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兌原
·이태윤이 이루던
디 엔드
(The End)는 언더그라운드에서 좋은 反應을 얻고 있었다. 보컬과 베이스는 이태윤이 맡았다.
金兌原
은 檢銀眞珠라는 그룹의
김종서
를 보컬로 맞아 復活로 改名하였다.
김종서
가 音樂的 見解로 脫退瑕疵 김태원은 親分이 있던
李承哲
에게 새로운 歌手를 알아보라고 시켰으나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結局
李承哲
이 노래를 맡게 되어
1985年
7月 3日
復活이 結成되었다.
李承哲
이 合流하기 前 이미 이름이 디 엔드에서 復活로 바뀌었으나 復活이라는 이름으로 音盤을 낸 것은
李承哲
이 合流한 後이다.
卒業 後 3代 기타리스트로 名聲을 떨치던
金兌原
은 所聞이 藉藉하던 김도균의 活動을 지켜보고 큰 感銘을 받게 된다. 한便 江南에서는 신중현의 아들 신대철의 名聲이 藉藉했다. 1985年 신대철의 시나위와, 復活의
金兌原
은 서로 같은 舞臺에서 對決을 한적이 있다. 復活은
게리 무어
스타일의 音樂을 했고, 시나위는
오지 오스본
같은 메탈 音樂을 했는데, 復活은 樂器의 水準이나 퍼포먼스 等에서 시나위에 큰 敗北感을 느끼게 되고
金兌原
은 其他實力보다는 作曲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音樂的 變化를 겪는다.
[1]
1986年 復活, 白頭山, 시나위가 모두 앨범을 냈으나, 白頭山과 시나위는 메탈을 追求하고, 復活은 부드러운 발라드 性向의 音樂을 하면서 다른 길을 걷는다.
復活과 活動해왔던
김종서
는 1986年 脫退를 하여 시나위로 들어가 큰 成功을 하지만, 復活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곧 새로운 보컬
李承哲
을 迎入했는데
李承哲
의 外貌가 록커答紙 않게 곱상하다는 理由로 다른 멤버들이 反對하면서 迎入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2]
金兌原
은 當時 金秀哲의 바이브레이션을 좋아했는데
李承哲
이 그와 비슷한 느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李承哲
迎入을 强力히 推進했고
[3]
李承哲
을 迎入한 復活은 1986年 <희야>, <비와 當身의 이야기>等으로 30萬張 以上의 音盤販賣量을 記錄하며 처음으로 크게 成功했다.
[4]
그러나 榮光도 暫時, 1987年 2輯 販賣量은 大舶을 쳤으나 大麻草 事件으로 인해 2輯 앨범活動은 失敗했다.
金兌原
은 "많은 人氣를 얻어 自慢心 때문에 大麻草에 더 빠져들었다"라고 告白했다.
[5]
그리고
李承哲
도 솔로로 活動하게 됐다.
그렇게 復活은 繼續 活動해오던 中 1993年 보컬이 空席이 된 狀況에서
김재기
를 만나게 된다.
金兌原
의 初等學校 同窓인 牧師가 "불광동에 누군가 올 것"을 豫見한 다음 날 김재기가 오디션을 보기 위해 復活 錄音室에 들어왔다. 김재기는 이어 Nazareth의 <Love hurts>를 한 番 불렀고 그의 實力에 感歎한
金兌原
은 바로 迎入을 하게 된다.
[6]
그러나 김재기는 3輯 앨범 錄音中 不意의 交通事故로 死亡했다. 이때 練習삼아서 單 한 番 불렀던 <사랑할수록>이 錄音되어 있었고 이를 그대로 앨범에 넣게 된다.
金兌原
은 "한 番에 錄音을 끝내는 사람은 김재기와
이소라
밖에 본 적이 없다"면서 그의 實力을 極讚했다.
[7]
정준교·김성태 그리고 김재기의 동생 김재희와 함께 音盤을 完成하고 復活 3輯이 發表되었다. 김재기가 參與한 <사랑할수록>이 包含된 앨범은 100萬張 以上의 販賣高를 올리며 큰 人氣를 얻었다.
以後 1997年
박완규
가 부른 5輯 <論理 나이트>의 人氣를 끝으로 復活은 또 다시 沈滯期에 빠져든다.
어려움에 빠져있던 復活
金兌原
에게 2001年
李承哲
에게 結合 提議가 들어오고 14年만인 2002年 다시 再會하여 <네버 엔딩 스토리>로 또 다시 큰 人氣를 얻게 되고
金兌原
은 KBS 歌謠大賞 作詞·作曲賞을 受賞하며 名譽도 얻는다.
[8]
後날 김태원은 "
李承哲
을 빼고서는 復活을 이야기 할 수 없다", "復活이 없으면
李承哲
도 없다"며 서로의 影響力을 認定했다.
[9]
7집에서는
金兌原
을 除外한 모든 構成員이 交替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