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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親日' 獨立新聞 創刊日이 新聞의 날?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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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餘年間 義兵을 찾아 다니며 여러 卷의 著述活動을 하고 있는 이태룡 金海建設工高 敎師(國語)가 4月 7日 '新聞의 날'을 맞아 보내온 글이다. 李 敎師는 義兵 等 舊韓末 抗日運動 等을 硏究해 오고 있다. 그는 그동안 <의병찾아 가는="" 길="">과 <한국근대사와 의병투쟁=""> 等을 펴냈다. 李 敎師가 보내온 글을 싣는다. [編輯者말]
독립문과 독립관.
 獨立門과 獨立館.
ⓒ 資料寫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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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月 7日을 '新聞의 날'로 制定한 지 올해로 52돌이다. 이날은 獨立新聞(獨立新聞) 創刊日이란 事實을 누구나 알고 있다.

獨立新聞은 一般的으로 徐載弼이 私財를 털어 만든 純粹 民間人 新聞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너무나 歪曲된 것이다.

그 뿌리를 찾아보면, 李丙燾, 申奭鎬 等의 震檀學會에서 發刊한 <韓國史>(1959)에서 甲申倭亂(甲申政變)을 일으켰던 金玉均, 朴泳孝, 洪英植, 徐光範, 徐載弼이 甲申오적(고종실록 用語)임에도 不拘하고 改革的인 人物로 好評했고, 徐載弼을 獨立新聞을 創刊한 字로 造作하는 蠻行을 저질렀던 것이다.

그 後 이기백의 <한국사신론>(1967)을 비롯한 槪說書가 이 見解를 따랐고, 신용하의 <독립협회연구>는 한술 더 떠서 '獨立協會' 마저 愛國團體인 양 糊塗했던 것이 그대로 <局社> 敎科書까지 前轍을 밟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對하여 많은 學者들이 甲論乙駁을 해 왔는데, 아직까지 뚜렷한 結論이 나지 않고 있는데, 代表的인 學者 두 분의 見解를 살펴보기로 한다.

신용하 서울대 名譽敎授에 따르면 갑신정변이 民衆의 支持가 缺如되었기에 失敗했던 敎訓을 되새긴 兪吉濬은 民衆을 啓蒙하는 事業으로 新聞 創刊이 切迫했다. 甲午更張이 開化派 內閣의 主導로 制度 改革을 하면서 日本側의 漢城신보에 對抗할 新聞을 만들 韓國人을 物色했는데, 그가 徐載弼이었다.

徐載弼은 日本으로 亡命 後 日本 政府가 迫害를 加하자 朴泳孝, 徐光範 等과 함께 美國으로 亡命했으며, 이어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으로 歸化한 그는 醫學 工夫를 하여 醫師가 되었는데, 甲午更張으로 甲申政變 때 大逆不道 罪人에 對한 赦免令이 내리고 國內 開化派가 그의 歸國을 要請하자, 1895年 12月 下旬에 돌아와 自由,民權, 自强의 民族 運動에 投身했다.

日帝와 그들 앞잡이를 稱讚하는 <獨立新聞>

중추원 고문관 서재필(필립 제이슨)을 농상공부 임시고문으로 임명하는 지령.
 中樞院 顧問官 서재필(필립 제이슨)을 農商工部 臨時顧問으로 임명하는 指令.
ⓒ 資料寫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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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烝冬 慶尙大 名譽敎授는 兪吉濬이 日本 케이오義塾(慶應義塾)(케이오大學 前身)에 遊學, 복택유길(福澤諭吉)의 弟子로 있을 때 號産學校(下士官學校)에 들어왔던 徐載弼과 親分이 두터웠다고 밝히고 있다.

兪吉濬이 附倭內閣(附倭內閣)의 內部大臣이 되었을 때 필립 제이슨에게 外部參判을 맡기려고 했으나 그는  美國人이기 때문에 受諾할 수 없다고 하여 中樞院 顧問官 자리를 주었으며, 新聞 創刊을 할 수 있도록 國費를 支援했다.

서재필(1866~1884)은 韓國人이요, 필립 제이슨(1885~1951)은 美國人이다. 그는 美國으로 건너가서 美國人으로 歸化하여 美國女子와 結婚했으며, 甲午億變으로 韓國에 와서 附倭逆賊 新聞이었던 獨立新聞을 내다가 結局 本國으로 追放되어 永遠히 美國人으로 살았다.

이와 같은 主張은 서재필(필립 제이슨)의 行跡에 對하여 서로 다른 視角으로 본 史官의 差異에서 起因된 것이다. 卽 甲申年의 事件을 信用하는 旣存의 主張대로 ‘開化派들이 政治 變革을 追求했던 事件’으로, 甲午年에는 改革이 이뤄졌다고 보고 獨立新聞度 그에 따른 것으로 그 意味를 附與했던 것인데 反해, 려증동은 民族史의 脈絡에서 두 事件 모두 ‘日帝 앞잡이들을 내세운 日帝의 侵略’으로 보았고, 獨立新聞은 그 內容을 살펴 日帝와 그들 앞잡이를 稱讚하는 新聞이었기에 附倭逆賊지라고 規定했다.

그렇다면 獨立新聞이 나오게 된 背景은 무엇일까?

1895年 10月 8日 명성황후(當時 閔妃)가 日本 刺客의 손에 無慘히 殺害되고 난 뒤에는 宮中에서조차 日制를 등에 업은 附倭人들이 날뛰었기 때문에 高宗도 언제 殺害나 弑害를 當할지 모르는 切迫한 時點이었다.

1895年 12月, 日本 外務大臣과 駐韓日本公使가 주고받은 電報의 內容이 收錄된 <駐韓日本公使關記錄.3>의 內容을 整理, 獨立新聞이 나오게 된 背景을 살펴보기로 한다.

"新聞 發刊을 위해 말씀해 오신..."

독립신문.
 獨立新聞.
ⓒ 資料寫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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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年 12月 3日, 日本 外務大臣 육오종광(陸奧宗光)은 駐韓日本公使 정상각오랑(井上角五郞)에게 電報를 보낸다.

“新聞 發刊을 위해 말씀해 오신 그렇게 많은 돈을 支出하는 일은 到底히 不可能하므로 이에 다시 한 番 節約?儉素한 方法을 考慮해 주기 바람. 또 新聞記者는 첫째로 그 新聞을 支配할 만한 人物을 選擇하는 것이 가장 必要하다고 생각하는 바, 나는 直前일랑(織田一郞)에게 그 任務를 맡겼으면 한다. 意義가 없는지 알고 싶다.”

1895年 12月 4日, 駐韓日本公使는 日本 外務大臣에게 新聞記者로 活動할 人物은 選定해 두었다는 重要한 電報를 보낸다.

"新聞社 創立費는 最初의 設計는 朝鮮의 機械類를 借用할 計劃이었으나 그 可望이 없기 때문에 모두 다 새로 調達할 必要로 하기에 1200원을 必要로 하는 것이다. 只今 物價가 4倍나 올랐기 때문에 아무리 節儉하여도 1千원은 必要하므로 꼭 1千원만은 支出해주기 바란다.

또 補助費는 전(前) 設計로는 160餘 원을 要하겠지만 이것은 朝鮮 政府 기타에 파는 것을 豫想하여 130원으로 減額한 것이다. 이런 것까지의 全額은 必要하지 않다고 생각되지만 앞서 陳述한 대로 物價가 매우 비싼 때인지라 萬一의 不足을 念慮하여 130원만은 꼭 請求해 주기 바란다. 또 新聞記者의 件은 이쪽에서 이미 適當한 者를 選擇해 놓았다. 이것은 제가 使用하는 者이므로 그 人選은 꼭 저에게 맡겨주시기 바람."

1895年 12月 5日, 日本 外務大臣은 駐韓日本公使에게 한글 新聞記者로 적합한 人物이 있는지 묻는 電報가 온다.

"午前義人(奧田義人)을 出張시키기는 어려운 일인지라, 그 代身 內閣의 畫房直蔘랑(花房直三郞)?시전가문(柴田家門) 中 1名을 出場시키는 쪽으로 하고 싶으며, 그 事務는 오로지 內閣의 組織과 各 誠意 壯丁을 定하는 일에 使用할 計劃이다. 또 오늘의 境遇 民間人을 넣는 일은 事實 困難하다. 只今 朝鮮 政府는 貧困하기 짝이 없어서 軍隊의 給料조차 4個月間이나 支拂하지 못하는 形便이다. 그러므로 民間에서 사람을 넣을 때는 卽時 給料 支拂에 蹉跌이 생길 것이다. 朝鮮文(朝鮮文: 한글-筆者 株)의 新聞 發行의 일은 어떠한가? 記者로서 그 곳에 適當한 사람이 있으면 速히 答電하기 바란다."

日本 外務大臣은 駐韓日本公使에게 電報

1895年 12月 5日, 駐韓日本公使는 日本 外務大臣에게 '한글 新聞' 製作은 自身에게 맡겨 달라는 要請書를 電報로 보낸다.

"眼光(安廣) 祕書官은 오늘 아침 9時 仁川을 出發하였다. 桐 棺이 到着할 때까지 滯在하시기 바란다. 또 한글 新聞의 일은 支給(至急)을 요하므로 저에게 一任시켜 주기 바람."

1895年 12月 6日, 駐韓日本公使는 日本 外務大臣에게 한글 新聞 創立費로 機密費를 支拂하고 싶다는 電報를 보낸다.

"火防(花房)?時前(柴田) 가운데서 出張을 全義(詮議)하기가 어려우면 전 農商務性 特許局長으로서 只今 第2軍을 遂行中인 유하장웅(有賀長雄)을 派遣하도록 措置하시기 바란다. 特히 同人의 俸給 支出의 길이 없음에 있어서 朝鮮 政府의 財政 形便이 調整될 때까지는 別途 機密金 65,000院內에서 支拂할 것을 承諾하여 주시기 바람. 또 朝鮮 新聞의 創立 步調도 支出할 길이 없음에 있어서는 位 別途 機密金 안에서 支拂하고 싶다. 如何튼 支給 答電을 기다리겠음."

1895年 12月 6日, 日本 外務大臣은 駐韓日本公使에게 新聞社 創立費를 보낸다는 電報를 보낸다.

"新聞 創立費 1200원은 支拂하겠지만 그것은 돈으로 보내고, 機械 等은 그 곳에서 整備할 作定인지 答電하기 바람."

1895年 12月 7日, 駐韓日本公使는 日本 外務大臣에게 新聞 發行을 위한 機械를 購入하겠다는 電報를 보낸다.

"新聞 發行에 있어 機械 等은 새로 調達할 作定이지만 信號(神戶)에는 高物로서 相當한 것이 있을 것이므로 代金을 혹 實感할지도 모른다. 더욱이 이를 위하여 이곳에서 사람을 差出할 作定임."

1895年 12月 7日, 日本 外務大臣은 駐韓日本公使에게 新聞社 創立費와 新聞 製作을 위해 管理를 派遣한다는 電報를 보낸다.

"新聞 創立費 1200원을 電信換으로 보냈음. 火防?時前 가운데 한 사람을 광도(廣島)에 滯在시킬 用務가 있다. 議會 開會 中 特히 奔忙할 것이므로 良人이 함께 貴下의 名에 應하기 어렵다. 따라서 種種 協議한 結果 法制局 參事官인 石塚令狀(石塚英藏)이라면 卽時 貴下의 名에 應할 것이다. 東人은 오랫동안 法制局에 있었다. 英文學에 能하고 日本 法律에도 精通하다. 그가 마땅하다면 轉補하시는 대로 本人을 도한(渡韓)시키겠음."

愛國志士를 헐뜯고, 日帝 앞잡이를 斗頓

日本公使는 本國의 訓令에 따라 朝鮮 政府에 指示를 한다. 이에 內部大臣 兪吉濬은 美國人으로 歸化하여 醫師 生活을 하던 필립 제이슨을 招聘하기에 이르렀고, 필립은 日本을 거쳐 그해 12月 末頃 우리나라에 오게 된다. 그는 이미 그해 3月 1日子로 附倭內閣으로부터 甲申倭亂의 罪에 對하여 赦免을 받았기 때문이었고, 新聞 創立 費用으로 國庫에서 3千원과 定着 資金으로 1400원 等 4400원을 받았고, 月 300원씩 10年間 中樞院 顧問職을 맡기로 한 것이었다.

그 契約에 따라 俄館播遷 後에도 新聞을 發行하는 일은 繼續되었는데, 1896年 3月 14日, 그가 中樞院 顧問과 當時 新聞 堂堂 部署였던 農商工部 臨時顧問을 겸하게 됨으로써 또다시 日帝 앞잡이로서 猛活躍을 하게 되었다.

그는 日帝의 使嗾를 받아 한글로 된 新聞을 통하여 朝鮮 政府를 흔들고, 나아가 政府 顚覆을 꾀했던 것이었다. 日帝는 이미 '漢城旬報'와 '漢城신보'를 통하여 半晴親日을 圖謀했지만 失敗했기 때문이었다.

獨立協會가 政府 大臣들을 劫迫할 程度로 威勢를 부릴 때 필립은 高宗皇帝에게 自身을 "外信"이라 稱했고, 高宗 앞에서도 담배를 피우는 等, 完全히 美國인 行世를 하다가 中樞院 顧問職에서 解任, 本國으로의 追放令을 받고 1898年 5月 27日 仁川港을 떠났지만 獨立新聞은 1899年 12月 4日에야 廢刊된다.

獨立新聞은 創刊 當時에는 政府에 協調的이었고 國民에게 政府 施策을 啓蒙하는 立場을 取하는 척하다가 獨立協會가 생기고 난 뒤부터는 本色을 드러내 反政府的인 態度로 바뀌어 갔으며, 愛國志士를 헐뜯고, 日帝 앞잡이를 斗頓하며, 半晴親日的인 態度를 取하였다.

記事 內容을 보면, 義兵을 '비도'(匪徒), 義兵將을 '匪徒首魁'(匪徒首魁)라 稱하고 義兵討伐을 强力히 促求했으며, 조병식, 신기선, 李建昌 等 愛國志士나 민용호, 노응규, 虛僞 等의 義兵將을 嘲弄하고 誹謗했지만, 李完用과 이토 히로부미를 各各 우리나라와 東洋 最高 政治人으로 稱讚했다.

이태룡 교사.
 이태룡 敎師.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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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軍隊의 增强에 反對하면서 日本軍이 우리나라에 駐屯하기를 願하고, 日本 貨幣의 使用을 主張했다. 日本 國王 어미의 죽음에 對해서는 32日間 哀悼를 表示하면서도 명성황후 國葬(里長)에는 "죽은 뒤라도 皇后의 尊稱을 받았으니 詐欺에 빛나는 一"이라고 빈정거리기까지 했다.

獨立協會 機關誌로 充實했던 獨立新聞, 獨立協會 初代 會長은 안경수였다. 그는 日帝가 明成皇后를 慘殺할 때 이를 도왔고, 高宗을 弑害하려다가 發覺되어 죽임을 當했으나, 庚戌國恥 때 日帝로부터 그 遺族이 恩賜金을 받았던 附倭人이었고, 獨立協會 初代 理事長은 이완용이었다.

果然 新聞의 날을 獨立新聞 創刊日로 삼아야 하는가?


태그 : #獨立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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