映畫는 文學, 演劇, 音樂, 美術, 舞踊, 建築에 이어 7番째로 태어난 新生 藝術이자 19世紀 末 모더니티의 代表的 産物 中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映畫의 運命을 결정짓는 要因은 바로 映畫와 테크놀로지 間의 뗄 수 없는 親緣性日 것이다. 映畫의 誕生 自體가 光學的 原理를 基盤으로 한 寫眞술과 幻燈 原理에 基盤한 領事술로 인해 可能했을 뿐만 아니라 映畫만큼 테크노的 想像力을 앞서서 그리고 華麗하게 具現하는 藝術은 드물기 때문이다.
그리고 當然히 映畫의 여러 장르들 中에서도 科學的 可能性에서 出發하여 未來 世界에 對한 空想을 다루는 空想科學映畫야말로 그러한 테크노的 想像力의 極致를 보여주게 된다. 이미 1902年에 조르쥬 멜리에스는 '달世界 旅行'에서 半世紀 以後에나 現實化한 로켓의 原理를 보여주고 있다면 '아바타'로 有名한 제임스 카메론은 '터미네이터 2'에서 아직까지도 可能하지 않은 液體 金屬을 視覺的으로 具現한 바 있다.
더구나 最近 들어 空想科學映畫는 大規模 資本과 하이 테크놀로지의 結合을 통해 漸漸 더 블록버스터化함으로써 가장 大衆的이면서도 影響力 있는 장르가 되어가고 있다. 近代를 이끌어온 機械産業과는 달리 現在의 컴퓨터 技術과 情報通信 技術을 中心으로 한 하이테크놀로지들은 現實에 對한 다른 次元의 再現을 이루어냄으로써 空想科學 映畫 속에서 全혀 새로운 想像力의 地平을 열어 보이고 있다. 特히 사이버 世界와 現實 世界의 相互作用을 素材로 하는 사이버 映畫의 境遇에 物理的 肉體의 지워짐 그리고 經驗, 記憶, 空間 等에 對한 再定義를 通해서 포스트모던한 思惟의 尖端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尖端 中의 尖端에 바로 映畫 '인셉션'이 存在한다.
크리스토퍼 놀란 監督이 無慮 25年을 매달린 프로젝트인 '인셉션'에서 사이버 世界는 꿈의 世界로 바뀐다. 機械의 힘을 빌려 他人의 꿈속에 浸透한 後 특정한 생각이나 記憶을 抽出해내거나 反對로 심는 일이 映畫의 素材이기 때문이다.
이미 오래前에 中國의 道家 思想家 莊子는 '胡蝶之夢(胡蝶之夢)'을 통해서 나와 나비 間의, 꿈과 現實 間의 區別이 없는 萬物一切의 絶對 境地를 말한 바 있다. 또 人間의 無意識에 穿鑿했던 프로이트는 決코 言語化할 수 없는 無意識에 이르는 王道를 꿈이라고 보았고, '꿈의 解釋'을 통해 꿈에 存在하는 文法을 밝혀냄으로써 人類에게 있어서 未知의 領域 中의 하나를 열어젖혔다. 그렇다면 '인셉션'은 바로 이러한 莊子의 哲學과 프로이트의 精神分析學을 實驗的인 내러티브와 獨創的인 스펙터클을 통해서 映畫化한 産物이다.
于先 이 映畫는 몇 겹으로 이루어진 '꿈속의 꿈'이라는 重層的 構造와 時間을 거슬러 올라가는 逆行的 構造를 통해서 마치 퍼즐과 같은 내러티브를 構成한다. 그 結果 觀客은 이미 提示된 結果의 原因을 찾아 漸漸 더 映畫의 深層과 캐릭터의 無意識 속으로 빠져들게 됨으로써 旣存의 慣習的인 觀覽 樣式과는 全혀 다른 經驗을 얻게 된다. 또한 喪失感과 罪責感을 中心으로 한 主人公의 無意識을 메두사와 같은 攻擊性과 決코 哀悼할 수 없는 멜랑콜리兒를 同時에 지닌 팜므 擺脫의 魅惑的인 이미지와 連結시키는 支店들은 하나의 精神分析으로서의 映畫를 具現한다.
勿論 여기에다가 도쿄, 캘거리, 탕헤르, 파리, 런던, LA에 이르는 廣大한 로케이션을 통해 이국성과 고풍스러움, 沙漠과 雪山을 아우르는 風光들 그리고 꿈이라는 設定을 통해 大都市의 建物들이 무너져 내리거나 空間이 半으로 접히는 場面들은 그 壓倒性으로 因해 崇高美마저 느끼게 한다.
何如튼 크리스토퍼 놀란 監督 自體가 이 映畫를 통해서 우리에게 拒否하기 힘든 '인셉션'을 試圖하는 셈이다. 하지만 映畫 속에서 더없이 幻想的으로, 英雄的으로 描寫되는 '인셉션'李 萬若 現實에서 可能해진다면? 勿論 수많은 이데올로기的 試圖들이 本來的으로 '意圖된 인셉션'일 수밖에 없음에도 不拘하고, 이 想像은 더없이 섬뜩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靈山大 映畫映像學科 敎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