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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高句麗)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고구려 ( )

중국 지린성 광개토대왕릉비 전경
중국 지린성 광개토대왕릉비 전경
고대사
지명/지명
서기전 1세기에서부터 668년까지 존속한 고대 왕국.
異稱
이칭
구려, 맥구려
內容 要約

高句麗는 西紀前 1世紀부터 668年까지 存續한 古代 王國이다. 鴨綠江 中流 地域에서 初期 城邑國家로 出發하여 周邊의 예·맥족은 勿論 沃沮·東濊·扶餘·造船 等 여러 種族들을 融合하여 보다 擴大된 高句麗人을 形成하면서 强大한 國家로 發展했다. 中國 漢나라의 侵入을 받아 恨의 郡縣이 設置되는 等 萎縮된 時期도 있었으나 이들을 몰아내는 過程에서 國力이 더욱 剛해졌고 中國의 統一 王朝인 數와 黨의 侵略도 물리치며 東아시아의 强大國으로 存在했다. 그러나 後期에 成立한 貴族聯立政權의 內部分裂로 國力이 弱化되어, 唐나라와 聯合한 新羅의 攻擊으로 滅亡했다.

正義
서기전 1세기에서부터 668년까지 존속한 고대 왕국.
개설

高句麗의 어원

國號 ‘高句麗’의 語源은 ‘구려(句麗)’에서 비롯하였다. 몽골高原 오르魂 江 기슭에 서있는 突厥(突闕) 第2帝國의 빌게可汗과 그의 동생 퀼테킨을 麒麟 2個의 高突厥非(古突闕碑)에서 高句麗를 倍크리(Bokli)라 記述하였다. 突厥語에서 B音과 M音이 相互轉換 될 수 있으므로 배크理는 매크리(Mokli)이며, 그 밖에 梵語잡名(梵語雜名)과 敦煌文書(敦煌文書) P.1283 等에서 高麗를 ‘무九里(畝久理)’ ‘Mug-lig’라 하였다. 이는 모두 脈구려(貊句麗) 卽 ‘貊族(貊族)의 구려’를 記述한 것이다. 이는 곧 高句麗에서 ‘구려’가 御間이고, ‘高’는 冠形詞임을 말해준다. 高句麗語에서 性(城)을 ‘九漏(溝?)’, ‘홀(忽: khol)’이라 하였다. 이는 邑(邑), 桐(洞), 曲(谷) 等을 나타내는 ‘고을’과 통하는 말이다.

‘高句麗’는 ‘구려’에다가 ‘크다’, ‘높다’는 뜻의 ‘高’=‘大’를 덭붙인 말로서, ‘큰 고을’ ‘높은 城’의 뜻을 지닌 말이다. 高句麗라는 名稱이 처음 歷史上에 登場한 것은 懸吐群(玄?郡) 設置 때(B.C. 107) 그 屬縣(屬縣)의 하나로 고구려현(高句麗縣)李 두어지면서였다. 卽 土着民들이 ‘큰 고을’이라고 부르던 邑落에 玄을 設置하고, 이를 고구려현이라 하였던 것이다. 그 뒤 西紀前 75年 懸吐軍이 退逐된 以後 이 邑落을 中心으로 高句麗 聯盟體가 形成되었고, 以後 國號로 使用되었다. 5世紀 中葉 以後로는 ‘높고 빼어나다’는 漢字의 뜻을 살려 高句麗를 줄인 말인 ‘高麗(高麗)’를 公式 國號로 삼았다. 『三國史記(三國史記)』 에서는 王氏 高麗 와 區分하기 위해 戰勝 記錄에 登場하는 고(구)려를 모두 高句麗라 記述하였다.

高句麗人의 起源

高句麗 發興地人 鴨綠江 中流 地域의 住民들의 種族 系統을 中國 側 史書에서 貊族 이라 記述하였다. 貊族은 先進文獻(先秦文獻)에서부터 登場하는데, 그들의 居住地域이 北中國의 여러 地域에서 부터 요동(遼東) 地域에 이르는 넓은 範圍에 걸치는 空間이었다. 그래서 鴨綠江 中流 地域의 貊族은 먼저 文獻 床에 登場하였던 北中國의 貊族이 한족(漢族)에 밀려 東으로 移動한 이들이라는 說이 紀元後 2世紀에 提起된 바 있고 近代에도 같은 主張이 이어졌다. 그러나 先進文獻의 貊族은 特定한 種族을 指稱한다기보다 한족 居住地의 北쪽에 사는 農耕文化가 덜 發達된 族屬들에 對한 汎稱(汎稱)이다. 貊族 移動說은 아무런 具體的인 根據를 찾기 어렵다.

住民移動說의 또 하나의 例는 近來 中國學界의 一角에서 提起하고 있는 高異族說이다. 卽 一周서(逸周書) 王會篇(王會篇)의 에서 西紀前 12世紀 末 聖王(成王)李 洛陽에서 四方의 諸侯와 種族들의 照會를 받았는데 그 中 高異族(高夷族)도 있었다고 傳한다. 이 記事의 ‘고이(高夷)’에 對해 4世紀 初 共助(孔晁)가 株(注)를 달아 고이가 곧 高句麗다고 하였다. 이런 共助의 株를 根據로 삼아, 高異族이 山東半島를 거쳐 遼東半島 方面으로 移住하여 高句麗가 되었다고 主張한다. 그러나 高異族이 高句麗였다고 한 것은 共助의 州가 唯一하고, 그것은 洛陽에서 朝會가 있었다는 週(周) 聖王(成王) 代로부터 無慮 1,400餘 年이 흐른 뒤에 記述된 것이다. 고이가 高句麗를 指稱한다는 客觀的인 根據는 그 어디에도 없으며, 高異族 移動說도 그러하다.

鴨綠江 中流 地域의 住民의 起源을 具體的으로 考察하는 方案은 이 地域에 널리 分布해 있는 積石塚 의 起源을 探究하는 것이다. 이 地域에는 素朴한 形態의 武器團 積石塚(積石塚)에서부터 巨大한 防單(方壇) 階段式 積石塚에 이르기까지 여러 時期에 걸친 다양한 樣式의 積石塚이 存在한다. 이들 積石塚의 起源을 요서 地域 陵園(凌原)의 홍산 文化 遺跡인 우하량(牛河梁) 積石塚에서 찾는 見解가 있다. 그러나 이 說은 時間的 · 空間的으로 鴨綠江 積石塚 遺跡과 너무 差異가 있다는 點에서 問題가 있다. 우하량 遺跡은 西紀前 3000∼2000年 前으로 推定되고 있다. 鴨綠江 中流 地域의 積石塚은 形態와 時間的 側面에서 가장 가까운 것이 요동 半島 南端의 靑銅器 時代 무덤인 積石塚遺跡(江桑苗 · 壘桑苗 等)이다. 鴨綠江 下流 觀戰縣 · 봉성현 等地의 積石塚을 媒介로 兩 地域의 遺跡이 서로 連結되는 面을 보인다.

全體的으로 보아 高句麗를 세운 이들로서 韓人들에 依해 貊族이라고 呼稱되었던 鴨綠江 中流 地域의 住民들은 外部에서 移住해온 이들이 아니라 이 地域에서 土着해서 살아왔던 族屬이다. 靑銅器 文化段階에서 요동 方面으로부터 靑銅器 文化의 影響을 받았으며, 이어 西紀前 3世紀 代에 年(燕)나라가 요동군을 設置한 以後 聯의 철기 文化를 受容하면서 徐徐히 發展을 圖謀해나갔다. 이들은 西紀前 1世紀 中盤 高句麗聯盟體를 形成한 以後 스스로를 高句麗人이라 稱하게 되었다. 以後 高句麗國의 成長과 함께 그 勢力 下에 包括되어 들어온 藝脈 系의 沃沮(沃沮) · 東濊(東濊) · 扶餘(夫餘) · 朝鮮(朝鮮) 等의 여러 種族들이 원 高句麗人을 中心으로 相互 融合하여 보다 擴大된 高句麗人을 形成케 되었다. 그 過程에서 一部 韓人들도 融合되어 들어왔으며, 남녁의 한(韓)足 의 一部도 그러하였다.

高句麗의 經濟와 收取制度

高句麗가 發興한 鴨綠江 中流 地域은 比較的 瘠薄하고 農耕地가 적었으며, 西北쪽으로 몽골高原의 草原地帶로 나아갈 수 있으며, 東北으로는 森林地帶로 이어졌다. 그에 따라 高句麗人은 일찍부터 遊牧民이나 森林地域의 種族과 關係를 맺었다. 高句麗人은 基本的으로는 定着 農耕民이었지만, 그 生業에서 牧畜과 狩獵圖 일정한 比重을 차지하였다. 高句麗가 發展하여 搖動과 서북한 地域 等 넓은 農耕地帶를 確保한 된 뒤에도 그 生活文化에선 牧畜과 狩獵을 重視하는 面을 維持하였다. 遊牧地대로의 進出과 北으로 森林地帶의 支配는 이런 面을 뒷받침하였다.

卽 高句麗人의 生業은 農業 一邊倒만은 아니었으며, 地域에 따라 一種의 複合經濟的인 性格을 지닌 經濟를 運營하였다. 高句麗 滅亡 以後 그 流民의 一部가 몽골 高原의 突厥로 이주해가 몇몇 集團을 形成하여 居住하였다. 이런 面은 亡國 前부터 高句麗人들이, 遊牧 生活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牧畜 經濟에 對한 깊은 理解가 있었음을 말한다. 高句麗는 紀元 前後부터 선비足(鮮卑族) 等 一部 遊牧民 集團과 關係를 맺었고, 滅亡할 무렵까지도 一部 거란족(契丹族) 말갈족(靺鞨族) 을 그 麾下에 두고 있었다. 이 亦是 牧畜經濟에 對한 깊은 理解와 連結된다.

高句麗의 收取制度는 高句麗 初期 聯盟體的인 部體制(部體制) 段階에선 피服屬 邑落들을 單位로 公納(貢納) 을 徵收하는 形態였다. 具體的인 貢納물의 內容은 各 邑落의 産出物에 따라 差異가 있어, 沃沮의 邑落에선 海産物 等도 徵收하였고, 美女들이 貢納에 包含되기도 하였다. 貢納물은 集團을 單位로 賦課되고 徵收되었다. 그런데 邑落 單位로 集團的으로 計算되어 賦課되었더라도, 具體的으로 邑落 內部에서는 그 構成員들에게 나누어서 賦課된 것을 모아 바치는 形態였을 것이다. 그럴 때 무엇을 基準으로 邑落構成員에게 分擔시켰을 것인지가 問題이다. 이에 對해선 當代의 狀況을 傳하는 具體的인 記錄이 없는 만큼, 뒤 時期의 收取 面貌를 통해 거슬러 推論해 볼 必要가 있다.

高句麗 後期 민(民)에게 賦課된 租稅에 對해 『周書(周書)』 高麗箭에서 “富世는 犬(絹) , 抛(布), 속(粟)으로 내는데, 그 가진 바에 따르며, 貧富를 헤아려 差等으로 내도록 한다”라고 하였다. 『水西(隋書)』 高麗箭에서는 “人(人)은 抛 5匹, 曲 5席을 세(稅)로 내며, 誘引(遊人) 은 3年에 1番 貰를 내는데 10人이 細胞(細布) 1疋을 함께 낸다. 號(戶)마다 1席의 條(租)를 내며, 차등호는 7頭, 下等號는 5豆를 낸다”라고 하였다. 『周書』는 稅 負擔 內容을 包括的으로 記述하였고, 『水西』는 좀 더 具體的으로 傳한다. 後者의 內容에서 砲 5匹과 曲 5席은 모든 이에게 賦課하기에는 負擔이 너무 過重하다. 이는 一種의 好調(戶調)로서, 이에서 말하는 人은 濠洲人 男丁(男丁)을 指稱하는 것이고, 號마다 均一하게 賦課되었다. 이것이 賦稅의 주된 것이고, 號(戶)마다 그 貧富에 따라 3等級으로 區分지어 差等으로 내는 條는 附加稅的인 性格의 이다.

以外에 勞動力 徵發을 하는 賦役이 있었다. 卽 高句麗 後期 施行되었던 收取制度에서 租稅는 認定(人丁)을 基準으로 均一하게 賦課되는 人頭稅가 그 주된 部分을 차지하였다. 統一期(統一期) 新羅 에서는 號를 9等으로 細分하고 그것을 基準으로 하여 算出한 계연(計烟) 에 依해 租稅를 賦課하였다. 9等號를 區分하는 基準이 認定을 中心으로 한 總體的 資産이었다고 보는 說이 有力하다. 新羅 末 高麗 初 以後 漸次 土地가 주된 基準이 되어 租稅가 賦課되었다. 이런 進展을 보면 高句麗 初期에는 認定을 基準으로 한 賦稅가 定해졌고, 그것이 邑落 單位로 賦課, 徵收되었던 것 같다. 共同體的인 關係가 解體되고 地方制度가 整備되어진 高句麗 中期에 접어들면서 官僚組織을 통해 個別 號에 對한 受取가 行해지게 되었다.

高句麗史의 時期區分

이에 對해서는 首都의 所在處에 따라 區分하는 視角이 있다. 卽 桓因(桓因) 時期, 國內城(國內城) 時期, 平壤 時期 等으로 나누는 說이다. 首都의 所在處에 따른 區分은 區分의 基準이 簡單明瞭하고, 遺跡 · 遺物과 直結하여 把握할 수 있는 利點이 있다. 美術史와 考古學 에서 選好하는 方案이기도 하다. 그러나 首都의 變遷이 한 나라의 歷史的 變化 發展相을 段階 別로 반드시 잘 反映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國內城 遷都 時期조차도 論難이 持續되고 있다는 點을 考慮할 때, 特히 그러하다.

政治史的 側面에서 時期區分을 하여, 國初에서 3世紀 末 봉상왕(烽上王) 代까지를 初期, 6世紀 中盤 안원왕(安原王) 代까지를 中企, 양원왕(陽原王) 代 以後 保障王(寶藏王) 代까지를 後記로 設定하는 說이 提起되었다. 이 說은 各 時期 별의 特徵的인 國家의 性格이나 그 政治運營 樣相에 따라 時期區分을 하였다. 卽 電氣는 聯盟體的인 部體制의 城邑國家(城邑國家) 가, 중기는 郡縣制(郡縣制) 敵人 中央集權體制의 領域國家(領域國家)가 形成되어 運營되던 時期였고, 後期는 中央集權體制는 持續되었지만, 그 政治 運營이 貴族聯立體制(貴族聯立體制)的인 性格을 지녔던 時期로 把握하였다. 現在 이 說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에 立脚해 各 時期의 高句麗史의 面貌를 살펴본다.

고구려의 형성 및 변천

高句麗 初期의 國家構造와 政治運營

高句麗 5部體制의 成立

懸吐軍이 退逐된 뒤, 鴨綠江 中流 地域에는 消奴(消奴)集團 이 中心이 되어 여러 地域集團(那: 內, 奴, 壤)들을 糾合한 緩慢한 聯盟體가 形成되었다. ‘나(那)’는 鴨綠江 中流 地域 各地를 흐르는 河川 邊에 形成된 集團으로서, 不足이나 始原的인 小國(小國: chiefdom)이었다. 退逐된 後 懸吐軍은 高句麗 聯盟體 內의 各各의 나와 外交 · 貿易 關係를 가져 이를 個別的으로 操縱하여 高句麗社會 內에서 强力한 統合勢力이 出現하는 것을 沮止하려 하였다. 이런 懸吐君의 間接支配 政策이 相當 期間 效果를 發揮해, 高句麗 社會 內에서 混沌狀況이 持續되었다.

그러던 中 扶餘 方面에서 南下해온 桂樓(桂樓)集團 이 頭角을 나타내 消奴集團을 누르고 연맹체의 主導權을 掌握하였다. 朱蒙 이 神通術 對決을 통해 송양王(松壤王)을 눌렀다는 說話는 消奴集團에서 繫累集團으로 聯盟體 腸이 交替된 事實을 傳하는 바이다. 『後漢書(後漢書)』 高句麗傳에서 傳하는 高句麗後 ‘秋(騶)’는 追慕(鄒牟) 卽 朱蒙(朱蒙)으로서, 紀元 前後 무렵 高句麗의 軍丈人 追慕의 存在를 確認할 수 있다. 『三國史記』 에 依하면 朱蒙은 扶餘에서 南下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朱蒙說話는 그 構成이 扶餘의 東明舌禍(東明說話)와 恰似하다. 그리고 考古學的으로 볼 때 예(濊)족 人 부여인의 墓祭(墓制)는 石棺墓(石棺墓) 土壙墓(土壙墓) 였는데 비해, 貊族人 高句麗人의 그것은 積石塚이어서 差異가 난다. 萬若 夫餘族의 一端이 南下하여 高句麗를 세웠다면 鴨綠江 中流 流域에 石棺墓나 土壙墓 무덤 떼가 確認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이런 點을 들어, 朱蒙說話는 扶餘의 東明說話를 大幅 借用하여 後代에서 만든 것으로써 實際上의 事實을 傳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는 說이 提起되어왔다.

그런데 繫累集團은 扶餘 方面에서 移住해온 朱蒙集團을 中心으로 여러 系統의 이들이 結合한 混成 集團이었으며, 漸進的인 過程을 거쳐 擡頭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朱蒙說話는 4世紀 後半 公式的인 高句麗의 建國說話로 定立되어질 때 扶餘의 東明說話가 이에 大幅 借用되어졌으나, 이에는 高句麗 建國期의 일정한 歷史的 事實이 反映되어 있다. 卽 朱蒙說話의 寫實性을 통째로 否定하는 것은 옳지 못한 理解이다.

隣近의 다른 ‘나’들을 統合하며 繫累集團의 勢力이 擴大해나가자, 이를 抑制하려는 恨郡縣(漢郡縣) 勢力이 介入하여 다른 나를 支援하거나 直接 侵攻하여, 高句麗 內部의 分裂을 誘發하였다. 그에 따라 一部 集團이 한군현의 作用力에 따라 高句麗 聯盟體에서 離脫해 나가기도 하였고, 나들 間의 相爭을 불러일으켜, 1世紀 後半 以後 長期間에 걸친 內紛과 混亂이 持續되었다.

오랜 混亂을 收拾하고 2世紀 初 再次 高句麗연맹체의 統合力이 形成된 것은 태조왕(太祖王: 國祖王) 때였다. 太祖王宮(宮)은 아마도 朱蒙의 直系 後孫이 아니라 桂婁部 內의 傍系 勢力이었던 것 같다. 그는 對外的으로는 한군현의 影響力을 排除하고 鴨綠江 中流 地域의 여러 나들에 對한 統制力을 强化하여, 外部와의 交涉 窓口를 一元化하였다. 卽 各 나의 自治權의 一部를 剝奪해, 貿易 · 外交 · 戰爭權을 王權에 歸屬시켰다. 나아가 一部 나들은 桂婁部에 倂合하였다.

鴨綠江 中流 流域의 나들은 그間 그들 사이에서 進行되어오던 相爭과 統合으로, 太祖王代에 이르러 다섯이 되었고, 桂婁部 王權에 依해 이들 다섯 集團의 自治力 一部가 統制되었다. 이것들이 곧 5部(五部)이다. 對內的 統合力을 强化한 뒤 太祖王은 蓋馬高原 을 넘어 東海岸으로 進出하여 옥저와 東濊의 邑落들을 攻略하여 支配下에 두었다. 西南쪽으로는 懸吐軍과 樂浪郡(樂浪郡) 等과 對決을 벌려나갔다. 北으로는 扶餘와 相爭을 이어갔다. 이런 形勢는 그 뒤 相當 期間 동안 持續되었다.

高句麗 5部體制의 政治構造

桂婁部 王權의 統制를 받아 對外交涉權은 喪失하였지만, 各 부는 그 內部의 일에 關해서는 自治力을 지녔다. 王族 代가(大加) 들과 各 部의 長들은 麾下에 自身의 官印을 두었다. 그렇지만 同一한 官等을 지녔을지라도 各 大家들 麾下의 官印은 王에 屬한 官印과 動熱에 서지 못하였다. 分立하는 가운데서도 上下 序列이 주어졌다. 主要 國務는 王族 代價와 各 部 大家들로 構成된 會議에서 處決되었다. 王은 高句麗 全體의 王인 同時에 桂婁部의 場이었다. 그는 超越的인 權力者라기보다는 大家들의 代表와 같은 性格을 지녔다. 곧 ‘primus inter pares’(同僚들 中의 最上位者)라 할 수 있다. ‘事緣나(四椽那)’ 卽 椽那部(椽那部) 內의 4個의 集團과 같이, 各 部에는 그 안에 部內部(部內部)라고 불릴 수 있는 下位의 自治體들이 存在하였다.

그리고 高句麗 5部에 依해 征服된 集團들에 對해선, 그 集團 內部의 일은 自治에 맡기고 首長을 通해 貢納을 徵收하는 式으로 間接 支配하였다. 東濊와 옥저의 邑落 等이 그러하였다. 양맥(梁貊) 의 邑落들도 그러하였다. 初期 高句麗國은 이런 各 級 自治體의 聯合體였다. 여러 自治體 中 5部는 支配種族으로서 高句麗國 內에서 集團的으로 優越한 位置에 있었다. 옥저와 東濊, 陽脈의 邑落들은 被征服民으로서, 一種의 集團豫民籍(集團隸民的)인 性格을 지녔다. 當時 ‘高句麗’라 하였을 때, 『三國志』 동이전에서처럼 이를 5部만을 指稱하는 境遇가 있고, 이와는 달리 5部와 함께 沃沮 · 東濊 · 陽脈의 邑落 等 5部에 征服된 銳敏 集團들을 包括하는 境遇가 있다. 後者의 境遇 5部와 餘他 被服속集團들은 實際上 高句麗 國家 構造 內에서 그 政治的 位相이 儼然히 區分되어졌다.

各種 自治體들을 上下 位階에 따라 累層的으로 雙芽올린 形態가 高句麗 初期의 國家構造였다. 主要 政策의 決定과 執行은 會議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런 國家構造를 形成케 된 것은 各級 自治體들을 解體하고 官僚組織을 通한 一元的인 支配方式을 取할 수 없었기 때문이며, 이는 根本的으로는 當時까지 邑落에 共同體的 關係가 作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支配組織이 發達되지 못한 狀態에서 國家的 統合力과 動員力을 確保하는 데에는 제가(諸加)회의와 같은 機構를 통한 政策決定 方式과 함께, 傳統的인 提議(祭儀)가 主要한 機能을 發揮하였다. 高句麗는 每年 10月 全國的인 規模로 同盟第(東盟制) 라는 祝祭가 열렸다. 同盟制는 一種의 秋收感謝祭의 性格을 지녔다. 同盟祭儀 具體的인 進行 內容을 살펴보면, 먼저 일신(日神)에 對한 祭祀를 지냈다. 이어 首都에서 떨어진 곳에 있는 洞窟에서 受信(隧神) 을 불러내어 나무로 깎아 만든 身上(神像)에 接神케 한 뒤, 천으로 身上을 덮고 배에 태워 鴨綠江을 통해 國內城의 祭祀 場所로 옮겼다.

受信이 到着하여 受信에 對한 感謝의 祭祀를 올리며 身上을 덮고 있던 천을 벗기면, 햇빛이 身上에 가득 비치어 提議가 絶頂을 맞는다. 卽 受信(隧神)은 受信(水神)으로서 女神인데, 이에 男神인 햇빛(日神)李 비쳐, 良臣(兩神)李 交接하는 形象을 이루게 된다. 이는 곧 한 해의 豐盛한 收穫을 준 一身과 受信에게 感謝를 드린 後 두 神을 交接케 함으로써, 새 生命을 孕胎하여 來年에도 豐盛한 收穫을 約束받는다는 것을 提議를 통해 나타내었다. 이런 提議의 進行過程을 主管하는 最高 司祭가 곧 高句麗王이다. 王은 人間들의 感謝와 바람을 神들에게 傳하고 神들의 約束을 人間들에 傳하는 新星司祭였던 것이다. 나아가 高句麗王 自身이 신성왕(神聖王)으로 形象化되었다.

同盟第 때, 5部의 有力者들은 王이 執典하는 提議에 參與하였다. 萬若 이 提議에 參席치 않는다면 이는 곧 半의(反意)가 있다고 看做되어진다. 왕이 執典하는 神께 올리는 祭祀에 參席한다는 것은 곧 王의 權威에 承服한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王은 이런 提議를 통해 自身의 政治的 位相을 强化할 수 있고, 支配層의 結束을 圖謀하였던 바이다. 아울러 同盟제가 首都에서 行해질 때 各 誌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고 그와 함께 物資交流가 行해지며 技藝를 다투는 各 種 놀이가 行해질 뿐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이러저러한 만남이 이루어졌다. 이 亦是 各 部와 部內部의 住民들 間의 疏通과 交流를 통한 情緖的 結束 도모에 큰 作用을 하였을 것이다.

高句麗 政治情勢의 變化

5部體制 下에서 高句麗 內部의 政治情勢는 서로 拮抗(拮抗) 關係에 있던 桂婁部 王室의 統制力과 各 部의 自治力 間의 關係의 進展에 따라, 그리고 王과 王族, 大家들 間의 關係에 따라 決定되었다. 漸次 王室의 집權力이 各 部의 分權力을, 그리고 王權이 王族大家들의 權力을 壓倒해가는 狀況으로 進展되어갔다. 그와 함께 王位繼承 慣行도 바뀌게 되었다. 이런 變化의 基底에는 社會分化의 進展에 따른 親族關係와 邑落의 共同體的 關係에서의 變化가 가로놓여 있었다. 社會分化에 따라 發生하는 貧農(貧農)을 救濟하기 위한 措處인 賑貸法(賑貸法) 고국천왕(故國川王) 臺에 施行된 事實은 이런 趨勢를 말해준다.

『三國史記』에서 傳하는 高句麗 初의 王位繼承은 富者繼承이 確立되지 못한 形態였다. 多分히 兄弟繼承의 모습을 띄었다. 그러다가 2世紀 後半 신대왕(新大王) 事後 그 아들인 고국천왕 이 王位를 이었다. 그런데 그가 아들이 없이 죽자, 王妃 于氏(于氏)가 媤同生인 勃起(拔奇: 發岐) 와 이이모(伊夷模: 延優) 中 나이가 적은 이이모를 다음 王位繼承者로 推戴하고 新王과 結婚한 일이 일어났다. 이에 勃起가 反撥하여, 搖動의 공손氏(公孫氏)와 連結해 叛亂을 일으키는 王位繼承紛爭이 勃發하였다. 이를 고비로 以後에는 富者繼承이 定着되었다. 卽 이이모( 산상왕 )의 事後 그 아들 동천왕(東川王) 이 王位를 이었고 그 뒤로 王位의 父子繼承이 確立되었다.

또한 兄이 죽으면 兄嫂를 取하여 아내로 삼는 取水魂(娶嫂婚: levirate) 도 동천왕臺 以後 더 以上 支配層의 婚姻慣行에서 確認되지 않는다. 王位의 兄弟繼承과 取水魂이 반드시 서로 同伴하는 慣行인 것은 아니지만, 相互 適合的 關係에 있다. 모두 親族의 共同體的 關係가 잘 維持되던 社會에서 흔히 行해지던 習俗이다. 그런데 社會分化의 進展과 함께 親族關係度 分化되어져 감에 따라 取水魂이 더 以上 選好魂(選好婚)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한便 各 部의 自治力度 漸次 弱化되고 反面에 中央政府의 統制力이 强化되어 갔다. 對外戰爭은 이런 趨勢를 促進하였다. 그 結果 3世紀 末 4世紀 初 以後 固有한 名稱을 띄었던, 自治力을 지닌 政治單位로서의 5部는 消滅되었다. 이제 富(部)는 首都의 行政區劃 單位가 되었다. 方位名(方位名) 5部가 그것이다. 이와 함께 같은 時期에 兄(兄) 等 새로운 官等을 核으로 하는 官等制가 모습을 드러내기 始作하였다.

高句麗 對外關係의 擴大와 毌丘儉의 侵攻

高句麗 建國期의 對外關係의 주된 對象은 한(漢)의 卞君(邊郡)이었다. 이와의 關係에서 消極的으로는 恨郡縣의 浸透와 分裂 策動을 막고 그들의 文物을 受容하는 交易關係를 維持하였다. 積極的으로는 요동군과 懸吐群 · 樂浪郡 等 恨郡縣 地域을 攻略하여 物資와 人民을 鹵獲하였다. 한便으로는 隣近의 附與를 壓迫하고 一部 遊牧民 集團들을 糾合하여 勢力 擴大를 圖謀하였다. 이에 對해 恨郡縣은 高句麗 內部의 各 自治集團과 高句麗에 歸屬해 있던 遊牧民 集團 等의 恨郡縣으로의 離脫을 부추기거나, 산상왕 卽位 紛爭 때처럼 高句麗 內部 狀況을 利用해 武力侵攻을 敢行하여 打擊을 加하기도 하였고, 一面으로는 高句麗의 壓迫을 받고 있던 附與를 支援하는 것으로 對應하였다. 高句麗가 强力한 勢力으로 成長하는 것을 沮止하는데 注力하였던 것이다.

이런 兩者의 關係는 3世紀 中盤에 들어 變化하는 面을 보였다. 後漢帝國이 滅亡하고 中國大陸에 세 나라가 對峙하였다. 그런 狀況에서 南中國의 吳(吳)가 北中國의 位(魏)를 攻掠하기 위해 搖動의 공손氏 勢力과 關係를 맺고자 하였다. 위의 報復을 두려워한 공손氏가 吳와의 同盟을 拒否하자, 오는 東便의 高句麗에 손을 내밀었고, 高句麗도 이에 應하여 使臣을 오에 派遣하기도 하였다. 그런 中 위가 搖動의 공손氏 勢力을 攻略하여 滅하였다. 이제 高句麗가 胃와 直接 國境을 接하며 그 壓迫을 받은 狀況이 되었다. 東川王이 誤와의 關係를 끊어 위에 友好的 姿勢를 보였다. 그러나 南쪽의 吳와 東北쪽의 高句麗가 連結할 可能性을 遮斷하고 東北方의 安全을 圖謀하려는 位는 高句麗 遠征을 敢行하였다.

244年 毌丘儉(?丘儉)李 이끄는 위軍(魏軍)李 高句麗를 侵攻하였다. 高句麗軍은 魂江(渾江) 流域에서 位君을 맞아 奮戰하였다. 近接하여 벌리는 短兵接戰에선 高句麗軍이 優勢하였으나. 陣을 치고 大規模 集團的 戰鬪에서 高句麗軍이 敗北하여 마침내 丸都城(丸都城) 이 陷落되었다. 동천왕은 沃沮 方面으로 避難해야만 하였다. 高句麗軍의 抵抗으로 追擊을 더 以上 할 수 없게 된 위軍은 回軍하였다. 이 때 毌丘儉이 丸都城 隣近인 小版차령에 記功碑를 남겼다. 이듬해 再次 位軍이 侵攻하여, 北沃沮(北沃沮: 豆滿江 流域) 를 거쳐 扶餘(길림시 一帶)로 迂廻하여 歸還하였다.

毌丘儉의 侵攻으로 高句麗는 큰 打擊을 받았다. 首都인 丸都城이 破壞되고 많은 이들이 捕虜로 잡혀갔다. 前後 동천왕은 首都를 臨時로 ‘平壤’에 옮기었다. 이때의 平壤은 只今의 平壤時 一帶가 아니라 禿魯江(禿魯江: 將子江) 流域의 江界 地域으로 보거나 집안 의 平地 地帶로 보는 見解도 있으나 분명치 않다. 戰亂에 따른 被害가 컸었지만, 위軍은 高句麗 領土에 駐屯치 못하고 곧 回軍하였으며, 以後 中國 內에서의 三國 間의 紛爭과 이은 위나라 支配層 間의 權力鬪爭으로 위君의 壓迫은 持續的인 것이 못되었다.

高句麗는 戰亂의 被害를 復舊하고 國家體制를 再整備해나갔다. 그 過程에서 中央政府의 집權力이 强化되었다. 아울러 비록 有效한 結果를 가져오지는 못하였지만, 高句麗는 3世紀 中盤 以後 北中國 王朝와의 交涉하면서 別途로 南中國 王朝와도 關係를 맺는 等 그 對外交涉의 幅을 크게 擴大하였다. 그와 함께 當時 複雜한 國際 關係와 各 國의 움직임을 把握하는 새로운 經驗을 쌓는 契機를 가지게 되었다. 이는 다음 世紀에 들어 展開된 急激한 國際情勢의 變動을 理解하고 그에 對한 對應을 摸索하는 데에 有效한 經驗이 되었다.

高句麗 中期 中央集權的 領域國家體制의 形成과 天下觀(天下觀)

4世紀 以後 高句麗의 對外的 進出

4世紀에 접어들면서 東아시아는 激動期를 맞이하게 되었다. 東아시아 國際情勢를 主導하던 中國의 陳(晉)帝國이 무너지고 周邊의 遊牧民들의 移動과 征服戰爭이 活潑히 展開되었다. 그에 따라 그間 東아시아 苦戰 文明의 中心地였던 北中國 地域이 混沌에 빠졌다. 많은 北中國의 住民들이 長江(長江) 以南으로 移住하였고, 北中國에선 匈奴(匈奴) · 선비(鮮卑) · 저(?) · 갈(?) · 江(羌) 等의 遊牧 種族이 移住하여 王朝를 세우며 그들 間에 엎치락뒤치락 興亡을 거듭하는 이른바 5號16國(五胡十六國) 時代가 展開되었다. 그에 따라 그間 東아시아 國際情勢를 主導하던 中心軸이 崩壞되고 國際的인 混亂狀態가 持續되었다. 이런 狀態는 오히려 그間 中國王朝의 壓迫을 받아왔던 中國 周邊의 種族과 國家들에게 變化와 發展의 好機를 提供하였다.

高句麗는 (徐)진제국의 沒落에 따라 支援 勢力이 없어진 樂浪郡과 帶方郡 을 攻擊하여 313年과 314年에 各各 이를 竝呑하였다. 西로는 搖動平野로 進出하여 그 支配權을 둘러싸고 모용선非(慕容鮮卑) 等의 遊牧民 集團들 및 한(漢)인 殘餘勢力 等과 벌였다. 北으로는 扶餘 方面으로 勢力을 뻗쳐나갔다. 當時 夫餘國은 只今의 길림시 一帶에 中心地를 두고 있었는데, 285年 毛用선비의 攻擊을 받아 首都가 陷落되는 等 큰 打擊을 입었다. 그 王이 自殺하고 扶餘人들이 大擧 北 沃沮 方面으로 避難하였다. 곧 이어 秦나라의 支援을 받아 國家를 回復하였다. 이 때 北沃沮 方面으로 避難하였던 扶餘人들 中 一部는 옛 터로 돌아가지 않고 繼續 그 地域에 머물다가 漸次 自立하였으니, 이것이 東扶餘이다. 복국(復國)한 뒤, 扶餘는 北進하는 高句麗의 壓迫을 받게 되었다. 이에 吉林 地域을 抛棄하고, 西쪽 農安 方面으로 그 中心地를 옮겼다.

한便 西北 方面으로 뻗어나가던 高句麗의 氣勢는 毛用선비의 攻勢로 壁에 부딪쳤다. 342年 무筍의 현토성(玄?城) 方面에서 國內城으로 나아가는 交通路 中 比較的 險峻한 南路(南路: 南道)를 통해 進軍해온 慕容皝(慕容?)의 侵攻軍에 高句麗軍이 敗北하여 首都가 陷落되는 等의 큰 打擊을 입었다. 그런데 北路(北路: 北道)를 擇해 侵攻하였던 모용선非軍이 高句麗 主力軍에게 擊破되었기 때문에 慕容皝은 고국원왕(故國原王) 의 아버지인 미천왕(美川王) 의 屍身을 發掘해 가져가고 王의 母后(母后)와 王妃를 人質로 사로잡아 急히 歸還하였다.

故國原王이 곧 首都를 回復하였으나, 모용연(慕容燕)과의 關係에 守勢的인 立場에 놓여졌다. 高句麗에게 打擊을 加한 뒤, 모용연은 346年 農安 方面에 있던 夫餘國을 攻略하여 그 王과 5萬餘 名의 住民을 사로잡아갔다. 크게 弱해진 扶餘는 以後 高句麗에 依支하여 그 命脈을 維持하게 되었다. 이렇듯 4世紀 中盤 搖動平原의 支配權을 둘러싼 鬪爭에서 高句麗는 모용연에게 機先을 制壓당하여, 그 勢力의 膨脹이 沮止되었다. 한便 이 무렵 남에서부터 百濟 의 勢力이 北進해와 樂浪 · 대방 地域을 둘러싸고 高句麗와 爭鬪를 벌리었다. 兩軍은 371年 平壤 一帶에서 激戰을 벌였는데, 이때 故國原王이 百濟軍의 화살을 맞아 戰死하였다.

高句麗 소수림왕代의 改革

高句麗는 徐와 남으로부터 攻擊을 받아 首都가 불타고 그 國王이 戰死하는 等 打擊을 입어, 危機에 빠졌다. 모두루(牟頭婁) 鼓子(高慈) 의 墓誌銘(墓誌銘)에서, 自己 집안의 始祖가 朱蒙의 建國에 寄與하였음과 中始祖가 慕容皝의 侵攻에 對抗하여 功을 세웠음을 强調하였다. 이는 곧 慕容皝의 侵攻에 따른 危機가 當時人들에게 얼마나 深刻하게 認識되고 記憶되었던가를 잘 말해준다.

이런 國家的 危機 狀況에 對處하기 위해 소수림왕(小獸林王) 代에는 몇몇 改革이 推進되었다. 먼저 弱化된 王室의 權威를 높이고 國家的 結束을 圖謀키 위해, 建國 說話와 時調 以來의 王室 系譜를 確立하였다. 高句麗 建國 神話 하백(河伯) 卽 講義 神의 딸인 油畫(柳花) 가 햇빛을 받아 妊娠하여 낳았던 朱蒙이 扶餘에서 迫害를 받아 南下하여 高句麗 地域에서 建國하였고, 그 아들인 有利(琉璃) 가 뒤에 아버지를 찾아 扶餘에서부터 와서 王位를 繼承하였으며, 孫子인 대무신왕(大武神王) 臺에 附與를 攻擊해 擊破하여 그 壓迫에서 벗어나 强大國이 되었다는 內容으로 構成되어 있다. 그間 高句麗 初期史에 關한 이러 저러한 說話가 여러 갈래로 傳해져 왔는데, 그것들을 모아 整理하고, 그 過程에서 扶餘의 東明說話의 많은 部分을 借用하여 修飾하기도 하여, 王室의 公式的인 傳承(傳承)으로 確立하였다. 高句麗 初期의 歷史를 담은 3代에 걸친 張大한 이야기로 構成되어 있는 建國說話의 定立은 곧 高句麗 建國史에 對한 國家的 公人이라고 하겠다.

이와 함께 王室의 系譜를 定立하여 公認하였다. 始祖 朱蒙의 直系 後裔로 이어져오던 桂婁部 王室은 앞서 말했듯이 1世紀 後半 以後 相當 期間의 政治的 混亂을 거친 뒤 태조왕이 再次 統合力을 强化하였다. 以後 태조왕 直系들이 王位를 이어갔고 그들은 事實上 태조왕을 始祖로 하는 系譜意識을 지녔다. 그에 따라 태조왕 移轉 時期 在位하였던 王들과 그들의 系譜에 關한 傳承이 일정치 않았다. 그런 面은 現傳하는 文獻의 短篇에서도 確認된다. 이제 王室이 이 問題를 主導的으로 解消하기 위해 朱蒙王系(朱蒙王系) 태조왕界(太祖王系)를 結合한 單一 王系를 公認하였다.

卽 公式的인 建國 傳承과 王系를 定立하고, 王室의 尊嚴性과 正統性을 確立하여, 現 王室을 中心으로 한 結束을 圖謀하였다. 곧 王室의 正統性과 尊嚴性을 기리는 內容을 담은 建國說話를 確定하고, 王室의 系譜를 定立함을 통해, 敗戰과 王의 戰死 等에 따른 衝擊을 契機로 일어날 수 있는 國內 餘他 政派의 離脫이나 다른 政治的 움직임을 누르고 現 王室을 中心으로 한 政治的 結束을 다지는 效果를 노렸던 것이다. 아울러 現 狀況이 要求하는 偉大한 君主의 모습을 建國說話를 통해 表現하려 하였다. 3代 大武神王이 그 좋은 例이다. 그는 强力한 征服君主로 形象化되었다.

對內的으로는 소수림왕 3年(373)에 律令(律令)을 頒布하였다. 이 때 制定된 律令이 中國 어느 王朝의 律令을 母法(母法)으로 한 것이며, 그 具體的인 篇목이 무엇들이었는지에 對해서는 具體的인 記錄이 없어 推定이 提起될 뿐이다. 그렇지만 굳이 『三國史記』에서 傳하는 이 記事의 寫實性을 否定할 理由는 없다. 律令은 나라의 制度와 刑罰에 關한 規定을 담은 中國王朝의 法律體系이다. 다른 歷史的 · 文化的 背景을 지닌 나라에서 律令을 受容할 때 母法이 그대로 移植될 수는 없고, 받아들이는 나라의 狀況에 맟게 變容하거나 選擇的으로 收容되게 마련이다. 그런 만큼 律令의 頒布가 곧 全體 法律體系를 中國的인 것으로 바꾼다는 것을, 달리 말하자면 나라의 體制를 律令에 立脚한 體制로 全般的으로 바꾸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373年에 中國的인 法律體系人 律令을 頒布한 後 高句麗의 法에는 律令적 要素와 함께 固有法的인 要素도 相當히 있었을 것으로 推定된다. 아무튼 소수림왕 3年에 律令을 頒布하였다는 것은 律令이 志向하는 體制를 追求한다는 意味를 담고 있다. 律令은 血緣이나 出身 地域의 車를 넘어서 普遍的인 性格을 띈 制度와 刑罰體系의 樹立을 志向하였다. 直接的으로는 郡縣制 에 立脚한 齊民(齊民)支配를 志向하였다. 3世紀 末 4世紀 初 以後 高句麗에서는 郡縣制를 志向하는 地方制度의 面貌가 나타나기 始作하였다. 이런 움직임의 延長線上에서 律令이 頒布되었고, 그것은 곧 中央集權的인 支配體制의 確立을 圖謀하겠다는 改革 方向의 提示였다. 그런 意志는 律令반포 한 해 前인 小獸林王 2年(372) 태학(太學) 을 設立한 데서 이에 表明되었다. 中央集權體制의 樹立에 必須的인 要素가 文書行政에 밝은 人力이다. 太學의 設立은 새로운 官僚組織의 擴大에 對備한 人材의 養成 措處였다.

소수림왕臺에 있었던 또 하나의 改革 措置는 佛敎 의 公人이다. 이때 高句麗에 傳해진 佛敎는 北中國에서 盛行하던 이른바 北方佛敎(北方佛敎)였다. 北方佛敎에선 ‘王이 곧 부처임(王卽佛)’을 標榜하였다. 이는 5號16國의 混亂한 時期에 號(胡)足 王朝의 保護를 받으며 佛敎를 傳播하기 위한 方便이었다. 또한 北方佛敎는 豪族 趣向에 맞게 呪術(呪術) 敵이고 祈福的(祈福的)인 要素를 多分히 많이 띠었다. 佛敎는 별다른 抵抗 없이 高句麗에 收容되었으며, 王室이 이를 積極 支援하였다. 王卽佛의 思想은 王室의 天孫意識(天孫意識)과도 符合할 수 있는 바였다. 아무튼 佛敎는 高句麗 領內에 包括된 種族들의 다양한 文化와 信仰을 보다 普遍性을 지닌 宗敎의 世界로 귀合시켜 나가, 高句麗 領內 住民들의 融合을 促進하였다. 아울러 印度 -西域-中國으로 이어지는 傳播 經路를 거치면서 各 地域의 다양한 文化가 녹아져 있는, 當時 最高의 國際文化인 佛敎를 통해 高句麗는 보다 넓고 다양한 世界를 接할 수 있게 되었다.

5世紀∼6世紀 全般 高句麗 中央集權化의 進展

2.3.1. 광개토왕 · 장수왕代의 對外的 膨脹

4世紀 後半 改革을 통해 內的 體制 整備에 注力하였던 高句麗는 391年 광개토왕(廣開土王) 의 卽位와 함께 急激한 對外的 膨脹을 해나갔다. 고국양왕(故國壤王) 臺에 高句麗의 北邊을 斟量하였던 거란을 遠征하여 一部 不足을 攻掠하고 被拉된 高句麗人을 歸還시키었다. 西로는 搖動平野를 둘러싼 爭霸戰에서 慕容氏의 後燕(後燕)을 擊退하고 最終的인 勝者가 되었다. 이어 南으로 勢力을 뻗쳐 백제를 壓迫하여 漢江 下流 以北 地域을 차지하였으며, 나아가 漢江 上流 地域으로 勢力을 뻗치었다. 한便 新羅 가 백제와 왜(倭)의 侵攻을 물리치기 위해 高句麗의 支援을 要請하자, 步兵과 騎兵 5萬을 派遣하였다. 高句麗軍은 新羅 首都를 거쳐 洛東江 下流 地域에까지 進出하여 백제군과 倭軍 및 伽倻 君의 聯合勢力을 擊破하였다.

이 遠征으로 韓半島 南部 地域 住民에 對한 高句麗 朝廷의 理解가 깊어졌으며, 新羅에 깊이 高句麗 勢力을 腐蝕하였다. 아울러 高句麗의 中長期病(重裝騎兵)은 韓半島 南部 地域 여러 나라들의 前歷 整備와 軍事戰略에 큰 影響을 주었다. 한便 東北方으로도 進出하여 東扶餘 를 倂合하였다. 東扶餘는 앞서 말했듯이 附與의 一部 勢力이 豆滿江 流域으로 亡命하여 自立한 나라이다. 高句麗軍이 首都로 밀려오자 東扶餘 王室은 抵抗치 못하고 降伏하였다. 412年 王이 죽자 諡號를 국江上광개토경평안호태王(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 하였다. 卽 ‘국江上(國原)에 陵이 있는, 크게 땅을 넓히고 世上을 平安하게 한 좋은 太王(太王)’이란 意味를 지닌 諡號이다.

이어 卽位한 장수왕(長壽王) 은 427年 平壤으로 遷都하였다. 平壤天道 는 國家의 中心地를 옮긴 것인 만큼 그 自體로 큰 意味를 지녔을 뿐 아니라, 이 以後 高句麗의 對外政策의 方向性을 提示하는 措處로서 意義를 지녔다. 戰略上으로 國內城에서 西쪽으로 魂江 上流로 나가 燒炙하(蘇子河) 流域을 거쳐 무筍 · 瀋陽 方面으로 進出하여 요동 平野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런 뒤 요서(遼西) 地域을 차지하고 內蒙古 草原 地帶로 나아가 몽골高原의 遊牧民 世界의 制壓을 圖謀하는 進出方向이 上程될 수 있겠다. 이와 함께 夭逝에서 西南方의 北中國 方面으로 나가 中國 天下를 놓고 爭霸戰을 벌리는 方略이 上程될 수 있다. 淸나라의 膨脹 過程이 그것을 잘 말해주며, 餘震 族의 金나라度 크게 보면 이런 經路를 醉해 膨脹하였다.

그런데 高句麗는 平壤遷都를 함으로써, 遼河 西쪽으로의 膨脹冊을 積極的으로 推進하지는 않겠다는 것을 闡明하였다. 實際 그 以後 高句麗 朝廷의 對外政策도 그러하였다. 그 代身 韓半島로의 南珍策(南進策)을 强化하였다. 그에 따라 高句麗와 백제 · 新羅 · 伽倻 間의 和戰(和戰) 兩面에 걸친 交流가 增進되었다. 勿論 以後 高句麗가 요서 地域의 政治 情勢에 介入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430年代에 들어 선비족의 탁발氏(拓拔氏)가 세운 北魏(北魏)가 勢力을 東으로 擴張해와 北燕(北燕)을 壓迫하니, 北燕 皇帝 風發(馮跋)李 東으로 高句麗에 援助를 要請하였다. 436年 북위군과 高句麗軍이 北燕의 首都 용성(龍城: 現 朝陽)을 사이에 두고 對峙하다가, 高句麗軍이 먼저 性에 들어가 城內를 席卷하고 北燕 皇帝와 그 住民을 몰아 東으로 歸還한 事件이 벌어졌다.

북위군과 高句麗軍이 直接 武力 衝突을 하진 않았지만, 兩側은 以後 相當期間 동안 尖銳한 對立相을 보였다. 520年代에도 북위의 內紛에 따른 混亂한 狀況에서 高句麗軍이 용성 地域에 進駐하여 많은 數의 그 地域民을 高句麗로 이주시킨 일이 있었다. 그리고 遼河 上流 方面의 거란 部族들 中 一部를 高句麗 勢力 下에 歸屬시켰다. 470年代에는 高句麗가 柔軟(柔然)과 謀議하여 興安嶺山脈(興安嶺山脈) 東麓에 居住하던 지두羽族(地豆于族)을 分割하려는 試圖를 하였다. 그러자 그 南쪽의 해(奚)족과 거란족이 動搖하여 移動하는 等의 紛亂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런 일들은 高句麗가 夭逝地域과 그리고 遼河 上流나 흥안령 地域으로 進出함에 따른 일들이다. 그렇지만 高句麗가 積極的으로 北中國 方面으로의 進出이나 몽골 草原의 制霸를 圖謀하였던 것은 아니다. 全體的으로 보면 몽골高原이나 北中國 方面으로 뻗어나가려 하였다기보다는 그 方面으로부터의 影響力을 遮斷하여 韓半島와 滿洲 地域의 高句麗 勢力圈을 鞏固히 하는데 重點을 두었다.

광개토왕臺 以來로 新羅에 미친 高句麗의 影響은 장수왕臺에도 이어졌다. 慶州平野의 積石木槨墳(積石木槨墳) 에서 出土된 高句麗 遺物들이 그런 面을 證言해준다. 壺杅塚(壺?塚) 의 靑銅 豪雨(壺?), 金冠塚(金冠塚) 의 네 귀 달린 靑銅製 缸아리, 瑞鳳塚(瑞鳳塚) 연수명(延壽銘) 銀그릇(合?) 等은 그런 例이다.

한便 475年 長壽王은 3萬軍을 派遣하여 百濟 首都인 漢城(漢城)을 攻掠하고 개로왕(蓋鹵王) 을 慘殺하였다. 以後 漢江流域의 狀態에 對해서는, 高句麗軍이 歸還한 뒤 漢江 下流 地域은 事實上 放棄되었다는 見解도 있었고, 『三國史記』 백제본기의 記事에 따라 百濟軍이 北進하여 漢江 下流를 回復하였다고 보는 說도 있다. 前者는 漢江 下流 地域에 高句麗 關係 遺跡 遺物이 確認되지 않는다는 點을 根據로 하였다. 그런데 近來 이 地域에서 高句麗 遺跡이 多數 發見되어 더 以上 이 說은 成立하지 않는다. 後者의 境遇, 551年 百濟軍이 다시 漢江 下流 地域을 奪還하였을 當時 이 地域에 高句麗軍이 駐屯하고 있었고 6個의 行政 單位(郡)가 設置되어 있었던 만큼, 475年 以後 얼마 안 있어 백제가 奪還하였다고 斷定키 어렵다. 475年에서 551年 사이 期間 中, 地域에 따라 그 具體的인 樣相에서는 變動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漢江 下流 地域에는 高句麗의 支配力이 미치고 있었다.

漢江 上流 地域은 475年 以前부터 高句麗의 勢力이 뻗치고 있었다. 나아가 竹嶺(竹嶺) 을 넘어 榮州 · 奉化 · 營養 · 蔚珍 · 盈德 慶北 北部 地域에까지 그 影響力이 미쳤다. 高句麗는 錦江 上流의 淸州市(淸州市) 淸原區(淸原區: 옛 淸原郡 ) 方面으로도 勢力을 뻗쳐 男性골에 酸性을 築造하니, 그에 對應해 맞은 便 報恩 地域에 新羅가 486年 三年山城(三年山城) 을 築造하였다.

이렇듯 5世紀 終盤 高句麗가 南으로 韓半島의 中部 地域을 席卷하고 繼續 남陣勢를 보이자 이에 對應해 百濟 · 新羅 · 伽倻가 聯合하여 對應하는 樣相을 나타냈다. 한便 高句麗는 西北 方面에서는 거란족의 一部 不足을 그 影響力 下에 두었으며, 中 · 東部 滿洲 의 靺鞨 部族들 多數를 服屬시켰다. 그와 함께 高句麗는 韓半島와 滿洲 地域에 걸친 獨自的인 勢力圈을 形成하였다. 이런 形勢는 5世紀 末 6世紀 初 물길(勿吉)의 成長에 따른 變化가 일어나기도 하였지만 大體로 6世紀 中盤까지 維持되었다.

2.3.2. 地方制度의 整備

4勢期待 以來로 持續되었던 對外的 膨脹으로 廣大한 領土를 確保한 高句麗 朝廷은 中央集權體制의 構築에 注力하였다. 中央 官署組織의 擴充과 함께 擴大된 領域을 地方制度로 編制하여 統治해나갔다. 高句麗 發祥地였던 鴨綠江 中流 地域은 5部의 自治力 弱化와 함께 曲(谷)을 單位로 地方官이 派遣되었다. 4世紀가 進展되면서 領土가 늘어난 一部 變更地域에 築城(築城)을 하고 城을 中心으로 周邊 地域을 包括하는 地方統治 單位가 設定되었다.

4世紀 以後 6世紀 全般에 이르는 時期에 軍(郡)制가 高句麗 領內에, 모든 地域은 아니지만, 相當히 널리 施行되었다. 이 時期 軍制가 施行되었음은 모두루墓地(牟頭婁墓誌) 에 具體的으로 ‘軍(郡)’이란 表現이 있고, 漢江 流域 16個 ‘軍’의 存在나 高句麗 後期 武官職인 ‘末藥(末若)’ 을 一名 ‘群頭(郡頭)’라 한 것 等의 事實을 통해 確認할 수 있다. 當時 軍 아래에 몇 個의 下位 姓이 있었고, 그 아래 寸(村) 等이 있었던 것으로 把握되어진다. 軍에 派遣된 地方官이 搜査(守事) 였던 것 같다. 軍은 通常的으로는 性(城)이라 稱하고 그 地方官의 稱號를 통해 君임을 나타내었다.

地方制度의 施行은 피복속민을 地域單位로 編制하여 支配코자 한 措處이며, 이는 곧 피服屬 地域의 住民과 土地에 對한 일정한 支配權을 中央政府가 掌握함을 意味한다. 律令이 頒布된 以後에는 그에 立脚해 地方官이 地域民을 統治하였다. 곧 中央集權的 領域國家體制의 樹立과 齊民支配(齊民支配)를 志向하였던 것이다. 中原高句麗碑(中原高句麗碑) 에 보이는 ‘大王國土(大王國土)’라는 表現은 이를 象徵的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는 高句麗의 地方支配가 公納 除籍人 것에서 租稅 制로 轉換되었음을 뜻한다. 한便 高句麗 勢力 下에 있던 말갈족과 一部 거란족은 地方制度 바깥에 存在하면서 그 族長을 통해 間接的으로 支配되어 貢納과 軍事的 助力을 하였다.

軍制는 6世紀 中盤 以後 變化가 있게 되었다. 中央政界의 再編과 함께, 搜査는 더 以上 쓰이지 않게 되고, 褥薩(褥薩: 都督) , 處閭近支(處閭近支: 刺史) , 壘初(婁肖: 縣令) 等이 새로 地方官의 名稱으로 登場하였다. 褥薩과 處閭近支 等은 軍政權과 민정권을 함께 지니고 있었으며, 그 치소(治所)가 山城 안에 있는 境遇가 적지 않았다. 地方制度와 軍事制度가 密接히 聯關되어 있어, 軍事國家的인 面貌를 剛하게 띠었다. 高句麗 末期 戰爭이 長期間 持續되는 狀況에서 漸次 廣域의 地域別 防禦體制를 構築해야 할 必要性이 增大함에 따라, ‘褥薩’李 主宰한 城을 中心으로 多數의 城들을 統括하는 廣域의 行政 · 軍事區域이 編成되는 傾向을 보였다. 667年에 作成된 一種의 전황표(戰況表)인 ‘目錄’에서 보듯, 褥薩의 性을 가르킨 ‘週(州)’라는 새로운 名稱이 登場한 것도 이런 面을 말해준다.

2.3.3. 高句麗 支配層의 天下觀(天下觀)

5世紀代를 통해 高句麗는 韓半島와 滿洲 地域을 包括하는 獨自的인 勢力圈을 構築하였다. 이를 背景으로 高句麗 支配層은 獨自的인 天下觀을 形成하였다. 이 天下觀은 當時 高句麗를 둘러싼 客觀的인 形勢가 反映된 것인 同時에, 高句麗 對外政策 樹立에 基本 土臺로 作用하였다. 天下觀은 國內外의 現實 政治秩序에 對한 認識을 담은 것이다. 具體的으로 自國의 性格이 어떠하고, 國際社會에서 自國과 隣接國과의 關係를 어떻게 設定하며, 이 世界가 어떻게 構成되어 있나를 開陳한 것이다. 5世紀臺의 金石文(金石文) 에서 이에 關한 高句麗人의 意識이 記述되어 있다.

먼저 高句麗人들은 自身들의 나라가 다른 나라들보다 優越한 價値를 지녀 天下 四方에서 가장 神聖하다고 主張하였다. 그 주된 論據로 萬有를 主宰하는 新人 天帝(天帝)가 高句麗 王室의 祖上神이며, 高句麗王은 天帝의 神聖한 핏줄을 이은 ‘天孫(天孫)’임을 내세웠다. 이런 天孫이 다스리는 나라는 餘他 周邊國들보다 優越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自己 나라를 神聖한 天孫局으로 여김은 곧 周邊의 나라나 集團들은 마땅히 高句麗에 服屬하여야 할 存在들로 規定하는 意識과 連結된다.

그래서 高句麗 支配層은 자국과 周邊國과의 關係를 上下 朝貢 關係(朝貢關係)로 規定하였다. 高句麗를 中心으로 上下 朝貢秩序를 形成한 그러한 國際情勢를 維持하는 것을 ‘數千(守天)’, 卽 天帝의 뜻을 지켜나가는 것이라고 하였고, 高句麗王은 ‘數千’의 主體임을 自負하였다. 또한 中原高句麗碑에서 新羅를 東이(東夷) 라 하였음에서 보듯이, 高句麗와 朝貢國을 對備해 이를 火(華)와 이(夷)로 表現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때 ‘火’와 ‘李’는 어디까지나 政治的 關係에 依據한 區分일 뿐이었다. ‘大王國土’ 住民의 存在 樣態가 新羅 · 百濟 住民의 그것과 社會的 · 文化的으로 顯著한 差異가 있어서 그렇게 表現한 것은 아니었다.

한便 當時 高句麗人들은 그들이 알고 있는 世界 卽 東아시아는 몇 個의 天下로 構成되어 있다고 여겼다. 몽골高原의 遊牧民들의 天下, 中國人들의 天下, 그리고 高句麗를 中心으로 한 天下 等이 그것들이다. 이들 間의 關係에서 中國的 天下의 相對的인 優位性을 認定하지만, 基本的으로 各 天下는 竝存하여야 하는 存在로 보았다. 實際 이 時期 高句麗는 中國의 남 · 북조 및 몽골高原의 유연과 各各 交流하면서 東아시아 國際情勢의 勢力均衡 狀態를 維持케 하는 方向에서 對外關係를 推進하였다. 具體的으로 말하면, 當時 가장 講對하고 膨脹的인 北緯와 密接한 交涉을 하면서, 다른 한便으로는 中國의 南朝와 유연의 連結을 도와주는 等 북위의 膨脹을 牽制하여, 國際 情勢의 急激한 變化를 막아 韓半島와 滿洲 地域에서 獨自的인 勢力圈을 維持하려 하였다.

또한 이런 多元的 天下觀(多元的 天下觀)에 依해, 高句麗人들은 自身들의 天下에 屬한다고 여긴 周邊 나라들에 對해서는 自然 그 바깥에 있는 集團들과 區別하여 認識되었다. 그러한 側面이 客觀的인 地理的 · 文化的 · 政治的 및 種族系統的 側面 等과 結付되어, 新羅 · 百濟 · 東扶餘 · 北扶餘 等에 對해 一定한 同類(同類)意識을 形成케 해주었다.

아무튼 高句麗 支配層의 天下觀은 古墳壁畫 의 構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假令 통구四神塚(通溝四神塚) , 집안오회분(集安五灰墳) 4號墳, 講書大廟(江西大墓) 等의 壁畫 構成은 黃龍과 北極星으로 象徵되는 五防衛 宇宙觀과 天下觀이 反映되어 있다. 卽 中央을 象徵하는 天聽에 黃龍과 北斗三星(北斗三星)李, 四方의 고임돌에 四神圖(四神圖) 와 별자리들이 그려져 있다. 王이나 그에 準하는 人物이었던 被葬者가 누워 있는 이곳이 宇宙의 中心이라는 表現이다. 죽은 者에 對한 表現은 現世에 對한 意識을 나타낸 것으로써, 當時人들이 지닌 天下觀의 反映이었다.

高句麗 後期 貴族聯立政權體制로의 變化

6世紀 後半 高句麗의 情勢 變動

3.1.1. 王位繼承 紛爭과 內憂外患

6世紀가 進展되면서 高句麗는 政治的 安定이 흔들리고, 貴族들 間의 葛藤이 激化되는 모습을 나타냈다. 531年 안장왕(安藏王) 이 被殺되고 그 동생인 안원왕(安原王) 이 卽位하였다. 貴族 間의 葛藤은 안원왕 臺에도 持續되었다. 안원왕 末年인 544年 12月 마침내 그것은 大規模 정란(政亂)으로 噴出되었다. 안원왕은 세 名의 王妃가 있었는데, 첫째 王妃는 所生이 없었고, 둘째 王妃와 셋째 王妃가 各各 아들을 두었다. 當時 貴族들이 各各 이 두 王子를 中心으로 勢力을 結集하여, 이를 追求(?群)과 細君(細群)으로 불리었다. 王의 病이 危重해지자, 추군과 細君은 서로 먼저 王宮을 掌握하여 優勢한 地位를 先占하려 하였다. 마침내 兩側 間의 武力衝突이 宮門 앞에서 벌어졌다. 以後 3日間 首都에서 兩側 間의 激烈한 對決이 벌어졌고, 秋軍이 勝利하여 政局을 掌握하였는데, 이듬해 初 8歲의 어린 王子가 卽位하니, 이가 양원왕(陽原王) 이다. 敗北한 細君 側의 被殺者가 2千餘 名에 達하였다.

首都에서의 戰鬪는 一段落되었지만, 紛爭의 餘波는 地方 各地에서 이어졌다. 그래서 551年 當時 漢江 上流의, 아마도 忠州地域의 寺刹에 머물고 있던 僧侶 惠諒(惠亮) 이 進擊해온 新羅軍에 投降하면서 “우리나라는 정란으로 언제 亡할지 모르겠다”라고 하였던 것은 그런 側面을 잘 말해준다. 이렇게 高句麗 內政이 混亂에 빠진 틈을 타, 百濟와 新羅가 551年 北進을 斷行하였다. 백제는 漢江 下流 6個 君을 차지하였으며 新羅는 漢江 上流 10個 君을 攻取하였다.

그런데 이무렵 高句麗는 西北方面에서부터 또 다른 威脅에 直面하였다. 北齊(北齊) 문선제(文宣帝)가 552年과 553年에 걸쳐 遼河 上流 地域의 해(奚)와 거란에 對한 大規模 討伐戰을 展開하고, 창려性을 直接 巡視하여 遼河 線을 壓迫하였다. 이와 함께 552年에는 外交的 壓迫을 加해 北緯 末期인 520年代에 高句麗로 넘어온 北緯 流民(流民) 5千 號를 다시 刷還해갔다. 거란의 一部를 麾下에 두고 있던 高句麗에 對한 直接的인 威脅이었다.

한便 이 時期 몽골高原에서 새로운 變動이 일어났다. 그間 高句麗와 友好的 關係에 있던 유연이 滅亡하였다. 유연의 피복속민으로서 야철業(冶鐵業)에 從事하며 알타이 山脈 서남록 準가르 草原에서 勢力을 키워왔던 突厥(突闕)李 興起하여, 552年 옛 像全國人 柔軟을 擊破하였다. 이 활기찬 新興 遊牧帝國은 早晩間 흥안령을 넘어 遼河 流域으로 그 勢力을 擴大할 氣勢였다. 草原에서의 勢力交替에 따른 波長은 急速히 四方으로 퍼져나갔다. 新興 突厥의 影響力이 高句麗 麾下의 거란과 靺鞨에 뻗쳐오고 나아가 高句麗 本土에까지 밀려들어 온다면 深刻한 危機 狀況이 到來할 수도 있게 된 바이다.

550年代 初에 進行된 이러한 一連의 內憂外患의 狀況에 對處하기 위해 高句麗 貴族들은 方案을 摸索하였다. 먼저 貴族들 間의 內訌을 中斷하고 그들 間의 葛藤을 收拾하기 위해 實權者의 職印 代代로(大對盧) 를 貴族들 肝에서 選任하는 措處를 取하였다. 그리고 防禦力이 크게 强化된 平山城(平山城) 形態의 새로운 首都 建設을 提起하였다. 旣存의 宮城은 동평양(東平壤)의 안학궁(安鶴宮) 터 자리에 있었고, 宮城 外郭에 市街地가 照映되어 있었다. 새로운 首都는 只今의 平壤 中心部에 位置하며 宮城과 市街地 全體를 羅城(羅城) 으로 둘러싸는 그러한 形態였다. 實際 新 首都인 長安城(長安城) 으로 薦度가 이루어진 것은 30餘 年이 흐른 뒤인 586年이었다.

對外的으로는 南北 두 方面에서 맞이하는 외침의 危機에서 벗어나기 위해, 南쪽의 新羅와 平和 協商을 試圖하였다. 마침내 新羅와 密約(密約)을 맺었다. 兩國 間 和平關係를 맺는 條件으로, 高句麗는 이미 喪失한 漢江 流域에 對한 領有權과 그리고 咸興平野를 包含한 東海岸 一帶를 新羅에게 넘겨주기로 한 것 같다. 新羅로서도 平野地帶이고 中國과의 交通路를 確保할 수 있어, 백제의 占領地인 漢江 下流 地域이 貪이 났던 것이다. 이런 兩國이 平和 協約을 맺었다는 事實은 『三國遺事(三國遺事)』 와 『新唐書(新唐書)』 신라전, 『日本書紀(日本書紀)』等에서 傳하고 있고, 眞興王巡狩碑(眞興王巡狩碑) 摩雲嶺碑(摩雲嶺碑) 에서도 “隣接國이 信義를 誓約하고, 平和의 使節이 오고 갔다”고 하였다.

이어 553年 百濟가 占領한 漢江流域을 新羅가 奇襲的으로 攻擊하여 차지하였다. 오랜 宿願인 故土回復에 成功하였지만, 곧이어 同盟國 新羅의 攻擊으로 이를 喪失하게 되니, 百濟 聖王(聖王) 은 크게 憤怒하였다. 이듬해 백제군과 伽倻軍 및 1千餘 名의 倭軍을 動員한 百濟의 反擊前이 벌어졌다. 百濟軍은 管山城(管山城: 忠北 沃川) 에서 新羅軍의 埋伏에 걸려 壞滅的인 敗北를 當하였다. 이 때 性王都 捕虜가 되어 處刑되었다. 管山城戰鬪 以後 新羅와 百濟 間에는 해를 이은 攻防戰이 벌어졌다. 그에 따라 高句麗의 南部 國境 一帶는 安定을 찾게 되었다. 그런 뒤 高句麗는 主力을 西北으로 돌려 突厥의 侵攻에 對備하여 危機를 克服할 수 있게 되었다.

3.1.2. 貴族聯立政權 體制 形成

양원왕 卽位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貴族들 間의 紛爭은 內外의 危機狀況에 直面하자 代代로 先任制를 媒介로 한 貴族들 間의 折衝에 依해 收拾되었다. 그런데 이 妥協策이 暫定的인 收拾案에 不過하였던 것이 아니라 그 뒤까지 큰 影響을 주었다. 6世紀 後半의 狀況을 傳하는 『周書(周書)』 高麗箭에서 “大對盧는 剛한 者와 弱한 者가 相爭을 벌여 이긴 者가 스스로 就任하며 王이 臨命치 못한다”고 하였다. 『舊唐書』 高麗箭과 『翰苑』에 引用된 「高麗技(高麗記)」 等에서도 같은 內容을 좀 더 詳細히 傳한다. 卽 6世紀 後半 以後 國政을 總括하는 職任人 大對盧를 3年마다 高位 貴族들이 選任하였음을 傳하고 있다.

이에 비해 『魏書』 高句麗傳 等 6世紀 前半 以前의 狀況을 傳하는 司書에서는 이런 記事가 보이지 않는다. 王權이 江大河였던 6世紀 以前 時期에는 大對盧가 貴族들 肝에서 選任되지 않았거나, 選任되었더라도 大對盧의 地位가 權力의 中樞이지 않았음을 뜻한다. 그런 狀態에서 變化가 생겨, 양원왕 卽位를 둘러싼 貴族들 間의 大規模 紛爭을 거친 後, 大對盧가 貴族들의 理解를 調整하고 代表하는 地位가 되었고, 大對盧를 3年마다 選任하는 慣行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大對盧의 職任을 잘 遂行하면 連任도 可能하다고 하였다. 卽 有力 貴族이 勢力을 維持하면 繼續 執權할 수 있었다. 6世紀 後半 以後 一種의 貴族聯立政權體制(貴族聯立政權體制)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大對盧의 選任은 곧 聯盟體腸 選任의 乳劑(遺制)를 되살린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選任의 主體는 中央貴族이었다. 貴族聯立政權 下에서 貴族들의 權力이 强化되고 王權이 크게 萎縮되었지만, 地方割據 狀態가 아닌 中央集權的인 國家體制가 維持되었다. 6世紀 後半 以後 새로운 貴族들이 前面에 擡頭하였는데, 연개소문(淵蓋蘇文) 집안도 6世紀 後半 以後 頭角을 나타낸 新興 貴族이었다.

3.1.3. 對外關係 上에서의 變化

6世紀 後半 以後 高句麗를 둘러싼 國際情勢에서 두드러진 變化의 하나는 新羅의 躍進이었다. 新羅는 漢江流域을 차지한 後 中國王朝와의 交涉을 活潑히 展開하였다. 特히 南朝와의 交涉에 置重하였던 從前과는 달리 北朝와의 交涉도 展開하였다. 그에 따라 北齊(北齊)는 565年 진흥왕 을 “사지절도독동이교위낙랑군공신라왕(使持節都督東夷校尉樂浪郡公新羅王)”으로 冊封하였다. 이에서 留意되는 것은 從前에 中國王朝의 高句麗王에 對한 冊封벼슬에서 慣行的으로 주어지던 “동이敎委(東夷校尉)”나 “동이中郞將(東夷中郎將)” 等 동이를 主管한다는 벼슬이 新羅王의 冊封 벼슬로 주어졌다는 點이다.

勿論 當時 中國王朝의 冊封號가 實際的인 意味를 지닌 벼슬은 아니었지만, 東이 問題는 高句麗에 一任한다는 姿勢에서 이제 高句麗만이 交涉의 對象이지는 않다는 式의 變貌를 나타내었다. 當時 백제도 北齊와의 交涉에 積極的으로 나섰다. 이런 新羅와 百濟의 움직임에 對應하여 高句麗는 南朝의 陳(陳)과의 交涉을 强化하였다. 한便으로는 오랫동안 交涉이 없던 倭國과 公式的으로 通交(通交)하여 570年에서 574年 사이에 세 次例 使節을 派遣하였다. 이 亦是 新羅를 牽制하기 위한 意圖를 지녔다. 한便 東쪽으로 進擊해오는 突厥를 擊破하여 그 東陣勢를 沮止하는 데 成功하였다.

專制的으로 볼 때 6世紀 後半 以後 高句麗의 對外關係의 狀況은 從前과 다른 面이 많아졌다. 三國間의 關係는 從前의 高句麗에 對抗해 新羅 · 百濟 · 伽倻가 聯合하던 形態에서 三國이 各個 躍進하는 狀況이 되었다. 그러나 백제와 新羅 間의 相쟁이 熾烈해짐에 따라, 高句麗 南部 國境 一帶는 相對的으로 安定되어졌다. 北齊와의 關係도 北齊 自體가 突厥의 壓力을 防禦하는데 注力해야 했던 만큼, 高句麗와의 葛藤은 저절로 수그러들었다. 突厥의 膨脹勢力 또한 東으로는 高句麗에 依해 沮止되었고, 南으로는 萬里長城을 넘지 못한 線에서 머물렀다.

이처럼 6世紀 中盤 以後의 情勢變動은 旣存의 國際關係의 틀에 相當한 衝擊을 加하였지만, 根本的인 變化를 가져오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581年 수(隋)帝國의 登場은 旣存 東아시아 國際 秩序를 根本的으로 뒤흔드는 狀況 變化를 惹起하였다. 그와 함께 高句麗의 對外關係도 激流에 휩싸이게 되었다.

高句麗와 수(隋)의 戰爭

581年 수(隋)가 建國되었고, 이어 東突厥(東突闕)을 擊破, 服屬시켰다. 나아가 589年 南中國의 陳(陳)을 統合하였다. 三百餘 年 만에 强大한 統一中國王朝가 登場하였다. 統一中國帝國의 登場은 隣接한 나라들의 安保에 深刻한 威脅이 되었다. 高句麗는 眞意 滅亡 消息에 바로 戰爭 準備에 着手하였던 것은 그런 危機意識에서였다. 統一中國帝國의 登場은 旣存의 國際秩序에 對한 根本的인 再編을 요하였다. 卽 5∼6世紀 臺에 維持되었던 多元的 勢力均衡 狀態를 打破하고, 中國王朝 中心의 一元的인 秩序를 確立하려 하였다.

그間 多元的 勢力均衡 狀態를 支撐하던 主要 勢力들인 몽골초원의 遊牧民 國家, 南中國의 王朝, 北中國의 王朝, 티베트 高原 東北 赦免의 吐谷渾(吐谷渾), 韓半島와 滿洲의 高句麗 中에서 高句麗를 除外하고 모두 秀帝國에 統合되거나 擊破 · 服屬되었다. 그럼으로써 高句麗에 對한 數의 壓迫이 加重되었다. 이런 狀況에 對處하기 위해 高句麗는 突厥과의 協力을 통해 秀帝國을 牽制하려는 試圖를 하였다. 그러나 現實的으로 水의 勢力 下에 屈服한 突厥이 더 以上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數와 高句麗 間에 戰爭이 勃發하자, 오히려 水軍의 一員으로 參戰하여 高句麗遠征에 動員되었다. 高句麗와 數의 對決은 後者의 네 次例에 걸친 侵攻으로 進行되었다.

隋나라는 水陸 兩 方面으로 大兵을 動員하여 速戰速決로 一擧에 高句麗를 멸망시키려 하였다. 그에 對應해 高句麗는 城郭을 中心으로 한 防禦戰을 벌였다. 그리고 一面으로는 敵의 最大 弱點인 긴 補給船을 攪亂, 遮斷하면서 가을이 되어 추위와 普及 不足에 시달리게 되기를 기다리는 長期 持久戰을 펼쳤다. 이에 躁急해진 敵軍이 別動隊(別動隊)로 無理한 浸透 奇襲戰을 벌리면, 이를 內陸 깊숙이 誘引하여 打擊을 加하는 方策을 取하였다. 이런 高句麗의 作戰에 말려 水軍은 番番이 敗北하였다. “搖動에 가서 헛되이 죽지마라(無向遼東浪死歌)”가 隋나라 末期 民衆 들 사이에 널리 流行하였음에서 보듯, 高句麗 侵攻에서의 거듭된 敗北와 戰爭에 따른 苦痛과 財政破綻이 主要 原因이 되어 秀帝國은 滅亡하였다.

高句麗와 數의 戰爭에서 留意되는 點은 兩國 間의 戰爭이 韓半島 內의 三國關係에 直接的으로 큰 影響을 미치지 못하였다는 事實이다. 百濟와 新羅는 數에 請兵하여 高句麗를 攻擊할 것을 要請하기도 했다. 그러나 實際 水軍이 高句麗를 侵攻할 때, 이에 副應해 高句麗 南部 國境을 攻擊하는 形態의 共同 作戰을 展開하지는 않았다. 정작 戰爭이 벌어졌을 때 백제와 新羅는 모두 한 걸음 물러서 情勢를 觀望하는 姿勢를 堅持하였다. 아무튼 秀帝國의 登場에 따른 東아시아 國際秩序 再編의 움직임은 高句麗에 依한 水軍 擊退에 依해 沮止되었고, 遼河 移動으로 그 影響을 끼치지는 못하였다.

高句麗 淵蓋蘇文의 執權

3.3.1. 政變

數를 이어 登場한 黨(唐)은 混亂에 빠진 中國을 再次 統合하고, 이어 隋나라 末期 以後 强盛해진 突厥을 擊破하여 몽골 草原의 遊牧民 社會를 制壓하였다. 이런 過程을 거치는 동안 黨과 高句麗 사이에는 平和가 持續되었고, 唐高祖(高祖) 이연(李淵)은 “黨과 高句麗가 各其 自己의 領土를 지키며 平和 共存하는 것이 옳다고 하면서, 自身은 굳이 高句麗를 迅速(臣屬)시키려 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런 平和共存論은 곧 黨의 臣僚들의 이념적인 反對에 逢着하였으며, 이어 糖이 國內를 統一하고 周邊의 隣接國들을 征服해나가자 高句麗 征伐論이 剛하게 提起되었다. 그런 흐름의 中心에는 당태종(太宗) 李世民(李世民)이 있었다. 그는 突厥의 힐리可汗을 擊破한 뒤, 몽골 高原 遊牧民集團의 首長들로부터 630年 遊牧世界의 敗者라는 意味를 지닌 ‘千加한(天可汗)’으로 推戴되었다. 이제 그는 農耕世界와 遊牧世界를 아우른 ‘皇帝-千加한’이 되었다.

이에 膨脹해오는 黨의 勢力을 沮止하기 위한 手段으로, 高句麗 朝廷은 631年 2月 北으로 부여성(夫餘城) 에서 東南으로 바다에 이르는 千里長城(千里長城) 을 쌓기 始作하였다. 그러자 이해 7月 黨 調整은 夭逝地域에 高句麗가 만든 景觀(景觀)을 破壞하였다. 이 景觀은 高句麗를 侵攻해왔다 戰死한 水軍(隋軍)의 屍體를 모아 쌓고 그 위에 흙을 덮은 것으로써 高句麗에게는 一種의 戰勝記念塔的인 性格을 지닌 것이었다. 이 時點에 景觀을 破壞하는 黨의 措處는 明白히 高句麗에 對한 威脅이고 挑發이었다. 이에 高句麗 朝廷은 大陸 情勢의 推移와 黨의 政策을 더 銳意 注視하였다.

이어 黨은 吐谷渾을 擊破하였고, 나아가 640年에는 천산北路(天山北路)에 있는 고창국(高昌國)을 竝呑하고 그 地域에 郡縣을 設置하였다. 이제 事實上 黨의 西部와 北部 方面에 있던 主要 나라들을 大部分 竝呑한 셈이 되었다. 黨의 다음 예봉이 어디로 向할 것인지를 능히 斟酌할 수 있는 狀況이 되었다. 李世民은 다음해 641年 5月 高句麗에 직방郎中(職方郞中) 진대덕(陳大德)을 派遣하였다. 직방郎中은 兵部 所屬으로서 國內外의 主要 軍事施設을 包含한 지도 製作을 管掌하는 職으로서 軍事情報 蒐集의 實務를 總括하였다. 그는 高句麗에 入境한 뒤, 山川 地理와 軍事施設 住民動向 等에 關한 廣範圍한 情報를 蒐集하여 돌아가 報告하였다. 그 때 당태종은 곧 高句麗에 對한 征伐戰을 敢行하겠다는 欲望을 露骨的으로 開陳하였다.

한便 진대덕이 平壤城을 訪問하였을 무렵 고창국 滅亡 消息을 接한 高句麗의 傷하는 크게 唐慌하였다. 다가올 國家的 危機에 어떻게 對處할 것인가 라는 問題는 貴族들 間의 內訌을 觸發하였다. 當時 高句麗 朝廷은 淵蓋蘇文의 去就를 둘러싸고 葛藤이 깊어지고 있었다. 앞서 淵蓋蘇文이 그의 父親의 職任人 東部대인(東部大人: 褥薩) 職을 繼承하려 했는데, 강대한 연개소문 집안의 勢力과 그의 威勢를 두려워한 다른 貴族들이 拒否하였다. 이에 淵蓋蘇文이 무리에게 呼訴하여 艱辛히 繼承할 수 있었다. 그 뒤 그의 勢力이 强化되어가자 威脅을 느낀 王과 다른 貴族들이 謀議를 하여 그를 除去하고자 하였다. 먼저 그를 千里長城 監役(監役)으로 임명하여 一旦 中央政界로부터 分離시키려 하였다.

自身을 向한 壓迫이 加重되어지자, 642年 10月 淵蓋蘇文은 査閱을 한다면서 貴族들을 招致한 뒤 府兵(部兵)을 動員해 貴族들을 大擧 殺戮한 뒤, 宮城을 侵犯하여 영류왕(營留王) 을 죽이고 保障王(寶藏王) 을 擁立하였다. 그는 莫離支(莫離支: 太大兄) 로서 大模達(大模達: 大將軍) 에 就任하여 軍權을 쥐었으며, 代代로와 貴族會議를 無力化시켰다. 그리고 重裏題(中裏制)를 施行하여 實權을 掌握하였다. 重裏題는 朝廷의 公式的인 官署組織(外朝)과는 別途로 宮中에 設置하여 內助(內朝)라 할 수 있는 王 直屬 行政組織이라고 여겨진다.

中央에서의 政變에 成功하였지만, 地方 各地에 있는 그의 反對勢力에 對한 討伐이 必要하였다. 有名한 安市城(安市城) 城主는 그의 反對派였다. 淵蓋蘇文은 安市城에 對한 軍事的 攻擊을 敢行하였지만, 勝利하지는 못하였다. 이에 兩者는 妥協을 통해 事態를 마무리하였다. 淵蓋蘇文은 그를 安市城主로 認定하고, 그는 淵蓋蘇文이 새로운 執權者임을 承服하는 線에서 折衝이 이루어졌던 것 같다.

3.3.2.연개소문과 金春秋의 平壤城 會談

그 무렵 남으로부터 新羅의 金春秋(金春秋) 平壤城 을 찾아왔다. 642年 8月에 백제의 攻擊을 받아 대야성(大耶城) 이 陷落되고 金春秋의 사위인 그 성주가 죽는 等 커다란 打擊을 입어, 新羅의 洛東江 西便 支配權이 흔들리는 狀況이 벌어졌다. 이에 金春秋는 高句麗에 援兵을 要請하기 위해 平壤城을 訪問하였던 것이다. 淵蓋蘇文은 그를 歡待하였고, 모처럼 兩國의 政治 實勢들 間에 談判이 벌어졌다. 金春秋는 高句麗가 相爭을 中止하고 和平關係를 맺으며 軍事的 支援을 해줄 것을 要請하였다. 淵蓋蘇文은 竹嶺 以北 高顯(高峴) 以南의 漢江 流域을 新羅가 高句麗에 돌려준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應酬하였다. 金春秋가 이를 拒否함에 따라 모처럼의 談判은 無爲로 돌아갔다.

이듬해 高句麗가 백제와 協力하여 新羅의 臺當 交通路인 당항성(黨項城)을 攻擊하였다. 이에 孤立된 新羅가 黨에 援兵을 要請하였고, 黨이 이에 積極的으로 應하려는 姿勢를 보였다. 이제 黨이 介入함에 따라, 더 以上 新羅와 高句麗 間에 妥協이 進展될 餘地가 없어지게 되었다. 黨의 高句麗 侵攻이 臨迫한 狀況에서 스스로 찾아온 金春秋의 提案에 對한 淵蓋蘇文의 拒否는 高句麗로 하여금 南北에서 敵을 맞이하게 하는 運命的인 選擇이었다. 이는 高句麗의 安危에 致命的인 것이 되었다. 淵蓋蘇文이 이런 選擇을 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流血 政變을 거쳐 執權한 그로서는 對外强勁策이 自身의 政權을 안정시키는 데 有效하다고 判斷하였던 데서 비롯하였던 것 같다.

高句麗와 黨의 戰爭

3.4.1. 645年의 戰爭

高句麗의 政變과 뒤이은 新羅의 黨에 對한 救援 要請은 高句麗 侵攻의 機會를 노리던 黨에게 좋은 機會를 提供하였다. 黨은 數次例 外交的 壓力을 加하고 高句麗가 그것을 拒否하는 過程을 거쳐 名分을 쌓은 뒤, 마침내 644年 7月 高句麗 遠征을 宣布하고 物資와 兵力을 動員하기 始作하였다. 大略 20餘 만에 達하는 唐軍(唐軍)은 水陸 兩面으로 侵攻을 祈禱하였다. 水軍(水軍)은 山東半島에서 遼東半島 南端을 攻擊하는 길을 取하였고 陸軍은 遼河를 건너 搖動平野로 나아가는 길을 取하였다. 黨의 先鋒將인 移籍(李勣)은 平坦한 北路 길을 擇해 遼河를 건너 只今의 푸순 고이山城(高爾山城) 神聖(新城) 을 攻擊하였다. 城을 陷落시키지 못하였으나 이곳에 高句麗軍을 묶어둔 뒤, 그 南쪽의 蓋牟城(蓋牟城) 을 攻掠하고 이어 요동성(遼東城) 을 包圍하였다.

한便 唐太宗 李世民의 本軍은 中路 길을 擇해 遼河를 건너 바로 요동성으로 밀려들었다. 熾烈한 攻防戰 끝에 遼東省을 陷落시키고 이어 白巖性(白巖城) 도 攻略하였다. 그 다음으로 安市城을 向해 進擊하였다. 搖動벌에서 平壤으로 나아갈 때 取하는 平坦한 대로의 길목에 安市城이 位置하고 있는 만큼, 이 城의 陷落은 戰略的으로 매우 重要하였다. 한便 이 무렵 高句麗 中央軍 15萬이 安市城으로 接近해왔다. 安市城 郊外에서 벌어진 兩軍의 回戰에서 당군의 機動力과 包圍戰術에 휘말려 高句麗軍은 司令官 以下 3萬 7千名이 捕虜로 잡히는 等 大敗를 當하였다. 唐軍은 勝勢를 몰아 安市城 攻掠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頑剛한 安市城民들의 抵抗으로 陷落시키지 못하고 攻防戰이 長期間 持續되었다.

그러던 中 陰曆 9月에 접어들면서 搖動 平原에 서리가 내리기 始作하였고, 再次 戰列을 整備한 高句麗軍이 包圍網을 좁혀오며 당군의 補給船을 威脅하였다. 한便 그間 淵蓋蘇文이 精誠을 쏟았던 薛延陀(薛延陀)에 對한 工作이 效果를 나타내기 始作하였다. 卽 淵蓋蘇文은 몽골 高原의 터키界 遊牧種族人 薛延陀에게 莫大한 物資를 提供하면서, 當時 당군의 主力이 搖動으로 나가있는 동안 防禦力이 弱化된 黨의 觀衆(關中) 地域을 奇襲 攻略할 것을 慫慂하여 왔다. 薛延陀의 움직임이 尋常치 않고, 安市城 陷落을 期約할 수 없으며, 추위와 補給品 部族이 닥쳐오고 있는 狀況에서 唐軍은 迅速한 撤收 外에 代案이 없었다. 撤收는 莫大한 被害를 同伴하였다.

한便 搖動 戰線에서 戰鬪가 熾烈하게 展開되던 이 해 5月에 戰爭의 불꽃이 韓半島 中部 地域으로 옮겨 붙었다. 新羅軍 3萬이 臨津江 을 넘어 北進하였다. 新羅는 644年 黨으로부터 ‘參戰하여 躁病(助兵)하라’는 要求를 받아왔다. 그러나 新羅 調整은 쉽게 決定을 내리지 못하였고, 645年 2月에도 出兵 督促을 받았다. 正統性을 둘러싼 論難에서 自由롭지 못하던 선덕여왕(善德女王) 으로서는 參戰 與否와 그 結果가 境遇에 따라 엄청난 政治的 負擔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마침내 善德女王은 參戰을 選擇하였다.

그런데 新羅軍이 北進하자 百濟軍이 그 空白을 노려 新羅에 對한 攻擊을 敢行하였다. 백제 亦是 黨으로부터 造兵할 것을 要求받았는데, 行動으로서 백제의 選擇을 分明히 하였다. 645年 4月 唐軍이 遼河를 건너 高句麗 性에 對한 攻擊을 敢行하였다. 이어 5月에 戰爭의 불꽃은 韓半島 內의 三國關係에 直接 옮겨 붙었다. 나아가 6月에는 倭國에서 政變(大化改新)이 일어나 日本列島에 까지 그 波長이 뻗쳐 나갔다.

3.4.2. 高句麗 · 百濟 · 왜의 連帶 形成

撤收한 뒤에도 당태종은 高句麗 征伐을 抛棄하지 않았다. 이番 侵攻을 통해 그는 高句麗를 一擧에 征服한다는 것이 不可能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에 그는 새로운 方案을 案出하였다. 그 하나는 長期消耗戰이다. 卽 小規模 單位의 兵力을 高句麗 邊境 地域이나 海岸地帶에 投入하여 치고 빠지는 것을 되풀이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高句麗人이 제대로 農事를 지을 수 없게 되고, 지치게 될 것이며, 그런 뒤 大規模 遠征軍을 投入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高句麗 南部 國境地帶에 强力한 第2電線을 構築하여, 그 防禦力을 分散시키고 遠征軍의 最大 弱點인 軍需品 調達을 남으로부터 받을 수 있게 한다는 方案이다. 그럴 때 새삼 注目되는 것이 新羅와 新羅軍의 價値이다.

新羅의 金春秋는 高句麗에 이어 647年 倭國으로 건너가 兩國 間의 關係 改善을 위한 協商을 試圖하였지만 별다른 成果를 얻지 못하였다. 이에 648年 黨으로 건너가 李世民과 論議하여 兩國 間에 軍事同盟을 맺었다. 新羅 調整은 黨의 連呼와 官服을 採用하는 等 積極的인 親堂政策人 한화政策(漢化政策)을 施行하였다. 新羅의 끈질긴 努力에도 不拘하고 倭國은 끝내 黨-新羅 축에 加擔치 않았으며 旣存의 百濟-高句麗 축에 友好的 關係를 維持하는 立場을 堅持하였다. 이런 두 陣營으로 갈라져 對峙하는 狀態는 660年 백제 滅亡戰을 거치면서 終局을 向해 치닫게 되었다.

高句麗의 滅亡

오랜 唐과의 戰爭으로 高句麗는 크게 疲弊해졌다. 黨의 軍事的 壓迫을 牽制할 目的으로 北아시아 草原 國家들과 同盟을 맺는 方案은 繼續 追求되었다. 우즈베키스탄 의 사마르칸트 市 外郭에 있는 아프라시압 언덕의 宮殿 維持(遺址)의 壁畫에서 確認되는 高句麗 使臣의 모습은 그러한 切迫한 試圖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 成果는 如意치 않았다. 特히 660年 백제의 滅亡으로 高句麗의 戰略的 位置는 더 惡化되었다. 이어 661年 唐軍이 侵攻해와 平壤城을 包圍하였다. 그런데 이어 겨울철이 되자 唐軍은 高句麗軍에게 擊破되고 逆으로 高句麗軍에 依해 包圍되었다. 食糧마저 떨어져가고, 本國과의 補給線이 遮斷된 危機狀況에 몰렸다. 그때 남으로부터 新羅軍이 進擊해와 軍需品을 補給해주니, 그것을 먹으며 漸進的으로 退却할 수 있었다. 새삼 신라군의 戰略的 重要性이 浮刻되는 狀況이었다.

그러나 이제 侵攻軍이 冬季 作戰도 벌일 수 있게 되어 高句麗의 戰略的 位置는 크게 惡化되었다. 狀況이 惡化되니 淵蓋蘇文의 後繼構圖에 對한 關心이 커져갔다. 淵蓋蘇文은 아들들에게 일찍부터 各級 單位 機關이나 部隊의 指揮官職을 歷任케 하였다. 長男인 男生(男生) 中裏小兄(中裏小兄) , 中裏大兄(中裏大兄) 을 거쳐 23歲에 中裏位頭大兄(中裏位頭大兄) 이 되었고 이듬해 將軍이 되었으며, 28歲에 莫離支( 太大兄 ) 三軍隊將軍(三軍大將軍)이 되었으며, 연개소문 死亡 直後인 665年 32歲로 太大莫離支(太大莫離支) 가 되어 軍國(軍國)을 總括하였다. 次男인 南山(男産) 도 비슷한 過程을 걸었다. 三南人 男建(男建) 도 비슷한 길을 걸었을 것이다.

이런 昇進의 길을 세 아들에게 열어준 것은 이들이 軍權을 掌握할 수 있게 하려는 意圖에서였다. 남생이 莫離支 三軍大將軍이 된 해가 바로 백제 滅亡 이듬해였다. 이 해에 남생이 三軍大將軍으로서 黨의 침공군을 防禦하는 役割을 맡게 하여, 軍權을 實際的으로 掌握케 하였다. 그러면서 淵蓋蘇文은 南山과 男建에게도 軍權을 移管하여, 세 아들 모두가 軍國 運營에 參與할 수 있게 하였다. 세 아들이 軍權을 나누어 掌握하고 서로 協力하여 國政을 이끈다면 延氏 집안의 權力은 더욱 탄탄해질 것이라는 期待를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結果는 反對로 나타났다.

연개소문 事後 남생이 665年 太大莫離支가 되어 軍國 大權을 掌握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동생인 南山 · 男建과 權力 鬪爭을 벌이다가 밀리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國內城에서 反旗를 들고 黨에 投降하여 救援을 要請하였다. 千載一遇의 機會를 맞은 黨은 666年 9月 軍隊를 보내어 男生을 支援하였다. 그에 따라 遼河에서 國內城에 이르는 高句麗 西北部 깊숙이 黨의 勢力이 뻗쳐 들어온 形勢가 되었다.

高句麗 中央政府는 軍隊를 派遣하여 男生軍에 對한 攻擊에 나섰다. 그러나 옛 首都인 國內城은 天惠의 要塞로서 外部에서 攻掠하기 어려우며, 무엇보다 조금 前까지 高句麗 最高 權力者이던 남생이 叛亂을 主導하는 狀況이다 보니 鎭壓이 어려웠다. 男生은 667年 黨에 入朝하였다. 以後 男生은 高句麗 內部 事情을 속속들이 黨에 알렸고, 당군의 香徒(嚮導)가 되어 積極 協力하였다. 이처럼 男生 兄弟들 間의 泥田鬪狗가 持續되자 南녘을 지키던 淵蓋蘇文의 동생 연정토(淵淨土) 가 離脫하였다. 그는 666年 12月 自身의 管轄區域人 咸鏡南道 南部 一帶와 江原道 北部 地域 12城을 들어 新羅에 投降하였다.

그런데 內紛이 터진 뒤에 이를 收拾하기 위한 어떤 積極的인 措處도 마련되지 못하였다. 이런 樣相은 20餘年에 걸친 淵蓋蘇文의 執權과 無關할 수 없다. 淵蓋蘇文은 大規模 流血 政變으로 執權한 後 强力한 權力을 構築하려 하였고, 權力을 아들이 世襲하게 하였다. 이 過程에서 抑壓的 權力行使는 不可避하였다. 自然히 餘他 貴族들의 不滿을 惹起하였으며, 무엇보다 旣存 權力 裝置를 무력화하였다. 연개소문에게 集中된 權力은 그가 죽자 엄청난 權力 空白을 招來하였다. 그의 아들 사이에 權力 鬪爭이 벌어졌을 때, 葛藤을 調停한다든가 어느 한 篇으로 힘을 몰아주든지 하여, 權力의 混沌狀態가 빨리 終結되게 하는 데에 王이나 貴族會議 等 어떠한 權力 裝置도 제대로 作動하지 못하였다.

最高 執權層 內部에서 일어난 分裂과 背信, 投降은 高句麗人들의 抵抗力을 마비시켰으며, 오랜 동안의 戰亂으로 疲弊해진 高句麗 社會에 敗北主義를 蔓延케 하였다. 한便 667年 2月 移籍이 이끈 大規模 黨의 侵攻軍이 遼河를 건너 神聖을 包圍하였다. 神聖은 오랜 抵抗 끝에 그해 9月에 內部 投降者들의 降伏에 依해 陷落되었다. 唐軍은 요동성 方面을 거쳐 鴨綠江 河口로 進擊하였다. 그에 따라 遼河 移動 高句麗 領域 內에 두텁고 깊게 黨의 占領地가 마련되어졌다. 이어 이듬해 봄에는 北으로 北部女性 一帶가 唐軍에 依해 攻掠되어졌다.

唐軍은 이제 平壤城을 向한 總進軍에 나섰다. 이런 당군의 進擊에 步調를 맞추어 新羅軍이 南에서 北進하였고, 平壤 南쪽의 대곡성(大谷城)과 漢城(漢城) 等 2軍 12性이 熊津都督府(熊津都督府) 로 投降하였다. 이제 平壤城을 向해 나아가는 南北 兩 方面의 進擊路에 防禦壁이 없어졌다. 드디어 唐軍과 新羅軍에 依해 平壤城이 包圍되었다. 이어 9月 21日 平壤城 防禦를 總括하던 將帥가 投降함에 따라 마침내 平壤城이 陷落되었다.

高句麗復興運動과 遺民의 向方

高句麗를 멸망시킨 뒤 黨은 平壤城에 安東都護府(安東都護府) 를 設置하고 2萬의 兵力을 駐屯시켰다. 그런 뒤 5部 176星 69萬 戶의 옛 高句麗國을 9都督府(都督府) 42(州) 100絃(縣)으로 再編하고, 高句麗人으로서 黨에 投降하거나 協力한 者를 都督(都督) · 自社(刺史) · 懸鈴(縣令)으로 임명하여 表面에 내세우고 黨인(唐人) 官吏가 實際的으로 統治하도록 措處하고 安東도호가 이들을 總括케 하였다. 새로이 行政單位를 區劃하는 等의 일에는 長安에 머물던 남생이 깊이 干與하였다.

安東都護府는 高句麗人들의 反撥을 源泉的으로 약화시키고 黨의 支配를 圓滑히 하기 위한 方策으로 富裕하고 힘 있는 高句麗人 2萬 8千餘 號를 黨의 內地에 大擧 强制 이주시키는 政策을 敢行하였다. 이는 高句麗人 社會를 뿌리채 뒤흔들었고, 高句麗人의 强力한 反撥을 불러일으켰다. 高句麗 遺民의 反撥은 두 가지 形態로 나타났다. 하나는 積極的으로 黨의 支配에 對한 武力 抵抗이었다. 다른 하나는 黨의 支配 網에 벗어나기 위해 다른 地域으로 移住하는 것이었다.

前者의 境遇, 平壤 一帶를 中心으로 한 검모잠(劍牟岑)의 蜂起 가 그 한 例이다. 遼東地域에서도 安市城을 爲始한 蜂起가 있었고, 부여성 一帶에서도 蜂起가 잇따랐다. 高句麗 遺民들의 武力 蜂起는 復興運動軍이 相互 連帶하는 組織性의 不足과 優勢한 당군의 武力에 밀려 673年 무렵까지는 鎭壓되었다. 한番 國家가 崩壞되면 그것을 代替할 組織體를 構成한다는 것은 지난(至難)한 일이다. 征服者가 恣行한 抑壓과 掠奪에 따른 고통스런 現實은 高句麗人의 抵抗을 觸發하였으나, 70年에 걸친 長期間의 戰亂으로 疲弊해진 民力(民力)과 最高 支配層의 背信的 行爲를 經驗한 이들에게 國家나 그에 準한 組織體에 對한 믿음과 相互 信賴感을 回復하는 데에는 더 많은 時間을 요하였다. 무엇보다 나와 내 家族의 安慰와 來日을 保障해줄 것이라는 確信을 構成員 個個人의 가슴 깊이 심어주는 데에는 長期間의 獻身과 승리에 對한 實際的 經驗이 必要하였다. 그러나 强力한 敵軍은 그런 時間的 餘裕를 주지 않고 밀어붙였던 것이다.

한便 班當(反唐) 抵抗運動 過程에서 多數의 高句麗 遺民이 다른 地域으로 移住해갔다. 그들의 移住는 小規模 單位로 이루어졌고 相當期間 동안 進行되었다. 이들의 向方은 몇몇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新羅로 合流한 이들이다. 이에는 그들의 原住地가 新羅에 倂合됨에 따라 함께 歸俗케 된 이들이 있고, 668年 前後 以來로 一連의 激動에서 연정토 一波나 安勝(安勝) 의 무리와 같이 集團的으로 新羅로 來投한 이들이 있었다. 戰爭 捕虜로 잡혀온 이들도 적지 않았다. 高句麗復興運動 에 參與하였던 이들 中 相當數는 唐軍에 밀리자 新羅로 넘어와 新羅軍에 合流하였다. 新羅와 黨의 戰爭이 終結된 676年 以後에도 黨의 支配에 抵抗하던 高句麗 遺民이 散發的으로 小規模 單位로 新羅로 넘어왔다. 668年 以後 高句麗 流民으로서 新羅에 合流한 이들의 數字가 얼마나 되는지 正確히 알 수는 없다.

둘째, 渤海(渤海) 建國과 함께 渤海人이 된 이들이다. 이들은 高句麗 滅亡 後에도 繼續 原住地인 東部 滿洲地域에 居住하던 集團과, 大祚榮(大祚榮) 集團같이 夭逝地域으로 옮겨져 居住하다가 東으로 脫走한 集團, 그리고 요동方面에서 東部 滿洲 地域으로 옮겨온 이들이 있었다. 셋째, 日本列島로 移住해간 이들이다. 險한 바다를 건너간 보트피플 같은 難民이었던 이들은 日本列島 여러 곳에 定着하여 生을 이어갔다. 關東地域의 가나가와縣에 있는 考慮절터(高麗寺址)는 이 地域에 定着하였던 高句麗 遺民들의 存在를 證言하고 있다. 이곳은 日本朝廷으로부터 高麗王(高麗王)이라 性[姓: 카바네(かばね)]을 받았던 藥狂(若光)의 一族이 定着하였던 地域이다.

넷째, 黨의 내지로 强制 이주된 集團이다. 이들은 크게 關內道(關內道) · 弄右島(?右道) 等에 옮겨진 이들과 淮河(淮河) 流域 等 江 · 回(江 · 淮) 方面에 配定된 이들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前者를 보면 只今의 陝西省(陝西省) 西部와 甘肅省(甘肅省) 方面에 定着케 되었다. 이 地域은 티베트의 吐蕃(吐蕃)과 몽골高原의 遊牧民 勢力의 連結을 遮斷하는 긴 回廊地帶이자 農耕과 牧畜이 함께 行해지던 곳으로서, 실크로드의 要地이다. 黨은 高句麗人의 軍事的 能力을 活用하기 위해 이 地域에 정착시키고, 一種의 地域 自衛를 위한 地方病因 團結病(團結兵)으로 編成하였다. 有名한 將軍인 고선지(高仙芝) 는 이 地域에 定着케 된 高句麗人의 後裔였다. 江 · 回 方面으로 옮겨진 이들은 淮河 流域의 荒蕪地에 定着하여 生活을 꾸려나갔다.

다섯째, 몽골高原 突厥의 支配 하로 移住해간 이들이다. 이들은 黨의 支配를 避해 集團的으로 옮겨갔는데, 그 中에는 고문간(高文簡) 처럼 묵鐵加한(??可汗)의 사위가 되어 ‘高麗王莫離支(高麗王莫離支)’라 稱한 이들도 있었다. 이들 中 고문간, 高空의(高拱毅) , 固定部(高定傅) 等이 各各 이끄는 高句麗人 集團은 突厥에서 內紛이 일어나자 몽골高原을 떠나 糖으로 來投하여 內몽골 地域에 정주하였다. 여섯째, 요동 地域에 그대로 繼續 머문 이들이다. 이들은 668年 以後 黨의 安東都護府 統治를 받았는데, 여러 次例 抵抗과 黨 乃至로의 强制 移住를 겪었고, 많은 이들이 東部 滿洲나 몽골高原 및 新羅로 移住해가 安東都護府 管內에는 가난한 少數만 남게 되었다. 일곱째, 高句麗에 近接한 榮州(營州) 方面에 옮긴 이들이다.

黨 내지로 끌려갔거나 突厥로 갔다가 黨으로 흘러들어간 이들의 運命은 여러 形態를 보였다. 676年 黨은 韓半島에서 撤收한 뒤 遼東地域에 對한 支配力을 再建하기 위한 一連의 措置를 取하였다. 그 一環으로 寶藏王을 ‘요동都督 조선군왕(遼東都督朝鮮郡王)’으로 봉해 677年 黨 내지로 옮겨졌던 高句麗 遺民과 함께 搖動에 歸還시켜 高句麗 遺民들을 안정시키는 役割을 맡겼다. 寶藏王은 요동에 歸還한 뒤 얼마 안 있어 옛 복속민이었던 속말말갈(粟末靺鞨)과 連結하여 黨에 反對하는 擧事를 圖謀하려 하였다. 그러나 發覺되어 다시 黨 내지로 流配되었고, 寶藏王과 함께 歸還했던 高句麗 遺民은 다시 黨 내지로 强制 移住되었다.

한便 黨에 끌려간 뒤 個人的인 力量을 發揮하여 고선지, 王母中(王毛仲), 百濟 流民인 흑치상지(黑齒常之) , 沙陀(擇)衝 等과 같이 크게 立身한 이들도 있었다. 이들의 出世는 黨帝國의 國際性과 開放性으로 말미암아 한결 容易하였다. 그러나 外形上의 開放的 雰圍氣에서도 黨 社會 內面에 흐르는 한족의 排他性 때문에 蔑視와 侮蔑이 甚하였으며, 大槪 逆謀 等의 嫌疑로 悲慘한 最後를 맞이하였다.

邊境地帶에 居住하게 된 高句麗 遺民들은 集團的으로 定着하였는데, 周圍에 相對的으로 低級한 文化를 지닌 北方 種族들이 居住하였고 한족의 文化的 壓迫이 相對的으로 덜하였으므로, 比較的 後代까지 高句麗人의 正體性을 維持할 수 있었다. 이들은 때에 따라 獨自的 勢力으로 登場하기도 하였다. 榮州 地域에 定着하였던 大祚榮 集團이 그러하였다. 繼續 領主地域에 머물렀던 이정기(李正己) 집안의 境遇, 안록산(安祿山)의 亂 以後 頭角을 나타내어, 산동 地域으로 옮겨 몇 代에 걸쳐 獨自的인 軍閥로 君臨하였다.

이렇듯 一部 高句麗流民들은 이런 저런 자취를 조금 남겼지만, 黨에 끌려간 高句麗 遺民의 大多數인 一般民은 將卒들에게 戰爭捕虜로 주어져 奴隸로 處分되기도 하였고, 邊境地帶나 荒蕪地에 集團 定着하였다.

한便 高句麗의 支配 下에 있던 말갈족 社會도 高句麗 滅亡 後 큰 變化가 있었다. 7世紀 代의 말갈 7部 中 第一 西쪽에 居住하던 속말말갈은 그 一部가 糖으로 强制 移住되었고, 一部는 原住地에 있으면서 高句麗 復興運動과도 關係를 지니는 等 激烈한 陣痛을 겪었으며, 一部는 唐軍에 從軍하는 等 다양한 樣態를 나타내어 全體的으로 分散되어졌다. 黨의 領主地域으로 移住하였던 속말말갈인들은 7世紀 末 大祚榮 集團과 함께 東으로 脫走하여 渤海를 建國하는 데에 一翼을 擔當하였다. 白山말갈(白山靺鞨)은 일찍부터 高句麗에 協力하였던 關係로 戰爭 被害를 甚하게 받아, 高句麗 滅亡 後 그 무리의 多數가 糖으로 끌려갔다.

安車骨部(安車骨部), 號室部(號室部), 伯咄部(伯?部) 等의 靺鞨 部族들은 高句麗에 協力하여 戰爭에 參與하였던 만큼, 668年 以後 그間 말갈 社會에 介入하여 作用해왔던 高句麗의 勢力과 組織이 崩壞되자 말갈족의 旣存 秩序도 維持될 수 없게 되었다. 오히려 高句麗에 協力하였던 關係로 다른 말갈족 村落들의 離脫과 抵抗을 받게 되어 “分散 微弱”하게 되었다. 그 代身 철리부(鐵利部) · 월희部(越喜部) 等과 같은 새로운 靺鞨 部族들이 頭角을 나타내었고, 高句麗 影響圈 바깥 地域에 있던 黑手部(黑水部)가 强盛해졌다.

그러나 가장 强盛하다는 黑手靺鞨度 大酋長이 없이 열여섯 部落으로 나뉘어 自治를 營爲하였다. 全體的으로 보면 다른 말갈족度 같은 形便이었다. 이런 狀態에서 高句麗 遺民들이 小規模 單位로 繼續 東部 滿洲地域으로 流入하여 各地에 分散 定着하였다. 歲月이 흘러 戰爭의 傷痕이 回復되면서, 이들이 지닌 높은 生産力과 文化는 이 地域 社會에 새로운 活力素가 되었다. 新羅와 黨의 戰爭 結果에 따라 7世紀 中盤 이 地域은 國際的으로 힘의 空白狀態가 되었고, 各地에 散在한 高句麗 遺民과 말갈족 村落들이 各地에 散在하여 自治를 營爲하는 狀態가 持續되었다. 이들 集團들을 아우르는 새로운 政治的 求心力의 形成은 夭逝地域에서 脫走해온 大祚榮 集團의 登場을 기다려야 하였다.

高句麗史의 歷史的 意義

668年 平壤城이 陷落되고 高句麗가 滅亡한 뒤 黨은 그 곳에 安東都護府를 設置하였다. 平壤 땅에 外國의 統治機構가 設置된 것은 B.C. 108年 古朝鮮(古朝鮮) 이 亡하고 樂浪郡 조선현(朝鮮縣)이 設置된 以後 776年 만이다. 樂浪郡과 安東都護府는 同一하게 平壤地域에 設置한 中國王朝의 統治機構였지만, 이 支配 機構를 設置하는 過程은 兩者가 判異한 面을 보였다. 卽 韓帝國이 古朝鮮을 멸망시키는 데 陸軍 5萬과 海軍 8千이 動員되어 1年餘의 攻防戰이 所要되었다. 平壤 地域에 設置되었던 樂浪郡은 그 뒤 400餘年을 持續하다가 313年에 高句麗에 依해 構築되었다.

그에 비해 668年 平壤城 陷落에는 數와 黨 2個 王朝에 걸쳐 70年이 所要되었다. 統一中國王朝인 數는 高句麗 遠征에서의 敗北가 主要 原因이 되어 滅亡하였다. 黨은 오랜 戰爭 끝에 新羅의 도움을 받아 平壤城을 陷落시킬 수 있었다. 이어 設置된 安東都護府는 不過 8年 만에 高句麗復興運動軍과 新羅에 밀려 滿洲地域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이런 差異를 낳게 된 것은 무엇보다 B.C. 108年과 A.D. 668年 사이에서 일어났던 變化에 起因한다. 卽 古朝鮮 社會와 中國의 戰國時代 社會 間에는 懸隔한 文化的 · 物質的 隔差를 보였다. 陳 · 한제국이 成立한 뒤에도 그 隔差는 如前하였다. 그 結果는 古朝鮮의 滅亡과 恨郡縣의 設置로 나타났다.

西紀前 108年 以後 예 · 맥 · 한족의 여러 集團들은 한便으로 恨郡縣의 先進文物을 受容하고 한便으로는 한군현의 支配에 抵抗하면서 自己社會의 發展을 圖謀하여, 中國 社會와의 隔差를 좁혀나갔다. 先頭에서 이런 움직임을 이끌어나간 것이 高句麗였다. 高句麗의 文化는 新羅 · 百濟 · 伽倻 等에 傳해져 그들의 發展을 牽引하였다. 三國時代의 後半에 들어서, “文字와 武器가 中國과 같다”라는 象徵的 表現이 含蓄하고 있듯이, 韓國 古代社會는 中國 古代社會와 별다른 큰 隔差 없이 對等한 競爭을 벌일 수 있었다. 그에 따라 高句麗의 70餘 年에 걸친 水 · 唐帝國과의 抗爭, 이은 羅唐戰爭을 遂行할 수 있었던 바이다.

西紀 前後 무렵부터 668年에 이르는 高句麗의 存立期間은 三國時代의 大部分을 占하는 期間이었다. 이 期間 동안 高句麗國은 작은 城邑國家 에서 韓半島와 滿洲地域을 아우르는 큰 領域國家로 成長하였고, 그 領域 內의 예(濊) · 맥(貊) · 한(韓)系의 여러 集團들과 一部 韓人(漢人)과 말갈인들을 融合하여 高句麗人이라는 보다 큰 單位의 族屬을 形成하였다. 그와 함께 韓半島와 滿洲 地域의 여러 갈래 文化를 收斂하고 中國과 西域의 文物을 받아들여, 獨自的인 文化를 建設하였다. 高句麗 文化는 新羅 · 百濟 · 伽倻와 바다건너 倭國에 影響을 주었으며, 말갈족은 高句麗 文化의 訓育을 받으며 成長하였다. 곧 高句麗는 古代 中國社會와 古代 韓國社會 間의 發展의 隔差를 克服하는데 中心的 役割을 하였고 獨自性과 國際性이 豐富한 文化를 建設하였으며, 高句麗人은 韓國人의 形成에 한 軸이 되었다.

고구려의 문화

高句麗의 文學과 藝術

高句麗의 漢文學

高句麗에서 이른 時期부터 漢字 를 使用하였던 것 같다. 2世紀 中盤 高句麗의 官人으로 主婦(主簿) 가 보이는데, 主婦는 元來 現(縣)의 속리(屬吏)의 職名이었다. 懸吐君의 支配에서 벗어난 뒤, 이 俗吏의 名稱을 襲用하여 高句麗王 麾下의 實務行政을 主管하는 官印의 職名으로 삼았던 것 같다. 具體的으로 各 時期 文書行政의 普及이 어느 程度인지는 具體的으로 알 수 없지만, 高句麗 國家의 成長에 따라 漸次 그 普及이 擴大되었을 것이다. 4世紀 後半 소수림왕臺에 律令을 頒布하고 太學을 세웠는데, 이는 文書 行政의 普及을 前提로 한 措處였다. 그런 만큼 漢字와 漢文 普及이 相當히 進展되어진 狀態였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律令의 반포와 地方制度의 擴充에 따라 漢文은 管理의 必須 敎養이 되었다. 佛敎의 公人과 함께 漢譯(漢譯) 佛經(佛經) 의 普及 또한 漢文 普及을 促進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漢文 使用이 널리 行해지면 질수록, 口語와 文語 사이의 不一致에 따른 不便함을 克服하기 위한 努力으로, 漢字의 陰과 勳(訓: 새김)을 빌어서 우리말을 記錄하는 借字表記法 이 使用되었다. 처음에는 指名 · 人命 · 官命 等의 表記에 쓰였다. 이어 吏讀(吏讀) 와 같은 表記法이 高句麗에 나타나게 되었고, 이것이 新羅에 傳해져 더 進展된 形態로 發達하였다.

한便으로 漢文學(漢文學) 이 發達하였다. 이 時期 漢文學 作品으로는 限時(漢詩) 와 非文 等이 傳해지고 있다. 隋나라 將帥에게 보낸 을지문덕(乙支文德) 의 詩는 老子(老子)의 『道德經(道德經)』 의 句節을 援用한 높은 品格을 보여준다. 유리왕 黃鳥歌(黃鳥歌) 는 男女間의 애틋한 愛情을 表現하였다. 高句麗의 鼻紋으로서는 廣開土王陵碑(廣開土王陵碑) 中原高句麗碑(中原高句麗碑) 가 있고, 墓地(墓誌)로서 中級 貴族인 모두루(牟頭婁)의 墓地 等이 傳해진다. 莊重한 隸書體(隸書體) 의 廣開土王陵碑는 이 時期 漢文學의 높은 水準을 말해주는 代表的인 作品이다. 高句麗의 起源과 廣開土王의 勳績을 簡潔하게 壓縮해서 表現한 部分은 飼料로서도 높은 價値를 지닌다.

漢文學의 代表的인 作品은 歷史書이다. 高句麗에서 遺棄(留記) , 新集(新集) 等의 司書가 編纂되었으나, 그 實體가 穩全히 전해지지는 않는다. 그 內容은 몇 次例의 傳承 過程을 거치면서 潤色되어, 그 一部가 中世史書人 現傳하는 『三國史記』에 反映된 것으로 여겨진다.

高句麗 古墳壁畫

高句麗의 古墳은 그 나름으로 綜合藝術의 結晶體였다. 特히 石室封土墳(石室封土墳) 이 그러하다. 積石塚의 境遇, 素朴한 武器團 積石塚에서 將軍塚(將軍塚) 과 같은 精製된 아름다움을 지닌 階段式 積石塚에 이르기까지 西紀前 3世紀에서 西紀 5世紀 前半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時期의 築造樣式을 보여준다. 積石塚에 이어 古墳의 주된 樣式이 된 것은 石室封土墳이다. 石室封土墳 中에는 무덤 안길과 무덤房의 四方 壁과 天障에 壁畫를 그렸던 것들이 있다. 大部分 平壤과 집안 一帶 地域에 密集해 있는데, 現在까지 알려진 數字는 90餘 基(基)에 達한다.

古墳壁畫는 그 素材에 따라 生活風俗圖, 裝飾文樣度, 使臣도 等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初期 古墳壁畫의 주된 話題(畵題)는 生活風俗圖였다. 이어 裝飾文樣度, 四神圖 順으로 주된 話題가 變遷해갔다. 生活風俗圖에서는 墓主의 家庭生活 모습, 그의 幕僚 · 下人 等의 人物도, 外出 때의 行列圖, 사냥하는 모습, 戰鬪도, 卯酒 人物像, 城郭도, 家屋 모습 等이 그려져 있어, 當時 生活相을 생생히 傳해준다. 이들 初期 古墳壁畫는 막돌을 쌓아올린 무덤 壁面에 두텁게 膾를 바른 뒤 膾가 채 마르기 前에 그려졌다. 安岳3號墳 , 춤무덤, 씨름무덤 等이 代表的인 初期 壁畫古墳이다.

後期에는 墓室 壁面의 고르게 다듬은 板石에 바로 그림을 그리는 式이 流行이었다. 오회분 4號妙와 5號妙, 講書大廟 等은 雄渾한 畫筆과 빼어난 色感의 壁畫로 有名하다. 이들 古墳壁畫를 통해 볼 때 高句麗 後期의 壁畫에는 生動感과 力動性을 지닌 活力이 如前하였다. 곧 文化的인 側面에서 高句麗가 內部的으로 이미 氣力이 衰殘해져 亡國의 길로 접어들었던 것이 아니라, 목 잘린 해바리機처럼 外部勢力의 侵略에 依해 滅亡되었음을 느낄 수 있다.

古墳을 크게 築造하는 것은 來世를 現世의 秩序가 그대로 이어지는 世界로 보는 계세적(繼世的) 來世觀에 따라 죽은 者가 來世에서 福樂을 누릴 수 있도록 많은 物資와 사람 等을 넣고 屍體를 잘 保管하기 위해서였다. 佛敎나 道敎 等이 퍼지면서 이런 계세적 來世觀을 떨치고, 來世는 現世와는 質的으로 다른 世界라고 認識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佛敎的인 前生적(轉生的) 來世觀이나 道敎思想에 따른 乘船적(昇仙的) 來世觀이 퍼져나갔고, 그런 面은 壁畫 內容에도 反映되어 연화前生도(蓮花轉生圖)나 勝先導(昇仙圖) 等이 그려졌다. 四神圖는 中國에서 韓代 以來로 流行하던 바로서, 道家的(道家的) 世界觀의 影響을 나타낸다.

高句麗의 音樂과 춤, 놀이文化

古墳壁畫에는 音樂 · 춤 · 巧藝 等에 關한 內容이 그려져 있어 高句麗 文化의 一端을 엿볼 수 있다( 高麗樂 , 百戱 ). 357年에 만들어진 安岳3號墳의 무덤 안길에 꼬는 動作으로 춤을 추면서 樂器를 연주하는 소그드人 舞踊手가 그려져 있고, 장천 1號墳 現實 北壁 上段에 채찍을 든 사람이 假面을 쓴 사람을 따라가는 소그드 對面劇의 한 場面이 그려져 있다.

角觝塚 , 舞踊塚 , 安岳3號墳 等 比較的 이른 時期의 生活風俗圖 壁畫에서 씨름 수박(手搏) 이 主要 部分을 且置하고, 이어 장천1號墳, 수산리 , 약수리 , 팔청리 壁畫 等 相對的으로 늦은 時期의 것들에선 다양한 재주와 曲藝를 主 內容으로 하는 백희기惡도(百戱伎樂圖)가 그려져 있다. 씨름과 수박이 主要 構成要素였던 雜戱(雜戱)에, 西域(西域: 中央아시아)으로부터 傳해진 다양한 道具와 動物을 利用한 曲藝 나 假面劇이 追加되면서 더욱 다양해져 이를 通稱해 百戱라고 불렀다. 巧藝를 하는 西域人들이 實際 高句麗에 往來하였던 것 같고, 西域의 音樂과 춤은 相當한 影響을 미쳤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高句麗의 百戱가 新羅에 影響을 주고 高麗로 이어졌던 것 같다.

高句麗의 建築-性

高句麗人들이 最大의 努力을 기울인 築造物은 城郭(城郭)이다. 姓은 平地城(平地城) · 酸性(山城) · 平山城(平山城) 等으로 나눠지는데, 高句麗 誠意 大部分이 酸性으로서, 山의 稜線을 活用해 城壁을 쌓았다. 高句麗 山城의 多數가 古老봉식(??峰式) 또는 砲穀食(包谷式)이라 불리는 形態를 지녔다. 卽 뒤에 높은 駐봉우리를 背景으로 해서 溪谷을 끼고 左右 稜線을 따라 내려와 平地에 닿게 하는 城壁을 築造하여, 城內에 일정한 空間과 水原(水源)을 確保하는 形態이다. 模樣이 安樂椅子처럼 보인다.

城壁 築造 材料에 따라 石城(石城), 土星(土城), 土石혼축性(土石混築城)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山城은 둘레가 1∼2百 미터에 不過한 보루성(堡壘城)에서부터 10㎞가 넘는 大型 酸性에 이르기까지 여러 種類가 있다. 大型 酸性들은 적지 않은 境遇 地方 行政單位의 치소(治所)였던 것 같다. 城壁의 아랫部分은 들여쌓기로 쌓았으며, 치(雉)와 甕城(甕城)이 있는 例도 있다. 平地城인 遼東省의 境遇, 요동성銃(遼東城塚) 壁畫에 그 平面圖가 傳해져, 全貌를 아는데 도움이 된다. 平山城은 平地城과 酸性을 結合한 形態로서 電子의 便理性과 後者의 防禦에 容易함을 結合한 獨特한 面貌를 지녔다. 平壤城(長安城) 의 境遇가 그 典型이다. 長安城은 그 內部가 北城(北城) · 耐性(內城) · 中性(中城) · 外姓(外城)으로 이루어졌으며, 中聲과 外城에는 井然한 區劃이 지워져 計劃都市의 面貌를 確然하게 보여준다.

高句麗의 民俗

高句麗의 民俗으로서 後代에까지 이어져 온 것으로 率壻魂(率壻婚)的인 婚俗(婚俗)과 犧牲物로 돼지를 쓰는 것 等을 들 수 있다. 高句麗人들은 돼지를 人間界와 영鷄(靈界)를 이어주는 神聖 動物로 여겨, 이를 하늘에 올리는 祭祀에서 犧牲物로 썼다. 이런 民俗은 오늘날에도 巫俗 祭祀와 各種 工事 關聯 祭祀 等에 돼지머리를 祭床에 올리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 世紀 前半까지도 간간히 行해지던 率壻魂은 結婚 後 사위를 데리고 사는 婚俗이다.

이 婚俗은 『三國志』 동이전에서 傳하는 高句麗 魂속인 壻屋制(?屋制) 와 連結된다. 卽 結婚式 後 新婦 宅에서는 새로이 작은 집[?屋]을 지어놓고, 사위가 저녁이 되어 新婦 父母에게 壻屋에 들어가 잘 수 있게 許諾해줄 것을 請하기를 몇 次例 하면 이를 許諾하였다. 사위는 妻家살이를 하다가 첫 아이가 태어나 어느 程度 자라면 妻와 아이를 데리고 本家로 돌아갔다. 卽 妻를 맞이하는 代價로, 다른 말로 하면 妻家의 勞動力 損失을 補償하는 意味로, 妻家에 數年間 勞動 奉仕를 하는 婚俗이다. 勿論 結果的으로 아이와 外家 사람들과의 關係를 돈毒이 함을 圖謀한다는 機能도 있다. 이 壻屋制 婚俗은 以後 時期 가난한 사람의 婚俗으로 行해졌던 率壻魂, 卽 妻家살이 婚姻 樣式과 連結되는 바이다.

高句麗의 宗敎

高句麗의 佛敎

佛敎가 처음 紹介되었을 때 그것은 多分히 起伏(祈福)的인 性格을 띤 것이었다. 391年 故國壤王의 下校(下敎)에서 “佛敎를 믿어 福을 求하라”고 하였음은 그런 面을 잘 말해준다. 이런 側面은 當時 伽藍(伽藍) 配置圖를 통해서도 確認되어진다. 498年에 세워진 平壤의 청암동 절터 를 보면 南北으로 一直線上에 中門, , 金堂 이 있고 塔과 金堂의 平面的 比率이 0.7 : 1이다. 塔의 平面的 比率이 後代에 비해 매우 높고, 寺院 構造에서 中心的인 位置에 있었다. 이런 嘉藍 配置와 塔의 比重은 釋迦牟尼의 舍利나 그와 聯關된 物件을 奉安하는 곳으로 여겨진 塔이 當時人의 主要한 信仰 對象이었음을 말해준다. 이는 또 當時의 信仰이 釋迦牟尼의 說法 內容과 解脫을 위한 自身의 修行보다는, 舍利의 靈驗에 依據하려는 神祕的이고 祈福的인 面이 剛했음을 말해준다.

高句麗 佛敎의 特性 中 하나는 王室 佛敎 乃至는 國家佛敎的인 面이다. ‘王이 곧 부처’임을 標榜하는 北方佛敎가 傳해졌고, 王室은 이의 紅布를 積極 支援하였으며, 僧侶들은 王權의 尊嚴과 國家에 對한 忠誠心 咸陽에 積極 服務하였다. 寺刹에서는 外的으로부터 國家를 保護하고 戰死한 이들의 靈魂이 往生極樂(往生極樂)하기를 祈願하는 百高座會(百高座會 )와 팔官災回(八關齋會)와 같은 法會들을 國家的 行事로 開催하였다. 호법(護法)과 護國(護國)李 同一視되었다. 이런 面들은 백제나 新羅도 同一하였다.

佛敎 受容 以後 時間이 흐름과 함께, 漸次 佛敎 敎理에 對한 硏究가 進展되었다. 모든 存在는 因緣에 따라 일어나는 것일 뿐이며, 獨自的인 存在性(存在性: 自性)이 없다고 보아, 萬有(萬有)의 實狀은 공(空: sunya-ta)이라고 主張한 三論學(三論學)李 널리 퍼져나갔다. 三論學에 造詣가 깊은 僧侶 慧灌(慧灌) 은 625年 倭國에 派遣되어 三論學을 紅布하여 日本 三論宗(三論宗) 의 始祖가 되었다. 僧侶 惠慈(慧慈) 는 성덕太子(聖德太子)의 스승이 되어 三論學을 널리 펴 日本 三論宗에 깊은 影響을 주었다. 高句麗 末期에는 一切 衆生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佛性을 지녔다고 主張한 『涅槃經(涅槃經)』 이 傳해졌다. 僧侶 普德(普德) 이 이 經典에 밝았다. 그는 7世紀 中盤 淵蓋蘇文이 道敎를 奬勵하는데 反撥하여 백제로 里居하였다. 그의 弟子들은 統一期 新羅 佛敎界에 큰 影響을 주었다.

佛敎의 擴散과 함께 漸次 佛敎的 倫理觀이 퍼져나갔다. 그것은 來世觀의 變化와도 結合되었다. 佛敎 受容 後 從前의 支配的 來世觀이었던 계세적 來世觀이 漸次 바뀌어졌다. 來世는 現世의 삶이 舞臺를 바꾸어 이어지는 것이 아니며, 죽은 者는 現世에서 저지른 自身의 業(業)과 쌓은 功德(功德)에 따라, 卽 現世에서의 自身의 行爲에 對한 佛敎的 倫理觀에 依한 評價에 依해 來世의 삶이 주어진다고 여기는 前生적(轉生的) 來世觀이 퍼져나갔다. 自然 戒律에 맞게 生活하려 하고, 그에 따라 佛敎的 價値觀과 倫理意識이 一般人의 生活 속에 널리 자리 잡아 나가게 되었다.

高句麗의 道敎

中國의 雜多한 民間信仰 을 신선술(神仙術)을 中心으로 體系化한 것이 道敎이다. 그에 비해 道家思想 은 萬物의 根源인 道(道)와의 合一을 追求하는 老子와 莊子의 思想을 中心으로 形成된 것이다. 道敎에서 老子를 神格化하여 崇仰하고 道家思想을 敎理整備에 많이 利用하였으나, 兩者가 一致하는 것은 아니다. 中國의 北魏 때 整備된 宗敎 形態의 道敎는 三國 末期에 이 땅에 傳해졌다. 韓國 古代의 民間信仰에는 道敎의 內容에 비길 수 있는 要素가 많았기 때문에, 道敎는 별다른 큰 摩擦 없이 收容되었고, 韓國 民間信仰과 結合되어 理解되었다.

5世紀 以後 高句麗 古墳壁畫에 여러 가지 모습의 神仙이 登場함을 보아 이 무렵에는 道敎가 相當히 퍼져있었음을 알 수 있다. 南朝의 모산파(茅山派) 道敎의 中心人物인 陶弘景(陶弘景: 456∼536)의 『神農本草(神農本草)』에서 高句麗의 有名한 藥材로서 人蔘 과 함께 金가루를 精製한 一種의 演壇(煉丹)을 珍藥(珍藥)으로 紹介하였다. 이는 演壇의 服用을 통해 神仙이 되고자 하는 道敎 信仰이 高句麗에 存在하였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이때의 道敎는 敎理體系와 組織을 갖춘 것은 아니었다. 연개소문 때에 佛敎 寺刹을 뺏어 導管(道觀) 으로 삼고, 道士(道士) 를 優待하는 道敎振興策을 取함에 따라 敎壇 組織을 갖춘 道敎가 登場하였다. 그러나 이에 對한 佛敎의 反撥 等으로 道敎가 그렇게 널리 퍼져나갔던 것 같지 않다.

한便 4世紀 以來 老將(老莊)의 道家思想에 對한 理解도 進展되었다. 佛敎의 敎義를 道家思想의 槪念에 依據해 풀이하기도 한 格의(格義)불교도 道家思想을 理解하는 데 일정한 役割을 하였다. 아무튼 道家思想은 當時 貴族層의 生活과 哲學에 相當한 影響을 주었다. 乙支文德의 詩를 통해서도 느낄 수 있듯이 道家思想에 對한 理解는 佛敎 · 儒敎에 對한 그것과 함께 高句麗 後期 當時 最高 知識人들의 敎養을 가름하는 主要한 한 部分이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고구려사연구 현황과 전망

高句麗史에 對한 實證的 硏究는 朝鮮後期 實學者들에 依해 그 端初가 열렸다. 한백겸(韓百謙) · 안정복(安鼎福) · 정약용(丁若鏞) 等에 依해 主로 文獻考證學籍人 方法으로 歷史地理에 關한 問題들이 논급되었다. 그러나 이런 새로운 學風이 미처 滿開하기도 前에, 國權 喪失과 함께 硏究의 主導權은 日本人 學者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獨逸의 랑케史學을 이어받은 日本 近代史學은 이른바 高等文獻批判에 依據해 關係 史料를 檢討하여 矛盾되거나 不合理하다고 여겨지는 部分을 除去하고 客觀的으로 論證되는 事實들만을 取하여 高句麗史를 再構成한다는 것이었다.

自然 硏究의 주된 部分은 『三國史記』 高句麗本紀의 史料的 價値에 對한 檢討에 모아졌다. 그 結果로 提示된 것이 산상왕 以前의 記事는 信憑性이 없는 것으로 判別하여, 高句麗는 3世紀 以後에 들어 비로소 믿을 수 있는 歷史의 時代로 들어선다고 보았다. 그 以前의 王系를 爲始한 『三國史記』 記事는 後代人의 作爲에 依한 것으로 結論지었다. 初期 古代史 關聯 記錄에 對한 史料批判은 根本的으로 古代史를 復元하고 再構成하기 위한 것인데, 日人學者들의 過度한 擬古主義(疑古主義)的 姿勢와 古代社會와 古代 史料의 性格에 對한 理解不足으로 因해 史料批判이 飼料 抹殺로 치달아, 初期 高句麗史를 虛構로 돌리는 結果를 導出하였다. 特히 그런 作業은 有史 以來로 矮小하고 허약한 나라라는 韓國의 歷史上을 만들어, 結果的으로 植民地 現實을 正當化하는 論理로 利用되어지는 잘못을 낳게 하였다.

解放 後 뒤이은 分斷과 戰爭 에 따른 對立으로 高句麗史의 舞臺였던 現場을 接近하기 어려운 狀態에서 高句麗史 硏究는 相當 期間 큰 進展이 없는 狀況이 이어졌다. 1960年代에 들어 北韓學界에서 廣開土王陵碑에 關한 새로운 硏究가 提起되어 論難이 이어졌다. 高句麗史의 展開에 對한 北韓 學界 나름의 理解體系가 提示되어졌고, 그것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어지고 있다. 卽 高句麗 初期부터 中央集權的 國家體制를 樹立하였고 그 社會의 性格을 中世로 본다는 視角이 그것이다.

南韓 學界에선 1970年代 以後 高句麗史 硏究가 本格化되기 始作하였다. 그것은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初期 記事의 史料的 信憑性 檢討에서 비롯하여 高句麗 初期의 國家 構造와 政治運營 形態, 古墳壁畫의 檢討, 對外關係, 天下觀(天下觀), 領域擴大와 地方制度의 定立過程 等의 主題로 그 硏究 領域이 擴散되어 나갔다. 1990年代에 들어 韓中關係(韓中關係)의 正常化에 따라 滿洲地域 答辭가 可能해졌고, 나아가 21世紀에 들어 平壤 訪問이 可能해짐에 따라, 高句麗史의 舞臺였던 地域에 對한 接近과 北韓 및 中國 學界와의 直 · 間接 交流는 硏究를 促進시켰다. 아울러 새로운 硏究 人力의 擴充과 考古學的 發掘成果에 對한 理解의 蓄積은 硏究力量을 크게 强化하였고, 相當한 硏究 成果를 내었다.

한便 1990年代 以後 中國學界의 高句麗史 硏究가 量的, 質的으로 크게 發展하였다. 特히 21世紀에 들어 中國의 國家的 事業인 東北工程(東北工程) 에 따른 一連의 主張이 提起됨에 따라 高句麗史 硏究는 새로운 局面을 맞게 되었다. 그것은 高句麗史에 對한 旣存의 利害體系를 變改시키려는 것이었다. 高句麗史의 性格을 中國史에 歸屬되는 中國의 한 地方史(地方史)로 規定하고, 그에 立脚해 高句麗史를 解釋하려는 것이다. ‘中國高句麗사론(中國高句麗史論)’이라 할 수 있는 이 時刻은 20世紀 初부터 提起된 바 있고, 多民族 國家인 中國의 民族理論인 ‘中華民族론(中華民族論)’에 뿌리를 둔 것이다.

卽 現在 中國 領土 內에 包括되어 있는 55個 少數民族들은 有史 以來로 中央의 한족(漢族)과 緊密한 交流를 하여 왔으며, 언젠가는 한족과 完全 融合하여 하나의 中華民族을 形成할 것이라는 主張이 그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現在 中國 領內의 少數民族들은 過去에도 한족과 交流 融合하여왔고 現在도 그러하며 未來에는 한족에 完全 融合 同化될 것이다는 主張이다. 自然 이에 따라 “中國 營內의 모든 地域의 住民들은 中國人이며 그들의 歷史는 中國史이다”라고 規定하였다.

그런데 高句麗史의 舞臺는 오늘날의 中國 領域 內에 限定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提起되었던 것이 ‘일辭讓用論(一史兩用論)’이다. 卽 只今의 國境線을 基準으로 高句麗史의 歸屬을 規定하려 하니, 427年 平壤으로 遷都하기 前에는 中國史이고 그 以後로는 韓國史家 되어, 하나의 歷史가 中國史도 되고 韓國史도 된다는 主張이다. 이런 主張에 對해선 어떻게 427年을 境界로 高句麗史의 性格과 그 歸屬을 달리 規定할 수 있느냐는 反論이 따르게 마련이다.

이런 點을 의식하여 中國學界에선 東北工程의 一環으로 새로운 視角을 提示하였다. 卽 現在의 國境이 基準이 아니라 歷史賞 中國王朝가 가장 멀리 膨脹하였던 時期의 境界를 基準으로 한 ‘歷史領域론(歷史領域論)’이 그것이다. 이에 따르면 한나라 帝國의 領域의 南쪽 限界인 漢江流域을 境界로 하여 그 以北 地域을 中國의 歷史領域으로 設定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漢江 以南 地域만이 韓國史의 歷史領域이다는 主張이다. 나아가 高句麗史의 意義는 中國의 歷史領域을 한족(韓族)의 나라들의 侵奪로부터 지켰다는데 있다고 하였다. 이는 일辭讓用論에 비해 더 積極的이고 膨脹的인 視角을 나타낸 것이다.

이와 같은 基本 立場에 서서 中國學界는 高句麗史가 中國史에 屬한다는 公式的인 論旨를 여러 主題들을 통해 開陳하였다. 檀君朝鮮 은 存在하지 않았고, 箕子朝鮮 은 實在하였으며, 衛滿朝鮮 은 中國人들에 依한 征服國家였다고 풀이하였다. 그리고 이어 한군현(漢郡縣)이 設置되었고, 그 하나인 懸吐軍에서 高句麗가 發興하였으며, 高句麗는 中國의 古代種族人 高異族(高夷族)이 세운 나라이며, 예맥족(濊貊族)은 中國의 高(古)民族이었다고 하였다.

卽 高句麗는 中國의 歷史領域에서 中國의 古代 種族에 依해 세워진 나라였고, 建國 以後 繼續 朝貢冊封關係를 통해 중원의 王朝에 政治的으로 隸屬되어왔던 中國의 地方政權이었으며, 高句麗 滅亡 以後 그 流民의 多數가 中國의 한족에 吸收 同化되었으므로, 高句麗史는 中國史에 屬한다고 主張하였다. 王建의 高麗는 新羅를 繼承한 나라이므로 高麗가 高句麗를 繼承하였다는 것은 그릇된 主張에 不過하며, 그리고 高句麗史가 韓國史에 屬한다는 10世紀 以後의 中國史書의 技術은 錯誤였다고 풀이하였다.

이런 中國 學界의 主張에 對해 具體的인 檢討와 批判이 行해졌다. 箕子朝鮮은 虛構的인 傳說에 依據한 것이며, 衛滿朝鮮은 中國系 流離民과 古朝鮮 土着民의 聯合政權이었는데 이를 中國系 住民에 依한 征服王朝로 規定하는 것은 잘못된 理解이며, 古朝鮮 地域의 住民은 種族的으로는 濊族이었고 일찍부터 農耕과 靑銅器 文化를 營爲해왔던 만큼 古朝鮮 地域의 文明의 黎明이 마치 한(漢)족의 移住와 征服에 依해 열린 것처럼 主張하는 것은 事實에 어긋난다. 그리고 高句麗人의 起源을 고이族으로 보는 見解는 根據가 없는 說이다. 卽 『一周서(逸周書)』의 왕회(王會)篇에서 星州支會(成周之會)에 參加한 種族 中 고이가 보이는데, 이 고이를 高句麗라고 한 言及은 星州支會가 있었다고 하는 時期로부터 無慮 千 六百餘 年 뒤인 4世紀 初 사람 共助(孔晁)의 州(注)가 唯一한 것이며, 고이가 山東半島에서 遼東半島로 移住하여 魂江 流域에 定着케 되었다는 移動經路에 對한 主張도 全혀 文獻的 · 考古學的으로 證明되지 않는다.

中國王朝와 高句麗 間의 朝貢冊封關係의 性格은 어디까지나 儀禮上의 上下關係를 設定하는 程度 以上의 意味를 지닌 것은 아니며, 더욱이 이를 高句麗가 中國王朝의 地方政權이었다는 主張의 根據로 想定하는 것은 歷史的 實相에 符合치 않는다. 高麗가 高句麗 繼承을 標榜한 것은 韓半島 中部 地域 住民들이 共有하고 있던 高句麗繼承意識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高句麗流民과 渤海遺民의 多數가 中國 內地로 끌려가 한족에 吸收 同化된 것은 事實이다. 이들 遺民들은 한족들에 비해 絶對 少數이며, 同化된 뒤에 이들이 高句麗繼承意識이나 高句麗의 文化遺産을 한족 사이에 全혀 남기지 못하였다. 20世紀에 이르기까지 한족들 사이에 高句麗 繼承意識을 찾아볼 수 없다.

이런 面에서 中國高句麗私論은 政治的 主張 以上의 客觀的 根據를 지닌 설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그런데 앞으로도 繼續 中國 學界에선 이런 主張이 堅持될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對應하기 위한 根本的인 方案은 韓國의 硏究力量의 擴充과 客觀的 硏究의 深化이다. 現地 調査와 發掘이 事實上 어려운 狀況에서 一方的인 中國 學界의 報告書에 依存하지 않을 수 없는 形便이지만, 廣範圍한 資料 蒐集과 客觀的인 實證的 硏究를 통해 高句麗史를 再構成하기 위한 끊임없는 努力이 要求되어지는 바이다.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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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唐書(新唐書)』
『日本書紀(日本書紀)』
『韓國古代史의 理論과 爭點』(노태돈, 집문당, 2009)
『高句麗 별자리와 神話』(金一權, 四季節, 2008)
『高句麗 南進政策硏究』(백종오, 書經, 2006)
『高句麗의 領域支配方式 硏究』(김현숙, 모시는사람들, 2005)
『高句麗의 西方政策 硏究』(이성제, 국학자료원, 2005)
『高句麗와 比較해본 中國 한·魏·眞意 壁畫分』(강현숙, 지식산업사, 2005)
『高句麗政治史硏究』(임기환, 한나래, 2004)
『高句麗 古墳壁畫의 世界』(전호태, 서울대학교 出版部, 2004)
『高句麗古墳壁畫硏究』(전호태, 四季節, 2000)
『高句麗史의 諸問題』(손영종, 신서원, 2000)
『高句麗史硏究』(노태돈, 四季節, 1999)
『高句麗 領域擴張社 硏究』(공석구, 서經文化史, 1998)
『韓國史』 5-高句麗-(國史編纂委員會 篇, 1996)
『譯註(譯註) 韓國古代金石文(韓國古代金石文)』1(韓國古代社會硏究所 便, 韓國古代社會硏究所, 1992)
『三國 및 統一新羅 稅制의 硏究』(김기흥, 역사비평사, 1991)
『朝鮮考古學戰서』-고구려편-(박진욱, 1991)
『高句麗史』(손영종, 1990)
『高句麗民族形成(高句麗民族形成)과 社會(社會)』(理獄, 敎保文庫, 1984)
『三國史記硏究(三國史記硏究)』(신형식, 일조각(一潮閣), 1981)
『동이전(東夷傳)의 文獻的(文獻的) 硏究(硏究)』(전해종, 일조각(一潮閣), 1980)
『韓國壁畫古墳(韓國壁?古墳)』(金元龍, 일지사(一志社), 1980)
『私學誌(史學志)』 13-中原高句麗碑 特輯號(中原高句麗碑 特輯號)-(檀國大史學會(檀國大史學會) 便, 1979)
『三國時代(三國時代)의 美術文化(美術文化)』(진홍섭, 동화출판公社(同和出版公社), 1976)
『高句麗史硏究』(이지린·강인숙, 1976)
『韓國古代社會硏究(韓國古代社會硏究)』(김철준, 지식산업사, 1975)
『丹齋申采浩全集(丹齋申采浩全集)』 上(上)(申采浩, 螢雪出版社(螢雪出版社), 1972)
『韓國古代史(韓國古代史)의 硏究(硏究)』(이홍직, 신구문화사(新丘文化社), 1971)
『韓國美術文化史論叢(韓國美術文化史論叢)』(高裕燮, 通文館(通文館), 1966)
『平壤城』(채희국, 1963)
『高句麗史と東アジア』(武田幸男, 1988)
『廣開土王陵碑の硏究』(李進熙, 1972)
『通溝』(池內宏, 日滿文化協會, 1938)
『高句麗考古』(魏存成, 吉林大學出版社, 1994)
『廣開土王碑硏究』(王健群, 1985)
『高句麗 電氣 政治史 硏究』(금경숙, 고려대 民族文化硏究所, 2004)
『高句麗의 政治와 社會』(東北亞歷史財團 便, 2007)
『高句麗의 文化와 思想』(東北亞歷史財團 便, 2007)
『高句麗 遺跡의 어제와 오늘』1, 2(東北亞歷史財團 便, 2009)
『高句麗 古墳의 照映과 提議』(정호섭, 서經文化史, 2011)
『아차산 보루와 高句麗의 南進經營』(최종택, 서經文化史, 2013)
『高句麗 古墳 硏究』(강현숙, 진인진, 2013)
『高句麗 初期 政治史 硏究』(여호규, 신서원, 2014)
『高句麗 性 硏究』(양시은, 진인진, 2016)
『高句麗 生活文化史 硏究』(전호태, 서울대 出版部, 2016)
『高句麗 山城 硏究』(정원철, 東北亞歷史財團, 2017)
『高句麗-水 戰爭』(이정빈, 走流性,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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