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 안되는 곳에 길 있다"…순박·정직한 農夫의 마음 그대로
   
▲ 有創造 동국대 經營學科 敎授

哲學이 있는 企業家, 농심 신춘호 會長

1. 彷徨의 靑年 時節과 創業

彷徨의 時節


신춘호 會長은 1930年 農夫의 아들로 蔚山廣域市 蔚州郡 삼동면에서 10男妹 中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롯데그룹의 신격호 會長이 집안의 맏兄이다. 신춘호 會長이 12살 때(1941年) 맏兄인 신격호 會長이 日本으로 건너갔고, 둘째 兄마저 허약한 몸으로 敎職에 從事하고 있어, 父母님께서는 內心 신춘호 會長을 집안의 기둥으로 여기고 있었다. 韓國戰爭 混亂 속에서 義勇警察로 軍 服務를 마친 신춘호會長은 23살(1952年)에야 東亞高等學校를, 27살에 동아대학교에 進學했다. 신춘호 會長은 高等學校 進學하던 時節부터 學業과 함께 國際市場과 자갈치 市場에서 장사를 배우기 始作했다. 신춘호 會長은 쌀의 價格이 時期마다 다름을 發見하고 가을 秋收期에 쌀을 購入한 後 이듬해 봄에 파는 장사를 처음 試圖했으나 時間이 지나가면서 쌀의 品質이 變質되어 큰 損害를 보게 된다. 그러나 이를 契機로 品質管理의 重要性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安定的인 事業의 機會

신춘호 會長은 大學을 卒業하면서 本格的인 事業을 始作할 수 있는 機會를 갖게 된다. 맏兄 신격호 會長이 日本에서 市場基盤을 確保한 後 韓國에서의 事業機會를 摸索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當時 韓日 國交正常化가 이루어지기 前이라 日本會社가 公式으로 韓國에 投資할 수 있는 與件이 造成되지 않았다. 그래서 韓國에 있던 兄弟들이 參與하여 1959年 設立된 會社가 株式會社 롯데이다.

當時 신철호氏가 社長을 맡았고 신춘호 會長이 專務를 맡아 會社를 運營했는데 롯데가 生産한 껌은 꾸준히 賣出이 增加했고, 1961年 5.16 以後 政府에서 國産品 奬勵運動을 展開하면서 큰 幅의 成長을 이루게 된다. 이 時期 신철호 社長과 신춘호 專務는 經營戰略에 對한 意見이 갈리게 되는데, 신철호 社長은 需要가 늘어나고 있는 時期 生産 擴大에 力量을 集中해 賣出을 늘려야 한다고 判斷하고 있었던 反面, 신춘호 專務는 이런 狀況에서는 製品의 品質 水準을 높여 顧客의 信用을 쌓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 라면市場에서 농심이 構築한 No.1 리더십의 動機는 신라면의 登場, 브랜드管理시스템 構築과 新製品 開發過程의 體系化이다./사진=농심 홈페이지 ‘브랜드觀’ 페이지

“只今 우리가 好況을 누리는 것은 우리 製品이 最高여서가 아니라 需要가 供給보다 많기 때문에 얻어지는 프리미엄日 뿐이다. 앞으로 競爭社들을 이기고 確固한 基盤을 잡으려면 바로 只今 우리의 브랜드 이미지를 뚜렷하게 심어야 한다. 그 길은 品質向上을 통한 差別化밖에 없다.”

當時는 韓國戰爭의 傷痕이 남아있고, 5.16 事態 等 政治的인 激動의 時期였던 點, 나아가 企業 經營戰略이라는 槪念조차 生疏했던 時節임을 勘案하면 신춘호 會長의 靑年時節의 이러한 判斷은 企業家로서의 卓越한 眼目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不確實한 未知의 世界로

經營方針에 對한 신철호 社長과의 差異를 確認한 신춘호 會長은 結局 兄과의 經營을 抛棄하고 1963年 獨自的인 길을 가기로 決心하게 된다. 兄과의 事業關係를 整理한 신춘호 會長은 소공동 삼화빌딩에 事務室을 얻어 貿易業을 始作하는 한便, 분말주스 事業을 始作했다.

신춘호 會長은 競爭製品과의 差別化를 위해 製品의 包裝과 디자인은 勿論 代理店 配布用 廣告傳單紙에도 心血을 기울였다. 廣告카피에 對한 認識이 全無했고, 高尙함과 嚴肅한 表現을 選好했던 當時 “롯데주스가 키스보다 난 좋아”라는 破格的인 文句로 신춘호 會長의 주스 事業은 한동안 成功을 거두었다.

以後 申會長은 다양한 事業을 構想하던 中, 情報 蒐集次 日本을 오가면서 눈여겨 보았던 라면이라는 製品을 運命처럼 떠올리게 된다. 日本에서는 1958年 닛신食品이 라면을 開發해 普及하기 始作했고 뒤이어 여러 食品業體들이 이 市場에 參與하고 있는 狀況이었다. 當時 우리나라에서는 라면이라는 製品 自體가 매우 生疏하고 맛도 익숙하지 않았다. 그때 國內엔 뉴라면이라는 製品이 製造되었으나 失敗한 바 있고 삼양식품이 日本 苗條 製品과 合作으로 라면事業을 推進하고 있었다.

이런 狀況에서 신춘호 會長은 國內에서 經濟開發 5個年 計劃의 推進으로 農村 人口의 都市 流入 速度가 빨라지고 그에 따라 라면과 같은 簡便食의 需要가 擴大될 것으로 豫測하였다. 特히 農夫 出身인 신춘호 會長은 國民들에게 하루 세끼 食事를 解決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몸소 體驗해 왔고, 우리나라 쌀 生産量이 不足한 狀況에서 쌀을 代替할 수 있는 食品의 開發은 國民에게도 바람직한 일이라고 判斷하였다. 또한 當時 政府가 쌀 不足現象을 對處하기 위한 方案으로 混食을 奬勵하고 쌀밥 中心의 食習慣 變化를 誘導하고 있었으며 라면 生産의 主原料인 밀가루를 安定的으로 確保할 수 있음도 確認했다.

   
▲ 신춘호 會長은 社員들에게 “失敗의 責任을 묻지 않는다.”는 經營方針을 宣布해 왔다. 이러한 失敗의 經驗이 智慧가 되어 농심은 글로벌 企業으로 成長할 수 있었다./사진=농심 홈페이지 메인페이지

이러한 諸般 狀況을 考慮해 라면事業을 展開하기로 한 신춘호 會長은 當時 韓國에서 本格的인 事業을 始作한 신격호 會長에게 이러한 事業構想을 論議한 바 있는데, 當時 신격호 會長은 우리나라의 境遇 아직 簡便食이 收容될 수 있는 經濟的인 餘裕가 없다는 理由로 反對한 바 있다. 當時 신격호 會長은 韓日 國交正常化를 앞두고 期間産業 分野의 進出을 積極的으로 摸索하고 있었다. 그러나 韓國市場을 둘러싸고 있는 諸般 事情이 當場은 아니더라도 長期的으로 無限한 可能性을 갖고 있음을 確信한 신춘호 會長은 獨自的으로 라면事業을 決心하게 된다. 決心을 하고 난 後 홀가분한 마음으로 신춘호 會長은 時計工場 事業을 위해 마련해 둔 敷地에 라면工場을 세우고 本格的인 事業 準備에 着手했다. 그리고 1965年 只今 농심의 뿌리가 된 롯데工業(週)을 서울 대방동에 設立하게 된다.

敎訓: “남들이 안 된다는 곳에 길이 있다.”

2. 國內 後發企業에서 글로벌 企業으로 가는 길


농심이 國內市場의 後發走者에서 글로벌 企業으로 成長하는 過程은 크게 5가지 段階로 區分될 수 있고 各 時期別 主要 內容은 아래 <票 1>에 整理되어 있다.

   
▲ 表 1. 농심의 時期別 主要 經營戰略

1期: 創業과 試鍊의 時期

신춘호 會長이 롯데工業株式會社로 創業한 當時엔 三養食品이라는 强力한 리더가 存在하고 7-8個 라면會社의 競爭이 亂立하는 어려운 時期였다. 이러한 環境에서 농심은 流通網을 構築하고 經營上의 收益性을 確保하기 어려운 與件이었고 따라서 初期 戰略은 푸쉬戰略(流通上에게 製品을 밀어내기 위한 販促 中心의 經營)을 選擇하게 된다. 그러나 신춘호 會長은 後發走者의 이러한 戰略은 市場에서의 立地를 더욱 위축시키게 됨을 看破하고 經營戰略의 根本的인 方向轉換을 構想하게 된다. 卽, 品質向上을 통한 差別化를 試圖하기 始作했는데 이러한 戰略은 跳躍을 위한 礎石이 되었다.

2期: 跳躍을 위한 발板 構築期

롯데工業株式會社의 競爭戰略이 라면의 品質改善을 통한 消費者의 需要創出로 再設定되자 會社는 어려운 資金事情에서도 技術開發 및 設備擴充에 投資를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投資와 함께 顧客志向的인 新製品 開發에 拍車를 加하게 되고 그 結果 두 個의 히트商品이 登場하게 된다. 70年에 짜장면의 인스턴트化라는 劃期的인 發想으로 '짜장면'과, 소고기 국물 맛이 再現된 ’소고기라면'李 出市되었는데, 이 두 製品은 히트商品이 되면서 會社의 收益性을 改善해 주고 全國的인 流通網을 確保하게 해 주는 契機를 提供해 주었다. 그러나 같은 時期 롯데工業株式會社는 여러 가지 失敗事例를 記錄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事例들은 消費者의 嗜好에 맞는 新製品을 開發하는 智慧로 使用되었다. 會社 跳躍을 위한 발板 構築期의 重要한 競爭戰略은 다양한 新製品의 開發이었다.

한便, 롯데工業株式會社는 78年 社名을 농심(農心)으로 變更하고 淳朴하고 正直한 農夫의 마음을 製品開發에 反映하기 始作하였다.

   
▲ 신춘호 會長은 젊은 時節 “只今 우리가 好況을 누리는 것은 우리 製品이 最高여서가 아니라 需要가 供給보다 많기 때문에 얻어지는 프리미엄日 뿐이다. 앞으로 競爭社들을 이기고 確固한 基盤을 잡으려면 바로 只今 우리의 브랜드 이미지를 뚜렷하게 심어야 한다. 그 길은 品質向上을 통한 差別化밖에 없다.”고 言及했다. /寫眞=농심 홈페이지 메인페이지

3期: 市場占有率 1位 達成機

농심의 持續的인 品質改善(麵발과 스프 맛)과 新製品 開發을 통해 農心만의 固有한 노하우를 蓄積하면서 85年 라면市場에서 처음으로 市場占有率 1位를 차지하게 된다. 농심이 先頭자리를 차지하게 된 背景엔 두가지 重要한 要因이 있다. 첫째는 强力한 競爭會社의 登場이다. 初期 競爭會社 亂立으로 여러 企業들이 市場에서 사라졌지만 라면市場의 高成長은 强力한 企業이 라면市場에 進入하는 契機가 되었다. 이 때 登場한 企業으로 韓國야구르트, 청보食品 및 빙그레가 있는데 이들 企業들이 삼양라면의 占有率을 蠶食하면서 라면 市場은 다사 競爭體制로 轉換되게 된 것이다. 둘째는 농심의 히트商品 登場이다. 농심은 그間의 投資를 바탕으로 너구리·肉개醬사발면(82年), 안성탕면(83年), 짜파게티(84年) 等의 新製品을 내 놓았는데 이들의 成功으로 市場占有率이 急上昇하기 始作했고 그 結果 85年엔 드디어 농심이 三養食品을 앞지르고 市場占有率 1位를 차지하게 되었다.

4期: 確固한 리더십 構築期

농심은 市場占有率 1位를 차지한 것에 滿足하지 않고 다양한 新製品 開發(高級化 戰略을 追求하기 始作함)에 더욱 拍車를 加하면서 1990年代를 들어서면서 60%가 넘는 市場占有率을 차지하는 强力한 리더십을 確保하게 된다. 이러한 確固한 리더십 構築의 動機는 신라면의 登場, 브랜드管理시스템 構築과 新製品 開發過程의 體系化이다. 앞서 言及했듯이 농심은 적지 않은 失敗事例를 記錄해 왔지만 이 失敗의 經驗은 消費者의 嗜好를 더 잘 理解하는 契機가 되었고 이러한 消費者에 對한 깊은 理解는 신라면(86年)이라는 空前의 히트作을 내게 된다. 농심은 이미 이 時期 브랜드管理 시스템을 導入해 히트商品이 登場하면 이를 장수브랜드로 키워냈다. 신라면, 안성탕면, 짜파게티, 너구리는 現在까지도 消費者가 選好하는 브랜드들로 이들이 차지하는 市場占有率은 50%內外에 이른다. 또한, 농심은 이 時期 體系的인 新製品 開發過程을 정착시켰다. 會社의 모든 職員이 新製品 아이디어를 提案할 수 있고 提案된 아이디어는 體系的인 檢證過程을 거쳐 商品化를 위한 팀이 構成되게 된다. 新製品 開發過程에서 注目되는 點은 職員은 失敗의 責任에서 자유롭고 成功에 對한 補償은 保障된다는 것이다. 농심은 다양한 新製品을 끊임없이 開發하는 것을 核心的인 競爭優位要素로 認識하고 있기 때문에 設令 新製品이 失敗하더라도 擔當者에게 그 責任을 묻지 않는다. 다만, 失敗經驗은 다음 新製品 開發의 智慧로 活用된다. 失敗의 自由가 있는 企業文化는 只今 농심 競爭力의 核心이라고 볼 수 있다.

5期: 글로벌 市場 構築期

신춘호 會長은 市場은 存在하는 것이 아니라 創造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신춘호 會長은 이러한 哲學을 바탕으로 國內市場에서의 壓倒的인 1位에 滿足하지 않고 글로벌 食品會社가 되기 위한 經營시스템을 90年代 末부터 構築하기 始作했다.

농심은 1990年代 末부터 中國市場에 進出했고 2000年代 初엔 LA 工場을 建設하면서 全 世界市場에서 農心라면의 固有한 맛을 傳하고 있다. 신춘호 會長의 글로벌 經營의 核心은 “농심의 브랜드(맛)를 그대로 심는다“다. 例를 들어 신라면의 매운 맛이 다른 나라 消費者들에 依해 선호되지 않더라도 그 맛을 변화시키기 보다는 海外 消費者들에게 신라면의 固有한 맛이 訴求될 때까지 持續的으로 努力하고 기다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戰略은 飮食文化가 다른 中國 市場에서도 통하고 있는 것으로 確認되고 있다. 이러한 신춘호 會長의 글로벌 經營에 對한 確固한 意志는 “顧客과 함께 健康과 幸福을 追求하는 글로벌 食品企業”이라는 비전에 잘 表現되어 있다.

   
▲ 농심은 그間의 投資를 바탕으로 너구리·肉개醬사발면(82年), 안성탕면(83年), 짜파게티(84年) 等의 新製品을 내 놓았는데 이들의 成功으로 市場占有率이 急上昇하기 始作했다./사진=농심 홈페이지 ‘브랜드觀’ 페이지

3. 신춘호 會長의 企業家精神

농심의 寄與


신춘호 會長이 농심을 키우면서 會社만 成長한 것이 아니라 國民 生活의 質도 함께 높아졌다. 過去 戰後時節 먹을 것이 充分하지 않았던 狀況에서 라면의 登場은 國民들에게 簡便한 한 끼 食事를 提供했고 농심의 끊임없는 製品 開發은 消費者들에게 맛있는 記號食品 또는 便利한 簡便 食品이라는 價値를 提供해 주었다. 우리나라 國民 中 一週日에 한番 程度 라면을 먹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現在에도 市場에는 無數히 많은 食品들이 競爭하고 있지만 라면만큼 그리고 農心라면만큼 國民들 日常生活에 자리 잡고 있는 製品은 흔치 않다.

많은 專門家들이 未來의 經營패러다임으로 企業과 社會가 共有하는 價値를 革新的으로 開發하는 것을 提示하고 있고 企業은 革新的인 모델을 통해 顧客들에게 完成된 價値를 提供함으로써 利潤을 創出하고 그 結果로 持續可能한 經營을 實現할 수 있다고 말한다. 어쩌면 농심은 會社를 設立한 初期부터 顧客과의 價値共有라는 現代的 經營모델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經營모델은 아래와 같은 신춘호 會長의 經營哲學으로 具體的으로 具現되었다.

固有한 經營哲學

신춘호 會長은 會社가 成長을 거듭하는 동안 市場 環境에 맞는 經營方針을 세우면서 市場에 適應해 왔고 이것이 농심이 글로벌 企業으로 成長하게 된 주춧돌이다. 신춘호 會長이 提示한 經營哲學을 紹介하면 다음과 같다.

失敗할 수 있는 自由: 企業이 差別化된 製品을 市場에 선보이기 위해서는 다양한 新製品 아이디어를 確保해야 하고 擔當者는 이를 果敢하게 試圖할 수 있는 機會를 가져야 한다. 그래서 신춘호 會長은 社員들에게 “失敗의 責任을 묻지 않는다.”는 經營方針을 宣布해 왔다. 이러한 失敗의 經驗이 智慧가 되어 농심은 글로벌 企業으로 成長할 수 있었다.

“失敗는 損失만 안겨주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같은 失手를 反復하지 않게 하는 智慧와 또 다른 失敗에 對處할 수 있는 힘을 키워주고, 그래서 成功에 보다 가까운 지름길을 案內해 준다.”

日常에서 얻는 智慧: 신춘호 會長이 東海 近方에 休暇를 하던 中 膾집을 찾은 적이 있다. 이 때 여러 膾집 中에서 關心을 끈 看板이 '釜山處女膾집’이었다. 그래서 이 食堂을 들르게 되었고 食堂主人에게 食堂이름의 背景을 傳해 듣게 되었다. 當時 主人이 이 食堂을 처음으로 開場했을 때 處女였다는 것이다. 當時 故鄕이 釜山인 主人이 처음으로 떠오른 이름이 '釜山膾집’이었는데, 무언가 不足해 보여 그 사이에 處女를 넣는 것이 顧客들의 關心을 끌 수 있고 情感을 줄 수 있을 것으로 判斷했다는 것이다. 이때 신춘호 會長은 消費者들에게 製品 이름이 얼마나 重要하고, 그 이름에 두 글字가 더 들어감으로 인해 그 이름을 記憶하기 쉽고 이름에서 消費者들로부터 다양한 感情的 反應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休暇 中의 日常에서도 智慧를 얻는 신춘호 會長의 能力을 보여주는 逸話이다.

   
▲ 농심은 國內市場 後發走者에서 글로벌 企業으로 成長하는 成功의 歷史를 그려냈다. 농심의 3代 精神과 核心價値는 빛을 發했다./사진=농심 홈페이지 ‘農心紹介’ 페이지

이와 비슷한 脈絡의 농심 逸話도 있다. 롯데工業(週)는 짜장면의 인스턴트化에 成功한 後 소고기 國의 깊은 맛을 라면에 再現하는 製品을 開發하였다. 當時 소고기를 구경하기조차 어려웠던 1960年代 時節 이 製品은 會社의 새로운 跳躍을 가져다 줄 수 있는 力作이었다. 當時 이름 候補로 '소고기라면’과 '쇠고기라면’으로 壓縮되었는데, 大多數 職員들은 쇠고기가 標準말이어서 '쇠고기라면’으로 해야 된다고 主張했다. 그러나 신춘호 會長은 '소고기라면’으로 해야 한다고 判斷했다. 消費者들에게 친숙한 單語가 '소’이고 '쇠’라는 接頭語는 製品에 適切하지 않은 이미지를 연상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當時가 50餘年 前, 經營學이 未知의 學問이었던 이 時期에도 신춘호 會長은 製品이름을 開發하는데도 顧客志向的 思考를 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正直함이 競爭力(“正直이 第一 좋은 廣告이다”): 농심의 核心價値는 '淳朴하고 正直한 農夫의 마음’이다. 신춘호 會長은 製品에서 이러한 價値가 反映되어야 하고 그런 製品을 開發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런 製品을 開發하면 이를 正直하게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 된다(광고의 核心槪念을 찾아내는 方式 中 가장 效果的인 方式에 'inherent drama’ 또는 'common touch’價 있는데 신춘호 會長의 哲學은 이에 該當됨). 신춘호 會長은 製品 槪念과 表現 아이디어를 開發함에 있어 華麗한 美辭麗句나 誇張된 表現을 節制한다. 그러한 表現이 農夫의 마음을 毁損시킬 수 있고 窮極的으로 會社의 信賴度에 否定的으로 影響을 미치게 되기 때문이다. 신춘호 會長은 只今도 製品이름과 廣告컨셉 開發에 直接 參與하고 있는데, 代表的인 히트 商品은 '소고기라면’ '새우깡’ '너구리’ '신라면’ 等이 있다. 製品이름에서도 會長의 哲學을 엿볼 수 있다.

한 발 앞선 投資가 成長의 動力(“돈은 써야 벌린다”): 농심은 資金 事情이 여유롭지 않았던 會社設立時節부터 技術開發硏究所에 果敢하게 投資해 品質을 통한 差別化를 통해 先導 企業으로 跳躍할 수 있었다. 先導 企業으로 跳躍한 後에도 品質 水準 提高를 위해 事務自動化와 情報시스템 構築에 競爭社보다 앞서 投資해 왔고 未來 市場開拓을 위해 네크워크 시스템도 먼저 構築해 왔다. 이러한 競爭社보다 한 발 앞선 投資가 現在의 壓倒的인 市場先導者의 祕訣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글로벌 市場 開拓도 競爭社보다 앞서 왔고 그에 따른 失敗도 成功하는 길을 찾는 智慧로 발전시키고 있다.

長期的인 眼目의 投資를 아끼지 않는 재미있는 逸話가 있다. 1988年 서울 올림픽에 농심이 公式 라면供給業體로 選定되었고 이 行事를 위해 擔當部署가 準備하고 있었다. 이와 關聯된 報告書에 따르면 擔當 職員들은 上衣 티셔츠를 입고 行事를 치르기로 했는데 그 理由는 費用節減이었다고 한다. 이 報告書를 接하고 신춘호 會長은 擔當者에서 모든 行事 參與者들이 上下 한 벌을 맞추고 世界的인 行事에 어울리는 디자인과 옷감에도 神經을 쓰라고 指示했다. 온 世界의 스포츠인, 報道陣, 글로벌 會社 等이 參與하는 行事에서 會社의 이미지를 傳해 주고 國家의 品格을 높일 수 있는 機會를 본 것이다. 아마 신춘호 會長은 이 時期부터 농심의 글로벌 經營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擔當者가 責任지는 事業(“納得해야 實踐할 수 있다”): 농심을 새로운 事業을 展開할 때마다 擔當者에게 모든 權限을 준다. 그리고 失敗할 수 있는 自由도 준다. 그러나 擔當者에게는 “그 事業을 完璧하게 理解해야 한다”는 무거운 責任感도 준다. 왜냐하면 擔當者가 理解해야 實踐할 수 있고 그래야 그 事業에서 失敗하더라도 다음에 成功할 수 있는 智慧를 얻기 때문이다.

   
▲ 농심의 로고는, 한톨 씨앗에 담긴 生命을 精誠과 眞實로 가꾸어 알찬 열매를 맺는 것으로 농심의 意志와 信念을 象徵化 했다./사진=농심 홈페이지 ‘CI紹介’ 페이지

釜山의 허심청을 開發할 때 이와 關聯된 재미있는 逸話가 있다. 當時 이 事業은 開發 計劃을 日本 사람들에게 맡겨졌는데, 數次例 會議를 통해서도 滿足할 만한 안이 나오지 않았다. 그 原因은 농심의 擔當者가 直接 關與하지 않고 日本 專門家에게 일을 맡겼기 때문이었다. 그 結果 日本 擔當者가 計劃을 修正할 때마다 안이 더 複雜하게 얽혀져 어떤 事業을 하는지 理解하기 어려워졌다. 그래서 농심 任員들이 모여 마라톤 會議가 進行되었고, 任員들은 '이것저것 자질구레한 것들은 다 없애고 東洋 最大의 沐浴湯을 만들자’로 結論을 내렸다. 그래서 只今의 허심청이 誕生했다. 事業을 擔當할 責任者가 事業을 充分히 理解해야 實行에 옮길 수 있고 管理할 수 있게 됨을 보여주는 逸話이다.

농심에는 이 外에도 '哲學을 가진 쟁이는 幸福하다,’ '寺院을 보면 會社를 알 수 있다,’ '飮食은 生命이다’ 等과 같은 他社에서 보기 어려운 經營 哲學 또는 經營 方針이 있다. 그리고 重要한 點은 이러한 哲學이 從業員들의 몸에 배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哲學은 거의 모두 신춘호 會長이 會社의 成長과 時代的 狀況에 맞춰 從業員들에게 提示한 것들이다. 현대 經營學은 리더의 가장 重要한 役割로 會社의 經營 비전, 經營哲學을 提示하는 것이라고 强調한다. 신춘호 會長은 이미 過去 50餘年 間 이러한 리더십을 發揮해 왔던 것으로 評價될 수 있을 것이다. /有創造 동국대 經營學科 敎授

(이 글은 自由經濟院 '韓國醫企業家' 揭示板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