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世界 大百科事典/政治/韓國의 政治/韓國의 外交/南北交流問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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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北交流問題〔序說〕 [ 編輯 ]

南北交流問題〔序說〕

오랫동안 하나의 生活圈이었던 韓半島가 解放과 美·蘇兩軍의 晉州로 南北으로 갑자기 分斷되자, 韓國國民과 指導者들은 協商이라는 政治的인 方法으로 韓國問題의 根本的인 解決策을 摸索하면서, 同時에 分斷이 韓國民族의 日常生活과 經濟活動에 미친 不便을 먼저 덜어보자는 目的으로 南北交流를 提議하였다. 兩大 占領國인 美·蘇, 그리고 韓國의 男·北 政治勢力間에 試圖되었던 統一政權 樹立을 위한 協商이 成功하였더라면 南北交流問題는 論議될 理由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兩側의 政治的 理念이나 立場의 傷痍로 말미암아 統一政權의 樹立이 어렵게 되고 遲延되자, 政治問題보다는 比較的 妥協의 餘地를 많이 가진 非政治的 領域의 問題를 먼저 協議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判斷과 또 分斷狀態下에서라도 서로의 生活에 必要한 交流만은 하여야 한다는 見地에서 非政治的 性格의 南北交流가 여러 形態로 試圖될 수 있었다.

南北交流問題가 처음 具體的으로 論議된 것은 1946年 1月 16日 서울 德壽宮에서 開催된 美·蘇共同委員會(美蘇共同委員會)의 豫備會談에서였다. 統一政府 樹立을 위한 政治問題가 主로 討議된 이 會談中에서 美國代表가 38度線의 設定으로 南·北間에 發生한 行政上 그리고 社會經濟問題에 協力할 수 있는 길을 討議하자고 하면서 蘇聯側 代表에게 다음과 같은 點의 協議를 提案하였다. ① 韓國으로부터의 重要物資 搬出, ② 38度線의 在來의 道(道)境界線에 依存한 變更, ③ 放送網의 一元化와 陽地球를 통하여 新聞의 自由로운 配布를 可能케 하는 問題, ④ 양지區間의 電話通信 再開, ⑤ 通話(通貨)의 統一 等.

蘇聯側도 上記와 같은 美國側 提議에 關心은 보였다. 그러나 蘇聯側은 이런 問題는 남·北間에 統一政權만 樹立되면 自然히 解決될 것이라는 立場을 取하면서 政治問題의 優先解決을 主張하였다. 比較的 相互妥協이 어렵지 않은 非政治的 領域, 卽 社會·經濟分野에서 南北이 協力하는 데 成功한다면 거기서 얻은 協調무드와 정신의로서 窮極目的人 統一政權 樹立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이 美國의 立場이었다. 이와 같이 美·蘇는 南北交流問題에 立場의 差異를 보였으나 蘇聯 亦是 美蘇共同委員會 豫備會談에서 南北交流를 위한 重要한 提案의 하나로 남·北間의 原料交換을 提議한 事實이 있다. 北韓에서 石炭을 비롯해서 南韓이 必要로 하는 物資를 보낼테니 南韓의 쌀과 交換하자고 하였던 것이다. 이 蘇聯側 提案에 對해서는 美國側이 南韓에도 戰災民(戰災民)이 많아서 쌀의 餘裕가 없다는 理由로 拒絶하였기 때문에 結局 物資交換에 關하여서도 合意에 到達하지는 못하였다.

韓國戰爭 前의 南北交流 狀況 [ 編輯 ]

韓國戰爭前-南北交流狀況

韓國 統一政府 樹立問題에 對해 南·北間 그리고 美·蘇間에 있었던 政治的인 立場의 對立이 解消되지 않은 影響으로 相互間의 實利와 便宜란 立場에서 보면 妥協이 아주 可能했던 南北交流 問題도 雙方 사이에서 合意를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分斷이 南北 雙方間에 주고 있었던 不便 때문에 1950年 6月 25日 韓國戰爭이 突發할 때까지는 南北間에 交流를 위한 合意를 얻기에 어느 程度 成功하여 다음과 같은 몇 가지 麵의 交流를 한 實績의 記錄이 있다.

⑴ 郵便物 交換 ― 1946年 3月 15日 개성역에서 美·蘇 兩國의 軍政(軍政) 當局者 사이에 郵便物의 交流問題에 合意를 하여 解放後 처음으로 公式的인 郵便物 交換이 이루어졌다. 現地에서 作成된 協定內容에는 繼續 2種 郵便物과 書類를 交換郵便 種類로서 規定하고 있고, 交換場所는 개성역이라 明示되어 있다. 이 合意에 依하여 남·北間의 郵便物 交換은 1950年 6月 25日 바로 3日 前까지 約 4年 3個月間 繼續 되었다. 公式集計에 依하면 이 期間 동안에 南韓에서 北韓에 보낸 寵佑篇數가 1,922萬 2,180通, 그리고 北韓에서 南韓에 보낸 것이 總 9萬 3,751統으로, 이들 郵便物은 一週日에 몇 番씩 交換되었다.

⑵ 物資交易(物資交易) ― 解放 後 約 2年間은 南·北間의 物資交易이 밀交易(密交易)의 形態로서 38度線上의 여러 곳에서 이루어졌다. 美·蘇 兩國의 軍政當局은 이와 같은 남·北間의 生活 必要上 이루어진 밀交易을 默認하여 오다가 1947年 5月 以後에는 雙方이 公式的으로 合意하여 現實化하여 주었다. 여기에 따라 北韓에서는 朝鮮上司(朝鮮商社)와 같은 몇 個의 對南交易(對南交易)의 專擔商事를 設立하여 對南物資의 交易에 臨하였고, 南韓에서의 商人들이 各自 個人別로 對北韓交易에 應하였다. 南北間 交易이 가장 活潑하였던 期間은 1948年 1月부터 8月까지였는데, 이 期間의 交易物資 額數를 보면 北에서 南에 온 것이 13億 4,000餘 萬원, 그리고 남에서 北으로 간 것은 3億 2千餘萬원이었다. 이 額數는 밀交易에 依한 額數는 包含되지 않는 公式的인 交易만의 것이기 때문에 밀交易에 依한 交易額까지 合치면 상기(上記) 額數의 2倍가 넘었을 것으로 推算된다. 그러나 南·北에 양정권이 樹立되고 그 關係가 惡化됨에 따라 1949年 3月 31日 南北交易은 公式的으로 禁止되었다.

⑶ 延白平野統帥(延白平野通水) ― 38度線으로 因해 延白平野(延白平野)가 나누어졌는데, 1946年 營農期(營農期)에 들어와서 北韓側에서 38度線 北方의 上位貯水池로부터 南方의 農民에게 統帥(通水)를 拒絶함으로써 所謂 延白平野 統帥拒否事件이 생겼던 것이다. 이 問題를 解決하기 위해 南韓側의 京畿道知事와 北韓의 臨時人民委員會 農林部長間에 會談을 가져 人道的인 見地에서 一旦 統帥할 것에 合意를 본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 後에는 北으로부터의 統帥가 適期(適期)에 適切히 되지가 않아 南쪽에서 北의 處事에 對하여 非難하였고, 北쪽은 이에 對하여 오히려 美國이 約束을 지키지 않았다고 非難했다.

⑷ 對南送電(對南送電)과 中斷 ― 電力資源 大部分이 北韓에 있으므로 國土가 分斷된 以後에도 送電問題가 南·北 當局者 間에 重要한 協議의 內容이 되었다. 1946年 12月부터는 北韓側에서 從前까지 送電하던 7萬킬로와트를 半으로 줄여 3萬 5千킬로와트 밖에는 送電하지 않았다. 이런 送電의 代價로 南쪽에서는 北쪽이 必要로 하는 物資를 보내기로 合意하여 相互의 必要를 暫定的으로 충족시켰던 것이다. 北韓으로부터의 送電은 南韓의 生活과 經濟에 絶對的인 重要性을 가졌기 때문에 大韓民國 樹立 前에 南北協商車 平壤에 갔던 金九·金奎植 良人도 繼續 送電을 北韓側으로부터 約束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北韓은 5·10 選擧로 大韓民國의 樹立이 確實視된 直後인 1948年 5月 14日 正午를 期하여 對南送電을 完全히 中斷함으로써 南韓地域이 큰 打擊을 받았다. 特히 電力 不足은 韓國의 産業部門에 深刻한 打擊을 주었고 民心의 動搖를 가져왔다.

⑸ 경평氷上 및 경평蹴球競技-1932年 以後 繼續된 조선일보사(朝鮮日報社) 主催의 경평氷上競技(京平氷上競技)가 國土分斷에도 不拘하고 1946年 1月에 開催되기에 成功하였다. 아이스하키만은 서울의 昌慶苑 蓮못에서 競技가 進行되었고, 速度競技는 春川 昭陽江上(昭陽江上)에서 進行되었다.

1946年 5月에 서울運動場에서 開催된 경평蹴球競技는 亦是 남·北民의 많은 關心과 興味속에서 두 番 試合을 하였다. 이 두 番의 試合에서 첫番 試合의 審判은 서울側에서 맡았고, 두番째 試合의 審判은 平壤側에서 맡아 試合을 運營하였다. 이때만 하여도 이미 座·右派가 甚히 政治的으로 對立하여 싸우던 渦中(渦中)이었으므로 運動競技에 政治性이 剛하게 露出되었고, 應援도 座·右派間의 政治對立을 크게 反映하여 問題를 일으켰다.

南北交流의 性格變化 [ 編輯 ]

南北交流-性格變化

韓國과 北韓共産政權 사이의 對立이 惡化되고 對話가 斷絶이 될수록 南·北間의 交流는 顯著하게 減少하였고 韓國戰爭의 突發로 南北交流는 論議될 餘地도 못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交流의 性格과 目的도 根本的으로 變更되었다. 初期의 南北交流는 相互協助를 위한 面을 많이 가진 交流 自體에 純粹性이 있었으나, 漸次 南·北間의 交流는 相對政權을 崩壞하려는 政治的 手段의 性格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性格은 戰爭後에 더욱 두드러졌다.

南北交流가 地下工作과 같은 政治資金 供給의 重要한 루트가 된 여러 가지 間諜事件이 일어남에 따라서 韓國政府는 北쪽과의 接觸 및 交流의 길을 徹底히 封鎖하는 政策을 取하였다. 또 戰爭의 慘禍를 復舊하면서 男·北이 漸次 相對 陣營과의 紐帶를 抛棄하고 海外經濟와 協力하는 經濟體制를 構築함으로써 남·北間의 交流는 完全히 斷絶된 狀態에 들어갔다.

韓國戰爭으로 南·北間에는 對話의 길이 完全히 杜絶되었고, 또 密貿易의 形態로 可能했던 男·北交易의 길마저 封鎖된 狀態에서 北韓 共産政權은 對南 政治攻勢의 一環으로 客觀的으로 보아 實現 可能性이 없는 內容을 담은 政治的 平和攻勢를 始作하였는데, 그때마다 여러 가지 形態의 南北交流를 主張하였다.

南北赤十字會談과 調節委員會 [ 編輯 ]

南北赤十字會談-調節委員會

1971年 8月 12日 大韓赤十字社의 崔斗善(崔斗善) 總裁가 北韓에 離散家族을 찾기 위한 赤十字會談을 提案한 것을 契機로 南北間의 오랜 障壁을 넘어 다시 南北交流가 始作되었다. 이리하여 約 1年에 걸친 豫備會談 끝에 4次에 걸쳐 本會談을 平壤과 서울에서 場所를 바꾸어 가며 開催하는데 成功함으로써 南北 關係가 相當히 改善되었다.

이 會談 때마다 50名이 넘는 南北 人士가 集團으로 南北을 往來한 것은 아주 重要한 南北交流였다. 더 重要한 것은 1972年 7月 4日에 南北共同聲明이 發表되고 南北調節委員會(南北調節委員會)를 構成할 것에 合意본 것이다. 2次에 걸쳐서 南北調節委員會 委員長間의 會合 結果 調節위의 構成·運營에 關한 南北間의 具體的 合意事項이 1972年 11月 4日에 公表되어 南北接觸에 새 起源을 만들었다. 合意文에는 南北間에 政治·經濟·文化에 걸친 廣範한 交流를 實行한 것을 規定하고, 이러한 交流를 위한 事務局을 板門店에 두고 南北間에 定期的인 會議를 가지도록 하였다. 또 南北間에 直通電話가 架設되어 南北間의 問題를 協議하는 핫라인의 役割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3年 朴正熙 大統領의 '6·23 宣言'이 나오자 北韓은 이를 永久分斷을 劃策하는 것이라고 非難하였다. 게다가 그해 8月 8日 發生한 '김대중 拉致事件'의 主謀者로 이후락이 指目되면서 北韓은 서울에서 열린 第3次 會議를 마지막으로 調節委員會 本會談을 中斷시켰다.

南北調節委員會는 비록 큰 成果를 거두지는 못하였지만, 南北韓 當事者들이 이 機構를 통하여 政治的 問題를 直接 解決하고자 努力했다는 데 意義가 있다.

離散家族찾기 運動과 南北赤十字會談 [ 編輯 ]

離散家族-運動-南北赤十字會談

崔斗善 總裁의 離散家族찾기 運動 提議 [ 編輯 ]

崔斗善總裁-離散家族-運動提議

最初의 南北間의 交流는 1970年 朴大統領이 8·15 宣言에서 提起한 平和統一의 基本原則에 따라 최두선 大韓赤十字社 總裁가 1千萬 離散家族찾기 運動을 提議한 데서 始作된다. 卽 崔總裁가 1971年 2月 12日 北韓赤十字會에 對해 純粹한 人道的 次元에서 南北間의 離散家族찾기운동을 協議하기 위한 南北赤十字會談(南北赤十字會談)을 가까운 時日 안에 開催할 것, 本會談의 節次上의 問題協議를 위해 늦어도 10月 안에 제네바에서 豫備會談을 열 것 等을 提議한데 對해 北韓이 北韓赤十字會 손성필 委員長名으로 8月 14日 이를 受諾함으로써 接觸의 길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8月 20日부터 9月 3日까지 兩側 派遣願間에 네 次例의 對面을 통해 첫 豫備會談을 9月 20日 板門店의 中立國監視位 會議室에서 開催할 것에 合意하였다.

南北的 豫備會談 [ 編輯 ]

南北赤豫備會談

1971年 9月 20日 1次 豫備會談을 開催하여 板門店 常設連絡事務所 및 直通電話의 設置에 合意한 後 1972年 8月 12日 25次 豫備會談에서 18個項 節次合意 文書를 交換할 때까지 滿 1年間 繼續되었다. 會談 中 論難對象이 된 것은 本會談 議題(議題), 場所, 時期, 代表團 構成問題였다. 于先 議題問題에서 한적(韓赤)은 이를 어디까지나 本會談 準備를 위한 豫備會談으로 보고, 6次會談時에야 本會談 議題로서 南北離散家族의 生死·素材確認 및 消息傳達, 이들의 書信交換, 再會斡旋 및 相互訪問, 再結合 其他 附隨的으로 解決할 問題 等 5個項을 提議한데 反해서 북적은 1次會談 때부터 家族·親戚·親友의 自由來往 및 相互訪問, 이들의 자유로운 書信去來, 離散家族을 찾아주고 相逢시키는 問題 等 本會談 議題를 들고 나오는 한便 政治宣傳을 하여 閑寂의 眞意를 探索하려 하였다.

12次 會談에서 最初로 북적은 한적안(韓赤案)에 接近한 修正案을 提示하였으나 그 後에도 繼續 '가장 切迫한 事業부터 가장 現實的 順次에 따라' 定하자는 閑寂側 意見과 相互訪問·自由往來를 主張하는 북적側 意見이 對立되어, 그後 여러 次例의 調整을 거쳐 1972年 6月 16日 20次 豫備會談에서야 家族과 親戚의 素材確認, 訪問과 相逢, 書信去來, 再結合 其他 人道的 問題 等 5個項을 本會談 議題로 確定지었다. 本會談 場所問題는 2次 豫備會談視 한적이 서울과 平壤으로 하자고 提議한데 對해, 북적은 板門店을 固執하였으나 第3次 會談에서 서울과 平壤으로 合意되었다. 本會談 時日問題는 한적이 豫備會談 終結 直前에 決定하자고 한데 反해 북적側은 豫備會談에서 本會談 議題·節次問題에 合意가 되기도 前인 1971年 內에 無條件 열자고 主張하였다.

이 問題는 6次 會談視 一旦 保留키로 合意하였으나, 그後 議題가 確定되고 첫 本會談 場所·節次·代表團 問題에 完全한 合意도 보기 前인 1972年 7月 19日 북적側이 다시 擧論하고 나와 一旦 8月 5日 開催키로 合意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北韓側의 無理한 主張에 依해서 不合理하게 策定되었기 때문에 事實은 제대로 實現되지 못하고 모든 問題에 最終合意를 본 8月 11日에야 1次 本會談을 8月 30日 平壤에서, 2次 本會談은 9月 13日 서울에서 開催하기로 最終 確定되었다. 代表團 構成問題는 1972年 7月 19日 23次 會談에서 各其 7名의 代表와 7名 以內의 諮問委員 및 7名 內外의 隨行員 및 支援人員으로 代表團을 構成하는데 合意하였으나, 북적은 첫 本會談에 政黨과 社會團體 代表를 相互 招請하자고 主張하여 人道的인 問題에 政治色彩를 加味시키려 함으로써 8月 5日 本會談 開催를 스스로 不可能하게 만들었다.

그後 25次 會談에서 첫 會談을 平壤에서 開催하기로 하고 이를 撤回함으로써 本會談 기타 18個項 節次에 最終合意하여 非公開原則의 本會談이 開催되었다.

南北的 本會談 [ 編輯 ]

南北赤本會談

第1次 本會談은 이범석 首席代表를 비롯한 代表 7名, 諮問委員 7名, 隨行員 20名 및 記者 20名, 合計 54名이 南北分斷 後 最初로 平壤을 訪問한 가운데 1972年 8月 30日 平壤에서 開催되어 南北으로 흩어진 家族들과 親戚들의 住所·生死 等을 알아내며 알리는 問題, 南北으로 흩어진 家族들과 親戚들 사이의 자유로운 訪問과 자유로운 相逢을 實現하는 問題와 南北으로 흩어진 家族들과 親戚들 사이의 자유로운 書信去來를 實施하는 問題, 南北으로 흩어진 家族들의 自由意思에 依한 再結合 問題, 其他 人道的으로 解決할 問題 等 5個項을 本會談 議題로 決定하는 合意文書(合議文書)를 交換하였다. 金泰希 丹粧을 爲始한 34名의 代表團과 20名의 記者가 遂行한 북적代表團(北赤代表團)李 서울을 訪問하여 開催한 第2次 本會談은 本會談이 끝난 다음날이 9月 14日에야 幕後 接觸 끝에, ① 雙方은 온겨레의 醫師와 念願을 反映하여 南北赤十字會談의 議題로 設定된 모든 問題들의 解決에 있어서 民主主義的 原則과 자유스러운 原則, 南北共同聲明(南北共同聲明)의 精神과 同胞愛, 그래고 赤十字人道主義的 精神을 徹底히 具現한다. ② 雙方은 第1次 및 第2次 南北赤十字 本會談을 통하여 더욱 다져진 雙方間의 信賴와 信賴의 雰圍氣를 바탕으로 3次會談부터는 議題에 關한 討議를 進行한다. ③ 第3次 南北赤十字本會談은 1972年 10月 24日 平壤에서, 第4車赤十字會談은 1972年 11月 22日에 서울에서 進行키로 한다는 合意書에 署名·交換하였다.

이같이 1·2次 赤十字本會談은 一旦 無事히 끝났으나 兩側은 異見을 좁히지 못하고 舌戰만을 繼續하다가 膠着狀態에 빠졌다. 그後 1984年 北韓의 조선적십자회가 南韓의 水災民을 위하여 救護物資를 보내겠다고 提議해 왔고, 南韓 赤十字社가 이를 受諾함으로써 實務者 接觸을 契機로 3次例의 本會談이 再開되었다. 1985年 5月 27日∼30日에 열린 第8次 本會談에서 8·15 光復 40周年을 전후하여 離散家族 故鄕訪問團과 藝術公演團의 交換訪問을 推進하기로 合意하고, 그해 9月 20日∼23日 南北赤十字 總裁는 各其 151名씩의 訪問團과 함께 서울과 平壤을 訪問하였다. 現在는 北韓의 深刻한 食糧問題로 交流가 再開되고 있다.

1990年 以後 南北 當國間 會談 [ 編輯 ]

-南北 當局間 會談 南·北韓은 1990年代에 들어 여섯 次例 當國間 會談을 가졌다. 現 政府 들어 이番 頂上會談을 除外하고 두 次例, 김영삼(金泳三) 政府 때 세 次例, 그리고 노태우 政府 때 한 次例 열렸다.  가장 最近 會談은 昨年 6月 22日부터 7月 3日까지 中國 베이징(北京)에서 열렸던 次官級 會談이다. 이 會談은 같은 해 4月부터 5月까지 한달 間의 非公開 次官級 接觸에서 肥料 20萬t 支援과 離散家族 問題 論議에 合意한 데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會談을 不過 1週日 앞두고 西海交戰이 일어나 肥料 10萬t만 支援하고 離散家族 問題는 論議조차 못했다. 또, 現 政府 出帆 直後인 1998年 4月 11日부터 18日까지 次官級 會談이 베이징에서 열려 肥料支援과 離散家族 問題를 連繫해 論議했으나, 相互主義가 爭點이 돼 決裂됐다. 金永三 政府 때에는 카터 前 美國 大統領의 周旋으로 김영삼 大統領과 김일성 主席間의 頂上會談 開催에 合意했다. 當時 實務節次 合意書까지 妥結했으나, 김일성 主席의 死亡으로 不發로 끝났다.

 



1990年 以後 南北 當國間 會談



時期



會談 名稱



場所



議題·內容



結果



1994.6.28∼7.8



南北 頂上會談 豫備會談 및 代表接觸



北京



頂上會談 開催 問題



實務節次 合意書 妥結, 김일성 死亡으로 不發



1995.6∼10



次官級會談

(쌀會談)



北京



對北(對北) 쌀 15萬t 支援, 韓半島 內에서 當局對話 再開, 우성호 送還



쌀 15萬t 支援,

12月 우성호 送還



1998.4.11∼18



次官級會談



北京



肥料支援과 離散家族 問題



相互主義 論爭으로 決裂



1999.6.22∼7.3



次官級會談



北京



離散家族 問題와 相互關心事



西海交戰으로 決裂



2000.6.13∼15



頂上會談



平壤



民族和解, 統一, 緊張緩和, 平和定着, 南北交流·協力 活性化, 離散家族 問題



南北共同宣言 發表

1980年代의 南北交流 [ 編輯 ]

-年代-南北交流

1971年 9月에 始作된 南北赤十字 會談과 1972年 '7·4 南北共同聲明'으로 대표되는 1970年代의 南北對話는 1980年代에는 對話와 各 分野別 交流를 통한 對決構造 克服으로 進展되었다. 1979年 '10·26' 以後 南側의 過渡期的 狀況 속에서 北側은 波狀的인 宣傳攻勢를 展開, 1980年 1月 南側에 '南北韓 總理(總理) 會談'을 提議해 왔다.

그러나 同年 9月 北側의 一方的인 中斷宣言으로 끝나고 11月 北側은 '高麗 民主聯邦共和國 創設案'을 提示해 왔으나 그 前提要件으로 美·北韓間의 平和協定締結 等 必要 以上의 條件을 提示, 南側이 받아들일 수 없게 함으로써 그 意圖가 의심스러운 것이었다.

第5共和國 出帆 後 전두환 大統領은 1981年 1月 '南北韓 當局 高位責任者 相互訪問'과 同年 6月 '南北韓當國 最高責任者 會談'을 北側에 提議하고 1982年 1月 '民族統一協議會議를 構成, 統一憲法을 制定하여 統一國會와 統一政府를 樹立함으로써 統一民主共和國을 完成하고 統一까지의 共存과 民族和合을 實現하기 위해 南北韓 基本關係에 關한 暫定協定締結'을 骨子로 하는 '1·22 民族和合 民主統一 方案'을 北側에 提議했다. 이 提議는 事實上 只今까지의 南北對話에 있어서 南側이 提示한 最初의 體系的인 統一方案으로서 1980年代의 基本 原則이었다는 點에 歷史的인 意義를 갖는다. 그러나 北側의 反應은 冷淡했고, 1982年 '1·22 統一方案' 實現을 위한 '20個 抗議 示範事業', '南北韓 高位代表 會談' 等 一連의 提議에 對해 北側은 拒否와 同時에 '南北韓 政治人 聯合會의'를 들고 나와 實質的인 接觸은 없었다.

1983年 南北關係는 '사할린 上空에서의 蘇聯戰鬪機에 KAL機 擊墜事件', '미얀마에서 發生한 아웅산墓所 爆彈테러 事件', '鬱陵島·多大浦·粤省·臨津江 武裝共匪·間諜船 浸透事件' 等 北韓·蘇聯에 依한 一連의 對南테러·武力挑發 事件으로 急激히 冷却되었는데, 1984年 서울·中部 一圓의 洪水被害에 對해 北側이 口號에 必要한 物資提供을 提議, 南側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다시 類化되었다. '秀才物資 引渡引受'를 契機로 '南北韓 經濟會談', '南北韓 體育會談', '離散家族 찾기를 위한 南北赤十字 豫備接觸'李 進行되고 이러한 友好的인 雰圍氣 속에서 實務接觸이 本格化되었으로 11月 板門店에서의 蘇聯人 亡命事件과 그에 隨伴한 銃擊事件, 1985年 1月 實施豫定이었던 '팀 스피릿 訓鍊'을 理由로 北側이 會談進行을 拒否, 다시 冷却되기 始作했다.

1985年 5月 第8次 南北韓 赤十字 本會談 再開를 契機로 對話 雰圍氣가 다시 高調되었다.

그러나 北側이 提議한 南北韓 國會會談은 北側의 宣傳攻勢로 成果가 없었고 '88서울 올림픽에서의 北韓의 參加를 議題로 했던 體育會談 亦是 저들의 억지主張으로 事實上 霧散되었다. 다만 同年 9月 20日∼23日 사이에 이루어진 '南北韓 離散家族 및 藝術公演團 交換訪問'은 오랜 忍耐와 刻苦 속에 얻어진 結實이었으나 南側의 洞事業 繼續 提議가 北側의 拒否로 合意에 失敗했고 1986年初 '팀 스피릿 訓鍊'을 빌미로 北側은 또다시 모든 會談을 一方 延期하였다.

以後 北側은 旣存의 모든 會談이 停止된 狀況에서 '軍事會談', '非核 平和地帶 創設', '南北韓 高位級 政治軍士會談'을 提議하는 等 一連의 平和攻勢로 나왔는데 이는 當時 南側의 社會情勢를 노린 意圖가 짙었다. 特히 北韓의 '금강산댐 建設'은 그 軍事的 전용성으로 인해 南側의 '平和의 댐 建設'과 南北關係의 梗塞을 가져왔다.

1987年은 南側의 政治的 狀況을 노린 北側의 平和攻勢와 對南誹謗, 各種 테러로 點綴되었다. 北側은 '高位級 政治軍事 會談', '多國籍 軍縮協商 會談', '南北·美(美) 3者 外務長官 會談'을 一方提議하는가 하면 南側의 國內問題를 빌미로 南北對話 中斷을 宣言하는 等의 波狀攻勢를 펴는 한便 同年 1月 '동진호 拉致', 10月 '진영호 衝突沈沒', 11月 'KAL 858機 爆破' 等 對南武力挑發을 恣行하였다.

1988年 北側은 'KAL機 事件'과 關聯, 逆宣傳과 對南·對美非難 攻勢를 펼치는 한便 '南北韓 連席會議', '南北韓 學生會談'을 提議, 學生과 南側 政府 사이의 葛藤을 煽動하고 나섰는데 그 意圖는 '88 서울 올림픽의 沮止에 있었다.

同年 7月 7日 노태우 大統領은 '民族自存과 統一繁榮을 위한 特別宣言'을 發表, 同伴者的 認識을 基礎로 하는 새로운 統一方案을 提議하는 同時에 後續措置를 取해 國內에 統一論議를 擴散시켰다.

1990年代의 南北交流 [ 編輯 ]

-年代-南北交流

1990年 第1次 南北高位級 會談이 서울에서 開催된 以來 1年 半의 會談을 거쳐 1992年 平壤 第6次 會談에서 '南北間의 和解와 不可侵 및 交流·協力에 關한 合意書'가 採擇되었다. 1991年에는 南北體育會談에서 分斷 以後 처음으로 單一팀 構成에 合意하여 그해 4月 日本에서 열린 第41回 世界卓球 選手權大會에 出戰, '女子 團體戰 優勝'이라는 快擧를 거두었으며, 世界 靑少年蹴球選手權 大會에서도 8强에 進入하는 凱歌를 올렸다. 1993年 김영삼 大統領은 '3段階 統一方案'을 提案, 南北聯合의 過渡期를 거쳐 1民族 1體制의 完全統一 志向을 표했다. 1994年 김일성 死亡으로 暫時 中斷되었던 南北交流는 1996年 江原道 潛水艦浸透 武裝間諜事件 以後 危機感이 極에 達하는 듯했다. 그後 輕水爐 協定이나 4者會談 等 多角度로 交流를 再開하고 있으며, 잇따른 脫北者와 北韓 高位幹部의 亡命, 深刻한 食糧 問題에 따른 支援問題 等 여러 側面에서 論議되고 있다. 1998年 현대그룹 정주영 名譽會長이 소 500마리를 끌고 板門店을 통해 直接 平壤을 訪問해 南北輕俠의 물꼬를 텄다. 또한 分斷 以後 南北間 人的·物的 交流의 새로운 章을 열며 始作된 金剛山 觀光遊覽船 出港은 1998年 11月 18日 以後 現在 500餘 回를 突破했으며 金剛山 觀光客 數는 25萬 名을 넘어섰다. 그리고 南北頂上會談 成事를 慶祝하는 평양학생소년예술단의 서울公演이 90年 以後 10年 만에 開催되었다. 1998年 서울 리틀 엔젤스 藝術團의 平壤公演의 答訪 形態이기도 한 이番 公演은 平和統一에 對한 念願과 우리 文化의 傳統性을 强調한 點에서 우리 國民들의 뜨거운 聲援과 呼應을 얻었다. 2000年 6月 歷史的인 南北頂上會談을 契機로 經濟뿐만 아니라 文化·藝術·體育 等 社會 全般에 걸친 南北交流가 새로운 方向으로 進行되고 있으며 特히 南北統一蹴球大會가 10年 만에 復活되며 類例 없는 大規模의 離散家族 訪問, 相逢이 進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