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世界 大百科事典/政治/韓國의 政治/韓國의 外交/韓國과 西歐 帝國의 關係

위키文獻 ― 우리 모두의 圖書館.

韓國과 西歐 帝國의 關係〔序說〕 [ 編輯 ]

韓國-西歐諸國-關係〔序說〕西歐帝國과의 關係에서 본 近世 韓國外交의 背景은 儒敎文化圈 秩序 속에서 健全하게 살아온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西歐의 文物制度를 導入하게 된 19世紀 末부터 비롯된다. 卽 從來의 鎖國主義 政策에서 脫皮하고 國際社會의 一員으로 行世하게 될 基本 契機였던 西歐帝國과의 個國通常(開國通商) 關係의 길을 처음으로 트게 된 것이 19世紀 末葉부터이다. 韓國이 近代的 意味에서 外國과 條約을 맺은 것은 1876年 日本과의 條約締結이 最初이지만, 西歐帝國과 條約關係를 맺은 것도 1882年 한·美友好通商 航海條約(韓美友好通商航海條約)의 締結을 除外하곤 1883年 獨逸과 英國, 1884年의 이탈리아와 러시아, 1886年에는 프랑스와, 그리고 1892年의 오스트리아와의 條約締結 等 모두 19世紀 末尾에 일어났던 일들이다. 그리하여 靑·日 戰爭(淸日戰爭)과 러·日 戰爭을 겪으면서 所謂 乙巳條約(乙巳條約)으로 日本의 侵奪史가 開始됨으로써 韓國의 外交權은 박탈당했으며, 第1·2次 世界大戰을 體驗할 때까지 韓國과 西歐帝國과의 關係는 말할 것도 없고, 一切의 對外關係가 斷絶되어 버린 쓰라린 外交史를 經驗했다.

第2次 世界大戰의 結果 비록 38線 劃定에 따른 國土分斷을 招來하는 또 하나의 悲運이 겹쳐오기도 하였지만, 그러나 解放과 獨立이 再來했고, 그 結果 南韓에 大韓民國 政府가 樹立됨으로써 以後 韓國의 西歐帝國과의 關係는 새로운 時代背景 속의 새로운 歷史의 場(章)을 펴 나가게 되었다. 于先 政府樹立 바로 이듬해인 1949年 1年 동안에 西歐帝國 中 大韓民國 政府를 承認한 나라들은 英國·프랑스를 비롯하여 바티칸·네덜란드·그리스·벨기에·룩셈부르크, 그리고 1950年에는 아이슬란드가 韓國을 承認했다.

大體로 韓國과 西歐帝國과의 外交關係 藥師는 두 時期로 區分해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政府 樹立에서 韓國戰爭을 겪는 1960年代 以前의 草創期로 잡을 수 있고, 다음은 外交關係의 成長發展기라 할 수 있는 1960年代 以後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舊韓末 以來 西歐帝國과의 關係에서 傳統的 友好關係의 代表的인 國家는 英國과 프랑스였다. 영·佛 兩國은 韓國戰爭에 臨하여 參戰 16個國 中의 하나로서 軍事·經濟支援 等을 통해서 韓國에 對한 貢獻이 至大했을 뿐 아니라, 유엔을 비롯한 其他 많은 國際機構에서의 活動을 통해서 韓國의 地位向上·保全 및 友好增進을 위해 많은 努力을 繼續한 나라들이다. 그리고 보면 영·佛 兩國은 韓國의 大暑구제국 關係史에서 中樞的인 存在이며, 적어도 傳統的으로 對西歐 外交展開의 2代 據點國이라 할 수 있고, 同時에 友邦國임을 말해주고 있다.

한便 西歐帝國과의 關係에 있어서 萬若에 關係 各國과 締結한 各種 協定·條約의 數나 種類와 頻度가 協力·友好·親善 外交關係의 한 基準尺度가 될 수 있는 것이라면 다음은 매우 時事的인 面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卽 韓國이 西歐帝國과 正式 外交關係를 맺은 年次別 順位를 보면 영·佛(1949年), 西獨(1957年), 이탈리아(1959年),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 等 스칸디나비아 3國(1959年), 벨기에·그리스·네덜란드·포르투갈(1961年), 아이슬란드·스페인(1962年)과 오스트리아·로마敎皇廳(1963年), 룩셈부르크·몰타(1965年), 그리고 스위스(1967年)의 巡이다. 그 中 條約·協定의 種類別 順位를 分類해 보면 西獨이 17個의 協定으로 水位이고, 다음이 英國(8個)이며, 그 다음은 스웨덴(5個), 프랑스(4個) 및 이탈리아(3個)의 巡이며, 其他國은 大槪 1·2改宗의 協定을 締結하고 있다.

西獨의 境遇는 特히 商標·技術·査證(査證)·經濟·財政·貿易協定 等 各種 協定의 締結이 거의 모두 1961年 以後에 맺어졌다는 點과, 國家元首로서 朴正熙 大統領이 1964年 12月에 80餘年의 한·獨 關係史上 처음으로 獨逸聯邦 共和國을 公式 訪問했고, 또한 뤼브케 獨逸 大統領이 1967年 3月 韓國을 答禮 訪問한 것 等 1960年代 以後의 臺西歐帝國과의 關係에 있어서 한·獨 關係가 어떤 다른 西歐帝國보다 刮目할 만큼 增進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韓國 外交의 全體像(全體像)으로 볼 때 西獨은 美國·日本 다음으로 韓國과 密接한 紐帶關係를 形成·構築해 왔다고 이를 만하다.

무엇보다도 1970年代 以後부터는 韓國의 外交姿勢가 前과는 比較할 수 없을 만큼 伸縮性을 가지고 展開되고 있다. 예컨대 中立國 外交의 擴大·增進, 經濟外交(經濟外交) 活動을 통해 協力國을 찾으려는 積極的이고도 前進的인 努力의 慶州, 通常·貿易政策上의 果敢한 行動半徑 및 振幅 增大의 試圖 等으로 韓國 外交街 方向轉換을 하고 있기 때문에 將次는 西歐帝國과의 關係뿐만 아니라 西歐와 隣接하고 있는 東歐帝國과도 公平한 外交關係의 樹立을 摸索할 必要가 있을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韓國의 動·西區 帝國과의 關係와 間接的으로 密接한 相關關係를 갖고 있는 蘇聯過渡 國家關係의 正常化가 可能한 時期가 到來할 것을 期待하게도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時代的 背景에 逆流(逆流)하지 않는 現實適應적·前進的 姿勢 속의 自主的 多變外交야말로 韓國의 生存과 繁榮과 國際社會의 성실한 일꾼으로서의 責任完遂를 위해 必要 不可避한 要諦(要諦)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韓國外交는 張差 '西歐帝國과의 關係'에 局限된 視野에서가 아니라 '世界外交'의 소용돌이 속에서 建設的이고 發展的인 役割을 忠實히 履行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는데 突進해 나가야 할 것이다.

<金 洪 喆>

韓國戰爭 全義 西歐 帝國과의 關係 [ 編輯 ]

韓國戰爭前-西歐諸國-關係

영·佛 兩國은 韓國問題의 유엔上程 以前부터 韓國乙支持, 政府樹立 後 美·中에 이어 英國은 1949年 1月 18日, 프랑스는 2月 5日에 韓國을 承認하였다. 이어 公使館이 設置됨으로써 國交 關係가 樹立되었다. 兩國은 그 後 유엔 韓國問題 等에서 韓國을 積極 支持하는 한便, 韓國戰爭 때에는 卽時 軍隊를 派遣하여 援助해 주었다. 韓國戰爭 以前까지 韓國을 承認 支持한 國歌는 영·佛 以外에 바티칸(1949年 4月 13日), 네덜란드(1949年 7月 25日), 그리스(1949年 8月 4日), 벨기에(1949年 8月 15日), 룩셈부르크(1949年 8月 29日), 아이슬란드(1950年 2月 12日) 等이다.

過渡期의 西歐 帝國과의 關係 [ 編輯 ]

過渡期-西歐諸國-關係

英國과는 繼續 友好 親善關係가 維持되었다. 動亂 後 英國 政府는 韓國 再建을 위해 2,600萬 달러를 提供하였다. 한 때 유엔決議로 北韓과 中國에 對한 全面的인 物資 禽獸措置(物資禁輸措置)가 取해진 後 英國은 1957年 3月 4日 單獨으로 臺 中國禽獸의 一部 緩和를 宣言하게 되어 韓國政府는 그것이 北韓에 對한 利敵行爲라는 點에서 抗議하는 事態가 생겼다.

이에 對해서 英國은 緩和措置가 非戰略物資(非戰略物資)에 限定된 것이라 밝히고, 유엔 韓國問題·統一問題 等에서 繼續 韓國을 支持하였다. 프랑스도 戰後 復興事業에 協助하였고, 1958年 10月 公使館을 大使館으로 昇格시키는 데 合意하였다. 이탈리아와는 1959年 11月 24日 外交 使節의 交換에 合意하여 公使館을 設置했으며, 1958年 12月에는 大使館으로 昇格시켰다. 韓國戰爭時 이탈리아는 유엔 會員國이 아니었으나 野戰(野戰)病院을 派遣하였고, 250萬 달러와 其他 物資를 韓國에 提供했다.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 等 스칸디나비아 3國은 韓國을 正式 承認하지는 않았으면서도 第3次 유엔總會에서 韓國政府 承認 問題에 덴마크·노르웨이가 贊成을 하였고, 韓國戰爭時에는 3國이 모두 醫療團을 派遣하였다. 1956年 3月 17日에는 國立 中央醫療院의 設立과 運營에 關한 協定이 締結되어 1958年 10月에는 中央醫療院이 開院(開院)되었다. 獨逸과의 關係는 韓國이 休戰 後 總領事館 交換을 希望한 데 對해 獨逸聯邦 共和國은 商業 代表團의 交換을 希望하였다. 이런 異見 속에 1954年 5月 20日 總領事를 임명하였으나, 獨逸은 2年이 지난 1956年 봄에야 領事 認可證(領事認可證)을 發給하고 6月 5日에 駐韓獨逸 總領事를 임명하였다. 그後 1957年 3月 兩國政府는 總領事館을 公使館으로 昇格시켰고, 다시 1958年 8月 1日 大使館으로 昇格시키게 되었다.

第3共和國의 對西歐 外交 [ 編輯 ]

第三共和國-對西歐外交

공화당 政府는 西歐 帝國과의 友好·親善關係를 維持·强化하는 데 努力하는 한便, 經濟開發 計劃의 成就를 위한 經濟外交를 積極 推進하여 各國과의 資本協力 및 技術協力 關係를 加一層 强化하고 通商關係를 增進시키는 데 努力하였다.

特히 西歐國家 中 獨逸 聯邦共和國과의 關係가 가장 中心이 되었다. 獨逸 聯邦共和國과는 1961年 3月 18日 한·獨 技術援助協定을 締結한 것을 비롯하여, 同年 12月 13日에는 한·獨 借款協定(韓獨借款協定), 1962年 3月 15日 韓·獨 經濟協力議定書, 1963年 2月 14日 한·獨 經濟顧問團 設置에 關한 協定 等이 締結되어 經濟協力 關係가 强化되었다. 1964年 12月 6日에는 獨逸 大統領의 招請을 받아 朴大統領이 獨逸을 公式 訪問하였다. 이것은 韓國의 國家 元首로서는 最初의 유럽 訪問으로서, 이 訪問을 통한 兩國 頂上會談에서는 한·獨 兩國間에 友好와 協助를 增進시키고, 國土가 分斷된 共同運命體로서의 紐帶意識을 再確認하고, 共同目標의 成就를 위해서 同一步調를 取한다는 데 合意를 보았다. 또한 朴大統領의 訪獨 中인 12月 7日에는 한·獨 經濟協力協定이 締結되어 1億 5,900萬 마르크 規模의 借款을 供與(供與)받았다. 1965年에는 MRO次官 1,500萬 마르크, 通信施設의 擴張을 위한 財政借款(財政借款) 1,900萬 마르크를 제공받고, 한·獨 實務者 會談을 서울에서 開催하여 兩國經濟關係의 全般을 協議하였다. 1966年에는 효성물산 나일론紗(絲) 工場次官 832萬 마르크와 嶺南火力發電 次官 8,800萬 마르크가 導入되었다. 1967年 3月 2日에는 朴大統領의 招請으로 뤼브케 西獨 大統領이 訪韓(訪韓), 3月 6日 國土統一을 위한 緊密한 協力, 韓國의 第2次 經濟開發 5個年 計劃에 對한 支援, 獨逸 企業의 對韓投資(對韓投資) 奬勵, 第2 嶺南火力 發電所·酪農(酪農) 示範農場·釜山 職業學校·괴테會館의 設立 等에 最善의 努力을 傾注할 것 等을 內容으로 하는 共同聲明이 發表되었다. 그 後 1970年 2月 18日에는 한·獨 鑛夫協定, 5月 15日에는 한·獨 文化協定이 締結되고, 이어 다음날 釜山 職業訓鍊所 設置에 關한 協定이 締結되는 等 兩國의 經濟協力關係는 美國 및 日本에 다음가는 密接한 關係를 가지게 되었다.

프랑스 및 이탈리아와의 經濟協力 關係와 友好關係度 繼續 强化되어, 이탈리아·프랑스와의 漁業協定을 통한 漁船의 導入, 팔당 水力發電을 위한 프랑스와의 借款契約이 1964年 11月에 正式으로 調印되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1972年 第27次 유엔總會에서 韓國問題 不上程案에 棄權함으로써 새로운 問題點을 던져 주었다. 또한 이탈리아와는 1961年 3月 7日 한·李 特許權 및 商標權(商標權) 相互 保護協定, 1962年 1月 15日 韓·李 經濟協力議定書, 1965年 3月 9日 한·李 貿易協定 等이 締結되었다. 프랑스와도 1961年 2月 1日 한·佛 商標·相互(商號) 登錄에 關한 協定을 비롯하여, 1962年 5月 25日 한·佛 關稅協定 等이 締結되었다.

英國도 經濟協力을 통하여 韓國의 經濟發展에 많은 寄與를 하였으며, 韓國과의 사이에 鐵道信號施設의 導入을 위한 借款契約을 하였다. 特히 英國은 經濟協力·通商問題 等에서는 큰 比重을 차지하지 못하나, 그 代身 政治問題에서는 韓國을 積極 支援해 주었다. 그 中에서도 유엔 韓國問題에 對한 英國의 寄與는 特記할 만하다. 유엔에서의 韓國 問題가 共産側의 活動의 微妙해지자, 韓國政府는 1971年부터 韓國政策에 不上程政策(不上程政策)을 取하였다. 이러한 韓國政策에 英國政府는 1971年 유엔 總會에서 韓國問題 1年 延期案을 英國안으로서 提出 採擇하게 하는데 積極 努力하여 성공시켰다. 1972年 第27次 유엔 總會에서도 英國은 다시 韓國問題 討議 1年 延期案을 提出하고, 콜린 크로우 英國代表는 서울과 平壤에서 열린 南·北 赤十字會談, 7·4 共同聲明을 指摘하면서, 유엔의 會員國들이 韓國의 이같은 努力을 도울 수 있는 最善의 方法은 유엔에서 이 問題를 끌어들임으로써 惹起될 冷戰(冷戰)의 辛辣하고 亂暴한 言語를 防止하여 和解精神에 寄與하도록 하는 것이라 指摘하면서 韓國問題 討議 延期를 强力히 主張하여 貫徹시켰다.

1980年代의 對西歐 外交 [ 編輯 ]

-年代-對西歐外交

韓國은 親美·親西方 外交基調를 維持해 오면서도 西유럽帝國과는 多少 疏遠한 듯한 感이 있었다. 西유럽國家들이 親美卷·獨自路線圈으로 나뉘어져 親美圈의 境遇는 韓國이 直接 接觸을 試圖하지 않아도 國際政治 懸案에 對해 共同步調를 醉해왔기 때문에 對美外交에 偏重되어 있었고 獨自路線圈은 소·中·北韓과 外交關係를 維持하고 있을 뿐 아니라 社會主義 政黨이 執權하고 있는 國家들이 多數 있었기 때문이었다. 實狀 西유럽國家들과 韓國은 서로의 事情을 잘 모르고 있다. 그러한 狀態에서 1980年代 韓國은 輸出市場 多邊化政策의 一環으로 EC市場을 攻掠했고 그 結果 兩側間에는 通商摩擦이 빚어졌다. 따라서 1980年代 韓國의 對西歐 外交는 經濟·通商 部門에 集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