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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品 드라마' <추노>, 傑作이 아닌 理由는? </추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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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品 드라마' <推奴>, 傑作이 아닌 理由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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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品 드라마' <推奴>, 傑作이 아닌 理由는?

[某 피디의 그게 某!] 同意할 수 없는 時代, 어떻게 살 것인가

스무 某 - <推奴>街 남긴 것

世上을 怨望하지 않는 사람도 있더냐.
- 마지막 回, 대길이 철웅에게


業복이는 虎狼이 사냥꾼이다. 그는 官軍도 쓰지 않는 放砲술을 익혀 능히 使用한, 時代를 앞서갔던 사람이다. 그러나 奴婢로 身分이 굴러 떨어진 後, 放砲술을 使用할 길을 찾지 못한다. 신나는 武勇談을 늘어놓으며 虎狼이와의 對決을 傳해줘야 했을 이 江原道 사나이는 광에 처박혀 새끼를 꼬다, 兩班을 쏴 죽이는데 그가 배우느라 一生을 바친 放砲술을 쓴다.

태하는 朝鮮 最高의 武裝이다. 名譽를 목숨처럼 여기고 部下들을 핏줄처럼 아끼며 올바른 世上을 念願한다. 그러나 그의 劍術은 國家를 保護하고 戰爭에서 勝利하는 데에, 或은 올바른 世上을 세우는 데에 쓰이지 못한다. 逃亡 奴婢 身世가 된 自身을 艱辛히 지켜낼 뿐이다. 그는 스승도 지키지 못한다. 部下도 지키지 못한다. 自身을 쫓는 敵조차 같은 나라 百姓이라는 理由로 죽이지 못한다.

大吉은 奴婢 사냥꾼이다. 저자에서 배운 싸움 實力으로 朝鮮 最高의 推奴꾼이라 불리는 어둠의 사나이. 그가 그렇게 살았던 데는 理由가 있다. 兩班, 常놈 區分 없는 世上에서 사랑하는 女人과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惡鬼처럼 익힌 싸움의 技術은 사랑하던 女人을 安全하게 떠나 보내기 위해, 스스로의 죽음을 재촉하는 데에 쓰인다.

<推奴>의 主人公은 世上에 依해 날개가 꺾였다. 그들이 世上을 살아가고자 希望을 가지고 익혔을 技術은 제 用途로 쓰이지 못한다. 大吉의 칼은 언년이와의 사랑을 지키는 데에 쓰이기는커녕 오히려 언년이의 목을 겨눈다. 業服의 銃口는 虎狼이 代身 사람을 向하며 그를 끊임없이 煩悶하게 한다. 戰場 代身 逃亡 길에 휘두르는 태하의 月刀는 같은 百姓을 차마 죽일 수 없어 虛空을 벤다.

그러나 그들이 칼춤을 추고 銃을 드는 모습만큼은 如前히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이 <推奴>를 보는 理由였다. 挫折한 꿈도 꿈이요, 꺾인 날개도 날개일진대, 제 자리에 있지 않더라도 그 誠實한 움직임의 瞬間瞬間은 戰慄이 일었다. 사람이 삶으로 몸에 익힌 어떤 境地. 그리고 그 境地가 제 자리에 쓰이지 못하는 悽然함. 살아남겠다는 몸뚱이의 意志들이 뿜어내는 아름다움은 <推奴>를 傑作의 門턱까지 데리고 온다.

同意할 수 없는 時代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推奴>는 다른 드라마의 몇 倍나 될 법한 登場 人物을 통해 이 質問을 짜놓는다. 이 가슴 뛰는 質問에 對答을 얻는 過程을 어떻게 풀어나가는가가 <推奴>價 가진 宿題였다. 그러나 이 새벽 찬물 같은 質問에 <推奴>價 내놓은 對答은 <推奴>를 傑作의 班列 바로 앞에서 멈춰 세운다.

▲ <推奴>의 마지막 回에서 主題를 담은 場面은 業服의 宮闕 進入이다. ⓒKBS

<推奴>의 마지막 回에서 主題를 담은 場面은 業服의 宮闕 進入이다. 老比黨의 同志들이 兩班에게 利用 當해 몰살당한 後, 業服은 孑孑單身으로 總 네 자루를 짊어지고 삼보放砲의 弱點을 스스로 補完하며 宮闕에 進入한다. 거기서 그는 偶然히 <推奴>의 惡의 軸, 左議政 이경식을 마주치고 그를 射殺하는 데 成功한다. 그리고 官軍에게 붙들린 業服의 눈빛은 敗北主義와 冷笑에 찌들어 있던 다른 奴婢에게 憤怒와 自覺을 剪夷한다.

드디어 奴婢가 權力의 核心을 무너뜨렸다는 感激은 暫時 제쳐두자. 좀 異常하지 않은가? 業服은 安重根이 아니다. 惡한 權力의 核心을 計劃的으로 除去한 것이 아니다. 그는 宮闕에 進入한 後 눈 앞에 보이는 첫 벼슬아치를 射殺했을 뿐이다. 萬若에 그 벼슬아치가 奴婢 推刷를 禁止시키려던 사람이었다면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悲劇이 되었을 것인가.

業服의 테러는 奴婢들의 連帶를 통해 나온 것이 아니었다. 元來 業服은 그 程度의 테러가 可能한 能力을 지니고 있었다. 結局 業福이 行한 것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對한 例示라기보다, 그동안 難攻不落이었던 左議政 이경식을 奴婢의 손에 떨어뜨린 痛快함을 위한 서비스였다.

그렇다면 主人公 大吉의 죽음은 어떠한가. 大吉은 스스로를 僞惡 속에 가두고 살다 간 마초的인 純情남이다. 끝끝내 마음 한 番 제대로 내비치지 않고 사랑하는 女人을 위해, 그의 男子를 同僚로 맞아들이며 제 발로 죽음 길로 찾아들어가다니 이렇게 슬플 데가 있는가.

그렇다면, 대길이 몸부림치며 살았던 人生은 무엇인가. 그가 '魅力的'人 것과 그의 人生이 '무엇'人家는 別個의 問題다. 大吉은 自身을 마음의 監獄 속에서 꺼내지 않고 義理의 싸움꾼의 魅力을 뽐냈지만 그 에너지는 結局 간 곳이 없다. 大吉이 한 것이 있다면, 大吉만큼 魅力的인 人間이 더 以上 '개죽음' 當하지 않아도 되는 世上을 만들어야 한다는 깨달음을 준 것일 뿐. 그런데 그 '개죽음'마저 드라마的으로 大吉의 魅力을 完成하는 要素가 아닌가. 이 亦是, 同意할 수 없는 時代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質問을 비껴난 結末이다.

勿論 業服의 痛快한 擧事와 大吉의 壯烈한 죽음은 <推奴>가 視聽者를 위해 準備한 가장 뜨거운 膳物이고, 充分히 즐길 만하다. 즐겁기에 <推奴>는 酬酌이다. 그러나 그 즐거움이 <推奴>가 애當初 던졌던 傑出한 質問에 對한 對答은 되지 못한다. 感傷的인 解消일 뿐이다. 推奴가 그려내는 생생한 人物들과 아름다운 미장센들은 이 質問에 熾烈하게 녹아들어가지 못하고 그저 이 時代에 이렇게 悽然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感傷 속에서 머문다.

▲ 推奴가 그려내는 생생한 人物들과 아름다운 미장센들은 이 質問에 熾烈하게 녹아들어가지 못하고 그저 이 時代에 이렇게 悽然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感傷 속에서 머문다. ⓒKBS

이렇듯 <推奴>는 莫强한 感傷主義 안에 視聽者들을 끌어안는다. 흩어진 이야기들은 흩어진 채로 남는다. 그리고 생생한 캐릭터와 아름다운 이미지는 그 可能性을 못다 펼친 채 아쉽게 접힌다. 이는 <推奴>의 中盤部부터 豫見된 일이기도 했다. <推奴>의 主題曲, 任宰範의 '烙印'은 <推奴>의 情緖를 代辯하는 노래다. 後斂句의 클라이막스 한 小節. '하루가 一 年처럼 길구나.' 악다구니 같은 삶을 살아가는 大吉의 情緖를 너무나 잘 드러낸 家事.

그러나 이 노래는 지나치다 싶을 程度로 晝夜長川 쉴 새 없이 드라마에 흘러나온다. 어떤 視聽者는 이를 빗대 이렇게 비꼬았다. '노래가 一 年처럼 길구나'. 그리고 이것이 <推奴>價 擇한 길이었다. 大衆性을 위한 感傷主義. 그리고 <推奴>는 2010年 大韓民國 드라마 판이라는 저자거리에서 오래 記憶될 勝利를 거머쥔다.

<推奴>는 눈 닫고 귀 막고 主人公이 부러진 날개를 퍼덕이려 애쓰는 模樣을 限껏 즐기고 싶었던 魅力的인 드라마였다. 하지만 이제 드라마는 더 以上 神話가 될 수 없다. 2010年은 <모래時計>가 放映될 때처럼 家族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本放送으로 드라마를 보고 各自의 鑑賞을 가슴에 품고 知人들과 史跡으로 몇 마디를 나누는 世上이 아니다. 本放送 以外의 經路로 드라마를 接하고, 匿名의 그늘에서 作家와 演技者를 辛辣하게 公開的으로 人身攻擊하며 낄낄거리는 웹 上의 저자거리가 펼쳐진 世上이다. 그리고 <推奴>는 그 징글맞은 著者에 제대로 烙印을 찍었다.

나는 主人公들이 이루지 못한 꿈이 슬프다. 그들이 제대로 써보지 못한 삶의 技術들이 悽然하다. 그리고 商業的인 成功에도 不拘하고 <推奴>가 아쉽게 멈춰선 傑作의 門턱이 안타깝다. 傑作의 誕生은, 꿈이자 希望의 誕生이다. 그리고 그 誕生의 機會가 한 番 오기도 무척 어렵다. <推奴>는 韓國 드라마의 未來를 열어젖혔으나, 아쉽게 傑作에 못 미친 酬酌으로 끝을 맺는다.

그리고 오늘 나는 우리의 나쁜 世上을 대면한다. <推奴>의 悲壯한 感傷主義가 제대로 成功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사는 世上이 充分히 나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世上이 우리를 充分히 悲壯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世上이 鬱憤을 鑑賞으로라도 풀지 않으면 못 견디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들은 온 힘을 다해 싸웠는데 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인가. 그래, 元來 이런 對答은 드라마에서 求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 안 人物들의 생생함과 이미지를 마음의 動力으로 삼아, 오늘 다시 스스로에게 묻는다.

同意할 수 없는 時代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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