最近 連日 肺腑를 찌르는 事件들이 新聞 社會面을 裝飾하고 있다. 이 中 特히 서울 신정동 屋塔房 夫婦 被殺事件의 戰慄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이 事件은 지난달 初 서울 양천구 신정동의 住宅街의 한 屋塔房에서 團欒한 저녁時間을 보내고 있던 40代 初盤의 夫婦가 느닷없이 侵入한 怪漢에게 次例로 被殺된 事件이다. 事件 한 달 만인 이달 初 被疑者가 붙잡혔다. 被疑者는 强盜强姦犯罪를 저질러 14年6個月의 刑을 살고 3個月 前에 出所한 33歲의 男子였다. 그는 警察에서 "屋塔房에서 흘러나오는 幸福한 웃음소리에 瞬間的으로 憤怒가 치밀어 올라 犯行을 저질렀다"고 밝혔다고 한다.
이 事件을 特히 注目하는 것은 '幸福한 家庭 憎惡'라는 새로운 類型의 犯罪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1990年代 中盤 世上을 놀라게 했던 至尊派·막가파 事件 못지않은 섬뜩한 衝擊을 준다. 이들 犯罪團은 社會에 對한 비뚤어진 憎惡를 富裕層을 對象으로 組織的·計劃的으로 저지른 데 비해 이番 事件은 不特定 對象에게 但只 '내 處地에 비해 幸福해 보인다'는 理由로 '묻지마'식 殺人을 저지른 것이다.
犯罪 現場이 '屋塔房'이었다는 데서 被害者에 對한 憐憫이 더욱 깊어진다. 屋塔房에서 사는 것으로 보아 被害者들은 아파트나 單獨住宅을 購入할 形便이 못 되는 庶民層이다. 그러나 幸福한 웃음소리를 낼 수 있을 만큼 健康하고 團欒한 家族이었음에 分明하다. 40代 初盤의 夫婦는 비록 屋塔房에서 살 망정 子女와 함께 幸福한 저녁을 보내며 來日의 希望을 꿈꾸었던 것 같다. 느닷없는 殺人魔의 侵入에 이처럼 幸福했던 家庭은 散散조각 나 버렸다. 父母가 살해당하는 場面을 目睹하면서 恐怖에 질렸을 어린 子女의 눈망울을 敢히 想像하기조차 무섭다.
屋塔房은 이 家庭의 幸福과 꿈을 지켜주지 못했다. 萬若 이들이 번듯한 아파트나 담이 높게 쳐진 大邸宅에 살았더라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被害를 보지 않았을 것이다.
이番 事件을 '犯罪 遺傳子'를 가진 特定 前科者에 依한 偶發的인 殺人事件만으로 置簿할 수 없다. 정글의 法則이 支配하는 우리 社會에도 큰 責任이 있다고 主張한다고 해도 殺人者의 天人共怒할 行爲를 外面한 發想이라고 誤解하지는 않으리라고 본다. 정글社會는 必然的으로 失敗者를 量産하고 兩極化를 부추긴다. 잘 適應하지 못해 精神分裂的 症勢를 보이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現代社會의 特徵이다. 對象을 가리지 않는 묻지마식 犯罪는 이 같은 우리 社會가 孕胎한 病理現象이다. 이를테면 예전엔 '天生 犯罪者'가 犯罪를 저질렀지만 現代社會에서는 平凡해 보이는 사람들이 瞬間的으로 犯罪를 저지르는 境遇가 잦다는 것이다.
묻지마식 犯罪의 犧牲者는 '屋塔房'으로 代辯되는 庶民層이 많다. 露出 頻度가 높기 때문이다. 最近 한 調査에 따르면 貧困層들은 社會와 널리 同化하지 못하고 幽閉되듯 '貧困의 섬'에 갇혀 사는 傾向이 높다. 또 이 같은 貧困의 섬에는 犯罪 發生率도 높은 것으로 調査됐다. 釜山 사상구 덕포동에서 發生한 '김길태 事件'도 肺·公哥가 많은 슬럼街에서 發生했다. 이런 犯罪의 責任이 貧困의 섬에 갇혀 사는 犧牲者들만의 것인가, 傳貰도 얻기 힘든 補償金을 쥐어주며 原住民들을 보금자리에서 내쫓고 開發差益을 얻는 業者들, 정글社會의 勝者들에겐 責任이 全혀 없는 것인가 하고 묻지 않을 수 없다.
屋塔房 夫婦 被殺事件은 MB가 話頭로 들고 나온 '公正社會'와 對照를 이룬다. MB는 公正社會를 機會가 均等하게 保障되는 社會로 定義했다. 機會 均等이 公正社會의 必要條件인 것은 分明하다. 그러나 充分條件은 되지 못한다. 이미 機會를 갖지 못한, 이미 박탈당한 사람도 우리 社會에 많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均等한 機會란 아무 소용없는 搜査에 不過하다. 힘없는 庶民들이 묻지마식 犯罪에 露出되도록 放置하는 社會는 公正한 社會가 아니다. 屋塔房에서도 家族끼리 맘껏 幸福한 웃음을 터뜨리며 未來를 꿈꿀 수 있어야 公正社會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