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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를 파싱하기 어렵습니다. “마라톤 풀코스 40日 連續 뛴 訓鍊 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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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 풀코스 40日 連續 뛴 訓鍊 했었죠”

“마라톤 풀코스 40日 連續 뛴 訓鍊했었죠”
地區 네바퀴 뛰고 치킨事業 마라톤 始作 이봉주氏(封奏치킨 代表)

김진수 記者(jinsuac@skyedaily.com)

記事入力 2013-12-09 01:15:00

스포츠는 人類에게 葛藤의 壁을 넘을 수 있게 하는 ‘平和의 祭典’ 求心點이다. 4年마다 열리는 夏季와 冬季올림픽은 그 祭典의 象徵이다. 우리나라는 작은 領土와 얼마 안 되는 人口에도 不拘하고 손꼽히는 스포츠 强國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陸上을 비롯해 피겨, 體操, 水泳, 스피드 스케이팅 等의 分野에서 世界的으로 技倆 있는 選手들을 輩出해 오지 못해 왔다. 이들 不振 種目들에서 太極旗를 단 韓國選手들이 最近 우리 스포츠 歷史를 다시 쓰고 있는 것은 그런 點에서 奇跡으로까지 비춰진다. 피겨의 女王 金姸兒를 비롯해 體操의 양학선, 水泳의 朴泰桓, 스피드 스케이팅의 李相花·모태범 等이 그 主人公들이다. 陸上에서는 올림픽金메달리스트 황영조가 擧論된다. 하지만 마라톤에서는 이봉주 選手를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다. 그는 韓國 마라톤 歷史를 다시 쓴 主役으로 當然히 꼽힌다. 어려서부터 持久力이 좋기로 타고났던 이봉주는 한창 練習에 沒頭할 當時에는 單 6個月間 42.195km를 無慮 40番이나 完走하는 地獄訓鍊을 해냈다. 平均 1.5日 間隔으로 每日 풀코스 練習을 하는 로봇 같은 哲人의 心臟을 가진 그다. 어려서부터 마라토너의 꿈을 꾼 이봉주는 高校 時節 陸上팀이 解體되는 두 番의 挫折을 겪는 渦中에서도 꿈을 잃지 않고 挑戰해 두 番의 스카웃 幸運을 거머쥐기도 했다. 以後 이봉주는 지난 1990年 弱冠의 나이에 全國體典 2位를 始作으로 마라톤 人生의 한 가운데 本格 뛰어들었다. 이봉주는 1993年 호놀룰루마라톤大會 優勝, 1995年 東亞마라톤大會 優勝, 1996年 애틀랜타 올림픽 準優勝(銀메달), 2001年 보스턴 마라톤 優勝 等 國內外 마라톤 社에 굵직한 足跡을 남길 成跡을 거뒀다. 그 사이 그는 至毒한 슬럼프를 겪는 等 苦楚를 겪기도 했지만 마라톤에 對한 熱情으로 이겨냈다. 이봉주는 40歲에 40番의 公式的인 마라톤 競技를 完走했고 訓鍊 輛까지 합치면 約 16萬km를 뛰었다. 이는 地球를 4바퀴 도는 距離다. 이제 마라톤 人生을 접은 이봉주의 꿈은 後進養成이다. 이를 위해 그는 事業을 始作했다. 收益金으로 꿈나무 財團 等을 만들어 韓國 마라톤의 歷史를 잇게 하고 싶은 것이 이봉주의 또 다른 人生 비전이다. 긴긴 마라톤 레이스를 접었지만 ‘封奏치킨’이란 프랜차이즈를 통해 人生 레이스에 발을 담근 이봉주 選手는 如前히 熱情이 넘쳐 있었다. 스카이데일리가 이봉주 選手의 마라톤 人生 뒤에 있었던 숨은 哀歡과 보람 等 그동안 털어놓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眞率하게 들어봤다.

 ▲ 韓國 마라톤 歷史에 한 劃을 그은 이봉주 選手의 人生 折半은 마라톤과 同苦同樂을 한 時間이었다. 지금은 封奏치킨의 CEO로 새로운 人生 레이스를 시작했다. ⓒ스카이데일리
 
“새벽 4~5時에 비가 오나 눈이오나 每日 일어나 個人訓鍊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마라톤 人生은 全國體典에서 始作해 全國體典으로 幕을 내렸습니다. 그 過程에서 甚한 슬럼프도 겪으면서 失敗와 成功을 함께 經驗 했었습니다”
 
大韓民國 마라톤의 自尊心 이봉주 選手(44)는 同甲내기인 황영조 選手의 그늘에 가려져 많은 注目을 받지 못했었다. 황영조가 1992年 바르셀로나 올림픽 金메달을 獲得 했을 때 全 國民은 歡呼했었고 全 世界 마라톤의 英雄은 黃 選手 뿐이었다.
 
하지만 이봉주는 負傷으로 大會에 參席을 하지 못한 채 江原道 轉地訓鍊場에서 TV 畵面으로 황영조 選手의 마라톤 優勝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黃 選手는 正말 대단했습니다. 같은 마라토너로서 부러움의 對象이었죠. 저는 TV를 통해 黃 選手의 活躍을 지켜보며 제 自身을 더욱 단련시키고 訓鍊에 邁進했습니다”
 
황영조의 榮光을 바라보며 이봉주는 승부욕이 더 强하게 일어났지만 슬럼프가 찾아왔다. 1992年 10月부터 이듬해 3月까지 約 40番의 풀코스를 뛰며 訓鍊했지만 2時間 19分과 20分代를 넘나들며 記錄이 低調했다. 
 
 
 ▲ 이봉주 選手가 마라톤을 통해 겪은 숱한 苦難과 보람 그리고 失敗와 成功 等에 對해 진솔하게 이야기를 했다. ⓒ스카이데일리
 
하지만 숱한 挫折에도 不拘하고 成功에 對한 渴望으로 2~3萬 名이 出戰한 2001年 105回 보스턴 마라톤에서 堂堂히 優勝하며 韓國 마라톤 歷史에 한 劃을 그었다. 그는 한 때 마라톤 世界랭킹 1位라는 大業을 達成하기도 했지만 그  過程은 決코 順坦치 만은 않았다.
 
初等學校 登下校길度 李鳳柱에겐 연습장
 
이봉주는 1970年 忠南 天安 胎生이다. 2男2女 中 막내로 태어난 그는 넉넉하지 않은 집안形便에 자랐고 성격은 內省的이었다고 한다.
 
말이 많지 않았던 그는 長距離 달리기 만큼은 自身이 있었고 어려서부터 頭角을 보이기 始作했다.
 
“盛擧初等學校 時節 學校까지 約 2.5km를 걸어서 다녔습니다. 이 時節에는 親舊들과 같이 빨리가기 試合을 하며 뛰기도 했는데 제가 恒常 먼저 到着을 했었습니다. 時間을 재 보니 조금씩 短縮됐었고 뛰는 것이 재미가 있었습니다”
 
場거리에 持久力이 剛했던 그는 단거리에서는 재능이 없었다고 한다.
 
“運動會를 할 때면 100m 달리기에서 順位에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제가 場거리에 强點이 있었다는 것을 初等學校 時節부터 알게 됐죠”
 
이봉주 選手는 天安 天性中學校를 卒業하고 天安農業高等學校에 入學했다. 이곳에서 그의 마라톤 人生이 始作됐다고 해도 過言이 아니었다고 이봉주는 말했다.
 
 ▲ 이봉주는 高等學校 時節 마라톤을 爲해 다시 1學年에 再入學했다. 그는 마라톤 팀이 두番이나 解體되는 過程에서도 屈하지 않고 自身의 꿈을 키워 갔다. 寫眞은 高校 選手時節 忠淸南道 選手團 車輛 앞에서 조카와 함께한 이봉주 選手. <寫眞=李鳳柱>
 
“천안농고에 陸上部가 있었습니다. 特別活動에서도 陸上部에 加入했고 이곳에서 體系的인 敎育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高等學校때부터 정식으로 마라톤 人生을 始作했다. 집에서 高等學校까지 거리는 12km程度 됐는데, 등하교길도 훈련을 하며 연습했다고 한다.
 
“1時間 30分程度 걸리는 距離가 나중에는 1時間 안으로 줄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조금씩 發展을 해나갔죠. 또 先輩들과 善意의 競爭도 하니 더 많은 發展 可能性이 보였습니다”
 
하지만 1學年을 마칠 때 즈음 陸上部는 學校 財政으로 解體됐다. 陸上部 先後輩 몇몇은 꽃을 피우기도 前에 마타톤을 그만두었다. 하지만 可能性이 보인 이봉주는 進路에 對한 苦悶을 깊이 했다. 
 
때마침 이 時期에 忠南 豫算에 있는 삽교高等學校에서 스카웃 提議가 날아들었다. 마라톤에 對한 意志가 이봉주 選手를 이끄는 듯 했다. 
 
“삽교고 側의 提案은 1學年으로 다시 재입학을 해야 한다는 條件이었습니다. 이미 1學年을 마칠 期間이었는데, 다시 1學年으로 敎育을 받아 陸上을 해야 한다는 말에 조금 망설였지만 저는 마라톤을 爲해 재입학 決斷을 내렸습니다”
 
當時 집에서는 反對를 했었다고 한다. 그 時節 이봉주의 兄은 레슬링을 했었지만 抛棄를 했었던 狀況이다. 陸上을 위해 1年이란 時間을 더 보내게 될 이봉주의 父母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한番은 코치 先生님으로부터 氣壓을 호되게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偶然히 學校로 찾아온 어머니는 멀리서 제가 크게 힘들어 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죠. 그 모습을 저도 바라 보면서 눈물을 흘렸던 記憶이 납니다. 저는 더 독하게 마음 먹었고 꼭 마라톤에서 成功하고 싶었습니다”
 
 ▲ 訓鍊을 하기 前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있는 이봉주 選手의 모습. <寫眞=李鳳柱>
 
또 한 番의 轉學과 連이은 陸上部의 解體
 
이봉주는 삽교고 1學年부터 大會에 出戰했지만 優勝한番 하지 못했었다고 한다. 다만 中上位圈 成跡을 꾸준히 維持했다. 이봉주는 天安市內 學校對抗戰 1500m에서 優勝을 일궈낸 것이 그의 公式的인 첫 優勝 記錄이다.
 
以後 專門 코치陣의 指導로 天安 驛前마라톤(10.2km)이나 小規模의 大會에서 優勝과 準優勝 等을 해가며 기량을 向上시켜 나가자 이봉주의 이름이 조금씩 알려지기 始作했다.
 
첫 優勝 以後 이봉주는 坦坦大路를 걸었다. 하지만 2學年 時節에는 學校의 財政問題로 陸上部가 또 解體가 됐다. 이봉주는 陸上을 위해 1年의 時間을 抛棄하고 재입학을 選擇했지만 陸上部가 또 空中分解 된 것이었다.
 
“돌이켜 보면 靑少年期에 많은 迂餘曲折이 있었습니다. 진로 問題로 또 많은 고민을 했었죠. 그런제 그 때 마침 洪城의 鑛泉高等學校에서 스카웃 提議가 왔습니다. 2학년을 維持하며 轉學을 갈 수 있는 條件이었습니다”
 
天國體典 3等 成績, 實業팀 入團에 大學 進學
 
高校時節 이봉주는 拔群의 實力을 十分 發揮해 좋은 成跡을 維持했다. 하지만 實業팀의 스카웃 提議와 大學 特技生 入學을 위해서는 어느程度의 마라톤 成績이 必要했다.
 
“高等學校 1~2學年의 成跡은 大學入學에 反映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高3時節 忠南代表로 全國體典에 出戰했었는데 3等으로 겨우 入賞을 했습니다. 저는 이 記錄으로 서울市廳 所屬이 될 수 있었고 동시에 서울시립대 貿易學科 (夜間)에 入學했습니다” 
 
 ▲ 1990年 21살에 처음으로 풀코스 마라톤에 挑戰했다. <寫眞=李鳳柱>
이봉주는 高校時節 풀코스를 뛰어 본 일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練習만큼은 강도 높게 했다. 그는 새벽 4~5時에 每日 같이 個人訓鍊을 했었고 비가 오는 날에도 비를 맞으며 연습에 邁進했다. 이봉주는 지구력과 陸上에 對한 執念만큼은 그 누구보다 自身에 次 있었다. 
 
“1990年 21살에는 서울市廳所屬으로 처음으로 풀코스에 挑戰하게 됐습니다. 高等學校 때 뜻하지 않은 재입학으로 나이로는 2學年이었지만 저는 1學年이었죠. 普通 3~4學年에 풀코스를 始作하는데 저는 1學年부터 하프를 始作으로 풀코스에 挑戰을 했습니다”
 
그 時節 서울市廳 오재도 전 코치(現 大韓陸上競技聯盟 마라톤·警報 技術委員長)는 이봉주의 可能性을 보고 풀코스를 勸했고 첫 出戰한 42.195km에서 2位의 成跡을 일궈냈다.
 
以後 拔群의 實力으로 좋은 成跡을 거뒀고 國家代表가 됐지만 그에게 슬럼프가 왔다. 1992년 23살이 되던 해에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앞두고 무릎 負傷으로 出戰을 하지 못한 以後 슬럼프를 繼續 겪게 된 것이다.
 
“올림픽 한 달을 남겨두고 韓國 新記錄을 세우는 等 上昇勢를 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無理한 레이스와 오버트레이닝으로 인해 무릎 負傷을 當했었죠”
 
그는 올림픽에 出戰할 수 있는 要件을 갖췄지만 訓鍊 欲心을 냈었고 그것이 禍根이 돼 돌아온 것이다. 이봉주는 올림픽에서 優勝해 錦衣還鄕한 황영조 選手를 지켜보며 승부욕을 더 불태웠다고 한다.
 
“황영조 選手는 動機이기 때문에 같은 大會에 出戰하며 成長過程을 繼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저 보다 뛰어난 體力을 자랑했고 마라토너로서 不足함이 없었죠. 저는 江原道 轉地訓鍊場에서 황영조 選手가 올림픽에서 金메달 獲得하는 것을 TV로 지켜봤습니다”
 
황영조의 金메달 消息은 國民들에게 希望과 感動을 주는 일이었고, 이봉주에게는 승부욕을 剛하게 심어 주는 契機가 됐다.
 
“많은 刺戟이 됐죠. 바르셀로나올림픽이 끝나고 저는 負傷에서 回復했고, 같은 해 1992年 10月에는 全國體典 優勝을 始作으로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訓鍊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듬해 3月까지 熱心히 뛰었지만 기록이 低調했습니다”
 
그는 1992年 10月부터 이듬해 3月까지 約 40番의 풀코스를 뛰었다. 기록은 2時間 19分과 20分代를 넘나들었다. 2시간 20分代를 전후한 成跡은 國家代表 마라토너로서 低調한 記錄이었다.
 
 ▲ 이봉주는 訓鍊을 熱心히 했음에도 不拘하고 저조한 記錄을 보이자 한동안 힘든 슬럼프를 겪었다. <寫眞=李鳳柱>
 
그는 1993년 코오롱 스포츠 陸上團으로 所屬을 옮긴 後 황영조와의 再會를 始作으로 優秀한 成跡을 維持하기 始作했다.
 
이봉주는 周圍 同僚들과 善意의 競爭을 통해 좋은 結果를 얻었다고 회고했다. 아울러 슬럼프도 克服하는 等 전문진 코치陣의 도움으로 實力을 向上시켜 나갈 수 있었다.
 
“6個月의 슬럼프는 저를 매우 힘들게 했지만 反面 저를 더욱 剛하게 키웠습니다. 周圍의 同僚와 코치陣의 도움으로 저는 다시 제 페이스를 維持할 수 있었죠”
 
슬럼프를 克服한 이봉주는 參加한 大會마다 乘勝長驅 하기 始作했다.
 
特히 1993年 24살 때 國際舞臺 데뷔前인 美國 하와이 호놀룰루 國際마라톤에서 優勝한 것이 슬럼프를 完全히 克服하게 해 주었다. 以後 이봉주는 자신감을 回復했다.
 
 ▲ 이봉주는 國際大會에 첫 參席한 호놀룰루 國際마라톤 大會에서 優勝한 以後 自信感을 되찾았고 슬럼프도 克服했다. 寫眞은 호놀룰루 마라톤에서 우승하고 단상에서 祝賀를 받고 있는 모습. <寫眞=李鳳柱>
 
“제가 自信感을 찾은 가장 값진 競技였습니다. 2時間 13分 16秒를 찍고 優勝을 했는데, 現地 僑民들이 韓國選手가 優勝했다는 消息을 接하고 많은 박수와 喝采를 보내주었습니다”
 
“저 亦是 優勝메달을 목에 걸고 歸國하면서 많은 取材陣들의 關心과 集中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큰 關心은 처음받아 본 것이었죠”
 
自信感을 되찾은 그는 국민들에게 큰 關心을 받으며 이봉주의 時代를 열어갔다. 때마침 1996년 황영조 選手가 부상과 成績 不振 等으로 조기은퇴를 宣言 한 以後 이봉주의 全盛時代가 왔다.
 
 ▲ 李鳳柱(앞줄 오른쪽에서 두番째) 選手가 1995年 겨울 中國에서 轉地訓鍊을 받을 당시 황영조 選手 및 關係者들과 함께 포즈를 取하고 있다. <寫眞=李鳳柱>
 
애틀란타올림픽 單 3秒差 아쉬운 準優勝
 
황영조의 隱退 後 이봉주는 所屬社에서 集中管理 對象이 됐다. 繼續된 訓鍊과 大會에서 좋은 成果를 거뒀지만 큰 걸림돌이 있었다고 한다.
 
“軍隊入隊 때문이었습니다. 當時 27살이었는데 軍 入隊를 더 以上 演技를 못하는 狀況이 됐었던 거죠. 상무 側에서도 저의 訓鍊을 지켜보며 迎入을 하려고 했었지만 저는 所屬社와 訓鍊方式이 바뀌면 제 페이스를 維持하기가 힘든 狀況이었습니다”
 
 ▲ 이봉주는 팀訓鍊과 함께 個人訓鍊을 竝行해 애틀란타 올림픽에서 2位를 記錄했다.  <寫眞=李鳳柱>
그가 當時까지 이룬 優勝 成跡으로는 국가가 定한 軍 免除 基準에 없었다. 
 
이봉주는 어쩔 수 없이 軍 入隊를 계속 演技하면서 묵묵히 訓鍊을 하고 大會에 出戰했다. 그 結果 1996年 第26回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모든 것이 解決 됐다.
 
“國家代表로 한창 좋은 成跡을 維持하는 나이였습니다. 27살에 애틀랜타 올림픽에 出戰을 했었는데 제 페이스를 維持하며 앞만 보고 뛰었습니다”
 
마라톤은 自己 自身과의 싸움이라고 하지만 集中力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이봉주는 첫 올림픽 出戰이라는 큰 舞臺에서 剛한 集中力을 發揮 했다.
 
그는 남아공의 조시아 투과니가 낸 2시간12분36초 記錄보다 不過 3秒가 뒤진 2時間 12分 39秒臺의 性的으로 2位를 했다.
 
“첫 出發時의 컨디션은 좋았습니다. 始作부터 先頭그룹을 維持했고 決勝까지 先頭그룹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저의 페이스로 레이스를 했었고 마지막에 힘을 내 보았지만 銀메달을 獲得했습니다”
 
그는 젖 먹던 힘으로 決勝點까지 最善을 다한 競技였다. 不過 3秒 差異로 준우승에 머물러 國民들은 아쉬움을 표했지만 이봉주 選手에게 더욱 應援을 해 주었다. 이를 通해 그의 이름이 全 國民들에게 각인됐다.
 
同時에 軍 入隊의 苦悶도 덜었기 때문에 이봉주의 銀메달 獲得은 個人에게도 값진 意味가 있었다.
 
“첫 出戰한 올림픽에서 銀메달을 獲得해 저는 軍 免除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銀메달보다 軍隊 免除에 對한 惠澤이 더 컸었고 무엇보다 제가 願하는 訓鍊과 저의 方式을 固守할 수 있어 저 亦是 기뻤습니다”
 
 ▲ 이봉주가 1998年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 優勝 後 觀衆席을 向해 太極旗를 흔들고 있다.<사진=이봉주>

이봉주는 애틀랜타 올림픽 以後로 1998年 방콕 아시안게임 마라톤에서 金메달을 獲得했다. 당시 IMF 狀況에서 國民들은 이봉주의 金메달 消息을 더없이 반겼다.
 
이어 2000年에는 코오롱에서 삼성전자로 팀을 옮겼고 시드니올림픽 마라톤에 參席했지만 結果는 좋지 않았다.
 
“京畿 當日 시드니 날씨는 좋았지만 바람이 若干 불었던 記憶이 있습니다. 저는 新鮮한 바람을 맞으며 競技에 臨했고 컨디션만큼은 正말 좋았습니다”
 
하지만 最惡의 結果를 보였다. 마라톤을 하면서 한 番도 넘어 진 經驗이 없었는데 올림픽이란 큰 舞臺에서 넘어진 것이다.
 
“約 15㎞ 地點에서 스페인 選手와 다리가 걸려 넘어졌었죠. 마라톤을 한 以後 처음으로 넘어졌는데 何必이면 올림픽이란 큰 舞臺에서 失手를 한 것입니다”
 
 ▲ 2000年 시드니 올림픽 때 스페인選手하고 다리가 걸려 넘어져 負傷을 當했다. 다시 일어나 完州 했지만 2時間17分代를 끊어 24位의 成跡을 거뒀다.
 
 그는 넘어지면서 손바닥이 찢어졌고 엉덩이와 머리에 打撲傷을 입는 負傷을 當했다. 이봉주는 다시 일어나 레이스를 再開해 鬪魂을 發揮했지만 正常的인 페이스를 되찾기는 어려웠고 끝까지 完走해 2時間17分57超으로 全體 24位의 成跡을 거뒀다. 
 
“父母와 兄들도 現地 決勝點 支店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狀況이었습니다. 저는 다시 일어나 完走를 했었지만 레이스를 끝내고 눈물을 삼켰습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負傷으로 出戰을 못했고, 애틀랜타는 3超差異로 準優勝을 했다. 이어진 시드니에서는 스페인 選手와 걸려 넘어져 低調한 成跡을 거뒀다.
 
이봉주는 올림픽에서 불운의 連續이었지만 마음을 추슬러 訓鍊에 邁進했다.
 
이봉주는 歸國 後 正常 컨디션을 다시 回復하고 2000年 10月에 出戰한 東京 國際마라톤大會에서 2時間7分20秒의 記錄으로 2位의 成跡을 올렸다. 이봉주는 수많은 레이스를 하면서 國內 新記錄을 갱신했다. 이 記錄은 現在까지 國內 最高記錄으로 남아있다.
 
 ▲ 1994年 황영조 選手와 함께 訓鍊中인 이봉주 選手 <寫眞=李鳳柱>
 
아버지 靈前에 보스턴 마라톤 優勝 메달 바쳐
 
이봉주는 東京 國際마라톤 準優勝 以後 冬季訓鍊에 들어갔다. 하지만 아버지가 健康 惡化로 2001年 第105回 보스턴마라톤을 앞둔 2週前에 운명을 달리했다. 
 
“先親께서 膵臟癌으로 숨을 거두셨습니다. 試合은 2主戰이었던 狀況이었죠. 葬禮式을 치루고 周圍 코치님과 監督님을 비롯해 수많은 同僚들이 激勵를 해 주었습니다. 아버님도 하늘나라에서 저를 熱心히 應援할 것으로 생각하고 저는 굳은 마음으로 訓鍊에 突入했습니다”
 
하지만 訓鍊이 集中될 수 없었다. 平素와 같이 訓鍊을 했었지만 마음 한 켠에는 아버지 생각이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시간이 흘러 보스턴 마라톤 競技에는 參與에 意味를 두겠다고 그는 생각한다.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으로 競技에 集中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이番 競技만큼은 欲心을 버리고 參與에 意味를 두었습니다. 하지만 現地에서 느낀 氣分은 달랐습니다. 제가 韓國에서 訓鍊을 해 왔던 날씨와 環境이 비슷했고 좋은 컨디션을 維持했죠. 조금씩 레이스를 하다 보니 訓鍊과는 다르게 集中이 됐었고 저의 페이스를 維持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치 아버님께서 決勝點으로 저를 引導해 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 이봉주가 보스턴 마라톤에서 優勝한 後 祝賀를 받고 있다. <寫眞=李鳳柱>
 
보스턴 마라톤은 無慮 1世紀가 넘는 歷史的 傳統으로 올림픽 마라톤 以上의 權威를 자랑하고 있다.
 
이 大會는 올림픽과는 다르게 페이스메이커가 導入된다. 페이스메이커들은 마라토너들의 時間 短縮을 위해 先頭그룹 約 10m앞에서 20km~30km까지 리드를 하는 競技이다. 當時에는 一般 市民들 2~3萬 名이 參與했고 選手들은 出發點 앞에서 競技를 할 수 있도록 配慮했다. 
 
“뛰면서 集中을 많이 했었지만 레이스 中 아버님 생각이 났었죠. 이 競技에서 좋은 컨디션을 維持해 堂堂히 1位로 優勝을 했습니다. 國內 言論을 비롯해 全 世界 言論에서도 저에 對한 關心을 보였습니다”
 
이봉주는 歸國 後 아버님 山所에서 절을 하고 金메달을 바쳤다고 한다. 이 後 各種 大會에서 優勝과 準優勝 等을 거뒀고 2002年 황영조 選手의 紹介로 結婚도 했다.
 
이봉주는 2009年 全國體典에 出戰한 마라톤에서 金메달을 獲得 한 以後 그의 길었던 레이스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의 나이 40歲였다.
 
“全國體典으로 始作해 全國體典에서 隱退競技를 했었습니다. 記者會見에서 저의 靑春과 人生을 바친 選手生活이 走馬燈처럼 지났었고 저도 모르는 눈물이 限없이 흘려 내렸습니다”
 
이봉주는 40의 나이에 40番째 마라톤 公式 競技 完走를 했고 訓鍊을 包含해 달린 距離는 約 16萬km에 이른다. 이는 地球를 네 바퀴를 도는 距離라고 한다.
 
‘封奏치킨’ CEO로 새로운 長期 레이스 始作 
 
 
 ▲ 이봉주 選手가 마라톤에서 隱退한 後 새로운 事業인 封奏치킨 프랜차이즈店을 始作했다.  封奏치킨은 最近 서울 석촌동에서 3號店을 開店했다. ⓒ스카이데일리
 
이봉주는 隱退한 2009年, 體育勳章 靑龍狀과 같은 해 第10回 大韓民國 國會對象 功勞賞을 受賞했다.
 
以後 三星을 비롯해 指導者 스카웃 提議가 있었지만 조금의 餘裕로운 時間을 갖고 싶어 했다고 한다.
 
이봉주는 이 期間을 利用해 그동안 內助를 해준 아내와 時間을 함께 했고 家長으로서 或은 아버지로서 役割을 할 수 있었다. 가정에 忠實한 이봉주는 最近 치킨事業을 始作해 또 다른 레이스에 몸을 실었다.
 
“저의 靑春과 人生을 바친 마라톤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받은 만큼 꼭 베풀고 싶었죠. 앞으로 마라톤 財團을 만들어 後輩養成에 힘쓰고 싶습니다”
 
이봉주는 마라톤을 꿈꾸는 꿈나무들에게 서포터 役割을 하기 위해 새로운 事業인 프랜차이즈 ‘封奏치킨’이란 事業에 뛰어들었다.
 
치킨은 아이들에게 間食거리를 提供할 수 있고 또 收益資金으로 마라톤 꿈나무 支援을 할 수 있다고 判斷했다.
 
“지난 10月 水原 권석구 고색동에 1號店을 오픈했습니다. 이어 水原 장안구 파장동에 2號店을 開業했습니다”
 
‘封奏치킨’ 李鳳柱 代表는 直接 인테리어에도 參與했고 마라톤을 素材로 다양한 맛의 差別化를 두었다.
 
“10km, 하프, 풀코스로 메뉴를 構成해 販賣를 하고 있습니다. 特히 풀코스는 매운맛을 즐기는 마니아들을 위해 開發한 것으로 먹기 위해서는 마라톤처럼 忍耐가 必要한 맛이죠”
 
李 代表는 지난 7日 서울 석촌동 3號店을 오픈해 마라톤이 아닌 CEO로서의 資質을 키워가고 있다.
 
오픈을 祝賀해 주기위해 찾아 온 임춘애 前 陸上選手, 이현세 漫畫家, 金東聖 쇼트트랙 全 選手, 김세진 러시앤캐시 배球團 監督, 金映豪 2000年 시드니 올림픽 펜싱 金메달리스트 等이 祝賀의 말을 건넸다.
 
“韓國마라톤이 沈滯期를 겪고 있습니다. 이는 국민적 關心이 줄고 서포터가 많이 없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치킨 事業을 통해 어느 程度 財政이 마련된다면 韓國마라톤이 位相을 제고할 수 있도록 많은 支援活動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封奏치킨 3號店을 開店한 석촌點에 임춘애 前 陸上選手(寫眞맨 位), 김영호 前 펜싱選手(두番째 寫眞), 金東成 前 쇼트트랙 選手(세番째 寫眞)가 방문해 祝賀를 傳했다. ⓒ스카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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