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만   중국   일본 
'샐러리맨 神話' 袁世凱, 왜 破滅했나? - 오마이뉴스

메뉴 건너뛰기

close

베이징 자금성 안의 군기처 건물에 있는 원세개의 초상화.
 베이징 紫禁城 안의 軍機處 建物에 있는 袁世凱의 肖像畫.
ⓒ 김종성

關聯寫眞보기


中國 近現代史에서 袁世凱(위안스카이, 1859~1916年)만큼 獨特한 캐릭터도 없을 것이다. 繼續되는 幸運을 주체하지 못하다가 結局 人生을 不幸하게 끝마친 사람이다.

過去에 失敗한 그는 스물 두 살이던 1881年頃에 軍人 吳長慶의 手下로 들어가 밑에서부터 社會生活을 始作했다. 나중에는 辛亥革命의 渦中에 漁夫之利로 總統이 되는 幸運을 얻더니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皇帝까지 되었다가 온 世上의 非難을 한 몸에 다 끌어안은 채 不過 2個月 만에 물러나고 말았다. 그리고는 尿毒症이란 疾病에 걸려 곧바로 世上을 떠났다.  

袁世凱에게 ‘로또福券’처럼 人生逆轉의 機會를 준 事件은 朝鮮의 壬午軍亂이었다. 壬午軍亂 當時 淸나라 廣東水師提督 吳長慶이 4500餘 名의 軍人들을 이끌고 朝鮮에 들어와 軍亂을 鎭壓했는데, 그 4500餘 名의 軍人들 틈에 袁世凱라는 23歲의 靑年 軍人이 섞여 있었다.

朝鮮에 對한 淸나라의 影響力이 가장 莫强했던 1882~1894年 時期에 朝鮮에서 勤務했다는 事實이 以後 袁世凱의 앞날을 輝煌燦爛하게 만든 決定的 要素였다. 朝鮮問題에 關與한 李鴻章·袁世凱·唐紹儀 等이 當時 或은 그 以後에 中國의 實力者가 된 事實에서 알 수 있듯이, 淸나라 政治人들에게는 朝鮮이란 곳이 一種의 出世 코스나 마찬가지였다.

甲申政變 때문에 朝鮮 現地 責任者인 진수당이 問責性 更迭을 當한 뒤에 袁世凱는 25歲의 젊은 나이에도 不拘하고 진수당의 後任者가 되어 本國의 臺(對)朝鮮 政策을 執行한다. 當時의 實權者인 北洋大臣 李鴻章은 自身이 쉽게 操縱할 수 있는 人物을 朝鮮 責任者로 심어두고자 했던 것이다.

이때 袁世凱의 職銜은 주찰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 乘用도보용支部(駐札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 升用道補用知府)였다. 맨 끝에 있는 補用支部(補用知府)라는 表現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오늘날로 치면 軍需給 候補者 程度의 地位에 오른 것이다.

本國에서는 郡守級 候補者 程度의 待遇를 받지만, 그는 朝鮮에서는 最高位級 淸나라 官吏로서 行世할 수 있게 되었다. 過去에 失敗한 後에 吳長慶의 手下로 들어간 袁世凱에게는 ‘海外派遣 勤務’가 뜻밖의 幸運을 가져다준 셈이다. 

젊은 나이에 벼락出世를 한 袁世凱

젊은 나이에 그것도 挫折 狀態에서 갑작스레 벼락出世를 해서 그런지, 袁世凱는 以後 10年 동안 朝鮮에서 참으로 傍若無人한 行動들만 일삼았다. 그 自身의 立場에서는 젊음과 霸氣를 앞세운 夜深한 行步라고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제3자들에게는 全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袁世凱가 朝鮮에 對해 極度의 內政干涉을 일삼을 뿐만 아니라 高宗 앞에서 人事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西洋 外交官들마저 그의 건방짐과 無禮함을 非難할 程度였다. 그는 高宗을 만날 때면 恒常 三揖禮(三揖禮)를 하곤 했는데, 이런 人事法은 對等한 關係에서나 할 수 있는 것이었다. 一國의 君主를 對等한 親舊 程度로 待遇한 것이다.

안 그대로 自意識이 剛한 高宗이 袁世凱를 볼 때마다 속이 얼마나 부글부글 끓었을 것인가는 어렵지 않게 斟酌할 수 있을 것이다. 한때 袁世凱가 高宗 廢位까지 圖謀한 적이 있었으니, 그가 얼마나 朝鮮 朝廷을 우습게 여겼는지도 斟酌할 수 있을 것이다. 

袁世凱 때문에 西洋列强의 外交官들이 淸나라보다는 日本에 心情的으로 기우는 現象이 나타났음에도 不拘하고, 李鴻章은 袁世凱를 끝까지 든든히 지켜주었다. 吳長慶에 이어 李鴻章이 袁世凱의 든든한 後援者가 되어 주었던 것이다.

袁世凱가 얼마나 幸運兒였는가는, 淸日戰爭 敗北에 責任을 져야 할 자리에 있었음에도 不拘하고 淸나라로 돌아간 뒤에 如前히 出世 街道를 달렸다는 點에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李鴻章의 뒤를 이어 北洋軍閥의 指導者가 되었고, 結局 이것을 바탕으로 1912年 3月에 中華民國 臨時總統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過去에 失敗해서 吳長慶의 手下로 들어갔다가 때마침 朝鮮에 派遣되어 鎭壓軍의 一員이 되었고, 진수당의 失敗 德分에 그 자리를 이어받아 朝鮮 現地 責任者의 地位에 올랐으며, 辛亥革命(1911年) 時期의 어수선한 틈을 타서 孫文을 밀어내고 總統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요즘 말로 하면 그야말로 ‘샐러리맨 神話’의 典型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不幸히도 袁世凱는 中國 最高指導者의 자리를 ‘5年’도 채우지 못했다. 1912年 3月에 總統에 就任해서 1916年에 尿毒症으로 죽었으니, 그는 在任 4年 만에 權座로부터 아주 永遠히 물러나고 만 것이다. 尿毒症이란 要路 缺席 等으로 인해 생기는 疾病으로서 四肢에 痙攣이 일어나기도 하고 또는 昏睡狀態에 빠졌다가 心臟痲痹로 죽기도 하는 病이다.

袁世凱가 權座에 오른 지 4年 만에 悲慘한 죽음을 當하고 만 것은 決코 疾病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疾病은 그의 過慾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고 해도 過言이 아닐 것이다.

그럼, 그의 過慾이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世上을 過去로 되돌려놓으려는 그의 無謀함이었다. 1911年 辛亥革命은 封建制에 對한 中國人들의 明確한 拒否였다. 그리고 그 辛亥革命 德分에 袁世凱도 비록 漁夫之利이긴 하지만 어쨌든 總統 地位에 오를 수 있었다.

袁世凱, 辛亥革命 德分에 總統자리에 오르다

그처럼 辛亥革命 德分에 最高指導者 자리에 오른 袁世凱는 막상 權座에 오르고 나서는 辛亥革命의 精神을 否定하기 始作한다. 反封建 民主革命人 辛亥革命을 뒤엎고 封建的인 皇帝制度를 부활시키려 한 것이다. 그에게는 封建前提時代가 淸算되어야 할 過去가 아니라, 그립고 되돌아가고 싶은 ‘잃어버린 날들’이었던 것이다.

總統이 된 袁世凱가 아예 皇帝까지 되어 보려고 展開한 舊體制 回復運動을, 中國史에서는 袁世凱의 製劑運動(帝制運動)이라고 부른다. 國內의 거센 反撥 때문에 製劑運動이 如意치 않자, 袁世凱는 日本까지 끌어들여 自身의 欲心을 충족시키려 한다. 산동地域의 權益 等을 要求하는 日本의 21個組 要求를 그가 선뜻 受容한 것은, 日本의 도움을 빌려 皇帝 자리에 오르기 위한 布石이었다.

所願대로 1916年 1月에 皇帝 자리에 오르긴 했지만, 繼續되는 國內의 反對運動과 國際社會의 壓力에 밀려 그는 結局 1916年 3月에 皇帝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처음에는 袁世凱를 支持하던 國際社會도 中國人들의 거센 反撥을 보고는 마음을 바꾸어 袁世凱에게 皇帝制度 取消를 要求하는 쪽으로 方向을 旋回한 것이다.

이 過程에서 생긴 心理的 스트레스 等이 原因이 되어 그는 尿毒症에 걸렸고 結局 그 때문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皇帝가 되어 보겠다는 過慾 때문에 自身의 生命마저 잃고 만 것이다.

單純히 皇帝가 되어 보겠다는 野心을 품은 것은 決코 잘못이 아닐 것이다. 누구든지 最高指導者가 되겠다는 野心을 품을 資格이 있기 때문이다.

重要한 것은, 袁世凱가 歷史의 흐름을 거스르는 方法으로 自身의 欲望을 충족시키려 했다는 點이다. 世上은 이미 皇帝體制를 내버리고 民主的인 총통制를 選擇했는데도, 그는 時代의 물결을 거슬러 皇帝制度의 復活을 꿈꾸었다. 옳건 그르건 間에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그 傲慢함이 그를 破滅로 이끌고 간 것이다. 總統 自體도 中國 最高指導者의 자리인데, 그는 거기에 滿足할 수 없었던 것이다.

萬若 皇帝의 復活을 꿈꾸지 않고 總統 職責을 誠實히 遂行했다면, 袁世凱는 歷史에서 이처럼 辱을 먹지는 않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는 以前의 失策에도 不拘하고 오늘날까지 ‘샐러리맨의 偶像’으로 崇拜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自身의 能力을 過信한 나머지 時代의 흐름까지 거스르면서 過去를 回歸시키려 한 그의 傲慢이 結局 그를 파멸시키는 原因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하지만 않았다면, 總統이 된 지 4年 만에 물러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그때그때 審判을 받았더라면, 袁世凱가 그처럼 傲慢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淸日戰爭 敗北와 戊戌變法 失敗 等에 對해 責任이 있는 罪人이다. 이 外에도 그는 數없이 많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辛亥革命 直後의 中國人들은 그런 그에게 罰을 내리지 않았다. 罪人을 벌하기는커녕 도리어 總統으로 뽑아주었으니, 안 그래도 傲慢한 袁世凱가 한層 더 誤만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袁世凱를 傲慢하게 만든 사람들이 結局에는 그를 죽음으로 내몬 셈이다.

或是라도 歷史와 時代의 發展을 거스르는 方法으로 自身의 欲望을 채우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袁世凱를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런 사람은 누구나 다, 袁世凱가 當한 것과 같은 悲慘한 破滅을 비껴갈 수 없을 것이다.


태그 : #統治者 , #反革命 , #袁世凱
댓글
이 記事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記事 原稿料로 應援 하세요
原稿料로 應援하기

kimjongsung.com.日帝淸算硏究所 硏究委員,第15回 임종국上.유튜브 時사와歷史 채널.著書:大論爭 韓國史,反日種族主義 무엇이 問題인가,조선상고사,나는 世宗이다,역사추리 造船社,黨爭의 韓國史,왜 美國은 北韓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韓國史,韓國 中國 日本 그들의 敎科書가 가르치지 않는 歷史,朝鮮奴婢들,王意女子 等.


讀者意見

移轉댓글보기
年度別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