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親日派 된 女性 敎育先覺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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定期後援

親日派 된 女性 敎育先覺者들

<資料入手> 金活蘭 等 先覺 女性 5人의 親日行跡

프레시안은 世界女性의 날인 8日을 맞아 우리나라 近代 女性運動 및 敎育의 先驅者로 얘기되는 女性 5名의 親日 行跡을 公開한다.

지난달 28日 '民族正氣를 세우는 國會議員 모임'(會長 金希善 議員)이 發表한 '親日派 708名' 名單에 包含된 이들 女性界 人士의 親日 行跡도 敏感한 內容이다.

이들 女性들은 敎育과 女性運動의 先覺者로 評價받아 왔으며 이들의 行跡은 아직도 우리 社會에 적지 않은 影響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現在에도 이들이 設立한 學校와 女性支援團體가 活動 中이다.

방응모·金性洙가 親日派에 包含되자 이들이 設立한 朝鮮·동아일보가 論爭을 惹起했듯이 女性界 一部에서도 이들이 親日派 名單에 包含된 데 對해 크게 反撥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우리나라 女性運動 및 近代敎育에 寄與한 功勞가 많다고 해서 이들의 親日 行跡이 덮어지는 것은 아니다.

프레시안은 讀者들의 判斷을 돕기 위해 國會議員 모임이 作成한 女性界 '親日派' 人事의 親日行跡을 言論界에 이어 두 番째로 轉載한다. 編輯者 註

金活蘭(金活蘭)의 主要 境域 및 親日經歷

-1899年 仁川生
-1918年 梨花學堂 大學과 卒業
-1923年 김필례(金弼禮), 유각경(兪珏卿) 等과 함께 YMCA를 創立
-1924年 美國 오하이오 웨슬레안 大學에서 敎育, 哲學 等을 專攻하고 卒業
-1924年 9月 보스턴 大學院에 入學하여 文學碩士 學位 받음
-1925年 6月 歸國하여 이화女子專門學校 敎授 및 學監에 就任
-1927年 民族, 社會 兩陣營이 손잡은 槿友會(勤友會)의 創立 때 基督敎 代表로서 發起總會 準備委員, 創立總會 臨時議長, 招待 臨時議長, 初代 中央執行委員을 맡음
-1928年 7月 槿友會 2次 中央執行委員會 檢査委員으로 選出되었으나 任意로 活動을 中斷
-1930年 掉尾하여 컬럼비아 大學校 大學院에서 哲學博士 學位 받음

-1937年 朝鮮夫人問題硏究會 常務理事
-1937年 爵位를 받은 貴族夫人들이 日本의 侵略戰爭을 支援하기 위해 金비녀를 뽑아 바치자고 組織한 '愛國金彩回(愛國金釵會)'의 幹事
-1938年 6月 8日 朝鮮女子基督敎靑年聯合會에서는 委員會를 開催하고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世界氣廳으로부터 退맹키로 決意하는 同時, 內鮮一體란 單一國民의 理念 下에 日本旗廳에 加盟키로 하였는데, 이때 京城實行委員이다.(매일신보 1938. 6. 9)
-1938年 6月 20日 이화여전과 이화보肉의 4百名 處女들로 '總候補國을 內助한다'는 愛國子女段을 組織
-1939年 李花女子專門學校와 이화保育學校의 校長으로 就任
-1940年 10月 國民總力朝鮮聯盟 理事
-1940年 10月 16日 國民精神總動員 朝鮮聯盟 發起人, 理事
-1941年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指導委員
-1941年 9月 16日에 前朝鮮에 6個班을 動員, 10月 30日부터 1週日間 39個所에서 '否認生活定義'라는 連載로 講演班을 編成하였을 때 제5반으로 平壤, 鎭南浦, 按酒, 新義州, 先天, 定住에서 講演活動
-1941年 10月 22日 現在 조선임전보국단 評議員
-1941年 11月 15日 創立된 朝鮮言論輔國會 理事
-1941年 12月 2日을 期하여 著名한 夫人講師를 各地에 派遣하여 全國認識과 徵兵, 徵用制의 趣旨를 徹底히 하는 巡廻講演을 하기로 하였는데 金活蘭은 忠淸北道에 派遣되었다.
-1941年 12月 27日 午後 2時 府民館 大講堂에서 조선임전보국단 決戰 否認大會를 結成하고 午後 6時 '女性의 武裝'이라는 練祭로 講演
-1942年 2月 15日 富民會館에서 열린 영(英) 東洋侵略의 牙城 싱가폴 攻略 大講演會에서 '大동아 建設과 우리의 準備'라는 練祭로 講演
-1945年 朝鮮言論輔國會 理事

-1946年 9月 파리에서 열린 國際聯合總會 韓國代表
-1956年 11月, 1957年 10月, 1958年 10月, 1959年 9月, 1965年 12月 等 다섯 次例에 걸쳐 國際聯合總會 韓國代表로 參席
-1961年 9月 이화여자대학교를 停年退職하고 名譽總長 兼 財團 理事長으로 奉職
-1962年 11月, 1964年 11月, 1966年 11月의 第12~14次 유네스코 總會의 韓國 首席代表 및 代表로 參席
-1963年 敎育部門 대한민국장 受賞
-1965~1970年 死亡 時까지 大韓民國 巡廻大使로 任命되어 活動함
-1970年 死亡 後 大韓民國 一等修交勳章이 追敍됨

金活蘭의 親日行跡

<<親日의 길 걸은 女性 指導者의 代名詞>>

<敎育, 基督敎界 女性 指導者의 代名詞>

- 金活蘭은 韓國 近代女性史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重要한 人物이다. 우리나라 最初의 '女性博士 1戶이며 日帝 下에서 專門學校의 唯一한 女性校長 그리고 YWCA 創立者' 等이라는 修飾語와 함께 敎育, 基督敎界의 代表的인 人物로 손꼽혀 왔다.

그리고 8.15 解放 以後에는 이화여대 總長職과 여러 學校의 理事長職을 맡았으며, 社會團體로는 YWCA, 韓國女性團體協議會, 大韓婦人會, 主婦클럽聯合會 等 女性團體를 設立하고 會長 等의 任職員을 歷任하였고 政府樹立 直後에는 유엔總會 韓國代表, 公報處長, 大韓民國 巡廻大使, 韓國아시아反共聯盟 理事 等 政治, 外交活動度 하였다.

이러한 活動의 功勞로 敎育部門 대한민국장, 大韓民國一等修交勳章, 필리핀으로부터 막사이사이 公益部門上, 美國으로부터 宗敎指導者에게 주는 다락房賞을 받았다.

그러나 敎育, 女性界에서 그가 누렸던 名聲과 地位만큼이나 日帝末期에는 當時 活動한 어느 女性보다도 자주 親日團體에 이름을 내놓았고, 많은 親日 論說을 發表했으며, 日帝의 皇國臣民化 政策에 副應하는 行動을 取했다.

<民族主義者 梨花學堂 敎師 金活蘭>

- 그가 梨花學堂 大學科를 卒業하고 梨花學堂 敎師로 있을 때 3.1 運動이 일어났다. 그 當時 그는 地下獨立運動 組織과 連結되어 있었다. 그의 自敍傳 '그 빛 속의 작은 生命'을 보면 當時 狀況을 이렇게 記錄하고 있다.

'나는 참으로 重大한 일을 맡고 있었던 것이 事實이었다. 그것은 發覺되기만 하면 假借 없이 重한 刑罰과 犧牲을 부를 만한 일이었던 것이다. 나는 祕密獨立運動團體에서 一部의 役割을 맡고 있었다. 그것은 學校와 敎會女性團體로부터 海外에 있는 獨立運動團體로 보내는 獨立運動資金을 中央本部에 傳하는 일이었다. 나는 嚴重한 指令 下에 움직였다.'

이 일로 하여 1年 남짓 逃避生活을 하고 그는 다시 梨花學堂 敎師職을 맡았으며 1920年에는 梨花學堂 學生들로 組織된 傳道大를 이끌고 平壤, 新義州 等 北部地方 宣敎에 나서기도 하였다.

1922年 5月頃 金活蘭은 유각경, 김필례와 함께 YWCA를 創立하고, 7月末 美國 留學의 길에 올랐다. 留學 中에는 YWCA 關聯 國際會議에 몇 番 參席한 것 外에는 祖國獨立을 爲해 일하자는 現地 獨立運動團體들의 要請을 모두 拒絶했다.

- 1926年 말부터 民族, 社會 양 女性運動 陣營間 統一戰線 結成 움직임이 活潑했다. 美國에서 歸國한 뒤, 基督敎界 核心人物로 떠오른 金活蘭度 이러한 움직임을 멀리 할 수 없었다.

1927年 5月 27日 마침내 民族, 社會 兩陣營이 손잡은 槿友會(勤友會)가 誕生했다. 槿友會 創立 初, 金活蘭은 基督敎界 代表로서 發起總會 準備委員, 創立總會 臨時議長, 初代 中央執行委員을 맡으며 活潑한 活動을 보였다.

以後 槿友會는 1928年 7月의 第2次 中央執行委員會는 社會主義 勢力이 大擧 進出했다.
金活蘭은 2次 中央執行委員會 檢査委員으로 選出되었으나 그 直後 任意로 活動을 中斷해버렸다. 그는 自身이 注力할 곳은 槿友會가 아니라 學校, 敎會, YWCA 等 基督敎界라고 생각한 것 같다.

<反民族行爲의 時點>

- 金活蘭의 親日行爲는 1937年 이화여전 副校長 時節부터 始作된다. 日帝가 中日戰爭을 일으키고 植民地 朝鮮을 戰爭基地로 만드는 時點이다. 金活蘭은 愛國金彩回(愛國金釵會)에 發起人으로 參與했다. 日帝의 侵略戰爭에 金비녀를 뽑아 바치는 이 團體에 加擔한 것은 明白한 反民族行爲라 아니할 수 없다.

以後 그의 이름은 朝鮮夫人硏究會, 國民精神總動員 朝鮮聯盟, 朝鮮敎化團體聯合會,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朝鮮言論輔國會 等 日帝가 만든 온갖 團體의 幹部職에 가장 자주 오르내렸다.

그런 가운데 1938年 6月 20日 이화여전과 이화보肉의 4百名 處女들로 '總候補國을 內助'한다는 愛國子女團을 組織하였다.

그리고 夫人總蹶起促求講演會, 時局否認講演會, 學兵勸誘啓蒙督勵半 講演 等 全國을 돌며 日本의 侵略戰爭에 協助하는 演說을 하고 다녔다. 야마機 카쓰란(人城活蘭)이라고 創氏改名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1938年 6月 8日 朝鮮 YWCA를 日本 YWCA에 統合시키는데 앞장섰다. 이 때 會長이 金活蘭이었다.

<學兵, 徵兵을 勸誘>

- 1941年 12月 太平洋戰爭 以後 日帝는 創氏改名을 强要하고 志願兵制에서 나아가 徵用, 徵兵, 挺身隊 等의 强制 連行을 始作하였다. 同時에 植民政策을 效率的으로 遂行하고 宣傳하기 위해 各種 親日團體를 結成하여 우리 民族의 精神까지 앗아가려는 온갖 策動을 다하였다.

그는 各種 親日團體의 幹部로서 夫人蹶起促求講演, 決戰否認大講演, 放送 等을 통해 日帝의 侵略戰爭을 美化하고 內鮮一體, 皇民化 施策을 宣傳하며 一般 女性이나 女學生들에게 '어머니나 딸, 동생으로서' 徵兵, 徵用, 學兵 動員에 對한 理解를 促求하였다.

擴張되는 戰線을 日本人 軍人으로만 막을 길이 없자 全面的인 徵兵制를 實施하여 朝鮮의 男兒들을 侵略戰爭의 銃알받이로 삼고자 한 決定에 對해 그는 다음과 같이 感激하였다.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徵兵制라는 커다란 感激이 왔다……. 只今까지 우리는 나라를 위해서 貴한 아들을 즐겁게 戰場으로 내보내는 內地의 어머니들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나 半島女心 自身들이 그 어머니, 그 아내가 된 것이다……. 이제 우리도 國民으로서의 最大 責任을 다할 機會가 왔고, 그 責任을 다함으로써 眞正한 皇國臣民으로서의 榮光을 누리게 된 것이다. 생각하면 얼마나 惶悚한 일인지 알 수 없다.'('징병제와 半島 女性의 覺悟', 新世代 1942. 12)

'學徒兵 出陣의 北은 울렸다. 그대들은 여기에 발맞추어 勇躍(勇躍) 떠나련다! 가라, 마음놓고! 뒷일의 寵厚(銃後)는 우리 父女가 질 것이다. 男兒로 태어나서 오늘같이 生의 참뜻을 느꼈음도 없었으리라. 學兵制軍 앞에는 洋洋한 傳道가 열리었다. 몸으로 國家에 順(殉)하는 거룩한 使命이 附與되었다.'('뒷일은 우리가', 趙匡 1943.12)

이밖에도 그는 新聞, 放送, 講演을 통해 日帝의 앞잡이로서 內鮮一體, 皇國臣民化 政策을 宣傳하며 우리의 젊은이들을 徵兵, 徵用 學兵으로 내보내는데 앞장을 섰다.

1944年 惡性 眼疾에 걸려 失明할 憂慮가 있다는 醫師의 말에 "남의 貴한 아들들을 사지(死地)로 나가라고 했으니, 장님이 되어도 抑鬱할 것 없지… 當然한 刑罰"이라고 말하였다 한다.(김옥길의 '金活蘭 博士 素描')

解放 後 金活蘭은 大部分의 親日經歷을 가진 人物들과 마찬가지로 그가 擇한 政治勢力은 '親美反共'을 내세운 政治權力과의 密着이다. 그는 單 한番도 獨裁權力과 맞서 싸운 적이 없다. 오히려 政權과 '蜜月關係'를 維持하면서 그들의 手足으로 活動하였다.

金活蘭은 分明 卓越한 力量을 지닌 女性 指導者다. 그러나 그 卓越한 力量은 韓國近代史가 屈折을 겪는 主要 고비마다 多數의 韓國人을 위해서가 아니라 少數의 支配權力을 위해 發揮되었다.

警察이나 軍隊, 行政機關에 所屬되어 抗日運動家와 民族聲援을 彈壓한 사람들과는 다르지만, 文化, 敎育家로서 日帝에 協力한 그의 役割은 決코 가벼울 수 없는 만큼 그가 民族社에 남긴 汚點은 分明히 해야 한다.

<種別 件名 또는 連載>

- 1941年 7月 5日 '愛國精神에 빛나는 寵厚의 覺悟'
- 1941年 9月 19日 '夫人 生活定義 講演' : '前朝鮮 6班을 派遣'
- 1941年 11月 26日 '國民總力中央理事會席 담' : 談話
- 1943年 5月 5日 '家庭도 戰場이다' : 放送
- 1943年 6月 27日 '男子에게支持 않게 큰 決意를 갖고 있다'
- 1943年 8月 7日 '敵 擊滅에 일로 賣盡' : 每日申報 論文
- 1944年 6月 27日 '感激과 重한 責任'

<認容著書>
-親日派 99人, ② 分野別 主要人物의 親日履歷書, 反民族問題硏究所 엮음, (275~283p), 著述者 : 강정숙(영남대 講師, 女性學, 反民族問題硏究所 硏究員)
-親日派 99人, ③ 分野別 主要人物의 親日履歷書, 反民族問題硏究所 엮음, (附錄2 日帝下 親日團體 및 機關 所屬 主要人命錄, 268, 269, 279p)
-親日派 罪狀機, 김학민 鄭雲鉉 엮음, (民族正氣의 審判 : 47, 48p, 親日派 群像 : 354, 386, 387, 431, 442, 443, 447, 448, 452p)
-韓國民族文化大百科 事典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編纂(108~109p)

황신덕(黃信德)의 主要經歷 및 親日經歷

-1889年 平壤 生
-崇義女學校卒業
-1921年 日本와세다대학 修了
-1926年 歸國 後 時代日報, 中外日報記者
-1927年 槿友會 創立會員으로서 活動
-1934~40年 東亞日報 新家政婦 記者

-1938年 5月 24日 鍾路 기독교청년회관에서 女性團體聯合 時局講演을 한때 '非常時局과 否認報國'이란 連載로 講演
-1940年 京城家庭旅宿을 創立, 解放 後에 中央女子中學校로 昇格시켜 校長에 就任
-1940年 10月 16日 發足된 國民總力朝鮮聯盟 厚生部 厚生委員
-1941年 9月 15日 乃至 1週日 豫定으로 女流 地名인 總動員 하는 前衛 女性 激勵臺를 電線 各地로 派遣하여 講演會 或은 座談會, 一般夫人層과 女學校生徒들을 모아놓고 '日本女性의 갈길'로 講演 또는 座談을 한때 淸州, 忠州, 嶺東地域 演士로 活動
-1941年 9月 16日 每日申報에 '廢品을 再生産하여 國家에 必要하게 쓰자'라는 題目의 글을 發表
-1941年 10月 22日 府民館에서 結成된 조선임전보국단 評議員
-1941年 12月 20日 2時 동양劇場에서 時局否認大講演會 年事
-1941年 12月 22日 6時 永登浦演藝館에서 열린 時局否認 大講演會 年事
-1942年 1月 5日 發足된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指導委員
-1943年 1月 國民總力朝鮮聯盟 厚生委員

-1948年 過渡政府 立法委員에 選任 됨
-1952年 女性問題 硏究會 創立會長
-1956年 家庭法律相談所 創設理事長
-1961年 學校法人 추계學院 理事長
-1962年 文化勳章 大統領章을 받음
-1970年 3.1節 女性同志會 副會長에 就任
-1971年 汎太平洋 東南亞 女性協會 會員으로 活動
-1983年 死亡

황신덕의 親日行跡

<<弟子를 勤勞挺身隊로 보낸 女性敎育者>>

<親日性向이 剛했던 中央女高 校長>

日章旗 머리띠를 두른 制服의 女學生이 先生님들과 함께 찍은 한 張의 記念寫眞, 이 寫眞은 1943年 한 女學生이 挺身隊로 差出되어 가기 前 이를 記念하기 위해 찍은 것으로 寫眞속의 校長은 황신덕, 副校長은 박순천이다.

1970年 어느 해 황신덕 敎藏의 病患 消息을 듣고 찾아가 "'先生님, 그때 節 挺身隊로 보내신 것 너무하셨어요. 先生님 가슴 아프라고 하는 얘기는 아니지만 그때 왜 그렇게 하셨어요?' 라고 하였더니 先生님께서 '그래, 네 말이 맞다. 나도 그 일을 後悔하고 있네'라고 처음으로 謝過의 말씀을 하시더군요" 라고 證言하고 있다. (뉴스메이커 19992.6.5)

그러나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황신덕은 우리나라 女性運動의 指導者 中 한 사람이며, 卓越한 女性敎育者이다.

'日帝下의 壓迫 속에서도 屈하지 않고 民族의 自矜을 지키며, 政府樹立에도 重要한 役割을 擔當했던 황신덕', '女性問題의 解決과 그 立地를 構築하는 일에 앞장서 온 황신덕은 우리民族의 受難史와 同時에 그 안에서 얼마나 꿋꿋하게 설 수 있는가에 對한 民族自存의 表象으로 現代 韓國人에게 삶의 한 座標를 提示하고 있다' 等 이것이 황신덕에 對한 一般的인 評價이다.

<各種 親日團體의 幹部와 重責을 맡으며 時局講演 講師로 活躍>

그에 對한 이러한 公式的 評價에도 不拘하고 日帝下의 그의 經歷과 足跡은 '日帝의 壓迫에도 屈하지 않고 民族의 自矜을 지킨 사람'이 아니라 '親日性向이 强한 校長先生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初期에는 愛國啓蒙的 女性運動을 이끌어 온 황신덕은 朝鮮 獨立을 目的으로 左右勢力이 協力하여 建設한 '槿友會' 活動을 그만 둔 以後부터는 積極的인 親日派 女流人士 中의 한사람으로 되었다.

1938年 6月 24日 鍾路 基督敎 靑年會館에서 夫人들을 對象으로 報國을 主題로 한 時局講演會를 開催하고 國防獻金을 募金하였는데, 그 자리에 演士로 參席하여 '非常時局과 家庭經濟'라는 題目으로 講演하였다. 또한 1941年 9月 16日子 每日申報에 실린 '廢品을 再生産하여 國家에 必要하게 쓰자'라는 論說은 겉으로는 節約精神을 主張하는 것이지만 結局에는 가뜩이나 굶주리고 疲弊해진 民衆들을 쥐어짜서 日帝의 展示品을 動員하자는 것이었다.

'展示生活과 婦人道德'이라는 主題의 座談이 每日申報 1942年 1月3~10日子에 5回에 걸쳐 蓮堤되었는데, 황신덕은 김봉희(金鳳姬), 임효정(林孝貞), 아라이(新井昌子) 等 6名과 함께 着席하였다.

座談 參席者들은 '새 時代의 道德은 個人에서 公衆道德으로', '消極的인 것을 버리고 情에서 同意 道德으로' 等을 論하고 있으나 中心 內容은 展示에 國家를 위하여 女性들이 積極 呼應하고 나서자는 것을 骨子로 하고 있다.

每日申報 1941年 12月 25日子에는 '停戰(征戰)을 뒤에서 지키는 盟誓-勤勞의 精神'이라는 題目으로 勤勞精神의 신명을 갖고 責任을 다하자는 趣旨의 글을 실었다. 또 '어머니의 責任이 中隊'라는 글에서는 "海軍 志願兵制度를 實施한 우리는 舊君臣(九軍神)과 같이 한 番 나라를 위해 죽을진대 '죽음'을 생각지 않는다는 그러한 偉大함을 길러내는 어머니가 되도록 努力해야 할 것입니다" 라고 强辯하고 있으며, '前衛 女性激勵臺'로 淸州, 忠州 嶺東 地方을 巡廻하며 講演하고 다녔다.

-그는 글이나 講演을 통한 活動뿐만 아니라 各種 親日團體의 幹部, 任職員을 맡아 活動하였다. 황신덕은 1940年 19月에 結成된 '國民總力 朝鮮聯盟' 厚生部 委員職을 맡았으며, 1941年 10月 22日에 親日勢力을 總網羅하여 組織된 '조선임전보국단' 에도 몇 안 되는 女性 評議員 한사람으로 參與하였다.

또 1942年 1月 5日 조선임전보국단 傘下機關으로 寵厚否認 陣營을 網羅한 '朝鮮臨戰 保國團 부인대'가 發足되었는데 황신덕은 그 團體에서 中樞的 役割을 擔當하였다. 그리고 徵兵, 學兵, 海軍志願兵 制度가 잇따라 實施되던 1943年 무렵부터는 志願兵과 學兵으로 나갈 것을 强要하는 데도 앞장섰다.

<槿友會에서 各種 親日團體의 任員으로 活動>

-황신덕은 記者로 在職하면서 愛國啓蒙運動系列의 女性運動을 主導하였다. 1927年 女性運動과 抗日運動의 一元化라는 目標 아래 女性運動界가 網羅하여 槿友會를 創立하였을 때 황신덕은 21名의 中央執行委員 가운데 한 사람으로 重責을 맡았으며, 中央機構의 部署에서 敎養敎育部 常務職을 歷任하였다.

1928年 第1回 大會에서 地方과 海外支社의 代表가 追加되어 31名으로 中央執行委員會가 構成될 때에도 황신덕은 다시 執行委員會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槿友會가 解體되고 나서 日帝의 朝鮮人 彈壓政策이 더 酷毒해지고 露骨化되자 親日人士로 變貌하게 된다.

-中央女高의 前身인 京城家庭義塾을 1940年 10月 37名의 新入生으로 始作하였다. 그런데 황신덕은 이 時節 이미 各種 親日團體에 깊이 關與하여 日帝에 積極 協力하는 人士로서 活動하고 있었다.
1940年 37名으로 세운 學校는 1945年 1月에 私立學校 規定에 依해 中央女子商科學校로 認可를 받게 된다.

1983年 11月 22日 死亡하기까지 황신덕은 추계學院 理事長으로 있었으며 수많은 女性團體에 關與하였고, 3.1 女性同志會 副會長을 歷任하였다.

<認容著書>
-親日派 99人, ② 分野別 主要人物의 親日履歷書, 反民族問題硏究所 엮음(289~294p), 著述者 : 장하진(충남대 敎授, 社會學)
-親日派 99人, ③ 分野別 主要人物의 親日履歷書, 反民族問題硏究所 엮음(附錄2 日帝下 親日團體 및 機關所屬 主要人命錄 268~270p)
-親日派 罪狀機, 김학민 鄭雲鉉 엮음(民族正氣의 審判 : 39, 54p)
-민족문화대백과사전 25, 한국정신문화연구원 編纂(484p)

고황경(高凰京)의 主要 經歷 및 親日經歷

-1909年 서울 生
-1928年 日本 도지샤(同志社) 如前 英文科 卒業
-1931年 日本 도지샤(同志社) 如前 法學部 卒業
-1937年 美國 미시간大學 大學院에서 哲學博士 學位 받음

-1937年 1月 總督府 學務局 斡旋으로 '朝鮮夫人問題硏究會'가 造作됐을 때 重要한 核心的 役割 擔當
-1937年 8月 6日 朝鮮中央情報委員會의 勸誘로 結成된 '愛國金彩回(愛國金釵會)'의 幹事
-1938年 6月 8日 朝鮮女子基督敎靑年聯合(YWCA)回에서는 委員會를 開催하고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世界氣廳으로부터 退맹키로 決意하는 同時, 內鮮一體란 單一國民 理念 下에 日本 YWCA에 加盟키로 했는데 金活蘭과 함께 京城府 實行委員(每日申報 1938年 6月 9日 發表)
-1938年 9月 12日부터 '朝鮮夫人問題硏究會'의 活動을 宣傳 啓蒙하기 위해 13度 巡廻 講演視 홍승원(洪承嫄)과 함께 全南北을 맡아 講演
-1940年 10月 16日 國民總力朝鮮聯盟이 發足됐을 때 慘事가 됨
-1941年 9月 7日 '臨戰對策 大演說回'를 마친 後 臨戰對策協議會에서는 '寵厚奉公(銃後奉公)은 債券으로부터'라고 외치며 街頭販賣했는데 그는 신흥우, 主要한 等과 함께 西大門에서 債券을 販賣
-1941年 10月 17日 時局否認 大講演會가 龍山 鄰保3에서 열렸을 때 演士로 講演
-1941年 10月 30日부터 1週日間 全鮮 39個所에서 '否認生活定義' 講演會를 開催했는데 第 2班으로 忠淸道 地方(淸州, 大田, 忠州, 公州, 强勁)으로 屬해 講演
-1942年 1月 5日 조선임전보국단의 傘下機關으로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가 發足됐을 때 指導委員으로 選出되어 活動
-1943年 8月 5日子 每日申報에 '徵兵 感謝와 우리의 覺悟, 建軍 精神에 透徹'이라는 題目의 글을 發表

-1945年 京畿女子高等學校 校長
-1946~48年 美軍政에서 保健厚生部 婦女局長
-1949~50年 美國 프린스턴대학에서 硏究活動
-1960~63年 유엔總會 韓國代表로 參席
-1958~86年 대한어머니회 會長
-1961~84年 서울여자대학 學長
-1963~67年 걸스카우트 團長
-1988年 學術院 終身會員
-1989年 서울여대 名譽總長
-2000年 死亡

고황경의 親日行跡

<<黃道精神 선양에 앞장선 女性 社會學者>>

<博士學位 받고 歸國 直後부터 植民地 社會敎育에 加擔 協助>

-고황경은 日帝時期에 日本과 美國의 大學에 留學했으며 日本에서는 英文科와 法學部를 卒業했으며, 1937年 美國 미시간大學 大學院에서는 哲學博士 學位를 받았다.
博士學位를 받고 歸國하여 그는 이화여전 敎授로 在職하게 되나 1937年부터 바로 親日集團에 加擔 協助하는 行跡으로 남기고 있다. 日帝가 植民地 政策을 强化하는 社會敎化敎育을 强化하기 위해 各種 御用團體를 組織토록 했다.

그 一環으로 1937年 1月 總東部 學務局 斡旋으로 '朝鮮夫人問題硏究會'가 組織됐다. 이 團體는 總督府의 '非常時 國民生活 改善策'에 呼應하여 '街情報局運動으로서의 國民 生活의 基本良識'이라는 것을 制定했다.

展示에 맞게 家庭生活을 簡素化하는 것이었는데, 이 團體는 新進 女性을 總網羅해 每月 마지막 土曜日을 會合일로 定하고 生活改善部와 收養父를 두어 活動했다.
여기서 고황경은 重要한 核心的 役割을 擔當했다. 이 團體의 活動을 宣傳 啓蒙하기 위해서 11名으로 構成된 巡廻講演班을 結成하여 1938年 9月 12日부터 13度를 巡廻講演했으며, 그는 全南北을 맡아 講演했다.

1937年 1月 總督府 社會敎育科가 주동해서 '放送宣傳協議會'가 發足됐는데 이 亦是 '日本 國民으로서 부끄러움이 없는 生活, 卽 耐乏과 節約을 戰爭을 이겨내고 신명을 天皇께 기꺼이 바치게 한다는 社會敎育을 遂行하게 할' 目的으로 修養講座, 否認講座, 常識講座 等의 放送講座를 實施했다. 여기에도 고황경은 否認講座를 맡는 役割을 했다.

<愛國金彩回 幹事로 活躍>

-朝鮮夫人問題硏究會에서 活躍하던 고황경은 '愛國金彩回'의 幹事를 맡게 됐다. 1937年 8月 16日 朝鮮중양情報委員會의 勸誘로 貴族의 妻와 中堅女流를 網羅해서 結成된 이 團體는 한마디로 말해서 金비녀 金가락지를 뽑아 日帝의 國防費로 獻納하자는 戰爭協力團體였다.

同時에 愛國金彩會는 '황군원號'를 目的으로 하면서 皇軍의 '환 송영, 寵厚家庭의 慰問 激勵, 寵厚家庭의 弔問, 一般 朝鮮夫人에 對한 황군원湖의 强化 및 國防費의 獻納 等을 事業計劃을 定했으며 陸軍病院 訪問, 慰問金 傳達, 國防獻金, 將兵慰問을 實施했다.

1939年 9月 10日 '東洋地廣' 主催의 '內鮮一體 座談會'에 參與했으며 1941年 '債券가두遊擊隊'에 西大門臺로 編成되어 郵遞局 앞에서 신흥우, 主要한 等과 함께 債券을 販賣했다.

1942年 1月 5日 조선임전보국단의 傘下機關으로 이른바 寵厚否認 陣營을 總網羅한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가 發足됐는데 고황경은 이 團體의 指導委員으로 活動했다. 그리고 1943年부터는 志願兵과 學兵을 勸誘하는데도 앞장섰다. 이러한 活動의 一環으로 每日申報 1943年 8月 5日子에 '徵兵感謝와 우리의 覺悟, 建軍精神에 透徹'이라는 題目으로 글을 썼다.

-解放이 되자 고황경은 다른 親日 女流名士와 마찬가지로 鎭靜한 自己反省 없이 分斷 祖國의 敎育에 中心的인 役割을 했다.

그는 또 美軍政下에서는 保健厚生部 婦女局長을 歷任했다. 그리고 1960~63年에는 유엔總會 韓國代表로 參席했으며, 1961~84年 서울여대 學長, 學術院 終身會員을 歷任하였으며, 大韓民國文化對象 國民褒章 동백장, 5.16 民族賞을 受賞했다.

<認容著書>
-親日派 99人 ②, 分野別 主要人物의 親日履歷書, 反民族問題硏究所 엮음,(284-288p), 著述者 : 장하진(충남대 敎授. 社會學)
-親日派 99人 ③, 分野別 主要人物의 親日履歷書, 反民族問題硏究所 엮음, (附錄2. 日帝下 親日團體 및 機關 所屬 主要 人名錄, 270p)
-親日派 罪狀機, 김학민 鄭雲鉉 엮음, (民族正氣의 審判: 35, 53p, 親日派 群像 : 391, 443, 445p)

박인덕(朴仁德) 主要經歷 및 親日經歷

-1896年 平南 龍岡 生
-1916年 梨花學堂 大學과 卒業 同時에 梨花學堂 幾何 體育 音樂 敎師
-1919年 3.1 獨立萬歲運動에서 民族精神을 鼓吹하고 學生을 煽動하였다는 罪目으로 붙잡혀 4個月間 서대문형무소에서 獄苦를 치름
-1919年 11月 大韓愛國回 事件으로 獄苦를 치름
-1922年 排貨女高 敎師로 敎育界에 復歸하면서 新聞 雜誌 講演을 통해 女權伸張과 女性啓蒙運動을 위하여 活動
-1923年 9月 監理敎 女子神學校에서 禁酒 禁煙運動을 主要 活動으로 하는 '朝鮮女子基督敎節制會'를 發足하여 會長으로 活動
-1921~26年 배화여고와 女子神學校에서 英語 音樂을 가르침
-1926年 美國 조지아州의 웨슬레안大學에 留學해 社會學 文學博士 學位를 받았고, 컬럼비아대학 師範大에서 敎育學 文學碩士를 받음
-1928年 2月 뉴욕에서 김마리아, 황애덕(黃愛德) 等과 民族主義 團體인 근화회(槿花會)를 勃起하여 活動
-1935年 '農村交易指針'을 發刊해 農村啓蒙運動

-1941年 德化旅宿(德和女塾) 設立 일에 檢事正 野마사와(山澤) 및 나가사키(長崎), 球라시게(倉茂) 報道部長, 梨花餘學校 신도순(辛島純 : 元 이름은 辛鳳祚) 等이 祝辭를 읽었고 敎師珍島 녹기연맹의 쓰다(津田節子), 靑華旅宿 敎師가 겸하는 境遇가 大部分이었다(淸田美智子, '德化旅宿을 訪問하고' 綠旗 1941.6)
-1941年 8月 25日 府民館에서 臨戰對策協議會를 開催하였는데 實踐委員으로 選出됨
-1941年 8月 30日 '나서라 增産 建設(絶對的인 國家 要請)'이라는 要旨로 談話文 發表
-1941年 9月 4日 府民館에서 臨戰對策演說會를 開催하였을 때 '勝戰의 길은 여기에 있다'는 練祭로 講演
-1941年 臨戰保國團 準備委員會 準備委員
-1941年 9月 7日 臨戰對策講演會를 끝마친 臨戰對策協議會에서는 '이로써 實踐으로!'라는 瑟러건을 세우고 債券가두遊擊隊로 나섰는데 박인덕은 尹致昊(尹致昊) 等과 함께 鍾路臺에 나섰다
-1941年 11月 15日 創立된 朝鮮言論輔國會 理事로 選出됨
-1941年 12月 18日 同性商高에서 時局否認 大講演會가 열렸을 때 모윤숙(毛允淑)과 함께 講演
-1941年 12月 20日 '停戰(征戰)을 뒤에서 지키는 盟誓'라는 要旨로 每日申報에 論文 發表
-1941年 10月 22日 府民館에서 結成된 조선임전보국단 決戰否認大會를 結成하고 午後 6時 講演會 때 社會를 맡아 '우리 1千5百萬 女性은 堂堂한 皇國女性으로서의 天皇陛下께 忠誠을 다할 千載一遇의 時期입니다' 等의 內容으로 開會辭를 函
-1942年 1月 5日 結成된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指導委員
-1942年 2月 15日 영(英) 東洋侵略의 牙城 싱가폴 攻略 大講演會에서 '東亞餘名과 半島女性'이라는 練祭로 講演
-1943年 朝鮮敎化團體聯合會 否認啓蒙督勵半
-1945年 6月 8日 朝鮮言論輔國會 理事

-1980年 死亡

박인덕의 親日 行跡

<<皇國臣民이 된 女性啓蒙가>>

<女性啓蒙家로서 華麗한 活動>

-박인덕은 1916年 梨花學堂 大學科를 卒業하였다. 이 時期에 梨花學堂 大學과는 國內 最高의 專門課程이었고 卒業生은 梨花學堂 내에서만이 아니라 朝鮮社會의 注目과 期待를 한 몸에 받기 마련이었다. 박인덕은 卒業과 함께 梨花學堂에서 幾何 體育 音樂을 맡아 가르쳤다.

그는 이 時期에 啓蒙運動的 次元에서 社會參與 活動도 하였다. 그러다가 3.1 獨立萬歲運動 때에는 民族精神을 鼓吹하고 學生을 煽動하였다는 罪目으로 警察에 連行되어 4個月 동안 監獄生活을 했다. 그리고 出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해 11月 또한 大韓愛國回 事件으로 投獄되는 苦楚를 겪었다.

結婚 後 박인덕은 1923年 9月 監理敎 女子神學校에서 禁酒 禁煙運動을 主要 活動으로 하는 朝鮮女子基督敎節制會를 發足하여 會長으로 活動하는 等 社會活動을 繼續하였다.
1921年부터 1926年 9月까지 배화학교와 女子神學校에서 英語와 音樂을 가르치다 배화학교 外國人 敎師의 協助로 1926年 美國 웨슬리안 大學으로 留學을 떠났다. 그는 이 大學에서 社會學 文學博士 學位를 받았고 컬럼비아 大學 師範大에서 敎育學 文學碩士 學位를 받았다.

-그는 美國에서도 社會活動을 繼續했는데 民族主義 團體인 근화회에서 活動한 것이 그 代表的인 例이다. 근화회는 1928年 2月 뉴욕에서 김마리아, 황애덕 等 女子留學生들의 勃起로 組織된 것으로 出版이나 巡廻講演 等을 통해 國內情勢를 外國人에게 紹介하여 祖國光復에 寄與하려는 團體였다.

1931年 歸國 後 그는 敎師 모임으로 組織되었던 望月俱樂部를 황애덕, 최활란과 더불어 '端正한 職業을 가진 女性'들의 모임인 朝鮮職業夫人協會로 改編하여 女性들을 위한 經濟學 講演을 여는 等의 活動을 하였다. 1933年에는 農村 婦女를 위한 移動學校를 開設하기도 했으며 監理敎 農村 婦女指導者 수兩訴의 일을 하기도 했다.

1935年에는 '農村交易指針'을 發刊하여 宗敎 活動의 一環으로서 農村啓蒙運動을 하였다. 그의 活動은 主로 農民을 啓蒙의 對象으로 把握하고 行해졌으며 그들의 處地를 改善하는 것에 主要한 關心을 기울였고 無知로부터의 解放이 生活改善의 主要 手段이라고 보았다.

이처럼 日帝에 對한 抵抗보다는 妥協的인 態度를 取하면서 合法的 空間에서 運動하는 그의 性向이 後날 反民族行爲로 나아가는데도 거리끼지 않게 만드는 要因이 되지 않았을까.

<녹기연맹(綠旗聯盟)의 支援을 받아 德化旅宿을 設立하여 急激한 變身>

-美國에서 朝鮮民族의 存在를 알리며 民族主義 團體에 參加했던 그가 어떤 契機로 反民族行爲者가 되었는가. 이에 對한 분명한 記錄은 없다. 그러나 當時의 社會情勢와 密接한 關聯이 있으리라 推定할 수 있다.

1935年頃부터는 日帝가 基督敎에 對해서도 神社參拜니 하는 各種 施策을 强要하여 强力하게 統制하였다. 이때부터 國內의 民族主義系 人物들 大部分이 이미 日帝에 對해 鬪爭性을 잃어버린 지 오래 되었다.

-박인덕의 親日行脚은 德化여숙의 設立에서 始作된다.
德化旅宿은 녹기연맹 附設 靑華旅宿을 본 따 姊妹學校로서 만들어졌다. 後代의 記錄에 依하면 덴마크의 實業學校를 本보기로 삼은 것이라고 하나 德化旅宿은 陰으로 陽으로 녹기연맹의 도움을 받은 것이 分明하다.

박인덕이 녹기연맹과 關聯을 갖게된 것은 日本語를 배우게 되면서부터이다. 녹기연맹의 쓰에(須江愛子)에게서 배우기 始作하여 하시키打(橋北町)의 '國語講習會'를 거쳤다. 이러한 가운데 녹기연맹은 自己 끄나풀로서 박인덕을, 박인덕은 自身의 立地를 强化해줄 수 있는 學校 設立의 志願者로서 녹기연맹을 選擇한 셈이다.

1941年 4月 18日 德化旅宿 設立일에 檢事正 野馬社와 및 나가사키, 球라시게 報道部長 等이 祝辭를 하였고 敎師珍島 녹기연맹의 쓰다, 靑華旅宿 敎師가 겸하는 境遇가 大部分이었다. 每日 아침마다 '皇國臣民의 敍事'를 읊고 靑華旅宿과 조선신궁에 合同 參拜하는 一種의 녹기연맹의 附設學校와 같은 것이었다.

-1941年 8月에는 臨戰對策協議會의 結成에 委員 資格으로 參與했으며 9月에 김동환, 신태악, 崔麟 等과 함께 '臨戰對策協議會'에서 '勝戰의 길은 여기에 있다'는 題目으로 演說하였다.
또한 戰爭非 調達을 위한 債券가두遊擊隊로서 이숙종(李淑鍾), 송금선(宋今璇)과 함께 參加하였다.

그가 그 當時 行하고 다닌 親日行爲들은 1941年 12月 20日 每日申報에 실린 '停戰(征戰)을 뒤에서 지키는 盟誓'라는 글을 통해 明確히 드러난다. "大體 왜 英 美 하고 싸우게 되나를 잠깐 생각합시다...... 重大한 것 中의 하나는 남의 區域에 英 美가 侵犯을 한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한 個人의 問題가 아니라 大東亞에 사는 全 民族에게 끼치는 일이니까 우리는 正義를 위하여 굳게 싸우려는 것입니다"

이제 그는 自身이 工夫하고 講演하고 다녔던 美國을 敵國으로 돌리고 自身의 祖國을 짓밟고 있는 日本 帝國主義를 庇護하여 日本이 일으킨 太平洋戰爭을 '正義의 戰爭'으로 美化하였다.
그는 조선임전보국단의 評議員과 그 夫人代의 指導委員으로서 1941年 12月 27日 決戰否認大會에서 社會를 맡아 "只今은 우리 1500萬 女性이 堂堂한 皇國女性으로서 天皇陛下께 忠誠을 다할 千載一遇의 時期입니다. 이에 우리 半島 女性을 代表로 하여 '決戰否認輔國會'를 組織하자"고 하였다.

그리고 戰爭이 消耗戰으로 되면서 軍人의 充員이 急해지자 日帝는 徵兵制를 計劃하고 學兵을 끌고갔다. 이를 위해서 優先的으로 宣傳隊員으로서 各種團體를 動員하였다. 이때 박인덕은 '새 어머니 될 우리의 感激과 抱負'를 論題로 한 座談會에 參席하였고 學兵을 動員하기 위해서 朝鮮敎化團體聯合會 否認啓蒙督勵半으로 派遣되었다.
以外에도 朝鮮言論輔國會의 理事를 맡는 等 日帝가 敗亡할 때까지 各種 反民族團體나 各種 討論會 講演會의 演士로서 그리고 司會者로서 猛活躍하였다.

<解放 後 反託 反共 演士로 活躍>

-解放 前에는 美國을 非難하던 입으로 박인덕은 日帝가 敗亡하고 美軍이 들어오자 突變하여 美軍政에 密着되어 美蘇關係의 冷戰이 始作되는 틈 속에서 다시 變身을 꾀하였다.
1946年 信託問題를 둘러싸고 反託運動體가 總集結될 때 女性團體도 獨立促成愛國婦人會로 結集되었다. 박인덕은 獨立促成愛國婦人會의 全國 夫人大會에서 '民主主義와 女性'이라는 主題로 講演을 하는가 하면 會議의 司會者로 猛活躍을 하고 情報部長으로 選任되어 全國的 舞臺에 再登場하였다. 뿐만 아니라 美軍政廳에 依해 第1回 國際婦人大會에 南韓代表로 美國에 派遣되었고 美國에서 反託輿論을 造成하는데 努力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以後 美國에서 著述 講演에 熱中하여 自敍傳的인 冊 2卷과 또 한卷의 冊을 썼다.
그 印稅와 講演料 等을 基金으로 1961年 以後 人德失業專門大學 等을 設立하여 人德學院 理事長이 되었다. 그리고 日帝時期 學校 設立者가 되었던 大部分의 人物들이 學校를 그들의 子孫에게 물려준 것처럼 그 亦是 딸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認容著書>
-親日派 99人, ② 分野別 主要人物의 親日履歷書, 反民族問題硏究所 엮음(295~302p)
著述者 : 강정숙(영남대 講師. 女性學, 反民族問題硏究所 硏究員)
-親日派 99人, ③ 分野別 主要人物의 親日履歷書, 反民族問題硏究所 엮음(附錄2 日帝下 親日團體 및 機關所屬 主要人命錄 270p)
-親日派 罪狀機, 김학민 鄭雲鉉 엮음(民族正氣의 審判 : 33~35,39,47p, 親日派 群像 : 366, 441, 445, 447, 451, 466p)
-親日變節者 33人, 무크 親日問題硏究 第2輯, 編輯委員 : 김삼운 임해봉 김승태 김순석 鄭雲鉉 (92~100p)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編纂(59~60p)

송금선(宋今璇)의 主要 經歷 및 親日事項

-1905年 京畿道 出生
-東京女子高普(東京女子高普)
-德性女子實業學校腸

-1940年 10月 16日 發足된 國民總力朝鮮聯盟 軟性部 軟性委員
-1941年 9月 1日 '前衛女性 激勵臺'라는 題目으로 天安, 大田, 公州 各地로 巡廻講演
-1941年 9月 7日 臨戰對策演說會를 끝마친 臨戰對策協議會에서는 '이로써 實踐으로!'라는 슬로건을 세우고 債券가豆乳格으로 나섰는데 송금선은 正敎員(鄭僑源), 이돈화(李敦化), 김사연(金思演) 等과 함께 경성역臺로 나섰음
-1941年 11月 15日 創立된 朝鮮言論輔國會 評議員
-1941年 12月 9日 '最低國民生活은?'이라는 談話를 京城日報에 發表
-1941年 9月 前衛女性激勵代가 戰線(全鮮) 各地로 派遣되어 夫人層과 女學校 生徒들을 모아놓고 '日本이 갈 길'을 主題로 講演會, 或은 座談會를 했는데, 송금선은 天安, 大田, 公州에 派遣됨
-1942年 1月 7日 著名人士들의 放送에서 '生活前에도 이기자'라는 題目으로 放送
-1943年 1月 現在 國民總力朝鮮聯盟 軟性部 軟性委員

송금선의 親日 行跡

<債券가두遊擊隊>

-1941年 9月 7日 臨戰對策協議會에서는 '이로써 實踐으로!'라는 슬로건을 세우고 桐會員 70餘名을 總動員하여 債券가두 遊擊으로 나섰다. 70餘名을 市內 11個 場所로 配置시켜 '寵厚奉公은 債券으로부터'라고 외치며 醜態를 演出했는데 송금선은 正敎員, 이돈화, 박기효(朴基孝), 김사연, 김사연의 父女 손홍원(孫弘遠)과 함께 京城 歷代로 나서서 가두 販賣했다.

<國民精神선양 角度 講演 行脚>

-1939年 8月 5日 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에서는 이달과 來달 中에 各 道路 講師를 派遣하여 國民精神 宣揚에 關한 巡廻講演을 열기로 됐다. 講演할 練祭는 時局進展에 對한 認識과 決心, 總動員 運動의 本位, 百億貯蓄生活 刷新에 關한 것들이며 講師들은 男子 18名, 女子 8名으로 朝鮮 各處로 講演을 다니리라고 한다. 女子部는 송금선, 조기홍(趙圻烘), 이숙종, 손정규(孫貞圭), 홍승원, 유각경(兪珏卿), 차사백(車士伯), 임숙재(任淑宰)이다.

<否認蹶起促求 講演>
-1941年 9月 19日 總督府 學務局 軟性科內에 있는 朝鮮敎化團體聯合會에서는 12月 2日을 期해 著名한 夫人講師를 各地에 派遣해 全國 認識과 徵兵徵用制의 趣旨를 徹底히 하는 巡廻講演을 하기로 했는데 송금선은 景氣도 講師였다.

<認容著書>
-親日派 罪狀機, 김학민 鄭雲鉉 엮음, (民族正氣의 審判: 35, 54, 130p, 親日派 群像 : 391, 437, 450, 45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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