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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시각="">이미륵과 에르하르트, 그리고 곤노

  • 文化日報
  • 入力 2006-12-12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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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年 가을. 韓半島의 北쪽 鴨綠江 나루터에서 한 젊은이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人夫들이 수풍댐 建設에 動員돼 工事를 하다 隨時로 水沒되는 光景을 보면서… 當時 이 工事에 動員된 朝鮮人부는 3萬名. 이中 3000餘名이 工事中 水葬됐다.

그때 마침 西洋(獨逸)의 한 神父가 지나가다 이 젊은이에게 우는 理由와 어딜 가는지 물었다. 神父는 獨逸에 오면 連絡하라며 名銜을 주었다. 그後 그는 祖國의 아픔을 뒤로 한 채 때로는 汽車를 타고, 때로는 걸어서 상하이(上海)까지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獨逸 行 배에 乘船했다. 그는 서울을 떠난 지 席달스무날 만에 獨逸땅을 밟았다.

그러나 그는 住所가 바뀌어 그 新婦를 만나지 못했다. 代身 한 獨逸의 젊은 女人을 만나 사랑에 빠져 結婚을 한다. 그는 그女의 도움으로 뮌헨대에서 工夫, 動物學 博士가 된다. 故鄕에 對한 그리움을 그리다 作家로 變身한 그는 作家와 敎授로 活動하다 1950年 世上을 떠난다. 그가 바로 ‘鴨綠江은 흐른다’의 著者 이미륵이다. 이 小說은 獨逸 初等學校 敎科書에 실릴 程度로 有名하다.

1960年 여름. 韓國의 한 젊은이가 에르하르트 經濟長官과의 面談을 周旋해달라며 大學 때 恩師인 에를랑겐臺 프리츠 포크트 敎授를 찾아 1週日째 哀願하고 있었다. 德分에 長官 代身 次官과의 面談이 이뤄졌다. 그리고 3000萬달러 借款을 內諾 받는다. 그가 바로 朴正熙 大統領의 獨逸語 通譯官이자 1次 經濟發展 5個年計劃을 立案한 백영훈 敎授다.

그러나 支給保證 없이는 곤란하다는 소리에 또 한番 挫折을 맛본다. 代表團을 서울로 보내고 혼자 남은 그는 20餘日을 눈물로 보낸다. 그때 勞動部 公務員인 獨逸 親舊가 奇拔한 아이디어를 주었다. “너희 나라에는 失業者가 많지?” “그렇다.” 그는 다음날 勞動部 局長 한名을 데리고 와 書類를 내밀었다. 次官 擔保안인 鑛夫 5000名과 看護師 2000名 派遣書類였다.

1961年 末. 獨逸 言論에서는 韓國의 看護師와 鑛夫들을 ‘살아있는 天使’로 描寫한 記事가 자주 登場했다. 그리고 그해 12月 朴正熙 大統領은 獨逸 國賓訪問 招請을 받았다. 總理가 된 에르하르트는 朴 大統領의 손을 잡고 支援을 約束했다. 한발 더 나아가 ‘라인江의 奇跡’을 例로 들며 京釜高速道路와 製鐵産業, 自動車産業, 精油産業, 造船産業 等을 할 것을 注文했다. ‘韓·日協定’을 맺을 것도 注文했다. ‘漢江의 奇跡’의 아이디어가 나오는 瞬間이었다. 當時 獨逸 人士들은 너나할 것 없이 韓國人을 만나면 李彌勒을 얘기했다. 그들은 ‘韓國 = 이미륵’으로 알고 있었다.

1960年 가을. 백영훈 博士는 京釜高速道路 妥當性調査를 爲해 日本의 고이치 센터의 곤노 아키라 博士를 만난다. 곤노 博士는 半導體와 電子産業을 할 것을 注文했다.

“半導體 産業을 하려면 空氣가 맑아야 하고, 물이 깨끗해야 하며, 섬세한 손재주가 있어야 하는데 韓國은 이들 3拍子가 모두 갖춰져 있다. 日本은 不幸하게도 颱風이 隨時로 찾아오며, 해풍의 짠바람이 불고 있다.” ‘漢江의 奇跡’ 뒤에는 이미륵과 에르하르트總理, 그리고 곤노 博士 같은 助演도 있었던 것이다.

最近 ‘漢江의 奇跡’이 漸漸 옛날 얘기가 돼가고 있다. 數年 째 經濟成長率은 5%를 넘지 못하고 있다. 美國 MIT臺 레스터 서로 敎授는 얼마前 ‘世界 經濟戰爭’(Head to Head)이란 著書에서 100年 後에 20代 强大國 리스트에서 韓國을 除外시켰다. 長距離 選手가 못된다는 것이다.

토인비는 2002年 “歷史는 戰略的 失手를 하는 民族에게 두 番 다시 機會를 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리를 두고한 말이 아니길 빌어본다.

[[오창규 産業部長]] cha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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