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兄弟福祉院, 國家가 國民을 짐승으로 만들었다



記者手帖

    兄弟福祉院, 國家가 國民을 짐승으로 만들었다

    [卞相昱의 記者手帖]

     

    테마가 있는 高品格 뉴스, 世上을 더 크고 餘裕로운 視線으로 들여다보는 CBS <김현정의 뉴스쇼=""> '記者手帖 시즌2'에서는 정의롭지 못한 것에 對한 날카로운 批判을 담았다. [編輯者 週]

    지난 10月 10日 釜山 兄弟福祉院 事件의 被害者들이 證言大會를 가졌다. 强制收用과 監禁, 暴行과 强制奴役의 地獄으로 惡名 높았던 釜山 兄弟福祉院. 온 國民을 衝擊에 빠뜨리고 閉鎖 된지 26年 만에 被害者 證言大會가 열렸다. 當時 需用者는 4千 餘 名에 이르렀는데 얼마나 慘酷한 經驗이었기에 그 이야기를 公開的으로 꺼내는데 26年이 걸린 것일까?

    ◈ 우리는 個였고 소였다

    兄弟福祉院은 1975年부터 1987年까지 存在했던 露宿人 强制收容施設이다. 浮浪人을 先導한다며 障礙人, 孤兒, 露宿人들을 不法監禁하고 强制奴役을 시키며 喝取했다. 性暴行은 茶飯事였고 暴行으로 숨져나간 사람도 數 百 名이다. 兄弟福祉院 記錄으로도 12年間 死亡한 사람이 513名이다. 當時 院長은 박인근이라는 人物. 그러나 그는 橫領罪 等으로 가벼운 處罰을 받았을 뿐 不法拘禁, 暴行, 殺人 等에 對해서는 指示.敎師인지 幇助인지 몰라도 裁判조차 받지 않았다. 院長이 떼먹은 國庫補助金이 12億 원에 이르지만 檢察 起訴 過程에서는 上部 指示로 無期懲役을 살짝 면하는 10億 아래로 줄여 橫領額은 7億이 되었다는 證言도 있다. 無期懲役 그 以上이어야 할 刑量은 抗訴審을 거쳐 줄고 줄어 懲役 2年 6個月로 가볍게 끝났다.

    兄弟福祉院은 運營資金으로 1年에 20億 원 程度를 國家와 釜山市로부터 支援받았다. 只今 돈의 價値로 換算하면 200億 원 臺다. 거기에다 不遇이웃돕기 誠金, 篤志家 誠金 等 돈다발이 굴러들어 왔고 그 祕資金의 相當部分은 다시 權力者들에게로 돌아 들어갔을 것은 뻔한 일이다. 全斗煥 氏로부터 받은 勳章만도 2個나 되었고 1987年 1月 그가 拘束되자 各處에서 救命을 請託하는 電話가 빗발쳤다고도 한다. 全斗煥 政權은 1987年 박종철 拷問致死事件으로 政治的 危機에 몰린 狀態에서 兄弟福祉院 事件이 터지자 權力 維持를 위해 이 事件을 緊急히 縮小·隱蔽했던 것이다.

    兄弟福祉院 收監者들의 處遇는 生存者의 手記 ‘살아남은 아이’ 中에 나오는 대목처럼 “한때 나는 개였고 소였다.”는 表現 그대로이다. 福祉院이라는 看板이 붙었고 園生이라 불렀지만 實際로는 强制收容所였고 構成은 軍隊式 編制였다. 1小隊부터 28素帶까지 있고 小隊는 100名 안팎으로 構成됐다. 每日같이 暴行과 團體 苛酷行爲가 벌어졌고 때리지 않으면 더 不安해지는 그런 生活이었다고 한다.

    맹물에 선지, 소금만 넣은 國이 나왔고, 쓰레기 菜蔬로 담근 김치, 썩은 生鮮구이 等이 飯饌이었다. 쓰레기 菜蔬는 慶南 金海 들판에 널린 배추잎·無쪼가리를 空짜로 긁어모아 온 것이고, 선지는 釜山 地域 屠畜場에서 나오는 선지를 얻어다 국을 끓였다. 屠畜場에서 나오는 핏덩어리는 事實上 産業廢棄物이다.

    脫出에 失敗해 野球방망이로 셀 수 없이 맞고 脫出해서 밖으로 나갔으나 며칠 만에 다시 잡혀 들어와 맞고, 心臟病을 앓아도 藥은 感氣藥과 營養素가 담긴 알藥 뿐이었다. 一部 屍身은 300∼500萬 원에 醫科大學의 解剖學 實習用으로 팔려나간 것으로 確認되기도 했다.

    兄弟福祉院이 閉鎖되고도 收監者들은 地獄을 벗어나지 못했다. 집으로 가보니 家族이 移徙하고 없어 다시 露宿者가 돼야 했다. 每日 피를 뽑고 獻血車에서 주는 빵으로 살아 간 사람들이 不知其數이다. 너무 오래 갇힌 채 屈從의 삶을 살다보니 社會生活에 到底히 適應을 못해 다른 收容施設을 찾거나 露宿人으로 살아가야 했다. 아주 오래 前 이야기 같지만 當時 收監者 中에는 12살~15살 程度의 少年少女度 許多했다. 그들의 나이 이제 40代 中盤이다.

    地下鐵 露宿者들. (資料寫眞)

     

    ◈ 兄弟福祉院은 國家의 暴力

    70~80年代 浮浪인 團束과 强制 拘禁의 根據가 된 것은 1975年 制定된 內務部 訓令 第410號 (浮浪人의 申告, 團束, 收容, 保護와 歸鄕 措置 및 事後 管理에 關한 業務 指針)이다.

    이 指針에 따르면 사는 곳이 일정치 않아 돌아다니며 거리를 오가는 市民을 不便케 하는 乞人, 껌팔이, 앵벌이 等은 團束對象의 浮浪人이다. 거리의 行商, 빈 지게꾼, 成人 껌팔이 等은 社會에 나쁜 影響을 주는 準浮浪人이다. 참으로 簡便한 分類이고 잡아가두는 것도 簡便했다. 團地 業務指針만으로 엄청난 人權蹂躪과 國家의 暴力이 行해진 것이다.

    兄弟福祉院을 閉鎖시킬 때 入所 記錄 等 各種 資料들이 廢棄되어 버렸다. 누가 어떤 被害를 입었고 어떤 사람이 加害者이고 누가 背後를 봐 준 것인지 가려내기 쉽지 않다. 公訴時效도 지났으니 艱辛히 살아남은 生存者들이 自身들의 被害를 立證해야 한다. 얼마나 기막힌 現實인가.

    兄弟福祉院에 對한 記錄은 多幸히 사라지지 않고 몇 卷의 冊으로 남았다. ‘살아남은 아이’外에도 擔當 檢事였던 이가 쓴 ‘브레이커 없는 벤츠’, 또 다른 生存者의 手記 ‘生地獄의 낮과 밤’, 그리고 國家 暴力의 犧牲者이면서도 숨 죽여 살아 온 그들이 드디어 直接 입을 열어 證言과 記錄을 남기기 始作했다. 이제 市民團體의 도움으로 오는 24日 ‘兄弟福祉事件 眞實糾明을 위한 對策委’를 꾸리게 된다. 對策委員會는 被害者 遺骨 收拾 作業과 다큐멘터리 映畫製作 作業을 準備 中이다.

    그런데 兄弟福祉院 設立者와 그 家族은 아직도 떵떵거리고 산다. 社會福祉法人을 세워 1,000億 원臺의 資産을 所有하고 있다 한다. 只今은 當時 朴 院長의 셋째 아들이 代表理事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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