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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兄님 親舊 꾐에 빠져 남로당 加入"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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最近 박근혜 한나라당 代表의 問題提起로 始作된 '正體性' 論難이 政治權에서 좀체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朴 代表는 盧武鉉 大統領과 參與政府를 두고 正體性이 의심스럽다며 이대로 가다가는 나라의 看板을 내려야할지도 모른다고 警告한 바 있다. 또 한나라당은 黨 次元에서 正體性 關聯 特別 對策機構까지 構成했다.

與圈에 對한 朴 代表의 이같은 正體性 問題 提起는 最近 與黨의 親日眞相糾明法 改正案 提出 等이 契機가 된 듯하다. 論難이 된 朴 前 大統領의 日本軍 服務經歷과 創軍 初期 그의 左翼前歷은 現在 政治權에서 일고 있는 正體性 論難과 決코 無關치 않다. 文件과 關係者들의 證言을 통해 朴 前 大統領의 親日-左翼行跡을 '實錄'으로 남긴다... 編輯者 註


▲ 朴正熙는 陸士 第1中隊長으로 勤務時節 남로당 加入嫌疑로 逮捕됐다. 寫眞은 陸士의 前身인 朝鮮警備士官學校 正門 모습.
ⓒ 陸士 卒業앨범

朴正熙가 남로당 加入 等 左翼嫌疑로 軍 搜査當局에 逮捕된 것은 1948年 11月 11日이었다. 이 날은 陸士 7期生들의 卒業式날이기도 했다. 朴正熙(當時 陸士 1中隊長) 少領은 旅順事件 關聯者 討伐 次 光州로 따라 내려갔다가 陸士로 돌아온 直後였다. 當時 軍 搜査當局은 陸士로까지 範圍를 넓혀 左翼分子를 索出하고 있었다.

이 무렵 태릉 駐屯 1聯隊의 情報主任 김창룡(特務隊長 歷任)은 수족들을 풀어 서울市內에서 '擧動受賞者'들을 붙잡아 調査를 벌였다. 그러던 中 部下들이 한 擧動殊常者를 逮捕했는데, 그가 붙잡히자마자 뭔가를 우물우물하며 삼키는 걸 보고 殊常히 여겨 金昌龍에게 그를 報告했다. 確認結果 그는 朴正熙를 包攝한 이재복이었다.

擧動受賞者 不審檢問에서 잡힌 남로당 軍總責

朴正熙 包攝한 이재복은 누구?

朴正熙를 남로당에 加入시킨 이재복(李在福, 1948年 當時 46歲)은 元來 牧師였다. 平壤 神學專門大學 卒業 後 日本 동지사대 신학부를 나와 慶北地方에서 司牧活動을 하다가 社會主義者가 된 그는 解放 뒤 慶北 道人民委員會 保安部長을 거쳐 남로당에 入黨했다.

그는 朴正熙의 兄 박상희, 5.16後 朴正熙를 包攝하러 南派됐다가 逮捕돼 死刑된 황태성 等과 同年輩로 親舊사이였다. 그는 이른바 '大邱 10.1事件'으로 박상희가 죽자 그의 家族을 돌봐주는 等 朴正熙 집안과 가까운 사이였다.

그는 남로당에서 軍(軍)總責을 맡고 있었는데, 軍部의 細胞들은 大槪 그가 包攝했거나 아니면 그가 包攝한 中間責에게 다시 包攝당한 사람들이었다. 朴正熙와 處刑된 최남근 中領 等은 그가 直接 包攝한 人物이다.
金昌龍의 直屬上官인 김안일(陸軍 准將 豫編) 特務課長은 이재복이 逮捕된 經緯를 유양수氏(陸軍 所長 豫編, 現 朴正熙記念事業會長)에게 證言한 바 있다. 다음은 柳氏의 傳言.

"어느 날 金昌龍이 와서 '擧動殊常者를 하나 붙잡았는데 이것저것 調査해도 마땅한 證據 같은게 안나와서 釋放하려다가 釋放 直前에 오일균을 監獄署 꺼내 물어보니 그가 바로 남로당 軍 總責 이재복이었다."

이재복에 이어 이재복의 祕書 兼 軍事連絡責 김영식이 逮捕되면서 肅軍 數詞는 急進展됐다. 搜査팀은 김영식을 통해 軍內 左翼細胞 名單을 통째로 손에 넣게 됐다. 다시 김안일 特務課長의 證言을 들어보자.

"김영식을 데리고 全國의 軍部隊를 돌면서 그에게 남로당 細胞들을 찍으라 했더니 以後의 搜査는 그냥 주워 담기만 하면 되는 式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재복의 名單 속에 바로 朴正熙 少領의 이름이 包含돼 있었습니다."

"郡內 左翼細胞 組織을 처음으로 提供한 사람은 朴正熙"

朴正熙에 앞서 陸本 情報局 戰鬪情報課長을 지낸 김점곤(81, 陸軍 所長 豫編, 前 경희대 副總長) 平和硏究院 院長은 "肅軍 過程에서 軍內 (左翼細胞들의) 組織構圖를 처음으로 構造的으로 提供한 사람은 朴正熙 少領이었다"고 지난 97年 筆者에게 證言한 바 있다. 金 院長은 그러나 "當時 朴正熙는 남로당 特殊組織部에서 指名한 '巨物'이었으나 이데올로기 때문은 아닌 것 같으며, 活動도 微弱했다"고 덧붙였다.

朴正熙가 左翼連累 嫌疑로 軍 搜査當局에서 調査를 받고 있을 때 한 人士가 白善燁 陸本 情報局長을 訪問했다. 그는 解放後 美軍政 때 外務部 職員 身分으로 中國에 派遣돼 北京, 上海에 머물고 있던 同胞들의 歸還作業을 도왔던 강측모氏(97年 當時 79歲, 咸北知事, 以北5道委員長 歷任)였다. 姜氏는 北京서 朴正熙 이주일 等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가 監獄에서 苦生하고 있다는 얘기를 傳해듣고 달려온 것.

그는 百 局長을 만나자 署名用紙 하나를 꺼내 보이며 "中國에서 歸還한 同胞 20餘名으로부터 署名을 받은 것"이라며 "朴正熙는 中國에서의 經歷으로 볼 때 빨갱이가 아닌 것을 確信한다"고 壯談했다. 6.25 勃發 後 정일권 參謀總長의 補佐官 時節 姜氏는 大邱로 옮긴 陸本에서 '民間人 身分'의 朴正熙를 만났다. 그는 朴正熙에게 "빨갱이라면 왜 大邱 왔나, 빨리 階級章 달아라"고 말했다고 筆者에게 證言한 바 있다. 어쩌면 姜氏의 判斷이 正確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제 朴正熙가 남로당에 加入한 經緯와 時點 等에 對해 알아볼 次例다.

▲ 靑瓦臺 祕書官 時節 朴正熙 前 大統領과 격의없는 對話를 나눴던 김종신氏. 寫眞은 70年代 初盤 靑瓦臺 境內에 나타난 멧돼지를 背景으로 찍은 모습.
ⓒ 김종신氏 提供
朴正熙는 生前에 自身의 左翼前歷에 對해 가끔 털어놓은 바 있다. 釜山日報 記者로 活動하다가 '0時의 횃불' 出刊을 契機로 60年代 後半 靑瓦臺 社會.言論 擔當 祕書官으로 勤務했던 김종신氏(74, 前 釜山문화방송 社長)는 그런 얘기를 가장 가까이서 直接 들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다.

京釜高速道路가 開通(70.7.7)될 무렵 어느날 金 祕書官은 朴正熙와 陸士 同期生인 政綱 將軍을 만났다. 憲兵 出身인 金 祕書官은 憲兵學校 校長 出身인 鄭 將軍과는 알고 지내온 사이였다.

이날 鄭 將軍은 金 祕書官에게 朴正熙와 自身과의 關係를 털어놓으면서 "5.16 쿠데타가 일어난 아침 主動者가 朴正熙 所長이라는 말을 듣고 나라가 뒤엎어질 줄만 알았다. 나는 그와 同期生이기 때문에 그의 前歷을 어느 程度 알고 있어 危險한 人物로 봐 왔다"고 말했다.

그 後 鄭 將軍 問病을 갔다온 얘기를 報告하는 자리에서 金 祕書官은 鄭 將軍이 들려준 얘기를 勇氣를 내 朴正熙 앞에서 꺼냈다. 選擧 때마다 '思想論爭'이 벌어졌으나 한番도 當事者의 시원한 解明이 없었기에 그 亦是 궁금한 點도 없지 않았다. 이윽고 朴正熙의 答이 이어졌다.

"陸士 敎官으로 있을 때 兄님 친구되는 분이 찾아와 다음 日曜日 某 場所에서 鄕友會가 있다면서 나더러 꼭 參席해 달라는 거야. 처음엔 拒絶하려다 士官學校 敎官生活이 따분하기도 하고 해서 거길 갔었지. 그런데 그게 禍根이 될 줄이야. 그날 鄕友會에 參席한 사람들은 모두 빨갱이였어. 나는 거기서 (남로당 入黨願書에) 死因하거나 圖章을 찍은 적은 없지만 그 일로 김창룡 한테 끌려가 모진 拷問을 받고 裁判도 받았지."

朴正熙 "남로당 入黨願書에 사인하거나 圖章 찍은 적 없다"

朴正熙의 '告白'대로라면 그는 남로당에 加入한 적이 없으나 이는 事實이 아닌 것 같다. 肅軍 實務責任者로 調査過程에서 朴正熙의 '自述書'를 直接 읽어본 김안일 特務課長은 朴正熙의 남로당 加入說을 剛하게 主張한다. 金 課長은 "朴正熙는 '大邱 10.1事件'으로 兄 박상희가 右翼에 被殺되자 그에 對한 復讐心과 이재복의 勸誘로 남로당에 加入한 것 같다"고 밝힌 바 있다.

한便 그가 남로당에 加入한 時期는 흔히 '春川 時節'로 보는 것이 定說이다. 8聯隊(聯隊長 원용덕 大領)가 駐屯하던 春川은 그가 陸士를 卒業하고 少尉로 任官(1946.12.14)韓 後 첫 赴任한 곳이다. 이곳에서 그는 9個月 程度 勤務 後 다시 이듬해 9月 陸士 中隊長으로 轉補됐다. 그러나 그의 勤務行跡을 記錄한 '將校自力票'에는 春川時節이 빠져 있다. 아마 原本은 없어지고 以後 再作成된 것이 아닌가 싶다.

▲ 春川 8連帶 作戰參謀 代理로 勤務하던 時節에 朴正熙가 作成한 망양리 隣近 假想 作戰도. 製作日子는 (19)47年 7月 22日.
그와 春川 8聯隊에서 같이 勤務했던 사람 가운데 生存者는 그리 많지 않다. 지난 97年 筆者는 取材過程에서 陸士 3期生 出身으로 春川 8聯隊 時節 朴正熙 밑에서 敎範 飜譯 等을 도왔던 염정태(陸軍 大領 豫編, 97年 當時 74歲)氏를 만나 朴正熙의 '春川 時節'을 復元할 수 있었다. 다음은 그의 回顧談이다.

"士官學校 時節부터 朴 先輩의 名聲을 들었습니다. 當時 그는 連帶本部 作戰主任을 맡고 있었는데, 江陵 3大隊(大隊長 송요찬 中領)로 暫時 派遣을 나와 3個 大隊 新任將校(36名)들의 敎育을 맡았습니다. 當時 鐵道官舍를 將校宿所로 썼는데 派遣돼 오는 날 보니 샤벨(칼날은 없고 크롬 鍍金한 指揮도)을 차고 오셨더군요."

그 무렵 두 사람은 죽이 맞아 바쁜 渦中에도 日課가 끝나면 江陵에 있는 명월관, 봉래官으로 쏘다니며 자주 술을 마셨다. 술값은 補給品으로 支給되던 '씨레이션'(美軍 野戰用 携帶食品)을 팔아 充當했다. 1個月間의 派遣 勤務가 끝난 後 朴正熙는 春川 連帶本部로 復歸했다. 朴正熙가 남로당 人脈과 連結된 것은 바로 그 以後라고 廉氏는 確信했다.

"8連帶에는 빨갱이가 수두룩했습니다. 于先 朴正熙와 神經軍官學校 2期 同期生인 이상진(8聯隊 副聯隊長) 少領은 連帶 內 總責이었습니다. 朴 前大統領이 이들과 자주 어울렸습니다. 當時 이들은 包攝對象者들을 加入시키기 以前에 ○, △, ×로 分類한 다음 檢證을 거쳐 最終 '○'를 받은 者에 한해 加入을 시켰는데 朴 前 大統領도 여기서 '○'를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朴正熙는 남로당이 탐낼만한 '最高의 成分' 人物"

▲ 김점곤 將軍
8聯隊 時節 警備中隊長으로 勤務하면서 朴正熙 小委를 麾下에 小隊長으로 데리고 있었던 김점곤 平和硏究院長度 이와 類似한 主張을 펴고 있다.

"春川 時節 남로당 君師父 總責 이재복이 春川까지 찾아와서 朴正熙를 만나곤 했습니다. 그 때 朴正熙는 나에게 이재복을 '叔父'라고 紹介했습니다. 朴正熙가 逮捕된 後 그의 自述書를 봤더니 이재복을 통해 入黨했다고 돼 있더군요."

이어진 김점곤 院長의 說明은 더 說得力이 있다. 金 院長은 "남로당에서 朴正熙에게 軍 總責을 맡길 때 이미 그는 黨籍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며 "朴正熙는 貧農 出身에다 兄의 죽음 때문에 怨恨이 있었고, 特히 師範學校 때 朝鮮共産黨事件을 接했으며, 또 軍官學校 首席 卒業 等 이른바 '最高의 成分'을 가지고 있어 남로당 側에서 탐낼만한 人物이었다"고 評했다.

陸士 3期生은 '빨갱이 期數'?
[分析] 同窓會 名簿 中 '有故者 名單'

▲ 지난 1996年 陸士 開校 50周年을 맞아 陸士 總同窓會에서 펴낸 會員名簿. 寫眞은 3期生 死亡者 名單 가운데 包含된 '有故者 名單'. 이들은 大槪 肅軍 때 處罰을 받은 사람들이다.
ⓒ陸士 總同窓會 會員 名簿

지난 1996年 陸軍士官學校 開校 50周年을 맞아 陸士 總同窓會(會長 김점곤, 1期)는 <육사 총동창회="" 회원명부="">를 發刊했다. 이 名簿에는 1期에서부터 52期까지의 卒業生 名簿가 실려 있다. 앞 旗手로 갈수록 死亡者 名簿가 各 期數別 名單 末尾에 別途로 添附돼 있다.

그런데 特異한 것은 3期生의 境遇 戰死者, 殉職者, 死亡者에 이어 '有故者 名單'이라는 項目이 別途로 있는데 그 數字가 無慮 56名이나 된다. 이들 가운데 相當數는 肅軍 때 處刑된 사람들이다.

代表的으로 旅順事件의 主謀者 김지회, 홍순석을 비롯해 東海岸 一帶의 左翼 總責 강문영, 朴正熙와 함께 軍事裁判을 받은 김종모(大尉, 給料沒收 및 懲役 15年, 最終 懲役 5年 減刑), 홍순오(中尉, 給料沒收 및 懲役 15年, 最終 懲役 10年 減刑), 한상순(中尉, 給料沒收 및 懲役 15年, 最終 懲役 10年 減刑), 한동석(中尉, 給料沒收 및 懲役 15年, 最終 懲役刑에 한하여 執行停止), 김형식(中尉, 給料沒收 및 懲役 10年, 最終 懲役 1年 減刑) 等이 그들이다.

또 濟州 駐屯 9聯隊長 박진경 大領을 暗殺한 主謀者 問喪길度 이 名單에 包含돼 있다. 特히 軍內 左翼分子들을 索出하는데 가장 앞장섰던 김창룡(1聯隊 情報主任, 나중에 特務隊長 歷任)도 바로 3期生 出身이다. 한마디로 쫓고 쫓기는 사이가 서로 同期生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에 對해 3期生 出身 염정태氏는 "3期生 300名 가운데 50% 程度가 左翼에 包攝됐다는 얘기도 있었다"며 "이는 生徒時節 生徒大將 오일균(當時 少領, 日本 陸士 61期)과 中隊長 조병건(當時 少領, 日本 陸士 60期) 等의 影響을 받은 탓"이라고 分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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