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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復 70周年] 先親 의친왕 獨立運動 行跡 찾아나선 皇孫 李錫 氏 "日帝가 歪曲한 皇室 歷史 바로 잡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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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復 70周年] 先親 의친왕 獨立運動 行跡 찾아나선 皇孫 李錫 氏 "日帝가 歪曲한 皇室 歷史 바로 잡아야"

井邑에 抗日義兵 參與 痕跡 / 居昌엔 獨立資金 募金 일화 / 調査·諮問通해 事實 밝힐 터

▲ 皇孫 이석氏가 同意비각을 가리키면서 先親인 儀旺의 獨立運動 行跡에 對해 說明하고 있다.

“나마저 잊어버리고 살면 歷史가 辱을 할 것입니다”

 

大韓帝國의 ‘마지막 皇孫’ 李錫 氏(74)가 맞는 光復 70周年의 感懷는 남다르다. 그는 누구보다 잘못된 歷史를 바로 잡고, 特히 自身의 아버지인 의친왕의 獨立運動 行跡을 되찾고 싶어 한다.

 

지난 11日 皇孫 李錫 氏가 先親인 儀旺의 獨立運動 行跡을 찾는 作業에 本紙가 同行 取材했다. 同行 取材에는 李氏가 總裁로 있는 (寺)大寒皇室文化財團의 頂上도 事務局長이 함께 했다.

 

△ 儀旺과 獨立運動家 204人의 決議 痕跡, 同意記念碑(同義紀念碑)

▲ 井邑 同意記念碑의 의친왕 關聯 記錄. 의친왕의 號와 이름인 춘암(春菴) 李堈(李堈)李 새겨져 있다.

皇孫 이석氏가 先親의 獨立運動 痕跡을 좇아 처음 찾은 곳은 儀旺과 獨立運動家의 決議 痕跡이 남아있는 井邑의 同意記念碑(同義紀念碑) 施設. 정읍시 산외면 오공리의 마을 안쪽 깊숙한 곳에 세워져 있는 記念碑에는 의친왕과 뜻을 모은 獨立運動家 204名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記念碑를 바라보는 李錫 氏의 表情은 眞摯했다. 그는 自身의 父親 의친왕의 號와 이름, 춘암(春菴) 李堈(李堈)李 새겨진 곳을 注目했다.

 

李氏는“아버지의 이름 뒤에 서(書)라고 새겨진 것으로 보아 아버지가 쓴 것이 分明하다. 게다가 아버지의 이름 옆에 餘興 민경호 찬(撰)이라고 써진 것으로 보아, 아버지가 종이에 쓴 것을 민경호가 憂國之士들과 함께 碑石에 새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碑石에 임병찬과 최익현 義兵將等이 倂記돼 있는 것은 1905年 後 아버지와 이들의 抗日義兵 鬪爭에 깊숙이 介入돼 있는 것을 알려준다” 며 “高宗皇帝가 아버지 의친왕에게 密詔를 내린 것이라 判斷한다”고 덧붙였다.

 

實際 韓末 朴殷植이 쓴 <한국독립운동지혈사> 等 몇몇 近代時期 史料에는 의친왕이 獨立運動 行跡을 示唆 할 만한 記錄이 남아있다. 記錄에는 의친왕이 獨立運動 團體인 大同團과 結託한 뒤 上海臨時政府로 亡命하려다가 日帝에 發覺된 事實, 上海 臨時政府에서 發表하려 했던 聲明書 等이 적혀있다. 그러나 이런 文獻資料들과 同意記念碑에 새겨진 記錄을 連結해 歷史的 事實을 導出할만한 核心根據를 찾기가 쉽지 않은 形便이다. 李氏는 “事實 그 部分이 가장 아쉬운 點이다”고 했다.

 

△의친왕이 義兵抗爭 準備하며 머물렀던 ‘정태균’古宅

 

의친왕의 獨立運動 痕跡은 慶南 居昌郡에서 생생히 傳해오고 있다. <거창군사> 에는 1909年 의친왕 江이 前 承旨 정태균의 집에 머물면서 北上 위천地方의 憂國靑年들과 抗日義兵活動을 謀議했다는 記錄이 나와 있었다. 居昌博物館 구본용 學藝硏究士는 이 記錄에 對해 “前 承旨 정태균 집안에서 傳해 내려온 口傳을 採錄해서 記錄한 것이다” 며 “그 집안의 後孫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으면 의친왕과 關聯된 여러 逸話를 傳해들을 수 있다”고 말했다.

 

區 學藝硏究士는 또 지난해 불탄 居昌 經德齋(2005年 4月 ‘國家指定 登錄文化財’로 指定됨)에 있었던 의친왕 이강이 쓴 懸板 資料寫眞을 보여주며 아쉬움을 表出하기도 했다.

 

의친왕이 擧事를 計劃했다는 정태균 古宅은 옛 모습을 어느 程度 保存하고 있었고, 정완수 氏 等 정태균 後孫 家族들이 살고 있었다. 정완수 氏는 先祖들로부터 傳해내려온, 의친왕과 關聯된 여러 가지 逸話를 들려줬다. 그는 洞네 사람들이 의친왕을 찾아 問安人事를 왔던 日, 獨立資金을 모으다가 日本軍 앞잡이의 密告로 發覺됐던 일 等 여러 이야기를 傳했다. 그러면서 그는 關聯 記錄의 不在에 對한 아쉬움을 얘기하면서, “當時 錄音된 것이라도 있으면 이게 歷史的 事實이라고 自信있게 말할텐데 아쉽다”고 말했다.

 

△ 大韓帝國의 ‘마지막 皇孫’耳石

 

우리 歷史上 唯一한 帝國이었던 大韓帝國에 對한 視線은 곱지 않다. 支配層의 腐敗와 無能이 亡國을 自招했다는 생각때문이다.

 

李錫 氏는“많은 사람들은 皇室의 一員들이 아무런 抵抗 없이 日帝에 무릎을 꿇은 것으로 생각한다”면서도 “우리 아버지는 平生에 걸쳐 獨立運動에 投身해오셨고, 解放 後에도 그에 對한 努力을 正當하게 評價받지 못한 것에 對해 아쉬움을 앉고 살아가셨다”고 말했다.

 

그는 그 理由를 植民史觀 때문으로 본다. 日帝에 依해 歪曲된 皇室의 歷史가 後代의 사람들의 認識속에 影響을 끼쳤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李錫 氏는 “끊임없는 調査와 諮問을 통해 歷史의 뒤안길에 가려져있던 아버지의 獨立運動 行跡을 明確하게 밝혀내겠다”며 抱負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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