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年 9月 10日
유홍준
文化財廳長은 就任 後 첫 記者懇談會를 갖고 "暴注하는 文化財 業務를 뒷받침하기 위해 地方廳을 新設해야 한다"라고 밝히고 "地方廳 新設에 앞서 慶州, 昌原, 扶餘의 地方文化財硏究所를 擴大 改編하고, 湖南地域과 京畿 講院地域을 專擔하는 地方文化財硏究所 新設을 위해 힘쓸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한, "다른 廳級 政府機關은 地方廳이 다 있는데 唯獨 우리 文化財廳만 없다"라며 "暴注하는 文化財 業務를 뒷받침하기 위해 地方廳 新設이 切實하다"라고 말했다.
[14]
[15]
2006年 9月 1日
韓國民族藝術團體總聯合
文藝아카데미에서 열린 地域文化政策 連續포럼에서
황평우
韓國文化遺産政策硏究所腸은 "效果的인 文化遺産 保存, 管理, 活用을 위해서는 責任 있는
副總理
級의 國家文化遺産管理구기로 統廢合해 豫算과 人力을 合理的으로 調律해 나가야 한다."라고 主張했다. "脂肪文化遺産을 管理하고 있는 地方自治團體의 境遇, 文化財 管理 人力과 豫算이 크게 不足해 제대로 된 文化行政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라면서 "이러한 限界를 克服하기 위해서는 地方 國立博物館을 '脂肪文化遺産靑'으로 轉換해야 한다."라고 强調했다. 特히 '脂肪文化遺産靑'은 "保存, 管理, 硏究, 活用의 機能을 가진 國家 統合機關과는 別途로 地域 文化遺産에 對한 獨自的인 權限과 義務를 附與받아야 하며, 各 地域의 傳統文化政策의 허브 機能을 專擔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16]
2008年 2月 12日 午後 유홍준 文化財廳長은 國立故宮博物館에서 記者會見을 열고 "國民에게 엎드려 謝罪한다"라며 "
崇禮門 火災 事件
의 責任을 지고 大統領에게 辭職書를 提出했다"라고 밝혔다. 유홍준 文化財廳長은 記者會見에서 崇禮門의 1次 責任 機關이 서울特別市 中區廳으로 되어 있는 文化財 保護시스템에 對한 問題點을 指摘하기도 했다. 그는 "地方政府가 堪當하기 어려운 部分을 中央政府가 맡아 하는 게 옳다"라며 "文化財廳 亦是 圈域別 地方廳을 設置해 體系的인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라고 强調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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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年 11月 12日
안휘준
國外所在文化財財團
理事長은
변영섭
文化財廳長과의 對談에서 변영섭 文化財廳腸이 "文化財廳은 가장 작은 부처로 적은 人力·規模 속에서 (文化財 管理를 위해) 孤軍奮鬪한다"라며 "國家指定文化財度 直接 管理하지 못한다. 늘 豫防이 아니라 뒷收拾만 하는 形便"이라고 吐露하자 "文化財廳은 바닷 속까지 全 國土에 分布된 文化財를 管理한다. 그런데 下部構造가 없다"라며 "文化財廳 管理의 效率을 높이려면 傘下에 下部構造(地方廳)를 둬야 한다"라고 提案했다.
[18]
2014年 9月 1日 文化財廳 等에 따르면 各 地域의 文化財 管理 및 硏究 組織을 擴大하는 內容의 組織 改編을 2013年 政府에 報告했으며 이를 基盤으로 올해 組織 診斷을 거쳐 最終 組織 改編案 樹立을 앞두고 있다. 文化財廳은 이르면 1-2個月 內에 最終案을 確定해 政府에 報告한 뒤 2015年부터는 地方廳 新設과 自治團體의 國家指定文化財 管理 業務를 改善하는 內容의 文化財 管理 改革에 나설 計劃인 것으로 알려졌다. 檢討되고 있는 改編 方向은 大田에 있는 國立文化財硏究所와 慶州·扶餘·伽倻(慶南 昌原)·羅州·中院(忠北 忠州) 等의 文化財硏究所, 國立海洋文化財硏究所(全南 木浦) 等을 改編해 各 地域에 地方廳을 新設하는 안이 有力視되고 있는데 그동안 이들 硏究所는 發掘 및 地表調査와 學術大會 等 調査, 硏究 機能에 注力해 왔으나 地方廳이 新設되면 硏究所 固有 機能에다 文化財 保存, 管理 等의 機能이 擴大 配置될 것으로 展望된다. 特히, 各 地方自治團體가 文化財廳으로부터 委任받아 遂行하고 있는 國家指定文化財 保存, 管理 機能도 全面的인 改編이 豫告되고 있다. 地方自治團體는 文化財의 保存·保守·維持管理, 文化財의 保護施設物 維持管理, 待機·水質·土壤景觀 等의 周邊環境 保護, 文化財의 消化·電氣·配水 等 災害·災難 防災 管理 等 文化財 管理의 實質的인 業務 機能을 맡고 있지만 崇禮門 全燒事件과 같이 重大한 文化財 損失에 對備해 完璧한 管理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指摘을 받고 있으며 文化財廳이 各 地方廳 新設을 통해 國家指定文化財들을 直接 管理하고 地方自治團體의 業務 機能을 一部 縮小·調停하는 方案이 豫想되고 있다.
[19]
文化財廳의 이番 組織 改編은 이미
노무현 政府
의 '政府 革新' 論議 때부터 提起됐던 것으로 地方自治團體에 委任돼 있던 文化財 保存·管理 業務를 政府가 直接的으로 管理하는 一元化된 體系 構築이 核心으로 優先的으로 提起되는 爭點은 通·廢合 規模에 있어 全國 13곳에 分布한 國立博物館을 包含시켜 地方廳이 아닌 '妻'나 '簿' 單位로 擴大해야 한다는 意見도 提示되고 있다.
직접的인 桶·廢合 對象이 되는 國立文化財硏究所의 內部 反撥을 最少化하는 것도 重要한 宿題다. 國立文化財硏究所를 비롯한 一部 專門家들은 地方廳으로 統廢合될 境遇 行政的인 業務가 主가 돼 文化財 發掘·保存·管理의 本然의 業務가 縮小될 것이라는 憂慮를 나타내고 있다. 特히, 地方廳 新設에 對한 各 硏究所들의 反撥이 만만치 않다. 자칫 文化財 保存 管理에 傍點이 놓이면서 發掘調査와 學術 硏究 等의 調査·硏究 機能이 萎縮될 수 있다는 點에서다. 1975年 첫 文化財硏究所 新設 以後 40年의 歷史를 갖는 硏究所에는 學藝士 等 專門 人力이 大擧 配置돼 있지만 構造調整을 통해 專門 硏究人力이 설 자리가 없어질 수 있다는 憂慮感도 表出되고 있다.
이에 對해
瑞山浮石寺제자리奉安委員會
엄승룡
共同代表는 "專門 人力 管理나 文化財 管理 效率性에 있어서는 地域 文化財硏究所를 擴大 改編해 地方廳으로 轉換하는 게 맞다고 본다"라며 "다만 行政 業務에 對한 效率的인 配分을 통해 學藝職 職員들의 反撥을 相殺할 수 있는 方案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20]
2015年 2月 9日
정수성
國會議員(慶州·새누리당)李 粤省과 쪽샘地球,
慶州 재매정
發掘現場 等을 둘러보고 文化財의 效率的인 管理와 旣存 組織과 豫算의 限界를 克服하기 위해 地方文化財靑 設立이 必要하다고 主張했다. 정수성 議員은 地方文化財廳의 役割로 文化財를 直接 發掘하기보다는 發掘 計劃을 樹立하고, 이를 統制하는 役割을 擔當하는 同時에 地域 住民과 疏通해야 한다고 主張했다.
[21]
[22]
記錄文化遺産으로 指定되어 있는
朝鮮王朝實錄
과
訓民正音
解例本意 指定書 原本을 紛失하여 재발급받은 事實이 뒤늦게 알려졌다. 1997年에 記錄文化遺産으로 登載된 두 文化財의 證書는 發給 1年만에 紛失했지만 情惑히 어디서 어떻게 紛失되었는지는 把握하지 못한 狀態이며, 只今의 證書는 10年이 지난 2007年에 재발급받은 것이다. 文化財廳 關係者는 "文化財管理局에서 昇格하면서 廳舍를 서울에서 大田으로 옮기는 過程에서 잃어버린 것으로 보인다"는 解明을 하였다.
[23]
[24]
한便,
石窟庵
및
佛國寺
,
陜川 海印寺 藏經板前
,
宗廟
,
昌德宮
,
水原 華城
,
慶州歷史遺跡地區
,
高敞 和順 强化 고인돌 遺跡
等 7件의 世界遺産 元本 認證書度 紛失하여 2007年 함께 재발급받은 것으로 確認되었다.
[25]
한便, 2015年 美國에서 返還된 德宗
御寶
가 事實은 模造品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정호 韓國戰角協會 理事 兼 管린委員長은 德宗御寶에 쓰인 글字 中에서 '卿'(敬) 者와 '온'(溫) 者 等의 殿閣 模樣이 잘못된 形態였음을 發見하였는데, 御寶가 徹底한 分業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點을 생각해보면 "李 같은 問題가 있다는 것은 以上"韓 일이라는 것이다.
國立故宮博物館
도 御寶의 外樣이 異常하다는 點을 把握하였고, 이에 文化財廳은 記者懇談會에서 1924年 當時 王室 業務를 管掌한
李王職
에서 模造品 製作을 맡았고 只今의 德宗御寶도 親日派
이완용
의 次男으로 禮式課長이었던
이항구
가 만든 것으로 밝혀졌다. 文化財廳은 返還받은 해 末에 이 事實을 認知했지만 "善意로 御寶를 준 寄贈者가 언짢을 것을 考慮"하여 이 事實을 2年 가까이 숨겨왔다. 한便, 文化財廳은 "
純宗
指示로 李王職이 製作해 宗廟에 正式으로 奉安했기 때문에 模造品이 아닌 '財(再)製作品'李 맞다"라는 立場을 固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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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