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문이불여일견. 世界史를 通해서 콜럼버스에 對해 배운 바는 있지만, 어떤 느낌 같은 것은 없었다. 15世紀 末 아메리카 新大陸을 發見한 功勞와 더불어, 때로는 苛酷한 征服者란 相反된 評價를 받기도 하는 歷史的 人物이란 게, 내가 아는 全部였다. 그런데, 얼마 前 스페인의 高度 세빌리아를 旅行하고서 비로소 콜럼버스라는 人物을 새롭게 만났다.
알카사르의 朱廊에서도, 이사벨라 公園의 噴水臺 곁에서도 그의 痕跡을 發見할 수 있었다. 더구나 캐시드럴, 卽 大聖堂 안에 安置된 그의 墓所를 보면서 콜럼버스에 對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콜럼버스라는 個人의 一生에 덧붙여 스페인 歷史에 나타난 세빌리아의 象徵的 意味 때문에 더욱 그랬다.
세빌리아는 回敎 國家와 가톨릭 國家의 榮辱이 交代로 點綴된 스페인의 歷史를 그대로 보여주는 都市이다. 市內 곳곳에 回敎 遺跡들과 가톨릭 遺跡들이 뒤섞여 있었다. 콜럼버스의 一生은 그런 歷史的 背景에 깊이 影響을 받았을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點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12世紀 回敎徒가 세운, 높이 97.4 m의 히랄드의 塔과, 스페인 最大의 15世紀 고딕建築物人 캐시드럴이 나란히 붙어 있다. 캐시드럴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알카사르는 回敎 王의 宮城이기도 하였지만 가톨릭 王이 再征服한 곳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세라믹 타일들과 모자이크 等에서 아랍 文化의 빼어남을 읽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內部에 裝飾된 成火들과 王族들을 그린 카펫 等은 가톨릭 藝術의 아름다움을 同時에 보여주고 있었다. 알카사르 內壁에 展示된 아랍風의 타피스트리(壁에 거는 絨緞)들에도 콜럼버스의 航海 歷史가 그려져 있었다.
歷史冊을 몇 番 읽었어도 잘 理解할 수 없었던 歷史的 事實들이었다. 세빌리아 이곳저곳을 둘러보면서 500餘 年 前 콜럼버스의 新世界 探險이 바로 어제 일처럼 눈에 선하게 그려지는 것이 神奇했다.
遊覽船을 탔다. 江邊 量案의 建物들과 그리고 과달키비르 江이 大西洋으로 이어지는 물길을 바라보면서, 콜럼버스가 引渡航海를 위해 같은 뱃길을 따라 大西洋으로 나아가던 때를 想像해보았다. 印度에 到着하는 代身 뜻밖에 아메리카 新大陸을 發見하여 歷史의 한 페이지를 裝飾하게 된 콜럼버스의 生涯가 어렴풋이 느껴졌다. 글로 읽는 歷史가 아니라 발로 걸으며 歷史를 느끼는 것이 얼마나 重要한가를 뚜렷이 體驗하였다. 콜럼버스는 핀타호와 니냐호를 타고 저 江물을 따라 大西洋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船着場에 세워져 있던 제법 큰 크루즈遊覽船을 보니 콜럼버스의 그 帆船들이 카디스를 지나 大西洋으로 나아가기에는 充分하였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 當時엔 只今보다 더 數量이 豐富할 수도 있었겠다.
콜럼버스가 이곳 세빌리아에서 핀타호와 니냐호를 타고 印度 航海의 첫 旗발을 올렸을 때, 배 뒷전에 바라보이는 黃金의 塔을 보고는 무슨 생각에 잠겼을까 하는 느낌도 떠올랐다. 13世紀 回敎徒에 依해 세워진 鄭12角形 模樣의 黃金의 塔은 그 時代엔 燈臺 役割을 하였을 것이다. 건너便 江邊에 있는 銀色의 塔에 쇠사슬을 連結해, 과달키비르港을 지켰다고 한다.
플라멩코와 鬪牛의 나라, 2010年 남아공 월드컵 優勝國인 情熱의 나라, 그곳에 있는 세빌리아 旅行에서 歷史를 배웠다. 遊覽船을 타고 과달키비르 江을 따라 흐르는 江물과 量案의 오래된 建物들을 바라보면서, 또한 여러 遺跡地들을 둘러보면서, 콜럼버스라는 歷史的 人物을 만나게 된 것은 幸運이었다. 이番 세빌리아 旅行은 콜럼버스의 달걀이라는 逆說에 對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해 주었다.
그에 對한 歷史的 評價가 어떠했던, 新世界를 向한 콜럼버스의 熱情과 冒險精神은 500年이 지난 오늘날도 如前히 본받을 만하지 않을까. 둥근 달걀은 세우기 어렵지만 바닥 모서리를 깬 달걀은 누구나 세우기 쉽다. 하지만 누구나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쉬운 일도 처음 始作하는 사람에겐 무척 어려운 法이다. 發想의 轉換이 있어야 새로운 世界가 열리는 法이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偉大한 것이다. 콜럼버스의 偉大함을 再發見한, 뜻깊은 旅行이었다.
釜山大 敎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