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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世界 大百科事典/世界音樂/西洋音樂家와 作品鑑賞/에스파냐 - 위키文獻, 우리 모두의 圖書館 本文으로 移動

글로벌 世界 大百科事典/世界音樂/西洋音樂家와 作品鑑賞/에스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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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사테 [ 編輯 ]

Pablo de Sarasate(1844-1908) 파가니니의 再現이라고 하는 臺바이올리니스트인 사라사테는 파가니니의 事後 4年 되던 해 에스파냐 北部 팜플로나에서 태어났다. 軍樂隊長人 아버지에게 바이올린을 배워 7歲 때 라 코르냐에서, 12歲 때에는 마드리드의 王室劇場에서 리사이틀을 가졌다. 그리하여 파리로 가서 콘셀바드왈에 入學하여 바이올린을 알라르에게, 和聲學을 르베르에게 배워 모두 首席으로 卒業하였으며 以後 獨走가(獨奏家)로서 龜尾(歐美)를 巡廻演奏하여 大成功을 거두었다. 初期에는 自身이 編曲한 오페라의 拔萃曲 等 全的으로 技巧를 誇示하는 曲을 많이 연주하였으나 1870年頃부터는 藝術的인 高度의 曲을 연주하였다. 또 그를 위해 臺作曲家인 랄로, 생상스, 브루흐 等이 作曲을 獻呈하였고 그것들은 只今 바이올린의 重要한 演奏曲目이 되어 있다. 그는 2個의 樂器(스트라디바리우스 製作)를 使用하였다. 그 中 하나는 어릴 때 이사벨 女王으로부터 받은 것이며 이것들은 파리와 마드리드의 音樂院에 保存되어 있다. 그의 生涯는 演奏旅行과 大成功의 連續이었다. 뛰어난 音樂性과 超人的인 技巧를 다하여 그의 優雅한 姿態가 聽衆을 魅惑시켰던 것이다. 또 그는 故國 에스파냐의 鄕土 舞踊의 멜로디를 바탕으로 많은 作曲을 남겼다(<로망스 안달루사>, <社파테아드>, <말라게냐>, <하바네라> 기타).

치고이네르바이젠 [ 編輯 ]

Zigeunerweisen 사라사테 作曲. 作品 20 <집시의 멜로디>는 技巧的인 有名한 曲이나 에스파냐의 집시의 曲은 아니며 헝가리 집시風의 슬프고 異國的인 멜로디이다. 曲은 3個의 部分으로 되었으며 1部는 哀愁에 찬 다(C)短調 4分의 4拍子, 2部는 조금 느린 감미롭고 感傷的인 4分의 2拍子, 3部는 活氣에 넘친 急速組의 4分의 1拍子로 漸漸 高調되어 끝난다.

알베니스 [ 編輯 ]

Isaac Albeniz(1860-1909) 에스파냐의 近代 피아노音樂의 大作曲家이며 피아니스트인 알베니스는 東北部의 카탈로니아에서 태어났으나 南部 안달루시아의 民族音樂에 魅惑되어 그 風物을 描寫하다가 서(西)피레네의 避暑地 칸洑에서 別世하였다. 그는 누나에게 피아노를 배웠고 4歲 때 바르셀로나의 로메아劇場에서 獨奏會를 가졌고 7歲 때 作曲한 派蘇塗프레를 時(市)의 軍樂隊가 연주했다는 天才이다. 알베니스는 어릴 때는 勿論 靑年時節에 甚한 波瀾을 겪었고 晩年은 榮譽에 빛나는 豪奢한 一生이었다. 6歲 때 파리에서 마루몽텔에게 배우고 8歲 때 마드리드로 옮겨 音樂院에서 멘디沙鉢에게 배웠다. 이 때 쥬壘 베르누이 科學小說을 耽讀하고 冒險에 興味를 느낀 끝에 家出하여 單身으로 에스파냐 北部를 演奏旅行하였으나 社몰라에서 그 當時의 名物인 山賊을 만났고, 한便 누나의 死亡으로 不得已 歸家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다시 집을 뛰쳐나와 남에스파냐를 旅行하였으며 이 때 본 風物과 民族音樂이 少年 알베니스를 魅惑시켜 이것이 後年 많은 傑作을 낳게 하였다. 카디스의 市場으로부터 "父母에게 돌아가지 않으면 逮捕하겠다"는 通告를 받고 港口에서 배를 타고 南美로 건너가 各地로 演奏旅行하면서 쿠바로 갔을 때 偶然히 아바나의 稅關에 勤務하는 아버지를 만났으나 알베니스는 이미 經濟的으로 獨立된 13歲의 音樂家였으므로 아버지의 許諾을 받고 旅行을 繼續하였다. 뉴욕에 왔을 때는 가진 돈이 없어 港口의 貨物 運搬 人夫로 또는 바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끼니를 이었다. 이 때 바에서 연주할 當時 그는 피아노를 뒤로 등지고 兩손을 뒤집어 여러 가지 曲을 연주하였다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 뒤 英國에서 獨逸로 건너와 野다스존과 라이네케에게 배우고, 歸國하여 國王의 補助로 브뤼셀 음악원에서 배워 18歲 때 優等으로 卒業하였으며 그 뒤에 리스트에게 배워 臺피아니스트 안톤 루빈스타인과 함께 演奏旅行을 하여 20歲로 世界 一流의 피아니스트가 되었으나 이것으로 그의 演奏活動은 그쳤고 그 뒤로는 作曲에만 專念하였다. 23歲 때 베들레르한테 배운 뒤 그의 作曲은 一變하여 안달루시아의 民族音樂(世間에서 말하는 플라멩코라고 하는 鄕土民謠 춤曲)의 形式과 精神을 바탕으로 한, 個性的인 不滅의 피아노 作品을 數없이 남겼다. 電氣의 作品 <에스파냐의 노래>(5曲), <에스파냐 모음曲>(8曲), <旅行의 追憶>(6曲), <붉은 色의 塔>, <탱고> 等은 모두 世界的으로 普及되어 後世에 남은 名曲이나, 이 時期의 曲 中에서는 <에스파냐의 노래> 中의 한 曲 <코르도바>가 最高作이라 할 수 있다. 後期의 作品에는 보다 高度의 <카탈로니아>, <베가>, <아스레포스>, <이베리아 4卷 12曲> 等이 있다. 特히 <이베리아>는 그가 晩年에 파리에서 故國을 回想하며 各地의 印象을 描寫한 것으로, 안달루시아의 民族音樂의 要素를 藝術的 形成 속에 自由롭게 以上化시킨 傑作이다. 民族音樂의 形式과 에스프리를 素材로 한 모음曲이 이와 같이 高度로 藝術化된 것은 매우 드물며, '브람스 以後의 最高의 피아노 文學'이라 하고 있다.

그라나도스 [ 編輯 ]

Enrique Granados(1867-1916) 에스파냐의 近代 피아노音樂의 大作曲家이며 피아니스트인 그라나도스는 카탈로니아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音樂을 배워 많은 에스파냐 音樂家들과 같이 파리 音樂院에 入學을 志望하여 그 곳에 왔으나 病으로 入學 年齡이 넘어 首席 敎授인 베리오에게 배웠다. 그리하여 파리와 에스파냐 各地를 演奏旅行하여 1889年 바르셀로나에 정주하였으나 이 무렵 이미 有名한 <에스파냐 춤曲> 12曲 中에서 몇 曲이 作曲되었다. 後에 페드렐에게서 배워 에스파냐 音樂의 本質과 傳統에 눈을 떠 作曲方向이 定해졌다. 그는 알베니스나 파리兒와 달라 다른 方向에서 藝術의 理想을 追求하였다. 優雅하고 高潔하고 게다가 純에스파냐的(카스티소)인 것을 求하여 獨特한 手法으로 마드리드의 情緖를 描寫하였다. 그것도 현대의 마드리드가 아니며 天才畫家人 고야가 그린 것, 劇作家인 라몬 데 라 크루스 時代의 騎士道가 한창이었던 무렵의 馬戶 또는 마하(當時의 模範 男女)들이 사랑에 熱中하고 있던 時代의 다운타운의 情緖를 描寫한 것이다. 마치 우리 나라의 舊韓末 때의 서울의 情緖라고나 할 回顧 趣味이지만, 그러나 그 作品은 洗練(洗練)된 유니버셜韓 音樂形式의 近代感覺에 넘치고 있다. 代表作으로는 <에스파냐 춤曲 12曲>(特히 第5番 <안달루시아>가 有名하다)과 <고예스카스>의 피아노曲集이 有名하다. 特히 後者는 그의 趣味인 古典의 優雅와 近代美를 兼備한 傑作이며 알베니스의 <이베리아>와 함께 에스파냐의 피아노 作曲 中에서 두 個의 定點을 이루는 것이다. 이것들은 後에 오페라로 다시 編曲되어 그 初演은 처음에는 파리의 오페라 코미크 劇場이 豫定 場所였으나 第1次大戰 中이어서 뉴욕의 메트로폴리탄으로 變更되었다. 그라나도스는 旅行을 싫어하였으며 特히 배旅行을 싫어하였지만 처음으로 美國으로 건너갔다. 그리하여 豫定에 없던 저 有名한 <間奏曲>乙 새로 作曲하여 大好評을 받았다. 하지만 歸國길에 機船 서섹스가 獨逸 潛水艦에게 擊沈되어 夫人과 함께 영·불海峽에서 一生을 마쳤다.

팔랴 [ 編輯 ]

Manuel de Falla(1876-1946) 에스파냐 近代音樂의 最高 作曲家. 카디스에서 태어나 어릴 때 어머니로부터 피아노를 배워 마드리드 音樂院에 다녔고 한便으로 國民音樂派의 指導者 페드렐의 가르침을 받았다. 28歲 때 오페라 <虛無한 人生>을 作曲하여 인정받았고 31歲 때 파리에 留學하여 드뷔시, 뒤카, 라벨, 알베니스 等과 親交를 맺어 7年에 걸친 勉學으로 그의 音樂思想을 顯著하게 높임과 同時에 페드렐의 가르침을 받고부터 繼續 지니고 있던 에스파냐 音樂의 올바른 存在意識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그것은 에스파냐 民族의 生氣와 情熱이 넘쳐흐르는 高度의 藝術音樂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사랑은 魔術師>, <에스파냐의 莊園의 밤>, <三角帽子>, <클라브생 콘體르 土>, <페드로의 人形劇>, <라 아틀란티나>, <7個의 에스파냐 民謠> 等의 不滅의 作品을 남겼다. 그 作品數는 大作家로서는 決코 많은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모두가 傑作이다. 그의 作品은 硏鑽을 거듭한 것이어서 樂譜는 음 하나도 不足함이 없고 지나침도 없다. 그 技法은 大體로 單純化되어 있지만 그것은 外面의 虛飾을 버린 內面의 豐富한 높은 藝術을 希求하는 그의 作曲理念인 것이다. 그는 作曲의 素材로 故鄕 안달루시아 地方에 예로부터 傳해오는 民族音樂의 要素를 取하였다. 卽 그 民族의 피와 精神이 팔랴의 높은 音樂思想에 依하여 藝術的으로 表現된 傑作이라고 하겠다. 또한 그는 逆境에 處해 있는 디아길레프 舞踊團을 위하여 <三角帽子>를 作曲하여 破産狀態에 있던 親舊 막스 에시그에게 全作品의 出版을 맡기는 等 人情味가 두터운 사람이기도 하였다. 第2次大戰 勃發과 同時에 아르헨티나로 移住하여 거기서 別世하였다. 그의 遺骸는 에스파냐 軍艦에 依하여 出生地 카디스로 옮겨져 카테드랄에 安葬되었다.

사랑은 魔術師 [ 編輯 ]

-魔術師 팔랴 作曲(1914). 이 뛰어난 舞踊劇의 모음曲은 팔랴가 파리에서 歸國하여 곧 有名한 집시의 女流 舞踊家 바스트라 人페리오의 依賴로 作曲하여 1915年 마드리드의 라라劇場에서 그女의 主役으로 初演되었고 뒤에 管絃樂曲으로도 編曲되어 널리 愛護를 받고 있다. 집시의 妖氣(妖氣)가 감도는 詛呪받은 사랑의 이야기로서, 젊은 집시의 少女 칸데라스가 그女를 괴롭히는 죽은 戀人의 惡靈(惡靈)을 물리치려고 추는 '불의 춤'은 피아노曲으로 된 '恐怖의 춤'과 함께 有名하다.

三角帽子 [ 編輯 ]

三角帽子 팔랴 作曲(1919). 알라르곤의 名作小說 <市場과 물방아지기의 아내>를 脚色한 舞踊音樂. 주책없는 好色의 늙은 市場과 아름답고 賢明한 물방아지기의 아내를 主役으로 하여 展開되는 남에스파냐의 田園的인 明朗하고 유머러스한 舞踊劇이다. 1919年 런던에서 디아길레프 舞踊團에 依하여 初演되었으며 按舞(按舞)는 對舞踊家 馬詩人, 背景은 피카소가 맡았다. 曲 中에 몇 個의 오랜 民謠가 巧妙하게 採擇되고 있지만, 有名한 물방아지기의 춤 '팔르카', '판당고', 피날레의 絢爛한 '호타'는 팔랴의 創作으로, 全體에 걸쳐 기타的인 手法을 써서 效果를 나타냈다.

7個의 에스파냐 民謠 [ 編輯 ]

七個-民謠 팔랴 作曲(1922). 그의 作品 中 歌曲은 매우 적으나 이는 世界의 현대歌曲 中에서 가장 뛰어난 歌曲의 하나이며, 各地의 民謠를 取擇하여 斬新한 手法으로 伴奏部를 붙여 그 火星이나 前兆는 個性的인 讀者 形式의 藝術歌曲이다. 各 曲마다 各其 원民謠의 形式을 지니고 있으나 '호타'는 아라곤 地方의 民謠를 模倣하고는 있지만 大部分이 그의 創作이라고 할 수 있다. '나나'(자장歌)는 안달루시아 地方에 옛날부터 傳해 오는 나나의 原形에 가깝고 그가 搖籃 속에서 어머니로부터 듣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

라 아틀란티다 [ 編輯 ]

L'Atlantida 팔랴 作曲. 1928年에 作曲하기 始作했으나 未完成인 채 남겨진 野心的인 大作으로 獨唱·合唱 및 管絃樂의 칸타타이다. 時(詩)는 伽陀란 사투리로 된 콜럼버스의 이야기로 아직 어린 콜럼버스가 漂流하여 高度에 이른다. 그러자 聖堂의 修道士가 나타나 아틀란티다(태고에 大西洋에 가라앉은 傳說의 섬 아틀란티스)에 關해 이야기한다. 콜럼버스는 마침내 이사벨 女王의 後援으로 未知의 나라를 向하여 배로 떠난다. 이러한 興味津津한 作品이지만 팔랴는 20年이라는 긴 歲月을 보냈으나 完結하지 못하고 別世하였다. 이것은 뒤에 그의 弟子이며 뛰어난 作曲家 에르네스트 알프텔에 依하여 完成되어 1961年 11月 바르셀로나의 리세誤劇場에서 빅토리아 데 로스 안헤레스 主演으로 初演되어 絶讚을 받았다.

투리나 [ 編輯 ]

Joaquin Turina(1882-1949) 에스파냐의 近代 作曲家 투리나는 세비야에서 태어나 그 곳 가르시아 트레스에게, 그리고 마드리드에서 호세 트라고에게 피아노를, 파리에 가서 某슈코프스키와 半生 댕디에게 作曲을 배웠다. 알베니스, 팔랴에 다음가는 안달루시아 樂派의 臺作曲家인 同時에 音樂院 敎授, 王室劇場 監督, 音樂評論家이며 또한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다. 그 作品은 交響曲, 室內樂, 劇場音樂, 피아노曲, 歌曲 等 모든 部門에 걸쳐 千餘曲에 이르며, 그 가운데서 特히 有名한 것은 <로시오의 行列>, <세비야 交響曲>, <鬪牛士의 祈禱> 等이며, 또한 피아노曲에 그의 個性的인 傑作이 많다. 그는 파리에서 알베니스와 사귀어 그의 勸告로 그의 作曲理念은 一變하였고 故國인 안달루시아 地方色을 描寫하는 데 始終一貫하였다. 特히 出生地 세비야를 中心으로 한 地域을 背景으로 하는 標題曲이 많은데, 이것들은 파리에서 硏磨된 抒情味 넘쳐흐르는 音樂感想에 따라 表現된 近代 에스파냐의 傑作이다.

로시오의 行列 [ 編輯 ]

Rocio-行列 투리나 作曲(1912). 세비야의 봄에 열리는 로시오 祝祭의 風景, 聖堂의 聲價나 鐘소리, 티피컬한 투리아나 거리 사람들의 기쁨에 찬 웅성거리는 情景을 그리는 멜로디가 이 地方의 民謠 춤曲인 페데넬라, 罷漏, 카世紀딜랴 等의 리듬에 실려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