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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 : [아임 프롬 仁川·(26)] 開敎 70周年 仁荷大 ‘1回 卒業生’ 남종우 前 仁荷大 副總長

아임 프롬 仁川

[아임 프롬 仁川·(26)] 開敎 70周年 仁荷大 ‘1回 卒業生’ 남종우 前 仁荷大 副總長

1933年 옛 競技 金浦 검단면 土박이 집안 出生

1995年 故鄕 仁川 西區 編入, 黔丹新都市 造成

戰爭통 中學校 다녀…국민방위군 入隊하기도

 

李承晩 ‘仁荷大 設立’ 談話 傳해듣고 入學 決心

熾烈하게 工夫한 大學 生活 中 樂섬의 追憶도

母校 敎授 길 擇해 學生處長 等 主要 補職 맡아

조중훈 理事長 “醫大 設立하라” 副總長職 勸誘

남종우 전 인하대학교 부총장이 지난 2일 오후 인하대의 상징 비룡탑이 보이는 교정에서 1회 입학생 시절을 이야기하고 있다. 2024.5.2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남종우 前 인하大學校 副總長이 지난 2日 午後 인하대의 象徵 飛龍塔이 보이는 校庭에서 1回 入學生 時節을 이야기하고 있다. 2024.5.2 /金龍國記者 yong@kyeongin.com

올해로 開校 70周年을 맞은 인하대학교 이야기를 ‘아임 프롬 仁川’에서 지나칠 수 없다. 어떤 人物이 70年 인하대를 象徵할 수 있을지 苦悶하던 中 學校 側 人士가 “1回 卒業生이 있는데, 如前히 亭亭하시다”고 귀띔했다. 게다가 인하대 敎授로 在職하며 副總長까지 歷任하고 停年退職했다니, 인터뷰 相對로 더할 나위 없었다.

1933年生 남종우 前 仁荷大 副總長은 “人物보다 學校를 照明해 달라”는 條件으로 操心스럽게 인터뷰 要請을 받아들였다. 지난 2日 午後 仁荷大 校庭에서 만나 學校 이곳저곳을 說明한 남종우 前 副總長은 望百의 나이라곤 믿기 힘들 程度로 꼿꼿하고 또렸했다. 補聽器도 끼지 않는다고 했다. 서울 自宅에서 仁荷大까지 홀로 오는 게 힘들지 않느냐는 質問에 “두어 달에 한 番은 知人들을 만나러 仁川에 온다”고 했다.

南 前 副總長은 옛 京畿道 金浦郡 검단면 원당리 宜寧 南氏 集姓村에서 나고 자랐다. 그의 故鄕은 1995年 3月 仁川市 西歐로 編入됐다. 13代祖 할아버지부터 터전을 잡고 살았다고 하는데, 仁川 사람보단 黔丹 사람으로 불리는 게 더 익숙하다. 西區 元堂洞에 있는 宜寧 南氏 宗中 墓域은 仁川市 記念物로 指定된 文化財이기도 하다. 金浦平野가 드넓게 펼쳐진 農村이던 南 前 副總長의 故鄕 洞네는 宗中 墓域만 남고 全部 ‘黔丹新都市’가 造成됐다. 7男妹 中 다섯째로 태어난 南 前 副總長은 住民登錄上 1934年生이다. 當時엔 흔한 일이었다.

“먹고살기 힘든 시골에선 어린 아이가 마마(天然痘)나 紅疫 같은 疾病에 걸리면 일찍 죽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兄弟들 모두 1年씩 늦게 出生 申告를 했습니다. 멀리 있는 面所(面事務所)에 가서 出生 申告를 해놓고 1年도 안 돼 죽으면 또 가서 申告해야 해서 번거로우니까. 내 故鄕은 아주 시골이었는데, 只今은 仁川이 돼 버리고, 祖上님 酸素들만 남고 全部 아파트 團地가 돼 버려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겠네요.”

그는 日帝强占期 金浦初等學校에 入學해 解放 後 首席으로 卒業했다. 初等學校는 2個 班이었다. 南 前 副總長은 數學을 참 좋아했다고 한다. 解放 直後 6年制로 改編된 金浦農業中學校에 1947年 入學했으나, 한 달도 되지 않아 自退했다. 當時 農村에선 當然視한 農業中學校 進學을 抛棄한 건 學業에 對한 熱望이 컸기 때문이다. 實狀 집안 農事일을 거드느라 中學校 進學조차 抛棄한 學生이 많았다.

1950년대 옛 경기도 김포군 검단면의 한 마을과 학교 모습. /출처 : 서구사

1950年代 옛 京畿道 金浦郡 검단면의 한 마을과 學校 모습. /出處 : 西歐社

南 前 副總長은 이듬해 當時 名門이던 6年制 仁川中學校에 다시 入學試驗을 치러 合格했다. 金浦에선 그를 包含해 4名이 仁川中 試驗에 應試했는데, 혼자만 붙었다고 한다. 또다시 學制가 中學校 3年, 高等學校 3年으로 改編되면서 1951年 인천고등학교로 進學했다. 仁川中學校의 後身 제물포고등학교는 1954年에 開校했다.

“우리가 中學校에 들어갈 때는 日帝强占期 때와 똑같이 9月1日에 새 學年이 始作됐어요. (1950年) 6·25事變이 나서 授業이 中斷됐다가 仁川上陸作戰으로 國軍이 다시 서울을 收復해서 새 學年 秒를 다니다 1·4後退로 또 授業이 中斷됐습니다. 中學校 3年 가운데 授業을 들은 期間은 1年 6個月 程度밖에 안 됐어요. 中學校 3學年 때 全國的으로 學制가 바뀌어서 高等學校 3年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저는 人中·提高同門會와 인천고同門回 모두 會員으로 加入돼 있습니다.”

韓國戰爭 때 南 前 副總長의 나이는 滿 17歲로 徵集 對象이었으나, 住民登錄上 나이로는 한 살이 어려 徵集되지 않았다. 自身보다 한 살 많은 四寸 兄은 陸軍에 徵集된 지 한 달餘 만에 京畿道 加平 戰鬪에서 戰死했다고 한다. 南 前 副總長은 年齡 資格이 되지 않음에도 豫備軍 性格의 國民防衛軍에 自願入隊해 慶南 昌原에서 3個月 동안 防空壕 建設 等에 投入됐다. 國民防衛軍 活動 功績이 뒤늦게 認定돼 2013年에서야 國家有功者 敍勳을 받았다. 어린 學生에게도 戰爭이 삶의 全部일 수밖에 없는 時代였다.

現 인하대의 前身 引下工科大學은 1954年 4月24日 土曜日 開校했다. 이날은 仁荷大 化學工學科 54學番 南 前 副總長의 入學式이기도 했다.

1954년 개교 당시 인하공과대학 전경. /인하대 제공

1954年 開校 當時 引下工科大學 前景. /仁荷大 提供

引下工科大學 設立 計劃은 停戰協定 締結 直前인 1953年 6月4日 午前 9時 臨時首都 釜山에서 李承晩 大統領이 特別 談話文으로 라디오 放送을 통해 發表했다. 談話文은 當時 公報處 保管文書(第248號)로 남아있다. 李承晩 大統領 談話文에는 引下工科大學 設立 背景과 目的이 모두 담겼다. 그 內容 一部를 옮겨본다.

‘引下大學은 仁川과 하와이 사이에 韓國移民船이 처음으로 仁川에서 하와이에 간 50年 記念을 목적하고 大學을 仁川港口 內에 建設하기로 決定되여서 (中略) 工科大學을 만들어서 마치 美國의 MIT와 같은 美國에 第一 有名한 工科大學을 의미한 것이니 (中略) 이 物質時代에 機械學과 工業 發展에 다른 나라와 競爭하자는 目的을 가진 것이니….’

“저는 醫科大學을 가길 希望했는데, 우리 집이 豫科·本科 6年 동안 學費를 마련할 形便이 안 됐습니다. 인천고 허민 先生님이 李承晩 大統領 라디오 放送을 듣고 저에게 ‘引下工科大學이 곧 만들어지는데, 王立大學이니 學費가 싸다’며 進學을 勸誘했어요. 美國의 MIT 같은 大學을 만든다는 말에 솔깃했지요. 인천고 同氣들도 引下工科大學을 많이 志願했습니다. 開校 前이라 入學試驗은 서울 돈암동 경동高等學校에서 치렀죠.”

仁川과 하와이의 첫 글字를 따서 명명한 引下工科大學은 하와이 韓人 同胞들이 日帝强占期 民族 人材 養成을 위해 設立했던 韓人基督學院 敷地를 賣却해 마련한 寄附金 15萬 달러(900萬圜)를 基礎 財源으로 設立됐다. 1902年 12月22日 仁川에서 하와이로 떠난 우리나라 ‘1號 海外 移民者들’과 그 後孫들이 寄附金을 냈다. 여기에 政府 補助金과 國內 民間 寄附金, 유엔 等 海外 援助를 보탰다. 國內 民間 寄附金 大部分은 企業, 政府 傘下 經濟團體, 그리고 全國 公務員 俸給에서 5%씩 各出했다. 私立大學校 模樣새를 갖췄지만, 事實上 國家 主導로 設立한 大學이었다.

1954년 인하대 개교 당시 화공과 신입생 단체 사진. 남종우 전 부총장이 사진을 간직해 등장 인물들에게 일일이 번호를 매기고 이름을 적었다. /남종우 제공

1954年 인하대 開校 當時 化工科 新入生 團體 寫眞. 남종우 前 副總長이 寫眞을 간직해 登場 人物들에게 一一이 番號를 매기고 이름을 적었다. /남종우 提供

只今의 仁荷大 모습을 생각하면 想像하기 어렵지만, 開校 當時엔 허허벌판에 建物 3個 洞이 全部였다. 學科와 入學 定員은 機械工學科, 朝鮮工學科, 鑛山工學과, 金屬工學科, 化學工學科, 電氣工學科 等 6個 學科에 120名씩 總 720名이었다. 韓國 最初 理學博士이자 ‘원철스타’로 有名한 天文學者 이원철(1896∼1963)李 初代 學長을 맡았다.

學生들이 캠퍼스의 浪漫을 생각하기엔 工業立國(工業立國)이란 仁荷大 設立 目的은 너무나도 뚜렷했다. 無知莫知하게 工夫해야 했다.

“아이고, 1學年 때부터 40學點(當時 學則上 36學點)을 못 따거나 科目 平均 60點(100點 滿點)에 未達하면 無條件 退學 措置했어요. 그러니 工夫를 熱心히 하는 수밖에 方法이 없죠. 成績이 안 좋으면 放學 中에 나머지 工夫도 했습니다. 제 記憶엔 1回 入學生 中 15名이 除籍 處分됐고, 化工과도 2名 包含돼 있었습니다. 그래도 여름이면 化工科 同期들과 버스 타고 樂섬 海邊에 가서 水泳도 하고 즐거운 時間을 보냈습니다.”

仁川 彌鄒忽區 용현동 一帶는 1960·70年代 都市 開發 等으로 完全히 埋立되기 前까지 바닷가였고, 樂섬(原圖)이란 조그만 無人島도 있었다. 住民들이 海水浴과 낚시를 즐기던 樂섬에서 引下工科大學 學生들도 1學期 終講 後 團體로 野遊會를 했다. 學校에서 學生들에게 참외를 하나씩 나눠줬다고 한다. 南 前 副總長은 그때 寫眞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그 바닷가는 現在 ‘樂섬射距離’란 地名으로만 남아있는 道路의 어디쯤이었을 것 같다.

1954년 인하공과대학 1학년 1학기 종강 이후 전교생이 낙섬 해변에서 가진 야유회 모습. 당시 사진을 촬영한 장소는 매립돼 더는 해변이 아니다.  /남종우 제공

1954年 引下工科大學 1學年 1學期 終講 以後 全校生이 樂섬 海邊에서 가진 野遊會 모습. 當時 寫眞을 撮影한 場所는 埋立돼 더는 海邊이 아니다. /남종우 提供

南 前 副總長은 卒業 後에도 學校에 남았다. 李承晩 大統領은 그의 入學式과 卒業式에 모두 參席했다. 南 前 副總長은 李承晩 大統領이 1回 卒業式 祝辭에서 “거북船도 만들고 젯트飛行機도 만들며 남이 못하는 것을 만들겠다고 作定하고 나서야 된다”고 한 激勵를 깊이 새겼다고 한다. 그로부터 2年 後 李承晩은 3·15 不正選擧와 4·19革命으로 大統領職에서 물러났고, 하와이로 亡命해 그곳에서 生을 마감했다.

南 前 副總長은 引下工科大學 化工科 專任講師로 活動하다 1966年 日本 政府 招請으로 도쿄工業大學에서 留學 生活을 했고, 1970年 博士 學位를 取得해 다시 學校로 돌아왔다. 그 사이 引下工科大學은 韓進그룹 創立者 조중훈(1920~2002) 會長이 引受해 引下學院 理事長으로 就任했고, 1971年 綜合大學 ‘인하대학교’로 轉換했다.

“李承晩 博士가 下野하고, 1960年代 初부터 引下工科大學이 힘을 못 쓰기 始作하니까 많은 敎授가 한양대학교로 移職했습니다. 조중훈 理事長이 인하대를 引受하면서 位相을 다시 回復하기 始作했습니다. 1969年 現 仁荷大 本館 起工式을 하는 等 建物이 漸漸 늘어갔고, 敎授 處遇를 改善하니까 實力 있는 敎授들이 다시 왔습니다. 博士가 別로 없는 時節이라서 서울의 大學들이 저한테도 스카우트 提議를 많이 했는데, 仁荷大 俸給이 훨씬 높아서 갈 必要가 없었죠. 제가 1回 卒業生인데 어딜 가겠습니까. 아무튼 조중훈 理事長이 인하대를 引受하지 않았다면 只今 이 學校는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이 큽니다.”

南 前 副總長은 인하대에서 出版部長, 學生處長 等 補職도 두루 맡았다. 1983年 12月 初 조중훈 理事長이 南 前 副總長을 불렀다.

“그때 學生處長을 맡고 있었는데, 理事長 祕書室에서 金浦空港으로 가라고 갑자기 連絡이 왔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갔더니 조중훈 理事長이 거기 있었어요. 조 理事長과 祕書室長, 저 셋이서 헬리콥터를 타고 全羅道 光州로 내려갔단 말이죠. 朴正熙 大統領이 光州에서 꼭 들렀다던 韓定食집에서 함께 저녁을 먹는데 조 理事長이 저에게 ‘來年부터 副總長을 맡아달라’고 했습니다. 副總長을 맡아서 醫科大學을 新設하라고요. 食事를 마치고 조 理事長의 벤츠 600 車輛을 함께 타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南 前 副總長은 조금 難堪했다. 當時 副總長은 仁川中學校 恩師인 조병화(1921~2003) 敎授였기 때문이다. 弟子가 스승의 자리로 간다는 負擔이 컸다고 한다. 理事長 要請이니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1984年 1月1日子로 副總長으로 赴任하는 同時에 引下醫科大學設立推進委員會 委員長까지 맡았다. 그해 10月 仁荷大 醫科大學이 醫豫科 1個 學科로 出帆했고, 1986年 11月 醫學科가 設置됐다.

지난 2일 인하대학교에서 만난 남종우 전 인하대 부총장은 “한진그룹 조중훈 회장이 인하대를 인수한 이후부터 학교가 위상을 다시 회복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2024.5.2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지난 2日 인하대학교에서 만난 남종우 前 仁荷大 副總長은 “한진그룹 조중훈 會長이 인하대를 引受한 以後부터 學校가 位相을 다시 回復하기 始作했다”고 말했다. 2024.5.2 /金龍國記者 yong@kyeongin.com

南 前 副總長이 醫豫科를 新設할 때 運動選手를 스카우트하듯 全國에서 成績 優秀 學生을 直接 誘致했다는 대목이 흥미롭다.

“學生處長을 맡았을 때 가장 重要한 業務가 運動選手를 스카우트하는 것이었어요. 그때는 어느 大學이나 다 水準이 비슷했어요. 有名한 高校 選手를 學校로 데려오려면 그만한 인센티브가 있어야 했습니다. 한番은 제물포고에 좋은 投手가 있다고 해서 인하대 野球部로 進學하기로 當時 제물포고 校長과 얘기를 다 끝냈는데, 글쎄 그 選手가 갑자기 고려대로 간다고 하더라고요. 그 校長과 電話로 宏壯히 싸웠어요. 醫科大學度 ‘工夫 選手’를 스카우트하자는 아이디어를 제가 냈습니다. 全國에서 1等을 하는 學生을 찾아다닌 끝에 첫해에 5名을 뽑았어요. 제가 副總長 任期를 마친 뒤 더는 ‘工夫 選手’를 스카우트하진 않은 걸로 압니다.”

南 前 副總長은 1999年 정년퇴직할 때까지 學校를 지켰다. 南 前 副總長은 現在도 인하대 名譽敎授이므로 學校 歷史 70年을 함께하고 있는 산證人이라 할 수 있다. 學者로서 成果에 對해 質問했을 땐 謙遜하게 答辯했으나, 南 前 副總長은 韓國 化學工學 分野 學問 基礎를 다지고 關聯 學會 活動을 强化한 張本人으로 評價받는다.

“韓國工業化學會라는 學會가 只今 會員이 5千600名 程度입니다. 예전엔 몇몇 敎授가 돌아가면서 會長을 맡는 바람에 會員도 적고 世가 弱했어요. 제가 1998年 學會長을 맡으면서 企業 硏究所 等에서도 會長을 할 수 있게끔 定款을 바꿨어요. 會員이 늘고 財政도 튼튼해지고 學會 活動도 活潑해졌습니다. 行政이 서툰 學界에선 이런 일도 큰 業績입니다. (웃음) 인하대에 關해선 앞으로도 1回 卒業生으로서만 할 수 있는 얘기, 多少 쓴소리도 많이 할 겁니다.”

健康을 維持하는 祕訣이 무엇이냐는 質問에 그는 當然한 걸 묻는다는 듯 答했다. “잠을 푹 자야 합니다. 그리고 뼈가 튼튼해야 하는데, 自己 前에 牛乳 한 컵을 꼭 마십니다. 化學者가 하는 말이니 믿어보세요.”

■略歷
1933年 京畿 金浦郡 원당리(現 仁川 西區 元堂洞) 出生
1947年 金浦初等學校 卒業
1947年 金浦農業中學校 入學·自退
1951年 仁川中學校 卒業
1954年 인천고등학교 卒業
1958年 引下工科大學(現 仁荷大) 1回 化工科 卒業
1962年 引下工科大學 化工科 專任講師
1966年 日本 문무성 招請 遊學
1970年 도쿄工業大學 工學博士 卒業
1972年 인하대학교 化工科 敎授
1978年 인하大學校 出版部長
1980年 도쿄工業大學 電子化學工學科 客員敎授
1982年 인하대학교 學生處長
1984年 인하大學校 副總長(3回 連任)
1984年 인하대학교 引下醫科大學設立推進委員長
1984年 인하대학교 電算化推進委員長
1999年 인하대학교 名譽敎授
■學會 經歷
1988年 韓國腐蝕學會 創立委員·第2代 會長
1998年 韓國工業化學會 第5代 會長
1999年 韓國化學關聯學會聯合 創立準備委員長·初代 副會長
2024年 韓國工業化學會 第4代 名譽會長
■其他
1989年 韓國奬學會 奬學委員
1994年 한국과학기술한림원 創立會員
1999年 國民勳章 모란장 受賞
2001年 人中·提高 길영희 校長記念事業會 第4代 會長
2013年 國家有功者 追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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