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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왜 하늘을 支配하려 했는가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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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창남이 中古 附屬으로 直接 製作하여 타고 다닌 飛行機 금강호
ⓒ 空軍博物館
韓半島의 하늘을 最初로 飛行한 者는 不幸하게도 日本人이었다. 1913年 8月 29日 日本 海軍의 技術 將校인 나라히라가 우리 民族의 國恥日에 맞춰 龍山 日本軍 司令部 練兵場에서 飛行示範을 보였다. 日本의 機械文明을 誇示하는 公開的인 示威行使였다. 이즈음 日本은 이미 滿洲大陸을 向한 布石으로 蔚山, 大邱, 서울, 平壤, 新義州에 飛行場을 建設하고 있었다. 들을 빼앗긴 民族이 하늘마저도 日本에게 빼앗겼던 것이다.

1次 世界大戰이 끝나자 飛行機로 世界一周를 하는 西歐의 飛行士들이 韓半島를 거쳐 갔다. 그中 1917年 봄 美國人 操縱士 아트 스미스의 曲藝飛行은 朝鮮 靑年들에게 깊은 印象을 남겼다. 이 曲藝飛行은 當時 20萬 서울 人口 中에서 4分의 1人 5萬 名이 汝矣島에 雲集할 程度로 엄청난 이벤트였다. 1901年 同甲내기인 안창남과 권기옥 亦是 아트 스미스의 曲藝飛行을 보고 날개의 꿈을 품게 된 靑年들이었다.

그러나 植民地 靑年들에게 飛行機는 浪漫的인 꿈일 수만은 없었다. 날개를 向한 꿈의 象徵이던 飛行機가 이내 戰爭武器로 發展했듯이, 나라를 잃은 靑年들은 일찍부터 飛行機를 獨立鬪爭의 武器로 認識했다. 그리하여 수많은 靑年들이 飛行士의 꿈을 안고 日本뿐만 아니라 中國이나 蘇聯, 美國으로 飛行術을 배우러 갔다.

이제 大陸의 하늘을 새벽별처럼 수놓았던 젊은 그들의 꿈과 氣槪, 異域萬里에서 流星처럼 스러져간 飛行勇士들의 숨겨진 이야기에 暫時 귀 기울여보자.

▲ 獨立軍 空軍 最初의 訓鍊飛行機와 獨立新聞 1920年 4月號
ⓒ 空軍博物館
美國 윌로스의 朝鮮航空大 - 太極마크를 단 飛行機

1913年 平壤 出身의 靑年 한장호는 獨立運動을 위해 中國 上海로 건너갔다가 如意치 않자, 1916年 美國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간다. 그는 "앞으로의 戰爭의 勝利는 하늘을 支配하는 者에게 있다"는 事實을 일찍이 看破한 獨立運動家 盧伯麟 將軍과 在美同胞 김종림의 支援으로 1919年 初 몇몇 僑胞 젊은이들과 함께 美國 레드우드 飛行學校에서 委託敎育을 받는다. 그리하여 한장호는 레드우드 飛行學校 卒業生인 장병훈 二秒 五淋下 李庸瑄 이용근 等과 함께 飛行士 資格으로 하늘을 난 最初의 韓國人이 되었다.

韓人 飛行士 養成所인 윌로스 飛行學校는 1920年 2月 臨時政府 軍務總長이 된 盧伯麟 將軍과 이들 6人의 飛行士들이 主軸이 되어 캘리포니아에 있는 김종림의 農場에 세워졌다. 이들은 練習用 飛行機 3臺를 사들이고 農場 한 쪽에 滑走路까지 만들었다. 飛行機에는 太極 마크와 함께 '朝鮮航空大'를 意味하는 'KAC'라는 表紙가 그려져 있었다. 朝鮮 各地에서 모여든 靑年들은 祖國의 自主獨立이라는 悲願을 품고 日本天皇宮을 爆擊하리라는 氣槪로 飛行訓鍊에 專念했다.

윌로스 飛行學校는 1920年 7月 第1回 卒業生 27名을 輩出했으며, 1923年에는 11名의 卒業生을 輩出하는 等 3回에 걸쳐서 40餘名의 飛行士들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美國 西部地域에 몰아닥친 風水害로 인해 同胞들의 才情後援이 어려워지자 解體되는 悲運을 겪어야 했다.

▲ 윌로스 飛行學校 最初의 飛行士들
ⓒ 空軍博物館
民心 激發 위해 飛行機 購入 試圖했던 안창호

윌로스 飛行學校가 爆擊을 念頭에 두고 있었다면, 島山 安昌浩는 飛行機를 民衆을 宣傳·煽動하는 道具로서 認識했다. 獨立運動家들 사이의 連絡과 朝鮮 民衆에게 宣傳物을 撒布하기 爲해서 飛行機를 購入하려고 했던 것이다.

1920年 1月에 記錄한 安昌浩 先生의 日記에는 飛行機 購入과 關聯한 努力들이 詳細하게 言及돼 있다.

"飛行機를 輸入할 方法인 바 그의 얘기가… 美國人 或은 톨트와 페페 三人을 紹介하고 飛行機 輸入은 러시아國과 交涉하라고 말하다."(민국 2年 1月 4日)

"또 20萬원 使用하라는 祕密內容을 말하여 이는 飛行機를 使用하여 國內民心을 擊發하고 將來 國內의 大爆發을 일으키기 위함이라고."(민국 2年 2月 17日)


日記에 依하면 安昌浩 先生은 1920年 年初에 飛行機 購入과 操縱士를 救하기 위해서 美國, 필리핀, 러시아, 中國人들과 多角的인 交涉을 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이 計劃은 資金 事情이 如意치 않아서 成事되지 못했다.

大陸의 하늘을 수놓았던 하늘의 先驅者들

앞의 두 試圖가 失敗하자 臨時政府 要人들은 中國의 航空學校에 朝鮮 靑年들을 推薦해 飛行士를 養成하는 方向으로 旋回했다. 當時 中國에서는 軍閥들이 競爭的으로 航空學校를 設立하고 空軍力을 增强하고 있었다.

朝鮮 靑年들은 임정의 推薦書만 있으면 中國의 航空學校에 無料로 入學할 수 있었다. 徐曰甫 권기옥 최용덕 장지일 이영무 김은제 이병운 等이 이런 過程을 거쳐서 航空學校를 卒業하고 中國에서 活動했다.

한便 飛行機가 없어서 理論만 가르쳤던 廣東航空學校를 나온 靑年들은 다시 蘇聯의 모스크바 航空學校로 留學을 가기도 했다. 박태하 張性哲 김진일 차정신 유철선 等은 廣東航空學校를 거쳐서 모스크바 飛行學校를 卒業한 뒤 中國에 돌아와 活動한 境遇다.

이들은 大部分 中國 國民革命黨 政府 空軍 創設의 核心이 되었고, 中日戰爭이 일어나자 戰鬪機를 몰고나가 日本軍과 直接 싸운다.

▲ 雲南航空學校 初級科程 訓鍊機(危) 와 高級課程龍 訓鍊機(아래)
ⓒ 정혜주
馬賊團 出身 飛行士 徐曰甫= 中國에서 活動한 飛行士들 中에서 우리民族 最初의 飛行士라고도 일컬어지는 徐曰甫에 對해서는 많은 '傳說'들이 傳해져온다.

徐曰甫는 1886年 咸鏡南道 元山에서 태어나 平壤 大成學校에서 受學하다 1910年 韓日倂合 直前에 신채호, 柳東說 等 新民會 人士들과 中國으로 亡命한다. 滿洲와 內蒙古 等地에서 反日 馬賊團 活動을 하기도 했던 徐曰甫가 처음 飛行士가 될 決心을 한 것은 獨立運動 軍資金 募金을 위해 國內에 潛入했던 1913年 여름이었다. 國恥日에 맞춘 日本 海軍 出身의 나라히라의 示範飛行을 目擊했던 것이다. 滿洲地域을 내달릴 馬車와 말을 사기 위해 軍資金을 募金 中이던 그는 눈이 번쩍 뜨였다. 馬車가 아니라 飛行機다!

中國에 돌아와 곧바로 飛行術을 배우려고 했던 그는 1次 世界大戰으로 當時 唯一한 國立 航空學校人 北京의 南原航空學校가 閉鎖되자, 戰爭이 끝난 後 1919年 1月 28日 馮玉祥의 推薦으로 南原航空學校 2期生으로 入學한다. 그는 33살이라는 많은 나이에도 不拘하고 '나라를 망친 朝鮮 놈'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지 않기 위해 피나는 努力을 쏟았다.

祖國에서 3ㆍ1萬歲運動이 일어난 것은 그가 한창 飛行術을 익히고 있을 즈음이었다. 日本의 殘忍한 彈壓消息에 憤慨한 그는 '내 언제고 東京으로 날아가서 너희 놈들 머리위에 爆彈을 퍼부어 오늘의 恨을 풀리라'고 決心했다.

1919年 5月 30日 南原航空學校를 卒業한 徐曰甫는 임정의 安昌浩를 만나 飛行機의 重要性을 力說했다. 또한 操縱士 資格으로 義烈團에 加入하고, 1923年에는 信義團을 組織하는 等 活潑한 獨立運動을 벌였다. 1924年 馮玉祥의 航空大 大隊長으로 小節(蘇浙)戰鬪에 20餘 次例 출격하여 武功을 세웠으며, 南原航空學校의 敎官으로 在職했다.

그는 최용덕을 補正航空學校에 推薦하여 飛行士가 되도록 도와주었고, 馮玉祥 航空隊에 들어온 女流飛行士 권기옥과 나이를 超越한 同志愛를 나누기도 했다. "우리 獨立軍에 이런 飛行機 한 臺만 있었어도 내가 爆彈을 싣고 서울로 날아가 朝鮮總督府 廳舍를 박살내 버리는 건데." 그는 飛行機를 탈 때마다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 徐曰甫 追慕記事 (東亞日報1926年7月6日)
ⓒ 정혜주
그러나 1926年 6月 28日 徐曰甫는 內蒙古 接境 공家長의 飛行場에서 새로 輸入된 伊太利製 言살도 飛行機를 施僧해보다가 飛行機 墜落으로 死亡했다. 그의 死亡消息은 國內에도 큰 衝擊을 주어서 동아일보는 두 次例에 걸쳐서 追慕記事를 내보냈고, 元山과 平壤, 間島 舂精 等地에서 追慕集會가 열리기도 했다.

안창남과 大韓獨立共鳴團의 現金輸送車輛 奪取 事件= 祖國의 獨立을 위해 大陸의 하늘을 날았던 飛行士들이 但只 中國이나 蘇聯 飛行學校 出身들만은 아니었다.

윌로스 飛行學校 出身인 김자중은 中國으로 와서 活動하다가 1922年에 墜落 死亡했다. 신용인 飛行士가 1920年代 末 汝矣島에 세운 朝鮮飛行學校 出身 이한설度 中國으로 亡命해서 獨立運動에 加擔했다. 日本의 飛行學校를 나와 中國으로 亡命하여 活動한 飛行士들度 많았다. 안창남 김치한 권태용 민성기 정우섭 전상국 等…. 여기서는 代表的인 人物로 安昌男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 最初로 祖國의 하늘을 날았던 안창남
ⓒ 空軍博物館
安昌男은 1901年에 태어나 1920年 日本 吳쿠리 飛行學校를 卒業하고 1921年 日本 帝國飛行協會가 처음 實施한 非行免許試驗에서 首席 合格한다. 그는 日本의 여러 飛行大會에 나가 優勝함으로써 無試驗으로 1等飛行士 資格을 取得한다. 1922年 12月 安昌男은 中古 附屬을 組立하여 自身이 直接 만든 複葉機 금강호를 타고 서울에서 飛行示範大會를 열어서 民族의 英雄이 된다.

安昌男은 故國訪問 飛行 後 다시 日本으로 건너가 飛行學校 敎授로 活動하면서도 늘 民族的 鬱憤과 抗日意識을 품고 있었다. 1923年 9月 關東大地震의 餘波로 일어난 朝鮮人 大虐殺에서 죽을 뻔한 危機를 넘긴 그는 日本을 벗어날 決心을 하게 되고, 1924年 年末 祕密裏에 中國으로 亡命하는 데 成功한다.

1925年 南方革命軍 곽송령 麾下의 陸軍 中將으로 任命되어 戰鬪에 參戰하고 戰果를 세우는 等 中國革命을 통한 民族解放을 圖謀했다. 또한 북평에서 朝鮮靑年同盟에 加入하여 活動했으며, 1926年에는 呂運亨의 紹介로 山西省의 軍閥 염석산 軍隊에 參加하여 航空中將과 산서飛行學校 校長으로 在任한다.

1928年 10月 安昌男은 산서飛行學校 校長이자 航空中將이라는 有利한 職責을 利用하여 中國 山西省 太原을 根據로 최양옥 신덕영 김정련 等과 함께 大韓獨立共鳴團(大韓獨立共鳴團)을 組織한다. 그리고 同志들을 糾合하여 大韓獨立共鳴團 組織 內에 韓國人 飛行士官學校 設立을 推進한다.

이듬해인 1929年 飛行學校 設立과 飛行機 購入, 그리고 軍資金 確保를 위해 최양옥과 김정련 等에게 600餘원을 提供하면서 이들을 國內로 潛入시켜 日本銀行의 現金輸送車輛을 奪取하는 擧事를 벌인다. 최양옥 김정련 等이 京畿道 마석에서 被逮되는 바람에 失敗하고 말았지만, 當時 이 事件은 그 大膽性으로 新聞 地上을 塗褙할 만큼 큰 波長을 일으켰다.

▲ 大韓獨立共鳴團 現金 奪取 및 檢擧場面(朝鮮日報 1929年4月21日)과 大韓獨立共鳴團 事件 裁判記事(朝鮮日報1929年12月13日).
ⓒ 정혜주
安昌男은 1930年 4月 2日 午後 4時에 太原 산서飛行學校 앞에서 뜻하지 않은 飛行機 墜落事故로 波瀾萬丈한 삶을 마쳤다. 太原 上空을 飛行 途中 紅塵으로 時計가 不良해지자 飛行場으로 歸還하다가 山에 衝突해 死亡했다.

親日과 抗日, 歷史는 記憶한다

或者는 박경원의 親日이 植民地 下에서 飛行機를 타기 위한 避치 못할 行爲였다고 擁護하기도 한다. 그女의 '日만親善 皇軍위門 日만連絡飛行'조차도 故國訪問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甘受해야 했던 受動的인 親日行爲였다고 抗辯하기도 한다. 그러나 안창남을 비롯한 그女와 同時代를 살았던 수많은 飛行士들은 삶 自體로 그런 抗辯이 한낱 詭辯에 不過함을 證據하고 있다.

박경원이 마지막 飛行을 했던 1933年은 아직 本格的인 戰爭이 始作되기 前, 日本의 大陸侵略의 草飯部로서 民間人 飛行士들이 軍隊와 깊은 關聯을 맺는 것은 强要나 義務가 아니라 個人的인 選擇의 問題였다. 日本에 있는 民間人 飛行士들이 戰爭物資 輸送이나 軍人輸送에 差出되는 것은 1940年代, 거의 從前에 臨迫해서이다.

當時 狀況을 考慮해보면 1925~1933年까지의 박경원의 親日行爲는 自身의 積極的인 選擇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特히 내선일체와 滿洲國 承認을 記念하는 '日만親善 皇軍위門 日만連絡飛行'에 스스로 自願했다는 것은 唯一無二하고 獨步的 親日行爲라고 볼 수밖에 없다.

祖國의 自主獨立이라는 悲願을 품고 異域의 하늘에서 靑春을 불사르다 流星처럼 스러져간 이름 없는 飛行士들이 있었음을, 오늘을 사는 우리는 記憶해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정혜주 記者는 현재 '권기옥 평전'을 집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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