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末의 抗日愛國志士. 獨立協會에 參與하고, 改革當, 大韓保安會, 공진회,憲政硏究會 等을 組織했다. 寶光,悟性學校를 세웠다. 1907年 헤이그 萬國平和會議에 이상설·李瑋鍾 等과 合流했으나, 日本側의 妨害로 參席 못하고 殉國했다. 號 一聲(一醒)·海士(海史)·淸夏(靑霞)·解玉(海玉). 本名 순칠(舜七). 初名 성재(性在)·麗川(汝天)·善哉(璿在). 咸鏡南道 北靑(北靑)에서 出生하였다. 29歲에 北靑에서 初試(初試)에 合格, 1894年(高宗 31) 咸興 巡陵參奉(純陵參奉)에 任命되었으나 곧 辭職하고 上京, 이듬해 新設된 法官養成所(法官養成所)에 들어가 6個月 後에 卒業하고, 1896年 漢城裁判所(漢城裁判所) 檢事補에 任命되었다. 그러나 調信(朝臣)들의 不法과 飛行을 들추어 파헤치다가 그들의 免官(免官) 運動 때문에 就任 1個月 만에 免職되고 곧 獨立協會에 加擔, 坪議長(評議長)으로 活躍하다가 日本으로 亡命하였다. 1897年(光武 1)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法科에 들어가 이듬해 卒業하고 歸國, 다시 獨立協會 일을 보다가 誣告로 幹部 17名과 함께 被逮, 數個月 後 釋放되었다. 1899年 獨立協會가 强制解散되자 민영환(閔泳煥)·李東輝(李東輝)·李商在(李商在) 等과 祕密結社 改革黨을 組織, 러일戰爭 後 日帝의 韓國侵略과 親日 走狗(走狗)들의 活動이 露骨化하자 大韓保安會(大韓保安會)를 組織하여 荒蕪地 開拓權을 얻으려는 日帝의 陰謀를 暴露하고 一進會(一進會)와 對抗하여 공진회(共進會)를 組織, 會長에 推戴되었다. 親日大臣(親日大臣) 5名을 聲討하다가 被逮, 鐵道(鐵島)로 流配되었으나, 이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