기에 이르렀다.

密敎의 大衆化는 또 하나의 佛敎 流派를 형성시켰으니 그것을 金剛乘(金剛乘:Vajrayana)이라 하였는데, 이러한 運動을 일으킨 사람은 認陀羅부저 (因陀羅部底:Indrabhuti, 687∼717?) 였다. 그의 아들인 연화生(蓮華生:Padmasam)은 密敎를 티베트로 傳했고, 이때 印度로부터 多數의 高僧이 티베트에 들어가 密敎를 中心으로 한 大乘佛敎를 傳播했다. 그러나 티베트에는 中國에서 온 學僧들이 있어, 이들과 印度 學僧 사이에 見解 差異가 생겨 混亂을 일으켰다.

티손데첸(Khrisron­Ide­bstan)王은 首都 라사(Lhasa)에서 會議를 열어 論爭을 매듭지었고, 그 結果 印度側의 點門派(漸門派:Rcen­Min­pe)의 설이 認定되고 中國의 돈門派(頓門派:Ston­mun­pa)의 說은 排斥되었다. 이로써 티베트 佛敎는 印度 後期佛敎의 性格을 그 主流로 삼게 되었다. 티베트로 들어간 密敎는 머지 않아 라마교로 發展하여 티베트 固有 佛敎로 定着하게 된 것이다.

印度佛敎의 衰退 [ 編輯 ]

印度佛敎-衰退

金剛乘(金剛乘)佛敎가 팔라(Pala) 王朝(750景∼1199)의 保護를 받으며 마가다 脂肪과 서벵골 地方에서 影響을 끼치고 있었으나 이때의 佛敎는 거의 힌두敎나 다를 것이 없는 狀態로 變質되고 말았다. 佛敎의 勢力은 오히려 中國·韓國·日本에서 興旺을 보았다. 이와 같이 印度에서 佛敎가 衰退된 것은 佛敎 自體가 內的으로 變化를 일으켜 彌勒佛(彌勒佛)·觀音(觀音)·大日如來(大日如來) 같은 불(佛)·菩薩(菩薩)들이 힌두敎의 諸神(諸神)들과 거의 같은 性格과 機能을 갖게 된 點에 있었고 그 위에 이슬람敎의 迫害에 依해 僧侶가 淘汰되고 社員이 破壞되었기 때문이었다.

佛敎의 傳播 [ 編輯 ]

佛敎-傳播

印度에서 佛敎가 消滅된 代身 佛敎는 스리랑카·미얀마·타이와 中央 아시아 帝國(諸國)을 비롯해 티베트·中國·韓國·日本 等 廣範한 地域으로 傳播되어 各 地域의 民族文化와 融合하여 다채로운 宗敎文化를 이룩하였다. 特히 中國에 佛敎가 傳來된 것은 1世紀頃이라고 推定되지만 佛敎 經典의 漢譯(漢譯)은 2世紀 後半부터 本格的으로 行해지고 그 後 위진(魏晋)·南北朝(南北朝) 時代에서 數(隋)·黨(唐)을 거쳐 송(宋)·元(元)·明(明)까지 中國 佛敎는 크게 繁昌하여 獨特한 佛敎文化를 形成하였다.

그러나 現實主義的 性格을 지닌 中國人에게 佛敎가 처음 傳해질 때 衝突을 免치 못했다. 그 傳來 時期는 傳한(前漢)경으로 소급되고 經典이 本格的으로 飜譯되는 것은 後漢(後漢)에 들어와서였으나, 現實을 떠나는 것을 主張하는 佛敎의 敎義가 現世主義的 思想風土를 造成하고 있던 當時에 쉽게 收容될 수는 없었다. 따라서 佛敎는 道敎的 信仰과 結付되어 新鮮房술(神仙方術)의 하나로 收容되었다. 中國佛敎의 初期 收容時期는 大體로 傳한말(前漢末)에서 4世紀 말까지 400年間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後 5世紀 初에서 6世紀 말까지 200年間 佛敎는 着實히 뿌리를 뻗게 되었다. 經典의 傳來가 激增되고 飜譯技術이 發達을 보인 以外에 많은 人度僧(僧)들이 들어왔다. 鳩摩羅什(鳩摩羅什, 350∼409)·담무참(曇無讖, 385∼433)·보리유지(菩提流支, 5世紀末∼6世紀初)·津逮(眞諦, 499∼569) 等이 나타나 本格的 飜譯을 行하여 學問上·信仰上의 基礎를 이룩했다. 後代에 이르자 當時의 潮流에 對해 毘曇宗(毘曇宗) 等의 名稱을 附與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阿毘曇(阿毘曇)>·<誠實論(成實論)>·<涅槃經(涅槃經)>·<十地經論(十地經論)>·<攝大乘論(攝大乘論)> 等이 經論(經論)을 硏究 對象으로 한 學派에 對한 名稱이었고, 또 이 學派들은 單純한 學派를 넘어 宗派(宗派)로까지 되었다.

수(隋)가 天下를 統一하면서 文化의 南北對立이 統合·解消되고 佛敎界에도 潑剌한 신기풍이 일어났다. 6世紀 末부터 8世紀 全般에 이르는 150年間 全代(前代)의 硏究와 信仰을 基礎로 中國 獨自(獨自)의 佛敎 宗派를 일으켰다. 假想(嘉祥) 吉藏(吉藏, 549∼623)의 三論宗(三論宗), 天台(天台) 誌의(538∼597)의 天台宗(天台宗), 新行(信行, 541∼594)의 三階敎(三階敎), 盜作(道綽, 562∼645)의 淨土宗(淨土宗), 道詵(道宣, 596∼667)의 律宗(律宗), 자은(慈恩) 窺基(窺基, 632∼682)의 法相宗(法相宗), 현수(贅首) 法匠(法藏, 643∼712)의 華嚴宗(華嚴宗), 大監(大鑑) 慧能(慧能, 638∼713)의 腺腫(禪宗), 一行(一行, 683∼727)의 密敎 等의 宗派가 發生된 것이다. 特히 禪宗은 中國 佛敎의 두드러진 特徵을 나타내는 宗派로서 菩提達磨(菩提達摩, ?∼528)에 依해 中國에 傳해진 以來 慧能에 이르러 佛敎界에 一大 變革을 일으켰다. 禪宗은 그後 林悌(臨濟)·위앙·早冬(曹洞)·韻文(雲門)·法案(法眼) 等 宗派의 成立을 보게 되었고 그것은 中國은 勿論 韓國과 日本을 風靡하였다.

이렇게 數·黨 宋代를 거쳐 中國 特有의 宗派佛敎가 形成되었고 그에 따라 韓國·日本도 大體的으로 中國의 重派的인 佛敎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高句麗 小獸林王(小獸林王) 2年(372) 전진왕(前秦王) 苻堅(符堅)에 依해 佛敎가 傳來된 以來 高句麗·백제·新羅는 受容한 宗派佛敎를 綜合佛敎(綜合佛敎)로 志向시키면서 爛漫한 佛敎文化를 꽃피웠다.

<李 珉 容>

원시佛敎의 成立 [ 編輯 ]

원시佛敎 [ 編輯 ]

原始佛敎

佛敎는 불타(佛陀:Buddha)의 가르침을 根本으로 하면서 그것이 繼承·傳播되어 가는 過程에 있어서 時代와 더불어 發展하여 온 것이다. 印度에서 發生하여 아시아의 廣範圍한 領域에 걸쳐 퍼져나간 佛敎를 모두 똑같은 한가지의 것으로 把握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歷史的으로나 地理的으로나 各其 다른 特色을 反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見地에서 佛陀가 道(道)를 깨닫고 傳道를 始作한 때로부터 그의 入寂(入寂) 後 弟子들이 그의 가르침을 整理하여 成立된 佛敎를 一般的으로 원시佛敎라 한다.

그 期間은 佛陀의 弟子들 사이에 分派가 생겨날 때까지의 約 2,300年間을 말하는데 北方佛敎와 南方佛敎의 資料에 따라 多少 差異가 있다. 원시佛敎의 特色은 佛陀의 가르침이 直接話法의 形式으로 되어 있는 點에 있으나 實은 弟子들에 依하여 口傳(口傳)된 것이 佛陀의 入寂 後 整理된 것으로 그 確實性의 限界點을 긋기는 어려운 것이다. 불타 및 그의 直弟子(直弟子) 時代의 佛敎를 根本佛敎(根本佛敎)라 하고 그 後의 것을 協議의 원시佛敎라 하는 說도 있다.

佛陀의 傳記 [ 編輯 ]

佛陀-傳記

불타는 歷史的 實在人物이다. 그의 生涯를 記錄한 佛殿(佛傳)은 많이 있으나 거의가 佛陀의 가르침을 信奉하는 사람들에 依하여 쓰여진 것으로 거기에는 當然히 信仰的 欲求에 依한 神祕的이고 靈驗的(靈驗的)인 여러 가지 潤色(潤色)이 加해지게 되었다.

假令 佛殿經典(佛傳經典)은 西曆紀元 前後에 많이 製作되었는데 아습朴驅使(馬鳴) 作이라 하는 <부다차리打(Buddhacarita)>(漢譯<佛所行讚>)는 佛陀의 生涯를 敍事詩風으로 노래한 것이고, 漢譯으로 된 <佛本行集經(佛本行集經)>은 60卷에 達하는 佛殿의 集大成이다. 이들은 모두 信仰的 傳記物로서 客觀的인 技術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佛殿에는 電氣와 傳說이 混在(混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歷史的 實在로서의 佛陀의 生涯는 이와 같은 多分히 傳說的인 資料를 批判的으로 考察하여 이와 關聯된 다른 資料들을 綜合的으로 硏究함으로써 이를 實證的으로 再構成하는 수밖에 없다.

誕生 [ 編輯 ]

誕生

佛陀가 誕生한 連帶에 關하여는 여러 說이 있어서 모두 一致하지 않는다. 그러나 불타는 大略 西曆 紀元前 486年부터 483年頃에 네팔 地方의 小王國(小王國)의 王子로 태어났다. 誕生日은 北方佛敎에서는 4月 8日이고 南方佛敎에서는 5月 보름날(이날을 베사카 第一로서 祝賀한다)로 되어 있다.

佛殿에는 이날 佛陀가 天上天下唯我獨尊(天上天下唯我獨尊)을 외치면서 태어났다고 하여 이 不世出의 宗敎的 巨人의 誕生을 祝賀한다.

석家族 [ 編輯 ]

釋迦族

佛敎의 窓時調 고타마 부다의 尊稱인 釋迦牟尼(釋迦牟尼:Sakya­muni)가 석家族 出身의 聖者(聖者)를 의미하는 것과 같이 불타는 석家族에서 태어났다. 傳說에 依하면 석家族은 아리아系統의 코살라 種族의 一派라고 하나 分明치 않다. 석家族은 佛陀가 이世上에 나올 무렵 이미 북인도의 迦毘羅城(迦毘羅城)을 中心으로 하여 小王國을 形成하고 있었다. 當時의 印度는 오랜 貴族 共和政治로부터 王族이 支配하게 되는 政治體制로 옮아가는 途中이었는데 佛陀가 世上에 나올 무렵에는 아직 强力한 專制國家는 出現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석家族의 周圍에는 코살라國(國), 마가다국, 쿠시나가라國과 其他 王國 또는 共和國이 竝立하여 있어서 이들 사이에 낀 석家族의 訂正(政情)은 不安하였다.

석家族은 武士階級에 屬하고 農耕과 交易에 從事하며 手工業도 發達한 便이었지만 軍事的으로는 弱體를 면치 못하였다. 傳說에 따르면 뒤에 코살라 王國의 攻擊을 받아 全滅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傳說에 依하여 象徵되는 석家族의 國家的 不安은 王子로 태어난 젊은 날의 佛陀가 出嫁하게 되는 動機와 조금은 關係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淨飯王 [ 編輯 ]

淨飯王

迦毘羅城의 王. 싯다르타의 아버지인 首都다나(Suddhodana)를 말함. 그는 라자(왕)의 地位에 있었으나 實際로는 조그마한 나라의 共和政治의 代表者였다. 싯다르타를 깊이 사랑하여 그가 出家(出家)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이를 막아보려 여러 가지로 애를 썼으나 뒤에 싯다르타가 正刻(正覺)에 到達하여 佛敎를 펴게 되자 스스로 나아가 篤實한 歸依者(歸依者)가 되었다. 76歲 或은 97歲까지 살았다고 한다.

마야부인 [ 編輯 ]

摩耶夫人

싯다르타의 生母(生母)인 摩訶摩耶(Mahamaya)를 말한다. 九里性(拘利城)의 執政官 先覺長子(善覺長者)의 딸로 태어나 이웃 나라 淨飯王의 王妃가 되었다. 오랫동안 子息을 낳지 못하다가 45歲에 싯다르타를 孕胎하여 當時 印度의 習慣에 따라 親庭에 가서 解散하기 위하여 구리性으로 가는 途中 룸비니의 숲속에서 싯다르타를 낳았다고 한다. 싯다르타의 出産 後 7日 만에 죽었다.

룸비니원 [ 編輯 ]

Lumbini園

중인도 카필라바스트(Kapilavastu:迦毘羅城)에 있었던 任員(林園). 佛陀가 誕生한 聖地로 되어 있으며 오랫동안 그 素材가 알려지지 않았으나 1897年 네팔국의 南쪽 룸민디에서 아쇼카왕이 룸비니를 訪問한 記念石柱(記念石柱)가 發見되어 그 位置가 判明되었다.

出家 以前의 불타 [ 編輯 ]

出家以前-佛陀

불타는 迦毘羅城의 王子로 태어났다. 經典에 依하면 그는 生後 7日 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姨母인 마하派사파뎨의 손에 자랐다고 한다. 그는 性을 고타마(Gautama), 이름을 싯다르타(Siddhartha)라고 하였는데 이는 '所願成就'라는 뜻을 지닌 것으로 父王(父王)의 한없는 愛情이 담긴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작은 나라이긴 하지만 王子였던 그의 少年時節은 物心兩面에 걸쳐 幸福하였다. 어릴 때부터 그는 武藝에 關한 敎育을 받았으나 冥想을 즐기는 폭넓은 性格의 主人公이었다고 한다. 커서 外四寸인 야쇼다라 公主와 結婚하여 아들 라후라를 얻었는데 그는 이때부터 끊임없이 出家하기를 希求하게 되었다.

그 動機는 일찍부터 兆朕이 보이고 있었다고 하나 主要한 原因은 宮廷生活의 形式的 幸福에 젊고 純粹한 佛陀가 견디지 못하였던 데에 있었던 듯하다.

아울러 일찍 生母를 여읜 日課 나아가서는 生(生)에 對한 보다 原初的인 會議가 作用한 것으로 생각된다. 佛殿에는 젊은 날의 佛陀가 人生의 無常함에 눈떠가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傳해주고 있다.

出家 [ 編輯 ]

出家

佛陀의 出嫁에는 여러 가지 動機가 重疊되어 作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佛陀의 마음을 가장 强力하게 움직여 그로 하여금 끝내 家族의 愛情과 紐帶關係를 斷絶하고 王國을 떠나가게 한 것은 無常한 이 世上의 괴로움을 어떻게 解決할 것인가 하는 道(道)를 追求하려는 끊임없는 情熱이었다. 佛殿에 있는 四門遊觀(四門遊觀)의 이야기는 盧(老)·病(病)·사(死)·沙門(四門)의 無償高(無常苦)에 對한 그의 强烈한 自覺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불타는 人生問題에 關한 한 조금도 허술하게 생각하지 않고 眞摯하고 感受性이 銳敏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當時 印度에는 道를 닦으려 하는 者는 出家하는 風習도 있어서 아들 라후라를 얻어 後繼者에 對해 근심하지 않아도 된 불타는 29歲가 된 어느날 밤에 始終 車닉(車匿)을 데리고 白馬를 타고 城門을 빠져나갔다고 한다.

苦行 [ 編輯 ]

苦行 始終과 헤어진 불타는 淨髮(淨髮)을 하고 옷을 갈아 입은 다음 求乞을 하면서 南쪽의 마가다국(Magadha國)을 向하여 갔다.

佛陀가 찾아간 이 나라 首都 라자 그리下(Raja­grha:王舍城)는 當時 政治·經濟의 中心地였고 많은 修道者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여기에서 불타는 婆羅門敎의 行者(行者)로부터 요가를 배웠으나 精神的인 滿足이 없었으므로 다시 繼續하여 마지막으로는 네란쟈나강(Nairanjananati江:尼連禪河) 附近에서 斷食과 不眠의 苦行을 繼續하였다. 이 期間이 6年 동안이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肉體的인 苦行도 效驗이 없음을 알고 이를 그만두었다.

이때에, 只今까지 苦行을 같이하던 다섯 사람의 修道者가 떠나갔으나 그는 沐浴을 하고 心身을 맑게 하여 마을 處女가 갖다 준 젖과 粥을 마시고 體力을 回復한 다음 다시 부다가야 近處에 있는 나무 아래에 앉아 조용히 內官(內觀)의 苦行을 繼續하였다. 이 苦行은 一切의 功利的 觀念을 버리고 自己 마음 속에 있는 欲望을 끊어 없애며 世界를 있는 그대로 보고자 하는 立場이다. 이 길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佛陀의 道를 닦는 마음을 挫折시키려고 달려드는 魔王(魔王)들과의 싸움을 그린 佛殿에 잘 나타나 있다.

聖徒 [ 編輯 ]

成道

佛殿에 따르면 불타는 35歲의 해 12月 8日 이른 새벽(南方佛敎의 傳說에는 바이샤카月의 滿月이 된 밤)에 드디어 '大覺(大覺)'을 이루고 生·노·病·社의 本院을 斷滅(斷滅)하는 確信을 얻게 되었다.

이것은 어떠한 煩惱(煩惱)에도 흔들리지 않는 絶對靜寂(絶對靜寂), 卽 涅槃(涅槃)의 世界를 體現(體現)한 것이며 올바른 自覺, 卽 正覺(正覺)을 얻어 눈을 뜨게 된 者, 卽 불타(佛陀)가 되었다는 自己革新의 一大 轉換이었다. 佛敎는 이 自覺을 얻은 者, 卽 佛陀의 體驗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菩提樹 [ 編輯 ]

菩提樹

觱發라나무 또는 아슈바타라고도 한다. 佛陀가 이 나무 아래에 坐禪(坐禪)을 하여 正刻(正覺:菩提=菩提樹라고 일컬어지게 되었다.

佛陀가 깨우침을 얻은 菩提樹는 네란쟈나강의 物價에 있었다고 하며, 佛陀 正覺(正覺)의 考査에 關聯되어 이 땅을 부다가야라고도 하였다. '步臺數'라고도 發音한다.

初戰法輪 [ 編輯 ]

初轉法輪

聖徒 後의 불타는 한동안 스스로 깨달음의 境地를 즐기고 있었으나 얼마 後에 이러한 法樂(法樂)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누어주고자 于先 지난날에 같이 苦行을 하던 다섯 사람의 修行者(修行者)들을 敎化하기 위하여 바나레스 郊外의 鹿野苑(鹿野苑)을 訪問하였다. 그들 다섯 사람은 苦行을 그만둔 佛陀를 輕蔑하였으나 드디어 佛陀의 說法에 感化되었다. 이때에 불타는 快樂과 禁慾의 兩極端을 排除한 中道의 立場에서 說敎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佛陀가 성도를 한 後 最初로 行한 說法(說法)을 初戰法輪이라고 한다. 法輪을 前(轉)한다 함은 法을 說破하고 그 實現에 努力한다는 뜻이다. 이 初戰法輪에 依하여 佛陀의 弟子인 5人의 比丘(比丘)가 나타나게 되어 불(佛)·法(法)·承(僧)의 佛敎 敎團 成立條件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顚倒 [ 編輯 ]

傳道

初戰法輪은 佛敎 傳道의 第一聲이었으며 同時에 佛陀의 入滅(入滅)에 이르기까지의 45年間에 걸친 不斷한 說法의 始作이었다. 불타는 王舍城(王舍城)과 사위성(舍衛城)을 中心으로 比較的 넓은 範圍에 걸쳐 說法(說法)을 해나갔다. 佛陀의 가르침은 深遠한 것이었으며 相對에 따라서 問答 形式과 比喩·因緣舌禍(因緣說話)를 活用하고 平易한 말로 親切을 다하여 說法하였으므로 차차 弟子가 불어나서 經濟的으로 佛陀를 돕는 篤實한 歸依者度 나타나게 되었다.

入滅 [ 編輯 ]

入滅

80歲의 高齡이 될 때까지 불타는 說法을 그치지 않았는데 파바視(市)에서 받은 供養(供養)李 잘못되어 甚한 異質을 앓더니 드디어 쿠시나가라의 땅에서 入滅하였다. 病이 危篤함을 깨달은 불타는 最後의 沐浴을 마치고 사라(沙羅)나무의 숲속으로 들어가 머리를 北쪽에 向하고 오른쪽으로 누워 발을 포갠 다음 밤中에 弟子들에게 最後의 가르침을 편 後 조용히 入滅하였다 한다. 이 날은 紀元前 383年 2月 15日(南方佛敎에서는 베사카月의 滿月의 밤)이었다고 한다.

敎壇의 發達 [ 編輯 ]

僧家의 發生 [ 編輯 ]

僧迦-發生

佛敎의 敎團(敎團)을 僧家(Sa­maha)라고 한다. 이를 弱해서 勝(僧)이라고도 하고 또 和合中(和合衆)이라고도 하며, 佛陀의 가르침을 中心으로 모이게 된 사람들의 集團을 말한다. 여기에는 當然히 한 集團을 維持하고 統制하는 制度와 方式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나 佛敎 敎團의 境遇 처음부터 어떠한 制度가 이루어지고 組織된 것은 아니었다. 鹿野苑(鹿野苑)에서의 初戰法輪(初轉法輪)에 依하여 다섯 사람의 比丘를 弟子로 삼은 以來 佛陀에 歸依하는 사람들이 뒤를 이어 自然히 佛陀를 中心으로 하여 하나의 集團이 自然發生的으로 생가게 되었다. 그들은 修道를 위하여 淸貧과 儉素를 根本으로 하고 雨季(雨季) 때의 屋內生活을 除하고는 여러 곳을 遍歷하면서 托鉢生活을 하였으므로 그 가운데 自然히 그들의 生活을 規制하는 規約이 생기게 되었다.

佛陀의 가르침에는 敎理로서의 法(法)과 個人이나 集團을 規制하는 율(律)이 있다. 遠視僧伽에는 그리 많은 戒律이 있었던 것은 아니나 차차 敎壇의 統制가 이루어지고 組織化가 進行되었다. 또 僧家 밑에는 敎壇을 經濟的으로 支援하는 在家信者(在家信者)가 增大되어갔음도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 이들 中에는 佛陀에게 竹林精舍(竹林精舍)를 獻呈한 마가다국의 빔비사라王과 祇園精舍(祈園精舍)를 시주한 사위성(舍衛城)의 수다타 長子(長者) 等이 있었다. 원시佛敎 敎團은 修道者인 比丘와 比丘尼(比丘尼)를 中心으로 이와 같은 在家信者를 周圍에 갖고서 漸次 發達하여 갔다. 여기에 對하여 異敎徒의 妨害와 內部로부터의 背反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佛陀의 四寸동생 테바다타는 敎團의 分裂을 劃策하다가 失敗하였다고 傳한다.

10代弟子 [ 編輯 ]

十大弟子

佛陀의 弟子들 中에는 個別的으로 뛰어난 人物이 많았다. 智慧가 第一이었던 舍利佛(舍利佛:Sariputra), 神通力(神通力)의 目犍連(Maudgalyayana), 無執着(無執着)에 透徹한 摩訶迦葉(摩訶迦葉:Mahakasyapa). 天安力(天眼力)을 가졌었다고 하는 아나率(阿那律:Aniruddha), 諸法皆空(諸法皆空)을 잘 깨우쳤다는 首補뎨(須菩提:Subbuti), 說法에 能한 富樓那(富樓那:Purnamaitrayaniputra), 討論을 잘하는 가전연(Katyayana), 지율(持律)의 優婆離(優婆離:Upali), 다문(多聞) 第一의 아난(阿難:

nanda), 行止(行持)가 綿密한 라후라(羅候羅:Rahula)는 特히 10代 弟子로 손꼽혀 傳해지고 있다.

摩訶迦葉 [ 編輯 ]

摩訶迦葉 마하카샤派(Mahahasyapa), 大迦葉(大迦葉)이라고도 불린다. 王舍城 附近 브라만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佛陀의 弟子가 되었다.

執着에 사로잡히지 않는 淸潔한 人物로서 佛陀의 信任을 받아 門下生들 中에서 上位를 차지하였다. 佛陀가 入寂한 後에는 悲歎과 動搖하는 弟子들을 統率하여 敎壇의 分裂을 막았다. 靈鷲山(靈鷲山)에서 佛陀가 꽃을 꺾어 보였을 때 오직 摩訶迦葉만이 그 뜻을 以心傳心으로 理解하고 微笑지었다는 點火微笑(拈華微笑)의 枯死(故事)는 有名하다.

第1結集 [ 編輯 ]

第一結集

佛陀의 說法은 主로 구화(口話)에 依한 것이었으므로 佛陀가 入籍하게 되자 그의 가르침의 內容이 올바르게 後代에 傳해질 것인가가 의심스러워졌다. 이에 佛陀의 敎法(敎法)을 옳게 把握해 놓지 않으면 似而非 說法이 世上에 나돌아 結局에는 正法廷率(正法正律)李 없어지게 될 것임을 두려워한 摩訶迦葉은 佛陀의 入滅 이듬해의 雨季(雨季)에 王舍城 밖의 칠엽굴(七葉窟)에 500名의 比丘를 모아놓고 佛陀의 가르침에 對한 結集(結集)을 擧行하였다. 結集이라 함은 여러 사람이 모여서 各自가 理解하고 把握한 佛陀의 가르침으로서 다시 敎壇이 確認하는 일이다. 이것은 佛陀가 남긴 가르침의 山일(散逸)을 막고 敎團의 理論的 根據를 마련하는 데 꼭 必要한 것이었다. 이때의 結集을 五百結集(五白結集)이라 하며, 多問題일(多聞第一)의 아난(阿難)李 警(經)을 讀誦하고 戒律을 보지(保持)함에 으뜸인 優婆離(優婆離)가 율(律)을 送出(誦出)하였다. 經이라 함은 敎理와 沙門에 關한 說法이며, 律은 行爲와 敎壇에 關한 規定이다. 그러나 이 結集으로 經過 率이 完成된 것은 아니고 제3회 後에도 몇會議 結集이 있었다.

第2結集 [ 編輯 ]

第二結集

第1結集에 있어서도 이미 新舊(新舊) 思想의 對立이 엿보이게 되었는데 佛陀의 入滅 後 約 100年이 지나게 되자 戒律에 對한 새로운 설을 提唱하는 者가 있어서 여러가지로 疑問點이 發生하여 紛糾를 일으키게 되었다. 이에 베샬里(Vaisali:吠舍離)에서 野史(耶舍)가 中心이 되어 700名의 上座部長老(上座部長老)를 모아 主로 律藏(律藏)을 編輯하고 敎壇의 統制에 힘썼다.

이를 七百結集이라고도 한다. 그後에 一說(南傳島史 等)에 따르면 이에 不服한 進步的인 比丘들이 1萬名의 多數人을 모아 獨自的인 結集을 열었다고 한다. 이를 對決집(大結集)이라 부르는데 이들은 保守的인 上佐로부터 離脫하여 大衆部(大衆部)를 形成하게 되었다.

第3結集 [ 編輯 ]

第三結集

南方에 傳해진 佛敎에 依하면 아쇼카왕臺(代), 佛滅後(佛滅後) 200年頃에 1000名의 比丘들이 모여 율(律)·警(經)·논(論)의 三藏(三藏)을 結集하였다고 하며 이를 千人(千人)結集이라고 부른다.

아쇼카왕 [ 編輯 ]

Asoka王

區(舊) 마가다국의 王統을 이은 마우리아 王朝의 第3代 王으로서 印度에 처음으로 理想的인 統一國家를 建設하였다. 王의 私的에 關하여는 王이 各地에 建立한 비의 鼻紋 外에도 傳說的 形式으로 된 아육왕展(阿育王傳)이나 아육왕頃(阿育王經)에 依하여 살펴볼 수 있다. 그는 西曆 紀元前 271年頃 王位에 오른 지 얼마 後 佛敎에 歸依하여 右바色(優婆塞:男性의 在家信徒)李 되었는데 訶陵家國 征服의 無慈悲한 戰爭을 體驗한 뒤에는 더욱 깊이 佛敎에 歸依하게 되었다. 卽位 後 約 10年이 되어 '三菩提(三菩提)'의 正刻(正覺)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며 以後 한層 더 佛敎에 精進하여 佛敎를 政治에 具現해보려고 努力하였다.

佛敎를 널리 펴기 위하여 不法의 대관을 두어 各地를 巡廻시키고 小아시아·그리스·스리랑카 等의 먼 곳에는 使者(使者)를 보냈다. 또한 佛敎的 生活道德을 설炮하는 法則(法勅)을 磨崖(磨崖)와 석주(石柱)에 새기고 病院과 斜塔(寺塔)을 建立하였으며 藥草를 栽培케 하기도 하였다. 南方佛敎에서는 王의 統治下에 第3回結集이 있었다고 하나 북전(北傳)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미 王의 時代에 佛敎 敎團은 分裂相을 보이고 있었고 王이 歸依한 것은 上座部 系統의 佛敎였다. 王은 많은 國庫金을 佛敎의 保護에 使用하였으므로 晩年에는 國家經濟가 窮乏해지고 王 自身도 別로 행복스럽지 못하였으나 最後까지 佛敎에 對한 原罪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但只 佛敎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宗敎에 對하여도 寬容을 베풀었으며, 佛敎는 이 時代에 王의 前領土와 周邊에 擴大되었다.

部派佛敎의 展開 [ 編輯 ]

根本2部의 分裂과 部派佛敎의 成立 [ 編輯 ]

根本二部-分裂-部派佛敎-成立

佛陀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定立하기 위하여 行한 第1回結集이 佛陀의 가르침에 忠實하려 하였기 때문에 保守的 傾向을 지니게 된 것은 當然한 일이었다. 이러한 保守的 傾向을 가진 長老比丘(長老比丘)에 對하여 進步的인 생각을 가졌던 比丘들은 不滿을 품게 되었다.

第1回의 칠엽굴(七葉窟)에서의 結集에 對하여 富樓那(富樓那)가 窟外結集(窟外結集)이라는 것을 열어 異議를 期하였던 것과 같이 佛敎 敎團의 밑바닥에서는 新舊의 두 傾向이 對立하게 되었다. 佛陀入滅 後 110年頃 進步派의 比丘 발도子(Vajjiputtaka)는 戒律에 對한 새로운 見解를 내세웠으나 上佐長老들은 이를 排斥하였다. 이리하여 兩者間의 틈은 더욱 벌어져서 進步派의 比丘들은 마침내 自派들만의 結集을 行하게 되었다. 여기에 많은 比丘들이 모이게 되어 이를 對決집(大結集)이라 하였으며, 여기에 參加한 사람들을 大衆部(大衆部)라고 하여 上佐長老의 上座部(上座部)와 對立하게 되었다. 이것을 根本2部의 分裂이라고 하며, 이로써 佛敎 敎團은 表面上 2代(二大)派로 分裂되었다. 이어서 여러 갈래의 分裂이 일어나 部派佛敎의 時代를 맞게 되었다.

小乘20部 [ 編輯 ]

小乘二十部

根本2部의 分裂이 가져온 分裂의 기운은 敎理上의 見解, 指導者間의 對立, 地理的 條件 等으로 인하여 더욱 深化되어 불타 入滅 後 約 200年 뒤에는 大衆部 系統으로부터, 그리고 그 뒤에 이어서 上座部 系統으로부터 敎壇의 派生的인 分裂이 促進되었다. 이 여러 갈래로 分裂하는 모습과 派의 이름 그리고 分派의 數에 關하여는 여러 說이 있다. 一般的으로 小乘20部로서는 大衆部 系統으로서 大衆部(大衆部)·一說部(一說部)·설出世富(說出世部)·계윤部(鷄胤部)·다문부(多聞部)·설家部(說假部)·第多産婦(制多山部)·北山主婦 (北山住部)의 9部와 上座部 系統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雪山部(雪山部)·독자부(犢子部)·法上部(法上部)·縣主婦(贅胄部)·정량부(正量部)·密林産婦(密林山部)·火支部(化地部)·법장부(法藏部)·음광부(飮光部)·經量部(輕量部)의 11部, 合計 20部를 들 수 있다. 이들의 成立 時期는 大略 西曆 起源 前後였을 것으로 보인다.

阿毘達磨 [ 編輯 ]

阿毘達磨

阿毘達磨(Abhidharma)라고 함은 논(論)이라고도 불리는 것처럼 經典의 說明과 註釋을 意味한다. 聖殿으로서의 警長(經藏)과 律藏(律藏)은 佛敎가 여러 剖破로 分裂되기 以前에 一旦 成立되어 있었으나 이것에 對한 說明과 註釋이 하나의 獨立된 形式으로 論藏(論藏)으로서 整理된 것은 部派佛敎의 時代에 들어가서부터였다. 各剖破는 自派의 權威를 主張하기 위하여 各各 獨自的인 聖殿을 編纂하게 되었으나 이들은 불타시대의 볼교의 純粹性으로부터 멀어진 것으로 되었으며 同時에 從來의 經典에 對하여 쓸데없는 解釋學的 傾向을 더욱 心懷시키기에 이르렀다. 이 阿毘達磨적 傾向은 佛敎를 出家 中心의 隱遁的 學問佛敎로 만들어 불타 在世時에 있었던 律動的인 힘을 잃게 하였다. 이러한 것에 對한 反省으로서 擡頭한 것이 大乘佛敎인데 이 大乘佛敎徒 뒤이어 논이 만들어지게 되었으며 이를 部派佛敎의 小乘論에 對한 大乘論이라고 한다.

카니시카王 [ 編輯 ]

Kanishka王

中央 아시아 大月氏族(大月氏族)으로부터 일어났던 쿠샨族은 西曆 1世紀 中盤에 西北印度에 進入하여 勢力을 擴大하고 大帝國을 建設하였다. 카니시카王은 이 나라의 3代째 王으로 2世紀 前半의 사람이다. 그는 처음에 조로아스터교의 信徒였다고 傳해지나 後에 佛敎에 歸依하여 아쇼카왕을 이은 佛敎保護者가 되었다. 王의 周邊에는 아습朴驅使(馬鳴)王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長老 파르슈바(脇尊者)가 있어서 이들로부터 많은 感化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國內 各地에 많은 佛塔과 寺院을 建立하였다. 쿠샨 王朝 時代의 文化는 그리스·로마·이란 等으로부터 들어온 西方文化와, 中央과 中央 아시아에서 온 東方文化의 影響을 融合하게 되었으므로 카니시카王으로부터 그의 아들인 後비슈카王 時代에 걸쳐, 文化思想 간다라 美術이라고 불리는, 後世의 아시아 美術에 커다란 影響을 준 佛敎藝術을 形成하였다.

大乘佛敎의 成立 [ 編輯 ]

大乘佛敎의 擡頭 [ 編輯 ]

大乘佛敎-擡頭

大勝(Mahayana)이라 함은 涅槃(涅槃)의 彼岸(彼岸)에 衆生을 運搬하는 커다란 탈것을 意味한다. 當時 上座部 系統의 佛敎는 經典의 訓詁·註釋에 치우쳐 形式化되었고 僧院(僧院)에 있어서의 出家 中心의 高踏的인 獨善主義에 빠져 있었다. 이를 反省한 革新的인 比丘들과 當時에 成佛(成佛)을 以上으로 菩薩行(菩薩行)에 精進하고 있던 裁可(在家) 信者들 사이에 形式보다도 內容을 重視하고 出家와 再嫁의 區別을 超越하여 널리 社會를 救濟하려는 實踐的 信仰運動이 擡頭하게 되었다. 그들은 利他行(利他行)의 實踐을 强調하고 出世間的(出世間的)인 自己本位의 傳統的 佛敎를 小乘(Hinayana)이라 낮춰 부르고 自己들의 立場을 大乘佛敎라고 불렀다. 大乘佛敎는 불타시대의 根本精神 回復을 志向하고 새로운 時代에 適應하려는 것으로서 形式化된 部派佛敎의 自己反省으로부터 出發한 것이다.

密敎의 擡頭 [ 編輯 ]

密敎의 擡頭 [ 編輯 ]

密敎-擡頭

印度는 本來 多神敎의 나라였다. 佛敎가 成立되기 以前에 이미 婆羅門敎(婆羅門敎)의 諸神(諸神)을 崇拜하였으며, 災殃을 막고 福을 받기 爲한 요가修行과 성구(聖句)·만트라(眞言)의 口誦(口誦), 불속에 物件을 던져넣으면서 하는 여러 種類의 起源 따위가 行해지고 있었다. 努力에 依하여 正覺(正覺)에 이를 것을 理想으로 하는 佛陀의 가르침은 이들과는 背馳되는 것이었으나 꽤 오래 前부터 佛敎 속에 婆羅門敎의 여러 神들이 守護神으로서 받아들여졌고 또 數濠洲(守護呪) 따위가 讀誦되고 있었다. 7世紀에 들어와서 華嚴經(華嚴經) 等 大乘佛敎의 經典을 基盤으로 하여 婆羅門敎와 其他 民間宗敎의 奏法(呪法) 等으로부터 影響을 받은 密敎가 成立되었다. 密敎라 함은 陀羅尼나 만트라를 욈으로써 마음을 統一하여 正刻에 이르고자 하는 實踐的인 가르침이며 그 深奧한 境地는 外部에서 들여다보아서는 알 수가 없다는 祕密敎라는 뜻의 略稱이다. 여기에는 汎神論的인 불타관은 나타나지 않고 曼陀羅(曼茶羅)와, 外面 靈驗을 얻게 된다는 陀羅尼(陀羅尼), 植栽(息災)·阻卜(調伏)·增益(增益)을 위한 好魔法(護摩法) 等 제법(諸法)의 採用이 그 特色이다.

잡밀·純밀 [ 編輯 ]

雜密·純密

初期의 密敎思想에는 제존(諸尊)도 整理되어 있지 않았으나, 7世紀 後半에 들어와서 大日經(大日經)과 金剛頂經(金剛頂經)李 成立하여 密敎의 理論的 根據가 整備되자 密敎敎理의 實踐에 依한 聖徒(成道)가 强調되었다. 이것을 順密敎라 稱하고 그밖의 것을 잡밀이라고 하여 區別한다. 純밀은 金剛乘(金剛乘)이라고도 한다.

左道密敎 [ 編輯 ]

左道密敎

密敎는 婆羅門敎 或은 힌두敎의 地盤을 利用하여 퍼지게 되었는데 뒤에는 힌두敎의 一派인 시바의 女神 샤크티(性力)를 崇拜하는 샤크티派 따위와 結付되어 輪座禮拜(輪坐禮拜)와 性的 恍惚境 속에서 解脫을 얻으려는 左道密敎(탄트라 佛敎)라고 하는 것으로 기울게 되었다. 이것은 人間의 愛慾과 快樂을 肯定하고 卽身成佛(卽身成佛)을 가르치려 한 것이었으나 引渡의 民衆 사이에 潛在해 있었던 性(性) 崇拜의 信仰과 겹쳐서 非外(卑猥)스러운 性的비의(性的秘儀)에 떨어지는 수가 많았다.

印度佛敎의 滅亡 [ 編輯 ]

印度佛敎-滅亡

굽타 王朝(270∼470年頃)를 中心으로 하여 最盛期를 맞았던 大乘佛敎는 뒤이어 高原(高遠)韓 學問과 思想體系로 理論化되어 宗敎로서 民衆으로부터 멀어지는 傾向이 있었다. 한便 密敎는 民衆의 現實的 要求에 副應하는 것이었으나 힌두敎的 色彩가 剛해짐에 따라서 佛敎 本來의 모습은 稀薄해지고 다시 左道火(左道化)되어 墮落의 길을 걸음으로써 當時 이슬람 勢力에 對抗하고 있던 印度 帝王(諸王)의 民族意識과 結付되어 復興期에 있었던 傳統 婆羅門敎-힌두敎 앞에서 後退를 當하지 않으면 안 될 狀況에 있었다. 特히 12世紀末부터 13世紀初에 걸쳐 排他的 一身注意를 내건 이슬람 勢力이 侵入하여 佛敎의 中心地였던 비하르地 房을 占領하고 密敎의 本據地였던 비크라마시라 寺院을 비롯하여 많은 佛敎寺院을 破壞하고 많은 僧侶를 죽였다. 이렇게 하여 佛敎는 內外的으로 衰退가 促進되어 印度 땅에서 衰亡하게 되었다. 오늘날 아샘이나 벵골 地方에서 少數의 佛敎徒가 殘存해 있으며 또한 一部에서는 復興運動度 일어나고 있다.

아시아 帝國에의 傳播 [ 編輯 ]

南方佛敎 [ 編輯 ]

南方佛敎

아시아의 남房地域에는 일찍부터 佛敎가 傳播되었으나 그 系統과 形態, 地域에 따라 大略 스리랑카를 中心으로 한 미얀마·타이 等地의 파리 佛敎, 中國 佛敎의 影響을 받은 베트남 佛敎, 오늘날 遺跡만을 찾아볼 수 있는 캄보디아 佛敎, 南海 佛敎의 4가지로 나눌 수 있다. 오늘날 신봉되고 있는 아시아 南方 여러 나라의 佛敎는 一般的으로 保守的 傾向이 强하고 원시佛敎의 傳統을 이어받아 戒律을 嚴格히 지키는 特色을 갖고 있다.

南方上座部의 佛敎 [ 編輯 ]

南方上座部-佛敎

아쇼카왕은 布敎師를 各地에 派遣하였으므로 王이 歸依하였던 上座部 佛敎가 아시아 南方 各地에 퍼지게 되었다. 그 據點이 된 곳은 스리랑카였으나, 現在는 미얀마·타이·캄보디아·라오스 等地에서 行해지고 있다. 이들 地域의 佛敎는 共通的으로 파리어(巴里語)의 聖殿을 根本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파리佛敎라고도 한다. 이것은 比較的 오래된 形態를 갖고 있기 때문에 원시佛敎의 硏究를 위해서 重要한 資料가 된다.

스리랑카 (실론)의 佛敎 [ 編輯 ]

Srie­Lanka-佛敎

西曆 紀元前 3世紀 아쇼카왕의 王子로 上座部의 長老였던 마힌다(Mahinda)는 王命에 依하여 실론섬에 派遣되어서 섬의 支配者를 歸依시키려고 아누라다城에 大刹(마하비하라)을 建立하였다. 그의 누이同生 商家彌陀(Sangamitta)도 比丘尼가 되어 실론에 건너가 佛敎를 布敎했다고 한다. 이것이 실론에 上座部佛敎가 傳하여진 最初의 일이었는데 西曆 紀元前 1世紀頃에 바아다가마니 아바야왕이 無畏山寺(無畏山寺)를 建立함으로써 大使派(大寺派)와 對立하게 되고 뒤에 다시 祇陀林사파(祇陀林寺派)가 分離되어 실론의 佛敎는 3波가 定立하게 되었다.

5世紀가 되면서 부다告祀를 비롯한 고학자가 나타나서 敎學의 基礎가 튼튼해졌다. 保守的인 上座部佛敎의 大使派에 對하여 다른 剖破의 比丘들에게도 開放的이었던 무外産사파(無畏山寺派)는 한때 優勢를 보였으나 11世紀 以後에는 異民族이 侵入하고 佛敎가 衰退하자 歷代 王은 佛敎復興政策을 取했는데 特히 13世紀에 派라크라마바侯王은 大使派(大寺派) 復興에 힘써 上座部佛敎가 다시 盛行하게 되었다.

부다枯死 [ 編輯 ]

Buddhaghosa

中部 印度 부다가야 地方 사람으로 430年頃 실론에 건너간 上座部 系統의 佛敎學者. 一說에 依하면 브라만 出身이라고 하며, 佛敎에 歸依하여 三藏(三藏)을 배웠다고 한다.

실론에 건너간 後 大使(大寺)에 居住하면서 그 절에 所藏되어 있는 聖殿을 파리語로 飜譯하기를 힘쓰고 또한 파리三藏에 對한 註解를 完成하였다. 晩年의 活動에 對하여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印度에 돌아왔다고도 하고, 미얀마로 갔다고 傳해진다. 오늘날의 스리랑카 佛敎 形態는 이러한 敎學者(敎學者)들에 依하여 大略 形成되었다.

미얀마의 佛敎 [ 編輯 ]

Burma-佛敎

오랜 옛날부터 금이 많이 나는 나라로 알려진 미얀마의 佛敎는, 아쇼카왕의 傳道師가 건너가 布敎한 것이라고도 하고, 부다고사가 실론으로부터 와서 前導한 것이라고도 한다. 그리하여 옛날부터 上座部 系統의 佛敎가 傳해졌던 듯하며, 後에 大乘佛敎가 盛行하였으나 얼마 뒤에 聖曆崇拜(性力崇拜)의 外交的(外敎的) 要素가 加味되면서부터 墮落하고 말았다. 11世紀에 파간 王朝의 亞나와라타王(Anawarata王)李 國土를 統一하고 聖曆崇拜의 宗敎를 追放한 다음 特히 戒律을 重視하는 上座部 佛敎를 南方으로부터 輸入하여 保護하였다. 以後에 실론系의 上座部 佛敎가 勢力을 떨쳐서 파간 王朝 時代의 全盛期에는 미얀마

佛敎의 特色인 佛塔(파고다)과 僧院(僧院)李 많아지게 되었고, 王朝가 바뀌어도 歷代王들은 모두 佛敎에 熱心히 歸依하였으므로 더욱 發達하게 되어 英國 統治下에서도 이러한 傳統은 그대로 持續된 채 오늘에 이르렀다. 버마의 佛敎는 一般的으로 戒律이 嚴格하며 特히 이를 强調하는 술라간디(Sula­gandi)派와 이와는 見解를 달리하는 마하간디(Maha­gandi)派로 갈라졌다.

타이의 佛敎 [ 編輯 ]

Thailand-佛敎

타이에는 8世紀頃에 大乘佛敎가 傳해졌으나, 11世紀 中盤에 미얀마의 亞나와라타 王의 侵攻과 함께 上座部 系統의 小乘佛敎가 크게 일어나 大乘佛敎를 쫓아냈다. 그後 13世紀 末에는 실론으로부터 上座部 佛敎가 輸入되어 戒律 中心의 小乘佛敎가 타이 佛敎의 主流를 이루게 되었다. 國王은 代代로 佛敎에 歸依하며 特히 差異크 王朝(1782年 創立)의 라마 1世와 라마 4世는 寺院을 建立하고 經傳을 編纂하며 乘風(僧風)의 刷新을 圖謀하고 佛敎의 保護와 興隆(興隆)에 힘썼다. 國民도 佛敎에 歸依하여 男子는 成人이 되기 前에 한 次例 僧籍에 들어가 寺院에서 修道生活을 體驗할 것을 理想으로 삼고 있는 强力한 社會的 傳統이 있으며, 또한 사람들은 이러한 修道僧을 尊敬하고 供養하는 것을 無上의 기쁨으로 하고 있다. 現在 타이에는 信仰의 自由가 保障되어 있지만 佛敎는 國敎이며 國民의 94% 假量이 佛敎徒이고 타이 文化의 全般에 걸쳐 佛敎의 影響을 剛하게 받고 있다.

캄보디아의 佛敎 [ 編輯 ]

Cambodia-佛敎

國民의 大多數가 小乘佛敎의 信者이다. 住民의 大多數는 크메르族으로 中國에서는 이들을 扶南(扶南)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다른 東南아시아와 마찬가지로 大乘佛敎와 힌두敎 等 印度 文化의 影響을 받고 있었다. 크메르 王朝의 歷代王은 都邑地인 앙코르에 많은 寺院을 建立하였다. 有名한 앙코르 와트(Angkor­Wat:都城寺院)는 12世紀初 수리야바르만 2歲가 힌두敎의 비슈누神을 위하여 建立한 것으로 南方佛敎 建築의 精髓(精髓)로 일컬어진다. 1181年에 卽位한 자야바르만 7世는 熱烈한 佛敎 信者로서 스리랑카로부터 佛敎를 輸入해 布敎에 힘썼다. 王은 印度의 아쇼카왕을 본받아 病院을 세우는 等 많은 佛敎的 社會事業을 일으켰으나 그後 이 王國은 衰運의 길을 걷게 되어 크메르 佛敎도 衰退하게 되었다. 13世紀末에 크메르가 타이에 依하여 征服되었기 때문에 宗敎 또한 타이 佛敎의 影響을 크게 받게 되었다.

南海佛敎 [ 編輯 ]

南海佛敎

옛날에 자바·수마트라·말레이시아 等地에 繁榮하던 佛敎를 통틀어 南海佛敎라고 한다. 처음에는 小乘佛敎가 行하여졌으나 뒤이어 大乘佛敎가 勢力을 얻게 되고 나중에는 密敎(密敎)로 옮겨져서 8世紀를 頂點으로 極히 隆盛하였다. 그러나 現在 大部分 인도네시아라고 불리는 이 地域은 이슬람敎가 支配하고 佛敎徒는 約 150萬에 不過하다. 다만 뛰어난 佛敎 彫刻 等을 남긴 자바의 보르브도르 大塔(大塔) 等이 옛날 佛敎 全盛時代의 面貌를 오늘에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베트남의 佛敎 [ 編輯 ]

Vietnam-佛敎

印度支那 半島의 東쪽에 位置한 베트남은 中國人으로부터 '越南(越南)'이라고 일컬어지며 한(漢)時代부터 中國 文化의 影響을 받아왔다. 베트남의 宗敎는 武術(巫術)을 中心으로 한 各樣各色의 民間 信仰을 갖고 있었는데 이 위에 中國으로부터 佛敎·儒敎·道敎 等이 輸入되어 퍼지게 되었다.

特히 佛敎는 6, 7世紀頃에 들어와서 뒤에 腺腫(禪宗)을 中心으로 하는 中國風 大乘佛敎가 盛行하였다. 19世紀 以後 프랑스 植民地 政策 아래에서는 가톨릭 勢力이 進出하게 되고 또 第2次大戰 後의 獨立과 南北 베트남으로의 分裂, 이에 따른 國內戰爭이라는 非宗敎的 기운 속에서 佛敎 勢力은 次次 衰退해가는 傾向이 있었고, 더욱이 남베트남 共産化와 이에 따른 南北 베트남 共産政權의 統一로 인해 宗敎의 自由는 認定되지 않고 있으나 아직도 80%가 佛敎徒로서 多數를 占하고 있다.

佛敎의 북전(北傳) [ 編輯 ]

서역의 佛敎 [ 編輯 ]

西域-佛敎

西域은 中國에 隣接한 西方 地域을 總稱하는 것으로 普通 파미르 高原, 톈산(天山)·쿤룬(崑崙) 量産맥에 둘러싸인 타림盆地의 一帶를 中心으로 이에 連續된 투르케스彈(Turkestan) 地域을 包含하여 가리킨다. 이 地方은 東西交通의 要衝地로서 옛날부터 文化가 꽃피게 되어 한대(漢大)에 있어서는 西域 36國(西域三十六國)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 地域에 佛敎가 傳來된 것은 아쇼카왕이 보낸 佛敎布敎社에 依하여 간다라나 캐시미르의 西北印度 地方에 盛行하던 佛敎가 흘러들어간 것이다. 西域(西域)의 불교국으로서 예로부터 大月氏國(大月氏國:토카라)·安息國(安息國:파르티아)·右前(코彈)·江擧國(康居國:호르기스)·九字(龜玆:쿠차) 等이 알려졌으나 이들 나라의 佛敎는 印度로부터 들어온 그대로의 것이 아니라 西域의 重要한 文化에 收容되어 變容된 西域佛敎이다. 또한 이것이 據點이 되어 佛敎를 다시 한(漢)의 中國사람들에게 傳播하는 구실도 하였다.

中國에 佛敎를 傳播한 布敎勝과 逆境勝(譯經僧)은 大部分 西域人이었다는 點에 注目하지 않으면 안 된다. 西域 여러 나라에 佛敎가 퍼지게 되면서 同時에 조각·繪畫·刺繡·佛塔乾燥 等의 佛敎美術이 發達하게 되었다. 그러나 大洋航路의 發達에 따라 東西交通의 要衝地로서의 西域의 重要性은 喪失되고 다시 9世紀 以後 이슬람敎徒의 侵略에 依하여 투르케스彈 地方이 荒廢해진 것 等으로 말미암아 西域의 佛敎文化는 오랫동안 忘却과 모래 속에 묻혀버리게 되었다. 19世紀 中盤부터 이 地方에 對한 學術探査가 始作되어 스웬 헤딘(1865∼1952), 오레르 스타인(1862∼1943), 폴 펠리오(1878∼1945) 等에 依하여 西域佛敎의 遺跡과 古文獻 等이 發見되었다.

티베트의 佛敎 [ 編輯 ]

Tibet-佛敎

險峻한 山岳과 거친 氣候를 가진 티베트에는 예로부터 民族宗敎인 본(Bon)교가 있어 降魔와 豫言, 占卜(占卜) 等의 呪術信仰이 盛行하였는데, 7世紀頃 라사를 中心으로 王朝를 開創한 손센 감포王(569∼650)은 佛敎의 篤實한 信者로 重臣(重臣) 톤美 삼보打를 印度에 派遣하여 佛敎를 輸入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티베트 佛敎 傳來의 公式的인 經緯이고, 佛敎經典의 傳來에 따라 티베트 文字가 만들어졌다. 그 後 치스롱 데트山王(755∼781)은 佛敎를 國敎로 하고, 많은 佛僧(佛僧)을 印度로부터 招聘했다. 이 中에는 左道密敎(左道密敎) 祕法에 能한 파드마 삼바바(蓮華上坐師:티베트 이름으로 파드마 쥰네), 샨타라크試打(寂護, 티베트 이름은 詩바쏘) 等이 있었다. 이리하여 티베트의 佛敎는, 印度佛敎 가운데에서도 特히 聖曆崇拜(性力崇拜) 傾向이 剛한 左道密敎, 卽 탄트라佛敎가 固有信仰인 本校의 地盤 위에서 發達한 것으로, 라마교라고 불린다. 라마(Bla­ma)라 함은 구루(Guru), 卽 스승(師)을 뜻하는데 불(佛)·法(法)·承(僧)의 3報(三寶)에 法을 傳하는 社(師)를 더하여 4報(四寶)라 하고, 여기에도 歸依한다. 이러한 特色을 外部에서 評하여 라마교라고 부르게 되었다. 10世紀에 들어와서 티베트 佛敎가 받아들인 密敎의 性的(性的) 要素를 排除한 카담派가 成立되었고, 이들로부터 分離된 사키야파의 파스파(1239∼1280)는 라마교의 敎頭(敎頭)임과 同時에 政權을 掌握하고 法王國家를 建設하여 勢力을 伸張하였다. 이 무렵에 라마교는 티베트와 같은 遊牧民族인 蒙古人 社會에도 퍼지게 되었다.

쏭카파의 改革 [ 編輯 ]

Tsong­ka­pa-改革

15世紀가 되면서 쏭 카파(Tsong­ka­pa, 1357∼1419)에 依한 라마교의 改革이 이루어져 現世의 利益을 비는 呪術(呪術)李 排斥되고 戒律의 遵守가 强調되었다. 이 파는 라사의 東南쪽에 있는 街丹沙(寺)를 根據로 하여 黃帽派(黃帽派)라고 불렀으며 從來 라마교의 紅帽派(紅帽派), 遠視 本校의 黑帽派(黑帽派)와 區別되었다. 戒律을 重視한 黃帽派는 對處(帶妻)를 認定하지 않았으므로 輪廻(輪廻)에 依한 前生설(轉生說)로 後繼者를 얻으려 하였다. 뒤에 黃帽派는 라사의 포탈라社(寺)와 市價歲의 他市룬褒姒(寺)로 分裂하여 쏭카파(宗喀巴)의 弟子 둘이 各各 라마의 稱號를 가지고 이곳을 根據로 하여 法脈(法脈)을 維持하였다.

달라이 라마 [ 編輯 ]

Dalai Lama 라사의 포탈라社(寺)를 根據로 하는 쏭카파의 後繼者들. 달라이라고 함은 蒙古語로 '바다(海)'를 意味한다. 16世紀末 제3대의 소남 甘草(1543∼1588)가 蒙古의 알탄韓(汗)으로부터 달라이 라마라는 尊稱을 받게 되면서부터 歷代의 라마 全體의 稱號가 되었다. 달라이 라마는 代代로 前生說(轉生說)에 依하여 繼承되고 活佛(活佛)·觀音菩薩의 齋生으로서 崇拜를 받으며, 但只 宗敎世界뿐만 아니라 政權도 掌握하여 티베트의 最高 支配者로 君臨한다.

판첸 라마 [ 編輯 ]

Pan­chen Lama

쏭카파의 高弟(高弟) 케루브의 系統을 이은 活佛로서 前生설에 依하여 代代로 他市룬褒姒(寺)에서 繼承되었다. 彌勒菩薩의 再現이라고 하여 崇拜되었으며 달라이 라마와 더불어 2代 活佛의 하나였으나 그 勢力은 달라이 라마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地域的으로는 큰 勢力을 가지고 있으며 現在까지 10臺가 내려왔다.

萬·몽의 라마교 [ 編輯 ]

滿·蒙-Lama敎

中國의 北部 및 東北部의 變更地方에는 遊牧生活이 營爲되고 있었는데 住民들 사이에는 옛날부터 샤먼的인 呪術信仰이 뿌리 깊이 박혀 있었으므로 본(특히 蒙古에서 일어난 援助(元朝)의 여러 君主들은 王의 長壽와 나라의 隆盛을 祈願하는 華麗한 密法(密法)에 魅惑되어 歷代 王이 라마교를 信奉하고 드디어는 그 廣大한 領土가 라마교의 影響下에 들어가게 되었다. 元나라가 命에 依하여 멸망당하자 中國에 있어서의 라마교는 衰退해지고 北方의 蒙古人들 間에는 이것이 民族主義의 물결을 타고 民衆 속에 널리 퍼져갔다. 또한 東北部에서도 滿洲王朝인 淸朝(淸朝)가 代 티베트 政策으로 라마교를 政策的으로 保護하였으므로, 베이징을 비롯하여 선양(瀋陽)과 러허(熱河) 等地에 라마의 廟堂(廟堂)李 세워지게 되었다. 特히 러허 承德(承德)에 있는 寶唾宗乘至妙(普陀宗乘之廟)는 포탈라 寺院을 模倣한 順 티베트式 建築物로서 이를 保護하였던 乾隆帝(乾隆帝)의 信仰을 斟酌할 수 있게 한다.

中國의 佛敎 [ 編輯 ]

佛敎의 秒前 [ 編輯 ]

佛敎-初傳

中國에 佛敎가 傳來되게 해준 端緖가 된 東西交通路의 開拓은 傳한(前漢)시대에 이루어졌다. 前漢의 無題(武帝, BC 140∼BC 87)는 西域 여러 나라와의 交易 루트를 처음으로 開拓하였는데 이것은 各其 獨自的인 高度의 文化를 갖는 中國과 印度를 連結시켜 주는 結果가 되었다. 儒敎나 婆羅門敎는 民族宗敎的 色彩가 濃厚하여 國境을 넘어 다른 民族에게 傳해지는 일은 없었으나 傳統的인 婆羅門敎를 批判·克服하고 誕生한 佛敎는 그 普遍主義的 性格으로 인하여 鄕土色이나 民族에 拘礙됨이 없이 隣近 여러 나라에 對한 布敎와 前途에 대단히 積極的이었다. 佛敎는 이미 紀元前 250年頃의 아쇼카왕 時代에 印度 國境의 北쪽을 넘어 傳播되었고 그後 차츰 中央 아시아의 沙漠에 散在한 오아시스 國家에도 浸透해 들어갔으므로 中國에의 前途는 必然的이며 時間問題였다. 排他的이며 中央偏重을 特色으로 하는 中國의 옛 記錄에도 西曆 起源 前後에 佛敎에 關한 記錄이 나타나 있다. 卽 前漢(前漢) 末期의 哀帝(哀帝) 원수원年(元壽元年:BC 2)에는 博士弟子(博士弟子)인 經路(景盧)가 大月氏(大月氏)王의 獅子 二尊(伊存)으로부터 不渡頃(浮屠經)을 口傳(口傳)받은 것(<魏略>), 或은 영평(永平) 8年(65)에 明나라 皇帝의 異腹 동생인 초왕(楚王) 영(英)李 그의 封止(封地)인 팽성(彭城:장쑤省, 江蘇省)에서 "皇帝(黃帝)·老子(老子)의 美言(微言)을 읊조리고 部處의 人事(仁祠)를 尊重하며 喪門(桑門)·右바色(優婆塞), 卽 僧俗(僧俗)의 佛敎徒를 尊重하였다"는 記錄(<後漢書>) 等이 있다. 실크 로드를 통해서 中國을 訪問하는 對象(隊商)이나 使節 中에 佛敎 信者가 있었을 것이며 이들은 또 僧侶를 同伴하여 왔을 境遇도 있었을 것이므로 西域으로부터 中國에 들어오는 入口에 該當되었던 둔황(敦惶)·장안(長安)·뤄양(洛陽) 等地의 沿邊에는 西曆 起源 前後에 佛敎가 徐徐히 傳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西域 여러 나라의 佛敎가 이 동안에 中國에 傳來된 것으로 생각되므로 특정한 年代를 決定한다는 것은 곤란한 일일 뿐만 아니라 無意味한 일이다. 當時 西域帝國에는 大勝·小乘佛敎가 함께 行해지고 있었는데 當然히 印度佛敎 그대로가 아니고 이른바 西域化된 佛敎였다. 中國에 처음 傳해진 佛敎는 西域佛敎였다.

經典漢譯 [ 編輯 ]

經典漢譯

印度에서 成立한 經典은 西域에 傳해지고 다시 中國에 輸入되었다. 그리하여 印度나 西域의 言語文字로 쓰여진 經典이 漢文으로 飜譯되었다. 經典이 漢文으로 飜譯되기 始作한 것은 安世高(安世高)와 지루가참(支婁迦懺)에 依해서였다. 이 두 사람이 中國에 온 것은 2世紀 後半으로 丸劑(桓帝)와 영제(靈帝)의 時代였다. 最初의 時期에 있어서 逆境者들이 飜譯하는 데 얼마나 힘을 들였는가는 現存하는 그들의 飜譯卿을 보면 알 수 있다. 印度人이나 西域人들과는 生活樣式과 思考方式이 全혀 다른 中國人이 迂餘曲折을 거쳐서 佛敎를 理解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外來의 逆境者들 德澤이었다. 이 두 사람 外에 軸불삭(竺佛朔)·안현(安玄)·지요(支曜)와 康居(康巨)·강맹상(康猛詳)·築臺力(竺大力)·담과(曇果)·지량(支亮)·엄불조(嚴佛調) 等도 後漢時代의 逆境者들이었다. 一般的으로 初期의 飜譯이 難解하고 딱딱한 것은 譯語(譯語)가 各各 다르고 歷問의 形式이 고르지 않으며 淫祀어(音寫語)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結合은 다음에 오는 逆境者들에 依하여 次次 改善되어 라濕(羅什)과 現場(玄裝)에 依하여 劃期的인 飜譯이 이뤄지게 되었다. 電子의 飜譯을 區域(舊譯)이라 하고 後者를 신역(新譯)이라고 부른다.

安世高 [ 編輯 ]

安世高

厚한(後漢)시대에 中國에 들어온 逆境勝(譯經僧)의 한 사람. 파르티아(安息國:現在 西北印度·페르시아 地方)의 王子였으나 王位를 버리고 佛敎에 歸依하였다. 者(字)는 세고(世高), 안(安)은 그의 出身國인 安息(安息)을 나타낸 것. 特히 小乘佛敎의 全的(典籍)인 阿毘達磨와 鮮京(禪經)에 精通하고 148年 뤄양(洛陽)에 들어와 안반수義警(安般守義經)을 비롯하여 34部 40卷의 經典을 飜譯 紹介하였다. 그의 經典飜譯은 中國 逆警査의 最初氣의 일이다. 後漢時代의 逆境은 大體的으로 生梗(生硬)하고 難解하다.

지루가참 [ 編輯 ]

支婁迦懺

後漢時代에 中國에 온 逆景勝의 하나. 로칵洗馬(Lokaksema)의 音域. 147年 後漢의 뤄양(洛陽)으로 와서 183年(中平3)에 이르기까지 般舟三昧經(般舟三昧經)·無量淸淨平等覺頃(無量淸淨平等覺經)·倒行般若經(道行般若經)·首陵嚴三昧境(首楞嚴三昧經)·阿閦佛國境 等 14部(一說에 依하면 23部)의 經典을 飜譯하였다. 그가 使用하였던 原電은 거의 大乘經典(大乘經典)이었으므로 이런 意味에서 그는 中國에 大乘經前을 傳한 最初의 人物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弟子로는 指量(支亮)이 있으며 지루가참·指量·지兼(支謙:三國時代의 逆境子)의 셋을 삼지(三支)라고 한다.

주자행 [ 編輯 ]

朱子行 한족 出身으로서 最初로 出嫁한 僧侶. 永川(潁川:허난省의 許州東北)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經典의 硏究에 專念하였다. 倒行般若經(道行般若經)의 江(講)을 받을 때에 너무 簡略하여 意味가 曖昧한 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하고 새로운 梵本(梵本)을 찾아 260年(曹魏의 甘露5)에 翁主(雍州)를 出發하여 타클라마칸 沙漠을 넘어 코彈에 들어갔다. 여기에서 새로 얻은 梵本을 불旅團(弗如檀:法饒)에 委託하여 뤄양(洛陽)으로 運搬하였다. 뒤에 이것이 飜譯되어 放光般若經(放光般若經)이 되었다. 주자행은 中國에 돌아오지 않고 코彈에서 죽었다.

竺法護 [ 編輯 ]

竺法護

西晉(西晋)時代에 活躍한 逆境勝. 法號는 다르마라크샤(Dharmaraksa)의 音域. 月支國(月氏國) 出身으로 地法號(支法護)라고도 불리었으나 스승인 축고좌(竺高座)의 軸(竺)을 따서 普通 竺法護라고 부른다. 그는 둔황(敦煌)에서 活躍하였기 때문에 둔황菩薩(敦煌菩薩)이라고도 한다. 툰黃으로부터 長安·뤄양(洛陽)에 걸쳐 流浪하면서 經典의 飜譯과 布敎活動을 하였다. 그의 손으로 飜譯된 經典은 般若經·法華經·維摩經(維摩經)·無量壽經(無量壽經) 等 初期의 大乘經典에 屬하는 것이 많이 包含되어 있으며 모두 154部에 達했다고 한다. 라濕(羅什) 以前에는 質과 量에 있어서 最大의 逆境勝이었다.

敎團形式의 움직임 [ 編輯 ]

佛圖澄 [ 編輯 ]

佛圖澄(233∼348)

佛道等 或은 不渡징(浮圖澄)이라고 쓰기도 한다. 後趙(後趙)時代에 活躍한 西域勝(西域僧). 구자국(龜玆國)에서 태어나 젊어서 出家하였다. 오장국과 界貧國에서 受學하고 經典을 讀誦하기를 數百萬語에 達하여 經典의 本意(本義)에 精通하였다 한다. 310年(西晋의 永嘉 4)에 뤄양(洛陽)으로 왔다. 영가(永嘉)의 亂이 있은 뒤 百姓의 괴로움을 救하기 위하여 잔인스러운 盲腸이었던 석륵(石勒)을 敎化하고 弘法(弘法)에 全力을 다하였다. 그는 王의 顧問이 되어 軍事와 政治에도 參與하여 文化水準이 낮은 北方民族을 佛敎文化와 神通力으로 이끌어나갔다. 候鳥의 王 석륵(石勒)과 潟湖(石虎)로부터 絶對的인 尊敬과 信任을 받아서 敎團과 國家와의 關係가 密接해졌으며 後조국(後趙國) 안에 있어서의 布敎는 昔氏(石氏)의 後援에 依하여 强力히 推進되었다. 335年 潟湖가 業(河南省安陽縣)에 遷都(遷都)하게 되어 그 뒤를 따랐으며 恒常 戒律의 嚴守와 傳道에 힘써 그때까지 許容되지 않았던 韓人(漢人)의 出嫁를 許容하도록 꾀하였다. 弟子에는 도안(道安)·縮法태(竺法汰)·法化(法和)·法上(法常) 等이 有名하며 河北佛敎(河北佛敎)를 隆盛하게 하였다. 그가 創建한 社員은 893個이고 그의 가르침을 받은 勝도(僧徒)는 1萬名에 達했다고 한다. 348(永和 4) 12月에 118歲로 죽었다.

도안 [ 編輯 ]

道安(312∼385)

初期 中國佛敎를 代表하는 高僧(高僧). 上山부유현(常山扶柳縣:河北省)의 油價(儒家)에서 태어나 12歲에 出家하여 西域으로부터 온 佛圖澄(佛圖澄)에 師事하였다. 스승이 죽은 後에는 그를 代身하여 많은 門下生을 指導하였으나 마침 戰亂時代여서 이 混亂을 避하기 위하여 할 수 없이 허베이(河北)·산시(山西)·허난(河南)의 여러 곳을 轉轉하면서 流浪하였다. 뒤에 蕙園(慧遠) 等 400名의 門下生과 더불어 襄陽(襄陽:湖北省)에 段階私(檀溪寺)를 짓고 嚴肅한 構圖와 硏修를 爲主로하는 敎壇을 組織하여 國王과 貴族으로부터 두터운 尊敬과 信任을 받았다. 79年에는 전진왕(前秦王) 苻堅(符堅)의 招聘을 받아 長安에 가서 國家의 拷問에 推戴되었다. 이리하여 名實共히 佛敎界의 指導者로서 活躍하게 되고, 特히 캐시미르 出身의 僧伽발징(僧伽跋澄)·僧伽제바(僧伽提婆), 토카라國의 蕁麻難題(曇摩難提) 等 外國勝을 도와 小乘經의 飜譯을 完成하였다. 그는 또한 그때까지 내려오던 隔意佛敎(格義佛敎)의 誤謬를 反省하고 般若經의 이役(異譯)을 比較 對照함으로써 참다운 뜻에 이르도록 努力하였다. 또 漢譯佛殿(漢譯佛典)의 總目錄(<綜理衆經目錄>)을 編纂하여 새로이 昇段生活의 意識과 規範을 制定하였다. 出身國을 城으로 쓰는 從來의 方法을 廢止하고 僧侶는 모두 席(釋)을 城으로 할 것을 提唱하여 스스로 席도안(釋道安)이라고 불렀다. 經典 解釋에 序文(序文)·正宗分(正宗分)·流通分(流通分)의 3分科를 처음으로 만들었다.

敎學硏究의 發達 [ 編輯 ]

敎學硏究의 發達 [ 編輯 ]

敎學硏究-發達

中國의 佛敎는 佛圖澄과 圖案의 出現으로 思想과 敎理를 硏究하는 契機가 되었다. 그러나 印度의 思想과 佛敎敎理를 그대로 中國사람들에게 이해시키기는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隔意佛敎(格義佛敎)라고 하는 便宜的 方法에 依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中國 固有의 思想인 儒敎와 노장思想(老莊思想)을 빌려 佛敎思想을 類推的(類推的)으로 理解하는 方法이다. 縮法아(竺法雅)나 강법랑(康法朗) 等은 이 隔意佛敎의 代表者였다. 도안(道安)이나 蕙園(慧遠)도 그것의 限界性을 느끼면서도 이 隔意를 完全히 克服하지 못하였다. 라濕(羅什)李 長安에 들어와 신역經論(新譯經論)을 내놓게 됨에 따라 從來의 잘못된 解釋이 바로잡혀 라習儀 門下生을 中心으로 새로운 佛敎硏究가 旺盛해졌다. 그 中에서도 乘組(僧肇)는 般若(般若)와 공(空)에 關하여 獨特한 論文을 發表하고, 度生(道生)은 頓悟成佛(敦悟成佛)과 天帝成佛(闡提成佛)을 主張하였다. 라濕 以後 印度의 經論이 續續 輸入되어서 特히 般若經·法華經·華嚴經·涅槃經 等 大乘經前의 硏究가 活潑하였고 다시 나아가 經典 相互間의 時間的 前後와 敎理的 優劣 따위가 論議되기도 하였다. 이것을 敎相判釋(敎相判釋)이라고 하며 手當(隨唐)의 宗派 成立에 對한 理論的 基礎가 되었다.

隔意佛敎 [ 編輯 ]

格義佛敎

위진時代(魏晋時代)의 中國불교계에 行해졌던 佛敎 硏究의 一種. 漢文으로 飜譯된 佛敎經典에 記述되어 있는 일들을 儒敎의 古典과 老子·莊子의 思想과 比較하여 類推(類推)함으로써 佛敎敎理의 理解를 쉽게 하고 接近하기 쉽도록 하려는 方法. 假令 佛敎에서 말하는 공(空)을 노장哲學의 무(無)에 比喩하여 說明하는 것 等을 말한다. 위진時代에는 老將에 關한 學問이 盛行하여 淸潭(淸淡)李 流行하였고 特히 노장思想과 類似한 表現 形式을 갖는 般若經과 維摩經이 愛讀되고 이를 老將과 驛(易)의 思想과 對備하여 硏究 討論하는 일이 盛行하였다. 이리하여 佛敎의 공(空)의 意義에 關하여는 本來의 뜻으로부터 멀어진 여러 가지 中國的 解釋이 다투어 생겨났다. 이른바 이와 같은 哲學的 隔意를 特히 '현학(玄學)'이라 부른다. 이와 같은 隔意佛敎의 誤謬를 깨닫고 이를 바로 잡으려고 努力하였던 것이 도안(道安)이었는데 그도 亦是 그 弊端을 完全히 克服하지는 못하였다. 般若經 等의 本意(本義)가 잘못됨이 없이 理解되기는 鳩摩羅什(鳩摩羅什)李 長安에 들어와 公館佛敎(空觀佛敎)의 敎理가 올바르게 飜譯·紹介된 以後부터였다.

鳩摩羅什 [ 編輯 ]

鳩摩羅什(350∼409景)

唐代(唐代)의 現場(玄奬)과 더불어 일컬어지는 臺飜譯家. 쿠마라지바(Kumarajiva)의 音을 따서 鳩摩羅什이라 하고 이를 弱하여 라습(羅什) 또는 襲(什)이라고도 한다. 서역의 구자국(龜玆國)에서 태어나 아홉살 때에 어머니를 따라 啓殯·사륵(沙勒)에 留學하여 小乘佛敎와 印度 學問을 배웠다. 사륵에서는 수리야소마(須利耶蘇摩)로부터 大乘佛敎를 배우고 다시 龍水系(龍樹系)의 公館佛敎(空觀佛敎)를 硏究한 다음 歸國하였다. 20歲 때에 十悚慄(十誦律)을 배워 比丘가 되었다. 뒤에 後進(後秦) 요흥(姚興)의 부름을 받고 長安에 들어가 局社(國師)로서의 待遇를 받고 所要院(逍遙園)과 大刹에서 經論의 飜譯에 從事하여 逆慶事에 있어서 하나의 時期를 이룩하였다. 그의 밑에 모인 學僧(學僧)李 3천이었다고 하며 乘組(僧肇)·度生(道生)·道融(道融)·僧叡(僧叡) 等 天下의 俊才들이 學問을 겨뤘다. 그의 飜譯은 35部 294卷으로 內容이 卓越한 데다 飜譯 文章이 流麗하고 뜻에 達通하여 後世에 이르기까지 貴重히 여겨졌다. 그 主要한 것으로는 般若經·法華經·維摩經·阿彌陀經·衆論·百論·12門論·大智度論·誠實論 等이 있으며 敎理的으로 重要하여 後世에 影響을 미친 經論이 많이 包含되어 있다. 또한 여산(廬山)의 蕙園과의 사이에 交換된 敎理에 關한 質疑 應答은 <大乘義章(大乘義章)>으로 整理되었다.

敎相判釋 [ 編輯 ]

敎相判釋

교상(敎相)·敎判(敎判)·板橋(判敎)라고도 한다. 數千卷에 達하는 많은 經典은 釋迦 一帶의 說法을 集大成한 것으로 보고 이들을 說法의 形式·方法·順序 및 內容과 敎理에 따라 分類·體系化하고 그것에 對한 價値判斷을 行하는 것. 印度에서는 歷史的인 展開過程을 밟아 成立된 여러 經典이 中國에 輸入되는 段階에 이르러서는 成立의 順序에 關係 없이 無秩序하게 飜譯되었기 때문에 中國의 佛敎 關係者들이 次次 이러한 經典의 記錄上 相互矛盾과 不一致를 느끼게 되어 어떤 것이 果然 부처님의 窮極的인 가르침인가를 判別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여기서 一切의 警(經)을 時間的 또는 內容的으로 配列·整理하고 가르침의 깊이와 優劣을 獨自的인 基準에 따라 體系化하게 되었다. 이러한 試圖는 南北朝時代부터 當代(唐代)에 걸쳐 가장 盛行하였으며 宗派 成立의 敎理的 前提는 이렇게 하여 마련되었다. 그 中에서 重要한 것을 들어 보면 三論宗(三論宗)의 2張 3輪校(二藏三輪敎), 天台宗(天台宗)의 5時 8橋(五時八敎), 法相宗(法相宗)의 3橋 8種(三敎八宗), 華嚴宗(華嚴宗)의 5橋 10種(五敎十宗) 等이다.

有·道 兩校와의 關係 [ 編輯 ]

有·道 兩校와의 關係 [ 編輯 ]

儒·道 兩敎-關係

佛敎는 中國의 傳統思想인 儒敎와 民衆的인 宗敎였던 道敎와의 사이에서 이것들과의 對立抗爭과 折衷融合 等 여러 形態의 關係를 갖지 않으면 안되었다. 儒敎는 韓帝國(漢帝國)을 뒷받침하는 正統思想으로서 佛敎가 輸入될 當時에는 이미 움직일 수 없는 確固한 地位에 있었다. 道敎는 後漢時代의 張道陵(張道陵)에 依하여 基礎가 잡히고 노장思想으로부터 여러가지 民間思想을 배워들이고 뒤에는 佛敎經典의 影響을 받아 圖章(道藏)을 이루게 되었다. 儒敎와 道敎와의 關係에 對하여 注目할 만한 最初의 文獻은 三國時代의 <변도론(辯道論)>과 <이혹論(理惑論)>이다. 西晉時代에는 百원(帛遠)과 王符(王浮)의 論爭이 있었는데 王父는 <老子和好頃(老子化胡經)>乙 만들어 道敎의 優越함을 主張하였다 한다. 3校의 對立은 東晉時代 以後 더욱 激化되었고 同時에 隔意佛敎(格義佛敎)에서 보는 바와 같은 相互間의 調和와 融合의 傾向도 顯著하게 되었다. 儒敎와 佛敎와의 論爭 테마는 主로 社會的·倫理的 問題가 擧論되었으며 神의 永遠不滅에 關한 問題와 應報輪廻(應報輪廻) 問題 等이 많이 論議되었다.

이혹論 [ 編輯 ]

理惑論 母子(牟子)의 著書. 著者의 生沒年代는 잘 알 수 없다. 佛敎에 共鳴하면서 老子와 油價(儒家)의 五經(五經)을 硏究하는 帽子를 世上사람들은 사도(邪道)에 빠진 사람이라고 非難하였으므로 이에 答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 이 冊이라고 한다. 그의 理論은 基本的으로 有·佛·道 3校의 調和를 志向하면서 이들의 共通點과 상위점을 밝히고 있다. 佛敎를 有·道의 兩校 위에 놓으려고 하는 著者의 姿勢는 佛敎에 對한 兩校로부터의 非難攻擊에 對하여 論駁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斟酌할 수 있다. 全體는 37篇으로 構成되어 있고 여기에 擧論된 것은 東晉時代 以後에 3橋(三敎) 사이에 論爭이 많던 問題 ― 出家遁世(出家遁世)는 世俗의 道德에 반한다는 윤상問題(倫常問題), 人間의 靈魂이 死後에 없어지는지 아닌지에 關한 問題, 中下(中夏)의 사람은 移籍(夷狄)에 服從해서는 안 된다는 이하론(夷夏論), 佛敎界의 腐敗와 墮落 問題 等 ― 를 테마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理論이 언제 成立하였는지에 關하여는 學者들에 따라 說이 다르지만 아마도 3橋 關係를 論한 것으로서는 이 冊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폐불 [ 編輯 ]

廢佛

中國에서 있었던 佛敎彈壓을 말한다. 一般的으로 말하자면 寺院·佛堂·佛像·經書를 破壞하고 僧侶와 니승(尼僧)을 還俗시키며 그들이 所有하고 있는 장원(莊園)과 奴婢를 國家가 沒收하는 것을 말한다. 中國불교사上에는 4番의 큰 폐불事件이 있었는데 이를 '三武一宗(三武一宗)의 法難(法難)'이라고 부른다. 三無(三武)라 함은 北魏(北魏)의 太武帝(太武帝), 北周(北周)의 無題(武帝), 黨(唐)의 武宗(武宗)을 말하며, 一種(一宗)이라 함은 후주(後周)의 世宗(世宗)을 가리킨다. 폐불을 斷行하게 된 理由로서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으나 表面的으로는 有·佛·道 3橋, 特히 佛敎와 道敎 兩校의 對立抗爭 形態를 取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對立을 利用하여 그것을 決定的인 段階로까지 이끌어간 것은 亦是 政治的·經濟的 要因이었다. 이러한 意味에서 본다면 當時의 支配者는 폐불을 斷行함으로써 스스로의 政治的 危機를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佛敎敎壇 쪽에도 페불을 誘發할 만한 條件이 갖춰져 있었다. 稅金과 奴役(勞役)을 避하기 위하여 出家한 厖大한 人口는 이를 堪當해야 할 政府의 財政을 威脅하고 또 그들의 墮落과 飛行은 눈으로 볼 수 없을 地境이었다.

六曹의 佛敎 [ 編輯 ]

六朝-佛敎

六朝時代라 함은 江南(江南)의 建業(建業:建康)에 都邑을 두었던 6王朝(六王朝), 卽 三國時代의 오(吳) 外에 東進(東晋), 南朝(南朝)의 송(宋)·第(齊)·量(梁)·辰(陳)의 時代를 말한다. 六曹(六朝)라 함은 江南 땅에서 繁榮한 貴族政治·貴族文化라는 共通性에 着眼한 文化史的인 名稱이다. 六曹佛敎의 特色은 六朝文化의 一般的인 特色과 마찬가지로 貴族的·高踏的·學術的이었으므로 북조(北朝)의 國家的·呪術的·實踐的인 佛敎와는 뚜렷한 對照를 이루고 있다. 南朝에는 族閥貴族이 廣大한 壯元을 所有하고 帝王 以上의 權勢를 누리고 있었다. 그들은 높은 古典的 敎養을 몸에 지니고 현학(玄學)을 崇尙하며 淸潭(淸淡)을 즐겼다. 佛敎도 이들에게는 方外隱逸的(方外隱逸的)인 것으로 받아들여져서 維摩經(維馬經)과 般若經(般若經) 等이 愛好되었다. 隔意佛敎가 盛行된 것도 이때였다. 여산(廬山)의 蕙園(慧遠)李 沙門(沙門)은 方外(方外)의 빈(賓)이므로 世俗的 政治權力의 支配를 받지 않는다고 主張하게 된 것은 그 自身이 東進(東晋)의 貴族社會에 몸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六朝時代의 佛敎는 全般的으로 支配者들의 保護를 받아 政治에 參與하는 者도 나타나게 되었다. 北朝에 있었던 폐불度 없었고 王侯貴族에 依하여 雄大한 寺院이 建立되어서 佛敎의 硏究時代라고 稱할 만큼 經論의 硏究와 講說(講說)李 성하였다. 第(齊)의 太子 聞慧(文惠)와 동생 숙자輛(肅子良)은 熱烈한 佛敎 信者로서 많은 學僧(學僧)을 祠宇(師友)로 하여 講席(講席)과 法會(法會)를 設置하고 佛敎서의 編纂事業 等을 行하였다. 量(梁)의 無題(武帝)는 南朝의 여러 帝王 中에서도 뛰어난 敎養을 갖고 있어서 佛敎의 敎理에도 精通하였다. 그는 스스로 <段酒肉門(斷酒肉文)>을 著述하고 大寺院을 建立하였으며, 無遮大會(無遮大會)와 같은 大法會를 10餘 次例나 열었다.

六朝時代에는 印度와 西域으로부터 續續 逆景勝이 들어와 中國僧科의 協力下에 많은 重要한 經論을 飜譯하였다. 佛馱跋陀羅(佛陀跋陀羅)·강량야사(畺良耶舍)·區나 발타라(求那跋陀羅)·津逮(眞諦) 等의 外國僧科 法顯(法顯) 等의 中國勝이 活躍하였다. 또한 兩大(梁代)에는 勝黃(僧晃)·法雲(法雲)·支障(智藏)의 3대법사가 出現하였고 또 佛敎史家로서 有名한 勝友(僧祐)가 나와서 <出三藏器什(出三藏記集)>과 <홍명집(弘明集)> 따위의 많은 著作을 남겼다. <高僧傳(高僧傳)>을 지은 惠敎(慧皎)도 빠뜨릴 수 없는 人物이다.

북위의 石佛 [ 編輯 ]

北魏-石佛

북위時代에 乾燥된 大規模의 石窟佛像. 그 代表的인 것으로는 雲岡石佛(雲崗石佛)과 龍紋席불(龍門石佛)이 있다. 前者는 산시省 다퉁縣(大同縣)의 西쪽 20km 地點에 있으며 社文通(沙門統) 毯요(曇曜)가 문성제(文成帝)에 常住하여 454年에 建國 以來의 5制(五帝)에 對한 秋扇(追善)과 懺悔滅罪(懺悔滅罪)를 起源하여 5窟(五窟)을 열게 된 것으로부터 始作된다. 더욱 큰 것으로 15窟이 만들어져서 이들은 彫刻史上 雲岡機(雲崗期)를 形成하게 된다.

둔황石窟(敦煌石窟)의 系統을 이어 받으면서 타쿠바쓰족의 雄渾(雄渾)韓 솜씨가 넘쳐 흐른다. 後者의 것은 뤄양遷都(洛陽遷都)와 더불어 그 郊外에 있는 이수하半(伊水河畔)의 龍門山(龍門山)에서 파서 만든 것. 雲岡의 것과 마찬가지로 先制(先帝)의 秋扇(追善)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으로서 20餘 年의 歲月과 巨額이 投入되었다. 주요한 北緯굴(北魏窟)李 14個 남아 있는데 이들이 용문機(龍門期)를 形成하는 것이다. 그 特色으로는 一般的으로 優雅 華麗하고 西方(西方)的인 냄새가 稀薄해지며 中國 固有의 것이 나타나 있다. 雲岡·용문 外에 公現(鞏縣)·천룡산(天龍山)·香堂山(響堂山) 等의 石窟도 북위時代의 것이다.

수·黨의 佛敎 [ 編輯 ]

수·黨의 佛敎 [ 編輯 ]

隋·唐-佛敎

수·黨時代는 中國佛敎가 새로운 展開를 보이게 된 時代였다. 南北의 分裂을 統一한 수(隋), 그 뒤를 이은 黨(唐)은 世界史的으로도 空轉(空前)의 繁榮을 이룩하였는데 이러한 統一國家 時代가 새로운 佛敎를 要請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特定의 經論에 立脚한 새로운 宗派가 形成되고 中國人 自身에 依한 佛敎의 體系化·組織化가 進行되었다. 수·黨 以前에도 毘曇宗(毘曇宗)·攝論宗(攝論宗)·成實宗(成實宗)·지론종(地論宗)·涅槃宗(涅槃宗) 等의 種(宗)으로 일컬어지는 것이 存在하였으나 이들은 嚴密한 意味에서 學派(學派)라고 불러야 할 것으로 뒤의 宗派와는 다른 것이었다. 學派로부터 宗派로의 發展을 促進한 契機가 된 것은 寺院經濟의 獨立과 敎判(敎判)의 確立이다. 三論宗(三論宗)은 아직도 學派的 色彩가 濃厚한 것이었으나 수대(隋代)에는 智顗가 大成한 天台宗(天台宗)李 法華經(法華經)을 地上으로 하는 讀者의 敎判(敎判)을 確立하여 처음으로 宗派를 만들어냈다.

當代(唐代)에 들어와서 法匠(法藏)李 華嚴經(華嚴經)을 中心으로 佛敎를 體系化하여 '師事撫愛, 중중무진(重重無盡)'의 華嚴敎理를 完成했다. 또한 道詵(道宣)은 戒律을 硏究하여 律宗(律宗)을 創始하고 現場(玄奬)·窺基(窺基)가 引渡의 새로운 油價唯識說(瑜伽唯識說)을 基礎로 하여 法相宗(法相宗)을 열었다. 아울러 善無畏(善無畏)·金剛砥(金剛智)·佛供(不空) 等이 들여온 密敎(密敎)의 隆盛도 看過할 수 없는 것이다. 天台宗·華嚴宗이 수·唐佛敎의 思想的 絶頂을 이루는 것이라고 한다면 腺腫(禪宗)과 淨土敎(淨土敎)는 그것이 미친 影響의 領域으로 보아서 佛敎의 中國化·民衆化에 커다란 役割을 하였다.

腺腫(禪宗)은 3兆(三祖) 승찬(僧璨)·4兆(四祖) 道臣(道信)을 거쳐 5條(五祖) 紅燐(弘忍) 무렵에 이르러 道俗(道俗)의 歸依者가 急增하게 되고 6兆(六祖) 慧能(慧能)은 그때까지 없었던 都市에 對한 布敎를 重視하였다. 慧能의 系統은 男종(南宗)이고 身數(神秀)의 系統은 북종(北宗)이라고 부르며 2派로 갈라진 채 各其 交線(敎線)을 維持하였으나 얼마 뒤에 北宗은 衰退하고 말았다. 淨土敎는 曇鸞(曇鸞) 以後 盜作(道綽)·善導(善導)가 나와 口稱念佛(口稱念佛)을 普及하여 無識한 民衆들의 歡迎을 받아 많은 信者를 獲得하였다. 845年(會昌5)의 폐불(廢佛)과 連續된 戰亂으로 말미암아 佛敎는 深刻한 打擊을 받게 되었으나 '不立文字(不立文字)'를 標榜한 禪宗과 民衆의 마음속 깊이 파고든 淨土敎는 衰退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勢力을 더하여갔다. 수·黨의 佛敎는 中國佛敎隆盛의 頂點에 位置한다.

吉藏 [ 編輯 ]

吉藏(549∼623)

隋나라 時代의 佛敎 人三論宗(三論宗)의 調査(祖師). 그의 先祖는 파르티아(安息國) 사람이다. 金陵(金陵:江蘇省南京市)에서 태어나 出嫁한 아버지를 따라다니다 津逮三藏(眞諦三藏)을 만나 吉藏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12歲 때에 興黃沙(興皇寺)에서 琺瑯(法朗)의 講義를 듣고 이듬해에 出嫁하였다. 처음에는 會計(會稽)의 加賞賜(嘉象寺)에서 三論(三論)을 硏究하였으므로 假想臺詞라고 받들어 일컫는다. 597年(開皇 17)에는 天台大師(天台大師) 지義와 門通(文通)을 하였다. 뒤에 隋煬帝(隋煬帝)의 勅命에 따라 洋酒(楊州)의 慧日社(慧日寺)에 들어갔다가 다시 長安의 일嚴査(日嚴寺)로 옮겨 法華經을 硏究하였다. 黨의 武德(武德) 秒에 10大德(十大德)의 한 사람으로 뽑혔으나, 얼마 後에 延興社(延興寺)에서 入寂하였다. 그는 섭令上昇(攝嶺相承)이라고 하는 三論 硏究의 傳統을 琺瑯으로부터 이어받아 이른바 新三論(新三論)의 敎理를 大成하였다. 그 自身은 새로운 宗派를 創設하려고 생각하지는 않았고 引渡의 中觀佛敎(中觀佛敎)의 眞意(眞義)에 이르는 것을 目標로 하였다. 이 點에 있어서는 같은 時代의 지醫와는 對照的이다. 그의 著作物은 대단히 많으며 그 中에서 代表的인 것으로는 <삼론현의(三論玄義)>·<대승현론(大乘玄論)>·<이체의(二諦義)>·<중관론소(中觀論疏)>·<법화현론(法華玄論)> 等이 있다.

知의 [ 編輯 ]

(538∼597)

隋나라 時代의 佛敎勝. 天台宗의 改造(開祖). 天台大師(天台大師). 智者大師(知者大師)의 尊稱으로 불리어진다. 荊州(荊州)의 화용(華容:湖南省華容縣) 사람. 한때 官職에 오르기도 하였으나 戰亂으로 인하여 兩親과 親族을 잃었다. 18歲에 出家하여 律藏(律藏)과 毘曇(毘曇)·誠實(成實)·旋法(禪法) 等을 배워 익혔다. 그後 南岳大使(南岳大師) 혜사(慧思)의 門中에 들어가 止觀法門(止觀法門)·三論界(三論界)의 敎理와 選菅(禪觀) 達磨選(達磨禪) 等 所謂 北方系의 敎理를 이어받고 法華三昧(法華三昧)에 依하여 隊伍(大悟)하였다. 30歲에 金陵(金陵)에 나아가 8年間 法華經 等의 講論에 힘썼다. 576年 名利(名利)를 떠나 天台山에 들어가 여기에서 約 10年間 修道 生活을 하였다. 天台敎理의 大江(大綱)은 이 時期에 形成된 것이다. 그 後 金陵에서 다시 大智度論(大智度論)·仁王般若經(仁王般若經)·法華經 等을 講論하였다. 隋煬帝의 請에 依하여 菩薩戒(菩薩戒)를 授與하고 智者大師(智者大師)의 號를 받게 되었다. 故鄕 형주에 돌아가 玉泉寺(玉泉寺)를 세우고 天台3代部(天台三大部)인 <法話玄義(法華玄義)> <法話文句(法華文句)> <摩訶止觀(摩訶止觀)>을 講說하였다. 門下에는 長安(章安)·至月(智越) 等의 뛰어난 人材가 나왔다. 著作도 많으며 34部가 現存한다.

末法思想의 佛敎 [ 編輯 ]

末法思想의 佛敎 [ 編輯 ]

末法思想-佛敎

末法思想이라 함은 6世紀頃부터 中國에서 盛行된 思想으로 佛敎의 時代棺·歷史觀을 나타내고 있다. 卽 정法(正法)·商法(像法)·末法(末法)의 3시思想(三時思想)에 따르면 正法時(正法時)는 正法이 儼存하여 敎(敎)·行(行)·增(證) 모두가 빠짐 없이 갖추어져 있으나 像法時(像法時)에 들어오면 增(證)李 없어지고 교와 行만이 있게 되며 다시 末法時(末法時)에 이르게 되면 行과 增(證)은 없어지고 오직 敎義 껍데기만 남게 된다고 한다.

이 3시思想 外에 5濁惡世(五濁惡世)와 法滅(法滅)思想도 말法官을 뒷받침하고 있다. 正常말(正像末) 3時(三時)의 年限에 關하여는 經典에 技術이 各各 다르나 정法(正法) 500年, 商法(像法) 1000年, 말法은 1萬年으로 보는 것이 普通이다. 이에 依하면 釋迦 滅後 1500年 지나면 말法의 時代에 들어가게 되는 것으로 이때가 552年(梁帝의 承聖 1, 北齊文宣帝의 天保 3)頃에 該當된다고 한다.

南北朝時代에 말法과 法滅思想이 일어나게 된 것은 末法思想을 鼓吹한 <臺집月將頃(大集月藏經)> 等의 經典이 飜譯된 日課 敎團의 墮落과 腐敗, 全國的인 폐불運動 等이 佛敎人들에게 危機感을 안겨주었다는 것 等의 理由에서였다. 이러한 말法 到來의 思想을 굳게 믿고 있었던 사람들은 이러한 時代에 알맞은 佛敎를 唱導할 必要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成立된 것이 盜作(道綽)·善導(善敎)의 淨土敎(淨土敎)이며, 新行(信行)李 開創(開創)韓 三階敎(三階敎)였다.

盜作(道綽)은 "只今이 말法이로다. 바야흐로 5濁惡世(五濁惡世)에 이르렀으니 오직 淨土日文(淨土一門)만이 있어 通入(通入)해야 할 길이로다"라고 說破하고 唱名念佛(唱名念佛)이라고 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方法이야말로 末法時代에 어울리며 그것만이 現實社會에서 有效한 佛道의 實踐이라고 主張하였다. 盜作과 같은 時代의 信行도 末法思想과 罪惡館에 立脚하여 現代에 必要한 것은 經典을 硏究 講述하고 그 優劣을 가리는 일이 아니라 現實的으로 佛敎를 實踐·體得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는 일이라 하고, 末法時代에 적합한 方法은 批判選擇을 加하지 않고 謙虛한 姿勢로 오로지 제경(諸經)을 받아들이고 諸佛(諸佛)을 禮拜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專修念佛(專修念佛)과 보경步行(普敬普行)과는 實踐方法으로서는 正反對이나 現世가 말法이라는 强烈한 時代的 認識 속에서 發生된 것이라는 點에서는 兩者 모두 末法思想의 佛敎라고 할 수 있다.

三階敎 [ 編輯 ]

三階敎

수대(隋代)에 新行(信行, 540∼594)李 새로 일으킨 佛敎의 一波. 수대로부터 宋代에 걸치는 約 400年間 流行한 革新的·異端的인 宗敎이며 三界種·三界不法·步법종(普法宗)이라고도 한다.

新行은 젊어서 出家하여 佛敎가 極히 隆盛하였던 北齊(北齊)의 都邑인 業에서 工夫를 하고 있었는데 577年에 北周(北周)의 無題(武帝)가 北齊에 侵攻해 들어와 黑心한 폐불을 斷行하는 것을 目擊하게 되었다. 信行도 多分히 都市를 빠져나가 山中에 몸을 숨길 것인가 或은 還屬할 것인가를 강요당하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 苦痛에 찬 深刻한 體驗을 통하여 그는 現實社會와 그 속에서의 生活을 直視함으로써 아무리 몸부림쳐도 罪惡으로부터 멀리 떨어져나갈 수 없는 無知한 自己 自身을 發見하게 되었다. 이러한 面으로 보아서 現實에 살고 있는 人間이 實踐할 수 있는 佛敎는 當然히 只今까지의 것과는 다른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581年 北周 代身으로 일어선 수(隋)가 佛敎復興이라는 새로운 政策을 取하게 되자 다시 喪主(相州)에 돌아가 새로운 佛敎를 提唱하였다.

그가 提唱한 三階敎의 敎理는 支障십륜경(地藏十輪經)에 立脚한 것이라고 하며 一切의 不法(佛法)에 3係(三階)를 세워 一乘(一乘)을 第1係, 三乘(三乘)을 第2係, 步法(普法)을 第3契라 하고 步法만이 말法人 現在에 적합한 것이라고 主張하였다. 釋迦의 入滅 後 500年(第1係)과 1000年(第2係)의 사람들은 各家 一乘과 三升의 '別法(別法)'에 依하여 增(證)을 얻었으나 1500年을 經過한 現在는 末法時代 이므로 第3系인 '步法(普法)'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第3界의 佛敎는 警(經)도 佛菩薩(佛菩薩)도 選擇을 加하지 않고 오로지 이를 恭敬하고 行해야 하는 謙虛한 態度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어떠한 사람도 오직 如來藏불(如來藏佛)·불成佛(佛性佛)·當來불(當來佛)로서 恭敬하는 것만이 罪惡에 充滿한 凡夫(凡夫)가 救濟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동신同行(同信同行)의 實踐을 僧俗(僧俗)에 勸奬하였다. 589年에 長安에 들어가 진적社(眞寂寺)에 三界원(三階院)을 두고 여기에서 信者들과 같이 살며 宣敎에 힘쓰는 한便 <三界不法(三階佛法)> 其他 많은 著述을 하였다. 新行(信行)李 죽은 後에도 弟子들의 努力은 커졌으나 600年과 725年 두 次例에 걸쳐 社交(邪敎)로 몰려 敎義 信奉이 금지당하고 全的(典籍)도 消滅되었다.

禪宗의 發達 [ 編輯 ]

禪宗의 發達 [ 編輯 ]

禪宗-發達

선(禪)은 禪那(禪那:jhana)의 略稱으로서 靜慮(靜慮)라고 飜譯되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集中하는 宗敎的 實踐이다. 印度에서 起源된 것이나 中國에 傳해져서 새로운 發展을 이룩함으로써 有力한 宗派의 하나가 되었다. 禪宗이라고 하는 呼稱은 當代에 들어와서 생겨난 것이며, 그 以前에는 여러 가지 名稱을 가졌었다고 한다. 禪宗의 처음 調査(祖師)라고 하는 菩提達磨는 2입 4行說에 立脚한 坐禪을 勸奬하였다. 禪宗은 그 後에 2兆(二祖) 慧可(慧可), 3兆(三祖) 승찬(僧璨), 4兆(四祖) 道臣(道信), 5條(五祖) 紅燐(弘忍)에 傳해져서 도신과 紅燐의 時代에는 宗會에 參加하는 自家 500名에 이르렀다. 黨의 初期에는 身數(神秀)의 북종(北宗)과 慧能(慧能)의 男종(南宗)李 對立하여 分裂되었다. 北宗은 漸悟(漸悟)를, 南宗은 頓悟를 標榜하였다고 한다.

慧能은 6組(六祖)가 되어 門下에 淮陽(懷讓)·行事(行思)·燼灰(神會) 等이 있었고 講書와 湖南을 中心으로 敎勢를 擴張하였다. 百張(百丈)은 船員에 있어서의 集團生活의 規範이 되는 淸規(淸規)를 만들었다. 5代에 걸쳐서 胃酸·林悌(臨濟)·早冬(曹洞)·韻文(雲門)·法案(法眼) 5價(五家)가 成立되어 淨土敎와 함께 宋代(宋代) 以後 佛敎의 主流를 이루었다.

菩提達磨 [ 編輯 ]

菩提達磨

中國禪宗(中國禪宗)의 窓時調. 生死 連帶 不明. 남인도 또는 破邪國(波斯國)에서 태어났다. 520年頃 前後에 北緯(北魏)의 都邑 뤄양(洛陽)에 갔다가 그 後 嵩山 小林寺(小林寺)에서 坐禪修行(坐禪修行)에 精進하고 그 旋法(禪法)을 慧可(慧可) 等에게 傳授하였다. 達磨의 前期에는 분명치 않은 點이 많다. 唐宋(唐宋) 時代 禪宗의 發展과 더불어 그의 電氣가 追加, 補完되어 禪宗의 1大棗로서의 달馬上(達磨像)李 歷史的 事實과는 別途로 確立되게 되었다.

兩廡制(梁武帝)와의 問答에 關한 이야기, 慧可가 눈 속에서 팔을 자르고 法을 傳受받았다는 이야기, 西域(西域)에서 西쪽으로 돌아가는 達磨를 만나보았다는 이야기 等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는 私權凌駕頃(四卷楞伽經)을 重視하고 2입(二入:理入과 行入)·4行(四行:報行·隨綠行·無所求行·稱法行)의 가르침을 말하고, 北緯 末期의 貴族的 嘉藍(伽藍)佛敎와 修行體驗(修行體驗)을 度外視한 講說(講說)佛敎에 對하여 날카로운 批判을 加한 일, 衆生의 同一眞性(同一眞性)을 믿고 線의 實踐遂行에 努力한 것 等은 事實로 認定된다. 弟子에는 慧可(慧可)·屠肉(道育)·勝負(僧副)·談林(曇林) 等이 있다.

慧可 [ 編輯 ]

慧可(487∼593)

수대(隋代)의 禪僧(禪僧). 禪宗의 第2代祖. 무뢰(武牢:河南省洛陽 附近)에서 出生하여 어릴 때 이름을 狂(光) 또는 身光(神光)이라 하였다. 젊었을 때에는 老將(老莊)의 戰績과 佛殿을 工夫하고 後에 뤄양의 용문(龍門) 향산(香山)에 가서 補正船社(寶靜禪師)를 따라 出嫁하여 英牧師(永穆寺)에서 戒律을 받았다.

그 後 各地를 遍歷하며 內外의 高明한 學問에 接하고 知識을 넓혔다. 32歲에 다시 향산에 돌아가 8年間을 冥想으로 보냈다. 520年 嵩山 小林寺를 찾아 禪宗의 第2代祖인 菩提達磨의 弟子가 되어 이 곳에서 8年 동안 首都에 精進하였다. 처음에 達磨를 찾았을 때 쉽사리 入室(入室)을 許諾받지 못하자 무릎이 빠질 만큼 쌓인 눈 속에 서서 밤을 새워 끝내는 自己의 팔을 잘라 構圖를 위하여는 身命을 아끼지 않는 精神을 보임으로써 下落을 받았다는 傳說은 有名하다. 552年에 度를 弟子인 승찬(僧璨)에게 傳授하였다. 그 뒤에 業道에서 선(禪)을 펴기 34年, 迫害(迫害)에도 屈하지 않고 各地를 돌면서 圖們(屠門)과 株價(酒家)에도 出入을 하였다 한다. 鑛區社(匡救寺)에서 涅槃經을 剛하여 많은 學僧이 모였다. 마지막에는 中 變化(辨和)의 미움을 받아 邑長(邑長)인 적中間(翟仲侃)에 依하여 處刑되었다고 한다.

법융 [ 編輯 ]

法融(594∼658)

黨 時代의 禪僧(禪僧)이며 우두선(牛頭禪)의 改造(開祖). 윤주(潤州)의 연릉(延陵:江蘇省)에서 出生. 19歲에 經史(經史)의 學問에 널리 精通하였으나 般若經을 읽은 後 그때까지 배운 儒敎와 道敎의 學問에 會議를 느끼고 某産(矛山)에 들어갔다. 여기에서 三論頃法師(三論炅法師)를 따라 出嫁하여 20年間 조용한 숲속에 默坐(默座)하여 깨우침을 얻었다. 뒤에 우두산의 遺書社(幽棲寺)에 머무르면서 漆匠(七藏)의 經書를 풀어 8年 동안 草略(抄略)을 만들었다. 643年에 절 北쪽 벼랑 아래에 船室을 짓고 坐禪을 繼續하였다. 百餘名의 사람들이 그의 門을 두드리게 되었는데 4代祖의 道臣(道信)도 그 中 한 사람이었으며 법융으로부터 頓悟(頓悟)의 法門을 이어받게 되었다. 食糧이 不足하여 80里길을 혼자서 한 섬 여덟 말의 쌀을 등에 지고 다른 중들을 위하여 運搬하였다 한다. 652年 健康(建康)의 建初寺(建初寺)에 招聘되어 大般若經(大般若經)을 剛하니 勝도 1,000名이 모였다. 그의 旋風(禪風)을 그가 머문 곳의 이름을 따서 우두선(牛頭禪)이라고 부르나 그것은 三論的(三論的) 要素가 짙은 것이었다. 門下에 弟子 至嚴(智嚴)·陶器·度빙(道憑) 等이 있다.

紅燐 [ 編輯 ]

弘忍(601∼674)

唐나라의 禪僧(禪僧)이고 禪宗의 第5代祖. 寄主의 黃梅(黃梅:湖北省)에서 出生하였다. 607年 일곱살 때에 冀州 雙鳳山(雙峰山) 東山社(東山寺)에 가 善終 第4代祖인 道臣(道信)을 좇아 出嫁하였다. 그는 돈占(頓漸)의 主要한 뜻을 硏究 通達하여 改悟(開悟)하였다. 도신에 四史(師事)하기 30年, 51歲 때 스승의 命令에 따라 塔을 建立하고 그 功績에 依하여 스승의 法의(法衣)를 받게 되었다. 同年 9月 刀身이 죽으므로 그 자리를 이어받고 善終 第5代祖가 되었다. 雙鳳山의 東쪽에 있는 빙霧散(憑茂山)으로 옮기고 法文(法門)을 宣揚하였다. 그의 淮河(會下)에 모인 사람은 700名을 넘고 절의 이름을 따서 當時의 사람들이 동산의 法文이라고 불렀다. 그의 禪思想은 心性(心性)의 本院에 徹底할 것을 本領으로 하고 水深(守心)을 慘虐(參學)의 要諦로 하였다. 그의 弟子로는 玄籍·慧能(慧能)·神樹(神秀)·地選·혜장(惠藏)·法餘(法如)·現藥(玄約) 等이 있었고 慧能이 法統을 이어받아 제6대조가 되었다. 傳說에 依하면 그가 23人의 弟子에게 各其 뜻을 말해 보라 하니 身數가 처음에 界로써 答하고 이어서 慧能度 契를 읽었으나 紅燐은 慧能에게 法의(法衣)를 주고 法統을 물려주었다 한다.

身數 [ 編輯 ]

神秀( ? ∼706)

黨 時代의 禪僧이고 禪宗의 第5代祖 紅燐의 弟子. 북종선(北宗禪)의 始祖. 開封(開封:河南省)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儒敎와 老將에 關한 戰績과 나아가 三乘(三乘)의 經論과 四分律(四分律) 等에 널리 精通하였다. 625年에 뤄양 天宮社(天宮寺)에 出嫁하였다. 50歲때에 冀州 雙鳳山 東山社에 들어가 5代祖 紅燐(弘忍)에 師事하였다. 700餘 名의 門下生 中에서 누구도 그를 따를 사람은 없었고 第一座(第一座)로서 新首相座(神秀上座)라고 불리었다. 同門인 慧能과는 서로 親했고 彼此 啓發(啓發)하는 바가 있었다. 後에 荊州(荊州) 玉泉寺(玉泉寺)로 옮겨갔는데 그의 높은 德을 따라서 많은 道人들이 모여들었다. 則天武后(則天武后)가 이 消息을 듣고 內道場(內道場)에 그를 모시고 法要(法要)를 講義하게 하였다. 無後(武后)·中宗(中宗)·睿宗(睿宗) 3題(三帝)의 局社(國師)로 있었고 長安 뤄양(洛陽)의 法主에 推戴되어 6年間 그 職을 맡았다. 勅命에 依하여 糖量産(當陽山) 度文士(度門寺)를 建立하고 住持가 되었다. 百餘 殺意 長壽를 누리면서 뤄양 天宮社에서 죽을 때까지 長安·뤄양을 中心으로 하는 華北(華北)·河南(河南) 地方에서 旋風(禪風)을 宣揚하였다. 대筒船社(大通禪師)라고 시호(諡號)되었다.

慧能 [ 編輯 ]

慧能(638∼713)

唐代(唐代)의 禪僧이며 禪宗(禪宗)의 第6代祖. 一般的으로 6組臺詞 또는 阼階臺詞(曹溪大師)라고 한다. 新株(新州:廣東省)에서 태어나 세살 때 父親을 잃고 가난하게 자랐는데 어느 날 나무를 짊어지고 팔러 다니는데 金剛經(金剛經) 외는 소리를 듣고 出家할 決心을 하게 되었다 한다. 24歲 때에 冀州 黃梅山(黃梅山:湖北省)의 桐船員(東禪院)으로 5代祖인 紅燐(弘忍)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 나중에는 紅燐으로부터 선法(禪法)을 물려받게 되었다. 燒酒(韶州) 阼階(曹溪)의 보림사(寶林寺)·大汎社(大梵寺)에 머물면서 信徒들의 歸依를 크게 얻었다. 大汎史에서의 慧能의 說法을 中心으로 編纂한 것이 <육조법보단경(六祖法寶壇經)>이란 이름으로 後世에 傳해졌다. 司法(嗣法)을 이어받은 門下의 弟子가 43人을 헤아렸고 中國의 禪宗은 이 門下의 時代부터 隆盛하게 되었다. 그의 系統의 線을 남종선(南宗禪)이라 하여 身數(神秀) 系統의 북종선과 對立하였으나 黨의 末期 以後에는 電子의 것만이 繁榮하였다. 男종(南宗)은 頓悟(頓悟)를, 북종(北宗)은 漸悟(漸悟)를 主張하였다. 後世에 이 兩者의 旋風의 差異를 南頓北漸(南頓北漸)이라 하였다. 門下의 弟子 中에는 請願行事(靑原行思)·남악회양(南岳懷讓)·荷澤燼灰(荷澤神會)·石頭희천(石頭希遷)·靈駕현각(永嘉玄覺) 等이 가장 有名하다. 대감선사(大鑑禪師)라고 시호되었다.

百張 [ 編輯 ]

百丈(749∼814)

唐나라 때 禪僧. 백萇山(百丈山)에서 살았기 때문에 百張이라고 부르지만 正式으로는 百張散會해(百丈山懷海)이다. 휘(諱)는 詼諧(懷海). 푸조우(福州) 장락현(長樂縣:福建省)에서 出生. 瑞山慧條(西山慧照)를 따라 削髮하고 刑事(衡山)의 法調律師(法朝律師) 밑에서 具足戒(具足戒)를 깨우쳤다. 여강(廬江)의 부차社에 들어가 그곳의 警長(經藏) 안에서 大藏經(大藏經)을 硏究하였다. 그後 767年頃에는 南江(南康:江西省)에서 馬祖道一(馬祖道一)을 만나 師事하였다. 마調 밑에서 修道를 하여 隊伍(大悟)하였다. 後에 백萇山(江西省)에 들어가 많은 門下生 弟子들을 地圖 敎化하였다. 그 中에는 황벽희운(黃檗希運)과 위산영우度 있었다. "하루 지음(作)이 없으면 하루 먹지 아니한다"고 하는 百張의 말은 그의 旋風(禪風)을 나타내어 주는 有名한 말이다. 그는 百張山에 율원(律院)으로부터 獨立한 船員(禪院)을 創設하고 다시 율전(律典)의 規定에 拘礙받지 않는 腺腫 讀者의 規律을 만들어냈다. 이것이 '백장청규(百丈淸規)'이다. 많은 修道僧이 일정한 場所에 모여 自給自足하는 集團生活을 營爲하게 되었는데 '백장청규'는 이러한 變化에 副應하는 것이었다.

密敎의 發達 [ 編輯 ]

密敎의 發達 [ 編輯 ]

密敎-發達

密敎라 함은 顯敎(顯敎)에 對한 말로 佛敎의 祕密深奧(秘密深奧)韓 敎理를 뜻한다. 印度의 傳說에 依하면 印度의 密敎는 大日如來(大日如來)로부터 금강살타·用水(龍樹)·用紙(龍智)를 거쳐 金剛砥(金剛智)·善無畏(善無畏)에 傳해졌다고 한다. 中國에 傳來된 것은 오래 前에 東晉時代(東晋時代:317∼419)의 前半에 백시리밀다라(帛尸梨密多羅)와 淡무란(曇無蘭)에 依하여 大灌頂神呪經(大灌頂神呪經), 時期兵經(時氣病經), 청우駐京(請雨呪經) 等의 많은 密敎 經典이 飜譯된 것으로부터 始作된다. 이들 經典은 病을 고치고 비를 오게 하는 注文이나 堤川(諸天)의 威德(威德)을 讚美하는 따위의 注文이 主를 이루며 이른바 이것을 잡밀(雜密)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呪術的(呪術的)인 面이 지나치게 强調되어서 純粹한 密敎라고는 말할 수 없으나 眞言陀羅尼(眞言陀羅尼)나 그 密法(密法)은 中國社會에 깊이 浸透해 들어갔다. 이와 같은 基盤 위에 善無畏(善無畏)·金剛砥(金剛智)·佛供(不空)의 所謂 開院(開元)의 3大社(三大士)에 依하여 密敎의 敎理·意識軌範·曼陀羅(曼茶羅) 따위가 組織되고 體系化되었다. 그들이 傳한 密敎는 <大日經(大日經)>이나 <金剛頂經(金剛頂經)> 等에 基礎를 둔 印度의 正統密敎(正統密敎)였다.

善無畏 [ 編輯 ]

善無畏(637∼735)

唐代(唐代)의 佛敎勝. 印度로부터 中國에 密敎를 傳한 逆境勝(譯經僧). 原名은 슈바카라 甚하(Su­bhakara­simha:淨獅子)라고 한다. 東印度의 誤多國(烏茶國:五里社)에서 出生, 13歲에 出家하였다. 中部 印度의 나란다사(寺)에서 達磨國다(達磨鞠多)에 師事하고 密敎를 배워 그 깊은 뜻을 깨우쳤다.

中國에 가서 密敎를 傳播하라는 스승의 命令으로 캐시미르를 거쳐 716年(開元 4) 長安에 들어왔다. 玄宗皇帝(玄宗皇帝)의 歸依를 받고 興福寺(興福寺)·署名社(西明寺)에 머물면서 密敎를 宣布(宣布)하고 <虛空藏求聞持法(虛空藏求聞持法)>을 飜譯하였다. 724年(開元 12)에는 뤄양(洛陽)의 複船社(福先寺)에 있으면서 이듬해에는 密敎의 根本 聖典 가운데 하나인 <大日經(大日經)> 7卷을 飜譯하였다. 이것은 이미 黨의 學僧(學僧) 無行(無行)李 人道에서 入手하여 黨에 보낸 原形(原型) 6卷에 善無畏가 가져온 것을 더하여 7卷으로 한 것이다. 이 事業에는 弟子 一行(一行)李 必須인(筆受人)으로서 參加하였다. 99歲로 죽을 때까지 다시 몇個의 密敎經典을 飜譯하였다. 弟子에는 保社(寶思)·名詞(明思)·온고(溫古)·一行(一行)·현초(玄超)·醫林(義林) 等이 있다.

金剛砥 [ 編輯 ]

金剛智(671∼741)

唐나라 時代의 佛敎勝. 密敎經典의 逆境子. 原名은 바즈라 보디(跋日羅菩提:Vajra의 第5代祖. 中部 人道의 마라野國(摩羅耶國)에서 태어나 10歲 때에 나란다사(寺)에 出嫁하였다.

聲明(聲明)·人命(因明)을 배우고 다시 大小乘(大小乘)의 율(律)·中觀(中觀)·油價有識(瑜伽唯識) 等을 工夫하였다. 31歲때 南印度에 가서 用紙(龍智)에게서 密敎를 배워 金剛頂經(金剛頂經) 等의 密敎經典에 精通하게 되었다. 38歲때 中部印度에 돌아와 佛跡(佛蹟)을 參拜하고 다시 南印度 및 실론을 巡禮하였다. 716年頃에 中國에의 布敎를 뜻하여 南海를 건너 719年(開元 7) 光州에 到着, 이듬해 뤄양과 長安에 들어갔다. 顯宗(玄宗)의 勅令에 따라 大慈恩寺(大慈恩寺)에 居住하였고 뒤에는 大川複寫(大薦福寺)로 옮겨 密敎經典의 飜譯과 宣敎에 힘썼다. <금강정유가중략출념송경(金剛頂瑜伽中略出念誦經)> 4卷 等 8部 11卷을 飜譯하였다. 密敎의 首都法度 傳하였으며 弟子에 佛供(不空)·慧超(慧超)·援助(圓照) 等이 있다. 그의 시호(諡號)는 臺홍교三藏(大弘敎三藏)이다.

佛供 [ 編輯 ]

不空(705∼774)

唐나라 時代의 佛敎勝. 密敎經典의 逆境子. 原名은 아모가바즈라(Amoghavajra)이고 飜譯해서 佛供錦江(不空金剛)이라고 하며 普通 佛供이라 略稱한다. 密敎唱法의 第6代祖. 실론(一說에는 북인도)에서 태어나 720年(開元 8)에 스승인 金剛砥(金剛智)를 따라 南海를 經由하여 뤄양(洛陽)에 왔다. 以後 約 30年間 金剛智에게서 密敎를 배우고 산스크리트와 中國語의 才能을 살려 스승의 逆境事業을 도왔다. 金剛智가 죽은 뒤 그의 維持를 받들어 含光(含光) 等과 함께 실론·引渡에 건너갔다. 于先 실론의 普賢阿闍梨에게서 祕法을 배우고 뒤이어 印度 各地를 돌아다니면서 많은 梵本(梵本)과 密敎經典을 얻어가지고 746年(天寶 5)에 長安에 돌아왔다. 그後 顯宗(玄宗)·肅宗(肅宗)·大宗(代宗)의 3代에 걸쳐 厚한 待接을 받고 大興善寺(大興善寺)에서 逆境에 專念하였다. <金剛頂經(金剛頂經)>을 비롯해 110部 143卷을 飜譯하고 後世에 4臺飜譯家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게 되었다. 逆境뿐만 아니라 手法(修法)과 官庭(灌頂)도 行하고 密敎의 布敎에 努力하였다. 弟子에는 含光(含光)·慧超(慧超)·惠果(惠果)·혜랑(慧朗)·원교(元皎)·刻草(覺超) 等 여섯 사람의 上足(上足)이 있다.

有·佛·道의 對立과 融合 [ 編輯 ]

3橋談論 [ 編輯 ]

三敎談論 唐나라 中期부터 盛行하게 된 宮中에 있어서의 儒敎·佛敎·道敎의 代表者들에 依한 討論會. 皇帝의 誕生日을 祝賀하고 記念하기 위하여 3校의 代表者的인 學者들을 宮中에 招待하여 討論을 벌이는 行事가 每年 開催되었다.

3校의 談論은 黨의 初期 高調(高祖) 時代부터 始作되었다고 하며 高調는 624年(武德 7)에 博士(博士) 曙光(徐曠)에게 <孝經(孝經)>을, 沙門(沙門) 慧勝(慧乘)에게는 <心境(心經)>을, 道士 유진희(劉進喜)에게는 <老子(老子)>를 各各 講義하게 하였다. 또 太宗(太宗)은 639年(貞觀 13)에 濟州(祭酒) 孔穎達(孔潁達), 沙門(沙門) 惠政(慧淨), 道士(道士) 채황(蔡晃)의 3人에게 홍문展(弘文殿)에서 3校에 對한 談論을 하게 하였다. 그後 大宗(代宗)·德宗(德宗)·警鐘(敬宗)·文宗(文宗)·武宗(武宗)·腺腫(宣宗)·毅宗(懿宗)·小宗(昭宗)과 歷代 皇帝를 통하여 年例行事로 開催되었으나 次次 意識化되어 眞摯한 맛이 없어져가게 되었다. 이리하여 3橋談論은 初期의 宗敎討論會와 같은 것으로부터 全혀 內容이 없는 宮中儀禮의 하나로 變化되고 말았다. 3校의 抗爭은 黨의 中期부터 激化되었으나 抗爭의 裏面에는 서로 融合하려는 움직임도 있어서 절에서는 老子의 像을 그려 붙이기도 하고 柚子(儒者)나 道士(道士)로서 佛敎를 硏究하여 出家하는 者까지 出現하게 되었다.

法林 [ 編輯 ]

法琳(572∼640)

手當(隋唐)時代의 佛敎勝. 永川郡(潁川郡:河南省)에서 出生하여 어려서 出家하였다. 박학하여 特히 三論(三論)에 精通하였는데 道術을 배워 道士로 轉向하였다. 다시 佛敎에 歸依한 뒤로는 長安의 眼眥法師(安濟法寺)에 자리잡고 講說을 폈다.

621年(武德 4)에 附革(傅奕)李 寺院僧尼事態(寺院僧尼沙汰) 11條를 尙州(上奏)하였을 때 卽時 上疏를 올려 잘못을 指摘하였다. 또한 이중향(李仲鄕)李 <십이구미론(十異九迷論)>, 유진희(劉進喜)가 <현정론(顯正論)>을 지어 佛敎를 非難하였을 때에 그는 <邊情論(辯正論)> 8卷을 지어 猛烈한 反論을 展開하였다. 太宗은 勅命으로 終南山(終南山)의 大花宮(大和宮)을 용전사(龍田寺)로 바꾸고 그를 이 절의 住持로 삼았다. 爬羅爬羅가밀다라(波羅頗迦羅密多羅)의 驛長(譯場)에서 必須鐵門(筆受綴文)에 從事하여 寶城陀羅尼經(寶星陀羅尼經)의 서(序)를 지었다. 道傳承後(道前僧後)의 制度를 만들려고 하였을 때 卽時 抗議하였으나 道士의 讖言(讒言)을 받아 罪人으로 逮捕되어 苛酷한 追窮을 받았다. 그러나 自己 主張을 굽히지 않고 200餘 條目을 들어 反擊함으로써 結局 死刑을 謀免하였다. 호법(護法)을 위하여 신명을 걸고 싸운 論客(論客)으로 알려졌다.

交線一致 [ 編輯 ]

敎禪一致

敎宗(敎宗), 卽 말과 글을 통하여 가르침을 펴는 宗派와 腺腫(禪宗), 卽 말과 글에 依하지 않고 佛陀의 마음을 傳하고자 하는 宗派가 서로 一致한다는 主張. 前者는 天台宗(天台宗)·華嚴宗(華嚴宗) 等이고 後者는 所謂 腺腫(禪宗)을 말한다. 交線一致의 主張은 黨(唐) 中期의 華嚴宗 第4代祖인 澄觀(澄觀)의 思想으로부터 싹이 터서 第5代祖 宗密(宗密)에 依하여 明瞭한 形態로 나타났다. 宗密은 처음 선을 工夫하고 後에 澄觀의 가르침을 받아 華嚴敎學(華嚴敎學)에 精通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華嚴과 線을 融合·一致시키고자 交線一致論을 主張하였다. 이 交線一致의 思想은 宋代(宋代)에 이르러 次次 뚜렷해져서 善과 敎宗의 融合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五代(五代)와 송初(宋初)의 英明硏修(永明延壽)의 交線一致 主張을 비롯하여 천태선·華嚴禪·念佛禪 等이 두드러지게 流行하게 되었다. 敎宗을 배우는 者가 先文(禪門)을 두드리기도 하고, 線에 몸 담은 自家 敎宗의 提學(諸學)을 探究하는 일도 흔히 있었다. 宋代 以後에는 大衆的인 念佛과 線을 融合시킨 念佛禪(念佛禪)이 가장 蕃盛하였다.

천태선 [ 編輯 ]

天台禪

所謂 腺腫(禪宗)李 發生하기 數世紀 前에 天台(天台) 智者大師(智者大師, 538∼597)는 모든 佛敎를 선(禪)이라는 한 글字로 統一하고 모든 遂行(修行)을 坐禪(坐禪)으로 要約하였다. 이 一門(一門)을 腺腫이라 부르고 그 影響은 後世의 선 集團을 통하여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었다. 天台大師(天台大師)의 <初學坐禪地官窯門(初學坐禪止觀要門)>(通稱 小止觀이라 函)은 坐禪에 關한 冊으로는 史上 처음 完成된 것으로서 이 冊을 模範으로 하여 뒤에 中國·日本의 坐禪의(坐禪儀)에 關한 여러 種類가 생겨났다.

天台大師는 坐禪을 蠻行(萬行)의 歸趣(歸趣), 地官을 坐禪의 內容이라 하여 이를 說破한 것이 <摩訶止觀摩訶止觀)>이다. 代表的인 著書로는 <선문수症(禪門修證)>으로서 선(禪)이라는 한 者에 佛敎를 內包시키고 있다. 이들 著書에 실린 思想은 坐禪이 佛敎의 首都에 있어서 가장 重要한 것이고 地官(止觀)은 坐禪하는 가운데 깨달아야 한다고 하였다. 卽 坐禪의 思想的 內容을 具體的으로 明白히 한 것이 止觀으로 <선문수症>에 있어서의 선 思想이 圓熟해져서 <摩訶止觀>과 같은 地官思想에 이르게 된 契機를 보여주고 있다. <摩訶止觀>에서 지(止)는 廉(念)을 法階(法界)에 매고 管(觀)은 殮을 法界와 一致시킨다고 定義하고 이를 合하여 地官(止觀)이라 하여 線의 思想的 內容을 合理的으로 解明하였다.

이 天台止觀(天台止觀)의 思想體系는 또한 천태선(天台禪)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念佛禪 [ 編輯 ]

念佛禪

交線一致(敎禪一致) 思想은 黨의 中期 以後 特히 宋代(960∼1280)에 들어와 漸次 두드러지게 되었다. 五代(五代, 907∼960)와 송初(宋初)에는 英明硏修(永明延壽, 904∼975)의 交線一致설이 한層 이름이 높았고 天台·華嚴·淨土의 學徒로서 線을 硏究하고 船價(禪家)에서 敎學(敎學)을 工夫하는 者도 出現하였다. 그 中에서도 念佛禪이 가장 성하였으며 淨土宗(淨土宗)은 後世에 들어와 특별한 하나의 宗派라기보다는 各 宗派의 사람이 念佛信仰을 갖게 됨으로써 盛行하였다. 宋代의 淨土敎徒로서 有名한 사람이 선·천태 出身 中에 많고 特히 天台系統의 淨土敎가 盛行하였다.

禪宗에서는 염선일치(念禪一致)를 主唱하고 <鐘磬錄(宗鏡錄)> 100卷, <萬선동귀집(萬善同歸集)>을 지은 英明硏修(永明延壽)를 비롯하여 종이·種本(宗本)·法手(法秀)·議會(義懷) 等이 모두 念佛禪 出身이고 選定習合(禪淨習合)을 醉한 人物들이었다. 線이 크게 떨쳤던 宋代에 있어서도 選定(禪淨)의 人物들이 많았고 擧事(居士)로서의 양걸(楊傑)·王일휴(王日休) 等이 有名하다. 王일휴는 <容恕淨土門(龍舒淨土文)>을 지었다. 이와 같은 風潮로 인하여 禪宗은 가장 성하였으며 이들 人物과 信者들이 一般社會의 宗敎로서 民衆 속에 깊이 뿌리를 박고 애호되고 普及되었던 淨土敎를 배워 每日의 日課로서 未妥(彌陀)의 이름을 외게 됨에 따라서 念佛禪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名臺(明代)에 와서도 亦是 選定融合(禪淨融合)의 形態인 所謂 念佛禪이 盛行하였다 한다. 淸朝(淸朝)의 雍正帝(雍正帝:在位 1722∼1735)는 스스로 原名擧事(圓明居士)라 稱하며 熱心히 線에 精進하고 그 中에서도 淨土(淨土)를 信奉하여 線을 鼓吹하였다. 民間에서는 明代 以後 이와 같은 形態로서 佛敎가 신봉되고 實踐되었다.

宋學과 線 [ 編輯 ]

宋學-禪

宋代에 와서 訓詁學으로부터 脫皮하여 性(性)을 中心으로 하는 새로운 性理學이 나오게 되었는데 이를 송학(宋學)이라 한다. 이 송학자들 中에는 學問과 實踐方法으로서 參禪을 하는 일도 있어서 주렴계(周濂溪)는 귀從事(歸宗寺)의 불인(佛印), 동림사(東林寺)의 上寵(常總)으로부터 佛敎 學問을 배웠고, 장횡거(張橫渠)도 上寵에게 배웠으며, 정명도(程明道)는 鹵石(老釋)을 工夫하기를 數十年 동안 하였다 하고, 정이천(程伊川)도 線을 배웠다 한다.

特히 走者(朱子)는 어릴 때부터 대혜鐘鼓(1163年 寂)의 <대혜語錄(大慧語錄)>을 愛讀하고 黨의 禪僧(禪僧) 위산영우의 思想을 사랑하였다. 그러면 어찌하여 線이 當時 名儒(名儒)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었던가? 線은 簡單明瞭한 敎理에 依據하여 直切(直截)韓 首都方法으로 地心見性(指心見性)을 攄得하고자 하였다. 또한 當時에 차차 整備되어 간 僧院(僧院)은 다른 宗派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고 그 中에서 初犯脫俗(超凡脫俗)韓 大德(大德)들이 많이 排出되어 後輩를 指導하였다. 또 基地에 차고 峻烈한 問答과 對談(對談)에 가득 찬 船價(禪家)의 語錄(語錄)에는 淸新하고 奇拔한 文字가 躍動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充分했다.

(1) 地心見性(指心見性) ―― 선(禪)이 교상(敎相)에 치우치지 않고 文字에 빠지지 않으면서 單刀直入으로 自己의 心性(心性)을 求하여 大成하려고 한 首都의 方法. 이것은 道가(道家)의 酒酊復歸(主靜復歸)와 符合될 뿐만 아니라 留學(儒學)의 眞心知性(盡心知性)과도 調和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選의 실참失手(實參實修)에 依하여 비로소 道家에서 追求하는 理想鄕(理想鄕)에 이를 수 있으며 또한 儒敎의 뜻을 文字로 表現함에 있어 더욱 깊은 뜻을 줄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孔子·老子의 가르침은 善意 仲介 役割에 依하여 內容上으로 融合할 수 있었다.

(2) 僧院(僧院)의 淸規(淸規) ―― 僧院의 規則은 <백장청규(百丈淸規)>로부터 비롯된 淸規에 依한 것인데 이것은 佛敎의 戒律과 儒敎의 禮樂(禮樂)과의 調和를 實際主義를 통하여 이룩한 것이다. 그 밑바탕에는 解脫에의 欲求를 갖고 있으며, 戒律의 形式에 따라서 形成된 禮樂은 形式에 빠지기 쉬운 儒敎에 비하여 眞摯하며 아울러 자연스럽게 行해졌다.

<咸淳淸規서(咸淳淸規序)>에 "우리에게 淸規 있음은 油價에 禮敬(禮經)이 있음과 같으니라"라 하고 <地帶淸規서(至大淸規序)>에 "叢林禮法(叢林禮法)의 對境(大經)이로다"라 하여 모두 淸規로서 有(儒)의 例로 삼고 있다.

(3) 肝銘(簡明)과 脫俗(脫俗) ―― 不立文字(不立文字)를 標榜하는 線은 異性과 正뿐만 아니라 곧바로 모든 人格에 呼訴할 것을 要求하고 煩雜한 筆舌(筆舌)에 빠지게 되는 것을 避하였다. 脫俗(脫俗)하여 超然한 立場에 서고 그 言動이 스스로 規求(規矩)에 合致되므로 社가(師家)의 名目을 發揮하는 船長(禪匠)의 生活은 形式的으로 되기 쉬운 油價(儒家)의 무리에 對하여 신풍(新風)을 불어 넣어주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船長(禪匠)의 簡明과 脫俗은 道가(道家)의 虛無恬淡과 매우 類似하여 많은 제가(諸家)가 共鳴하는 바였다.

朱氏(周氏)·小子(蘇子)의 법우(法友)였던 불引料원(佛印了元)과 歐陽脩(歐陽脩)의 法友였던 兆인거눌(祖印居訥), 장상영(張商英)의 法友였던 德홍角犯(德洪覺範) 等은 儒佛 2度(儒佛二道)에 達通하고 文才(文才)에 뛰어나 當時의 學者들을 움직였다. 종문(宗門) 第一의 서(書)라고 일컬어지는 <碧巖集(碧巖集)>과 黨의 中期 以後에 처음으로 敎界의 表面에 나타난 <楞嚴經(楞嚴經)>은 많은 사람에게 愛讀되었고 擧事(居士)로서 註釋者(註釋者)가 된 사람도 있다.

擧事佛敎 [ 編輯 ]

居士佛敎

五代(五代)와 송(宋)으로부터 近代에 걸쳐 擧事를 中心으로 行하여진 佛敎를 말한다. 居士라 함은 元來 關係에 나가려는 뜻을 버리고 佛敎의 門에 들어온 士大夫(士大夫)를 말한 것인데 이 時期에는 相當한 社會的 地位에 있으면서 佛敎의 經典과 敎理에 關하여 깊은 知識을 가지고 自己의 財産을 나누어 敎團의 保護와 育成에 힘쓰는 篤志家를 가리켰다. 五代로부터 송으로 넘어와서는 念佛結社(念佛結社)가 이곳 저곳에 생기고 知識人들間에 熱烈한 信者들이 생겨났다. 또 禪宗이 盛行되면서 송학(宋學)에 큰 影響을 미쳐 많은 油價(儒家)가 佛敎와 關聯을 맺게 되어 양억(楊億)·소식(蘇軾)·양걸(楊傑)·王安石(王安石) 等은 佛敎의 篤實한 信者이기도 하였다. 名臺말(明代末)로부터 淸代初(淸代初)에는 儒佛도(儒佛道) 3校의 融合이 顯著해져서 깊은 儒敎的 敎養을 몸에 지닌 속에 巨事가 선·정토·율을 같이 배우고 念佛信仰을 믿었다. 이러한 形態가 佛敎의 主流를 이루게 되었다. 이 時代에는 진헌장(陳獻章)·王陽明(王陽明)·袁宏道(袁宏道)·駐克服(周克復)이 있었고 또 韻書주굉의 門下에는 많은 巨事가 養成되었다. 다시 淸代에 들어와서 居士佛敎는 더욱 盛行하게 되었다.

庶民佛敎 [ 編輯 ]

庶民佛敎

庶民들에 依하여 신봉된 佛敎. 大衆的인 佛敎라고 할 수 있다. 當代(唐代) 以後의 庶民 사이에는 未妥信仰(彌陀信仰)의 淨土敎(淨土敎)가 가장 널리 信奉되었었는데 이것과 竝行하여 彌勒(彌勒)의 淨土에 往生(往生)하고자 하는 彌勒信仰度 旺盛하였다.

또한 法華經의 讀誦과 敍事(書寫)의 功德은 여러 가지 災難으로부터 몸을 保護해 준다고 믿어져서 特히 法華經 中의 觀音經(觀音經)에 依한 觀音信仰이 普及되었고, 十一面觀音(十一面觀音)·千手觀音(千手觀音)·如意輪觀音(如意輪觀音) 等이 各各 信仰의 對象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五臺山(五臺山)의 文殊信仰(文殊信仰)도 빠뜨릴 수 없는 것이다. 佛舍利(佛舍利)에 對한 信仰도 盛行하여 舍利塔이 곳곳에 세워졌다.

地藏菩薩(地藏菩薩)의 信仰과 密敎의 傳來에 依한 陀羅尼(陀羅尼)의 信仰도 널리 行해졌다. 庶民의 마음에 가장 큰 呼訴力을 가졌던 것은 十王審判(十王審判)의 思想이었다. 이것은 中國에서 만들어진 十王卿(十王經) 等의 經典에 根據를 둔 것으로서 사람은 죽으면 閻羅大王 以下 열 사람의 王에 依하여 罪가 審判된다고 믿는 것이었다. 이에 根據하여 七七日(七七日) 中音(中陰)의 七齋(七齋) 行事와 追善供養(追善供養)을 위한 十王再(十王齋) 信仰이 形成되었다.

行脚僧(行脚僧)李 各地에서 俗講(俗講)을 하는 가운데 이러한 說話를 使用하였던 것이 廣範圍하게 流布되었다.

白蓮宗 [ 編輯 ]

白蓮宗

南宋(南宋)으로부터 원(元)·明(明) 時代에 걸쳐 盛行된 代表的인 民間 新興宗敎. 白蓮敎라고도 한다. 南宋의 高宗(高宗) 때에 오군(吳郡:蘇州) 聯想社(延祥寺)의 沙門(沙門)인 자조자원(慈照子元:?∼1166)李 創始한 것으로 彌陀念佛을 遂行하고 戒行(戒行)을 嚴修하였던 것으로 여산(廬山) 蕙園(慧遠)의 白蓮寺(白蓮社) 이름을 따서 白蓮채(白蓮菜)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다. 알기 쉬운 方法으로 布敎를 하였기 때문에 많은 男女가 入敎하였고 稅金과 勞役을 면하려고 하는 貧農出身의 사람들도 이 門下에 모여들었다. 敎勢가 擴張됨에 따라 이 宗敎의 結社(結社) 活動은 彈壓을 받게 되고 自願(子元)은 유배당하였다. 南宋 末期부터 원臺에 걸쳐 쟝쑤·저쟝·푸졘 等의 地方에서 隆盛을 보았으나 여러 次例 邪敎로 看做되어 禁止와 彈壓을 받았다. 刊經(看經)과 念佛을 男女가 섞여서 하고 밤에 모여 아침에 흩어졌으므로 當時의 支配者는 社會不安을 招來한다는 理由로 政治的인 彈壓을 加하였다.

名(明) 末期에는 白蓮宗 속에 貧農과 下層民間에 行해지던 彌勒下生(彌勒下生)의 가르침이 混合되어 그 性格이 變化되었다. 名臺와 청대를 통하여 加重된 彈壓에도 不拘하고 反政府的인 祕密結社를 組織하여 各地에서 叛亂과 蜂起를 일으켰다.

백운종 [ 編輯 ]

白雲宗

송(宋)·元(元)時代의 民間宗敎. 백운채(白雲菜)라고도 한다. 北送(北宋) 末頃에 뤄양(洛陽) 步應四(寶應寺)의 中 聽覺(淸覺)李 항저우(杭州) 白雲巖(白雲庵)에 자리잡고 새로 연 宗敎로서 敎徒는 宗祖(宗祖)인 聽覺(淸覺)을 백운화상(白雲和上)이라 부르고 그의 가르침을 백운종이라고 하였다.

極端的으로 腺腫(禪宗)을 攻擊하였으므로 腺腫으로부터 激烈한 反擊을 받고 邪敎로 判定되어 聽覺은 멀리 은주(恩州:廣東省)에 追放되었다. 그가 죽은 後 弟子 慧能(慧能)李 遺骨을 閭巷南山(余杭南山:浙江省)에 葬事지내고 그곳에 白雲山 보령사(普寧寺)를 建立하였으며 以後 이 절을 中心으로 하여 저쟝 脂肪이 백운종의 根據地가 되었다.

백운종은 天台宗의 敎界(敎系)를 이어받아 禪宗을 排斥하고 大勝十指(大乘十地)의 菩薩三昧(菩薩三昧)에 週(住)하여 利他行(利他行)에 精進하고 白蓮宗과 같이 葷酒肉食을 禁하는 戒律主義의 信仰團體로서 誘發(有髮) 裁可宗敎(在家宗敎)였다. 官憲의 迫害와 彈壓에도 不拘하고 깊이 民間 속으로 浸透해 들어가 元代에는 江南地方에 一帶 勢力을 形成하였다. 그러나 그後 敎主 심명인(沈明仁)의 非違 事實이 原因이 되어 禁斷(禁斷)을 當하여 衰亡하고 말았다.

1290年 完成된 <항주여항현백운종남산대보령사대장경(杭州余杭縣白雲宗南山大普寧寺大藏經)>은 백운종 信徒의 努力에 依하여 出版된 것이다.

征服王朝下衣 佛敎 [ 編輯 ]

賤人邑會 [ 編輯 ]

千人邑會

요·금시대(遼·金時代)에 나타난 僧俗(僧俗)의 信仰團體. 起源은 南北朝 時代의 法司(法社)·醫邑(義邑)에까지 溯及되는 것으로서 黨 末期頃에 盛行하였던 結社와 同一한 것인 듯하다.

信仰人들의 모임임과 同時에 일정한 會費를 納付하고 이로써 會員에게 經濟的 援助를 해준다는 性格이 剛하였다. 假令 金나라때의 樂中部(樂中府) 三學士(三學寺)의 賤人邑會는 그 절에 있는 僧侶의 生活을 維持하고 保障해 주기 위하여 設置되어, 會員은 僧侶도 包含하여 每年 10月에 돈 200板(貫), 쌀 한 말을 바쳐야 한다는 規定이 있었다. 또 未妥信仰(彌陀信仰)을 中心으로 하는 彌陀邑會(彌陀邑會)도 있었다.

이세호 [ 編輯 ]

二稅戶

腰帶(遼大) 民戶(民戶)의 一種. 契丹(契丹)의 宗室(宗室)·貴族·功臣·寺院에 주어진 민호로서 그들은 歲의 班을 政府에, 班은 所屬된 貴族과 寺院에 바쳐야 할 義務가 있었다.

이 때문에 이와 같은 民戶를 이세호라고 불렀다. 尿意 滅亡과 더불어 宗室과 貴族에 所屬된 이세호는 良好(良戶)가 되었다. 寺院에 所屬된 이세호만은 金의 時代에도 存續되었고 寺院의 僧徒들의 壓迫에 依하여 奴隸로 轉落하게 되었다. 當時 一部 社員이 經濟的으로 富裕하게 된 것은 이러한 이세호를 많이 所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萬송행수 [ 編輯 ]

萬松行秀 (1166∼1246)

金나라 時代의 佛敎勝. 曹洞宗(曹洞宗) 請願(靑原)下의 23歲(世) 禪僧(禪僧). 河內(河內:河南省)에서 出生하여 자주代名詞(磁州大明寺)의 舌癌만(雪巖滿) 아래에서 隊伍(大悟)하고 뒤에 만송헌(萬松軒)을 지어 여기에 者的(自適)하였다.

章宗(章宗)의 歸依를 받고 여러 큰 절에 머물다가 뒤에 종鎔巖(從容庵)에 隱退하여 굉지(宏智)의 白松(百頌)을 評釋(評釋)韓 <종용록(從容錄)>을 著述하였다.

嚴格한 修繕(修禪)에 精進함과 同時에 華嚴敎學에도 精通하였고 佛敎뿐만 아니라 留學(儒學)과 기타 提學(諸學)에도 豐富한 知識을 갖고 있었다. 門下에는 種尹(從倫)·複禹(福祐)·이순보(李純甫) 等이 있다.

팔사파 [ 編輯 ]

八思巴(1235〔1239?〕∼1280)

파스파(Hphagspa)라고도 한다. 元祖(元朝)의 招待 祭祀(帝師)가 된 티베트 사키야파의 法王. 어렸을 때부터 매우 怜悧하여 파스파(贅者)라고 불리었다. 卽位하기 前에 쿠빌라이에게 界(戒)를 授與했고, 그의 卽位와 함께 祭祀(帝師)의 地位에 올랐다.

이때에 그는 티베트의 行政權, 蒙古 全體의 佛敎行政權, 僧侶의 特權 等을 쿠빌라이로 하여금 升引토록 하였다. 1269年 티베트 文字에 基礎를 둔 蒙古 文字를 만들었다. 이것이 파스파 文字이다. 1274年 아우인 린첸에게 國史의 地位를 물려주고 歸國했다.

名·靑의 佛敎 [ 編輯 ]

三從一圓 [ 編輯 ]

三宗一源

名(明)의 太祖(1368∼1398)가 禪僧(禪僧) 出身이라고도 하며, 宰相이었던 宋濂(宋濂)도 절에 있었다고 한다. 이로 말미암아 이들 두 사람은 다 같이 佛敎와 佛敎徒를 保護하고 大藏經의 刊行을 行하였다. 終歲(宗勢)로서는 禪宗이 우뚝하여 다른 宗派는 이에 미치지 못하였으며 天台·華嚴·淨土의 第宗派는 敎宗合同(敎宗合同)의 傾向이 있었다. 著名한 佛子(佛者)로서는 德淸(德淸:山大師, 1546∼1623)·주굉(1535∼1615)·智旭(智旭) 等이 있다.

이 中에서 주굉은 線(禪)을 깊이 硏究하고 淨土(淨土)를 念願하여 善과 淨土에 關한 著述이 많으며 思想은 諸宗派合同의 傾向을 갖는다.

儒者(儒者) 出身인 智旭은 주굉의 <者地록(自知錄)>을 읽고 주굉을 欽慕해서 出嫁하여 天台·法上(法相)·念佛에 精進하였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 宗派에 局限하지 않고 佛敎 全體를 硏究하고 그 참뜻을 밝혀보려 하였다. 그 스스로 팔불道人(八不道人)이라고 自稱한 것은 有名한 일이다. 스승 주굉과 마찬가지로 諸宗派合同의 傾向을 明白하게 나타내고 性狀融會(性相融會)의 뜻을 품었으며 또한 選定融合(禪淨融合) 思想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線은 佛心(佛心), 校(敎)는 불어(佛語), 율(律)은 不幸(佛行)으로 불(佛)은 3學(三學)에 依하여 되는 것이므로 3學(宗)에 依해서 불도(佛道)를 이루어야 한다면서 3學一致의 趣旨에 따라서 佛敎의 第宗派는 一圓(一源)에 歸一돼야 할 것이라고 主張할 程度였다. 그러나 3學一致(三學一致)는 理論이었고 實踐方法으로서는 念佛을 들었기 때문에 3學(宗)은 念佛에서 나와 念佛에 歸着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를 가리켜 三從一圓(三宗一源)이라고 한다.

韻書주굉 [ 編輯 ]

(1535∼1615)

人和(仁和:浙江省)에서 出生하였으며 蓮池大使(蓮池大師)라고 尊稱된다. 華嚴宗의 學僧(學僧) 便융(辯融)과 禪僧 小庵(笑巖)에게서 佛學(佛學)을 배웠으나 後에 여러 곳을 遍歷한 後 마침내 항저우(杭州:浙江省)의 韻書(雲棲) 山골짜기에 들어갔다.

그는 이곳에 韻敍事(雲棲寺)를 다시 일으키고 門下의 弟子 敎育, 信徒의 敎化에 盡力하였다. 그 밑에 1000餘인(人)의 僧俗(僧俗)李 모여들었다고 傳해지는데 그 中에서 狂人(廣印)·원현(元贅) 等이 有名하다. 그의 思想的인 特色은 여러 宗派를 融合하여 統一的인 佛敎를 樹立하려고 하였던 點에 있다. 그는 戒律(戒律)의 復興에 努力하고 戒律을 基礎로 하여 이에 선(禪)과 念佛을 融合시켰다.

一切의 行爲를 善惡2門(善惡二門)으로 나누고, 善惡의 功過(功過)를 點數로 標示하여 하루하루의 行爲의 向上을 圖謀하고자 하는 功過格(功過格)思想을 重視한 點도 빠뜨릴 수 없다. 여기에서 그의 有·佛·道 3校의 調和思想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교에 對해서 敵對的이었으며 當時 中國에 온 宣敎師 마테오 리치와 激烈한 論爭을 交換하였다. <選管冊眞(禪關策進)>·<者地록(自知錄)> 等 많은 著述을 남겼다.

3敎一致 [ 編輯 ]

三敎一致

儒敎·佛敎·道敎의 3校는 各其 成立 經緯와 思想的 性格을 달리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 3校를 조화시켜 折衷融合하려는 움직임이 三國時代 以後 끊임없이 나타났다. 손작(孫綽)의 <誘導論(喩道論)>, 朱翁의 <三從론(三宗論)>, 睾丸(顧歡)의 <이하론(夷夏論)> 等이 3敎條化의 立場에 있으며 맹경益(孟景翼)의 <正일론(正一論)>과 顔之推(顔之推)의 <家訓(家訓)>은 2敎一致(二敎一致)를 主張하고 있다. 수대(隋代)의 이사겸(李士謙)이나 王統(王通), 當代(唐代)의 양숙(梁肅)·이고·징관(澄觀)·종밀(宗密)·여동빈(呂洞賓) 等은 立場이나 뉘앙스에 差異는 있으나 모두 3교합일論을 펴고 있다. 宋代(宋代)에서는 계숭(契崇)·장상영(張商英)·孝宗皇帝(孝宗皇帝)·이순보(李純甫) 等이 있으며 원臺(元代)에는 流蜜(劉謐)이 있다. 名臺(明代)의 代表的인 佛敎人으로서는 韻書주굉과 減産德淸·右翼紙욱(藕益智旭) 等이 各各 諸宗融合, 3敎條化思想을 품고 있었다. 그 中에서도 德淸의 <3敎員類移動論(三敎源流異同論)>(一名 <觀老莊影響論>)은 佛敎의 立場에서 본 3敎一致論으로서 注目할 만한 價値가 있다.

減産德淸 [ 編輯 ]

(1546∼1622)

金陵의 前哨(全椒:安徽省)에서 태어났다. 減産은 戶로서 減産臺詞라고 尊稱된다. 11歲에 出家의 뜻을 품고 佛敎의 經論과 儒敎의 轉籍을 가까이 하였다. 19歲때 出家하여 便융(辯融)·小庵(笑嚴)·耘谷(雲谷) 其他 많은 스승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 旋風(禪風)을 振興함은 勿論 廬山에 草庵(草庵)을 짓고 念佛을 닦았다. 그의 思想은 善과 華嚴과의 融合에 核心을 두고 있으며 이로써 諸宗弔花를 꾀하려 하였다. 그의 著作으로는 <管凌駕京畿(觀楞伽經記)>·<法華經通의(法華經通義)>·<원각경직해(圓覺經直解)>·<기신론직해(起信論直解)> 等 特定한 宗派에 拘礙받지 않는 폭넓은 點이 있다. 또한 <重用直指(中庸直指)>·<노자해(老子解)>·<莊子內篇週(莊子內篇註)> 等을 著述했는데 이들은 모두 佛敎思想으로서 儒敎와 노장思想의 全的(典籍)을 解釋한 것으로 3敎條化思想이 나타나 있다. <官奴場影響론>(<三敎源流異同論>이라고도 한다)은 3校를 論한 것으로서 有名하며 3橋 移動(異同)의 比較 檢討를 통하여 調和點을 찾아보려고 努力하였다.

王陽明 [ 編輯 ]

王陽明(1472∼1528)

明代의 儒敎學者. 이름은 囚人(守仁), 字는 백안(伯安), 號를 양명이라고 한다. 이른바 陽明學(陽明學)을 펴낸 사람. 저쟝性 出生. 科擧를 보기 위하여 朱子學(朱子學)을 배웠으나 多情多感하고 豪快한 氣質로 인하여 官學的(官學的)이고 形式的인 朱子學에 滿足할 수 없어서 任俠(任俠)·技士(騎射)·文學·道敎·佛敎 等에 次例次例로 耽溺하였다(이를 五溺이라 한다). 28歲때 進士에 及第하여 管理生活에 들어갔으나 35歲때 宦官(宦官)의 橫暴를 非難하였으므로 貴州省(貴州省)의 勇將驛(龍場驛)으로 左遷되었다. 그의 格物致知(格物致知)·知行合一(知行合一) 學說이 誕生한 것은 이런 時期였다. 39歲에 歸鄕을 許諾받고 돌아와서 心卽理(心卽理) 學說을 發表하였다. 이에 따르면 格物(格物)이라는 것은 自己의 마음속에서의 일(物)을 바르게 하는 것(格)으로서 주자(朱子)가 말하는 것과 같은 外傳人 물(物)의 이(理)를 追求하여 이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의 學說에는 佛敎, 特히 善과 華嚴思想(華嚴思想)李 들어 있으며 그 自身 擧事(居士)로서 佛敎에 好意를 품고 있었다. 57歲 때에 致良知說(致良知說)을 主張하였다. <大學古本(大學古本)>·<走者萬年正論(朱子晩年定論)>·<傳習錄(傳習錄)> 等을 著述하였다.

民間佛敎 [ 編輯 ]

民間佛敎

中國에 있어서의 民間佛敎, 卽 一般 庶民이 信仰하였던 佛敎는 明淸時代(明淸時代)에도 全代(前代)에 비하여 變化가 없었다. 敎團佛敎의 一般的인 形態는 選定融合(禪淨融合)으로서 坐禪과 念佛이 아울러 行해지고 있었으나 民間에서 行해지고 있었던 佛敎는 道敎와 民間信仰이 混淆(混淆)된 雜多한 要素를 包含하고 있어서 複雜한 樣相을 나타내고 있었다. 特히 觀音信仰(觀音信仰)이나 支障信仰(地藏信仰)은 阿彌陀(阿彌陀)나 彌勒信仰(彌勒信仰) 못지 않게 성해서 道敎도(道敎徒)들에게도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또한 反對로 道敎的인 황제상(皇帝像)이나 身上(神像)李 社員 內에서 받들어지게 되었고 道敎的인 行事가 擧行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庶民에게는 信仰의 對象이 佛菩薩(佛菩薩)이건 道敎의 神들이건간에 크게 다를 바가 없었고, 自己의 所願을 들어주고 幸福을 내려주는 것이면 좋은 것이었다.

佛敎思想 가운데에는 因果應報 思想, 特히 그 中國的 發展 形態인 十王史上(十王思想)李 꽤 깊숙이 浸透해 있었다. 地獄의 審判, 地獄의 悽慘한 모습은 庶民들에게 恐怖感을 주어서 罪意識을 키워주게 하였다.

變革期의 佛敎 [ 編輯 ]

變革期-佛敎

1911年의 辛亥革命으로 인하여 淸朝(淸朝)가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成立되었다. 淸末(淸末) 以來의 묘산흥학(廟産興學) 事業은 中華民國에 繼承되어 寺院이나 僧侶는 새로운 社會에 있어서는 無用之物이라는 極端論조차도 나타나게 되었다. 모든 옛것을 一掃하고 近代化를 推進하고자 하는 5·4 運動(五四運動)에 이르러 이러한 움직임은 絶頂에 達하였고 有·佛·道 3校나 民間의 迷信的 宗敎에 對한 批判이 심해졌다. 이에 對하여 佛敎側에서는 民國 初期 以來 大同團結하여 佛敎의 危機를 打開해보려는 움직임이 여럿 있었는데 1929年에는 太虛(太虛) 等에 依하여 中國佛敎聯合會가 結成되었다. 太虛는 뒤에 난징(南京)에서 中國불學會를 만들고 雜誌 <海潮音(海潮音)>을 主宰하여 밖으로는 佛敎徒의 利益을 擁護함과 同時에 안으로는 敎團의 革新을 積極的으로 主張하였다. 政府의 '四廟管理條例(寺廟管理條例)' 따위의 佛敎壓迫에 反對하고 새로운 時代의 僧侶를 育成하기 위하여 武昌불學院(武昌佛敎院) 等 여러個의 敎育機關을 세웠다. 또한 佛敎氣管支의 發行, 佛敎硏究의 推進, 大藏經의 出版 等 變革期에 處한 佛敎人들은 多方面으로 活躍하였다.

5·4運動 [ 編輯 ]

五四運動

'5·4'란 1919年 5月 4日을 뜻하는 것으로 이날에 베이징(北京)의 學生 約 3000名이 日本과의 21個組 條約과 파리平和條約에 反對하는 데모를 벌이고, 이를 契機로 해서 全國에 波及된 愛國政治運動이다. 이 데모는 베이징 軍閥政府(軍閥政府)의 彈壓을 받았으나 이것은 오히려 全國的인 共鳴을 불러일으켜 6月 3日 以後 學生뿐만 아니라 市民·商人·勞動者를 包含하는 大規模 同盟罷業으로 發展하여 結局 베이징 政府를 굴복시킴으로써 親日要因(親日要人)의 罷免과 파리조약의 調印 拒否를 承認하게 하였다.

인텔리겐차에 依하여 15年 以後 展開된 文化啓蒙運動(新文化運動)이 이 運動의 先驅的 役割을 하였다. 이 運動은 民主主義와 科學思想의 旗幟를 내걸고 有·佛·道의 3橋, 民間宗敎, 迷信 等에 對한 徹底한 批判을 통하여 舊 文化와 封建的인 倫理道德을 克服하려고 하였다. 이 運動은 及其也 反宗敎運動으로까지 發展하여 墓(廟)·寺院(寺院)·導管(道觀) 等에 亂入하여 身上이나 佛像 따위를 破壞하는 者도 있었다.

監督四廟組令 [ 編輯 ]

監督寺廟條令

中華民國 政府가 發砲한 四廟(寺廟)를 監督 統制하기 위한 鳥嶺. 辛亥革命(辛亥革命)에 依하여 淸朝(淸朝)가 무너지자 淸朝 末期부터 主張되어 온 묘산흥학(廟産興學)運動이 한層 더 强化되었다. 寺院과 그 財産을 庶民을 위한 敎育施設로 開放시키려고 하였던 이 묘산흥학運動은 5·4運動 等 政治革命·思想革命·文學革命의 高調(高潮)와 結付되어 새로운 發展을 보게 되었다. 1929年 '四廟管理條例(寺廟管理條例)'가 政府로부터 公布되어 四廟는 財産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初等敎育·圖書館·救濟院(救濟院:孤兒院·養老院·保育院)·貧民工廠(貧民工廠:授産施設)·合作社(合作社:協同組合) 等을 經營할 것을 規定하였다. 社員 스스로의 손으로 管理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던 佛敎界는 이 條例에 依하여 僧尼(僧尼)의 生活과 權利가 顯著히 威脅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全國的인 中國佛敎會를 組織하여 反對運動을 폈다. 이 運動이 奏效하여 同年 가을에 政府는 全義 條例를 '監督四廟組例(監督寺廟條例)'로 改正하였다.

文化大革命 [ 編輯 ]

文化大革命

1966年 8月 紅衛兵(紅衛兵)의 出現을 發端으로 일어난 一帶 鬪爭. 이 鬪爭은 學術·文化界의 整風運動(整風運動)으로 始作되어서 毛澤東(毛澤東)思想에 反對하는 黨內 權力層의 追放이라는 權力鬪爭으로 發展하였다. 빙우란(憑友蘭)·후외려(候外廬)·임계유(任繼愈) 等의 有力한 哲學者와 歷史學者들에게도 批判 攻擊이 加해졌다고 傳해지나 宗敎家들이 어떠한 取扱을 받고 있는지는 具體的으로 알 수가 없다. 狗吠一掃(舊弊一掃)라는 슬로건 아래 社員이 閉鎖되고 佛像 等이 破壞된 時期도 있었던 것 같다. 硏究活動 等이 停止되어 있는 것도 確實하며 <哲學硏究>·<歷史硏究> 等의 學術誌도 休刊되었다. 일찍이 中國共産黨은 宗敎人과의 統一戰線을 提起하고 信仰은 個人의 自由이므로 行政的으로 이를 禁止하는 것은 마르크스 레닌主義 原則에 違背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日本의 佛敎 [ 編輯 ]

日本의 佛敎 [ 編輯 ]

日本-佛敎

日本은 처음 백제에서 佛敎를 받아들인 後 繼續 高句麗·新羅를 통해 수많은 佛敎文物을 받아 所謂 古代 日本文化의 黎明期人 아스카文化(飛鳥文化)를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그後 많은 日本勝들이 韓國에 와 佛法(佛法)을 배워 갔고 또 一部는 黨(唐)나라에 들어가 佛敎를 배워 갔다. 日本佛敎의 特性은 本地垂迹思想(本地垂迹思想)에 있는데 이 思想은 日本 佛敎의 土着化 過程에서 커다란 影響을 끼쳤다.

이 思想 傾向은 나라(奈良) 時代에 싹트고 후지하라(藤原) 時代에 敎理的 組織이 漸次 이루어져 가마쿠라(鎌倉) 時代에는 敎理에 關한 여러 著述이 나타나 日本 特有의 神佛(神佛)習合의 佛敎를 낳았다.

日本 佛敎史에서 特記할 時代는 淨土宗(淨土宗)을 이룩한 法然(法然)·親란(親鸞), 또 一連種(日蓮宗)의 宗祖(宗祖)인 一連(日蓮), 그리고 曹洞宗(曹洞宗)을 瘡腫한 桃源(道元) 等의 高僧을 排出한 가마쿠라 時代라고 할 수 있다.

그 後 이러한 傾向이 現代까지 내려오면서 日本 固有 佛敎의 여러 宗派를 亂立시켰다. 近世에 와서 日本 寺院은 單價(檀家) 信徒와 密着되어 寺院 境內는 單價 信徒의 家族墓地가 되었으며, 社員은 祖上祭祀를 위한 單價의 供養(供養)·喜捨(喜捨)에 依하여 維持되었다.

<李 珉 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