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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렌은 純粹 醫療 宣敎師가 아니었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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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前 우연한 機會에 '알렌에게 무릎 꿇은 韓醫學' (2009年 7月 10日)이라는 題目의 連載를 프레시안에서 읽게 되었다. 이 글은 알렌이라는 人物을 浮刻하기 위해 韓醫學을 卑下하고 歪曲하는 典型的인 西洋醫學 中心의 醫學士管을 보여주고 있다.

서울대학병원과 연세대학病院 間의 뿌리論爭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내에 있는 대한의원 건물. 일본인들이 한의사들을 축출하고 양의 위주의 병원으로 만든 대한의원은 경술국치와 함께 조선총독부의원이 되었으며,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된 이후 경성제국대학병원으로 사용되었다. 해방 이후 미군정법령에 의해 서울대학교가 만들어질 때 서울대학교의 재산으로 편입되어 현재까지 서울대학병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 大韓議員 本館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病院 內에 있는 大韓議員 建物. 日本人들이 韓醫師들을 逐出하고 量의 爲主의 病院으로 만든 大寒議員은 庚戌國恥와 함께 朝鮮總督府議員이 되었으며, 경성제국대학이 設立된 以後 경성제국대학病院으로 使用되었다. 解放 以後 美軍政法令에 依해 서울대학교가 만들어질 때 서울대학교의 財産으로 編入되어 現在까지 서울대학병원으로 使用되고 있다.
ⓒ 文化財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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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洋醫師들의 醫師學界(醫史學系)에서 지난 20餘 年間 熾烈했던 論爭 中 하나가 서울醫大와 延世醫大 間에 있었던 濟衆院(1885)을 둘러싼 뿌리 論爭이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數千 年 醫學士의 흐름에 비추어 볼 때 些少한 主題일 수도 있는 問題가 두 大學의 自尊心이 介入되면서 歷史에는 學問的 論爭에 앞서는 무엇인가가 있음을 느끼게 한다.

서울대학병원(1946)은 國立病院이므로 大韓議員(1907)을 母胎로 하며, 大寒議員은 內部病院(1899)과 그 以前의 濟衆院(最初 이름 廣惠院, 1885)이 모두 國家 財政으로 運營되었으므로 自身들의 前身이라고 主張한다.

反面 연세대학病院은 濟衆院이 朝鮮 王室에서 資金을 댔지만 알렌을 代表로 하는 美國 北長老敎 宣敎部가 運營하였으며, 財政의 安定을 위해 宣敎部가 完全引受(1893)하였고 以後 세브란스의 寄贈(1904)을 통해 現在의 延世大學校 세브란스병원으로 이어져 내려왔다고 主張한다.

結局 우리나라 最初의 兩方病醫院인 濟衆院이 어느 大學病院의 母胎가 되는가에 對한 論爭이기 때문에 뿌리論爭이라 한다.

지난 2007年 3月 <프레시안>을 통해 大韓議員 設立 100周年을 記念하려고 한 서울대학병원의 計劃을 延世大學校 側에서 시원시원하게 反駁을 하였고, 內心 拍手를 쳤던 記憶이 있다. 大寒議員은 1905年 乙巳勒約 以後 이토오 히로부미의 統監府 體制 下에서 日本人들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 굳이 대한의원을 言及하면서도 大寒議員이 庚戌國恥와 함께 朝鮮總督府議員(1910)으로 名稱을 變更하고, 경성제국대학의 出現과 함께 경성제국대학病院(1926)으로 吸收되었다가 解放 以後 物資 뿐 아니라 人力까지도 서울대학병원에서 받아들인 歷史는 애써 外面하고 있다.

하지만 서울대病院 側의 主張을 反駁하였으니 알렌을 세브란스 病院의 援助로 認定하고 拍手를 치면 모든 問題가 끝나는 것일까?

이토오 히로부미, 國家 醫療시스템에서 韓醫師들 逐出

서울시 중구 정동 소재.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된 장소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 이토오 히로부미에 의한 통감부 정치가 시작되었고 한의사들은 국가의료시스템에서 강제 축출되었다.
▲ 重眀殿(重明殿)  서울市 中區 정동 所在. 을사늑약이 强制 締結된 場所다. 을사늑약이 締結된 以後 이토오 히로부미에 依한 統監府 政治가 始作되었고 韓醫師들은 國家醫療시스템에서 强制 逐出되었다.
ⓒ 文化財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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惠民署가 없어지게 되면서 百姓들에 對한 韓醫診療 惠澤이 없어지자 1899年 大韓帝國은 韓醫師들이 勤務하여 治療하는 國立 內部病院을 만들었는데 여기에서는 양의진料도 같이 施術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內部病院에서 勤務하던 韓醫師들은 1907年 이토오 히로부미에 依한 統監府 統治 아래에서 日本人 洋方醫師들에게 쫓겨나게 되었고, 內部病院의 이름도 大韓議員으로 바뀌게 되었다.

또 開化派 金玉均은 池錫永을 日本에 보내어 種痘法을 배워 普及하게 하였는데, 이 池錫永은 日帝에 依해 强制解散된 韓醫師들의 모임인 前線議會(全鮮醫會, 1915-1916)의 會長이었다. 이러한 事實은 朝鮮人들 스스로가 韓醫學科 洋醫學을 適切히 조화시키고 硏究하여 韓國만의 獨特한 醫療시스템을 定着할 수 있는 機會가 있었는데, 日帝에 依해 機會가 剝奪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只今의 한兩方 間의 反目의 歷史는 이토오 히로부미에 依해 만들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알렌은 純粹한 目的의 醫療宣敎師가 아니었다

過去에는 알렌을 朝鮮 政府에서 認定한 最初의 改新敎 宣敎師로, 最初의 兩方醫療機關을 設立한 美國人 意思로, 朝鮮의 獨立을 一貫되게 主張한 親韓派 外交官으로 稱頌하였다. 하지만 最近 알렌에 對한 여러 學者들의 硏究가 進行되면서 朝鮮에 들어오게 된 그의 動機가 純粹하지 못하였고, 앞으로는 朝鮮을 위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美國의 帝國主義 侵奪에 앞장선 最初의 人物이라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다.

알렌은 中國에서 醫療宣敎活動을 하려던 中 韓國 居住 外國人을 對象으로 收益性있는 事業을 벌일 수 있을 거라는 同僚 醫師의 勸告를 받아들여 1884年에 來韓하였다. 1885年 4月 濟衆院이 만들어진 以後 同僚 宣敎師들과 不和를 겪으면서 宣敎活動에 幻滅을 느끼고 美國의 外交官으로서의 役割을 始作하였다고 한다.

그 結果 1895年에는 雲山金鑛採掘權을, 1896年에는 京仁鐵道附設權을 直接 獲得하여 美國의 事業家들에게 넘겼다. '노다지(no-touch)'라는 말을 만들어낸 雲山金鑛採掘權은 40年間 總 900萬 톤의 金鑛石을 採掘하여 總 5600萬 달러의 收益을 美國에 건네주었다고 하며, 俄館播遷을 周旋하여 親美勢力이 大擧 登用된 뒤에는 京仁鐵道附設權을 따냈는데 두 달만에 日本에 넘기면서 約 200萬 원의 差益을 챙길 수 있었다고 한다.

1907年 日本에 진 나라 빚 1300餘萬 원을 갚기 위해 國債補償運動이 벌어졌던 것을 記憶할 것이다. 當時 모았던 돈이 約 200萬 원이었다고 하니 알렌에 依해 流出된 國富는 想像을 超越할 程度인 셈이다.

또한 前任者의 任期가 남았음에도 美國 政治權에 直接 로비를 하여 駐韓美國公使가 되었을 程度로 政治的 野心이 있었으며, 在職하는 동안 서울의 電氣, 戰車, 上水道 等의 利權事業이 美國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助言한 手腕家이기도 하였다.

알렌은 徹頭徹尾하게 美國의 權益을 代辯한 外交官이었다

고종황제가 을사늑약을 전후로 하여 비밀 외교를 목적으로 발부한 친서에 사용한 것으로, 알렌에게 보낸 문서에도 사용되었다.
▲ 大韓帝國 高宗 皇帝 御璽  高宗皇帝가 乙巳勒約을 前後로 하여 祕密 外交를 目的으로 發付한 親書에 使用한 것으로, 알렌에게 보낸 文書에도 使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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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렌은 周圍의 列强에 맞서 朝鮮이 獨立을 維持해야 된다고 主張하여 高宗皇帝의 歡心을 산 積極的인 親한 人士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親韓的 이미지는 朝鮮 사람들에게 비친 모습이었을 뿐 朝鮮의 獨立이 美國의 利益에 도움이 된다는 徹底한 計算에 依해 演出된 모습이었다.

美國의 權益을 위하여 各種 利權 事業에 介入하였을 뿐 아니라 1898年 京釜鐵道敷設權이 日本에 돌아가게 하는 데에도 關與를 하는데, 이것이 美國의 利權에 도움이 될 것이라 判斷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親美派 勢力들이 結集力을 喪失하자 美國의 利權에 好意的이었던 親日派 勢力들을 間接的으로 後援하기도 하였고, 日本의 韓國支配가 確實視 되었을 때에는 日本에 親美派 人士들의 名單을 넘겨주었고 이들에게 日本에 協力을 勸告하였다는 點을 自負한 사람이었다.

알렌은 典型的인 帝國主義的 視角을 갖고 있는 美國 사람이었다

알렌이 韓國에 온 지 1年이 되었을 때 '(朝鮮은) 사람이 살아보려고 試圖한 나라 中 第一 성질나는 곳'이라고 하였으며, '美國人들이 들여온 戰車 德分에 막勞動者들까지도 電車를 탈 수 있다'는 優越意識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 美國人들이 들여온 戰車 德分에 朝鮮의 國富가 얼마나 流出되었고 美國에 얼마나 많은 利權이 돌아갔는지에 對해서는 外面하고 있는 것이다. 日本 德分에 韓國에 道路와 鐵道, 港灣이 놓였고, 地位高下를 莫論하고 近代 文物을 利用할 수 있게 되었다는 主張과 一脈相通하는 論理가 아닌가! 道路와 鐵道, 港灣을 통해 朝鮮을 어떻게 收奪했는지, 地位高下를 莫論夏至 않고 많은 사람이 利用하게 하여 얼마나 많은 利權을 가져갔는지는 記述하지 않고서 말이다.

弱者의 位置에 있었던 朝鮮人들에게 開花期의 韓國史는 슬픔의 歷史이고 收奪의 歷史이며 屈辱의 歷史였다. 强者의 位置에 있었던 美國, 日本을 비롯한 帝國主義 列强들에게 開花期의 韓國史는 利權獲得이라는 機會의 時期였고, 스스로는 開花할 수 없는 無知蒙昧한 朝鮮人들을 깨우치는 啓蒙의 歷史였다.

'알렌에게 무릎 꿇은 韓醫學'은 '美國에게 무릎꿇은 朝鮮'일 수도 있고, '日帝에게 무릎꿇은 高宗皇帝'일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인가? 굳이 日帝의 侵略과 美國의 帝國主義 侵奪을 함께 한 洋醫學의 歷史를 끌어오면서 韓醫學을 卑下할 必要가 없을 程度로 現在의 洋醫學界는 韓國社會에 크나큰 貢獻을 하였고 充分한 支配力을 갖고 있다.

韓國社會를 支配하고 있는 이들 恐龍들은 只今도 患者들에게 韓醫學에 對한 歪曲된 情報를 强要하고 있으니 우리 社會의 先進化와 歷史를 바로 세우는 作業은 아직 遙遠하다 할 것이다.


태그 : #韓國醫學士 , #歷史觀 , #歷史바로세우기 , #알렌 , #濟衆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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圓光大學校 韓醫科大學 醫師學敎室 (週)民族醫學新聞社 編輯委員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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