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世界 大百科事典/東洋思想/韓國의 思想/三國時代의 思想/三國時代의 佛敎思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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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時代의 佛敎思想〔槪說〕 [ 編輯 ]

三國에 佛敎가 처음으로 導入된 것은 4世紀頃으로 中國의 南北朝 時代에 該當한다. 卽 中國 佛敎의 全盛期라고 할 수 있는 이 時代에 南北朝 各國에서 發達했던 佛敎가 或은 外交的인 接觸에서 或은 佛敎인 自身의 布敎 活動에서 우리나라에 傳來되었고, 傳來 直後인 4∼5世紀에는 大體로 宗敎儀式과 經論의 普及에 그쳤고, 6世紀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佛敎思想이 理論的으로 探究되고 우리 自身이 能動的으로 中國·印度에까지 나가 佛法을 求하고 이를 日本에까지 傳하는 活躍像을 펴게 되었다. 이 동안에 高句麗, 백제, 新羅의 校壇도 차츰 整備되고, 土着思想과의 摩擦도 차츰 克服되어 6世紀末에 이르면 三國을 통틀어 佛敎가 指導的인 思想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外來思想인 佛敎가 이러한 地位에까지 이르게 된 데는 中國의 先進 文明을 재빨리 받아들여 國家體制를 改革하고 佛敎를 일으킨 高句麗의 소수림왕(小獸林王), 百濟의 침류왕(枕流王), 新羅의 법흥왕(法興王) 等의 役割이 컸고, 特히 土着勢力의 反撥이 가장 컸던 新羅에서 殉敎로 이를 克服한 이차돈(異次頓)의 行跡은 特記할 만한 것이다. 또한 單純한 信仰으로 滿足치 않고 直接 中國·印度에까지 나아가서 佛敎思想에 接하고, 이를 直接 硏究하여 海外에서 或은 國內에서 佛敎理論을 說破한 高僧으로 승랑(僧朗)·依然(義淵), 백제의 謙益(謙益), 新羅의 惠諒(惠亮) 等은 모두 偉大한 先覺者였다. 그러나 7世紀에 들어서면서 高句麗의 佛敎는 道敎를 崇尙하는 中央 政府의 冷待를 받아 高僧 報德(普德)李 백제로 亡命하게 된 反面, 佛敎의 定着이 가장 늦었던 新羅에서 오히려 자장(慈藏),

圓光(圓光), 明朗(明朗) 等의 高僧이 排出되어 佛敎의 鎭護國家(鎭護國家) 思想을 土臺로 한 花郞道의 發達, 百高座, 八關會 等 護國 佛寺를 일으켰다. 나아가 皇龍寺 9層塔, 四天王寺의 建築 等이 이루어지는 等 民族思想의 꽃을 피웠다. 한便 國稅가 기울어지기 始作한 高句麗, 백제의 高僧들이 日本에 건너가 日本 佛敎를 일으키니 高句麗의 慧灌(惠灌)·惠慈(惠慈), 백제의 觀勒(觀勒)·圖章(道藏) 等이 그 代表者들이었다. 이와 같이 7世紀의 佛敎는 高句麗 佛敎의 衰退와 日本 全校, 백제 佛敎의 日本 全數, 新羅 佛敎의 護國 信仰化와 中國 進出 等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大體로 이러한 經過를 보여주는 三國時代의 佛敎를 理論面에서 본다면, 佛敎史 硏究에 毅然이, 三論學(三論學)의 硏究에 승랑·실法師(實法師)·人法師(印法師)·慧灌(惠灌)·惠慈(惠慈)·觀勒(觀勒) 等이 있고, 誠實學(成實學) 硏究에 圖章(道藏), 攝論學의 圓光(圓光), 千太學(天台學) 硏究에 파야(波若), 涅槃學(涅槃學) 硏究에 普德(普德)과 圓光(圓光), 戒律宗(戒律宗) 敎理 硏究에 謙益(謙益)·煮醬(慈藏), 華嚴學(華嚴學) 硏究에 現況(玄光)·延期(緣起), 密敎(密敎)의 傳授에 明朗(明朗)·密本(密本) 等이 各各 不朽의 業績을 남겨 7世紀 後半에는 우리나라의 宗派 佛敎가 輪廓을 나타나게 되었다. 이들에 依하여 開花한 佛敎思想은 곧 널리 民衆 속에 浸透되어 때로는 政治 理念化하고, 때로는 末世 救援의 悲願이 담긴 彌勒信仰(彌勒信仰)으로, 極樂往生(極樂往生)의 未妥信仰(彌陀信仰)으로 發展하여 民族信仰으로 定着하기에 이르렀다.

純度 [ 編輯 ]

順道

4世紀 人物. 高句麗 小獸林王 2年(372年)에 전진왕(前秦王) 苻堅(符堅)의 獅子를 따라 佛敎를 처음으로 傳한 度僧. 그는 佛像과 佛經을 가지고 와 高句麗 君臣의 奉迎(奉迎)을 받아 우리나라 最初의 寺院인 초문사(肖門寺 或은 省文寺)에 머물면서 佛敎를 布敎하였다고 하는데, 一說에는 東進(東晋)에서 왔다고도 한다.

阿道 [ 編輯 ]

阿道

4世紀의 中. 高句麗 小獸林王 4年(374年)에 高句麗에 入國하여 佛敎를 傳한 度僧. 國籍은 不明이나 伊不蘭寺(伊弗蘭寺)에 머물며 佛敎를 布敎하다가 5世紀 乃至 6世紀頃에 新羅에 潛入 布敎하였다는 記錄이 있으나 良人이 同名 이인(同名異人)인지는 疑問이다.

譚詩 [ 編輯 ]

曇始

400年頃 高句麗 廣開土王 5年에 東晉(東晋)에서 經律(經律) 數十部를 가지고 와서 搖動(遼東) 地方을 敎化시킨 僧侶. 本來 中國人이라 하며 移籍(異蹟)이 많고 發이 얼굴보다 희어서 白族火傷(白足和尙)이라고도 한다.

依然 [ 編輯 ]

義淵

6世紀頃 高句麗의 중으로서 高句麗의 평원왕(平原王) 때 大勝上(大丞相) 王高德(王高德)에 依하여 北齊(北齊) 業에 派遣되어 지론종(地論宗) 남도파(南道派)의 代表者인 법성(法性)을 만나 佛敎史(佛敎史)를 알아 왔다고 한다.

승랑 [ 編輯 ]

僧朗

6世紀頃 高句麗의 高僧. 一名 낭大使(朗大師), 섭山大使(攝山大師)라고 함. 高句麗 搖動 出身으로 中國 南北朝時代에 中國에 들어가서 鳩摩羅什(鳩摩羅什)의 敎義를 工夫하고 三論學(三論學)을 大成하여 中國 三論宗의 第3代祖가 되었고 兩廡制(梁武帝)로부터 優待를 받았다. 그는 用水(龍樹)의 眞俗二諦說(眞俗二諦說)을 밝혀 吉藏(吉藏)에게 傳하여 中國 三論의 元祖가 되었다.

慧灌 [ 編輯 ]

慧灌

600年頃 高句麗의 高僧. 수(隋)나라에 들어가 假想(嘉祥), 吉藏(吉藏) 等에게서 三論學을 배웠으며 624年에 日本에 건너가 겐코尤史(元興寺)에 머물면서 三論(三論)을 설(說)하니 日本 三論宗의 始祖가 되었다.

惠慈 [ 編輯 ]

慧慈

600年頃 高句麗의 중으로서 595年에 日本에 건너가 백제승 惠聰(惠聰)과 같이 성덕太子(聖德太子)의 스승이 되어 日本 佛敎를 일으키는 데 크게 貢獻하였다.

報德 [ 編輯 ]

普德

7世紀頃 高句麗 末期의 高僧. 者는 地法(智法)이요, 용강현(龍岡縣) 出身. 涅槃經(涅槃經)의 代價로서 平壤城에서 老僧에게 涅槃經 40餘卷을 講述하였고 高句麗 寶藏王과 淵蓋蘇文의 國策이 道敎(道敎) 信奉으로 바뀌자 이에 不滿을 품고 650年에 百濟 방장산으로 내려가 涅槃經을 가르쳤다고 한다. 元曉(元曉)·衣裳(義湘) 等도 그의 敎化를 받았고 高弟(高弟)로 無償(無上) 等 11人이 있어 크게 繁昌하였다고 한다.

파야 [ 編輯 ]

波若 (? ∼ 613)

高句麗의 中. 中國에 건너가서 禪法(禪法)을 求하여 稱頌을 받았다.

摩羅難陀 [ 編輯 ]

摩羅難陀

4世紀頃 백제에 佛敎를 傳한 호승(胡僧). 백제 枕流王(枕流王) 元年(384年)에 東進(東晋)으로부터 와서 閑散(漢山) 佛事에 머물며 佛敎를 처음으로 布敎하였다고 한다.

謙益 [ 編輯 ]

謙益

6世紀頃 百濟의 高僧. 백제 聖王(聖王) 4年(526)에 中(中) 印度 商街나(常伽那)에 건너가 印度말을 배우고 律賦(律部)를 깊이 硏究하여 人度僧 배달다삼장(倍達多三藏)과 같이 印度版 <아비담牆(阿毘曇藏)>과 <5部率(五部律)>을 가지고 歸國하였다. 興輪寺(興輪寺)에서 律賦 72卷을 飜譯하니 百濟 律宗의 始祖가 되었다.

觀勒 [ 編輯 ]

觀勒

600年頃 百濟의 勝. 三論學을 硏究하고 外學(外學)에도 能通하여 602年에 譯本·天文地理서·둔갑방술서(遁甲方術書)를 가지고 日本에 건너가 佛敎를 布敎하고 第2의 僧正(僧正)에 任命되었다.

圖章 [ 編輯 ]

道藏

百濟의 學僧(學僧). 7世紀頃 박학영桶(博學靈通)의 高僧으로 觀光次 日本에 건너갔다가 그 곳에 머물면서 <성실론소(成實論疏)> 16卷을 撰述하여 日本 成實宗을 성립시켰다.

墨胡子 [ 編輯 ]

墨胡子

5世紀頃 新羅에 佛敎를 처음으로 傳했다는 高僧. 國籍은 不明이고 高句麗로부터 왔다고 한다. 新羅 訥祗王(訥祗王) 때 高句麗에서 一線郡(一善郡) 모례(毛禮)의 집에 潛入하여 窟속에서 佛敎를 布敎하다가 王女의 病을 고쳐 佛敎의 移籍을 보여주고 사라졌다고 하나 阿道(阿道)와의 同一人 與否가 不明하다.

이차돈 [ 編輯 ]

異次頓 (506∼527)

新羅 法興王(法興王) 때의 殉敎人(殉敎人). 일찍이 佛敎에 歸依하여 법흥왕 側近에서 佛敎 公認(公認)을 主張하다가 調信(朝臣)들의 反對에 부딪쳐 스스로 殉敎를 통한 移籍을 보여 佛敎를 公認케 하였다고 한다.

법흥왕 [ 編輯 ]

法興王

新羅 第23代 王. 在位 514年∼540年, 이름은 원종(原宗). 佛敎의 公認 및 奬勵를 통하여 統治體制를 改革하고 國民 思想을 統一시킨 名君(名君). 同王 4年에 처음으로 兵部(兵部)를 設置하여 軍制를 改革하였고, 7年에는 律令(律令)을 頒布하였으며, 同王 14年(527年)에는 異次頓의 殉敎를 거쳐 佛敎를 國敎로 定한 以後 佛敎精神에 依한 統治를 하여 三國統一의 思想的 基盤을 마련하였다. 繼續하여 殺傷 禁令(禁令), 伽倻國 征服, 上大等(上大等) 官職 設置 等의 選定을 하다가 536年에는 우리나라 歷史上 처음으로 건원(建元)이라는 年號를 使用하였다. 한便 그는 佛敎에 投身하여 스스로 僧侶가 되어 이름을 法供(法空)이라고 고치고 興輪寺(興輪寺)에 머무니 新羅 創社(創寺)의 처음이었다고도 한다.

惠諒 [ 編輯 ]

惠亮

6世紀頃의 新羅의 中. 本來 高句麗 出身으로 新羅 大阿飡(大阿飡) 거칠부(居柒夫)와의 因緣으로 新羅에 歸化하여 僧統(僧統)李 되고, 眞興王의 命을 받아 처음으로 百高座 강蛔(百高座講會)·八關會(八關會)를 主宰하여 起源을 이루었다.

圓光 [ 編輯 ]

圓光 (542∼640)

新羅의 高僧. 姓은 朴(朴). 諸子百家(諸子百家)·4서5경(四書五經)·<춘추(春秋)>·<사기(史記)>등을 읽고 不問에 들어가 中國에 留學, 陳(陳)나라 中승민(僧旻)의 弟子. 수(隋)의 中 痰喘(曇遷)·蕙園(慧遠)·領有(靈裕) 等을 만나 涅槃經(涅槃經)·誠實論(成實論)·俱舍論(俱舍論)·攝大乘論(攝大乘論)을 배워 歸國하였다. 眞平王 때 <여래장경사기(如來藏經私記)>·<大方等如來장경소(大方等如來藏經疏)> 等을 지어 새로운 佛敎理論을 紹介하였고, 歸山(貴山)等에게 畫廊도 世俗5係(世俗五戒)를 지어준 것으로 有名하다. 그 밖에 王命을 받아 수(隋)에 보내는 걸辭表(乞師表)를 지었고 皇龍寺 百高座會에서 <仁王般若經(仁王般若經)>을 說法하였다.

卽 그는 大乘佛敎의 鎭護國家史上(鎭護國家思想)을 畫廊도 및 勤王思想과 連結시켜 國家 理念으로 正立하는데 큰 貢獻을 했다.

자장 [ 編輯 ]

慈藏

7世紀頃 新羅의 高僧. 本名은 김선종(金善宗). 善德女王 때 唐나라에 건너가 華嚴宗·戒律宗을 工夫하고 藏經(藏經) 1部와 不拘(佛具)를 가지고 歸國하여 芬皇寺(芬皇寺)·皇龍寺(皇龍寺) 및 中國에서 大乘論(大乘論)과 菩薩戒本(菩薩戒本)을 講論하였고, 大國統(大國統)이 되어 國家安保를 祈願하는 皇龍寺 9層塔의 建立을 主宰하였으며, 唐나라 年號 使用을 建議하기도 하였다.

新羅 佛敎의 鎭護國家 思想 [ 編輯 ]

新羅佛敎-鎭護國家思想

新羅의 佛敎는 6世紀頃부터 土着的인 花郞道의 傳統과 外來 佛敎, 그中에서도 特히 <仁王般若바라밀경(仁王般若波羅密經)>에 根據한 鎭護國家(鎭護國家)의 敎理를 融合하여 佛力(佛力)으로 國家를 지키고 國民 思想을 啓發시키는 求心點을 形成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新羅 佛敎의 가장 두드러진 特徵의 하나이다. 이 思想이 確立되는 過程을 簡單히 要約하면 다음과 같다. (1) 異次頓은 殉敎 直前에 自己가 죽는 것은 임금을 위한 臣下의 길이요, 自己가 죽음으로써 佛敎가 公認되면 나라가 太平하고 賃金이 便安할 것이라고 말하여 忠誠과 殉敎 精神을 連結시켰다. (2) 眞興王 때 惠諒(惠亮)李 伯固講座會(百高講座會)와 8管再會를 開設하니 國家를 위한 佛敎行事의 嚆矢가 되었다. (3) 진흥왕 33年에 戰死한 士卒을 위하여 팔관宴會를 7日間 열었다. (4) 眞興王 37年에 花郞道를 人材 登用機關으로 하였고 이들의 敎育 指針으로 圓光(圓光)李 世俗5係를 지어 주었으며 35年에 皇龍寺에서 百高座를 說하고 圓光 等이 卿을 說하였다. (5) 善德女王 14年에 慈藏(慈藏)의 建議로 皇龍寺 9層塔을 세우니 日本·中國 等 9個의 敵을 鎭壓하기 위해서였다. (6) 文武王 때 神惠法師(信惠法師)가 中央 官職에 任命되었고 明朗法司(明朗法師)의 建議에 따라 唐缾(唐兵) 防禦策으로 四天王寺(四天王寺)를 지으니 3國統一의 象徵처럼 되었다.

明朗 [ 編輯 ]

明朗

7世紀頃 新羅의 중으로 字(字)는 鞠育(國育). 선덕 女王 때 唐나라에 留學하고 돌아와 668年 당군의 內寢 消息을 듣고 낭산(狼山) 南쪽 신유림(新遊林)에 四天王寺(四天王寺)를 創建하면 물리칠 수 있다고 상주하였다. 緋緞으로 절模樣을 꾸민 다음, 풀로 5房身上(五方神像)을 만들어 세우고 요가 名勝(瑜伽明僧) 12名과 門두루祕密法(文豆婁秘密法)을 서서 颱風을 일으켜 唐나라 兵船을 沈沒시켰다고 한다. 그는 또한 이 思想의 根據인 <金光明經(金光明經)>의 뜻을 살리기 위하여 龍王이 시주한 黃金으로 自己 집자리에 절을 짓고 塔狀을 裝飾하여 金鑛社(金光寺)라 하였고, 뒤에 眞言宗(眞言宗)의 별波인 神印宗(神印宗)의 調査(祖師)가 되었다.

百高座 [ 編輯 ]

百高座

新羅 때의 國家的인 佛敎 行事의 하나. 仁王般若바라밀경에 根據하여 國土를 珍護하기 위해서는 大法會로 여기서는 백佛像(百佛像), 百菩薩上(百菩薩像) 및 4部(四部) 7中(七衆)을 모시고 仁王經을 講讀하였다고 한다. 이 行事는 眞興王 12年에 惠諒(惠亮)이 始作한 後로 新羅 末期까지 繼續되어 佛力에 依한 國家 진호를 祈願하였다.

八關會(新羅) [ 編輯 ]

八關會(新羅)

新羅·高麗 때에 있었던 佛敎儀式의 하나. <중아함경(中阿含經)> 第55卷 <지재경(持齋經)>에 나오는 八關法(八關法)에 依據한 佛敎 法會로 562年(眞興王 12年)에 팔관地法(八關之法)을 둔 것이 처음이다. 그 後 戰死한 兵士들을 위하여 外事(外寺)에서 열린 때도 있듯이 처음에는 各 社員을 中心으로 開設되었지만 高麗 때에는 國家 行事로 바뀌었다.

三國時代의 彌勒信仰 [ 編輯 ]

三國時代-彌勒信仰

佛敎의 遠視鏡前에서 由來하지만 小乘·大勝을 莫論하고 널리 普遍化된 彌勒信仰은 6世紀頃부터 이미 3國에 들어와 여러 가지 說話를 形成하였으니 大略 다음과 같다. (1) 百濟 武王(武王)李 사자사(獅子寺)에 가고자 용화산(龍華山) 밑 큰 못가에 이르렀을 때 彌勒 3존을 보고 敬禮한 다음 그 자리에 彌勒寺를 지었다. (2) 新羅 진지왕(眞智王) 때 興輪寺의 重鎭子(眞慈)가 彌勒像 앞에 나가 彌勒大聲(彌勒大聖)이 花郞(花郞)으로 化現(化現)하기를 비니 彌勒이 작은 娘子로 나타나 7年間 世上을 빛냈다. (3) 善德女王 때의 中, 生의(生義)가 途中社(道中寺)에서 꿈을 꾸고 깨어나 돌彌勒을 찾아냈다. 이 思想은 統一 以後에 더욱 發展하여 末期에는 自稱 彌勒까지 나오기에 이르렀다.

密本 [ 編輯 ]

密本

7世紀頃 新羅의 名勝. 明朗法司에 이어 密敎(密敎) 思想을 발전시켰고, 利敵으로 王과 기양도(金良圖)의 病을 고쳐주는 等 神通한 재주가 많았던 사람으로 傳한다.

現況 [ 編輯 ]

玄光

6世紀頃 百濟의 高僧. 熊州(熊州) 사람. 中國 陳(陳) 나라에 가서 혜사(慧思)로부터 法華三昧(法華三昧)를 배우고 돌아와서 熊州 옹산(翁山)에 절을 짓고 法話를 傳하니 우리나라 法華宗(法華宗)의 調査가 되었다.

新放 [ 編輯 ]

神昉

新羅의 高僧. 中國의 高僧 現場의 門下에 들어가 그의 逆境 事業을 補佐했으며 文章이 뛰어났다고 한다.

延期 [ 編輯 ]

緣起

新羅 眞興王 때의 高僧. 全南 求禮 화엄사(華嚴寺)를 創建하여 우리나라 華嚴宗의 始祖가 되었다. 뒤에 義天(義天)李 밝힌 바로는 그는 3千名의 弟子를 길러 원교宗風(円敎宗風)을 우리나라 全國에 퍼뜨렸다고 하며, 著書로 <大乘起信論鑄鋼(大乘起信論註綱)> <화엄경요결(華嚴經要訣)> 等이 있었다고 하나 모두 傳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