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엔 金素延 記者]
한 篇의 映畫 같은 時間이었다.
天安에서 거리公演을 하던 靑年들이 2010年 5月 서울로 올라왔다. 오디션 프로그램에 出演했고 누구보다 드라마틱하게 生放送 舞臺에 進出해 準優勝까지 차지했다. 發表하는 앨범마다 全曲이 음원 차트를 싹쓸이하고, 全國투어콘서트를 成功하게 할 만큼 슈퍼스타가 된 버스커버스커. 이들의 2年을 살펴보니 映畫가 따로 없었다.
天安에서 "내 音樂이 먹히나 안 먹히나" 試驗하기 위해 홍대 앞으로 온 첫날, 張凡俊과 金形態 等 버스커버스커 멤버들은 KBS 2TV '다큐멘터리 3日' 撮影팀에 눈에 띄어 5分 남짓 出演했다. 當時 張凡俊은 "藝術을 하려면 弘大에 가야 한다는 생각은 좋지 않은 것 같다. 그래도 여긴 眞짜 音樂에 미쳐서 다 걸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좋다. 地方에서는 合奏하고 싶어도 팀員을 求하기 어렵다"고 했다. 張凡俊에게 製作陣은 "21世인데 생각하는 게 奇特하다"고 하자 "우리 엄마도 그렇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내가 이러겠다는 것을 알고 엄마가 用돈을 끊었다"며 웃었다. 當時 홍대에서 張凡俊이 불렀던 노래 歌詞 中에는 "엄마, 用돈 좀 부쳐주세요"가 있었다.
거리公演에 對한 생각이 透徹했던 張凡俊은 함께 모여 거리公演 情報를 共有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이트를 만들었다. 사이트 이름은 버스커 버스커(wwww.buskerbusker.co.kr)다.
2011年 4月 張凡俊이 Mnet '슈퍼스타K 3'에 버스커버스커란 이름으로 參與한 理由도 張凡俊이 하고 있던 거리文化活動에 對해 弘報하려는 意圖도 깔렸었다. 2次 오디션은 버스커버스커 活動을 함께 해왔던 親舊 中 時間이 됐던 김형태와 車가 있는 브래드가 함께했다. 現在 3人組 體制의 始發點이다. 버스커버스커가 '슈퍼스타K 3'가 끝난 後 "그룹이 結成된 지 얼마 안 돼 앞으로의 正體性이나 向後 活動에 對해 苦悶하겠다"고 밝힌 理由도 여기에 있다.
以後 버스커버스커는 李承哲에게 "제가 본 아마추어 中에 가장 水準級의 밴드였던 것 같다"는 讚辭를 받으며 頭角을 나타냈지만 투個月과 함께한 콜라보레이션 미션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그래도 張凡俊은 활짝 웃으며 "滿足하고 있고, 여기까지 認定해 주셨다는 것에 感謝하다"는 말을 남겼다. 以後 버스커버스커는 다시 길거리의 音樂家로 돌아갔다.
하지만 本格的인 生放送 準備를 앞두고 예리밴드가 無斷으로 離脫하면서 追加合格이란 異變의 主人公이 됐다. 生放送 첫 舞臺에서 張凡俊의 기타 소리가 나오지 않는 放送事故가 났지만 버스커버스커는 無事히 合格했다. 審査委員들에게 酷毒한 評價도 많이 들었지만, 生放送 競演 다음날 음원 차트에선 恒常 先頭였고, 온라인 投票에서 絶對的인 支持를 받았다. 그리고 準優勝까지 차지했다.
以後로도 坦坦大路였다. 처음으로 낸 1輯 앨범 타이틀曲 '벚꽃 엔딩'과 '麗水 밤바다'는 신드롬的인 人氣를 일으켰다. 버스커버스커의 人氣를 分析하는 技士들도 쏟아져 나왔다. 앨범 發表 以後 한 달 만에 가진 單獨콘서트度 1分 만에 賣盡되는 氣焰을 吐했다. 以後 地方公演이 追加되면서 자연스럽게 全國투어 콘서트가 됐고, 6月 23日과 24日 兩日間 앙코르콘서트까지 했다.
그사이 發表한 마무리 앨범 亦是 收錄曲 다섯 曲 모두를 有名 音源 사이트 順位에 1位부터 5位까지 올렸다. 거리公演에 關心 있던 平凡한 大學生과 原語民 敎授의 生活은 2年 만에 그렇게 바뀌었다. 一部에서는 버스커버스커의 成功을 "運이 좋았다"고 多少 깍아내리는 視角도 있다. 하지만 버스커버스커는 '슈퍼스타K 3' 出演 當時부터 "練習量이 많은 팀인 게 느껴진다"는 稱讚을 받았다. 1輯 앨범 全體를 自作曲으로 채우는 內功 亦是 오디션 參與 前부터 만들어 놓은 100曲이 넘는 自作曲에서 비롯됐다. 結局 꿈을 위해 끊임없이 努力하며 달려온 세 젊은이가 2年만에 한篇의 感動的인 드라마를 만든 것이다.
金素延 s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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