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5年 王政復古로 天皇 親政 體制를 마련하고 메이지維新[明治維新]을 斷行하여 近代國家로의 急速한 發展을 이룩한 日本은, 朝鮮과의 近代的 國交 關係를 맺기 위해 交涉해 왔다.
그런데 朝鮮은 國書의 棲息이 從來와 다르고 대마도주 무네氏[宗氏]의 職銜이 다르다는 理由로 接受를 拒否하였다. 이러한 西界(書契)問題가 얽혀 交涉은 한때 難航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興宣大院君(興宣大院君)
의 하야, 閔氏 戚族政權의 再登場으로 通交 交涉은 새로운 轉機를 맞게 되었다. 또한 領議政
이유원(李裕元)
과 右議政
박규수(朴珪壽)
는 더 以上 通交를 拒絶하는 것은 國家 利益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建議도 交涉에 影響을 주었다.
그런데 當時의 政治的 雰圍氣도 徐徐히 變하여 大院君의 通商拒否政策을 積極 支持하던 척사위정勢力(斥邪衛正勢力)과는 달리, 北學과 西學의 影響을 받은 박규수·
오경석(吳慶錫)
等에 依해 對外 開放을 主張하는 開化 勢力이 자라고 있었다.
한便, 淸나라는 朝鮮에 對해 프랑스 · 美國과의 國交를 勸告하였으며, 日本의 臺灣 征伐의 消息도 對日本政策의 轉換을 促求하는 內在的 影響力이 자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