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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떼루를 株얍니다”… 레슬링解說가 김영준氏 別世 :: 文化日報 munhwa

“빠떼루를 株얍니다”… 레슬링解說가 김영준氏 別世

  • 聯合뉴스
  • 入力 2024-05-16 06:23
  • 업데이트 2024-05-16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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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年 애틀랜타올림픽 때 PC通信에서 ‘빠떼루 아저씨’ 別名

‘빠떼루 아저씨’라는 別名의 TV 레슬링 競技解說家로 有名한 김영준(金寧俊) 前 京畿大 스포츠科學大學院 敎授가 15日 午前 3時45分께 水原 아주대病院에서 持病으로 世上을 떠났다고 遺族이 傳했다. 享年 76歲.

1948年 全北 扶安에서 태어난 故人은 全州 영생고, 漢陽大 經營學科를 卒業했다. “工夫 熱心히 해서 面書記가 돼라”는 父親의 뜻을 어기고 高校에서 레슬링을 始作했다. 160㎝ 單身에 68㎏로 손가락도, 다리도, 목도 짧은 典型的인 레슬링 選手의 體格이었다. 1970年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銅메달을 땄고, 1972年 뮌헨올림픽과 1974年 테헤란 아시안게임에도 國家代表로 出戰했다.

1976年 選手 隱退 後 大韓住宅公社에 들어가 1997年까지 湖南知事 誇張, 硏究管理部長, 弘報室長 等으로 일했다. 選手 生活 途中에 한양대 大學院에서 經營學을 專攻한 德에 住宅公社 레슬링팀이 아니라 一般 部署에서 活動했다.

1983年부터 2年間 레슬링 國家代表 自由型 監督을 맡았다. 1984年 LA올림픽 때 金메달을 確定한 유인탁을 목에 태우고 競技場을 돈 게 故人이었다.

레슬링 解說은 1984年부터 始作해 1986年 아시안게임, 1988年 서울올림픽, 1992年 바르셀로나 올림픽, 1994年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1996年 애틀랜타 올림픽으로 이어졌다. 빠르고 투박한 말套에 興奮하면 自己도 모르게 사투리가 튀어나오는 탓에 스스로는 放送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自責했다. 1988年 서울올림픽 解說 때는 愛國心이 넘친 탓에 相對方 選手가 攻擊하는 걸 보고 “마치 미친× 널뛰듯…”이라고 했다가 1990年 베이징 아시안게임 中繼를 맡지 못한 적도 있었다.

1996年 애틀랜타올림픽 레슬링 解說을 한 것을 契機로 人氣가 急上昇했다. “아, 이럴 땐 빠떼루를 株얍니다”, “머리끄댕이를 잡고…”, “배를 바닥에 붙이고”, “아, 머리를 들으야 함다”, “다리를 걸어야 함다” 같은 말들이 ‘빠떼루 아저씨의 語錄’이라는 題目으로 PC通信 使用者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올림픽 期間 동안 PC通信에 ‘빠떼루아저씨 專用揭示板’李 開設됐고, 講席-김혜영이 進行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엔 ‘빠떼루 아저씨 時事漫評’ 코너까지 생겼다. 1996年 8月23日子 조선일보에 따르면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빠떼루 줘야 함다” 같은 말까지 膾炙될 程度였다. 當時 한총련이 ‘연세대 事態’로 國民의 指彈을 받을 때였다.

故人은 이런 人氣를 부담스러워하면서도 ‘레슬링 大衆化’ 契機로 받아들였다. 1997年에 낸 ‘빠떼루 없는 世上 만들기’(퇴설당)라는 題目의 回顧錄에 “한番은 藝術의 殿堂에서 逍風 온 學生들이 사인을 해달라고 해서 ‘레슬링 解說家 김영준’이라고 써줬더니 한 學生이 ‘에이, 빠떼루 아저씨라고 써주세요’라고 하더라. 지나가면 ‘빠떼루 간다’고 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적었다. 같은 冊에서 “택시費도 안 받는다고 하고, 市場에 갔다가 平素 좋아하던 젓갈이 있길래 들여다보았더니 主人이 싸주면서 ‘빠떼루 아저씨한테는 돈 안 받는다’고 했다”고도 했다. 語塞해도 “빠떼루 아저씨 때문에 레슬링을 보게 됐다”는 말에 코미디나 게임 프로그램 出演도 拒絶하지 못했다.

1988∼1991年 大韓레슬링協會 理事, 1991年 아시아레슬링選手權大會 選手團長으로도 活躍했다. 1997年 한나라당 이회창 大統領 候補 特報를 맡아 暫時 政治權에 몸을 담은 적도 있다.

1998年부터 京畿大 體育學部에서 兼任敎授로 講壇에 서기 始作, 2001∼2013年 스포츠科學大學院 敎授로 學生들을 가르쳤다.

最近에는 2013年부터 韓民族共同體財團 副總裁, 尹奉吉記念事業會 移徙 等으로 活動했다. 1997年 回顧錄에서 김동규 當時 大韓住宅公社 社長은 “成功한 사람들에게 한가지 共通點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障礙를 機會로 알고 挑戰한다는 것”이라며 “(故人은) 壁도 聞으로 알고 밀어붙인 사람”이라고 했다. 故人 스스로는 “늘 마이크 앞에 앉으면 아버지가 듣고 계신다고 생각했다”며 “아부지(아버지) 所願대로 面書記 못 되고 運動해서 罪悚함다. 그렇지만 레슬링은 제 人生이었습니다.”라고 적었다.

遺族은 夫人 배숙희氏와 사이에 1男1女로 아들 김지훈(카카오엔터테인먼트事業本部長), 딸 김소원(事業)氏와 며느리 正눈실(韓華솔루션 戰略部門 常務)氏 等이 있다. 殯所는 삼성서울병원 葬禮式場 15號室, 發靷 18日 午前 7時, 葬地 盆唐 奉安堂 홈.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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