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世界 大百科事典/政治/國 제 정 치/世界各國의 政治事情/東歐 帝國·蒙古의 政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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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區 多元化의 歷史的 背景 [ 編輯 ]

東歐多元化-歷史的背景

東區라는 槪念은 地政學的 規定이 아닌 政治的인 槪念規定이다. 自由民主主義 市場經濟體制를 國體로 하는 西유럽·西方에 對應하여 共産主義(스탈린주의)·計劃經濟體制를 國體로 하는 國家群(群)을 뜻하는 槪念으로, 蘇聯과 그 影響圈 안에 있는 東유럽帝國을 가리킨다. 卽, 東獨·헝가리·유고슬라비아·체코슬로바키아·불가리아·루마니아·알바니아·폴란드 8個國이 이에 該當한다. 이들의 共通點은 第2次 世界大戰을 契機로 蘇聯에 占領되어 스탈린주의를 强制 移植당했다는 것이며, 이 點에서 西유럽 社會主義·共産主義 政黨의 마르크스-레닌주의와 區別된다.

1960年代에 中·蘇 紛糾(中蘇紛糾)의 表面化와 더불어 共産圈의 多元化(多元化)가 進陟되는 가운데 흔히 共産國家들을 蘇聯圈·中國圈·獨自圈으로 나누는 3等法(三等法)이 流行하였다. 洞口로 말하면 그 大部分이 蘇聯의 直接的 統制를 벗어날 수 없다는 데서 現實的으로 蘇聯圈에 屬한다고 볼 수 있고, 다만 유고슬라비아의 自主路線과 알바니아의 中國 一邊倒가 例外的인 것으로 看做된다. 그러나 東歐圈의 줄기찬 自主化 乃至 自由化運動은 巨視的으로 보면 이 地域은 西歐와 蘇聯의 中間에 끼인 '第3地帶'의 性格을 지녔다. 이러한 事態 發展은 東區의 歷史·地理的 條件과 密接히 關聯된다. 지난날 長久한 歲月을 두고 이 地域은 러시아와 獨逸 및 투르크 等 諸勢力이 交叉하는 3車路이다시피했으며, 1815年까지만 하더라도 名實相符한 獨立國은 存在하지도 않았다. 東區에 現存하는 國家들은 모두가 1815年에서 1919年에 이르는 期間에 獨立한 弱小國家들이다.

이 地域에 民族意識과 近代化 運動을 가져다 준 것은 18世紀 프랑스의 啓蒙思想이었고, 第1次 世界大戰 終結時期에 이르는 獨立鬪爭度 西歐 諸國家들의 同情과 勢力均衡 政策에 힘입은 바 컸다. 그러한 沿革이 作用하여 東歐帝國은 2次大戰 前까지만 하더라도 그들의 近代化를 곧 西歐化로 看做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나치스 獨逸이 이 地域을 휩쓸고 나서 敗亡하자 그 眞空(眞空)을 힘으로 메워 차지한 것이 蘇聯이다. 게다가 獨逸과 蘇聯이 東歐를 左之右之하는 동안 西歐 帝國은 거의 傍觀했거나 油畫(宥和)政策을 일삼는 程度였다. 西歐에 對한 不信感情과 自國의 近代化運動 挫折感이 蔓延된 가운데 蘇聯의 實力이 作用함으로써 結局은 第2次 世界大戰 以後 共産化가 招來된 것이다.

한스 콘은 東區의 民族主義를 西歐의 것과 比較하면서 그 特徵을 "뒤늦게 發生했을 뿐더러 後進的인 社會, 政治的 段階에서 發生"했고, "現存하는 國家形態에 抗議하며 衝突하는 方式으로 成立"했다는 點을 指摘하였다. 東區의 境遇에도 '植民地 民族主義'의 共通的 指標인 民族解放, 經濟自立, 社會改革의 同時的 追求가 뚜렷하다. 그리고 蘇聯 追從의 共産化는 東區에 뿌리깊은 民族主義의 課題를 解決하지 못했다. 고작 두드러진 것은 蘇聯方式을 模倣한 敎條主義(敎條主義)와 警察 恐怖統治였다.

東區의 自主 希求(希求)와 自由化運動은 以上과 같은 歷史的 背景을 갖고 있기 때문에 ① 蘇聯으로부터 離脫하려고 하지만 西歐에도 警査(傾斜)하지는 않으려고 하며, ② 政治的 自由化와 經濟的 近代化는 追求하되 共産主義의 完全한 抛棄는 아니다는 것이다.

國際共産主義의 仕樣奇現象 [ 編輯 ]

國際共産主義-斜陽期現狀

蘇聯勢力圈으로부터의 離脫과 民主的 內政改革을 志向하는 東歐帝國의 몸부림은 ① 半(反)스탈린運動, ② 自由化運動을 分別케 한다. 前者는 1956年 2月 蘇聯共産黨 第20次大會 自體가 스탈린의 個人崇拜와 苛酷한 中央集權制를 批判하는데 이르러 크게 힘입었는데, 結局은 그것이 蘇聯으로부터의 獨立運動으로 發展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事態發展은 蘇聯이 좀처럼 容認하는 바 아니었다. 더구나 自由化 運動에 이르러서는 西方接近 引上과 더불어 共産主義理論에 對한 本質的 水晶처럼 看做되는 形便이어서 끝내 蘇聯의 武力鎭壓을 招來하는 꼴로 되고 말았다.

東歐 共産黨들은 蘇聯의 武力을 背景으로 執權하는 過程에서 한결같이 人民民主主義를 標榜하였다. 그것은 '社會主義로 가는 새로운 길'이라고 풀이되기도 했으나 實質上 프롤레타리아獨裁의 特殊形態임에 다를 바가 없었다. 蘇聯에서의 프롤레타리아獨裁가 妥當(他黨)과의 聯立政府 構成을 許容치 않는 것과 比較해서, 勞動同盟(勞動同盟) 뿐만 아니라 民族資本家 階級까지 網羅한 폭넓은 階級聯盟을 基礎로 하여, 共産黨이 다른 政黨들과도 統一戰線政府를 形成한다는 說明도 있었으나, 그러한 存在樣式은 反파쇼鬪爭을 전후한 過渡的 形態임에 不過했다. 結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指導思想으로 하며, 一旦 反帝·反封建(反帝反封建)의 段階를 거치고 나면 곧 이어서 프롤레타리아獨裁의 樹立과 社會主義 建設에 鎭壓한다는 點이 本質的인 重要性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論理로 東歐帝國은 하나의 例外도 없이 共産黨 一黨獨裁의 기틀을 露出시켰다. 한便 蘇聯은 東歐의 共産化·衛星國化(衛星國化)를 推進함에 있어서 政治·이데올로기的 統制에 그치지 않았다. 軍事的으로는 바르샤바 同盟機構, 經濟的으로는 코메콘이라고 略稱되는 經濟相互援助會議가 있다. 後者는 '社會主義的 國際分業과 加盟國들의 經濟協力의 調和的 發展'을 標榜하고 있으나, 問題는 蘇聯 中心의 經濟的 統合體制로서 各國 經濟의 自立的 土臺와 西方接近 可能性에 限界를 設定해 놓고 있다는 데 있다.

바르샤바 同盟機構와 코메콘의 聲援으로는 蘇聯 外에 불가리아·폴란드·헝가리·루마니아·체코슬라비아 그리고 東獨을 셈 할 수 있지만, 유고슬라비아와 알바니아는 '東歐의 異端兒'라고 불리어진다. 蘇聯이 믿을 수 있는 '東歐의 優等生'은 불가리아 뿐이었다. 헝가리의 境遇는 1956年 10月 反(反)스탈린運動이 及其也 反蘇·反共義擧로 擴散되었다가 蘇聯의 武力彈壓下에 유린당한 歷史가 있다. 그러나 이 事件 以後로 個人의 私生活에 對한 統制만큼은 相當히 緩和되고 宥和政策이 實施되었다. 폴란드는 1956年의 '포즈나니 事件' 以後로 蘇聯의 內政干涉을 排除하는 데 있어 相當한 進展을 이룩했으며, 그 國民은 傳統的으로 反蘇(反蘇) 感情이 뚜렷하다. 루마니아는 中·蘇 紛糾에 便乘하여 獨自路線을 摸索하다가 蘇聯의 軍事的 威脅下에 後退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그런 대로 코메콘 體制에 對해서는 非協力(非協力) 姿勢를 굽히려 하지 않았다. 東獨으로 말하면 2次大戰의 敗戰國으로서 줄곧 蘇聯軍 占領下에 놓여 있는 部分이라는 특수한 事情이 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1968年의 自由化運動으로 인하여 蘇聯과 東歐圈을 振動케 한 바 있다. 그 進步的 民主主義, 政治的 信念의 自由 그리고 한때는 西歐와 別 差異가 없었던 言論自由의 許容이 共産圈의 內部變化 기운을 浮刻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社會主義로 가는 체코의 길'도 結局은 蘇聯의 武力介入으로 말미암아 挫折을 겪었으며, 아직도 '人類良心의 무거운 짐'이라고 回告되는 形便이다.

다른 한便 蘇聯은 東區의 激動에 不安을 느끼는 同時에 그 影響이 蘇聯內部에 波及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는 立場에서 이른바 '네오 스탈린니즘'이라는 後退現象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共産主義 이데올로기의 魅力 喪失, 國際共産主義 運動의 龜裂은 挽回 不可能한 狀況에 이른 것이다.

東歐의 自由化運動과 自主路線 志向은 뿌리 깊은 歷史的 基盤을 갖고 있는 同時에 이데올로기 退色時代의 問題提起이고, 時代의 進運(進雲)을 反映하는 까닭에 不死鳥와 같은 것이다. 이미 政治心理的 側面에서는 蘇聯과 西歐의 中間에 第3地帶歌 形成된 것으로 觀察할 수도 있다.

<朴 東 雲>

東歐의 改革과 對西方關係 [ 編輯 ]

東歐-改革-對西方關係

1980年代 後半 들어 일어난 共産圈의 大幅的인 體制改革은 東歐圈의 對外關係에 있어 새로운 轉機를 마련하였다. 고르바초프가 推進한 '新思考政策'李 具體化 되면서 '社會主義的 國際主義'라는 브레즈네프 독트린이 破棄되어 社會主義體制의 共同利益보다 各 主權國家의 個別的 利益이 優先하게 되었다. 1988年의 新베오그라드 宣言에서 蘇聯은 더 以上 自身들의 體制를 東歐國家에게 强要하지 않으며, 各國이 獨自路線을 選擇할 權利를 尊重하겠다고 闡明하였다.

過去와 같이 主權을 制限하고 對外關係를 統制하려던 方針이 撤回됨으로써 이제 東歐圈 國家들은 發展의 길을 스스로 選擇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造成된 自主化 路線 追求의 環境은 1次的으로 東歐帝國의 蘇聯으로부터의 離脫을 加速시켰지만, 한便으로는 1950年代 以後 維持되어 온 政治, 軍事, 그리고 經濟的 保護權이 解體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特히 經濟分野에 있어서 그 동안 東區는 中工業優先政策의 推進에 必要한 天然資源의 確保와 技術獲得을 全的으로 蘇聯에 依存하여 왔다. 또한 追從勢力의 確保를 目的으로 이루어졌던 蘇聯의 莫大한 援助는 이제 等價交換의 原理에 기초한 貿易으로 轉換될 수밖에 없다. 中央政府에 獨占된 統制經濟, 通貨의 兌換性 不足, 自給自足的 體制에서 派生되는 國際適應力 缺如, 그리고 蘇聯志向的인 生産構造體制 等으로 인하여 國際貿易環境에서 競爭力이 未洽한 東歐國家로서는 自主의 獲得과 함께 負擔해야 하는 深刻한 問題를 안게 될 것이다.

特히 1980年代 末 電擊的으로 이루어진 바르샤바條約機構와 COMECON의 解體로 政治·軍事的 保護를 提供해 왔던 社會主義圈의 連帶를 더 以上 期待할 수 없게 되었다. 東西冷戰期間 동안 蘇聯은 이 두 機構를 東區 衛星國에 對한 調整·統制機構로서 活用하여 왔다는 點에서 東歐帝國에게는 그만큼 活動領域이 擴大된 것이다. 그러나 한便으로는 蘇聯을 包含한 社會主義 陣營에 安保의 眞空事態가 造成되어 國家安定保障의 不安이 高調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變革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있는 蘇聯이 東歐를 더 以上 保護할 餘力과 意思가 없는 狀況에서 東歐帝國은 向後 展開될 國內民主化 措置와 經濟發展의 安定된 進展을 保障할 새로운 機制를 確保해야 할 狀況인 것이다.

東歐帝國의 對西方關係 擴大는 1次的으로 이러한 國際環境의 變化에 依해 더욱 가속되고 있다. 經濟發展은 必須的인 諸般支援의 確保, 國家安全 및 主權의 保障 等을 위하여 東歐國家들은 宗主國의 後見아래 있는 衛星國家가 아닌 하나의 主權國家 立場에서 國際社會의 一員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國際社會에서 附與하는 低開發國家에 對한 保護와 元祖를 自己責任下에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國際秩序에서의 責任있는 構成國으로서의 認識의 轉換은 國內政策的 次元에서도 反映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東歐帝國은 西方의 投資를 吸收하기 위한 合作法의 새로운 制定 및 開放을 推進하고 있다. 1960年代 以後 이미 東歐國家들은 合作法을

設立한 바 있다.1967년 最初로 유고슬라비아가 合作投資法을 制定하였으며, 1972年 헝가리와 루마니아, 1976年 폴란드, 그리고 1980年 불가리아가 合作投資法을 制定하였다. 그러나 初期의 合作投資法은 西方資本을 流入시키기에는 制限的이었고, 經濟體制的 問題로 西方資本에 依한 合作企業이 役割을 適切히 遂行할 수도 없었다. 旣存의 經濟制度를 변화시키지 않은 채 合作投資法만을 制定하고 制限된 形態로만 許容함으로써 惹起된 것이다.

1980年代 中盤 以後 이들 國家들은 繼續的인 景氣沈滯와 踏步狀態에 빠진 對西方貿易 實績 等이 이러한 部分的인 開放과 未備한 制度的 改革으로 招來되었다는 事實을 認識하고 貿易制度의 改善과 合作企業法의 整備 等 보다 根本的인 對外經濟關係의 改革에 서두르게 되었다.

가장 先導的인 유고의 境遇 1986年에 合作投資條件을 緩和하여 利益과 損失의 配分, 過失 送金 等의 規定을 緩和시켰으며 最近 '外國人 投資法'이라는 이름으로 合作法을 全面的으로 改正하게 되었다. 헝가리도 1986年 重點産業에서의 合作投資企業에 對한 이윤세 減免 措置 等 合作投資 與件을 크게 改善하였으며, 1988年 末에는 合作企業의 數를 200餘 個로 증가시켰다. 外國人 投資에 對해 相對的으로 冷淡해 왔던 체코도 1986年 包括的인 形態의 合作企業制度를 創設한 바 있다.

이렇게 하여 새로이 確立된 合作投資法들은 合作企業 設立 節次의 大幅 緩和, 外國側 持分의 擴大 및 單獨出資 許容, 合作企業의 地位上昇, 合作分野의 擴大, 그리고 大幅的인 租稅 減免 等의 많은 開放要素를 包括하게 되었다. 合作投資法을 비롯한 經濟制度 全般에 걸친 改革은 東歐의 對西方關係에 있어 開放의 擴大를 의미하는 것이며, 親密度의 反映이라고 할 수 있다. 制度의 改革과 竝行하여 東歐와 西方國間의 經濟交流도 增加하고 있는 事實에서도 이러한 意味를 찾을 수 있다.

事實 東歐國家들은 蘇聯 主導로 COMECON이 設立된 1949年 以前부터 유럽市場의 重要性을 認定하고 있었으며, 國民經濟에서 貿易이 차지하는 役割이 蘇聯에 비해 매우 重要하기 때문에 冷戰體制下에서도 大部分 GATT에 加入하거나 參觀人으로 參加하는 等 西方과의 經濟交流에 큰 關心을 보여왔다.

特히 東歐國家들의 對西方 經濟交流는 地理的·文化的 親密性과 制度的 互換性 等으로 인해 大體로 EC를 中心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유럽경제지역(EEA)' 創設合意를 통해 유럽共同市場 構築에 拍車를 加하고 있는 EC帝國은 商品, 勞動, 資本 및 서비스市場의 統合計劃에 過去 COMECON 國家들까지도 包含시키고 있다. 때문에 最近까지도 東歐國家와의 經濟交流를 擴大시키고 東歐國家의 經濟制度 改革에 많은 支援을 해오고 있다.

그러나 1980年代 동안 EC와 東歐의 經濟關係는 貿易規模의 側面에서는 每年 조금씩 增加趨勢를 보이고 있지만 'COCOM(對共産圈 輸出統制委員會)'의 貿易規制措置, 蘇聯의 아프가니스탄 侵攻 等으로 일정한 限界를 벗어날 수 없었다. EC의 對蘇聯·東區 貿易比重은 本來부터 낮은 水準이었으며, 그나마 最近에는 그 比重이 더욱 낮아지는 傾向을 보이고 있는 事實에서도 알 수 있다. 1983年 EC貿易에서 占하는 蘇聯·東區의 比重은 輸出 3.12%, 輸入 4.16%에서 1989年에는 輸出 2.48%, 輸入 2.7%로 낮아졌다.

하지만 1988年에 비해 1989年에는 EC의 對蘇聯·東區 貿易比重이 높아졌다는 點은 注目할 만하다. 1988年 EC·COMECON 共同宣言 以後 EC가 東歐와의 關係改善을 積極的으로 推進, 그 效果가 貿易에서 나타난 것이다. 卽 最近 東歐帝國들이 잇달아 EC와 經濟協力協定을 調印하였고 COCOM 規制도 漸次 緩和되는 方向으로 나아가며, 東西貿易의 障礙要因이 除去됨에 따라 東歐가 漸次 EC製品의 販賣市場으로서 重要性을 더해가고 있는 것이다.

東歐의 對西方接近의 擴大를 把握할 수 있는 要素는 EC와 東歐間의 貿易의 增加 外에도 漸增하고 있는 西歐의 對東歐 經濟支援이다. 지난 1989年 以後 폴란드와 헝가리를 始作으로 東歐 各國의 政治·經濟改革이 本格化되자 프랑스 等 EC國家들은 같은 해 8月 初 西方 先進 24個國 援助 會議를 開催하여 東유럽 經濟支援에 對한 具體的인 方案을 講究하기 始作하였다. EC는 루마니아·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 等과 經濟協力協定을 締結하였으며, 10月 初에는 EC 豫算으로 2億 ECU에 이르는 對폴란드, 헝가리 經濟支援을 主要 內容으로 하는 EC 措置計劃(Action Program)을 承認하였다. 또한 以後 루마니아를 除外한 東歐帝國과의 交易自由化 및 政治·文化協力關係 强化를 위해 一種의 準會員國 協定人 聯合協定(Association Agreement) 締結을 推進하는 等 廣範圍한 對東歐 經濟支援을 實行하여 왔다.

特히 西方은 對東歐 經濟援助의 本格的인 制度化를 위하여 '유럽復興開發運動'(EBRD)을 設立하였다. 1989年 10月 프랑스 미테랑 大統領이 提案하고 1990年 5月 設備協定文이 調印된 EBRD는 1991年 末頃부터 本格的인 任務를 遂行하고 있다. 2次 世界大戰 直後의 마셜플랜 以後 特定地域의 經濟援助를 위한 計劃으로 最大規模인 EBRD는 폴란드와 헝가리 等 市場經濟를 志向하는 東歐帝國에 對해 長期處理의 開發資金을 融資해 주는 外에 대동구 投資企業에 對한 保證과 技術援助 等을 擔當한다.

EBRD의 設立을 包含한 諸般 經濟援助 措置를 통해 西歐帝國은 1980年代 後半 以後 東歐에서 推進되고 있는 政治·經濟改革을 한層 促進시킬 뿐 아니라, 東歐帝國과의 結束을 더욱 强化시키고 있는 것이다. 蘇聯의 大變革으로 造成된 新데탕트의 潮流 속에서 東歐國家들은 國內의 政治·經濟的 改革을 推進할 수 있었으며, 改革의 成功을 위하여 西方世界와의 交流와 支援이 不可缺한 狀態이다. 여기에 外的으로는 國際秩序安定의 固着化와 內的으로는 外交의 多邊化 및 原料의 供給地, 商品市場이라는 經濟的 利益 等의 目的을 위하여 西歐帝國들度 東歐圈 國家와의 關係擴大에 漸次 注力하고 있다. 이러한 環境 속에서 東區의 對外關係는 漸次 西方志向的으로 變貌해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東歐 帝國의 政治 [ 編輯 ]

東歐諸國-政治

東歐의 社會主義 8個國은 大槪가 ① 蘇聯軍에 依해서 解放되고, ② 軍事的으로는 바르샤바 條約機構에 加入되어 있으며, ③ 經濟的으로는 經濟相互援助協議會(COMECON)에 參加하고 있다. 勿論 이들 어느 것에도 該當되지 않는 國家로서 유고슬라비아가 있었다. 또한 알바니아도 1968年 9月 13日에 체코슬라비아에 對한 蘇聯의 軍事介入에 抗議하여 바르샤바條約에서 脫退하였고, 루마니아는 積極的으로 自主路線을 가고 있으며, 체코만이 예로부터 先進工業國家에 屬한다. 이들 가운데 蘇聯軍이 駐屯하고 있지 않은 곳은 유고슬로비아·루마니아·알바니아 等 3個 國家뿐이다.

유고슬라비아 社會主義聯邦共和國 [ 編輯 ]

Yugoslavia 社會主義聯邦共和國

1929年 成立된 君主國 유고슬라비아는 第2次 世界大戰 勃發 後 親獨政權의 逐出過程에서 獨逸軍의 侵入을 받았다. 1943年 以後 티토가 이끄는 共産主義 파르티잔이 代讀抗戰을 展開, 1945年 蘇聯의 支援下에 國土를 解放시키고 君主制를 廢止, 聯邦人民共和國을 樹立하는 한便 1946年 社會主義 新憲法을 制定했다. 國家元首에 就任한 티토는 1948年 民族主義를 主張, 蘇聯의 指導權을 否認하다가 코민포름에서 除名된 後 "獨自的이고 民族主義的인 社會主義"를 志向하였다. 非同盟 中立主義, 美·蘇의 權力政治 排擊으로 대표되는 티토주의는 東歐圈에서 西方側과 關係改善을 圖謀한 異端者로 規定되었으나 第3世界 非同盟運動의 指導者로서의 位相을 占하였으며 企業 자주怜悧·이윤제 等 市場經濟 構造를 導入, 獨自的인 社會主義 經濟體制를 推進함으로써 1970年代에는 經濟的 發展을 達成하기도 하였다. 1971∼73年 브레즈네프·코시긴 等 蘇聯首腦와 티토의 相互交換 訪問과 1977年 蘇聯의 不干涉原則의 確認으로 兩國關係가 好轉되었으며 1970年代 對西方 接近은 더욱 具體化되었다. 1980年 5月 티토의 死亡 以後 유고슬라비아는 聯邦幹部會의 集團指導體制로 轉換하였다. 聯邦議會는 聯芳院과 共和國·自治州원의 兩院制이다.

폴란드 人民共和國 [ 編輯 ]

Poland 人民共和國

폴란드는 第2次 世界大戰 때에 東쪽은 蘇聯에게, 西쪽은 獨逸에게 國土를 分割當했다. 戰爭이 끝난 뒤에는 西쪽의 옛 獨逸 領土를 새로 獲得하였지만 그보다 더 넓은 東쪽 領土를 蘇聯에게 빼앗겼다. 그러나 옛 獨逸 領土인 오데르·나이제 라인 問題는 未解決로 남겨 놓아서 유럽政治가 풀어야 할 宿題가 되고 있다. 大戰이 끝난 直後 1945年 6月 勞動者黨 卽 共産黨과 社會黨이 中心이 되어 統一政府를 세웠지만, 1948年에는 勞動者黨과 社會黨이 合倂해서 統一勞動黨이 되고, 1952年에는 人民共和國 憲法이 採擇되었다. 1956年의 政變으로 黨制1書記에 復歸한 고물카는 民族共産主義者로 親蘇派(親蘇派)를 몰아내고 政治犯을 釋放했으나 1970年의 勞動者·學生 暴動으로 基에레크가 黨制1書記로 就任하여 親蘇路線으로 바뀌었다. 1976年 6月 24日 物價暴動 等으로 다시 勞動者·學生이 蜂起했으나 政治權力의 變動은 없었다.

체코슬로바키아 社會主義 共和國 [ 編輯 ]

Czechoslovakia 社會主義共和國

第2次 大戰 中에 蘇聯軍에 依해 解放되자 런던에 亡命했던 베네시(1884∼1948) 大統領이 歸國하여 新政府를 組織하였다. 1946年의 總選擧에서는 共産黨이 第1黨이 되어 黨首 골드바트(1896∼1953, 1946年에 受賞, 1948∼1953年에 大統領)가 聯立內閣을 組織하였지만, 1948年 2月의 無血 쿠데타를 통하여 共産黨이 政權을 잡았다. 1960年에는 新憲法이 採擇되어 現 國名으로 改稱하였다. 1969年 1月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聯邦制가 樹立되었다. 이때 執權한 두브체크(堂祭1書記)를 비롯한 改革派들은 먼저 政治의 自由化를 試圖했으나 이같은 움직임을 資本主義 復活이라고 警戒해오던 蘇聯 等 바르샤바 條約國 5個國 軍隊가 武力으로 그 해 8月 21日 밤 체코를 强點(强占)함으로써 失敗로 끝났다. 이것을 '체코의 自由化運動' 또는 '체코의 依據(義擧)'라고 부른다.

헝가리 人民共和國 [ 編輯 ]

Hungary 人民共和國

헝가리에서는 第2次大戰 後 1946年 2月에 共和制가 實施되고 小地主黨(小地主黨)을 第1黨으로 하는 4個政黨 聯立政權이 發足하였다. 그 後 1947年 8月의 總選擧에서 共産黨은 第1黨으로 進出하고 이의 指導를 받는 民族獨立戰線은 60.8%를 차지하였다. 이듬해 6月에는 共産黨이 社會黨과 合倂해서 勤勞者當(勤勞者黨)으로 改稱하고, 1949年 5月의 總選擧에서는 99.8%를 얻었으며, 그 해 8月 20日에는 新憲法을 公布하여 人民共和國이 發足하였다. 1956年 10月의 '헝가리 義擧'가 있은 뒤에 라코시(1952∼1953年 受賞)는 黨의 名稱을 社會主義勞動者黨으로 改稱하고 黨의 肅淸을 斷行했다. 또한 作家聯盟(作家聯盟)을 解散시켰으며, 勞動者評議會(勞動者評議會)를 禁止시켰으며, 1959年부터 61年에 걸쳐서 農業集團化를 完成하였다. 카다르 第1書記는 蘇聯의 第22次 黨大會 後에 새로운 路線을 採用하고, 1962年 8月에는 라코시·케레 等 스탈린주의者를 一掃하였으며, 이듬해 3月에는 義擧로 逮捕되어 있던 政治犯들을 모두 석방시켰다.

獨逸 民主共和國 [ 編輯 ]

獨逸民主共和國

第2次大戰이 끝난 뒤에 東西로 分轄된 獨逸이 再統一하는 것은 事實上 곤란하게 여겨졌다. 蘇聯軍 占領 밑에 있었던 東獨은 1949年 10月에 獨逸 民主共和國을 樹立하였다. 東獨의 共産黨은 1946年 社會民主黨과 合倂해서 社會主義통일당을 結成하고, 이의 指導에 依하여 基督敎民主同盟 等 4個 政黨이 國民統一戰線으로 結集했다. 마셜플랜의 結果로 西獨 經濟가 '라인江의 奇跡'을 이루게 되자, 東獨도 이의 影響을 받아 1953年 6月에는 勞動者 데모가 베를린에서 發生하여 全國을 휩쓴 바 있다. 또한 많은 人口가 西獨으로 移動하였기 때문에 東獨의 經濟建設이 困難을 받게 되자 1961年 8月에는 베를린 障壁을 構築함으로써 人口移動을 막았다. 스탈린주의者 울브리히트(1893∼1973, 社會主義통일당 第1書記)는 農業集團化, 市場과 이윤제(利潤制)의 槪念導入 等의 新經濟政策을 採用했다. 그의 死亡 後 슈토프에 이어 호네커가 權力을 繼承하였다.

루마니아 人民共和國 [ 編輯 ]

Rumania 人民共和國

第2次 大戰 때에는 獨逸을 도와 三國同盟(三國同盟)에 加擔했던 루마니아는 1944年에 蘇聯軍에 占領되어, 1945年 3月에는 共産主義者가 支配하는 內閣이 組織되었다. 1946年 11月의 總選擧에서는 共産黨이 壓倒的인 勝利를 거두고, 이듬해 人民共和國이 樹立되었다. 1965年 執權한 차우셰스쿠는 自主路線과 全方位(全方位) 外交를 展開, 蘇聯의 內政干涉을 非難하고 動·西 兩陣營의 軍事 블록 解體를 呼訴하는 等 外交的으로는 대단한 成功을 거두었다. 1978年 中國과 反蘇路線 構築을 圖謀하다가 蘇聯과 極限的으로 對立하는 狀態로까지 進展되었는데 '破砌派 亡命事件'으로 政治的인 打擊을 입었다. 國內政治는 테러 獨裁로 一貫하였다. 어수선한 國內 狀況속에서 反政府示威는 더욱 擴散되어 示威隊는 차우셰스쿠의 辭任을 要求, 마침내 獨裁者 차우셰스쿠는 1989年 處刑되었다. 그 뒤에도 수많은 暴動과 示威를 거쳐 1996年 11月, 市民議會 候補인 콘스탄티네스쿠가 大統領으로 選出되었다. 이로써 루마니아는 共産政權이 무너진 지 7年末에 民主 人士가 政權을 잡게 되었다.

불가리아 人民共和國 [ 編輯 ]

People's Republic of Bulgaria

불가리아(王國)는 第2次 世界大戰 當時 聯合國側에 加擔, 1944年 蘇聯軍이 侵入하고 共産黨의 파르티잔 鬪爭이 本格化되어 同年 10月 兩側間의 休戰協定이 締結되었다. 1946年 樹立된 디미트로프 左翼政府는 王政을 廢止하고 共和國을 樹立했으며, 1947年 人民共和國 憲法이 制定되었다. 1954年 政權을 移讓받은 지프코프 以後 불가리아는 東歐圈의 代表的인 親蘇路線을 나타냈다. 蘇聯 및 東歐帝國과의 友好協力關係 維持가 外交 基調인 불가리아는 經濟計劃 推進을 위해 1970年부터 對西方 接近을 보였으나 그 基調에는 變함이 없었다. 1971年 憲法改正으로 最高權力機關인 國家評議會가 新設되어 지프코프가 議長(國家元首)에 就任하였다. 1980年代 末부터 改革의 물결이 東유럽 共産 國家를 휩쓸어 1990年 1月에 共産黨은 多黨制 政治體制를 承認했다. 그해 8月에 불가리아議會는 民主勢力聯合의 줼레프를 大統領으로 選出하였다.

알바니아 人民共和國 [ 編輯 ]

People's Republic of Albania

第2次 世界大戰 當時 이탈리아·獨逸의 侵攻을 받자 1941年 유고의 元祖로 結成된 共産黨이 파르티잔 活動을 展開, 1944年 解放 後 호자를 首班으로 하는 左翼臨時政府가 樹立되어 1946年 人民共和國이 成立되었다. 1961年 흐루시초프가 알바니아 指導層의 스탈린주의를 批判한 後 蘇聯圈에서 離脫, 反美反訴 親中路線으로 變質되었으며 스탈린주의와 對東歐圈 孤立主義 路線을 堅持하였다. 1976年 社會主義 人民共和國 新憲法을 制定·公布하였는데 中國의 毛澤東 死亡과 實權派의 復權 以後 兩國關係가 强化되었고 '自力更生의 原則'을 强調, 孤立主義 路線을 强化해 나갔다.

東區의 肅淸 [ 編輯 ]

東歐-肅淸

1948年부터 49年에 걸쳐 스탈린의 指示에 따라 헝가리의 라이크 外傷, 불가리아의 코스토프 副首相, 알바니아의 쵸췌 副首相, 체코슬로바키아의 스란스키 共産黨 書記長 等이 斷頭臺의 이슬로 사라졌고, 고물카(폴란드 統一勞動黨 書記長, 後에 第1書記가 됨) 카다르(헝가리 內喪, 後에 勞動者黨의 第1書記가 됨)가 逮捕·投獄되었다. 이 當時 東歐 여러 나라에서 티토주의者라고 낙인찍혀 處刑되거나 投獄된 사람은 數萬 名을 헤아린다.

체코슬로바키아 2月政變 [ 編輯 ]

Czechoslovakia 二月政變

체코슬로바키아는 1947年 6月에 發表된 美國의 마셜플랜에 參加하였지만 스탈린이 이를 反對하였기 때문에 政府 內에 있는 親西歐派(親西歐派) 立場은 不利하게 되었다. 1948年에 이르자 共産黨이 指揮하는 祕密警察의 勢力增大가 情勢를 決定的으로 만들었다. 그 해 2月 프라하 警察의 支署長 更迭에 抗議하여 12名의 非黨員 閣僚(閣僚)가 大統領에게 辭表를 提出함으로써 共産黨을 牽制하려 하였지만, 事態는 逆轉해서 放送局은 共産黨이 占領하고 프라하 展示가는 警察隊의 統制 밑에 들어가 社會黨은 共産黨에게 屈服하였다. 베네슈 大統領은 辭表를 受理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無血 쿠데타는 이와 같이 끝을 맺었으며, 結局 2月 25日에는 共産黨이 새로운 內閣을 組織하였다.

코민포름에서 유고슬라비아 除名 [ 編輯 ]

Cominform-Yugoslavia-除名

유고슬라비아는 蘇聯軍이 遺稿에서 恣行한 飛行(非行), 유고人을 祕密警察 프락치로 利用한 것, 1946年에 蘇聯이 遺稿에게 不利한 蘇聯·유고 合作會社를 設立한 것 等 많은 理由 때문에 相互關係가 惡化되었다. 1948年 1月 유고의 外交政策은 蘇聯과 協議하라는 蘇聯의 干涉을 유고가 拒否하게 되자, 그 해 3月 유고 駐在 蘇聯 軍事顧問官·敎官 및 非軍事 專門家의 철수가 通告되고, 두 나라의 關係는 最惡의 事態로 突入하였다. 스탈린은 유고슬라비아에다 最後 手段을 呼訴했으나 別 效果가 없어 코민포름 經濟關係를 完全 斷絶시켰다. 1971年 브레즈네프의 유고 訪問과 1972年, 1973年 두 次例에 걸친 티토의 蘇聯 訪問 等으로 關係는 改善되어가고 있으나 獨自路線은 재강조되었다.

積極的 共存政策 [ 編輯 ]

積極的共存政策

유고슬라비아가 1950年代 以後 내놓은 外交政策의 基本理念. 第2次大戰 後에 資本主義와 社會主義 兩陣營은 '힘의 政策'을 取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相互不信을 增大시켜 軍備增强을 造成하고 軍事基地의 建設과 他國에 對한 軍隊의 駐屯을 招來하게 하였다. 軍事費 支出의 무거운 負擔은 國民들에게 轉嫁되었으며, 全世界가 軍事블록으로 分割되어 國際關係의 緊張을 招來하였다. 이에 유고슬라비아는 서로 다른 體制를 가진 國家들 사이의 平和共存을 主張하는 同時에 어떠한 軍事블록에도 參與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모든 國家의 協力을 害치는 世界의 블록 分割을 撤廢시키기 위하여 모든 努力을 다한다는 政策이었다.

勞動者의 自主管理 [ 編輯 ]

勞動者-自主管理

유고슬라비아에서는 勞動者評議會가 中心이 되어 勞動者에 依한 企業의 自主管理를 實行하였다. 一般 勞動者로부터 選出된 15∼120名의 評議員으로 構成되는 勞動者評議會는 3∼11名으로 構成되는 經營委員會를 選出한다. 또한 勞動者評議會 代表에 勞組代表 및 코뮌 代表 等을 합쳐서 特別委員會를 만들고 여기서 一般的으로 公募한 應募者 中에서 企業腸을 全體會議의 滿場一致로 決定한다. 勞動者評議會에 附與된 任務는 ① 製品의 種類·數量·價格의 決定, ② 利益分配方法의 決定, ③ 企業의 擴張·近代化 및 이에 所要되는 資金의 調達, ④ 勞動者의 解雇 및 新規採用 等이다. 勞動者의 自主管理制度는 製品의 種類·生産額·價格을 스스로 決定하고 利潤을 스스로 分配한다고 하는 利潤方式이 採用되고 있으며 中央政府가 企業活動에 直接 干涉할 餘地는 없다.

헝가리 依據 [ 編輯 ]

Hungary 義擧

헝가리의 라코시 政權(在任 1952∼53)은 蘇聯共産黨 第20次黨大會 後에도 거꾸로 統制를 强化했는데 폴란드의 포즈나니 依據에 刺戟받은 부다페스트의 知識人들은 1956年 6月 30日 밤에 페 피 클럽에서 群衆集會를 열고 비스탈린화를 徹底하게 實施할 것과 라코시 政權의 退陣을 要求하였다. 라코시는 이에 病을 憑藉해서 黨 第1書記의 地位를 親舊 케레에게 물려 주었다. 10月 23日에는 부다페스트의 大學生들이 ① 蘇聯軍의 卽時 撤退, ② 黨指導部의 刷新, ③ 나지(1896∼1958) 受賞의 復歸, ④ 言論·集會·結社의 自由 等을 要求하면서 데모를 行하였다. 케레 黨 第1書記는 나지를 受賞으로 복귀시키는 同時에 데모를 鎭壓하기 위하여 蘇聯軍의 出動을 要請하게 되었다. 이에 그 해 24日에는 부다페스트視(市) 全地域에서 市民과 蘇聯軍과의 사이에 市街戰이 展開되었다. 나지수상은 事態收拾을 위하여 케레 黨 第 1書記를 辭任시키는 同時에 카다르를 就任시켰지만, 31日에는 約 20個 師團의 蘇聯軍이 國境을 넘어 헝가리에 들어오게 되자 義擧는 다시 일어났다. 나지政府는 11月 1日 바르샤바條約機構로부터의 脫退를 宣言하였지만 蘇聯軍은 나지政府의 閣僚들 全員을 逮捕하고 카다르를 首班으로 하는 革命勞動政府를 樹立케 하였다. 헝가리의 勞動者들은 全國的으로 主要都市에 設置되어 있는 勞動者評議會를 통하여 거듭되는 總罷業으로 對抗하였지만 結局 義擧는 2個月만에 失敗로 돌아았다.

폴란드의 政變 [ 編輯 ]

Poland-政變

蘇聯共産黨 第20次 大會의 스탈린 批判으로 深刻한 衝擊을 받은 폴란드는 勞動者들이 生活苦 때문에 賃金引上을 要求하면서 1956年 6月 28日∼30日 사이에 工業都市 포즈나니에서 勞動者들이 反政府義擧를 일으켰다. 義擧는 곧 鎭壓되었지만 統一勞動黨 內部의 스탈린주의波와 民主派對立은 激化했다.

民主派는 1949年에 티토주의者로서 黨制1書記의 地位에서 追放된 고물카를 1956年 8月 4日 復黨(復黨)시키는 데 成功하였지만 스탈린주의파는 軍士 쿠데타를 準備해서 蘇聯 駐屯軍의 軍事的인 協力을 얻어 軍士移動을 敢行하였다.

이때 흐루시초프는 10月 19日 갑자기 바르샤바를 訪問하고 폴란드 指導者들과 會談했으나 蘇聯의 軍事介入은 行하지 않았다. 10月 21日 黨中央委員會 總會에서 스탈린파는 追放되고 고물카가 第1書記에 選出되었으며, 蘇聯은 고물카路線을 承認하였다. 路線이란 ① 國會의 權威를 높이고, ② 통일노동자당·統一農民黨·민주당의 議會勢力에 따라 聯立政府를 組織하며, ③企業에 勞動者評議會를 設置하고, ④ 强制的인 農業協同化를 排除하고 國營農場을 解體하며, ⑤ 敎會에 干涉을 行하지 않는다는 等의 內容을 말한다.

유고슬라비아 共産主義者 同盟의 新綱領 [ 編輯 ]

Yugoslavia 共産主義者同盟-新綱領

유고슬라비아 共産主義同盟(共産黨)은 1958年 4月의 第7次 大會에서 새로운 綱領을 採擇하였다. 이 綱領에는 스탈린과 訣別한 後 유고가 導入한 獨自的인 社會主義 制度의 基本理念이 總括的으로 나타나 있다. 이 綱領에서는

(1) 社會主義에는 여러가지 길이 있다. 社會主義의 目標는 同一하지만 各 國民은 서로 다른 方法을 통하여 그것에 到達한다.

(2) 國際共産主義 運動에 있어서 하나의 中心을 두고 運動을 指導하는 것에 反對하며 어느 한 나라가 國際共産主義 運動에서 獨占的 地位를 要求하는 것을 許容할 수 없다.

(3) 最近의 資本主義는 줄곧 變化하고 있으며 矛盾이 激化되고

있다고는 볼 수 없으며 社會主義의 發展이 共産黨에 意解서만이實現된다고 보는 見解는 옳지 못하다.

(4) 共産黨에 依한 政治權力의 絶對的 獨占이 普遍的이고 永久的인 原則이라고 보는 것은 도그마(獨斷)이다.

(5) 人間을 政治 目的으로 종속시키는 것에 反對한다. 社會主義의 最高의 目標는 個人的 幸福이다 라고 하는 見解를 밝히고 있다.

알바니아의 蘇聯 離脫 [ 編輯 ]

Albania-蘇聯離脫

第2次大戰 後 유고슬라비아의 衛星國이었던 알바니아는 1948年 유고가 코민포름에서 追放되자 蘇聯의 忠實한 衛星國이 되어 國內에서는 親諭高分子·親티토주의者의 大量 逮捕가 始作되었다. 그러나 1955年에 蘇聯과 유고슬라비아 두 나라의 和解가 成立되자 알바니아의 蘇聯과의 關係는 急速히 식어지면서 1960年 中國과 蘇聯의 紛爭이 일어나게 되자 알바니아는 中國側을 支持하면서 國內에서는 親蘇派에 對한 壓迫이 始作되었다. 1961年 蘇聯은 알바니아에 對해 次官(借款)을 取消하고 技術者를 撤收시켰으며, 그 해 12月에는 알바니아와의 外交關係를 斷絶했다. 이에 代替하여 中國은 1961年 알바니아에 對해 借款供與를 約束하고 技術者를 派遣하였으며, 中國에 對한 알바니아의 貿易額은 全體의 60%를 占有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알바니아는 完全히 中國의 保護를 받게 되었다.

루마니아의 自主路線 [ 編輯 ]

Rumania-自主路線

루마니아가 蘇聯의 支配로부터 獨立하고 西方陣營과 經濟交流를 强化하려는 外交路線을 말한다. 이 自主路線은 1952年 5月 黨內의 蘇聯派 逐出과 1958年 7月의 蘇聯軍의 루마니아 撤收完了, 그리고 1960年 以後 中·蘇對立이 激化된 틈바구니에서 可能하게 되었다. 루마니아는 中·蘇對立에 對해서는 처음부터 中立的인 態度를 維持하였으며, 1963年부터는 中國接近을 表示하였다. 1964年 3月에는 마우레루 受賞(在任 1961∼1966)을 團長으로 하는 代表團이 北京을 訪問하고 中國과 蘇聯 사이를 仲裁하려고 하였지만 失敗하였다. 루마니아는 蘇聯이 中國을 除去하기 위하여 開催하려는 世界共産黨會議를 始終一貫 反對하였다. 1964年 4月에는 루마니아共産黨은 聲明을 發表하고 社會主義 여러 나라의 關係는 兄弟黨이어야 한다고 主張하였다. 루마니아는 알바니아와 外交關係를 繼續 維持하고 UN에서는 自主外交를 行하였다. 1962年에는 英國 및 프랑스와 共同借款契約을 締結하였으며, 1964年에는 美國과 프랑스에 經濟使節團을 派遣하였고, 1967年 1月에는 社會主義國家로서는 最初로 西獨과 國交를 맺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自由化·蘇聯의 軍事介入 [ 編輯 ]

Czechoslovakia-自由化·蘇聯-軍事介入

1960年부터 繼續된 經濟沈滯에 國民의 不滿이 쌓이자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1967年 1月부터 신경제方式이 採用되기 始作하였다. 이러는 가운데 思想의 自由化에 對한 要望度 强力하게 일어나 同年 6月 作家同盟(作家同盟) 大會에서는 文學·藝術의 完全한 自由를 要求하게 됐고, 이제까지 共産政權下의 社會主義는 그릇된 것이었다고까지 말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自由化를 要求하는 知識人들과 노보트니(1904∼1975) 政權과의 사이에 緊張이 高調되었다. 그 해 12月의 黨中央委員會 總會에서는 改革派가 大勢를 制壓하게 되었고, 스탈린주의者의 노보트니는 14年間에 걸친 黨 第1書記의 地位를 두브체크에게 넘겨 주게 되었다. 그 後 노보트니는 大統領까지 辭任하고, 3月 30日에는 스보步多將軍이 大統領에 選出되었다. 4月初에 열린 黨中央委員會 總會에서는 共産黨 以外의 4個政黨의 完全한 獨立을 認定하는 決意가 있었으며, 4月 9日에 發表된 黨의 새로운 行動綱領에는 言論·集會·結社의 自由 및 國外旅行의 自由를 許容하고 檢閱制度의 廢止, 複數候補制(複數候補制)를 導入한 選擧法의 改正, 强力한 議會의 回復, 多數政黨制의 實施 等이 發表되었다. 1968年에 이르러 체코의 自由化는 豫想外로 高調되었다. 1968年 1月 以後 체코 自由化의 急速한 進行에 對해서 蘇聯은 그 해 6·7月 바르샤바조약군의 체코 國內에서의 合同 練習과 7月末의 蘇聯·체코 兩國 指導者의 體르나會談 및 8月 3日의 프라스티라버에서의 6個國 首腦會談을 통하여 警告를 發하였다. 그러나 체코가 이에 屈服하지 않게 되자 8月 20日 밤 드디어 蘇聯과 5個國 軍隊는 체코에 侵入해서 全國土를 占領하였다. 체코 國民의 結束은 頑强하고 蘇聯이 期待하는 親疏政權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체코의 指導者들은 蘇聯軍의 撤兵의 代價로 10月 16日에 蘇聯軍의 체코駐屯條約을 맺었으며, 蘇聯이 要求하는 체코 정상화의 完全 履行을 文書로 約束했다. 이렇게 해서 체코는,

(1) 共産黨의 指導的 役割을 높이고 反社會主義 勢力에 對해서 鬪爭을 强化할 것

(2) 新聞이나 텔레비전 等으로부터 進步的 分子들을 追放하고 言論統制를 한層 强化할 것

(3) 黨·政府의 主要 地位에서 蘇聯을 싫어하는 사람들을 몰아낼 것 等을 강요당하였으며 그 反面 1月政變 以後에 그 地位를 잃은 保守派 사람들이 徐徐히 復活되었다. 그러나 蘇聯 駐屯軍의 支配 밑에서도 체코 國民의 抵抗은 頑强하게 繼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