冷戰이 終熄되고 共産圈이 沒落하면서 이데올로기의 時代는 끝났다는 얘기가 떠돌기도 했지만, 요즘 우리社會를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地域, 性別, 階級, 政治的 立場 等에 따라 이념적 葛藤의 골은 漸漸 더 깊어가는 것 같기 때문이다. 勿論 複雜한 現代社會에서 다양한 理念의 衝突은 不可避하기도 하고, 때론 社會의 健康함을 보여주는 肯定的 指標이기도 하다. 하지만 表面的으로는 수많은 理念들이 목청껏 自己主張을 펴며 다투는 것 같아도, 事實 오늘날 우리社會의 底邊을 흐르고 있는 가장 强力한 意識의 흐름은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든다. 嶺湖南, 男女, 貧富, 與野, 左右에 關係없이 모두가 同意하고 實踐하는 이데올로기, 그건 바로 먹告詞니즘과 귀차니즘이라는 이데올로기다.
專門 學術用語度 아니고 너무나 日常的인 삶의 態度일 뿐이므로 巨創하게 理念이라고 말하기도 쑥스럽지만, 이데올로기라는 게 元來 우리 삶 속에 파고들어 와 無意識的으로 우리를 支配하는 힘이라는 걸 생각하면 이런 내 생각이 그리 억지스럽지는 않다고 믿는다.
언제부턴가 "먹고사는 게 가장 重要하며, 그 外의 모든 것은 無意味하고 無價値하다"는 風潮가 우리社會를 휩쓸고 있다. 眞짜 먹고살기 힘든 庶民에서부터 내로라하는 富者에 이르기까지, 또 公共業務부터 個人의 內密한 私生活에 이르기까지 먹고사는 問題가 가장 큰 關心事요, 目的이 되어버린 것이다. 오래前 먹고사는 것 自體가 正말 힘들었을 때보다 웬만큼 '먹고살만해진' 요즘 먹告詞니즘이 더 威力을 떨친다는 게 좀 疑訝하기는 하지만, 事實 이 主張 自體는 크게 是非거리가 못 된다. 돈이 最高라는 式의 俗物的 拜金主義에 기대거나 物質的 生産이 精神的 삶도 決定한다는 理論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나날의 經驗을 통해 먹고사는 게 얼마나 힘들고도 重要한 일인가를 뼈저리게 느끼기 때문이다. 하긴 옛 聖賢인 孟子께서도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항산(恒産: 物質的 삶의 安定)'이 있어야 비로소 '恒心(恒心: 變치 않는 떳떳한 마음)'도 可能하다고!
따라서 먹고사는 게 重要하다는 말 自體는 아무 問題 될 게 없다. 甚至於 第一 重要하다고 强調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므로 그 以外의 모든 것은 考慮할 必要가 없다는 態度, 먹고사는 게 삶의 窮極目的이므로 다른 모든 건 한낱 手段에 不過하다는 態度가 政黨할까?
一般人들은 不法行爲를 해놓고도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辨明하고, 政府 또한 不正依하고 非民主的인 過誤를 저지를 때마다 "이게 다 國民을 먹여 살리기 위한 措處"라고 强辯하는 모습이 果然 正常일까? 게다가 더 큰 問題는 이런 辨明과 우격다짐 앞에서 大部分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共感을 표하거나 쉽게 容恕한다는 點이다. 또 窮極目的에 依해 잘못 正當化된 갖가지 手段들은 다시 또 다른 下位手段들을 正當化하면서, 結局 不正과 不義의 連鎖고리와 그물網이 생겨난다. 예컨대 먹고살기 위해 좋은 일자리를 얻어야 하고, 좋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 좋은 學閥을 가져야 하며, 좋은 學閥을 위해서는 入試地獄이든, 過熱競爭이든, 私敎育의 畸形的 膨脹이든, 人間敎育의 崩壞든 다 어쩔 수 없다는 式의 論理가 橫行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社會의 核心問題들이 뭔지 물어보면, 大部分의 사람들은 놀랍게도 그 答을 正確하게 알고 있는 境遇가 많다. 그렇게 모두가 빤히 아는데도 社會的 合意를 끌어내서 고치지 못하는 까닭이 뭘까? 슬픈 일이지만 그 또한 먹고살기 위해서다. 모두가 먹고살기 위한 無限競爭에 올인하고 있는 世上에서 한가롭게 定義 타령이나 하고 있다가는 自身의 밥줄이 위태로워질지도 모른다는 强迫觀念이 모든 사람을 惡과 不義의 共犯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地點에서 먹告詞니즘과 銅錢의 앞뒷面 關係에 있는 두 番째 强力한 이데올로기가 登場하는데 그건 바로 귀차니즘이다. 나 먹고사는 問題와 無關한 모든 일은 다 귀찮다는 論理, 먹고사는 데 도움이 안 된다면 그 어떤 것에도 神經 쓰지 않겠다는 論理! 바로 이 論理가 우리 社會를 좀먹고 병들게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제 各自 스스로에게 물어볼 時間이다. 우린 都大體 왜 이렇게 악다구니를 쓰면서 먹고살려고 하는 것일까?
경성대 敎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