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世界 大百科事典/사회 I·文化財/文 禍 再/重要 文化財/忠淸南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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落花巖 [ 編輯 ]

落花岩

忠淸南道 扶餘, 白馬江에 닿아 있는 扶蘇山 西쪽 끝에 絶壁을 이룬 큰 바위. 百濟 31代 義慈王 20年(660) 羅唐聯合軍에 依해 백제가 亡하자 3千 宮女가 이 바위에서 白馬江에 몸을 던져 빠져죽었다 하여 有名하다. 이 곳에는 백화정(百花亭)이라는 亭子가 있다.

扶蘇山城 [ 編輯 ]

扶蘇山城

史跡 第5號. 百濟 首都 泗沘城의 마지막 據點이었던 城으로 둘레 2,200m, 面積 約 74萬㎡이다. 忠淸南道 扶餘郡 부여읍 扶蘇山에 있다. 半月루(半月樓)가 있는 곳에서 算定을 두른 約 600m의 山城 안에는 寧越루(迎月樓)와 軍倉址(軍倉址) 等의 建物터가 남아 있다. 538年(聖王 16) 熊津에서 이곳으로 遷都한 때를 전후하여 築造한 것으로 推定된다. 半月城(半月城) 또는 泗沘城(泗泌城)이라고도 한다.

皐蘭寺 [ 編輯 ]

皐蘭寺

忠淸南道 扶餘郡 扶蘇山에 있는 庵子로 白馬江 왼쪽 絶壁 위에 있다. 景致가 매우 좋고, 皐蘭草(皐蘭草)로 더욱 이름이 있다. 450年頃 百濟 때에 創建되었다.

궁남지 [ 編輯 ]

宮南池

史跡 第135號. 百濟 武王 時代의 別宮 蓮못으로, 忠南 扶餘郡 부여읍 동남리에 있다. “마래방죽”이라고도 한다. 이 蓮못의 東쪽에는 礎石(礎石)이 남아 있고, 周邊에 옛 기와가 많이 남아 있다. 또 附近에는 大理石을 3段으로 쌓아올린 八角形의 우물이 남아 있어 只今도 使用되고 있다.백제시대 法王(法王)의 侍女였던 女人이 못가에서 홀로 살던 中 龍神(龍神)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新羅 眞平王(眞平王)의 셋째 딸인 善花公主(善花公主)와 結婚한 薯童(薯童)으로, 이 薯童이 法王의 뒤를 이어 武王(武王)이 되었다.

定林寺址 [ 編輯 ]

定林寺址

史跡 第301號. 忠淸南道 扶餘郡 부여읍 동남리에 있는 백제時代의 절터이다. 嘉藍配置는 典型的인 一塔式(一塔式) 配置로, 南쪽에서 北쪽으로 中門(中門)·석탑(石塔)·金堂(金堂)·講堂이 一直線上에 세워져 있고, 周圍를 回廊(回廊)으로 區劃지었다. 國寶 第9號인 정림사지 五層石塔과 寶物 第108號인 定林寺址 石佛坐像 等의 遺物이 남아 있다.

정림사址 5層石塔 [ 編輯 ]

定林寺址五層石塔

國寶 第9號. 定林寺址에 있는 백제時代의 5層 石塔으로 높이 833cm이다. 백제를 멸망시킨 唐나라의 蘇定方이 새겨 놓은 대당평백제국碑石(大唐平百濟國碑銘)이란 글을 볼 수 있다. 이 石塔의 樣式인 얇고 넓으면서 끝이 若干 反轉된 屋蓋石, 2段으로 얕게 表現된 層級받침이 輕快한 느낌을 준다. 마치 多層樓閣 形態의 木造建物을 보는 것 같은 느낌으로, 益山 미륵사지石塔과 함께 백제時代를 代表하는 石塔이다.

甲紗 [ 編輯 ]

甲寺

忠淸南道 공주시 계룡면 鷄龍山 東쪽 기슭에 있는 절. 新羅 24代 진흥왕(振興王) 17年(556)에 혜명大士(惠明大師)가 重建(重建)했다. 그 뒤에 衣裳(義湘)李 道場(道揚)을 設置하고 法堂을 增修하여 規模가 커졌다. 境內에는 對敵展(大寂殿)·不渡(浮屠)·鐵幢竿支柱(鐵幢竿支柱) 等의 寶物과 君子臺(君子臺)·용문幅(龍門瀑) 等 祕境이 있다. 東區의 鬱蒼한 숲길은 여름에도 서늘한 感을 주며 溪谷 사이로 펼쳐지는 가을 丹楓이 아름답기로 有名하다. 寺寶(寺寶)로는 千斤 梵鍾과 『月印千江之曲(月印千江之曲)』 木刻版(木刻板) 等이 있다.

甲寺 銅鐘 [ 編輯 ]

甲寺銅鐘

寶物 第478號. 甲紗 鐘閣에 있는 朝鮮時代의 種으로 높이 132.5cm, 입지름 92cm이다. 어깨 위에는 如意頭(如意頭) 입火刑(立花形)李 돌려 있고, 그 아래 한 가닥의 隆起線으로 2줄의 가로띠를 만들어 위띠에 나란한 4角形 속에 蓮꽃무늬를, 아래띠에는 동그라미 속에 梵字(梵字)를 洋酒(陽鑄)하여 촘촘히 配置하였다. 이 가로띠에 붙여서 4곳에 젖꼭지와 같은 突起가 3個씩 3줄로 늘어선 遊廓(乳廓)을 마련하고, 그 둘레를 唐草紋(唐草紋)으로 裝飾하였다. 遊廓 밑에는 原形의 當座(幢座)를 配置하고, 아래에 구름무늬를 깔았다.1584년(선조 17)에 만들어져 수많은 亂離를 거치면서도 오늘과 같은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麻谷寺 [ 編輯 ]

麻谷寺

忠淸南道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태화산 東쪽 山허리에 있는 절. 640年(新羅 선덕여왕 9)에 慈藏(慈藏)이 創建하였으며, 高麗 明宗(明宗) 때 1172年 普照國師(普照國師)가 重修하고, 梵日(梵日)李 再建하였다. 創建 當時에는 30餘 칸의 大寺刹이었는데, 現在는 大雄寶殿(寶物 第801號)·대광保全(寶物 第802號)·영산전(寶物 第800號)·四天王門·解脫門(解脫門) 等이 있을 뿐이다.이 밖에 社報(寺寶)로는 5層石塔(寶物 第799號)·梵鍾(地方有形文化財 第62號), 掛佛(掛佛) 1幅, 木牌(木牌), 世祖가 타던 年(輦), 靑銅香爐(地方有形文化財 第20號)가 있다.

麻谷寺 대광保全 [ 編輯 ]

麻谷寺大光寶殿

寶物 第802號. 麻谷寺에 있는 朝鮮 後期 木造建物. 正面 5칸, 側面 3칸으로 多包系 樣式의 單層 八作지붕의 建物이다. 自然石 더미 基壇 위에 세웠으며, 기둥에는 뚜렷한 배흘림이 보이고, 開口部는 앞面 5칸과 側面 앞칸에만 두었다. 1787年에 만들어졌으며, 世祖가 金時習을 만나기 위해 타고 온 魚價가 保管되어 있다.

麻谷寺 五層石塔 [ 編輯 ]

麻谷寺五層石塔

寶物 第799號. 麻谷寺 대광保全 앞에 있는 高麗 後期의 石塔으로 높이 8.7m이다. 重層(重層) 4角形의 一般型이다. 2層 基壇 위의 5層 塔神父에는 불(佛)·菩薩 等을 早食하고, 屋蓋石(屋蓋石) 네 모서리의 殿閣(轉角)에는 風景을 裝飾해 놓은 듯하나, 現在는 남아 있지 않다. 相輪部(相輪部)는 라마塔 形式의 靑銅度禁制로, 國內에서는 唯一한 것이다. 高麗時代 石塔의 特色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多寶塔이라고도 한다.

麻谷寺 大雄寶殿 [ 編輯 ]

麻谷寺大雄寶殿

麻谷寺에 있는 寶物 第801號. 17世紀 朝鮮 中期에 建立된 麻谷寺의 法堂. 下層은 正面 5칸, 側面 4칸, 上層은 正面 3칸, 側面 3칸이다. 1.5m 높이의 基壇 위에 세운 重層(重層) 多包系(多包系)의 八作建物로서 다른 建築樣式에 비해 構造가 特異하다. 外部는 一部가 變形되었으나 內部는 거의 原形대로 保存되어 있다.

扶餘 능산리 古墳群 [ 編輯 ]

扶餘陵山里古墳群

史跡 第14號. 扶餘郡 능산리 一帶에 分布하는 백제의 무덤軍이다. 1915年과 1917年 6基의 古墳이 發見된데 이어 1965年 2基가 더 發見되어 總8基의 古墳이 世上에 알려졌다. 백제 末期인 사비時代(538∼660)의 백제 王族墓로 推定되며, 構造的으로는 板石으로 짠 直四角形의 널房에 꺾임天障을 갖춘 典型的인 능산리型 돌房무덤이다. 그러나 陵山里古墳은 大部分 甚하게 盜掘당하여 出土遺物이 거의 없으며, 능산리型 돌房무덤은 百濟 領域이던 忠淸道·全羅道 等地에서도 發見되고 있다.

顯忠祠 [ 編輯 ]

顯忠祠

史跡 第155號. 忠武公 李舜臣(李舜臣) 將軍의 忠節을 追慕하기 위하여 세운 祠堂. 忠淸南道 아산시 廉치면 백암리에 있다. 朝鮮 肅宗 30年(1706) 忠淸道 儒生들이 朝廷에 建議하여 建立되었고, 이듬해 이름을 下賜받았다. 1865年 大院君의 書院撤廢令으로 撤廢 危機를 맞이한데다 庚戌國恥 後 日帝의 彈壓으로 20餘 年 間 거의 撤廢되다시피 하였으나 1932年 동아일보사 主管으로 汎國民的 모금을 벌여 補修하고 다시 影幀을 모셨으며, 1962年 展示館이 建立되었다. 1966年에는 顯忠祠의 聖域化 事業으로 領域을 擴大함으로써 現在 本錢·故宅·靜慮(旌閭)·遺物展示館·활터 等이 잘 整備되어 있다.

이충무公墓 [ 編輯 ]

李忠武公墓

史跡 第112號. 忠南 아산시 음봉면에 있는 忠武公 李舜臣 墓所이다. 1598年(宣祖 31) 露梁海戰(露粱海戰)에서 이 忠武公이 戰死하자 1599年 2月에 忠南 牙山 빙港山에 葬事지냈다. 그 後 다른 곳으로 移葬했다가 다시 現在의 位置로 모셨다. 墓域은 9,583㎡이며 墓 1期 外에 碑石 1期, 床石(床石) 1期, 長明燈 1雙, 石像(石像) 1雙이 保存되어 있다.

『亂中日記』 [ 編輯 ]

亂中日記

國寶 第76號. 忠武公 李舜臣이 壬辰倭亂을 겪는 中에 쓴 陣中日記(陣中日記)이다. 宣祖 25年(1592) 5月 1日부터 同王 31年(1598) 9月 17日까지, 卽 壬辰倭亂이 일어난 다음달부터 始作하여 忠武公이 戰死(戰死)하기 前달까지의 것으로, 『李忠武公全書(李忠武公全書)』에 傳해진 亂中日記의 自筆 草本이다. 內容은 試取(詩趣)에 넘치는 日常生活, 同僚·親戚과의 往來 交涉, 社가(私家)의 일, 水軍의 統制에 關한 祕策(秘策), 忠誠과 강개·非分 等의 內容이 收錄되어 있다. 壬辰倭亂 硏究에 없어서는 안 될 飼料(史料)로서 忠南 牙山 顯忠祠에 保管되어 있다.

灌燭寺 彌勒菩薩立像 [ 編輯 ]

灌燭寺彌勒菩薩立像

寶物 第218號. 忠淸南道 恩津에 있는 높이 18m나 되는 韓國 最大의 石造佛像이다. 巨大한 巖石을 利用한 擧上(巨像)이라는 外에 技法 自體는 拙劣하고 石材를 다루는 能力을 喪失한 데서 오는 無計劃하고 諦念的인 作品이라 할 수 있다. 허리의 아래와 위가 두 個의 巖石으로 나뉘며 머리 部分을 畸形的으로 크게 다루었기 때문에 보는 사람에게 外包(畏怖)의 느낌을 주는 呪術的인 效果는 있을지언정 藝術上의 價値는 不足하다.

무녕왕릉 [ 編輯 ]

武寧王陵

忠淸南道 공주시 금성동에 있는 백제 무녕왕과 王妃의 陵. 1971年 發掘되었다. 송산리 第5, 6號墳과 서로 封土(封土)를 接하고 있다.분구(墳丘)는 지름 約 20m의 原形 構造를 가지며 墓室의 바닥面에서 天障까지 7.7m이다. 墓室은 蓮花紋展(蓮花文塼)·文字展(文字塼) 等으로 쌓인 單室墓(單室墓)로 平面 4.2×2.72m의 크기인데 北으로 軸線을 둔다. 天障은 아치를 이루고 바닥面으로부터의 最高값은 2.93m이다. 壁面에는 第6號墳과 똑같은 模樣의 所感(小龕)과 그 아래에 硏子窓(連子窓) 模樣으로 된 것을 北쪽 壁에 1個, 桐·西壁에 各各 2個를 만들고 各 堪耐에는 燈盞이 들어간다.출토된 遺物로는 널길(羨道)에서 發見된 한 個의 뿔을 가진 鐵製(鐵製) 석수(石獸), 靑瓷六二號(靑瓷六耳壺) 洞祭(銅製)의 발(鉢)·市(匙)·誤主戰(五銖錢)과 함께 이 墳墓의 被葬者가 武寧王 夫婦임을 밝히는 各磁石板(刻字石板) 2張 等이 있다.현실에서는청자사이병(靑瓷四耳甁)·청동용기류(靑銅容器類)·철모·현금(玄琴) 等의 副葬品과 金·銀의 式금구(飾金具)가 달린 木管이 나왔는데, 王의 것은 東쪽에, 王妃의 것은 西쪽에 묻혀 있었다. 崩壞된 管 안에는 木枕·足座(足座)·東京(銅鏡)·단룡환두(單龍環頭)의 칼, 울두(蔚斗)와 洞祭(銅製)의 容器類 火焰型冠飾(火焰形冠飾)·數式(首飾)·移植(耳飾)·殖利(飾履)·팔찌(釗) 等의 裝身具가 들어 있었다.

公主 古墳群 [ 編輯 ]

公州古墳群

忠淸南道 공주시 一帶에 흩어져 있는 백제의 古墳群이다. 宋山里(宋山里) 1∼6號墳(私的 13號)·時木洞 古墳(枾木洞古墳)을 비롯하여 금성동(錦城洞)·옥룡동(玉龍洞)·금학동(金鶴洞) 等의 古墳이 代表的이다. 石室무덤이 主流를 이루는데, 小型에서부터 한 邊의 길이가 3m를 넘는 大型 等 크기와 形式 面에서 여러 가지이다.

公州 宋山里 古墳群 [ 編輯 ]

公州宋山里古墳群

史跡 第13號. 忠淸南道 공주시 금성동에 있는 백제古墳群. 海拔高度 130m의 松山 中턱의 南쪽 傾斜面에 甓돌무덤과 滑石·怪石으로 만들어진 돌房무덤 10餘 氣가 있다. 只今까지 發掘된 7基의 分布를 보면 溪谷 西쪽에는 무녕왕릉과 5∼6號墳, 東쪽에는 1∼4號墳이 있다. 1∼5號墳은 穹窿으로 된 천장식 돌房무덤인데, 1∼4號墳은 백제가 公主로 遷都한 直後부터 6世紀 初盤에 造成된 것으로 보인다. 6號墳과 무녕왕릉은 터널型 天障의 甓돌무덤으로서 6號墳은 壁 네 面의 一部에 四神圖를 그려 넣은 壁畫古墳으로서 긴 排水口가 널길을 向해 밖으로 뻗어 있다. 甓돌의 무늬와 築造 方法上 무녕왕릉보다 조금 앞선 6世紀 初의 무덤으로 보인다.

公州 公山城 [ 編輯 ]

公州公山城

史跡 第12號. 忠淸南道 공주시 산성동(山城洞)에 있는 酸性으로, 흙과 돌을 섞어 쌓았다. 475年(문주왕 1) 百濟가 한산성(漢山城)에서 熊進(熊津)으로 遷都하였다가, 다시 538年(聖王 16)에 扶餘로 遷都할 때까지 5代 64年 間의 都邑地인 公主를 防禦하기 위하여 築造한 性이다. 城터는 東西 約 800m, 南北이 約 400m이며 四方에 席루(石壘)가 남아 있는데, 이것은 大部分 朝鮮 中期에 改修된 것이다. 東쪽과 南쪽 城壁은 높이 約 2.5m로 全面만을 石築하였으며, 안쪽 面은 土沙·雜石으로 다져 붙였다. 城內에는 後代에 세워진 영은사·광복루(光復樓)·雙修正(雙樹亭)·蓮못터 等이 남아 있다.

七百義塚 [ 編輯 ]

七百義塚

史跡 第105號. 忠淸南道 錦山郡 금성면 의총리에 位置해 있다. 壬辰倭亂 때 義兵將 고경명(高敬命)과 趙憲(趙憲), 僧將(僧將) 靈圭(靈圭) 外 함께 戰死한 700名의 將卒의 遺骨을 合掌한 무덤이다. 後世에 殉義碑(殉義碑)와 종용사(從容祠)를 建立하였으나 倭人들에 依하여 破壞되었다. 解放 直後 再建한 것을 1970∼1976年에 크게 中搜(重修)하였다.

無量寺 [ 編輯 ]

無量寺

忠淸南道 扶餘郡 외산면 萬壽山에 있는 절이다. 新羅 때 創建한 것으로 그 後 여러 次例 重修하였다. 朝鮮 7代 世祖 때 金時習(金時習)李 隱居(隱居)하여 있다가 죽은 곳으로 有名하며, 極樂殿(極樂殿)·石燈·5層 石塔 等이 있다.

無量寺 極樂殿 [ 編輯 ]

無量寺極樂殿

寶物 第356號. 無量寺에 있는 朝鮮 中期의 重層(重層) 佛殿(佛殿) 建築物이다. 下層은 正面 5칸에 17.14m, 側面 4칸에 12.23m이며, 上層은 正面 3칸에 12.23m, 側面 2칸에 7.34m의 重層 八作지붕이다. 外觀上으로 보면 重層이나 內部는 上下層의 區分 없이 하나로 통해 있어 雄壯한 느낌을 준다. 內部는 바닥에 마루를 깔았고, 四方 周圍에 1칸의 外둘레칸을 통하게 하였으며, 안쪽에 3칸×4칸의 平面을 지어 高柱(高柱)를 돌려 세웠다.

無量寺 石燈 [ 編輯 ]

無量寺石燈

無量寺에 있는 10世紀頃의 花崗石 石燈이다. 極樂殿 앞에 있는 5層石塔(寶物 185號) 바로 앞에 있다. 全體的으로 보아 屋蓋石이 若干 큰 便이지만 엷은 屋蓋에 추녀마다 날아갈 듯 輕快하게 만들어져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다.

성주사지 [ 編輯 ]

聖住寺址

史跡 第307號. 忠淸南道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에 있는 백제時代의 절터이다. 많은 塑造佛(塑造佛) 破片과 百濟·新羅 時代의 기와 等 여러 遺物이 發掘되었다. 壬辰倭亂 때 불타버려 現在는 절터만 남아 있다.절의 重창자인 朗慧(朗慧)가 入寂한 뒤 그의 業績을 기리기 위하여세운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국보제8호)와중앙3층석탑, 桐·西3層石塔, 石燈 等의 遺物이 남아 있다.

성주사지 서삼층석탑 [ 編輯 ]

聖住寺址西三層石塔

寶物 第47號. 성주사지에 있는 統一新羅時代의 3層石塔이다. 성주사지에 一列로 있는 3個의 石塔 中 하나로 높이는 4m 程度이며, 2層 基壇 위에 3層 塔身을 올린 新羅 石塔의 基本形이 가장 잘 드러나 있다. 『史跡記』에 依하면 3基의 3層石塔은 3세불(三世佛)인 錠光佛(定光佛)·藥師佛·가섭불의 舍利塔이라고 한다.

성주사지 五層石塔 [ 編輯 ]

聖住寺址五層石塔

寶物 第19號. 성주사지에 있는 統一新羅時代의 石塔. 金堂址(金堂址) 前面에 있는 것으로 보아 佛塔으로 推定된다. 2層 基壇 위에 5層의 塔身으로 層數에 差異가 있을 뿐 各 部分의 樣式이나 造形手法이 같은 절터 안에 있는 다른 3個의 塔(中央3層石塔·西3層石塔·桐3層石塔)과 같다.

修德寺 [ 編輯 ]

修德寺

忠淸南道 禮山郡 덕산면 사천리 덕숭산(德崇山)에 있는 절이다. 백제 15代 枕流王 2年(358)에 수덕각시라는 觀音 化身(觀音化身)李 衆生 制度를 위해 創建했다는 傳說을 지닌 考察(古刹)이다. 國寶 第49號인 大雄殿은 形態가 莊重하고 細部 構造가 堅實 緻密한 優秀한 建築物이다. 高麗 25代 忠烈王 34年(1308)의 建物임이 8·15光復 前 修理工事 때 밝혀졌다. 『三國遺事』에 依하면 백제의 中 慧顯(惠現)李 이곳에서 三論(三論)을 工夫했다고 한다.산 위에는 比丘(男子 中)가 居處하는 定慧寺(定慧寺)가 있으며, 西쪽에 比丘尼(女子 中)가 사는 叢林(叢林)이 있다. 觀音 바위·彌勒 石佛·滿空塔·전원사 等이 있다. 特히 曇徵(曇徵)李 그린 大雄殿 壁畫가 有名하다.

修德寺 大雄殿 [ 編輯 ]

修德寺大雄殿

國寶 第49號. 修德寺에 있는 大雄殿. 正面 3칸, 側面 4칸의 맞배집이며 恐怖는 2出目으로 되고 大體的으로 浮石寺 無量壽殿과 같은 形式이나, 全般的으로 無量壽殿에 비해 高麗 後期의 性格을 보인다. 1940年의 修理時에 나온 묵署名(墨書銘)에 依하여 그 連帶가 1308年임이 確認되었다.

해미邑城 [ 編輯 ]

海美邑城

史跡 第116號. 忠淸南道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에 있는 옛 石城. 朝鮮 9代 成宗(成宗) 22年(1491)에 築造된 原形의 邑城(邑城)으로, 城의 길이 1,800m, 城壁 높이 5m, 面積은 64,463㎡이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完全한 邑城의 하나이다. 俗稱 탱자城이라고도 하는데 1973年부터 復元事業을 實施하여 民家 및 官公署가 撤去되고, 3大門과 客舍 2棟, 東軒 1洞 等이 復元되었다.

瑞山 磨崖三尊佛像 [ 編輯 ]

瑞山磨崖三尊佛像

國寶 第84號. 忠淸南道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있는 백제 末期 마애삼존불像으로 높이는 2.8m이다. 中央의 本尊像을 中心으로 오른쪽에는 菩薩立像, 왼쪽에는 半跏思惟像이 있다. 이 三尊像은 『法華經』의 手記三尊佛(授記三尊佛), 卽 석가불·彌勒菩薩·제화갈라보살로, 『法華經』 思想이 백제社會에 流行하였다는 事實을 立證하는 遺物이다.

普願寺지 [ 編輯 ]

普願寺址

史跡 第316號. 忠淸南道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있던 절터이다. 講堂寺(講堂寺)라고도 하는데, 절터에는 寶物로 指定된 石造(石槽)·幢竿支柱(幢竿支柱)·五層石塔·法人國師보승탑(法印國師寶乘塔) 等이 남아 있다.

普願寺지 五層石塔 [ 編輯 ]

普願寺址五層石塔

寶物 第104號. 普願寺지에 있다. 高麗 初期의 塔婆 樣式을 보여주며, 높이 9m나 되는 큰 塔이다. 下城 基壇의 各 面에 獅子 模樣을 새기고 상성 基壇의 各 面에는 八部愼重(八部神衆)을 새겨 新羅 末期 石塔의 手法을 보여준다. 한便 얇고 길게 뻗은 처마가 백제의 傳統을 따르고 있어 特異하다.

洪州城 [ 編輯 ]

洪州城

史跡 第231號. 忠淸南道 洪城郡 홍성읍에 있는 城이다. 現在의 城은 朝鮮 5代 文宗(文宗) 1年(1451)에 修築한 것으로 東쪽에 조양문(朝陽門), 西쪽에 警疑問(景義門), 北쪽에 網化門(望華門)이 있다.

泰安 마애삼존불 [ 編輯 ]

泰安磨崖三尊佛

寶物 第432號. 忠淸南道 泰安郡 태안읍 동문리에 所在하는 花崗石 石佛像이다. 2如來·1菩薩이라는 破格的인 이 3尊尙은 우리나라 조각 史上 稀貴한 것이다. 따라서 그 獨特한 形式은 彫刻뿐 아니라, 敎理思想으로도 重要한 意味를 갖는 遺物이다. 聯隊는 仔細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6世紀 中葉頃의 中國 佛像의 백제式 飜案으로 推測된다.

안국사지 石佛立像 [ 編輯 ]

安國寺址石佛立像

寶物 第100號. 高麗 後期의 花崗巖 佛像. 忠淸南道 唐津郡 정미면 수당리에 있다. 본존 높이 4.91m, 座菩薩 높이 3.55m, 禹菩薩 높이 1.7m. 本尊 머리 위에는 長方形 갓이 씌워져 있고 몸통은 방주형(方柱形)이다. 얼굴은 넓적하고 목이 짧으며, 表情 또한 怪常하다. 오른쪽 菩薩像은 立體感이 두드러지며 머리에 높은 保管을 썼는데, 왼쪽 菩薩像은 머리가 切斷되었고 前面에 磨滅이 甚하다.

안국사지 石塔 [ 編輯 ]

安國寺址石塔

寶物 第101號. 高麗時代의 4層 石塔. 忠淸南道 唐津郡 정미면 수당리에 있다. 塔神父에 비해서 基壇部가 疏忽한 便이다. 地上에 2枚의 長臺石을 놓아 址臺石을 삼았으며, 相面에 낮은 怪임이 表出되었을 뿐 그 위의 重石(中石)은 1賣惜을 얹었고 宇宙(隅柱)나 撐柱(撑柱)도 없는 自然石에 가까운 石材이다. 素朴한 느낌을 주며, 塔身에 佛像을 彫刻한 點 等 價値가 높다.

寶篋印石塔 [ 編輯 ]

-石塔

천안시 北面 대평리 所在. 1期, 基壇部 55×66cm, 높이 187cm. 構造나 樣式으로 보아 特殊型에 屬하는 오월왕전홍숙팔만사천기탑계의 異形石塔으로 우리나라에서는 唯一無二하다. 北面 대평리 탑골에 있는(구룡사라 口傳) 절터에서 出土된 것으로 흩어져 있다가 1967年에 天安으로 搬出되었다가 東國大 博物館에 保管하고 있다. 基壇石 角面에 2柩씩의 羅漢像이 彫刻되어 있으며, 塔身怪臨席에는 唐草紋과 양연文이 彫刻되어 있고, 塔身 角面에 釋迦本生圖 조각과 舍利공이 있다. 開析에는 唐草紋과 單先聞 48版의 蓮花紋 조각이, 相輪部에는 4個의 마異常을 한 蓮花瓣을 네 귀퉁이에 세워 彫刻하였다.

천흥사 同種 [ 編輯 ]

天興寺銅鐘

國寶 第280號. 천안시 성거읍 천흥리에 있던 천흥사의 同種. 種球直徑 955m/m, 鐘鼓 1676m/m. 構成 要素로 볼 때 新羅鐘의 特徵인 단용·蔭官·上臺·下臺·流頭·當座 및 飛天像의 傳統을 그대로 이어받은 代表的인 高麗 電氣鐘으로서 外形上으로는 新羅종이 아닌가 疑心할 程度로 類似點이 많으나 構成이 簡素化되었고, 位牌兄의 名文곽이 있는 것이 特徵이다.명문에 依하면 1010年에 主星된 鐘임을 알 수 있고 規模는 鐘鼓 1,676mm, 구경 955mm, 두께 88mm로 現存하는 高麗 電氣鐘 中에서 最大의 鐘이다. 現在 國立中央博物館 金屬工藝室에 展示되고 있다. 천흥사가 斃死된 後 어떤 理由인지 남한산성으로 옮겨져 使用되다가 광주군청으로 옮겨졌고 다시 德壽宮 美術館에 있다가 國立中央博物館에 있게 되었다.

천흥사地 五層石塔 [ 編輯 ]

天興寺址五層石塔

寶物 第354號. 천안시 성거읍 천흥리 190 所在. 數量 1式, 높이 5.3m. 新羅時代 石塔樣式을 이어받은 高麗時代의 5層石塔이다. 基壇은 二重基壇을 갖추었는데 下層基壇은 址臺石 免席으로 構成되었으며 免席에는 宇宙와 撐柱없이 1面에 7柩씩의 眼象을 새겼다. 上層氣團의 免席에는 네 個의 宇宙만이 새겨져 있다. 塔神父에는 塔身과 屋蓋石이 各各 한 個의 돌로 되어 있으며, 遞減率은 작은 便이다. 屋蓋石은 評駁하고 낙수면은 傾斜가 緩慢하며 殿閣의 反轉이 큰 便이다. 現在 相輪部는 全部 없어서 元來 狀態를 알 수 없으나 石塔 自體에서 나타나는 形式과 樣式에서 秀麗한 手法을 보이고 있고, 樣式的 特徵을 갖춘 塔으로 천흥사 同種(1010)과 時代를 같이 하는 高麗 初期의 塔이다.

千원 삼태리磨崖佛 [ 編輯 ]

天原三台里磨崖佛

寶物 第407號. 天安市 풍세면 삼태리 산 27 所在. 佛像 높이 7m. 이 佛像은 巨大한 算定바위에 돌을 새김한 磨崖佛立像이다. 넓적하면서도 迫力있는 얼굴, 길게 치켜올라간 눈, 광대뼈가 나온 뺨, 큰 코와 작은 입 等의 耳目口鼻가 매우 剛健한 印象을 주고 있다. 소발의 머리카락, 둥글고 큰 陸繫島 퍽 印象的이며, 두 손은 가슴 앞으로 들어 獨特한 손 模樣을 이루고 있는데 이런 수인은 高麗時代의 彌勒佛像 囚人들과 같은 것이어서 佛像 名稱까지 알 수 있다. 넓은 어깨에 걸친 洞見의 不義는 배 아래서부터 U字形의 주름을 形成한 點이나 손목을 돌아 내린 依習儀 對稱的인 表現 等은 거침없고 豁達한 便이지만 先覺의 平行的인 處理, 끝단의 마무리 等에서는 圖式化된 面을 엿볼 수 있다. 全體的인 形態나 相互, 옷주름의 表現 等에서 高麗 時代의 佛像樣式을 端的으로 보여주는 巨大한 磨崖佛像으로 評價된다.

어필賦役免稅權 [ 編輯 ]

御筆賦役免稅權

寶物 第259號. 천안시 광덕면 광덕리 640(광덕社內) 所在. 校誌의 規模는 세로 47cm, 가로 28cm이다. 世祖 3年(1457) 8月에 王이 溫陽溫泉에 行幸하다가 이곳 광덕社와 개川社(只今의 광덕면 寶算原理)에 들러 이와 같은 面部長을 써 주었다. 內容은 본 査察의 僧侶들은 賦役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世祖는 우리나라의 有名寺刹을 거의 찾아 참佛韓 帝王으로 널리 알려졌으나 面部長을 남긴 寺刹은 많지 않다.

柳寬順 烈士 遺跡 [ 編輯 ]

柳寬順烈士遺蹟

史跡 第230號.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 外. 生家 20坪, 奉化地 1式, 私的 2.449㎡, 奉化地 1,600式. 이곳은 柳寬順 烈士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1919年 3月 1日 3·1運動이 일어나자 梨花學堂 學生들과 서울에서 示威에 參加하였고, 日本人들이 休校令을 내리자 같은 해 3月 13日 故鄕 병천으로 내려와 마을 사람들에게 서울의 3·1運動 狀況을 說明하고 함께 蹶起할 것을 說得했다. 4月 1日(陰曆 3月 1日) 아우내 場날을 期하여 萬歲運動의 횃불을 올렸던 곳으로 1972年 10月 14日 國家에서 史跡地로 指定하였다.

계유명 三尊千佛碑像 [ 編輯 ]

癸酉銘三尊千佛碑像

國寶 第108號. 鳥致院 서광암에서 發見된 이 飛上은 蓮花臺와 異端을 이루는 千個를 上下에 갖추고 있다. 神父의 下部에는 삼존상이 새겨져 있고 左右에 名文이 있으며 그 밖에는 千불挫傷이 가득 새겨져 있다. 造成時代는 統一新羅 初期로 推定된다.

金銅菩薩立像 [ 編輯 ]

金銅菩薩立像

國寶 第247號. 1974年 공주시 의당면 송정리 절터에서 出土. 國立公州博物館 所藏. 三面 保管을 쓴 얼굴은 거의 四角形에 가까우며, 保管의 中央에 化佛이 있어 觀音菩薩像임을 알 수 있다. 둥글고 雅淡한 單판蓮花座의 樣式과 함께 백제 後期 約 7世紀頃의 作品이다.

新元史 掛佛 [ 編輯 ]

新元寺掛佛

國寶 第299號. 공주시 계룡면 量와리. 製作年代는 未詳이며 朝鮮時代 末期로 推定되는 바로者나 不和로서 길이 9.76m 幅 6.17m로 麻布에 彩色하여 그렸으며 大法會視 밖에 내걸었던 行事用 佛畫이다.

釋迦如來 진신사리탑 [ 編輯 ]

釋迦如來眞身舍利塔

1990年 미얀마에서 4과, 泰國에서 3과 都合 7과의 釋迦如來 眞身舍利를 모셔다 奉安하고 있는 塔이다. 이곳에 伽藍을 세우고 塔을 세우면 千年萬臺로 國益을 圖謀한다는 옛 말에 따라 現 住持 운담 大使의 願力으로 세우게 되었다.

階伯 將軍 遺跡 戰跡地 [ 編輯 ]

階伯將軍遺蹟戰蹟地

논산시 부적면 산 4番地 所在. 義慈王 20年(660)에 羅唐 聯合軍이 백제에 侵入하였을 때 5千 名의 決死隊를 이끌고 出戰 新羅 金庾信의 軍事 5萬餘 明과 對決 4次例에 걸쳐 물리쳤으나 衆寡不敵으로 壯烈하게 戰死한 階伯 將軍의 屍身을 거두어 隱密하게 假埋葬한 것으로 朝鮮 肅宗 6年(1680)에 衷曲書院을 建立하고 階伯 將軍 位牌를 走向으로 모시고 享祀를 지내오다가 近來에는 墓所에서 墓祭로 지낸다.

星州 陶氏 宗中文書 [ 編輯 ]

星州都氏宗中文書

寶物 第724號. 논산시 연산면 관동리 所在. 文書 5件(王旨 28cm×35cm 4件, 鹿牌 18cm×48cm 1件). 陶氏 中宗에 所藏된 本文서는 星州 陶氏 7歲 都膺에게 朝鮮 太祖 2年(1393) 3年, 4年, 6年에 各各 發給된 司令 왕지 4件과 鹿牌 1件이다.도응은 高麗 末의 恭愍王 때에 重大廣問하時贊成을 歷任하였다. 高麗가 亡하고 朝鮮이 들어서자 태조왕이 4次例에 걸쳐 王旨를 보내며 官職을 授與했으나 이에 應하지 않았으며 杜門洞 72人의 한 분이다. 4次例의 왕지에는 高麗末 朝鮮初의 官職名이 竝用되었고, 왕지에 쓰인 刷步 4件은 「朝鮮支保」로 鹿牌는 「船社知人」으로 되어 있으며, 筆體는 草書體가 使用되었다. 本文書를 통해 官制의 沿革, 刷補宜 使用經緯, 書體의 變化, 文書樣式의 變遷過程을 糾明할 수 있는 重要한 歷史的 資料이다.

김장생 墓域 [ 編輯 ]

金長生墓域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 산 7-4番地 所在. 沙溪 金長生은 83歲의 나이로 世上을 떠났고, 그의 學問은 아들 金集에게 이어져 朝鮮 禮學의 泰斗로 畿湖學派 學問의 主流를 이루며 門下에 宋時烈·宋浚吉 等 朝鮮 儒學의 巨儒들을 排出시켰다. 1688年에 文廟에 配享되고, 演算의 돈암書院, 安城의 陶器서원, 强勁竹林서원 等 國內 10餘 開所 書院에 配享되어 있다.

開泰寺 [ 編輯 ]

開泰寺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 108番地 所在. 이규보 先生이 쓴 「開泰寺 弔電原文」에 依하면 高麗 太祖 19年에 王建이 後百濟를 平定하고 이곳에 국刹로 創建케한 國立 個國寺刹이다. 戰爭이 끝나고 나라가 安定되어감에 따라 王이 命하여 開泰寺를 創建케 하였는데 이는 太祖가 戰爭을 하면서도 百姓이 生業을 維持케 되고, 나라를 세웠음은 부처님과 山神靈의 도움이라고 생각하고 절을 創建하여 開泰寺라 불렀다.이 一帶는 백제의 階伯將軍과 新羅의 金庾信 將軍이 戰鬪를 벌렸던 곳에 가까우며 古今을 통하여 軍事, 交通上의 要地로서 査察周邊에는 6km에 達하는 土城이 있었고, 僧兵이 駐屯하여 査察을 守備하였다. 이곳 地域에는 同時代의 鐵확(가마솥, 忠淸南道 民俗資料 第1號)과 三尊石佛像(寶物 第219號)李 奉安되어 있다.

쌍계사 大雄殿 [ 編輯 ]

雙溪寺大雄殿

寶物 第408號. 논산시 양촌면 중산리3 雙磎寺. 正面 5칸 19.7m, 側面 3칸 10m, 單層 8作지붕. 朝鮮 英祖 14年(1378)에 再重建 되었는데 기둥과 大들보는 굵은 材木을 使用했고, 規模도 相當히 큰 便에 屬한다. 正面 5칸은 6個의 기둥을 같은 間隔으로 세우고, 各 칸마다 두 짝씩 門을 달았다. 門짝의 門살에는 섬세하고, 精巧한 꽃새김을 한 꽃살門이다. 門살에 彫刻된 꽃무늬는 國花·芍藥·牧丹·無窮花 等을 華麗하게 彫刻했고, 꽃과 門살에도 彩色하여 아름답게 꾸몄다. 배흘림있는 기둥 위에는 唱榜과 平方을 짜돌리고 그 위에 外事出目 내오출목의 多包式 恐怖를 配列하였는데 우리나라 佛殿建物로서는 가장 出目樹가 많은 恐怖의 事例이다. 建物 內部에는 3弗을 奉安하였는데 佛像마다 上部에는 奬勵한 닫집을 달았으며 닫집의 섬세한 彫刻과 裝飾은 莊嚴한 느낌을 준다.

노성산性 [ 編輯 ]

魯城山城

史跡 第393號. 論山市 노성면 송당리 산 1-1 所在. 노성산 算定에 있는 酸性으로 石築으로 된 테뫼型이다. 公州·論山·演算으로 갈라지는 重要한 地點에 位置하고 東北方向으로는 洋畫山城과 對하고 있다. 酸性의 둘레는 約 900餘 m이고, 높이는 西쪽이 4.2m, 南쪽이 6.8m이고, 西쪽文의 痕跡이 뚜렷이 남아 있는데 幅은 6m이다. 여기에 使用된 石材는 크기가 일정하지 않지만 20cm×60cm 程度로서 네모지게 다듬고 自然의 地勢를 巧妙하게 利用하여 構築한 築城術은 近方의 山城 中에도 보기 드문 形態이다. 城內에는 우물 4個所가 있고, 頂上部分에는 傾斜面을 朔吐하여 만든 土壘가 있고, 山꼭대기에는 장대지로 推定되는 곳과 장대지 東쪽으로 조금 내려온 곳에 烽火臺로 推定되는 部分이 25cm 程度의 石築으로 되어 있다. 城안에서는 百濟時代, 新羅時代, 朝鮮時代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土器篇과 瓦片들이 發見되고 있어서 朝鮮時代까지 重要하게 使用되었던 聖地임을 알 수 있다.

保寧 官衙文 [ 編輯 ]

保寧官衙門

地方有形文化財 第40號. 忠南 보령시 주포면 部令리 所在. 保寧貫아문은 朝鮮時代 保寧縣과 外郭을 두루고 있는 洑勵聲 專門으로 알려져 있다. 世宗 13年(1431) 縣監 朴曉星 赴任 後 建立한 것으로 傳한다. 現存 城郭 約 640m가 文化財 資料로 指定되어 있고, 衙門의 懸板 “解散루”가 當時(中宗 33年:1590) 領議政을 지낸 李山海의 親筆로 傳해오고 있다.

南浦 官衙文 [ 編輯 ]

藍浦官衙門

地方有形文化財 第65號. 忠南 보령시 남포면 읍내리 所在. 南浦官衙文은 朝鮮時代 남포현과 外郭을 두루고 있는 南浦邑城 正門으로 鎭西樓는 外三門, 玉山아문은 內三門이었다. 朝鮮 太宗 6年(1397) 兵馬使를 두어 賢士를 겸하게 하다가 世宗 1年(1466) 陣을 縣으로 고쳐두었다. 當時 客舍, 東軒, 餓死, 鄕廳, 作廳, 現事 等 官衙建物이 『여지도서』에 記錄으로 傳한다.현존 建物 3棟이 原形保存, 文化財로 指定 保存되고 있다. 鎭西樓는 正面 3칸, 側面 2칸의 重層樓閣으로 下層에 三門을 設置하여 東軒의 出入門으로 使用하였다. 玉山아문은 內三門으로 正面 7칸, 側面 1칸으로 兩쪽에 1칸씩 紅살과 翼室을 두었다. 東軒은 縣監의 執務建物로 正面 7칸 側面 3칸 中央에 2칸의 우물政 마루를 두고 座·右便에 4칸의 작은 房을 두었고, 長礎石, 덤벙주초에 圓기둥으로 建立하였다.

오천현 官衙 [ 編輯 ]

鰲川懸官衙

地方有形文化財 第136號. 忠南 보령시 오천면 蘇城里 所在. 오천현 官衙는 朝鮮時代 忠淸水營廳의 官廳建物로 當時에는 客舍 82칸, 上書헌 9칸, 內東軒 10칸, 外東軒 10칸, 餓死 5칸, 관청고 10칸, 軍事 7칸 等으로 이루어졌음이 勵志圖에 記錄되어 있다. 現存 官衙建物로는 將校廳, 賑恤廳, 공해관으로 3棟이 있다. 將校廳은 朝鮮 純祖 33年(1833)에 建立한 建物로 水泳의 軍幹部들이 議論하던 正面 4칸, 側面 2칸으로 右側에 溫突房을 둔 建物로 1986年까지 오천면 廳舍로 使用하였다. 賑恤廳은 水泳에서 貧民을 救濟할 目的으로 穀食을 꾸어주고 거두어들이던 곳으로 五千性 序文 周邊에 있다. 공해관은 水泳의 內三門으로 솟을 形式이며, 正面 3칸, 側面 1칸의 初翼工 建物로 當初에는 현오천初等學校 正門으로 使用하였다.

개심사 大雄殿 [ 編輯 ]

開心寺大雄殿

寶物 第143號. 서산시 운산면 신창리의 上王山麓에 있다. 백제 義慈王 14年(651) 때 惠鑑國師가 創建했다. 壬辰倭亂 때 모두 타버린 것을 다시 再建하였다. 大雄殿은 多包式 建築樣式으로 作法이 아름다워 建築藝術의 極致를 이루고 있다. 지붕 처마 가까이에는 죽 늘어선 陶瓷器 連峯들이 있는데 기왓張이 떨어져 내리는 것을 막는 구실을 한다. 안으로 들어서면 높은 佛壇 위에 蓮꽃彫刻 臺座를 두고 阿彌陀佛이 앉아 있으며, 兩 옆의 菩薩들은 支障과 觀音菩薩立像이다. 군더더기 없는 얼굴 模樣, 井然한 彫刻 等이 高麗 末과 朝鮮 初期의 緊張感을 보여주고 있다.

간월암 [ 編輯 ]

看月庵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里에 位置한 작은 庵子로 朝鮮 初 無學大師가 創建하였으며, 萬共大使가 重建하였다고 傳해진다. 다른 庵子와 달리 干潮視에는 물과 連結되고 滿潮時는 섬이 되는 神祕로운 庵子로 滿潮時에는 물 위에 떠 있는 庵子처럼 느껴진다. 밀물과 썰물은 6時間마다 바뀌며 周圍 自然景觀과 옛 先祖들의 숨결을 함께 느낄 수 있는 考察이 어우러져 觀光客의 발길이 줄을 잇고 있다.

牙山 외암리 民俗마을 [ 編輯 ]

牙山外巖里民俗-

忠南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所在. 忠南 아산시와 천안시의 境界인 廣德山 밑에 位置하고 있는 외암리 民俗마을은 約 500年 前에 이 마을에 定着한 瘞安 李氏 一家가 主流를 이루어 살고 있다. 門中에 傑出한 人物들이 많아 큰집이 들어서기 始作했고 只今도 옛 모습을 간직한 집들이 많다. 이끼낀 돌담을 돌면 이 마을의 歷史를 斟酌할 수 있는데 돌담 너머로 뜰 안에 심어 놓은 과일나무 및 마을 入口의 장승을 비롯하여 朝鮮時代의 生活相을 엿볼 수 있는 디딜방아·硏子방아·물레방아·草家지붕 等이 保存되어 있으며 이 밖에 많은 民俗遺物들이 傳해내려오고 있다.

孟氏杏壇 [ 編輯 ]

孟氏杏亶

史跡 第109號. 아산시 배방면 중리 300 所在. 牙山孟氏杏壇은 牙山市에서 구온孃을 거쳐 左부리라는 곳을 지나 6km쯤 되는 地點에 있다. 牙山孟氏杏壇 內에는 맹사성 政丞이 심은 600餘 年 된 銀杏나무가 있고 故宅이 있는데 이 建物은 우리나라 民家 中에서 第一 오래된 집이다. 古宅 뒤에는 맹 政丞, 父親인 희도, 祖父 留意 位牌를 奉安한 祠堂으로 勢德社가 있다. 巨大한 銀杏나무가 있어서 杏壇이라 부르게 된 듯하나 工夫하던 자리의 意味인 行段이 된 것 같기도 하다.

石造藥師如來立像 [ 編輯 ]

石造藥師如來立像

寶物 第536號. 아산시 송악면 평촌리 산2-4 所在. 高麗時代의 代表的인 丈六佛像(1張 6隻)이다. 上體가 짧고 下體가 긴 多少 不均衡한 賞이지만 얼굴이나 옷주름의 뛰어난 彫刻 솜씨 때문에 優秀한 佛像으로 돋보이고 있다. 갸름하고 端雅한 얼굴, 맵시 있는 耳目口鼻, 잔잔한 微笑 等은 高麗時代의 獨特한 佛像樣式의 特徵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點은 佛像의 體軀가 直四角形이면서 評判的이지만 손이나 팔, 어깨와 다리를 서투르게 表現하지 않은 點이나 옷주름의 流麗한 솜씨 等으로 當時의 石佛像으로는 드물게 優秀한 모습을 表現한 데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비암사 계유명 全氏 阿彌陀佛三尊石像 [ 編輯 ]

碑巖寺癸酉銘全氏阿彌陀佛三尊石像

國寶 第106號. 燕岐郡 全義面 다방리 비암사에서 出土되었으나 現在는 國立 淸州博物館에 있다. 本來 燕岐郡 全義面 山 속의 비암사에는 3位의 非常이 傳해왔는데, 1960年 9月에 發見·調査하여 모두 國寶寶物로 指定하고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으로 移管 保存하였는데 이 石像도 그 中의 하나이다. 非常이란 石碑 模樣으로 造成한 佛像을 말하는 것인데 이러한 非常이 3位나 있었음으로 비암사라는 使命이 붙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三尊石像은 屋蓋와 臺座를 잃고 神父만이 남아 있다. 前面에는 大型의 舟形光배를 지닌 群像이 彫刻되었으며 中央에는 本尊인 阿彌陀如來坐像이 蓮花座 위에 結跏趺坐하였는 바 醫團은 밑으로 내려 對坐의 半을 덮고 依濕은 左右對稱으로 表現했으며 洞見한 法衣를 비롯해 習癖 사이에 演奏家 裝飾되어 있다. 本尊像 左右에는 各各 1位의 菩薩立像과 仁王入賞이 모두 유경蓮花座 위에 積立하였으며 本尊과 菩薩 사이에 各 1位의 羅漢像半身이 表現되었다. 모두 七尊尙이 彫刻되었는 바 이들 漆尊尙은 모두 다시 下部에는 大阪中葉의 蓮花座에 二重으로 실려 있으며 蓮花座와 各 相 사이에는 相對하는 長身의 獅子 2頭가 새겨졌다. 光背에는 火夫와 飛天像이 彫刻되어 華奢하다. 兩 側面에는 左右 兩쪽

끝에 圓柱形을 表現하고 蓮花座에는 모두 같은 樣式의 天賦株樂想을 꿇어 앉혔다. 뒷面은 4段으로 等分하되 三曹의 行船臺로 나누었다. 그리고 各 段마다 5位의 座上을 病熱하여 合計 20位를 配置하였다. 各 賞의 모두 같은 形態로서 연화와 寶珠型 頭光을 갖고 있으며 兩손으로 水中空輸하였고 胸部마다 前面의 本尊像과 같이 萬자를 새겨놓았다. 조각에 있어서 量側面의 株樂想은 連帶가 가장 오랜 石像일 것이며 名門의 癸酉年은 新羅文武王臺(661~680)로 推定된다. 따라서 이 飛上은 백제가 滅亡한 後 그 流民의 有力者인 全氏가 發源하여 이룩한 것으로 斟酌된다.

서광암 계유명 三尊千佛碑像 [ 編輯 ]

-庵癸酉銘三尊千佛碑像國寶 第108號. 總 높이 91cm. 鳥致院邑內에서 西쪽으로 約 2km 떨어진 山기슭의 서광암에서 1961年에 發見·調査되었다. 上·下 2席으로 연화臺石과 神父가 1席이며 頂上部에 얽힌 2段型 千個가 別席으로 造成되어 있다. 이 石像은 單판의 殃禍原形 臺座 위에 세워졌는데 鉛版의 彫刻은 側面에서 그쳤다. 神父는 長方形 非신형을 이루고 그 下部中央에 三尊像을 彫刻하였으며, 그 兩側에는 各 4行의 名門을 陰刻하였다. 그리고 三尊과 名文 以上의 全面을 10段으로 나누었는데 賞9段에는 各 20位의 작은 如來坐像을 彫刻하였다. 이 같은 小型佛像의 配置는 側面 各 14段에 各 8位씩 後面 16段에 各 12位씩으로 4面 全體에 720位의 小불이 彫刻되어 空間을 남기지 않았다. 全面 三尊像에서의 本尊은 방형 對坐에 結跏趺坐하였으며 무릎 밑과 下段에 蓮花座가 있고 그 사이에는 상현좌의 樣式을 彫刻하였다. 豆腐는 부서져 없어졌으며 洞見의 가슴에는 萬자가 보인다. 수인은 오른손을 올려서 現場하고 왼손은 가슴 앞에서 船長하였다. 座·右 兩 夾侍 菩薩은 둥근 양연좌에 섰으며 上部는 裸體인데 下半身은 상의가 X字로 交叉된 天意가 있으며 연화와 注文으로 原形頭光을 갖추고 있다. 屋蓋石은 長方形 2段을 이루고 1席 造成으로서 上·하단 4面과 뒷面에도 新婦와 同一한 小型如來像代가 있어 全體 約 200位에 達한다. 이와 같이 前面에 새겨진 小佛相對는 千불信仰에 따르는 千弗의 表現으로 解釋되는 바, 席上에 造成된 千佛의 類例로서는 最高의 作品일 것이다.

金銅觀世音菩薩立像 [ 編輯 ]

金銅觀世音菩薩立像

國寶 第293號. 國立扶餘博物館. 1970年 扶餘郡 규암면 신리에서 發見되었다. 三面花冠(三面花冠)을 쓴 머리와 부드럽고 아름답게 表現된 몸통 部分과 素朴하게 表現된 연화對坐(蓮花臺座)는 完璧한 造形美를 보여주며 내려뜬 눈과 입가의 微笑는 菩薩像이 지니는 자비로움을 全身에 넘쳐흐르게 하는 백제 末期의 優秀한 佛像이다.

金銅彌勒菩薩半跏像 [ 編輯 ]

金銅彌勒菩薩半跏像

國寶 第83號. 國立扶餘博物館. 왼쪽 무릎 위에 오른쪽 다리를 걸치고 고개 숙인 얼굴의 뺨에 오른손가락을 살짝 대어 깊은 冥想에 잠긴 모습은 部處가 出家 前에 人生無常을 私有하던 모습에서 始作되었다한다. 安定된 形態와 부드럽고 優雅한 姿勢, 裸身의 上體에서 보이는 人體美, 依習儀 立體的인 表現과 微笑를 머금은 얼굴表情 等은 法悅(法悅)의 極致를 자아내는 思惟形(思惟形)의 半跏像(半跏像)으로 百濟人의 宗敎的 藝術性을 잘 表現한 우리나라 佛像彫刻을 代表하는 名品이다. 우리의 半跏思惟像은 日本의 悲調, 백봉時代에 많은 影響을 주었다.

金銅釋迦如來立像 [ 編輯 ]

金銅釋迦如來立像

寶物 第196號. 國立扶餘博物館. 1919年에 扶餘의 扶蘇山城에 있는 송월代에서 發見된 三尊佛像이다. 蓮花紋을 陰刻한 둥근 臺座 위에 一周(一鑄)의 三尊이 造成되었으나, 우협시菩薩像은 部分的으로 破損되었다. 本尊은 肉髻가 높고 商號는 길쭉한 便이다. 수인은 餘원·施無畏印(與願·施無畏印)을 결하고 있는데, 身體에 비하여 손이 무척 크다. 우협시菩薩은 合掌賞을 보이고 있다. 光背의 바탕은 火炎紋으로 채워져 있으며, 頭光(頭光) 위에는 化佛(化佛) 1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