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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 '5·18 講演'에 새내기 눈물 '펑펑'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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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27일 계엄군이 '충정작전'을 통해 전남도청을 다시 장악하면서 5.18은 막을 내렸다. 사진은 '충정작전'으로 체포된 시민군.
 1980年 5月 27日 戒嚴軍이 '忠情作戰'을 통해 全南道廳을 다시 掌握하면서 5.18은 幕을 내렸다. 寫眞은 '忠情作戰'으로 逮捕된 市民軍.
ⓒ 5.18記念財團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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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年) 5月 26日, 光州 市民 3萬 名이 道廳 앞에 모였어요. 하지만 어두워지면서 다 집으로 돌아갔지. 道廳에는 사람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5月 27日 새벽에) 20分도 안 걸려 道廳이 陷落되었을 거예요. 그런데 그때 光州 市民들이 자고 있었을까? 어떻게 잘 수 있겠어요? '道廳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밤을 지샜겠지요. 아마도 우리 5000年 歷史 中 가장 긴 새벽이었을 거예요."

19日 午後 5時, 한홍구 성공회대 敎授가 '只今 이 瞬間의 歷史'라는 主題로 새내기 對象 講演을 시작했다. 週末을 앞둔 金曜日 늦은 午後였음에도 100餘 名이 서울대학교 文化館 中講堂을 찾아 한 敎授의 講義를 傾聽했다.

이番 講演은 서울대 앞 冊房 '그날이 오면'(대표 김동운, 아래 '그날') 과 '그날이 오면 後援會'(會長 장경욱 辯護士)가 주최하고, 서울대학교 人文大 學生會와 社會大 學生會가 後援했다.

1988年에 門을 연 人文社會科學 專門書店人 '그날'은 서울대 앞 綠豆거리를 지켜온 批判的 知性의 産室이다( 關聯 記事 : 人文社會科學, 다시 날아오를 '그날' 꿈꾸다 ). 過去 大部分의 大學 앞에 하나쯤은 있었던 이런 人文社會科學 書店들이 하나둘씩 사라져갔지만, '그날'은 20年 넘게 꿋꿋이 자리를 지키면서 單純히 冊을 販賣하는 것을 넘어 社會 進步를 위해 活潑한 活動을 펼치고 있다. '그날' 代表 김동운氏는 講演 前 人事하는 자리에서 "'그날'은 韓國 社會의 矛盾들을 省察하기 爲한 窓門의 役割을 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밝혔다.

새내기를 主要 對象으로 한 강연이었지만, 새내기 뿐만 아니라 大學院生이나 白髮의 老人도 參席하는 等 다양한 聽衆이 한 敎授의 講義에 集中했다.

"지난 100年 동안 이렇게 많은 일들이 있었나"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한홍구 성공회대 敎授.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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演壇에 선 한홍구 敎授는 '그날'과 講演 題目인 '只今 이 瞬間의 歷史'가 통하지 않느냐며, "'또 다른 그날'을 이야기하겠다"라고 韻을 뗐다.

韓 敎授는 2010年을 "꺾어지는 해"라고 表現하면서 "(지난 100年 동안) 이렇게 많은 일들이 있었나 싶다. 庚戌國恥 100周年, 韓國戰爭 60周年, 4.19 50周年, 5.18 30周年 等 생각해봐야 할 일들이 많다"라고 했다.

이어 한 敎授는 韓國 社會가 現代에 壓縮的으로 變化한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했다. 그것은 그 以前에 韓國이 速度感 있는 歷史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韓 敎授에 따르면 王朝가 中國에 비해 오래 持續된 이유를 엘리트의 持續性에서 엿볼 수 있다고 한다. 貴族-豪族-新興士大夫로 이어지는 韓國의 엘리트들은 及其也 日帝 時代에도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日帝時代는 驚天動地하게 朝鮮과 다른 時代였어요. 그런데도 엘리트는 그대로 살아남았어요. 그리고 이 엘리트들은 解放 以後에도 고스란히 살아남았어요."

韓 敎授는 이 이야기를 하며 親日派 淸算 問題로 自然스레 講演을 이어갔다.

"親日派 淸算 못 한 나라가 全 世界에 둘, 바로 남베트남하고 南韓"

現代史 專門家로 <大韓民國史>, <特講> 等의 冊을 펴냈던 韓 敎授는 最近에 낸 저서 <只今 이 瞬間의 歷史>에서도 자주 言及했던 親日派 淸算 問題를 꺼냈다.

"親日派 淸算 못 한 나라가 全 世界에 둘이에요. 남베트남하고 南韓. 다른 나라들은 다 淸算했어요. 그리고 남베트남은 亡했지. 그럼 남은 건 우리밖에 없어요. 韓國戰爭은 親日派를 反共鬪士로 거듭나게 했던 決定的인 契機였죠."

韓 敎授는 1948年에 만들어진 制憲憲法이 宏壯히 左派的인 性格을 띄고 있었다고 指摘하면서, 이는 當時 親日派와 區分되는 民族主義 右派까지 同意하는 內容이었다는 點을 强調했다. 그런데 '惡質的인 反民族行爲를 處罰하는 特別法을 제정할 수 있다'고 明示的으로 規定한 制憲憲法 條項이 實現되지 않고 親日派 淸算이 失敗한 것에 對해 한 敎授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1949年에 쿠데타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制憲議會에서 親日派 淸算 等을 主張한 國會議員들을 間諜으로 몰았던) '남로당 프락치 事件' 알죠? 親日 警察이 일으킨 事件이에요. 그리고 國家機構人 反民特委를 警察이 襲擊했어요. 그로부터 2주 後 白凡(金九)李 暗殺됐죠. 이 세 事件은 한 事件이에요. 親日派가 民族的 良心을 가진 右派를 處斷한 거야."

"5000年 歷史에서 가장 길었을 그 새벽이 많은 사람의 人生을 바꿨다"

親日派 淸算의 當爲性을 强調한 韓 敎授는 5.18에 對해서도 많은 時間을 割愛해 이야기했다. 그는 犧牲者 數로 보면 한국전쟁이나 濟州 4.3抗爭에 미치지 못하는 이 事件이 왜 그렇게 重要한 事件이 되었는가 하는 話頭를 던졌다.

"光州의 犧牲者는 2000名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좀 誇張된 數値 같고 當時 죽었던 사람은 政府 發表와 비슷한 水準인 200名 程度, 以後 後遺症으로 死亡한 이들까지 합쳐 500名은 넘지 않을 듯 싶어요. 이 程度 水準이면 韓國戰爭 死亡者에 名銜도 못 내밀지. 濟州道 4.3事件 때만 해도 3萬5000名이 죽었어요. 그럼 光州가 뭣 때문에 그렇게 重要했나? 바로 그 새벽 때문에 많은 사람의 人生이 바뀐 거였어요. 光州는 한 世代를 만들었던 겁니다."

韓 敎授는 5.18의 過程을 훑어보면서 '解放 光州' 時期에 重要한 意味를 附與했다.

"人類 歷史에서 보기 어려운 일이었어요. 正말 놀라운 일이지. 武器가 數千 情이 풀렸는데 强盜 事件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物資가 不足했지만 아무도 買占賣惜한 사람이 없었고. 그게 바로 大同世上이죠. 그때를 생각하면 죽어도 餘恨이 없다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있어요."

1980年 5月 26日과 27日 道廳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면서 講演會는 클라이맥스에 다다랐다. 모든 聽衆이 숨죽이며 한 敎授의 말을 傾聽했다. 몇몇 學生은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5月 26日에 道廳에 남은 이들이 있었어요. 그들 中 一部는 現實的으로 鷄卵으로 바위稚氣라며 降伏하자고 했지. 하지만 남은 사람들은 '그냥' 남았어요. 차마 집에 갈 수 없었던 거죠. 그날(27日) 새벽, 20分도 안 되어 道廳이 陷落되었어요. 結局 진 거죠. 그런데 그 以後로 우리 歷史에 突然變異들이 나타나기 始作했어요. 別種들이 誕生한 거야. 그때 道廳에 있었던 사람들이 銃을 내려놨다면 우리 時代의 光州는 없었을 겁니다."

이어 한 敎授는 서울대 學生들을 응시하며 이야기했다.

"良識 있는 사람들은 現代史 初期에 다 虐殺당했어요. 그것도 滅菌실 水準으로. 이렇게 '淸掃'가 말끔히 된 社會에서 民主化를 이룩할 수 있었던 理由가 있어요. '한 時代에 가장 똑똑한 이들이 自身을 돌보지 않았던 것'이에요. 그것을 可能하게 했던 게 바로 光州였죠."

앞자리에 앉은 한 女學生은 연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시민들의 저항에 밀려 계엄군이 일시 후퇴했던 1980년 5월 '해방 광주' 모습. 한홍구 교수는 19일 강연에서 "무기가 수천 정이 풀렸는데 강도 사건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라며 "인류 역사에서 보기 어려운 일이었고, 바로 대동세상이었다"라고 평가했다.
 市民들의 抵抗에 밀려 戒嚴軍이 一時 後退했던 1980年 5月 '解放 光州' 모습. 한홍구 敎授는 19日 講演에서 "武器가 數千 情이 풀렸는데 强盜 事件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라며 "人類 歷史에서 보기 어려운 일이었고, 바로 大同世上이었다"라고 評價했다.
ⓒ 5.18記念財團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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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主化로 누가 第一 좋아졌죠? 財閥 아닌가요?"

그러나 한 敎授는 5.18로 만들어진 한 世代가 일군 民主化가 不完全하다고 評價했다. 分明히 民主化는 큰 成果이고 지켜야 하는 것이지만 限界가 너무 많다고 보았다.

"民主化되고 나서 누가 第一 좋아졌죠? 財閥 아닌가요? 옛날에는 全斗煥 한마디에 財閥이 解體됐었죠. 그런데 只今은 財閥이 國家權力을 管理해요. '떡찰' 있잖아요. 李健熙만을 위한 特別赦免을 하는 나라가 됐죠. 眞짜 權力이 뭔지 알아요? 그건 壁에 똥漆할 때까지 꼭 쥐고 있다가 子息한테 물려주는 거예요. 그게 뭐죠? 바로 財閥하고 言論이야. 그들은 적어도 열 倍는 剛해졌어요."

이어 具體的으로 民主化의 限界에 對해 言及했다. 韓 敎授는 非正規職 問題와 財閥 改革 失敗를 첫손가락에 꼽았다. 그리고 當付로 講演을 마무리했다.

"韓國에 새로운 身分制가 생기고 있어요. 요즘 支配層이 하고 있는 것은 거기(상류층)로 들어가는 門을 닫는 일이에요. 不幸한 時代에 우리가 이뤄놓은 것, 여러분들이 뺏기지 않도록 努力해야 해요. 그것은 바로 憲法이고, 그걸 지키기 爲해 어떻게 싸워왔는지 記憶해야 해요. 1980年代에는 大義를 위해 싸웠어요. 只今 여러분은 自身을 지키기 위한 鬪爭을 우리 社會의 公共善에 맞게끔 해야 해요."

그는 이렇게 2時間에 걸친 講義를 마무리했다. 긴 拍手소리가 터져 나왔다.

講演 내내 곳곳에서 눈물... 두 새내기는 講演 後 '펑펑'

講演이 끝난 後 한 새내기 大學生에게 所感을 물었다. 광주 出身으로 올해 師範大에 入學했다는 김소영氏는 過去 新羅·高麗 支配層의 維持와 親日派 淸算 問題를 연결해 說明한 대목이 印象的이었고, 5.18 이야기가 가슴에 와닿았다고 덧붙였다. 또한 "最近 高麗大學校 學生의 自退 大字報를 보며 親舊들과 많이 共感했어요. 大學이 어쩌다 이 地境이 되었는지 모르겠네요."라면서 變化의 主體로 서고 싶다는 抱負를 밝혔다.

講演會가 끝난 後 한홍구 敎授의 著者 사인會가 이어졌다. 韓 敎授는 학생들이 들고 온 冊에 하나하나 사인을 해주면서 오랫동안 對話를 나누는 熱情을 보였다. 이 過程에서 올해 大學에 入學한 '10學番' 새내기 두 親舊가 5.18에 對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펑펑 울어, 보는 이들의 마음을 울컥하게 했다. '그날이 오면 後援會' 會長인 장경욱 辯護士도 "5.18 이야기를 처음 듣는 것도 아닌데 한홍구 敎授 講演을 들으며 북받쳤다"라며 "講演 主催 側으로서 눈물 참느라 혼났다"라고 털어놓았다.

以後 綠豆거리의 한 호프집에서 한 敎授와 講演 參席者 30餘 名이 함께한 뒤풀이가 이어졌다. 校服을 입은 高等學生 아들을 데리고 參席한 82學番 先輩, 몇 時間 前 '그날' 앞을 지나가다가 講演 포스터를 보고 한걸음에 달려왔다는 考試生, 갓 大學에 들어온 10學番 새내기 等이 자리를 함께하는 大學街에서 보기 드문 자리가 만들어졌다. 韓 敎授도 밤 11時까지 자리를 지키며 參席者들과 깊이 있는 對話를 나눴다.

덧붙이는 글 | 최기원 記者는 '그날이 오면 後援會' 運營委員입니다. '그날' 消息은 http://www.gnal.co.kr/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태그 : #그날이오면 , #한홍구 , #5.18 , #講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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