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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맛 쓴맛 보고, 한 바퀴 돌아 親庭팀 온 마해영 - 오마이스타
'野球의 追憶'에는 이미 마해영에 對한 글이 오른 적 있었다. ( '다시 날아라 마해영' -06.12.27, 番外篇-) 그러나 各팀의 現役 選手들에 對한 이야기를 쓰는 이번 順序에서, 다시 한 番 마해영을 다루기로 했다. 그는, 롯데 자이언츠와 꼭 같은 軌跡으로 '영'과 '辱'을 맛보았으며, 먼 길 돌아온 親庭팀에서 只今 다시 釜山팬들의 歡呼와 歎息을 한몸에 받고 있는, 또 다른 意味에서 롯데의 象徵과 같은 選手이기 때문이다. - <記者 週>

 제리 로이스터 롯데 자이언츠 감독.

제리 로이스터 롯데 자이언츠 監督. ⓒ 롯데 자이언츠


지난 6月 5日 두산戰과 6日 SK戰을 마친 辭職競技場에서, 제리 로이스터 롯데 자이언츠 監督을 인터뷰했었다. 그리고 스스로 조금 殘忍하다는 생각까지 하면서도 어느 選手에 對한 생각을 물었다.

"그 選手를 選拔出場시킨 理由가 무엇입니까?"
"平素에 보내기번트 사인을 잘 내지 않는데, 그 選手에게 보내기번트를 시킨 理由는 무엇입니까?"
"그 選手에게 願하는 것이, 競技力입니까? 아니면 팬서비스입니까?"

로이스터 監督은 매너 있는 사람이었지만, 인터뷰 相對로는 달갑지 않은 사람이었다. 꽤나 날카롭게 후벼대 봐도 딱히 건져서 쓸 것 없는 둥글둥글한 이야기 말고는 내뱉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팀에 必要 없는데도 起用하는 選手는 아무도 없습니다. 바로 그 競技에 가장 適切한 選手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번트 自體가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할 수는 없습니다. 꼭 必要한 狀況에서는 어떤 選手에게라도 作戰을 낼 수 있습니다."
"팬들의 사랑은 勿論 重要합니다. 그러나 競技場에서 競技가 始作되면, 京畿에 가장 必要한 것이 무엇인지만을 저는 苦悶합니다."
… 等等.

그는 質問이 무엇이듯, '나는 남의 視線이나 評價는 神經 쓰지 않는다'거나, '우리는 주어진 條件 속에서 最高의 멤버들로 競技에 나서고 있다'거나, '目標는 恒常 이기는 것이며, 다른 것은 神經쓰지 않는다'는 等의 答辯으로 돌려막고 있었다. 어쨌든 그는 낯선 팬과 言論에게 각별한 關心을 받고 있는 韓國프로野球史上 最初의 外國人 監督이기에, 어느 만큼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거듭 그에게 물었던 '그 選手'란 다름 아닌 마해영이었다. 그는 그 두 競技에 오랜만에 1壘手로 選拔 出場했지만, 이틀間 일곱 打席에서 單 한 個의 安打도 때려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날 그가 팬들에게 남긴 뒷맛은 單純한 '無安打' 以上으로 深刻했다. 그의 앞에 유난히 많은 機會가 돌아왔고, 그가 登場할 때마다 사직구장은 들끓어 올랐지만, 그는 그때마다 맥없는 三振 두 番(그 中의 한 番은 보내기 번트 失敗에 이은 헛스윙 三振), 虛脫한 내야 파울플라이 한 番, 그리고 倂殺打 한 番으로 粥을 쑤고 말았던 것이다.

마해영을 만나다

배팅연습 실내연습장에서 배팅연습중인 마해영

▲ 배팅練習 室內演習場에서 배팅練習中인 마해영 ⓒ 롯데 자이언츠



그리고 그다음 競技가 始作되기 두어 時間 前인 6月 7日 午後, 사직구장의 室內演習場에서 마해영을 만날 수 있었다. 다른 選手들은 各自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出戰을 準備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고, 室內演習場은 비어있었다. 그러나 그는 室內 演習場에서 혼자 아무 表情 없이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京畿 時間 前에 이렇게 인터뷰 付託을 드리게 돼서, 罪悚합니다."

競技가 있는 날, 選手들은 날카로워지기 마련이다. 競技 始作 直前이면 더 그렇다. 球團 弘報팀을 통해 미리 諒解가 된 일이긴 했지만, 그런 時間에 인터뷰하는 것은 꽤나 未安한 일이다.

"괜찮습니다. 저는 오늘 出戰 안 합니다."

씁쓸한 웃음. 무슨 뜻인지는 알 만했다. 그래도 慰勞를 하고 싶어서였을까, 나는 쓸데없는 質問으로 그의 쓴웃음을 한 番 더 짜내고 말았다.

"그래도 競技 中間에 交替出場하게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가 다시 答했다.

"監督님 스타일이, 그렇게 하시지는 않을 것 같고 …, 어제랑 그제 제가 잘 못했으니까 …, 이番 機會는 제가 놓친 것 같네요."

그는 國內 最高의 熱情을 자랑하는 釜山 팬들에게 成跡과 無關하게 歡呼를 받는 人物이다. 그래서 1割臺의 貧打에 허덕이며 2군에서 選手生活의 바닥을 經驗하는 只今도 올스타投票 指名打者 部門 1位를 豫約하고 있다. 그러나 팀이 無慮 10餘 年 만에 4强 進出의 마지막 고비를 넘고 있는 요즘, 競技의 重要한 고비에 그가 登場할 때면 歡呼聲 아래로 慇懃한 한숨이 깔리는 것이 또한 別수 없는 雰圍氣이기도 하다.

歷代 最高의 오른손 打者

1995年, 大學을 卒業하고 常務를 거쳐 프로에 入團한 그는 오픈스탠스의 打擊폼에서 나오는 豪快한 스윙과 長打力, 그리고 甚至於 얼굴까지 닮았다며 '오른손 梁埈赫'으로 불렸고, 果然 '怪物'로 통했던 한 해 先輩 양준혁과 크게 다르지 않은 活躍을 선보이며 빠르게 자리를 잡아갔다. 데뷔 첫해, 그는 單숨에 터主大監 '자갈치' 김민호를 밀어내고 롯데의 4番을 꿰차며 話題를 뿌렸고, 大學과 常務 時節을 함께 한 先輩 임수혁과 더불어 '마림포'로 불리며 팀의 準優勝을 이끌기도 했다.

그리고 1999年, 그는 正規시즌에 .372의 打率로 打擊王에 오르는 同時에 35個의 홈런을 記錄하며 '힘과 正確性을 兼備한 타자'의 典型으로 자리매김한 데 이어 그 有名한 플레이오프 7次戰 同點 홈런을 때려내며 다시 한 番 팀의 마지막 韓國시리즈行의 主役이 되었다. 그리고 三星으로 移籍한 2003年에는 李承燁, 양준혁과 더불어 無慮 127個의 홈런과 359個의 打點을 만들어낸 歷代 最强 클린업트리오의 傳說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90年代 말과 2000年代 初盤, 그는 늘 歷代 最高의 右打者로 꼽히곤 했고, 相對팀과 投手에게 저승使者와도 같은 存在였다. 그러나 2004年, 起亞로의 FA 入團이 그에게 갈림길이 됐다.

2003年 시즌 뒤 FA 資格을 얻은 마해영에게 三星이 提示한 것은 '3年間 23億'이었다. 데뷔 以後 9年間 通算 3割이 넘는 打率에 229個의 홈런을 때려낸, 그리고 2002年에는 팀 最初의 韓國시리즈 優勝을 결정짓는 逆轉 끝내기 홈런을 날린 韓國시리즈 MVP에 對한 待接으로는 野薄했다. 그리고 條件을 받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는 式의, 에누리도, 協商의 餘地도 없다는 球團 側의 態度가 마해영의 自尊心을 긁었다.

끝내기 홈런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삼성 라이온즈의 한국시리즈 첫 우승을 결정짓는 끝내기 홈런을 날린 마해영

▲ 끝내기 홈런 2002年 韓國시리즈 6次戰에서 三星 라이온즈의 韓國시리즈 첫 優勝을 결정짓는 끝내기 홈런을 날린 마해영 ⓒ 三星 라이온즈


大卒에 常務까지 經由해서 들어온 프로 10年次로 이미 30代 中盤에 들어서던 巨砲. 게다가 前年度 3億8千에 達했던 만만치 않은 몸값. 그런 그에게 補償金 包含 40億 以上의 돈을 배팅할 球團이 없으리라는 나름의 計算이 三星에게 있었다. 그러나 그 해는 創團 以後 3年 連續 中上位圈에 머물며 더 높은 곳에 對한 欲心을 품기 始作한 飢餓와 3年 連續 꼴찌의 受侮를 더 以上 견딜 수 없게 된 롯데가 三星이 獨走하던 FA市場의 새로운 큰손으로 뛰어들었던 그 해였고, 그 渦中에 整數根과 이상목, 진필중, 박종호 等이 애初 豫想을 훨씬 뛰어넘는 條件으로 유니폼을 갈아입었던 그 해였다.

마해영도 4年間 28億(補償金 包含 45億1千萬원)의 條件을 提示한 飢餓로 移籍했다. 三星과의 協商時限이 끝나자마자 러브콜을 보내온 起亞였고, 自尊心을 살려준 데 '感動'하며 그 자리에서 곧장 사인을 해버린 마해영이었다. 그러나 기아와 마해영, 둘 사이의 아름다운 關係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마해영은 2004年 시즌 初부터 起亞의 4番 打者로 起用되었지만 2割臺 初盤을 轉轉하는 選手生活 初有의 不振을 거듭했고, 6月 以後 第 페이스를 찾으며 시즌 打率을 2割8푼臺로 맞추어 놓았지만 홈런은 프로生活 中 가장 적은 11個에 그치고 말았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5年에도 홈런 數는 別般 늘지 않은 12個였고, 그나마 打率마저 떨어지며 .266으로 시즌을 마치고 말았다. 이종범, 장성호로 묶인 中距離砲의 火力을 極大化해 팀을 創團 첫 優勝으로 이끌어주어야 할 '優勝請負社'로서는 落第點이었다.

"故鄕 팀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FA로 많은 돈을 받고 他鄕 팀으로 가니까 恒常 눈치를 보게 되더라구요. 前에는 잠깐 不振해도 '그냥 그러다 말겠지' 했는데, 여기서는 '돈을 얼마를 주고 데려왔는데…' 하는 視線이 느껴지는 거죠. 차라리 말로 하고 惹端을 치면 낫겠는데…."

따지고 보면 '最惡'이랄 것까지는 없는 成跡이었지만, 그는 고스란히 '먹튀'라는 汚名을 써야 했다. 2005年, 기아는 意欲的인 投資에도 創團 以後 처음으로 꼴찌를 經驗해야 했고, 그 原因을 分析하는 이마다 '45億짜리 優勝請負社의 背信'을 맨 앞줄에 넣어야 했기 때문이다.

三星 時節 '國民打者' 이승엽에게조차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던 단단한 自尊心. 巨額의 FA契約者로서의 重壓感과 그것을 부채질하는 微妙한 疑心과 不滿의 눈초리. 거기에 釜山에서 光州로, 人文的인 意味로 보자면 이 나라의 이 끝에서 저 끝으로 보내져 겪어야 했던 他鄕살이의 生疏함과 三十 代 中盤을 넘어선 巨砲가 避해갈 수 없었던 微妙한 瞬發力과 배트스피드의 變化까지. (덧붙이자면 指導者와의 葛藤까지) 모든 惡材들이 그 瞬間 뒤섞이며 그의 下向勢를 이끌었다.

FA, 먹튀, 放出

2006年에는 LG로 트레이드되었지만 充分한 競技 出張의 機會조차 가지지 못한 채 더 가파른 내리막을 타기 始作했고, 2007年에는 2軍에서조차 放置되다시피 하는 受侮를 겪어야만 했다.

"昨年 시즌 初, 김재박 監督이 競技마다 딱 두 打席씩만 機會를 주는 것 같던데, 그렇게 테스트 받는다는 느낌으로 臨할 때 더 스트레스를 많이 받게 되지 않았습니까?"

마해영은 떠올리기만 해도 몸이 굳어온다는 듯 앉은 자리에서 허리를 비틀며 難堪한 웃음을 흘렸다.

"아, 正말 죽겠더라고요. 한 番 스윙을 할 때마다 자꾸 더그아웃 쪽의 눈치를 보게 되는데 …."

11競技에서 許諾받은 32番의 打席. 그가 때려낸 것은 한 個의 單打와 한 個의 홈런. 7푼 1里라는 낯설고도 소름끼치는 數字가 그의 지난 2007年 시즌 成績이었다.

그리고 2008年, 더 以上 트레이드의 材料로서도 效用을 가질 수 없다는 判斷을 내린 LG는 그를 放出하는 親切을 베풀었고, 그는 다시 入團테스트를 거쳐 5千萬원이라는 形式的인 年俸으로나마 故鄕팀에 復歸하는 幸運을 누렸다.

"都大體 問題가 뭐였습니까?"

가장 本質的인 質問을 던졌다. 그것이 가장 本質的인 質問인 것은, 그 亦是 아직 풀어내지 못한 質問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글쎄요, 저도 답답하죠. 어디 負傷이 있는 것도 아니고. 體重이 불어난 것도 아니고. 訓鍊을 게을리 한 것도 아니고."

實際로 그는 選手生活 始作한 以後로 特別히 深刻한 負傷을 當한 적도 없었고, 手術을 받은 적도 한 番도 없으며, 全盛期와 별다를 것 없는 體重을 維持하고 있다. 그가 언제나 訓鍊量이 많은 便에 屬하는 選手로 評價받아온 것과도 無關하지 않다.

"아무래도, 競技 感覺이 떨어졌던 데서 찾아야 할까요?"

辨明 같아서, 먼저 뱉을 수 없는 말을 내가 먼저 물었다. 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큰 것 같고…, 勿論 FA契約이라는 選擇을 제가 한 거니까 누굴 怨望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한 番 感覺이 꺾이고 나니까 다시 올라가기가 쉽지는 않아요."

勿論 그것이 그에게 찾아온 不振의 原因 全部라고 할 수는 없다. 나이를 먹어가고 相對 投手들의 水準과 傾向이 變化해가는 過程에 能動的으로 對處하지 못한 그의 技術的, 心理的 問題들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理由들이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그리고 고약하게 얽혀들었는지는 正말 모를 일이다. 어쨌든 그는 단맛 쓴맛을 모두 보고서야 한 바퀴 돌아 親庭팀으로 돌아왔다.

그저 約束과 義理를 지키고 싶었을 뿐

복귀신고 2008년 4월 1일, 시즌 홈 개막전에서 마해영이 부산팬들에게 복귀를 신고하는 큰절을 올리고 있다.

▲ 復歸申告 2008年 4月 1日, 시즌 홈 開幕展에서 마해영이 釜山팬들에게 復歸를 申告하는 큰절을 올리고 있다. ⓒ 롯데 자이언츠


2000年, 選手協 事件은 프로 野球史를 뒤흔들어놓았고, 마해영 個人도 엄청난 餘波를 經驗하게 된다. 當時 박용오 KBO總裁가 '選手協이 만들어지면 프로野球를 그만두겠다'는 超强勁發言을 쏟아내는 가운데 各 球團 社長들은 選手協에 加入한 選手들을 全員 放出하겠다는 決意를 했고, 結局 迂餘曲折 끝에 縫合되기는 했다.

하지만 심정수, 梁埈赫, 박충식, 姜炳圭, 박재용 等 '미운털'이 박힌 主動者級 選手들이 트레이드되거나 옷을 벗었다. 롯데의 中心이자 象徵이 되어가던 마해영이 猝地에 三星으로 밀려난 것도 바로 그때였다.

"모르겠어요. 結局 그 事件이 저한테도 엄청난 影響을 미쳤는데…, 99年 시드니올림픽 豫選 때 代表팀에 모인 選手들이 選手協을 만들자고 決意를 하고 約束을 했어요. 우리같이 자리 잡은 選手들이 아니라 新人이나 候補, 어렵게 生活하는 選手들을 위해서 꼭 必要하다고 생각했고. 저는 約束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고, 義理를 지키고 싶어서 끝까지 했죠. 結局 그것 때문에 팀에서 나가게 됐지만… 只今도 後悔는 없어요."

하지만 좋지도 않은 일로 헤어졌던 球團과의 再結合. 앙금이 남아있지는 않을까?

"率直히, 外國人 監督이 赴任하는 機會가 아니었다면, 제가 돌아올 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點에서 監督님께 참 感謝하죠. 그리고 무엇보다도 釜山팬들이 저를 이렇게 記憶해주고 찾아주지 않았다면, 絶對 不可能했을 일이니까, 正말 感謝한 마음이구요."

國內 最高 水準 巨砲의 火力을 抛棄하고 팬들의 至毒한 非難마저 甘受해가며 그를 내쳤던 球團이었다. 不過 5千萬원의 '푼돈' 外에 必要한 費用이 없었다 하더라도, 그를 다시 받아들인 球團과 그 사이에는 말하기 複雜한 事緣이 있을 수밖에 없다. 더 以上 깊이 캐묻는 것은, 그를 곤란하게 만드는 일일 수 있었다.

그 밖에도 監督에 對한 이야기, 後輩들에 對한 이야기, 또 임수혁 選手에 對한 이야기들을 묻고 答했고, 너무 속 깊은 이야기는 나도 가슴 속에만 두기로 했다.

그날 競技에 出場할 일은 없다고 했지만, 그도 더그아웃을 지켜야 했다. 그러면서 파이팅도 외쳐주고, 安打를 친 後輩에게는 祝賀를, 三振을 먹고 들어온 後輩에게는 慰勞를 해주는 것도 그의 役割이었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물었다.

"事實, 예전에는 이렇게 인터뷰를 하거나, 팬들 만나서 死因 해주고, 寫眞 찍어주고 그런 것 좀 귀찮게 여겨지고 그러셨죠?"

"率直히, 좀 그런 것도 있었죠. 特히 言論에 對해서는, 제가 그렇게 親切한 便이 아니었으니까 … 좀 倨慢하다, 뭐 그렇게 보는 분도 계셨고. 正말 競技 끝나고 疲困한데 몰려들어서 사인해달라 뭐해달라 그러시면 좀 귀찮은 생각이 있었죠. 그런데 요즘에는 正말 그런 분들 사랑 德分에 내가 있구나 하는 걸 알게 되니까, 正말 感謝한 마음으로 해드리죠."

그리고 말끝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런데 뭐, 成績이 좋아야 그게 正말 報答이 되고, 더 기쁘게 해드리는 건데…."

選手의 꿈, 팬들의 바람

가르시아와 함께 동계훈련중 마해영을 업은 채 훈련에 임하고 있는 가르시아

▲ 가르시아와 함께 冬季訓鍊中 마해영을 업은 채 訓鍊에 臨하고 있는 가르시아 ⓒ 롯데 자이언츠


示範競技 때, 親庭 復歸를 申告하는 2壘打를 터뜨렸던 날의 그가 떠올랐다. 이대호가 登場했을 때보다도 배는 큰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連呼하는 팬들 앞에서 3壘쪽 라인을 뚫고 나가는 安打를 치고 2壘 베이스에 安着한 그가, 가슴에 두 손을 모으고 수줍게 웃는 場面을 TV 카메라맨은 執拗하게 클로즈업했고, 나는 그가 눈물이라도 흘리면 어쩌나 緊張하며 시려 오는 코끝을 꼭 집어 다스렸었다.

'頂上에 있을 때 作別하고 싶은' 것이 選手들의 꿈이기도 하지만, '마지막 한 숨까지 하얗게 태우도록 곁에 두고 싶은' 것이 팬들의 欲心이기도 하다. 마해영의 選手로서의 꿈에는 이미 津한 얼룩이 배어버렸지만, 그가 다시 한 番 솟구쳐 頂上에 오르지 못한다 해도 팬들은 그를 怨望하지 않을 것이다. 구경꾼과 달리, 팬이란 그런 것이다.

더 以上 하루건너 하루씩 홈런을 때려내지 못한다고 해도, 아니 決定的인 逆轉 찬스에서 倂殺打를 때리고도 1壘까지 抛棄하지 않고 달리는 모습만 보여준다면 怨望하지 않는 팬들과, 대여섯 點쯤 앞서거나 뒤진 채 맞은 8回나 9回, 勝負가 이미 決定되고 나서야 自身의 이름을 連呼하며 찾아주는 팬들을 怨望하지 않는 選手. 그들이 함께 지키는 野球場은 競爭으로 살고 죽는 社會, 그 안에서도 가장 熾烈하고 劇的인 競爭이 벌어지는 野球場이 가지는 逆說的인 멋과 浪漫의 證據다.

그리고, 내가 野球를 사랑하는 理由다.

덧붙이는 글 記者紹介 : 사람에 關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지은 冊으로 <야구의 추억,="" 그의="" 141구는="" 아직도="" 내="" 마음을="" 날고="" 있다="">(뿌리와이파리), <126, 팬과="" 함께="" 달리다="">, <돌아오지 않는="" 2루주자="">(以上 풀로엮은집) 等이 있다.
마해영 롯데 자이언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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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關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連載했던 '맛있는 追憶'을 冊으로 엮은 <맛있는 追憶>(自認)을 비롯해서 靑少年用 傳記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聖者>, 80,90年代 프로野球 스타들의 이야기 <野球의 追憶>等의 冊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