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봉동을 다녀보면 눈에 띄는 傳單紙들이 있다. ‘원룸’, ‘化粧室 있음’ 같은 不動産 傳單紙다. 勿論 다른 洞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골목을 조금 더 걸어 보면 색다른 光景을 目擊할 수 있다. 傳單紙가 아니라 漆板인데, 흰色 바탕에 검정 매직으로 빈 房이 있다는 것을 標示하고 있다. 마치 軍隊 狀況板처럼 出入門 左側 담벼락에 붙어 있으니 눈에도 잘...
2010年을 지나고 있는 現在 구로구 地域은 尖端 디지털 都市로 탈바꿈했지만 1970年代 구로구는 우리나라 産業化의 中心地였다. 굴뚝 工場은 구로구의 象徵처럼 認識됐고, 輸出 工業 團地의 代名詞가 됐다. 일자리가 많으니 當然히 全國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시골에서 上京한 十代들이 가리봉동에 살면서 구로구의 工場으로 일하러 가는 것이 익숙한 風景이었다. 가리봉市場...
가리봉동?骨말敬老堂에서 만난 윤재병[1932年生] 氏는 平生을 가리봉동에서 살았다. 윤재병 氏에게는 위로 누이 두 분과 兄님 한 분이 계셨다. 아버지는 윤재병 氏가 세살 때 돌아가셨고, 다섯 살 터울의 맏누이 윤묘병[1927年生] 氏가 어머니와 함께 동생들을 돌봤다. 敬老堂에서 만난 老人들의 얘기 가운데 한결같은 것이 있었다. 모두 激動의 時期를 겪었다는 것....
가리봉동 取材가 한창이던 때는 2010年 5月, 마침 6·10地方 選擧를 앞두고 있어서 거리에는 弘報 傳單이 가득했고 만나는 사람마다 빠지지 않고 選擧 이야기를 했다. 유흥열[1945年生] 氏를 만날 때도 그랬다. 유흥열 氏는 區廳長 候補 名銜을 내밀며 自己紹介를 했다. 只今은 某 政黨의 弘報를 맡아서 하고 있으며 40年 동안 가리봉동에서 살았으니 여기가 故鄕이나 魔讚歌...
서울市는 2005年 末?가리봉동 地域 8萬 4430坪[27萬 9107.44㎡]을 ‘均衡發展促進地區’로 指定해 4段階 開發 事業을 推進하기로 決定했다. 가리봉동 地域을 구로동과 가산동 等에 세워져 있는 서울디지털産業團地를 支援하기 위한 호텔과 컨벤션, 創業 保育 센터를 包含해 商業·業務·住居 地域으로 構築하겠다는 目標였다. 그리고 5年이 지난 2010年 1月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