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티드 도넛. [롯데백화점 提供]
1983年 8月 7日, 평화로운 日曜日 午後였다. 家族은 오랜만에 도넛을 튀겼다. 어머니가 믹스로 반죽을 만들어 얇고 넓게 펴면 初等學生 아들들이 컵과 麥酒甁으로 동그랗게 떠내는 나름의 協業이었다. 이윽고 다 튀겨 雪糖까지 솔솔 뿌린 도넛을 먹으려는데 갑자기 警戒警報가 울렸고, 곧 空襲警報로 轉換됐다.
"이것은 實際 狀況입니다." 텔레비전에서 노래를 부르던 歌手 이은하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字幕이 흘러나왔다. 아파트에서는 地下室로 待避하라고 放送했다. 或是 모르니 도넛이라도 가지고 내려가자고 주섬주섬 챙기는데 狀況이 곧 解除됐다. 中國 操縱士 손천근이 미그21 戰鬪機를 몰고 韓國 領空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韓國戰爭 以後 最初로 發令된 空襲警報였다. 같은 해 2月 北韓軍의 이웅평 上位가 미그19 戰鬪機를 몰고 歸順했던지라 한層 더 무섭게 다가온 事件이었다. 何必 그때 도넛를 튀겨 먹고 있었던 德分에 아직도 또렷하게 記憶하고 있다. 뒤집어 보면 도넛이 그만큼 우리의 食卓에 자리를 잡은 지 오래됐다는 傍證이다.
40餘 年 前에도 믹스로 집에서 만들어 먹었을 程度로 도넛의 歷史는 깊다. 밀가루 반죽을 튀긴 飮食 自體의 歷史가 워낙 깊기도 하지만 모두에게 잘 알려진 도넛의 歷史는 17~18世紀로 거슬러 올라간다. 美國으로 移民을 간 네덜란드人들이 뉴욕(當時 뉴네덜란드)에서 동그랗게 빚은 밀가루 반죽을 튀겨 팔았다.
最初의 도넛은 우리가 아는 고리 模樣이 아니었다. 네덜란드語로 '올리코엑(olykoek·기름 케이크)'이라 불렸던 이 飮食의 中心部에는 과일이나 堅果類가 들어 있었다. 中心部가 가장자리보다 천천히 익는 現象에 對備한 나름의 對策이었으니, 德分에 이 飮食은 19世紀 初盤부터 英語로 반죽(dough)과 堅果類(nut)의 合成語인 ‘도넛(doughnut)'이라 불리기 始作했다.
도넛이 只今의 고리 模樣을 갖춘 건 大略 1850年頃이다. 一說에 依하면 美國의 船員인 핸슨 그레고리가 반죽을 둥글게 빚은 뒤 가운데에 구멍을 뚫었다고 한다. 暴風 等 온갖 劇的인 要素가 登場하나 아주 正確한 根據는 없어 설에 不過한 이야기이지만 한 가지만은 確實하다. 바뀐 模樣 德分에 도넛은 더 커지면서도 고루 잘 익는 卽席빵이 될 수 있었다.
디자인 업그레이드를 겪은 도넛은 戰場에서 猛活躍하게 된다. 1·2次 世界大戰에서 軍人들에게 特食으로 供給돼 士氣를 북돋우는 役割을 톡톡히 한 것이다. ‘도넛 아가씨들(Doughnut Lassies)'이라 불린 女性 自願奉仕者들의 목숨을 건 猛活躍 德分이었는데, 元來 이들이 처음부터 도넛을 튀길 計劃은 아니었다.
■戰爭터 누빈 ‘도넛 아가씨들'
美國은 元來 파이와 케이크의 나라였지만 그 둘은 만드는 데 품이 많이 들뿐더러 裝備 또한 적지 않게 必要했다. 따라서 最前線 바로 뒤에서 軍을 도와야 했던 女性들에게 적합한 飮食이 아니었으니, 그들은 結局 도넛을 代案으로 採擇했다. 아주 많은 기름이 必要하지 않고 훨씬 더 쉽게 만들 수 있어 戰場의 慰問品으로 괜찮았다.
비록 代案으로 採擇돼 支給됐으나 軍人들은 도넛을 좋아했고 任務를 마치고 本國으로 돌아온 뒤에도 찾기 始作했다. 그 틈을 타고 러시아 避難民 出身인 아돌프 레빗(1883~1953)李 自動 도넛 製造機의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이미 비슷한 機械가 登場한 뒤였지만 레빗의 機械는 그것들보다 더 나은 性能으로 人氣를 끌기 始作했다.
그런 가운데 只今까지 猛活躍하는 도넛 브랜드가 登場했으니 바로 크리스피크림(Krispy Kreme)이었다. 美國 켄터키州 出身의 버논 루돌프(1915~1973)는 高等學校 卒業 後 어떻게든 도넛으로 자리를 잡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래서 故鄕인 켄터키와 테네시, 웨스트버지니아주 等 南部를 돌며 아버지와 三寸을 도와 도넛을 만들었다. 그리고 1937年, 드디어 노스캐롤라이나州의 윈스턴세일럼에 自身의 도넛 가게를 연다.
元來 루돌프는 소매를 할 心算으로 도넛 工場을 열었다. 그런데 도넛을 튀겨 글레이즈(끈끈한 雪糖물)를 끼얹어 完成할 때의 다디단 냄새가 行人들을 刺戟했다. 行人들은 레빗에게 도넛을 팔라고 要請했고, 루돌프는 結局 길 쪽으로 난 工場의 壁에 작은 구멍을 뚫어 소매도 始作했다.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크리스피크림 도넛의 始初였다.
1950年에는 도넛 帝國 던킨(Dunkin’)이 世界에 첫발을 내디뎠다.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出身인 빌 로젠버그(1916~2002)는 14歲부터 電報를 配達해 돈을 벌기 始作해 2次 世界大戰이 勃發하자 勞動者들에게 間食거리와 飮料를 販賣하는 一種의 푸드트럭 事業을 始作한다. 事業이 成長하면서 販賣額의 40%가 도넛과 커피에서 나온다는 것을 깨닫고는 1948年 ‘오픈 케틀'이라는 專門店을 연다.
勝負手는 多樣性이었다. 다른 가게들이 고작 다섯 가지의 도넛을 팔 때 로젠버그는 52가지를 내놓았다. 德分에 장사가 잘되면서 그는 相互를 ‘커피에 도넛을 담가 먹는다(Dunk In)'는 造語인 던킨으로 바꾸고 1955年, 여섯 番째 直營店을 연 뒤 프랜차이즈로 轉換한다.
■韓國은 도넛 春秋戰國時代
韓國 도넛의 歷史도 만만치 않다. 오뚜기에 따르면 이미 1970年에 핫케이크 가루와 더불어 ‘도나스' 가루를 出市했다고 한다. 美國式으로 보이지 않는, 튀겨 雪糖을 입힌 프리터(fritter)留都 製菓店이나 市場의 가게 等을 통해 널리 팔리곤 했다. 꽈배기 等으로 命脈을 維持하는 韓國式 도넛의 歷史는 資料가 거의 없다. 꽈배기는 中國의 유타誤(油條)와 비슷하지만 유타오는 雪糖도 묻히지 않고 짠맛 爲主의 아침 食事用이라는 點에서 사뭇 다르다.
只今껏 살펴본 兩大 美國 프랜차이즈의 國內 歷史는 1980年代로 거슬러 올라간다. 當時 제일제당이 던킨을 들여오려고 했다가 霧散됐고, 1983年에 1號店을 열기는 했으나 1年 뒤 不渡를 내고 한동안 國內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10年이나 더 지난 1994年, 배스킨라빈스의 비알코리아와 提携해 梨泰院에 다시 賣場을 내 오늘날까지 왔다.
以後 던킨은 10年假量 獨走하다가 本土의 宿敵인 크리스피크림이 2004年에 進出하면서 國內에서도 競爭하게 됐다. 一說에 依하면 신동빈 롯데그룹 會長이 外國에서 맛있게 먹었다며 積極 推進해 크리스피크림이 들어오게 됐다.
요즘 韓國은 도넛의 春秋戰國時代다. 던킨과 크리스피크림의 兩大 프랜차이즈 外에도 2017年 노티드를 筆頭로 올드페리도넛 等의 國産 個人 賣場이 出帆해 나름의 자리를 잡았다. 이런 市場의 움직임에 캘리포니아州의 프랜차이즈인 랜디스까지 進出해 角逐戰을 벌이고 있다. 基本 條理가 比較的 簡便하고 빠른 데 비해 맛이 좋은 게 人氣와 擴張의 祕訣이다.
이용재 飮食 評論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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