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世界 大百科事典/東洋思想/東洋의 思想/中國의 思想/송·明의 思想

위키文獻 ― 우리 모두의 圖書館.

송·明의 思想 [ 編輯 ]

宋·明-思想

中國 송명대 思想의 特徵은 한(漢)·6兆(六朝)·數(隋)·黨(唐) 時代의 油價(儒家)·道가(道家)·불가(佛家)의 3矯正立을 止揚 綜合함으로써 油價를 中心韓 3교합일의 思想이다. 그 特色은 이기(理氣) 心性(心性)의 硏究로서 이기는 哲學床의 本體論的 實在이며, 心性은 心理(心理) 倫理의 問題로서 理氣心性의 鶴은 千(天)과 人(人)을 一貫的으로 보려는 것이다. 그런데 前者는 特히 老將(老莊)의 世界觀을, 後者는 特히 佛敎의 禪宗(禪宗)의 心性論을 받아들여 儒敎를 深化(深化)한 것이라 하겠다. 基(氣)는 宇宙構成의 素材로서 陰陽(陰陽)의 기운 卽 힘으로서 自然科學上의 에너지이며, 이(理)는 氣의 運動이나 作用의 條理(條理)로서 哲學的으로는 原理(Principle)·形式(Form)·로고스(Logos)·이데아(Idea)·規範(Norm)·當爲(Sollen) 等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自然科學的으로는 法則(Law)의 뜻이다. 宇宙를 根源에 있어 旗 하나로 보는 것은 氣一元論(氣一元論)이요, 이와 基의 두 個로 보는 것은 理氣二元論(理氣二元論)이다. 따라서 物心(物心)의 一切現象이 氣 또는 利器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사람의 心性을 論함에 있어서도 審(心)을 氣 또는 利器로 보게 된다.

그리고 그 本體를 체(體)라 하고, 그 作用을 龍(用)이라 하여 體와 龍으로 區別하는데, 龍이란 本體와 現象으로 區別할 때의 現象과는 그 槪念이 다르다. 北送(北宋)의 代表的 哲學者로 周敦頥, 邵雍, 張載, 程顥, 程頥 等이 있고, 南宋의 代表者로 朱熹, 陸九淵 等이 있으며, 名臺에는 王守仁, 羅欽順, 劉宗周 等이 有名하다. 周敦頥(1017-1073)는 <太極圖說(太極圖說)>과 <通書(通書)>를 지었다. 그는 宇宙의 根源(體)을 '無極이 太極(無極而太極)'이라 하여 이 太極이 그 自體의 同情(動靜)에 따라 음(陰)과 孃(陽)으로 分化되며, 量이 變하고 音이 合함으로써 數·火·金·목·土(水火金木土)의 5行(五行)이 된다. 無極의 陳(眞)과 陰陽5行의 情(精)李 묘합(妙合)하여 凝聚함으로써 萬物이 化生(化生)한다.

그러니 萬物은 그 根源에 있어 1太極(一太極)이므로 一切가 各其 한 太極으로서의 自省(自性)을 가진다고 하여 角一旣成(各一其性)이라 했다. 따라서 人性(人性)은 體로서는 太極이니, 그 本來上을 性(誠)이라 하여 이것을 人劇(人極)이라 불렀다. 人劇은 寂然不動(寂然不動)으로서 純粹支線(純粹至善)인 性(誠)이나, 그것이 對象物에 接할 때 善과 惡으로 나누어진다 하여 性善說과 性惡說을 綜合했으며, 特히 酒精(主靜)과 無欲(無欲)으로써 修養을 强調하였으니 老佛(老佛)思想을 攝取한 것이다. 邵雍(邵雍, 1011-1077)은 <皇極經世書(皇極經世書)>를 지어 선천학(先天學)을 論했다. 邵雍은 太極을 一動一靜之間(一動一靜之間)이라 定義하였다. 太極의 同情(動靜)에 따라 陰陽剛柔(陰陽剛柔)로 分化되며, 陰陽은 千(天)의 4床(四象)으로서 日月星辰, 剛柔는 지(地)의 4酉(四維)로서 手話土石(水火土石)李 된다. 4賞과 4油는 天地의 本體로서 先天이며, 4賞과 4留意 교운(交運)으로써 現象世界란 後天(後天)李 生成되는 것이다. 邵雍은 한·당 以來의 5行思想을 取하지 않고, 4修(四數)로써 모든 것을 說明한다. 그리하여 선천학으로써 時間과 空間의 基準을 定하여 天地의 運行 壞滅과 人物(人物)의 所長(消長) 盛衰(盛衰) 및 歷史 地理 等을 解明하려 했다.

그리고 審(心)을 太極이라 하고, 道(道)를 또 太極이라 하여 物心一圓館(物心一元觀), 萬物一體館(萬物一體觀)의 立場에 서서 認識의 客觀主義를 主張함으로써 官物哲學(觀物哲學)을 이루고, 천(天)을 人(人)에게로 끌어내려 人間本位론(人間本位論)을 確立했다. 張載(張載, 1020-1077)는 <正夢(正蒙)> <署名(西銘)>을 지어 太虛(太虛)를 論했다. 太虛란 宇宙空間과 基(特히 本體)를 合한 槪念으로서 太極과 恰似한 것이다. 太虛의 同情 屈伸(屈身) 卽 陰陽의 會合沖和之氣(會合沖和之氣)를 泰和(太和)라 하고, 泰和를 곧 도(道)라 하여 氣一元論을 展開함에 있어서 이일분水泄(理一分殊說)로서 天地萬物一切智인(天地萬物一體之仁)의 思想에 到達하였다.

그리고 人性論에 있어 萬人同一한 天地知性(天地之性)과 만인 遊車(有差)韓 氣質之性(氣質之性)으로 나누었으며, 氣質之性을 天地至誠으로 돌이킬 것을 强調하고, 日記(一氣)의 有無婚日地上(有無渾一之常)을 宇宙의 眞相(眞相)이라 하여 佛家의 靈魂不滅說과 道敎의 신선영生說을 攻擊했다. 정호(程顥, 1032-1085)는 太極을 말하지 않고, 建元日記(乾元一氣)의 分化를 말함으로써 現象界의 差別賞을 眞相(眞狀)이라 보게 하고 性論에 있어 善惡公裁(善惡共在)를 生(生) 卽 三의 眞相이라 했다. 그는 生(生)을 性이라 이르고, 性을 기라 하여 性卽氣(性卽氣), 基卽成(氣卽性)이라 함으로써 宇宙論에 있어서도 道卽氣(道卽器), 基卽도(器卽道)를 主張하여 本體와 現象을 一切(一體)로 보았으며, 認識論에 있어 神祕的 神奧(神悟)를 말하여 존구자명(存久自明)을 主張함으로써 물래順應(物來順應)하는 無爲 自然의 境地를 이룰 것을 主張했다. 情이(1033-1107)는 兄인 程顥와 같은 系統이지만 理氣二元論을 創設한 사람이다. 그는 陰陽은 기요, 陰陽하는 까닭(所以 卽 理致)은 理라 하여, 理를 體, 氣를 用이라 한다. 理와 氣는 宇宙本體로서 形而上學的 實在요, 理의 이일분數(理一分殊)를 具體化하는 것이 氣이며, 現象 世界는 이와 基의 合成이다. 心性(心性)에 있어 이는 性으로서 체요, 基는 情으로서 用이라 하고, 將材와 같이 性을 天地지성과 氣質之性으로 나누어 보고, 천支持姓은 萬人同一로 旬宣, 氣質之性은 萬人副題(萬人不齊)로 有線惡(有善惡)이라 하여 從來의 性說에 對한 除雪을 綜合하였다. 정호·政이 兄弟의 遺書를 <2停戰서(二程全書)>라 일컫는다. 朱熹(朱憙, 1130-1200)는 理氣二元論의 완성자이다. 宋學의 集大成者로서 特히 周敦頥의 太極圖說과 정이의 理氣說을 綜合하였다. 그는 周敦頥의 太極圖說에 있어서 太極을 이(理), 陰陽을 基(氣)라 하여 이와 氣를 槪念上으로 區別 分臺(分對)시키고, 實際에 있어서는 이와 基의 不可分개(不可分開)를 말하였으나, 이선기後(理先氣後)의 傾向을 띠었다.

性情論에 있어 정이와 같이 이(理)를 性(性)으로서 체(體), 基(氣)를 情(情)으로서 龍(用)이라 하고, 性을 本然之性(本然之性 卽 天地知性)과 氣質之性으로 2扮하여 本然之性은 旬宣으로서 萬人 同一한 것, 氣質之性은 有線惡으로서 萬人遊車(萬人有差)라 하고, 氣質之性 中의 악을 線으로 돌이킬 것을 主張하여 居敬(居敬)과 窮理(窮理)를 아울러 닦을 것을 내세웠다. 朱熹는 知識論에 있어 정이와 같이 經驗論的 立場과 理性論的 立場을 아울러 强調함으로써 歸納法과 演繹法을 모두 採用했으며, 선지後行(先知後行)의 立場을 取했다. 著書로 <走者大展(朱子大全)>이 있다. 陸九淵(陸九淵, 1139-1192)은 宋學에 있어 이채로운 存在로 朱熹에 맞섰다. 朱熹는 정이의 經驗論的 分析的 系統을 이어 程朱學을 完成시켰고, 陸九淵은 정호의 直覺的(直覺的) 綜合的 系統을 이으면서 그 由來를 孟子에 두었다. 그는 朱熹의 理氣論의 實在論的 傾向에 反對하여 心卽理(心卽理)라는 唯心論的 特性을 드러냈다.

그리하여 千里(天理)·地理(地理)·隣里(人理)의 셋을 合하여 이(理)라 하고, 審(心)을 곧 理라 한다. 卽 모든 現象은 審議 現象이다. 따라서 性論에 있어서도 本然 氣質을 區別하지 아니하고, 이로서의 本心만 밝히면 良知良能(良知良能)李 本來대로 드러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朱熹의 지리한 科學的 工夫方法을 排斥하고 德性涵養(德性涵養)에만 기울어졌다. <上山全集(象山全集)> 36卷이 있다. 王守仁(王守仁, 1472-1528)은 明代의 代表的 哲學者로서 陸九淵의 學風을 이어 六王學(陸王學)을 完成시켰다. 그는 心卽理(心卽理)란 唯心論的 立場에서 審議 本體 本質을 陽地(良知)라 하고, 私慾에 가리워져 審議 本來 面目을 흐리게 한다 함으로써 致良知(致良知)를 力說하여 大學의 이른바 格物(格物)을 正心(正心)이라 主張하고 또 知行合一을 말하였다. 心卽理, 知行合一, 致良知는 王學(王學)의 3綱領이며, 致良知의 工夫로서 定座(靜坐)를 强調한 것은 中庸의 이른바 未發地中(未發之中)을 체인하려는 것이며, 이 傾向은 船價(禪家)의 選定(禪定)에서 吸收한 것이다. <傳習錄(傳習錄)>이 있다. 羅欽順(羅欽順, 1465-1547)은 정호의 系統으로서 程朱學을 이어 王守仁의 旋風的인 空理空談(空理空談)을 물리치고 이일분水泄로써 宇宙와 人性을 解明한 이기일물說(理氣一物說)의 立場을 取했다. <곤지기(困知記)>를 지었다. 劉宗周(劉宗周, 1578-1645)는 名臺 最後의 哲學者로서 周敦頥의 太極圖說을 模倣하여 <人劇圖說(人極圖說)>을 지어 未發地中의 心體(心體)를 無線이지선(無善而至善)이라 하여 朱熹의 先生 移動의 學風을 이어 新毒工夫(愼獨工夫)를 强調하였다. <柚子前서(劉子全書)> 40卷이 있다.

<裵 宗 鎬>

宋學의 發興 [ 編輯 ]

宋學-勃興

송(宋)의 學問 文化가 새로운 傾向을 가지고 일어나기 始作한 時期는 大略 眞綜調(眞宗朝)로부터 人種組(仁宗朝, 998-1063)에 걸친 時期이다. 范仲淹(范仲淹)이나 停學(正學)의 4先生으로 呼稱된 호원(胡瑗), 損福(孫復), 石芥(石介), 진양(陳襄) 等은 各其 特色있는 學風이나 主張을 가지고 서로 잇따라 나와 所謂 송학(宋學)의 船荷(先河)를 이루었다. 范仲淹(范仲淹)은 그 名節(名節)과 高邁한 識見으로 時代의 先驅者로서 啓蒙的 役割을 遂行하였다.

特히 西夏(西夏) 經營에 政治的 手腕을 보여 中央政府의 重要한 地位를 차지하였다. 學問的으로는 6景(六經)에 통하였으며 더욱이 驛(易)에 精通하였고 장횡거(張橫渠)에게 <重用(中庸)>을 주어 儒學의 門에 들어가게 한 이야기는 有名하다. 호원(胡瑗, 933-1059)은 安定 先生(安定 先生)이라고 呼稱되며 敎育家로서 많은 弟子를 養成하였는데, 정이천(程伊川)도 그 門下에서 배운 俊才(俊才)이다. 그의 <主役區의(周易口義)>는 驛(易)을 理論的으로 解明하고 한대 油價(儒家)와 같이 常修論(象數論)을 混合하지 않았다. 利川(伊川)의 逆轉(易傳)에 그 影響이 보인다. 損福(孫復, 992-1057)은 泰山先生(泰山先生)으로 呼稱되었다. 進士 試驗에 合格하지 못해 泰山(泰山)에 隱退하여 講學(講學)에 힘을 쏟았으며 <春秋존王跋尾(春秋尊王發微)>를 著述하였다. 그는 이 著述에서 從來의 註釋에 拘礙받지 않고 자유스러운 自己의 解釋을 展開하고 있지만 그中에도 다시 <春秋(春秋)>의 本紙(本旨)를 정명정分(正名定分)에 있다고 하고 또 <春秋>에 실린 事實을 全部 道義에 違背된 것뿐이라고 하였다. 損福 및 그 弟子인 石芥(石介, 1005-1045)는 春秋論을 통하여 中國(宋王朝)의 正統性과 古典思想의 正統的 復活 및 量(楊)·묵(墨)·佛(佛)·노(老) 思想의 排擊을 主張하여 宋朝 國家體制의 精神的 支柱를 樹立하려고 하였다. 다시 진양(陳襄)은 <大學(大學)> <重用(中庸)>에 依據 實踐道德論을 展開하여 <성명기(誠明記)>와 함께 宋代 道德의 궁리진性(窮理盡性)·格物致知설(格物致知說)의 方向을 잡아 놓았다. 그의 地方政治에 있어서의 勸農政策(勸農政策)이나 鄕村民(鄕村民)의 敎徒에 利用한 <高齡先生勸誘文(古靈先生勸誘文)>은 南宋(南宋)의 走者(朱子)에 이르러서 크게 採擇되어 그 模範이 되었다.

歐陽脩 [ 編輯 ]

歐陽修 (1007-1072)

中國 宋代의 文學家·思想家·歷史가. 字는 영숙(永叔), 時(諡)는 문충공(文忠公)이다.

吉州(吉州) 餘陵(廬陵)에서 出生하였다. 受注(隋州) 叔父의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寄宿하였다. 22歲에 進士가 되었고, 國子監(國子監) 및 禮部(禮部)의 試驗에도 首席으로 合格하였다. 이로부터 中央政界에서 活躍하게 되어 마침내 參知政事(參知政事)에까지 올라갔다. 그는 歷史家로서 <新5大社(新五代史)>를 咀嚼하였다. 그 特色은 春秋(春秋)의 3錢(三傳)을 믿지 않고 直接 本文의 注意(主意)를 찾아내고 門(文)을 <詐欺(史記)>에서 取하여 한 字 한 區에 이르기까지 그 使用에 깊은 意味를 갖게 했다. 송初(宋初)에 설거정(薛居正)의 甘受에 依하여 만들어진 <區5大社(舊五代史)>는 實錄(實錄)이었는데, 歐陽脩의 그것에는 그의 史觀(史觀)李 흐르고 있으며 司馬光(司馬光)의 <資治通鑑(自治通鑑)>, 走者(朱子)의 <通鑑綱目(通鑑綱目)>, 胡安國(胡安國)의 <春秋傳(春秋傳)> 等 宋代 新歷史學의 先驅的 役割을 하였다. 또 그의 著作으로 <新唐書(新唐書)>가 있다. 文學者로서는 韓愈(韓愈)의 古典 文體를 窓도(唱道)하였다. 그 門下에는 消息(蘇軾), 蘇鐵(蘇轍) 兄弟와 症南風(曾南豊), 流暢(劉敞), 鍮盤(劉産) 等의 文章家가 나와 各各 一家(一家)를 이루었다. 또 思想家로서는 歷史家적 見識과 批判精神에 依하여 直接 經典의 批判을 試圖하였고, 特히 <逆혹門(易或問)> <逆洞諮問(易童子問)>을 지었는데, 거기에서는 獨創的인 見解를 세워 宋代에 있어서 形而上學的 事由(思惟)의 先驅를 이루었다. 그것은 丁寧코 革命的인 主張으로, 그의 考古學的 著作이라고 해야 할 <집高祿(集古錄)>과 아울러서 宋代 文藝復興에 큰 힘을 주었다.

司馬光 [ 編輯 ]

司馬光 (1019-1086)

中國 宋代의 歷史가·사상가·정치가. 字는 군실(君實), 時(諡)는 문정(文正). 太史(太師) 온국공(溫國公)이란 稱號를 받았다. 蟾注(陝州) 下弦(夏縣)에서 出生하였다. 父親 私馬地(司馬池)는 天障角大祭(天章閣待制)이었다. 20歲 때에 進士試驗에 合格하여 奉禮郞(奉禮郞)에 서임되었고, 以後 영종(英宗) 때에는 天障角大祭(天章閣待制) 兼 侍講(侍講)李 되었으며, 新種兆(神宗朝)에는 翰林學士(翰林學士)가 되었다. 이즈음 下삭(河朔-黃河의 北方) 地方의 오랜 가뭄으로 繼續 作物(作物)은 말라죽고 國家 財政은 窮乏해졌다. 司馬光은 "災殃을 救濟하고 用途를 節約하는 것은 마땅히 歸覲(貴近)으로부터 始作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王安石(王安石)은 "國用(國用)이 不足한 것은 財物을 잘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主張하여 養子를 中心으로 하는 新法黨(新法黨)·舊法黨(舊法黨)의 다툼이 생겼다. 宋代 朋黨(朋黨)의 黨爭이 여기에서 始作된다. 그의 學問的 業績은 무엇보다도 <資治通鑑(資治通鑑)>으로 充分하지만, 그 厖大한 著述 속에서 注目해야 할 것은 <溫恭醫猛(溫公疑孟)>에서의 孟子 批判(孟子批判)과 <暫許(潛虛)>에서의 形而上的 事由이다. <孝經(孝經)> <驛(易)> <老子(老子)> <太玄經(太玄經)> <大學(大學)> <重用(中庸)> 等의 註解(註解)도 重要한 著作이다.

資治通鑑 [ 編輯 ]

資治通鑑(1084)

司馬光(司馬光)의 躊躇(主著). 영종(英宗)(1063∼1066) 때 歷史 關係의 冊이 厖大하여 皇帝가 두루 이것을 볼 수가 없기 때문에 司馬光에 命하여 <通知(通志)> 8卷을 만들게 함으로써 始作되었다. 2題(二帝) 19年의 歲月을 消費하여 新種 遠風(神宗 元豊) 7年 11月에 이르러 完成한 실로 294卷에 達하는 巨大한 歷史書이다. 이 冊은 週(周)의 위열왕(威烈王) 23年(前403)에서 始作하여 송(宋)의 前·5代 後周(五代後周)의 世宗 玄德(世宗 顯德) 6年(959)에 끝맺고 있다. 技術은 統社(通史)·編年史(編年史)의 滯在를 取하고, 歐陽脩(歐陽修)의 <新五代史(新五代史)>와 같이 春秋(春秋)에서 그 規範을 模倣하고 있다. 司馬光(司馬光)이 이 冊을 製作한 意圖는 全國(戰國)時代에서 5代(五代)까지 1362年의 政治的 變遷을 더듬어 그 治亂興亡(治亂興亡)을 整頓함으로써 大義名分을 밝혀 帝王(帝王)의 癡情의 거울로 삼는 데 있었다. 따라서 거기에는 그 自身의 歷史觀이 大義名分에 集約的으로 貫徹되어 있다. "神(臣)의 精力이 이 西(書)에 다하였도다"라고 그가 尙州(上奏)韓 바 있는 19年間의 搜査事業(修史事業)에는 各 王朝(王朝)의 情事(正史) 外에 雜史(雜史) 322種이 使用되고, 副産物로서 <資治通鑑고이(資治通鑑考異)> <痛感目錄(通鑑目錄)> <痛感釋例(通鑑釋例)> <界高祿(稽古錄)> 等의 著述이 생겼다. <資治通鑑(資治通鑑)> 및 이런 類의 著書가 宋代에 미친 影響은 크며 痛感 製作에 關하여 汎遭遇(范祖禹)(1041∼1098)의 <당감(唐鑑)>은 正統論(正統論)의 基礎가 되어 胡安國(胡安國)의<춘추전(春秋傳)>, 走者(朱子)의 <資治通鑑綱目(資治通鑑綱目)> 等이 나오게 되었다.

王安石 [ 編輯 ]

王安石 (1021-1086)

中國 宋代의 政治가·사상가. 字는 個洑(介甫), 時(諡)는 문공(文公), 胎田(太傳)이란 稱號를 받았다. 茂朱(撫州) 林泉(臨川)에서 出生하였다. 20歲를 갓 넘은 靑年 天子 新種(神宗)은 밖으로는 요(遼)와 西夏(西夏)의 武力的 壓迫을 받아서 屈辱的 條約을 맺고, 안으로는 獨裁 君主國家의 必然的인 結果로서 惹起된 政治的 紊亂(紊亂)으로 인해 國政改革에 着手해야만 그 때에 눈이 띈 사람이 王安石(王安石)이다. 王安石은 南京 支部(南京知府)로부터 拔擢되어 서울로 들어와 翰林學士(翰林學士)가 되었고, 얼마 後 部材商人 參知政事(參知政事)에 任命되었다. 그는 有名한 神法(新法)을 斷行하여 龜手(均輸)·청묘(靑苗)·市域(市易)·保甲(保甲)·寶馬(保馬)·謀逆(慕役) 等의 제 政策을 내놓았다. 이것은 머지않아 失敗로 끝났지만, 그 새로운 政策들의 依據한 바는 <主禮(周禮)>의 精神이었던 것이다. 그의 著書 中에 主禮(周禮)(周官)에 신해석을 한 <주관신의(周官新義)>가 그것이다. <時頃(詩經)>, <서경신의(書經新義)>와 아울러 <3更新의(三經新義)>로 일러지고 있으나 서(書)·시신의(詩新義)는 아들인 房 및 文人이 쓴 것이다.

邵雍 [ 編輯 ]

邵雍 (1011-1077)

中國 宋代의 特色있는 思想家. 字는 요부(堯夫), 市(諡)는 강절(康節). 범양(范陽) 出身이다. 邵雍의 집은 代代로 恩德(隱德)을 本志로 삼아 벼슬하지 않았다. 그도 몇 番인가는 召命을 받았지만 끝내 官道(官途)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의 著書에는 <관물편(觀物篇)> <漁礁問答(漁樵問答)> <이천격양집(伊川擊壤集)> <先遷都(先天圖)> <皇極經世(皇極經世)> 等이 있다. 學界(學系)를 보면 眞朴(陳搏) ― 충방 ― 木手(穆脩) ― 이지재(李之才) ― 邵雍(邵雍)으로 되어 있다. 學祖(學祖)인 眞朴(陳搏)李 송初의 道가(道家)였기 때문에 그의 學問은 道家思想(道家思想)의 影響을 받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관물편(觀物篇)>을 爲始하여 그 著書를 細密히 보면 道家的 論理보다도 오히려 <驛(易)>의 論理에 基礎를 둔 特色있는 先天心學(先天心學)이라고 하겠다. 그에 依하면 現象界(現象界)의 構造는 結局 陰陽(陰陽)의 大隊(對待)요, 그와 같이 되어 있는 窮極의 自己 原因(自己原因)은 1期(一氣)이며, 天地의 '中(中)'이며 1棟1梃(一動一靜)의 '肝(間)'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肝(間)이나 中(中)은 바로 사람의 마음의 作用 그것이기 때문에 天地인(天地人) 3者가 이 世界構造의 全體를 나타내는 相應體系(相應體系)이다. 現象에 相卽(相卽)하는 現象 그 自體의 自己 原因이나 나(我)속에 있다. 나의 마음의 作用 그 自體는 卽 世界 救助의 窮極的인 唯一 者(者)인 이 世界를 存在하게 하는 作用이라는 것이다.

道學 [ 編輯 ]

道學

中國 宋代의 學問은 春秋學(春秋學)을 中心으로 하여 正統論(正統論)·名分論(名分論)·政治論(政治論)을 이끌어 내었고 다시 從來의 訓詁적 柱石學(註釋學)을 脫却하여 直接 古典을 批判的으로 解釋하고 展開하는 方向을 取하였다. 이의 影響을 받아서 나타난 것이 形而上學的인 理論의 展開와 그것을 바탕으로 한 道德論의 構成이다. 더욱이 그것은 道學이라고 呼稱되는 바와 같이 옛 聖人의 儒敎(遺敎)를 現實인 宋代에 直接 살려서 새로운 解釋과 思索을 함께 融合시킨다고 하는 正統的 儒學의 發展으로서 自覺하고 있었다. 道學이라 함은 都統(道通)의 學(學)이라는 뜻이다. 요(堯)-순(舜)-우(禹)-탕(湯)-문왕(文王)-무왕(武王)-주공(周公)-공자(孔子)-증자(曾子)·안자(顔子)-자사(子思)-맹자(孟子)-주자(周子)-장자(張子)·정자(程子)-주자(朱子)라고 하는 一連의 學界(學界)를 意識的으로 構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또 駐(周)·裝(張)·政(程)·週(朱)의 學(學), 程朱學(程朱學)·朱子學(朱子學)·理學(理學)·이기학(理氣學)·性理學(性理學)·聲明(性命)의 學(學) 等으로 呼稱됨으로써 宋隊의 代表的 學者·思想家를 包括하고 있었다. 그 思想 傾向의 대요(大要)는 다음과 같다. (1) 現存(現存)하는 世界(世界)의 構造를 잘 觀察하여 그의 能力 作用=存在形式을 窮究하면 人事 一般(一般)도 또한 이 世界 卽 天地(天地)의 自然(自然)이므로 그와 같이 있는 存在形式을 떠나서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天地自然의 生成, 變化, 消滅의 形式은 바로 人事一般(人事一般)의 그것이다. (2) 天地自然(天地自然)의 運行-生成變化(生成變化)에는 무엇인가 根本이 되는 作用이나 까닭(原因)이 있는 것이 아닐까? 이 까닭이라는 것이 天地自然(天地自然)으로 하여금 저절로 그와 같이 있게 하는 것은 아닌가? 그 原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느 곳에 있는가?

―― 이러한 問題에서 出發하여 다시 ―― (3) 이 天地(天地)의 저절로 그렇게 되는 原因(原因)으로서의 作用은, 實은 사람에 있어서는 사람이 사람인 原因의 作用인 셈이다. 왜냐하면 天地自然은 本來 斜視(四時)를 軸(軸)으로 삼아 한 없이 循環하고, 各各 相互의 調和(調和)를 保全하여 조금도 精製(整齊)하지 않은 곳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도 또한 天地의 사이에 있는 存在이기 때문에 天地自然이 그와 같이 있는 存在形式은 사람이 사람으로 있지 않으면 안 될 形態(姿)를 보이고(示)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現在 있는 사람은 例外없이 天地自然(天地自然)이 저절로 그처럼 調和(調和)를 維持하고 있는 것과 같은 狀態로는 되지 않는다. 不調和(不調和)나 惡(惡)도 現存(現存)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天地自然(天地自然)의 그와 같은 存在形式을 본받아 또 마땅히 할 狀態로 있지 않으면 안 된다. (4) 그러면 사람은 天地의 사이에 處하여 어떻게 存在하는 것이 사람으로서 完全한 形態(姿)일까? 사람의 사람된 所以(所以)는 무엇일까? 이런 것들의 共通된 問題意識은, 事實은 도리어 現實에 處해서 人事(人事)의 處理(處理)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具體的인 데서부터 出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것을 解決할 論理的 根據를 區(求)하기 위하여 天地自然 卽 現象一般의 生成, 變化, 消滅의 存在形式을 究明하여 人事(人事)의 處理도 이것을 規範으로 해서 合理的으로 이것을 解決하려 하였다. 結局 어떻게 하여 나를 닦고 남을 다스릴까 하는 道德論(道德論)과 이 世界의 構造는 어떤가 하는 宇宙論(宇宙論)과 表裏의 關係이며 一切(一體)이다. 그들은 이러한 問題를 解決하기 위하여 빠짐없이 古典思想(<驛(易)> <重用(中庸)> <大學(大學)> <論語(論語)> <孟子(孟子)> 等으로 特히 <驛(易)>이 그 中心)에서 그 根據를 區(求)한 것이다.

周敦頥 [ 編輯 ]

(1017-1073)

中國 宋代의 思想家. 字는 無宿(茂叔), 號는 염계(濂溪), 時(諡)는 元功(元公)이다. 逃走 影島(道州 營道-現在의 허난省에 屬함) 사람. 本名은 敦實(敦實)이라고 하였으나 그 때의 皇帝 영종(英宗)과 東明이었으므로 고쳐서 돈이라고 하였다. 父親인 寶城(輔成)은 荷主(賀州) 戒令縣(桂嶺縣)(現在의 黃西省에 屬함)의 知事(知事)를 하고 있었다. 母親은 鄭氏(鄭氏)이다. 염계는 少年 時節에 아버지를 잃었으므로, 母親의 一家인 用度角(龍圖閣) 대학사(大學士) 丁香(鄭向)의 집에서 養育되었다. 境遇(景祐) 3年(仁宗朝, 1036)에 그는 젊은 나이로 紅酒(洪州) 分녕縣(分寧縣)의 主婦(主簿)가 되었으며, 이어서 南岸(南安)에 司法官(司法官)으로 赴任하였다. 그 後 主로 各 縣(顯)의 知事를 歷任하여 指南强軍(知南康軍)을 最後로 57歲에 他界했다. 그가 南岸(南安)에 있을 때에 丁香(程珦)이라는 사람이 같은 官吏로서 赴任했다. 定向은 염계의 人品과 學問에 敬意를 품고 親하게 交際함과 同時에 自己의 두 아들을 염계에게 나아가 배우게 하였다. 그것이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의 두 兄弟였다. 宋代의 形而上的 事由는 朱子(周子)에 依하여 열려졌다고도 한다. 그 以前에 싹이 엿보였다고 해도 저 有名한 염계의 <太極圖說(太極圖說)>이나 <通書(通書)>에 보이는 깊은 思索은 後의 2亭子(二程子), 장횡거(張橫渠)로 繼續하는 宋代 道學(道學)의 端緖였다. <주자전서(周子全書)> 7卷은 純全히 염계의 著述을 모은 것이다.

太極圖說 [ 編輯 ]

太極圖說

周敦頥(濂溪)의 著書. <太極圖說(太極圖說)>은 태극도와 圖面을 說明한 <太極圖說(太極圖說)>로 되어 있다. 태극도는 아래의 그림과 같다. 이 圖面에 붙여진 그의 說明(圖說)에 依하여 그 思想을 살펴 보겠다. 첫째 '無極(無極)이면서 太極(太極)'이라 한다. 이 말은 世界의 窮極的인 것, 말하자면 比較相對(比較相對)를 超越한 唯一의 眞實在(眞實在)라는 것이다. 極(極)은 行하여 다한 곳(盡), 一到에 달(達)韓 곳이기 때문에 無極(無極)은 行하여 다하고도 오히려 達하지 않는 것을 意味한다. 또 '太極(太極)'이란 "譯(易)에 太極(太極)이 있으니 이것이 羊의(兩儀)를 生(生)한다"라고 한 것과 같이 現象(現象)의 窮極(窮極)·存在(存在)의 倍후에있는 原因(原因)이다. 이렇기 때문에 '無極(無極)이면서 太極(太極)'이라는 語句는 다같이 存在(存在)를 支撐하고 있는 原因이 積極(積極)·笑劇(消極) 두 樣相의 形容 곧 表現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原因(原因)-窮極者(窮極者)가 움직임으로써 積極的으로 움직이면 量(陽)을 낳고, 이 양동(陽動)李 窮極(窮極)하면 情이 된다. 정이 되면 그것은 陰(陰)이다. 그러나 이 音程(陰靜)도 그대로의 狀態로 있는 것은 아니고 最後까지 가서는 다시 積極的인 양동(陽動)으로 變한다. 이와 같이 1棟(一動) 1梃(一靜)으로 相互間에 根據(根)가 되고 基本이 되어 膠着하고 있다. 同情(動靜)이 있다고 하는 것은 量(陽)과 陰(陰)으로 分離되는 일로서 結局 이 世界를 支撐하고 있는 窮極(窮極)의 것이 自然히 作用하고 分化하여 서로 陰이 되고 量이 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音程양동(陰靜陽動)은 물(物)·사(事)가 現象(現象)으로서 生成, 變化, 消滅하고 있는 이 世界의 基本的인 形態를 나타낸다. 그와 함께 音程양동(陰靜陽動)으로서의 물(物)과 사(事)는 無極(無極)-太極(太極)이라고 하는 窮極者로부터 分離하여 그것의 바깥으로 떨어져 나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桐(動)-政(靜) 或은 음(陰)∼양(陽)이라고 하여도 그것은 窮極者(窮極者)로서의 無極(無極)∼太極(太極)과 相卽(相卽)하여 그 속에서 그것과 分離되는 일이 없이 생기(生起)하고 있다고 하는 論理的 關係를 나타내고 있다. 이와 같이 陰(陰)과 孃(陽)李 서로 交代하고 變化하여 5行(五行)이 생긴다. 5行(五行:土·水·火·木·金)은 陰陽이 물과 討議 具體的 存在의 가장 基本的인 2期(一氣가 나누어져 陽氣·陰氣로 된다)를 나타낸 것에 對하여 말하자면 現象(現象)하는 個個의 物件 乃至는 現象 自體의 構成 要素로 생각된다. 이 5行이 여러 가지의 樣相으로 서로 組合되어서 件도(乾道) 卽 陽氣(陽氣)인 積極(積極)은 男性的인 것을 生成하고 곤도 卽 陰氣(陰氣)인 笑劇은 女性的인 것을 生成한다. 이와 같이 하여 萬物이 生成하는 中에서 사람은 陰陽5行(陰陽五行)의 組合이 가장 優秀한 것이다. 더욱이 사람이 理想(理想)으로 하는 成人(聖人)은 中情人의(中正仁義)의 德을 닦아서 사람에게 있어야 할 道德的 規範(人極)을 세워서 天地의 作用, 日月(日月)의 運行(運行), 4時(四時)의 循環 및 鬼神까지도 各其 그것의 作用에 呼應하여 調和를 補塡한다고 말하고 있다. <太極圖說(太極圖說)>은 宋代의 道學에 있어서 形而上的 思惟와 道德論의 基本的 方向을 提示하였다. 그 後의 學者는 거의 이 冊을 읽고 여러 가지의 解釋이나 思索을 하고 있다. 走者(朱子)와 陸象山(陸象山)의 論爭도 無極(無極)이면서 太極(太極)을 어떻게 解釋하는가 하는 點에 兩者의 思想을 集約하여 이루어졌다.

通書 [ 編輯 ]

通書

周敦頥(濂溪)의 著書. 朱子의 說에 依하면 <通書>는 本來 <逆桶(易通)>이라고 呼稱되어 <太極圖說(太極圖說)>과 竝行하여 쓰여졌다고 한다. 全體는 2卷 40章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各腸은 比較的 짧은 文章으로 記述되고 있다. <太極圖說>이 周敦頥의 宇宙論을 論述하고 있다면 <通書>는 道德論을 說明하고 있다고 하여도 좋다. 道德論으로서의 <通書> 1篇을 一貫하고 있는 것은 性(誠)이다. 그는 '性'을 現象(現象) 世界의 모든 變化 交替에 潛在하는 참된 機能이라고 하는 同時에 그것을 人間에 있어서의 道德의 根本 規範으로 看做하였다. 性(誠)은 帝德(諸德) 또는 모든 사람의 行爲의 根本이다. 사람이 性(誠)을 完全하게 體得할 때 곧 窮極的으로 사람의 行爲가 性(誠) 그것일 때 所謂 5床(五常)의 德目(仁·義·禮·智·信)도 完成된다. 行爲에 있어서의 善惡(善惡)은 <太極圖說>에도 "5星(五性)李 感動하여 善惡이 나누어지고 萬事가 나온다"고 한 것처럼 5性이 感應하여 움직여서 이제 막 行爲를 발(發)하려고 할 때에 基(幾)가 나누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德을 닦고자 하는 者는 반드시 洞(動)을 謹愼(愼)하지 않으면 안 된다. 桐(動)을 삼갈 때는 善惡으로 나누어지는 行爲(行爲)의 基(幾)를 삼가(愼)도록 하여 이것을 반드시 線(善)으로 向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基(幾)에 삼가고 桐(動)에 삼간다는 것은 周敦頥의 말로 하면 酒酊(主靜)이다. 酒酊(主靜)이란 無欲(無欲)하기 때문에 鄭(靜)을 保全(保全)할 수 있는 그 無欲(無欲)의 情(靜)을 週日(主一)로 하는 일이다. <通書>는 亦是 朱子에 依해 註解됨으로써 宋代 理學(理學)의 遵據해야 할 古典이 되었다.

張載 [ 編輯 ]

張載 (1020-1077)

中國 宋代의 思想家. 字는 自後(子厚)이다. 棒狀迷眩의 횡거眞(橫渠鎭) 出身이었기 때문에 횡거 先生(橫渠先生)이라고 呼稱된다. 어렸을 때에 縣의 知事職(知事職)으로 있던 父親을 잃었다. 젊었을 때 范仲淹(范仲淹)을 會見하고 兵士(兵事)를 말하였다. 그때 范仲淹은 "柚子(儒者)에게는 自然히 名敎(名敎)를 즐길 만한 것이 있다. 어찌하여 兵談(兵談) 같은 것을 좋아하는가"라고 하면서 <重用(中庸)>을 그에게 주었다. 횡거는 거기서 비로소 道(道)를 求할 것을 決心하고 한때 佛敎·노장思想(老莊思想)에 들어갔으나 오래지 않아 6景(六經)의 學問으로 돌아왔다. 進士試驗에 合格한 後에 地方官으로서 여러 가지 功績을 쌓았다. 그 때의 皇帝(皇帝)인 新種(神宗)은 그를 크게 登用하려고 하였으나 執政(執政=內閣의 最高 責任者) 王安石(王安石)과 意見이 맞지 않아서 身柄을 理由로 鄕里에 돌아와 學問과 敎育에 힘을 다하였다. 그에 依하여 세워진 基(氣)의 宇宙論(宇宙論) 또는 基(氣)의 哲學은 當時의 제家들의 思想과 比較하여 매우 特色있는 것이었다. 그 徹底한 '劉(有)의 理論(理論)'은 얼른 보기에 周敦頥, 邵雍(邵雍), 2亭子(二程子)의 思想이 <驛(易)>의 精神을 基礎로 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듯하다. 그러나 亦是 그 立論(立論)의 根底에는 <驛(易)>의 '1音(一陰) 1陽(一陽), 이것을 도(道)라고 한다'를 中心으로 하는 思考方式이 있다. 있는 것은 氣(氣) 뿐이어서 現象의 個體는 氣(氣)가 凝聚(凝聚)韓 客감(客感)·客型(客形)이다. 基(氣)의 本來의 模樣(姿=個體를 形成하지 않은 氣)은 泰和(太和) 또는 太虛(太虛)라는 것인데, 이것은 사람에게 感覺되지 않는 것(幽), 卽 基(氣)의 指定(至靜)韓 狀態라고 한다. 그의 著述은 <長子戰서(張子全書)>에 收錄되어 있는데 同名(東銘)·署名(西銘)·正夢(正蒙)·經學理屈(經學理窟)·逆說(易說)·文集(文集)·語錄(語錄) 等이 이 속에 들어 있다.

正夢 [ 編輯 ]

正蒙

장횡거(張橫渠)의 著作이다. <正夢(正蒙)>은 그가 鄕里로 내려간 後의 咀嚼이니 卽 그의 晩年인 50歲 以後의 것으로 推定된다. 本署(本書)는 <長子戰서(張子全書)>에 收錄되어 있다. 前(全) 9卷이며 閣圈은 2篇으로 되어 있다. 全體를 통하여 가장 重要한 便은 1卷에서 4卷 程度까지인데, 그 中에서도 <泰和便(太和篇)>·<聲明便(誠明篇)>은 그의 思想의 核心이다. 一般的으로 長子(張子)의 宇宙論(宇宙論=形而上學的 思惟)李 基1原論(氣一元論)이라고 命名되고 있는 것은 老子(老子)의 '유(有)는 무(無)에서 生(生)한다'라고 하는 말을 正面으로 反對하고 있는 것이다. 有(有)가 무(無)에서 生(生)하지 않는다고 하면 有(有)는 有(有)에서 生(生)하는 것인데, 長子(張子)는 이와 같은 생각으로 徹底한 有(有)의 宇宙論(宇宙論)을 展開하였다. 그에 依하면 現象 世界의 모든 個體는, 사람까지도 陰陽2期(陰陽二氣)의 同情(動靜)·承康(昇降)·浮沈(浮沈) 等에 依한 運動의 結果로 해서 生成된 것이다. 그 陰陽2期(陰陽二氣)도 實際는 氣(氣)=1期(一氣)이므로 이 氣(氣)가 客감(客感)·客型(客形)을 取한다고 하는 것이 現象의 成立이며, 이 世界의 萬變漫畫(萬變萬化)가 生(生)하는 까닭인 것이다. 이에 反對하여 氣(氣)가 흩어지면 無形無感이어서 사람에게 感覺되지 않게 된다. 이런 氣(氣)의 無形無感(無形無感)의 狀態가 基(氣)의 神이요, 또 그것을 太虛(太虛) 또는 泰和(太和)라고 한다. 따라서 太虛·泰和는, 氣(氣)가 現象으로서의 客감·客型을 取하면서 變化하기 以前 根本의 穩全한 鄭(靜)의 狀態이므로 이 世界의 모든 것의 原因이다. 이러한 思考方式의 問題, 卽 道德論에 電話되면 '허(虛)와 基(氣)가 合하여 性(性) 名(名)이 있다'고 한 것같이 太虛(太虛)·泰和는 또 사람 本來의 姿態의 性(性)李 된다. 性은 사람에게 一般的인 것이요, 具體的으로는 知性(至誠)이다. 그래서 性(誠)을 얻는다 ― 知性(至誠)에 이른다 ― 는 것이 性(性)을 얻는 것이며 性(性)을 다하는 것이 된다. <正夢(正蒙)>은 走者(朱子)가 重要視한 것이며, 또 明末 淸楚(明末淸初)의 王船山(王船山)李 <長子정몽주(張子正蒙註)>까지 지은 中國의 思想思想(思想史上) 異色的인 著書이다.

署名 [ 編輯 ]

西銘

張載(張載)의 咀嚼. <正夢(正蒙)>과 같이 그의 晩年(晩年)의 著作일 것이다. <署名>은 <同名(東銘)>과 함께 대단히 짧은 文章이지만, 特히 <署名>의 思想的 內容은 深奧하여 2亭子(二程子)에게 賞讚(賞讚)되었다. <署名>의 前文은 겨우 253字(東銘은 112字)에 지나지 않지만 담겨진 主題는 要컨대 天地萬物과 '나'의 存在와의 一切에서 얻어지는 '人(仁)'이다. 건(乾)은 나의 富(父)이며 곤(坤)은 나의 某(母)이다. '나'는 天地의 者(子)로서 天地의 中間에 萬物과 함께 있다. 그런 까닭으로 나의 體(體)는 但只 나의 形體(形體)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사람·山川·草木·禁輸·昆蟲에 이르기까지 무릇 天地의 사이에 存在하는 것은 全部 나의 體(體)이다. 나의 性(性)도 또한 萬物의 性이다. 天地는 나와 그리고 萬物(萬物)도 生成(生成)하기 때문에 나와 한가지로 天地 사이에 있는 것은 모두 나의 同胞다. 天地가 萬物을 養育하는 것은 天地의 인덕(人德)이요, 天地의 이 運行을 본받고 天地의 存在形式에 服從하면 天地의 人德을 나의 마음의 德으로 삼을 수가 있다. 天地의 作用은 '火(化)한다'고 하는 것이며, 天地 運行의 뜻(志)은 헤아려 알 수가 없다. 그런 까닭으로 '火(化)'를 알고 新(神)을 窮通(窮通)하면 天地의 運用과 그 向하는 바 뜻을 밝혀 이것을 繼承할 수가 있다. 이렇게 해야 비로소 天地의 마음을 나의 마음으로 삼고 天地의 性(性)을 나의 姓으로 삼을 수가 있어 天地의 인덕(人德)과 나의 人德이 하나가 된다.

走者(朱子)의 <署名해(西銘解)>가 있다. 그에 依하면 '程子(程子) 學派는 大體로 署名(西銘)으로 學者에게 開始(開示)하였다'고 할 만큼 2亭子(二程子)에게 준 影響이 컸다.

정호 [ 編輯 ]

程顥 (1032-1085)

中國 宋代 道學의 代表的인 學者의 한 사람이다. 字는 백순(伯淳), 시호(諡號)는 巡功(純公). 名도 先生(明道先生)으로 呼稱되었다. 代代로 中産(中山)에 居住하였으나 後에 河南(河南)에 移住하였다. 父親 香(珦)은 地方官이었을 當時 周敦頥를 알아 名도(明道), 利川(伊川) 兄弟를 그에게 배우게 하였다고 한다. 進士에 及第한 後 地方官으로 活躍하였다. 喜令(熙寧) 初(1070景)에 餘共著(呂公著)의 推薦으로 中央政府에 들어 갔다. 王安石(王安石)의 新法(新法)이 擧論되자 意見을 달리하여 職을 떠나 地方官으로 지냈다. 그 性格은 온후관대하여 동생인 利川(伊川)李 理論的이며 峻嚴(峻嚴)한 것과 對照的이었다. 明渡史上(明道思想)의 特色은 鱗屑(仁說)·性論(性論)인데 그 基礎가 되는 것은 逆賊 論理(易的論理)의 展開로서의 形而上的 事由이다. 그에 依하며 現象의 世界는 結局 陰陽2期(陰陽二氣)의 大隊(對待)에 依해 生成消滅하는 것으로 그것은 <自然的으로 그런 것>이다. 그것은 바로 驛(易)에 "1音 1陽(一陰一陽), 이를 道(道)라고 한다"고 하는 道(道)이며, 天地萬物의 이(理)나 도(道)는 사람에 있어 默識心통(默識心通-사람의 마음에 개우쳐지는 것)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의 鱗屑(仁說)은 이 論理를 基底로 하여 天地自然의 이(理)와 사람의 이(理-一般的인 性)와의 一體觀에서 論述된다. <식인편(識仁篇)>에서 "人(仁)은 渾然히 물(物)과 胴體요 儀禮支神(義禮智信) 모두 人(仁)이다. 이 이(理)를 알아서 聖經(誠敬)으로써 이것을 保存(存)할 뿐이다"라고 말하였다. 人(仁)은 '저절로 그러한' 天地萬物의 이(理)·道(道)인 同時에 사람의 마음의 이(理)라는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人(仁)을 體得하면 이미 나는 天地萬物과 一切요 일新人 것이다. 이와 같은 思考方式이 發展하여 性(性)은 곧 氣(氣)요, 基(氣)는 곧 省(性)으로서 생겨나면서 지닌 그대로 性(性)이라고 하는 論理가 展開된다. 그의 <眞治法 10社(陳治法 十事)>은 反新法黨(反新法黨)의 處地에서 當時의 政治社會 狀態를 잘 洞察하여 그 弊端을 찌른 銳利한 政治 論文이다. 名도(明道)의 思想은 南宋의 陸象山(陸象山)을 거쳐서 名의 王陽明(王陽明)의 思想으로 繼承·展開된다. 語錄(語錄)·著述은 <2停戰서(二程全書)>에 收錄되어 있다.

2停戰서 [ 編輯 ]

二程全書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 兄弟의 思想的 論述·文章 等을 收錄한 것. 內容은 2精油서(二程遺書)·이천문집(伊川文集)·정자외전(程子外傳)·이천경설(伊川經說)·이천역전(伊川易傳) 等으로 이루어져 있다. 2亭子(二程子)는 宋代 道學의 代表的 人物이어서 周敦頥, 邵雍(邵雍), 장횡거(張橫渠) 等의 思想家가 各各 異色的인 思想의 所有者였음에 비하여 至極히 正統的으로 傳統的 留學을 繼承하여 論理的으로 展開하고 있으나, 量子의 精密한 思想 內容上 뉘앙스를 달리하며, 學問的인 關心과 方向(方向)에 있어서 크게 다른 點이 있다. 그러나 類似한 點도 있어 <2停戰서(二程全書)>속에는 名도(明道)의 말인지 利川(伊川)의 말인지 判別되지 않는 것도 많이 보인다. <戰서(全書)> 속에서 思想面으로 特히 重要한 名도(明道)의 것은 <식인편(識仁篇)> <정성서(定性書)> 外에 <名도어록(明道語錄)>이며, 利川(伊川)의 것에는 <利川語錄(伊川語錄)> <利川어(伊川語)> <이천경설(伊川經說)> <利川逆轉(伊川易傳)>이 있다.

情이 [ 編輯 ]

(1033∼1107)

中國 宋代 道學(道學)의 代表的인 學者의 한 사람. 字는 정숙(正叔).

兄인 名도(明道)보다도 1年 늦게 河南(河南) (現在의 河南省에 屬함)에서 出生하여 利川先生(伊川先生)으로 呼稱되었다. 송학(宋學)의 先驅者 好安定(胡安定)을 통하여 大學(大學)에서 배우고, 서經國子監(西京國子監)의 敎授에 서임되었으나 辭退하였고, 後에 숭前傳說서(崇政殿說書)에 拔擢되었다. 이때 많은 文士들은 政府部內에 있는 蘇東坡(蘇東坡)를 따르면서 利川(伊川)의 學問은 迂遠(迂遠)하다 하여 排除했다. 여기에서 所謂 樂觸(洛蜀)의 黨爭(黨爭)이 생겨 利川(伊川)은 逐出되었다. 徽宗皇帝(徽宗皇帝)(1100∼1125) 때가 되어서야 겨우 復官(復官)되어 警査(京師)에 돌아왔다. 利川의 學問에서 가장 重要한 것은 逆賊 論理(易的論理)의 展開로서의 形而上的人 事由이다. 卽 利川은 <驛(易)>의 "1音(一陰) 1陽(一陽), 이것을 도(道)라고 한다"에 道(道)라는 것은 '陰陽(陰陽)으로 되는 所以人 것' 卽 陰陽(陰陽)李 開合(開合)하는 沼이라고 한다. '所以(所以)'라고 하는 것은 '까닭'이며 '理由'이며 '原因'이다. 따라서 1音(一陰) 1陽(一陽)과 도(道)는 理論的으로 相異한 것이다. 現象이 1音(一陰)하고 1陽(一陽)하여 生成·變化·消滅(生成變化消滅)하는 그 原因·理由가 道(道)이다. 더욱이 陰陽(陰陽)과 도는 어제 陰陽이 있고 오늘 道가 있다고 하는 論理가 아니고, 도는 陰陽에 卽(卽)하고 陰陽은 道에 處하여 있다고 하는 形而上下(形而上下)의 關係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이 思考方式은 1信(一身)의 마음(心)은 곧 天地(天地)의 마음(心)이고, 1물(一物)의 이(理)가 곧 萬物(萬物)의 이(理)라고 하는 얼핏 보면 名도(明道)의 論理와 같은 兄(型)으로 展開되는 것 같다. 그러나 名도(明道)가 '性卽氣(性卽氣), 基卽成(氣卽性)'이라 한 데 反하여 그는 性卽理(性卽理)라고 하면서 性卽氣(性卽氣)의 說은 取하지 않았다. 또 二千은 實踐을 重視하면서 居敬窮理(居敬窮理:마음을 純一하게 하여 오로지 自己의 本來 城에 順應하는 것에서 事物의 理致를 窮究한다), 格物致知(格物致知:事事物物에 卽하여 그 理를 窮究하여 知를 明確히 한다)를 說破하였다. 利川의 思想은 南宋의 走者(朱子)에게 받아들여져서 展開되었다.

利川逆轉 [ 編輯 ]

伊川易傳

정이천(程伊川)의 咀嚼. 序文에 原簿(元符) 2年 正月이라고 記錄되어 있어서 1099年에 完成된 것이라고 斟酌된다. 그러나 弟子인 楊口山(楊龜山)(1053∼1135)에 依하면, 이것은 未完成인 채로 文人에게 보인 것이며 얼마後 散佚된 것을 구산(龜山)李 蒐集하여 咬合(校合)하였다고 한다. 이 著書는 驛(易)의 上京·하경·斷電(彖傳)·上典(象傳) 및 文言便(文言篇)을 解釋하였을 뿐이며, 繫辭(繫辭)·說卦(說卦)·잡卦(雜卦)의 祭典(諸傳)에는 州(註)가 없다. 이렇게 된 것은 王弼(王弼-魏晋時代의 思想家, 226-249)의 譯註(易註)를 模倣했기 때문이라는 說도 있으나, 量九山의 말과 같이 未完成 作品이라는 것이 妥當하다고 <4古典서 銃목體요(四庫全書總目提要)> (淸朝의 乾隆年間 四庫全書館에 收藏된 厖大한 中國 歷代의 書籍의 內容 解說書)는 記述하고 있다. 어떻든 王弼(王弼)의 譯註를 採用한 利川이 驛(易)을 論理的으로 解釋한 것은 當然한 것이다. 그에 依하면 驛(易)의 道理는 至極히 微妙하고 驛(易)李 나타내는 上(象)도 至極히 분명하나, 體用(體用)은 一圓(一源)하며 玄美(顯微)는 無肝(無間)한 것이라 한다. 體用一圓(體用一源), 顯微無間(顯微無間)이라는 것은 무릇 存在하는 것(現象·易象)과 그것의 存在의 方式(道·易理)과는 分離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物件이 있으면 거기에 物件의 理致가 있다고 하는 것과 같이, 兩者가 相卽(相卽)하여 있음을 보이는 意味깊은 말이다. 走者(朱子)의 <譯本의(易本義)>가 그 自身이 말한 바와 같이 매우 不滿足했던 것에 비해서

<利川逆轉(伊川易傳)>은 週(註)가 缺如된 部分도 있으나 宋代(宋代) 易學의 正統을 確保하고 있다.

朱熹 [ 編輯 ]

朱憙 (1130-1200)

中國 宋代의 最大의 思想家로서 송학(宋學)의 集大成者. 者는 원희(元晦), 또는 중회(仲晦)라고도 한다. 또한 紫陽(紫陽), 회암(晦庵), 회옹(晦翁), 固定(考亭) 等으로 呼稱하였다. 諡號는 문공(文公)이다. 先祖 代代로 휘酒(徽州) 無援(-現在의 江西省에 屬함)에 居住하고 있었으나, 父親 主誦(朱松)李 管理였기 때문에 그의 林地인 南검주(南劍州) 우계현(尤溪縣)에서 出生하였다. 紹興(紹興) 18年(1148)에 19歲로 進士에 合格하였다. <송원이거 3록(宋元利擧三錄)> 中의 <紹興 18年(紹興一八年) 同年小祿(同年小錄)>에 依하면, 그는 眞사 第5匣(第五甲) 第90人(第九○人) 卽 第5匣(第五甲) 의 142人(人) 中 90番이라는 成績으로 合格하였다고 한다.

朱子學 [ 編輯 ]

朱子學

그의 著作은 매우 많다. 그 中에서 重要한 것은 <譯本醫啓蒙(易本義啓蒙)> <詩集展(詩集傳)> <大學(大學)·中庸장구(中庸章句) 및 혹門(或問)> <太極圖說海(太極圖說解)> <署名해(西銘解)> <桶西海(通書解)> <焦思執奏後어변증(楚辭集註後語辨證)> <資治通鑑綱目(資治通鑑綱目)> <朱子家禮(朱子家禮)> <近思錄(近思錄)> <하남정字遺書(河南程子遺書)>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 <儀禮經傳通解(儀禮 傳通解)> 以外에 <走者文集(朱子文集)> 100卷, <續集(續集)> 10卷, <魚類(語類)> 80卷 等이 있다. 이러한 著作에서 보듯이 朱子(朱子)의 學問은 北送(北宋)에서 일어난 新傾向의 學術을 全面的으로 받아들여 이것을 折衝하고 또 體系的으로 集大成한 것이다. 또 4서(<大學>·<中庸>·<論語>·<孟子>)를 特別히 重要視 하여 註釋을 하였고, <大學>의

<誠意(誠意)>醬의 註解는 죽기 3日 前까지 繼續해서 修正했다. 理氣論(理氣論)에서는 정이천(程伊川)의 2原論(二元論)을 繼承하여 다시 더욱 詳細·嚴密하게 體系化하였다. 形而上的(形而上的), 形而下的(形而下的) 論理 區別을 분명하게 하였다.

또 周敦頥의 太極論(太極論)도 받아서 太極(太極)은 오직 1個의 이(理)의 者(字)라고 規定하여, 이(理)=太極(太極)=道(道:形而上的)와 基(氣)=陰陽5行(陰陽五行:形而下的)인 것은 兄以下(形而下)의 陰陽2期(陰陽二氣)의 校監에 依해 生成되는 個體(個體)와 相卽不利(相卽不離)인 것이라고 말하였다. 道德論(道德論)에서 二千二 名(命)·性(性)·李(理)·心(心)을 同一하게 보았기 때문에 <性卽理(性卽理)> <心卽理(心卽理)>라고 한 데 對하여, 走者(朱子)는 <性卽理(性卽理)>만을 取하고 審(心)은 形而下的(形而下的)인 것, 卽 陰陽2期(陰陽二氣)의 作用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사람의 性(性)은 이(理)이고 地選(至善)韓 것이며 사람의 本然의 것이라고 하였다. 審(心)은 이(理)가 있는 곳, 이가 作用하는 場所이다. 또한 審(心)의 發動은 이(理)에 依하여 있게 되는데, 그 이야말로 사람에게 本來의 性(性)이라고 規定하였다. 그러나 사람의 本然의 性(性)李 地選(至善)하지만 現實에는 惡도 存在하고 惡人도 있다. 그것은 氣品(사람도 氣의 集合에 依하여 이루어져 있다. 그 氣가 모이는 方法, 氣를 받는 方式은 個別的인 것이라고 朱子는 생각하였다)에 過不及(過拂不及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理)=太極(太極)이라고 하는 形而上的人 것은 恒常 事事物物(事事物物) 속에 있다. 事事物物이 없으면 다라서 이(理)는 없다. 卽 1물(一物)에 1里(一理)=1太極(一太極)이 있는 것이다. 論理的 過程을 말하면 이(理)가 있어야 물(物)이 있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물(物)이 없는 이(理)는 없다. 이런 까닭으로 이기(理氣)에 先後는 없다고 한다. 또 朱子에 依하면 1물(一物)에 1太極(一太極)이 있는데, 이 이(理)는 卽 萬物의 이(理)이다. 달이 湖水나 냇물에 비쳐도 달은 元來 하나의 것이다. 一般者(一般者)·兄異常者(形而上者)는 恒常 個體(個體)에 內在하여 個體(個體)를 통하여 一般者(一般者)는 實現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論理가 道德論에 適用되면 사람은 自己의 本然(本然)의 性(性)(理)을 回復하는 것이 人間으로서의 德을 完成하는 것이며, 個別的 人間은 實踐에 依하여서만 一般者(一般者)로서의 도(道)∼이(理)-성(性)을 具現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朱子의 修養論(修養論)은 于先 格物致知(格物致知)이며 궁리진性(窮理盡性)인 것이다. 朱子에 依하면 事事物物의 이를 窮究한다고 하는 것은 結果的으로는 나를 窮究하는 것이며 나를 다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물(物)의 이(理)와 審(心)의 이(理)와 審(心)의 이(理)와의 統一的인 把握에는 아직 不充分한 點이 있었다. 陸象山(陸象山)이나 名(明)의 王陽明(王陽明)은 그 正鵠을 찔러 批判한 思想家였다. 그러나 朱子思想(朱子思想)李 宋代 以後 끼친 影響은 至極히 크다. 朱子學은 朱子의 生前에 있어 脂肪觀的, 在野的(在野的) 立場에서의 思想을 構築했음에도 不拘하고 원(元)·明(明)을 거쳐 (淸朝에 이르기까지 官學的(官學的)인 아카데미즘의 主流를 形成하였다. 뿐만 아니라 朱子學은 우리나라나 日本(日本)에도 重大한 影響을 끼쳤다. 오늘날 朱子의 思想이 封建社會에 있어서 支配階級의 上下的 身分의 確立을 志向하는 論理라고 하는 것이 容易하게 指摘되고 있지만, 그 學識·論理 構成·學問的 態度는 依然히 中國史上 乃至 東洋思想의 解明에 있어 重要한 地位를 占據하고 있음은 否定할 수 없다.

近思錄 [ 編輯 ]

近思錄 (1175景)

朱熹(朱憙)와 그 學問的 親交가 깊었던 女東來(呂東萊) 두 사람의 合作(合作)이다. 이 西(書)는 北宋 時代 道學(道學)의 代表的 思想家인 周敦頥, 장횡거(張橫渠), 정명도(程明道) 및 정이천(程伊川)의 著述(著述)·語錄(語錄)을 拔萃하여 編輯한 것이다. 成立의 事情을 알기 위하여 朱子의 後序(後序)를 보면 初學者(初學者)의 入門書로서 지어진 것이라 한다. 그러므로 走者도 이 冊을 읽어 얻은 바를 基本으로 하여 다음은 4字(四子)의 全集(全集)을 읽을 것이며 苟且하고 煩多하다고 努力을 避하고 簡便한 맛에 便乘하여 이것만으로써 滿足하다고 여기는 일이 있으면, 本署 編輯의 意圖에 半(反)한다고 말하고 있다. 構成은 導體(道體)·僞學(爲學)·致知(致知)·存養(存養)·克己(克己)·가도(家道)·출처(出處)·치체(治體)·치법(治法)·정사(政事) · 敎學(敎學) · 警戒(警戒)·變異團(辨異端)·관성현(觀聖賢)의 14流(十四類)로 나누어져 있다. 이것에 依支하여 學問의 道(道)에 들어간 사람은 中國 뿐 아니라 우리나라와 日本의 學者에도 많으며 따라서 主席서도 이 3國에 많다. 그리고 또 女東來(呂東萊)의 後序(後序)에 依하면 <近思錄(近思錄)>은 이미 되어 있었다고 하면서 朱子가 實際의 編者요 女東來(呂東萊)는 이에 參與한 것같이 쓰고 있다.

사서집주 [ 編輯 ]

四書集註

朱熹(朱憙)의 咀嚼. 사서(四書)라 함은 <大學(大學)> <重用(中庸)> <論語(論語)> <孟子(孟子)>를 이른다. <大學(大學)>과 <重用(中庸)>은 本來 <禮記(禮記)> 中의 2篇이었다. 그것이 獨立된 것은 北宋의 司馬光(司馬光)李 <대학광의(大學廣義)>를 著述하는 한便, 當時(仁宗 때) 科擧의 合格者에 給與한 것으로부터 始作하였다. 다시 정이천(程伊川)은 以上의 넷을 사서(四書)로서 取하여 重要視했고 北宋의 思想家 中에서 이 冊을 醉하여 批判이나 解釋을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4書를 特히 學問의 基本的 方向이나 內容을 提示하는 것이라고 한다든가, 옛 成人(聖人)의 儒敎(遺敎)가 담겨져 있는 것이라고 하여, 相互 關聯性을 갖게 하여 註釋을 한 것은 走者였다. 北送 以來의 思想家는 走者를 包含하여 決코 4서만이 傳統的 儒敎思想의 繼承에 專擔 役割을 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은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時代는 벌써 難解한 古典(古典)을 一部 特權的 學者가 俗世를 벗어난 書齋에서 造作(操作)할 때가 아니었다. 宋代에 開放된 文化의 一連의 서민화 傾向은 讀書人의 廣範한 擴張을 가져 왔고, 또한 敎育의 普及도 이루어져서 4서(四書)의 重要性을 志向했던 것이다. <論語> <孟子>에 對해서는 제가(諸家)의 週(註)를 炊事(取捨)하면서 註解를 붙였고, <大學> <重用>은 特히 장구(章句)로 나누어서 註釋을 붙였다. 그 全體的 傾向은 말할 것도 없이 그가 到達한 學問에 바탕을 둔 理論的 解釋이어서 淸朝의 考證學者(考證學者)에 依한 事實 認定(事實認定)의 誤謬의 指摘도 이러한 곳으로부터 오고 있다. <사서집주(四書集註)>는 송 以後의 中國人·韓國人·日本人에게 가장 많이 읽혀진 古典에 屬한다.

走者文集 [ 編輯 ]

朱子文集

朱熹(朱憙)가 쓴 文章(文章)을 輯錄(集錄)韓 100卷의 서(書). 여기에 收錄된 朱子의 글은 實로 多種多樣하다. 特히 그의 上奏文(上奏文)·赦免門(辭免文)·氣(記)·공이(公移) 等等은 朱子의 具體的인 政治活動이나 政治思想을 아는 데 至極히 重要한 資料이다. 또 書簡文(書簡文)·雜著(雜著)·氣(記) 等은 朱子의 學問思想을 아는 데 있어 <魚類(語類)>와 함께 必讀해야 할 部分이다. 其他 이 文集(文集) 100卷은 別集(別集)·續集(續集)을 合하여 朱子의 思想이나 歷史的 性格을 全體的으로 規定하는 點에서 必要 不可缺한 資料이나, 從來 走者를 論하는 사람 가운데서 文集을 仔細히 읽은 사람은 거의 없다. 走者 硏究에 있어서 새로운 설이나 解釋을 提供할 수 있는 資料的 報告(寶庫)라 해도 無妨하다.

朱子語類 [ 編輯 ]

朱子語類

朱熹(朱憙)와 그 文人(門人)들의 學問上의 問答을 記錄한 冊(書). 只今 여기서 이르는 <朱子語類(朱子語類)> 140卷은 여정덕(黎靖德)李 編纂한 것으로서, 그 序文에는 南宋 咸淳(咸淳) 6年(1270)의 再編年次(再編年次)가 記錄되어 있다. 朱子의 死後 70年이 지나서 된 것이다. 이 <魚類(語類)>가 刊行(刊行)되기 前에는 3록(三錄) 2流(二類)라고 하는 語錄적 形態(語錄的 形態)와 魚類적 形態(語類的 形態)의 두 系統의 刊本(刊本)이 있었다. 여정덕(黎靖德)의 것은 魚類적 立場에서 從來의 第刊本(諸刊本)을 再編한 것이다. <語錄(語錄)>의 便은 文人(門人)李 走者로부터 들은 學問上의 回答을 個人的으로 記錄했던 것을 收錄한 것이고, 魚類(語類)는 弼綠瓷별의 <語錄>을 解體하여 遊牧別(類目別)로 思想內容에 따라 分類 再編成한 것이다. 朱子의 語錄(語錄) 및 魚類(語類)의 種類는 모두 14種이나 여정덕의 <朱子語類>로 再編된 刊本이 가장 內容이 豐富하다. 內容面으로 가장 重要한 部分은 亦是 이기(理氣)·귀신(鬼神)·성리(性理)·성정론(性情論)으로서 朱子의 形而上的 事由를 알 수 있다. 그러나 <朱子語類>는 朱子의 文人들이 個人的으로 記錄한 것을 蒐集한 것이기 때문에 走者가 直接 執筆한 著書나 <주자문집(朱子文集)>에 比較하여 資料的인 價値는 第2의적인 것이다. 著書나 文集을 合하여 읽음으로써 그 資料的 價値는 높아질 것이다.

六王學·陽明學 [ 編輯 ]

陸王學·陽明學

六王學(陸王學)이란 宋代(南宋)의 思想家 陸象山(陸象山)과 明代의 王陽明(王陽明)의 學問을 合하여 呼稱한 것이다. 또 陽明學(陽明學)은 勿論 王陽明(王陽明)의 學問思想의 總稱이다. 六王學(陸王學) 乃至 陽明學(陽明學)의 思想的 系譜를 찾아보면 當然히 宋代 思想(宋學)에 미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陸象山의 思想은 北宋의 정명도(程明道)를 繼承하고 있으며, 王陽明은 정명도를 繼承한 陸象山의 思想 系譜(思想系譜)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정명도를 繼承한 陸象山의 鶴은 대단히 肝銘(簡明)하고 主로 實踐 體得(實踐體得)을 重視하고 自我(自我)의 主體性을 强調한 點에 特色이 있다. 이 때문에 南宋(南宋)의 思想界는 週(朱)·育(陸) 2者(二子)에 依해서 兩分되어 이것이 名臺(明代)에까지 痕跡을 남기게 되었다. 주자는 이(理)의 形而上的 性格과 基(氣)의 形而下的 性格을 분명하게 理論的으로 區別하여 所謂 이기(理氣) 2原論的인 方向을 取하였다. 따라서 特히 周敦頥의 <太極圖說(太極圖說)>을 둘러싸고 朱子와 陸象山은 激烈한 論爭을 展開하였다. 走者는 事事物物(事事物物)의 이(理)를 窮究하여 天下萬物의 一理(一理)를 얻는다고 하였다. 그에 反하여 上山(象山)은 宇宙를 있게 하는 것은 이 1里(一理)뿐이라고 하고, 다시 學者가 배우는 것은 이 1里를 밝히는 것으로서, 名도(明道)가 "天地와 感通(感通)하면 나는 天地와 一體가 된다"고 말한 것이 이 이(理)를 얻는 것이라고 하여 明度에 同調하였다. 그것은 상산의 "宇宙의 모든 現象은 實은 나의 마음의 思想(事象)이요, 나의 마음의 일은 실은 宇宙의 일이다. 이 이(理)와 이 마음과는 한가지 것으로 歸結된다"는 理論으로 展開되는 心卽理說(心卽理說)에 基本하고 있다. 다시 王陽明은 上山을 이어 一體觀적(一體觀的) 世界觀에서 走者의 格物致知說(格物致知說)을 批判하고, 心卽理(心卽理)설, 知行合一(知行合一)설, 陽地(良知)說을 展開하여 名臺 思想의 最高峯을 形成하였다. 六王學(陸王學)의 特色이 實踐的인 道(道) ― 이(理)의 體得을 主張하여 主體의 道德的 自覺에 依한 受贈一致를 論하는 點에 있었기 때문에, 그 思想을 主管唯心論的(主觀唯心論的)이라고 하는 見解도 있다.

陸九淵 [ 編輯 ]

陸九淵 (1139-1192)

中國 南宋의 思想家. 字는 子正(子靜), 號는 상산(象山), 時(諡)는 文案(文安). 茂朱(撫州) 金鷄縣(金谿縣-現在의 江西省에 屬한다) 사람으로 兄인 舊蘇(九韶-字는 子美), 救靈(九齡-字는 子壽, 復齋先生)과 함께 學問으로서 이름을 남겼다. 件도(乾道) 8年(1172) 進士試驗에 合格한 後 地方官으로 從事하면서 自制敎育에 從事했다. 그의 思想의 特色은 心卽理(心卽理)이다. 그에게 있어서의 이 이(理)는 '天地가 千지어야 할 것'으로서 그 立論(立論)의 基礎는 宋代(宋代)의 다른 思想家와 다른 바가 없다. 그런데 이(理)는 어디에 있는가, 어떻게 把握하느냐 하는 點에 있어서는 北送(北宋) 以來 個個의 思想家에 따라서 論理의 立證이 달랐다. 그것은 主로 그와 같은 存在의 窮極者(窮極者=存在를 存在로 하는 것)와 <나>人 主體와의 關係에 있어서 傾向을 달리했던 것이다. 陸象山은 이에 對해서 "마음(心)은 1審(一心)이며, 이(理)는 1里(一理)이다. 이 審(心)은 이 이(理)여서, 둘로 나누어져 있는 일은 없다"라고 말하고 宇宙 안의 일은 自身의 分內(分內)의 일이며, 自身의 分內(分內)의 일은 宇宙안의 일이라고 했다. 다시 사람의 審(心)은 至極히 영(靈)=뛰어났다는 것) 하고 이(理)는 至極히 分明하다. 사람은 모두 이 審(心)을 가졌고, 심은 모두 이 이(理)를 지니고 있다고 했다. 이 走者의 格物致知론(格物致知論)에 있어서 主張한 "1물(一物)에 1里(一理)가 있고, 事事物物(事事物物)의 이를 밝힘으로써 萬物의 一理를 얻는다"라는 論理와는 다르다. 上山에 있어서의 이(理)는 事物에 內在하는 것이 아니고, 그와 같은 存在의 이(理)는 그것을 그것이라고 調整(措定)하는 바 나의 마음 속에 있다. 이것이 可能한 것은 나의 마음이 이(理) 그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卽 存在를 存在하게 하는 것, 卽 이(理)는 내 마음의 이(理)라고 하여 <心卽理(心卽理)>를 說破한 것이다. 따라서 이 1審(一心)李 萬物의 이(理)이기 때문에 나의 마음에는 여하한 物件도 附加할 必要가 없고 마음을 가리고 있는 惡弊만을 除去하면 된다. 讀書講學(讀書講學)이라든지 四色 等도 도리어 有害하다고 한다. 그의 有名한 <6景(六經)은 나의 周角(註脚)에 不過하다>라고 하는 말은 이러한 思考 方式에서 나온 것이다. <太極圖說(太極圖說)>을 둘러싼 走者와의 論爭의 核心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走者가 陰陽2期(陰陽二氣)와 도(道)를 形而上下(形而上下)로 나누고, <無極(無極)이면서 太極(太極)>人 것을 도(道), 卽 이(理)라고 한 데 對하여, 상산은 無極(無極)은 老子의 말이니 驛(易)의 太極이라는 말로 足하다 하겠다. 卽 驛(易)에서 <1音(一陰) 1陽(一陽), 이를 道(道)라고 한다>고 하였듯이 그는 圖說(圖說)의 僞作론(僞作論)을 더하여 더욱 激烈한 論爭으로 朱子에 對抗하였다. 상산의 思想은 明代의 진백社(陳白沙)를 거쳐 王陽明(王陽明)에게 影響을 주고 있다.

육상산전집 [ 編輯 ]

陸象山全集 陸九淵(陸九淵)의 語錄(語錄)·文章(文章)을 蒐集한 것이다. 內容은 問題(門弟)·學友(學友)들에게 준 書簡文이 36卷 中 17卷에 이르러 상산의 思想을 解明하는 重要한 資料로 되고 있다. 思想 關係에서는 議長현학기(宜章顯學記)·武陵현학기(武陵顯學記) 等과 같이 地方의 學校가 設置되었을 때 붙였던 文章(文章)(記), 學術論文을 모은 雜著(雜著) 및 講義가 있고, 또 政治論文으로서 朱標(奏表)·冊文(策問) 等을 輯錄(集錄)하고 있다. 끝으로 2卷은 語錄(語錄)으로서 文人들의 필록(筆錄)을 收錄하고 있다. 기타 書證(序贈)·市(詩)·祭文(祭文)·墓誌銘(墓誌銘)·行長(行狀)·正門(程文)·拾遺(拾遺) 等의 卷(卷)이 있고, 正門(程文)(一定한 形式으로 쓰는 試驗論文)이나 拾遺(拾遺)에는 思想關係의 文章이 많다. 이 <陸象山 全集(陸象山全集)>에는 明代의 王陽明(王陽明)의 序文序文)(正德 16, 1521年)이 있어 興味를 끈다. 王陽明은 聖人의 學(學)을 心學(心學)이라고 規定하여 요순右(堯舜禹)는 서로 이어서 "人心은 위태롭고 都心(道心)은 美(微)하다. 오직 鄭(精)하고 오직 일(一)함으로써 眞實로 그 中(中)을 잡는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心學의 源流(源流)라고 한다. 다시 "孔孟(孔孟)의 學(學)李 一貫하여 鼓子(告子)의 意外(義外)의 설(說)을 破棄한 것은 곧 人(仁)李 사람의 마음에서 求해야 할 것이지 밖에서 求해지는 것이 아님을 明白히 한 것이다. 그런데도 後世의 柚子는 審(心)과 이(理)를 둘로 나누어 물(物)이 이(理)를 밖에서 求해 나의 마음이 곧 물의 이(理)인 것을 알지 못한다. 宋의 走者(周子), 2亭子(二程子)는 孔孟(孔孟)의 本紙(本旨)를 잇고 陸象山이 이것을 承繼하였다. 그의 學問思想을 주자(朱子)와 比較하여 線(禪)이라고 하나, 선(禪)은 人倫(人倫)을 버리고 물의 이(理)를 忘却하여 天下國家에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禪)과 上山(象山)의 學(學)은 같지 않다"고 하고 있다. 여기 王陽明에 이르는 思想系譜가 그 自身에 依하여 분명하게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外에 <全集(全集)>에서 注目할 만한 內容에는 朱子(朱子)와의 <太極圖說(太極圖說)>을 둘러싼 論爭中 交換한 書簡, <驪州元會(與朱元晦)> 數 篇과, 朱子의 要請에 依하여 行한 <白鹿洞書院講義(白鹿洞書院講義)>가 있다.

진헌장 [ 編輯 ]

陳獻章 (1428-1500)

中國 明代의 思潮(思潮)의 先驅的 役割을 遂行한 思想家. 字는 公報(公甫), 時(諡)는 문공(文恭)이다.

燼灰(新會)의 백사리(白沙里) 사람이므로 白蛇先生(白沙先生)으로 呼稱되었다. 신장(身長)은 8隻, 눈빛은 별과 같았고, 禹檢(右瞼)에 일곱 個의 黑點이 있어 북두(北斗)와 같았다고 한다. 正統(正統) 12年(1447) 廣東(廣東)의 향시(鄕試)에 合格, 翌年 中央政府에서 行한 會試(會試)에 合格했다. 國子監(國子監)에 入學하여 다시 進士試驗을 準備 中이었으나, 오강재(吳康齋, 1391-1469)에게 受學한 後 過去에 對한 意欲을 버렸다. 그의 學問은 正坐(靜坐)를 主로 하는 것이었다. 聖賢의 儒敎(遺敎)를 求하여 寢食을 잊은 채 冊을 읽었지만 道理를 얻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것은 곧 마음과 이(理)가 하나로 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定座(靜坐)에 依하여 물(物)李 이(理)를 체인(體認)하는 것만이 學問(學問)이라고 하였다. 明末(明末) 淸楚(淸初)의 學者인 黃宗羲(黃宗羲)는 "明代(明代)의 學問은 百社(白沙)에 이르러서 비로소 정미(精微)韓 데 들어갔다. 그 가장 重要한 工夫는 咸陽(涵養)에 있다.……왕양명(王陽明)에 이르러 커졌다. 襄先生(兩先生)의 學問이 가장 가깝다고 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王守仁 [ 編輯 ]

王守仁 (1472-1528)

中國 明代의 思潮를 代表하는 思想家·政治가·군인(軍人). 字는 백안(伯安)이며 詩(諡)는 문성(文成). 양명(陽明)이라 號(號)하였으므로 一般的으로 王陽明(王陽明), 양명先生(陽明先生)이라고 한다.

汝窯(餘姚-現在의 浙江省에 屬함)의 사람으로 父親은 禍(華)라고 한다. 聖火(成化) 17年(1481) 眞사(進士) 第1人(第一人)에 及第하였고, 管(官)은 南京(南京) 吏部尙書(吏部尙書)에 이르렀다. 그는 出生 以來로 腺病質(腺病質)이어서 靑年期에 벌써 肺病으로 피를 吐한 일도 있다. 昏迷와 煩悶의 原因은 이 病(病)과 朱子學(朱子學)에서 說明되는 格物致知설(格物致知說)李 아무리 하여도 納得되지 않는 點에 그 原因이 있었다. 朱子의 이(理)는 事事物物(事事物物)에 卽하여 窮究해야 할 것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때는 뜰의 대나무를 잘라 代의 理致를 把握하려고 한 나머지 病이 나기도 하였고, 또 어느 때는 走者의 讀書法을 읽음으로써 그대로 成俔(聖賢)의 儒敎(遺敎)를 읽었으나 道理를 얻지 못하여 神經衰弱에 빠지기도 하였다. 自身은 到底히 成人(聖人)이 될 만한 그릇이 못된다는 諦念이 <오익(五溺)>(任俠·騎射·辭章·神仙·佛敎의 傳習)에 빠지게 하였다고 한다. 35歲 때에 中央政府에 批判的인 政治論文을 常住하여 宦官(宦官) 幼根(劉瑾)의 노여움을 삼으로써 鬼誅(貴州) 勇將(龍場-現在의 貴州에 屬함)에 流配되었다. 山岳部族(山岳部族) 속에서 孤獨한 生活을 보내고 있던 失意(失意)의 양명(陽明)은 여기서 本來의 깨달음을 얻었다. "聖人(聖人)의 道(道)는 나의 性(性)에 具備되고 있다. 지난番에 이(理)를 事物에서 求한 것은 誤謬였다"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이(理)가 事物에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나의 마음에 있다. <心卽理(心卽理)>의 설이 여기서 確立되어 마침내 양명史上(陽明思想)의 根幹이 되었다.

<心卽理(心卽理)>라고 하는 것은 善惡을 包含한 마음이 이(理)라는 뜻이 아니고, 마음의 發動이 恒常 이(理)의 境地를 뜻하는 實踐的인 槪念인 것이다. 走者(朱子)가 이(理)와 審(心)을 나누어 前者를 形而上的, 後者를 形而下의 陰陽이라고 한 말과는 크게 다르다. 나의 마음이 發動이 恒常 이(理)라고 하는 것은 孝(孝)를 아는 것과 孝를 行하는 것이 나누어져 둘인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은 지(知)와 行(行)李 合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 走者의 格物致知(格物致知)에 對하여 陽明이 치地格物(致知格物)을 말한 것도 '陽地(良知)를 치(致)한다-치양지(致良知)'라고 한 것도, 要는 마음의 本體로서의 陽地 그것으로 되는 境地를 말한 것이다. 양명의 思想은 行爲하는 主體가 恒常 이(理)의 體現者日 것을 要請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의 死後, 그의 思想은 여러 方向으로 展開되어 實踐하는 主體를 疏忽히 하는 觀念的·空想的인 理論으로 흘렀는가 하면, 着實한 勉學修養(勉學修養)을 輕視하는 風潮까지 빚어냈다. 그러나 明代의 思潮는 양명史上(陽明思想)의 展開(右派와 左派로 나누어진다)에서 個性이 發揮된 것도 歷史的 事實임에 틀림없다. 韓國에서도 朝鮮(朝鮮)의 中期(中期) 以後의 思潮에 큰 影響을 주었다.

傳習錄 [ 編輯 ]

傳習錄

王陽明(王陽明)의 第學說과 敎界(敎戒)·書簡 等을 그 弟子들이 編輯한 것이다. 前習(傳習)이라고 한 말은 <論語(論語)> 鶴이(學而) 第1(第一)의 <前(傳)韓 바를 익혔(習)는가>에서 나온 것이다. 卽 이 名稱은 양명(陽明)에게서 傳受(傳授)된 學問을 自身이 잘 體得 習熟하고 있는지 어떤지를 스스로 反省하는 意味로 붙인 것이다. <傳習錄>은 普通 <왕문성空轉서(王文成公全書)> 38卷 中의 처음 3卷에 收錄되어 있으나, <傳習錄>만을 刊本(刊本)으로 하고 있는 것도 있다. 양명思想(陽明思想)을 把握하는 데는 <왕문성空轉서> 全體를 熟知해야겠지만 <傳習錄>을 精誠껏 읽으면 그의 思想은 大體로 理解된다.

王學 右派 [ 編輯 ]

王學右派

中國 明代의 思想家인 王陽明(王陽明)의 學問의 流派中의 하나이다. 正統派(正統派)로 看做되었다. 양명(陽明)의 <心卽理(心卽理)>는 善惡을 包含한 마음이 이(理)가 아니고 마음이 發動할 때 이미 그 마음은 이(理)라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마음의 惡弊(惡弊), 卽 私慾(私欲)을 克服하여서 마음을 陽地(良知) 그것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流派는 양명의 <4口訣(四句訣)>에서 線(善)도 없고 惡(惡)도 없는 것은 審(心)의 체(體)라 한 것을 審(心 )의 本體는 地選舞樂(至善無惡)이라고 하여 傳統的인 性善說(性善說)과 妥協하고, 審(心)의 問題를 中心으로 하는 양명心學(陽明心學)으로부터 떠나서 漸次로 朱子學的(朱子學的) 이(理)를 問題로 하여 實際的·現實的 硏究를 重視하는 立場을 取하게 되었다. 양명의 文人 전서산(錢緖山-德洪, 1496-1574)李 王龍界(王龍溪-1498-1583)와 <4口訣(四句訣)>을 둘러싸고 對立하여 分派한 以後, 右派에는 秋收益(鄒守益-東廊, 1491-1562), 羅洪先(羅洪先-念庵, 1504-1564), 劉宗周(劉宗周-1578-1645) 等이 있었다.

王學 左派 [ 編輯 ]

王學左派

中國 明代의 思想家 王陽明(王陽明) 學問의 流派의 하나이다. 이 派의 王龍界(王龍溪)는 線(善)도 없고 惡(惡)도 없는 것은 審(心)의 체(體)요, 線(善)도 있고 惡(惡)도 있는 것은 의(意)의 움직임이며, 선(善)을 지(知)하고 惡(惡)을 지(知)하는 것은 陽地(良知)요, 선(善)을 하고 惡(惡)을 버리는 것은 格物(格物)이라 한다는 王陽明의 <4口訣(四句訣)>에 對하여, 이것은 一般 死因(士人)에게 說明하기 위하여 設置한 方便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는 心卽理(心卽理)·致良知(致良知)의 實踐的 主體의 立場, 卽 實踐을 主로 하는 道(道)·李(理)에의 誤入(悟入) 乃至는 그것의 體得이라고 하는 立場에서 보면 의(意)·지(知)·물(物)에 善惡의 對立이 있을리 없다는 것이다. 眞正한 學問은 悟得(悟得)만을 尊貴하게 여긴다고 하였다. 이러한 思考方式에서 王龍界는 마음이 本來 無線舞樂(無善無惡)하면 그때 發하는 行爲는 陽地(良知) 그것이며, 따라서 羊脂는 배우지 않고 思慮하지 않아도 사람이 本來 完全하게 具備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思考方式은 이 派(派)의 이탁오(李卓吾)에게 傳해지면서 한 걸음 나아가 積極的인 人慾(人欲)의 肯定으로 發展하였다. 이 派의 特色은 有(儒)·佛(佛)·道(道) 3校의 渾融, 線學的(禪學的)傾向, 小農(小農)·圖章(陶匠)·나무꾼·炎程 等의 낮은 身分의 사람들을 包含하는 庶民敎育에의 實踐, 傳統의 否定이나 反體制的(反體制的)·神祕的인 點 等에 있었다. 이 파는 特色있는 思潮를 形成하면서도 새로운 時代를 形成하는 具體的인 思想 內容을 갖지 못하고 公論的·神祕的 傾向만을 强調하다 오래지 않아 消滅하였다. 王龍界(王龍溪), 이탁오(李卓吾) 外에 왕간(王艮), 王壁(王檗-東崖, 1510-1587), 안균(顔鈞-山農, 生沒年 未詳), 量餘원(梁汝元), 나여방(羅汝芳-近溪, 1515-1588) 等이 이 派에 屬하였다.

왕간 [ 編輯 ]

王艮 (1483-1541)

中國 明代 陽明學 左派(陽明學左派)의 思想家 者는 餘地(汝止), 心材(心齋)라고 호하였다. 태주(泰州) 安風腸(安豊場)의 사람. 태주學派(太州學派)의 指導者. 少年 時節에 집이 가난하여 學業을 마칠 수가 없었으나 25歲 때 孔子墓(孔子廟)에 參詣(參詣) 後로는 <孝經(孝經)> <論語(論語)> <大學(大學)> 等을 熱心히 읽었다. 38歲 때 처음으로 王陽明이 講書 地方에서 陽地(良知)의 學(學)을 講論한다는 말을 듣고서 찾아가 그 學問에 크게 感服하여 그後 弟子의 禮節을 取하였다. 양명의 死後에 그는 門戶를 開放하여 一般 庶民을 講學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있는 곳에는 小農·圖章·漁夫·炎程·初付(樵夫) 階層의 사람들까지 몰려와서 그 學問을 傾聽하였다. 그는 實踐을 重視하여 學問의 目的은 成人이 되는 것이라고 規定하였다. 王學左派(王學左派)의 王龍系가, 羊脂는 사람의 마음에그대로 顯性(現成)하고 있다고 말하였는데, 그도 또한 羊脂는 自然의 天測(天則)이어서 人力으로 按排할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또 學問은 반드시 먼저 自己 自身으로부터 始作해야 할 것을 說明하였다. 自己를 바르게 하고 그 다음에 물(物)李 바르게 되고 自己 自身이 바르게 된 後에 비로소 天下가 거기에 歸一한다고 하며 特色있는 <格物說(格物說)>을 展開하였다.

量餘원 [ 編輯 ]

梁汝元 (1517-1579)

中國 明代 陽明學左派(陽明學左派)의 思想家. 者는 주건(柱乾), 號는 釜山(夫山). 後에 하심은(何心隱)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영풍(永豊) 사람으로서, 안균(顔鈞)을 스승으로 하고 왕심재(王心齋) 學問의 信奉者였다. 따라서 태주學派(太州學派)의 直系이다. 河心隱隱 講學(講學)을 特히 重視한 사람이며, 그 實行家이기도 하였다. 北京(北京)에 있을 當時 張居正(張居正)李 講學을 憎惡하였으므로 激論하게 되었고, 이것이 原因이 되어 얼마 後 그는 捕縛되어 殺害되었다. 그의 思想은 人倫(人倫) 中에서 朋友(朋友)를 重視하며, 任俠적(任俠的)인 行動力에 依한 廣範圍한 講學 實踐과 農工上家事(農工商賈士)의 平等論, 人慾(人欲)의 肯定 等을 그 特色으로 한다. 著書에는<찬동집( 桐集)> 4卷 外에 <양부산誘集(梁夫山遺集)>이 있다.

이지 [ 編輯 ]

李贄 (1527-1602)

中國 明代 陽明學 左派(陽明學左派)에 屬하는 思想家. 처음에 垈地(戴贄)라 하고, 탁오(卓吾)라 호하였다. 天主(泉州) 鎭江縣(晋江縣-現在의 福建省에 屬함) 사람이다.

그의 官職 生活은 허난省(河南省)·北京(北京)·난징(南京)의 下級管理 및 南京 兄夫員外郞(南京刑部員外郞)을 거쳐, 51歲 때에 윈난省(雲南省) 要眼部(姚安府)의 支部(知府)가 되었다가 54歲에 그만둔 것이 全部이다. 回敎徒였던 그의 性格은 至極히 獨尊的인 人品으로 是非를 즐겨 挑戰的·戰鬪的이었다. 더욱이 奇行(奇行)을 좋아하고 反儒敎的(反儒敎的)·破壞的 言辭를 써서 當時 矛盾 많은 明代 社會에서 壓倒的인 人氣를 모았다. 따라서 當時의 腐敗한 官僚層의 彈壓을 받아 逮捕되어 그는 自殺하였다. 그는 王陽明과 王龍界를 道(道)를 얻은 眞人(眞人)의 不死者(不死者)라고 準崇廈였다. 그의 思想에 있어서의 <童心설(童心說)>이라든가, 歷史批判에 있어서의 善惡·眩仆(賢否)의 相對化(相對化) 等은 陽明學의 發展임과 同時에 佛敎나 노장思想의 影響도 받고 있다고 생각된다.

焚書 [ 編輯 ]

焚書

이지(李贄) (卓吾)의 著作으로 全 6卷이며 <속墳서(續焚書)> 5卷이 附加되었다. 이 著書는 이탁오(李卓吾)가 官職을 그만두고 허베이省(湖北省) 黃안현(黃安縣)의 警定向(耿定向)의 處所에서 起居하다가 思想的인 對立으로 絶交한 後 마聖賢(麻城縣) 용호(龍湖)의 지선원(芝仙院)에 居住하고 있던 時節(59歲 以後)의 十餘年 동안 써놓은 書簡·隨筆·詩 等을 蒐集한 文集이다. 이 著書 中에서 代表的 論文은 제3권에 收錄되어 있는 <童心설(童心說)>이다. 童心이 喪失되는 것은 聞見(聞見)李 밖으로부터 들어와 안의 主人이 되고 道理(道理)가 들어와서 안의 主人이 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特히 그 道理를 否定的으로 看做하였다. 이러한 그의 立論(立論)에서 본다면, 淫亂을 가르치는 <徐相箕(西廂記)>라든가 도둑을 가르치는 <水滸傳(水滸傳)>과 같은 俗文學(俗文學)李 古今의 指紋(至文)이며, 6景(六經)·論語(論語)·孟子(孟子)는 道學者들의 口實로서 僞善者를 만드는 本院이라고 한다. 이 外에 <焚書(焚書)>에는 "사람이 各各 생지(生知)를 所有하고 刻印이 다 부처가 된다"는 것을 說明하고 (卷一 答周西嚴), "衣服을 입고 밥을 먹는 것. 이것이 人倫의 物理(物理)이다"(卷二 答鄧石陽)等 獨自的이면서 自由로운 見解가 많이 提示되어 있다.

藏書 [ 編輯 ]

藏書

이지(李贄)의 代表的 著作으로서 전68권, <속藏書(續藏書)> 27卷이 附加되어 있다. <焚書(焚書)>가 그의 文集으로 雜多한 것을 蒐集한 것에 비하여 이 冊은 戰國時代에서 원臺(元代)까지를 記錄한 紀傳體(紀傳體)의 綜合 歷史書이다. 이것은 이탁오가 허베이省(湖北省) 魔性縣(麻城縣)에 있는 지선원(芝仙院)에 滯留하고 있었던 時節의 十數年 동안에 著述한 것이다. 서무인 <藏書 世紀列傳 銃목典論(藏書世紀列傳總目前論)>에 보이는 것처럼 是非善惡에는 正體(定體)가 없고 全部 相對的·竝存的이라고 한다. 이 立場은 <長子(莊子)>의 思想을 많이 닮고 있다. <世紀總論(世紀總論)> <덕業有神論(德業儒臣論)> 및 <後론(後論)>, 其他 이 冊 全般的인 論調는 武威(無爲)·無事(無私)에의 反論과 공리의 主張이라든가 傳統的 價値觀·規範意識에의 反撥과 송유도通論(宋儒道通論)의 不正 等 從來의 사서(史書)인 <詐欺(史記)> <資治通鑑(資治通鑑)> <通鑑綱目(通鑑綱目)>에 있어서의 春秋學的(春秋學的) 發想을 無視하였다. 매우 自由奔放하고 獨創的인 見解와 豐富한 內容을 담고 있다.

동림學派 [ 編輯 ]

東林學派

中國 明代 末期에 생긴 學者들의 政治活動 그룹이다. 明代의 社會는 萬曆(萬曆) 時節부터 차츰 混亂속으로 빠져 들었다. 熙宗(憙宗) 천계제(天啓帝-在位, 1621-1627)는 明朝 第一의 暗君(暗君)으로서, 宦官(宦官) 위충현(魏忠賢)에게 政權을 委任하고 自身은 一樂(逸樂)에만 빠져들고 있었다. 昏迷한 社會的·政治的 狀態에 對하여, 王陽明(王陽明) 以後의 心學(心學) 運動은 이미 公理空疏한 것으로 흘러 부질없이 觀念的 論式만 展開하였을 뿐 救國經世에는 아무 所用도 없게 되었다. 이때 政治的 紊亂과 社會的 混亂을 是正하려고 일어난 것이 所謂 동림學派(東林學派)의 學者들이었다. 무석(無錫)의 顧憲成(顧憲成)은 政府 部內의 人事刷新을 위하여 累累이 龍仁(用人)의 醫書(議書)를 上疏하였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으므로 그는 官職을 辭任하고 鄕里로 돌아와 宋의 名儒(名儒) 양시(楊時)의 동림書院(東林書院)을 再興하여 同志를 집합시켰다. 그 中에는 組男性(趙南星), 追遠票(鄒元標), 고번룡(高樊龍) 等이 있었다. 그들은 學問的으로는 朱子學(朱子學)을 信奉하고 위충현(魏忠賢) 等 宦官 一派와 對抗하여 官僚 士大夫의 正統派 그룹을 代表하고 있었다. 그러나 反東林黨(反東林黨)이 일어나 政策論議를 反復하고 있던 中에 이 黨派는 宦官 一派와 結託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東林黨(東林黨)은 彈壓을 받아 消滅하였다. 그러나 이 派에 依하여 主張된 經世致用(經世致用)의 學(學)은 明末 淸初의 黃宗羲(黃宗羲), 顧炎武(顧炎武), 王父子(王夫子) 等에 繼承되어 다음 臺(代)의 新文學의 原動力이 되었다.

그리스도교의 傳來 [ 編輯 ]

-敎-傳來

그리스도교의 中國 傳來에 對해서는 일찍이 黨(唐)·元(元)時代의 네스토리우스교(景敎)의 流行과 원(元) 時代의 몬테 코르非盧(John of Monte Corvino, 1247-1328)의 가톨릭 布敎에 注目할 수가 있다. 그러나 어느 것이나 그 時代에 消滅되어 中國의 思想이나 文化에 重要한 影響을 주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것이 本格化한 것은 名말에 있어서의 예수회(耶蘇會) 宣敎師의 가톨릭 布敎로부터 비롯한다. 예수회의 中國 布敎 活動은 포르투갈·에스파냐의 東洋貿易 進出에 隨伴한 것이요, 最大의 開拓者는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寶)였다. 그는 僚友(僚友)인 美켈러 룻제리(羅明堅)와 함께 16世紀末에 廣東省(廣東省)에서 布敎에 努力하였다. 그러다가 17世紀 初에 名(明)의 萬曆帝(萬曆帝)의 勅許에 依해 北京(北京)에 居住하면서 宮廷이나 高官들 사이에 크게 布敎 活動을 行하였다. 리치가 成功한 뒤를 이어 아담 샬(Adam Schall, 湯若望), 베르비스트(Verbiest, 南 仁) 等의 宣敎師들이 名·靑 釀造(兩朝)의 天文觀(天文官)으로서 奉仕하면서, 北京(北京)의 宮廷을 中心으로 布敎 活動에 從事하였다. 中國에서의 信者로는 明朝의 對官(大官) 徐光啓(徐光啓)나 이지조(李之藻) 等도 包含되어 있으며, 淸의 康熙(康熙) 初에는 信者 總帥가 24萬에 達하였다 한다. 예수회 宣敎師가 리치 以來 그리스도교와 中國의 傳統的 禮敎(禮敎)와의 調和를 위하여 自己의 信仰을 中國人에 强要하는 것보다도, 차라리 天文(天文)·曆法(曆法)·數學(數學)·地理學(地理學) 等의 새로운 西洋 科學文明의 紹介에 依하여 宮廷을 비롯하여 支配階級의 歡心을 사는 方法을 取하였다. 그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信仰보다도 西洋科學 知識의 移入이 活潑하게 行하여져 明末 淸初의 思想界에 큰 影響을 주었다.

徐光啓 [ 編輯 ]

徐光啓 (1562-1633)

中國 明末의 政治가·학자. 字는 자선(子先), 號는 현호(玄扈).

1596年 廣東省(廣東省) 燒酒(韶州)에서 예수회 宣敎師로부터 처음으로 그리스도교의 說敎를 듣고, 1600年 난징(南京)에서 마테오 리치를 만나 敎義를 배웠다. 다시 다 로차(羅如望)에게 信仰을 닦은 後, 1603年 洗禮를 받았다. 1604年 進士가 되어 北京에 居住하면서 리치와 親交를 두텁게 하였고, 서로 協力하여 유클리드(Euclid) 幾何學의 曆書(譯書) <幾何原本(幾何原本)>의 作成·刊行에 힘썼다. 또 傷害(上海)에서 宣敎師의 布敎 活動을 援助하여 뒤의 書架會(徐家匯) 天主堂(天主堂)의 基礎를 만들었다. 리치의 活躍 中에는 이지조(李之藻)와 함께 兩翼(兩翼)李 되었으나, 리치의 事後 彈劾되어 官職을 辭退하고 約 10年에 걸쳐 農學(農學)의 硏究에 沒頭하여 古今의 學說을 集成한 <農政全書(農政全書)>를 咀嚼하였다. 後에 關係에 復歸하여 1630年 禮部尙書(禮部尙書)가 되었고, 다시 大學史(大學士)로 나아갔다. 그 동안 아담 샬과 함께 中國力(中國曆)의 個數(改修)에 從事하였고, 또 宣敎師들과 協力하여 <崇禎曆書(崇禎曆書)>를 編纂하였다.

道敎의 系譜 [ 編輯 ]

道敎-系譜

道敎가 敎壇的(敎團的) 社會 勢力을 形成하여 그 基礎를 確固히 한 것은 北緯(北魏) 太武帝(太武帝) 時節 天使도(天師道)를 연 寇謙之(寇謙之)의 힘에 依한다. 宋代 北送에서는 太祖(太祖)·太宗(太宗) 以來의 皇帝가 遊學 振興策을 取하는 한便, 道敎를 깊이 믿어 여러 種類의 宮官(宮觀)을 建立하여, 宋王朝를 保護 維持하는 宗敎와 같은 性格을 갖게 하였다. 將軍房(張君房)의 <雲級 7첨> 120卷도 이때에 編纂된 것이다. 7첨(七籤)은 道警(道經)의 分類, 卽 3棟(三洞)(洞眞·洞玄·洞神) 및 4報(四輔:太正·太平·太淸·太一)를 말하는데, 그는 이런 經典(經典) 4565卷 속에서 重要한 것을 拔萃하여 이 冊을 編輯하였다. 以後 南宋에서는 크게 男종(南宗)·北宗(北宗)의 두 派로 나뉘었다. 南宗은 性(性)을 主로 하였고 北宗은 命(命)을 主로 하였다. 南宗의 性, 北宗의 名이라고 하는 說은 名(明)의 송렴(宋濂)의 見解에 依하면 오히려 反對라 한다. 북종(北宗)은 旅順孃(呂純陽)으로부터 全眞敎(全眞敎)를 開設한 金(金)의 往哲 (字는 知明, 重陽子라고 易한다) 名臺 및 淸代에는 皇帝 權力의 專制 絶對化(專制絶對化)를 强化할 目的으로 民衆敎化의 方策이 徹底하게 取해졌다. 그 方策은 儒敎思想을 中心으로 하면서도 傳承的인 民間 信仰에 있어 因果應報(因果應報)·勸善懲惡(勸善懲惡)을 말하는 이른바 儒佛도(儒佛道) 混融의 敎化冊이었다. 이 敎化冊은 宣誓(善書)의 流行과 함께 名·廳舍會에 넓고 깊게 浸透되었다. 宣誓란 善을 勸하는 冊이라는 뜻으로서, 宋에게 傳해졌다. 그의 著述로 <중양전진집(重陽全眞集)> <中洋敎化집(重陽敎化集)> <中兩分리十畫集(重陽分梨十化集)> <中洋禁闕玉碎결> <중양수단양(重陽授丹陽)> <中洋入校15론(重陽立敎十五論)>等이 있다. 또한 南宋 初에는 有名한 <太上感應篇(太上感應篇)>이 이창령(李昌齡)에 依하여 著作되었다. 代 以後 一般的으로 使用되었다. 그것은 民間에 있어 日常的 通俗的인 道德의 實踐을 勸奬하는 冊으로서, 儒敎的 敎理뿐만 아니라 誘導불(儒道佛) 3橋 混合의 形式을 採擇하고 있었다. <太上感應篇(太上感應篇)> <功過格(功過格)> <陰騭文>은 그 代表的인 것이다. 또 佛敎界의 通俗 經典으로서의 <寶卷(寶卷)>이 明代 以後 一般에 使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