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만   중국   일본 
島山 安昌浩와 太虛 유상규|新東亞

島山 安昌浩와 太虛 유상규

“共同墓地 太虛 옆에 묻어달라”… 默殺된 島山의 遺言

  • 김영식 隨筆家, 飜譯家 japanliter@naver.com

    入力 2008-02-11 17:09:00

  • 글字크기 설정 닫기
    • 망우리公園 島山 安昌浩 墓地터 隣近에는 愛國志士 유상규(劉相奎·1897~1936)의 무덤이 있다. 倒産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上海 臨時政府에서 倒産의 祕書로 일한 유상규를 아는 이는 드물다. 島山의 精神的 아들이기도 했던 그는 京城儀典 附屬病院의 醫師로, 獨立運動家로 많은 業績을 남겼다. 不惑의 나이에 他界한 유상규의 자취를 쫓던 筆者는 감춰졌던 島山의 遺言, 倒産과 그의 關係, 알려지지 않은 故人의 業績을 發掘했다.
    도산 안창호와 태허 유상규

    망우리公園의 太虛 유상규 墓와 島山 安昌浩의 墓地터(怨 안).

    망우리公園 管理事務所 앞에 난 오르막길을 50m쯤 걸어가다 보면 循環路가 나오고 그 왼쪽으로 20餘 分을 가면 동락천 藥水터가 나온다. 藥水터에서 물 한 盞 마시고 위를 올려다보면 오른쪽에 愛國志士 유상규의 年譜費가 서 있다.

    “島山의 友情을 그대로 배운 사람이 있었으니 그것은 유상규였다. 유상규는 上海에서 倒産을 위해 島山의 아들 模樣으로 獻身的으로 힘을 썼다. 그는 歸國해 경성의학전문학교 講師로 外科에 있는 동안 辭退 後의 모든 時間을 남을 돕기에 바쳤다.”

    이 글은 春園 李光洙가 쓴 ‘島山 안창호’에 나온 文章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웬만한 愛國志士라면 그의 글이 남아 있을 터. 그렇다면 왜 이 年譜費에 後日 親日 文人으로 낙인찍힌 春園의 글이 실렸을까. 유상규에 對한 記錄을 그만큼 찾기 어려웠다는 얘기다. 서울市는 망우리墓地의 公園化 作業 때 興士團에 依賴해 故人의 글을 받으려 했으나 如意치 않자 어쩔 수 없이 春園의 글을 올렸다 한다. 우리가 유상규라는 이름 석 字를 쉬 接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筆者는 故人의 長男 유옹섭(76)氏의 도움으로 그와 關聯된 글을 두루 찾을 수 있었다. 事實 그는 生前에 많은 글을 發表했으나 本名 代身 雅號를 筆名으로 썼기에 후세인은 그 글의 著者가 故人인지 알 수 없었다. 말은 있었지만 말의 主人을 알 수 없었고, 主人은 있었지만 主人의 말은 사라진 셈. 筆者가 찾아낸 ‘主人의 말’은 後述하기로 하고 一旦 年譜費의 뒷面을 紹介하면 이렇다.

    찾지 못한 말



    도산 안창호와 태허 유상규

    太虛 유상규의 年譜費.

    “1897 平北 江界郡 강계읍 서부동에서 出生, 1919 大韓民國 臨時政府에서 組織한 臨政 調査員 江界地域 責任者로 獨立運動 資料調査 및 蒐集 等 活動, 1920 上海에서 臨政要人 安昌浩 先生의 祕書로 活動하며 興士團 原動支部에 加入, 1925 島山 安昌浩 先生의 主唱으로 組織된 ‘修養同友會’에 加入하여 活動, 1927 경성의학전문학교 卒業, 1931 修養同友會 綱領 宣傳과 發展을 위해 ‘靑年開拓群’ 組織을 協議하는 等 活動, 1990 建國訓長 愛族章 追敍.”

    年譜費 옆길로 20m쯤 올라가면 故人의 墓가 나온다. 碑石의 앞面에는 “愛國志士江陵劉公諱相奎(愛國志士江陵有功휘常規)/ 配孺人淸州李氏(배유인淸州李氏)”라고 적혀 있다. 여기서 ‘휘(諱)’는 故人의 이름을 의미하고 ‘劉因(孺人)’은 兩班이되 벼슬이 없던 사람의 아내에게 붙이는 呼稱이다. 後에 다른 이의 墓를 紹介할 때 다시 나오겠지만, 叔父인(淑夫人)은 3品 以上의 堂上官, 段인(端人)은 正/種 8品 官吏의 夫人에게 주는 爵位다. 碑石의 뒷面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도산 안창호와 태허 유상규

    1936年 5月23日子 ‘조선중앙일보’에 실린 太虛 유상규의 醫學記事와 1935年 동아일보에 실린 그의 健康 講演會 廣告(왼쪽).

    “功은 1919年 3·1運動 後 경성의학전문학교를 中斷하고 上海 臨時政府 交通局 및 國務總理 島山 安昌浩 祕書 勤務. 1920年 興士團 入團 活動함. 人材가 必要한 民族이니 故國에 돌아가 學業을 마치라는 島山의 勸告로 1924年 歸國 (1925年) 復學하고·수양동맹회, 同友會에서 獨立運動을 繼續함. 1927年 敬意戰 修了 後 洞外科 講師 勤務 中 卒. 黨 40세임. 1990年 8月15日 建國訓長 愛族章 追敍.”

    1990年 故人이 뒤늦게 勳章을 받은 것은 長男 유옹섭氏의 證據資料 提出에 依해 마침내 政府가 그 功績을 認定하게 됐기 때문이다. 옛날 碑石은 땅에 묻고 새로운 碑石이 세워진 것도 勳章 授與 後의 일이다.

    醫學을 통한 民族 啓蒙

    倒産이 自身의 祕書로 있던 유상규에게 急遽 歸國을 勸告한 것은 그의 獨立事象 때문이었다. 유상규는 3·1運動에 參加한 履歷 때문에 京城儀典에서의 學業을 中斷하고 上海로 와 臨時政府에서 일하고 있었다. 島山은 “우리가 나라를 잃은 것은 이완용 一個人 탓도 아니오, 日本 탓도 아니라 우리가 힘이 없어서였다. 그러하니 나라의 獨立은 國民 個個人이 힘을 가질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므로 漸進的으로 힘을 키워나가는 方向으로 鬪爭을 할” 것을 主張했다. 이에 急進派는 “當場 싸울 人力이 必要한데 무슨 말이냐”며 反對했으나, 倒産은 “나라의 獨立을 위해서는 于先 人材를 育成할 必要가 있다”고 强調했다.

    島山의 弟子 格인 春園 李光洙 또한 나이 27歲로 上海에 있을 때 “獨立國民의 資格者를 키우라”는 島山의 勸告에 따라 歸國해 興士團 活動과 著述을 통한 國民啓蒙에 나섰다. 春園은 興士團의 國內組織으로 修養同友會를 組織했고 島山의 葬禮를 主管했으며 光復 後에는 記念事業會의 勸誘로 ‘島山 안창호’를 執筆했다. 春園의 精神的 地主는 倒産이었다.

    京城儀典은 朝鮮總督府 傘下 最高의 醫學校로 서울대 醫大의 前身이다. 유상규는 1916年 3月 更新中學을 11回로 卒業하고 그해 4月에 京城儀典에 入學했고, 1919~1924年 休學 後 1925年 復學해 1927年 3月에 卒業했다. 京城의전 出身 醫師로서 백병원 設立者 백인제(1898~?·1921年 卒業, 6·25 때 拉北)와 民衆病院 設立者 유석창(1900~1972·1928年 卒業) 等이 有名하다.

    유상규는 卒業 後 京城儀典 附屬病院 外科醫師 및 學校의 講師로 博士學位를 準備하는 한便, 동아일보사 主催 講演會에 꾸준히 演士로 參席해 朝鮮 民衆의 醫學的 啓蒙活動에 熱心이었고, 1930年에는 朝鮮醫師協會 創設度 主導했다(중외일보, 1930. 2.22). 또한 同友會 雜誌 ‘동광(東光)’은 勿論, ‘신동아’에 많은 글을 실었다. 그러나 日帝의 監視를 避해 本名을 밝히지 않고 ‘太虛(太虛)’라는 號로 發表한 글이 많아, 失明으로 실은 醫學 關聯 記事 外에는 그의 글을 거의 찾을 수 없었다.

    李光洙는 글로써 民族啓蒙에 나섰고, 유상규는 醫學으로써 民族의 健康을 위한 公衆衛生 啓蒙에 나섰다. 爆彈을 던지는 方式의 獨立運動도 必要하지만 꾸준하고 漸進的인 獨立運動도 重要하다고 主張한 島山의 獨立思想을 그대로 實踐한 사람이 바로 유상규다. 그는 治療費를 받지 않는 往診에도 熱心이었고, 休暇 때도 親舊의 病 看護를 할 만큼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患者를 治療하던 中 單獨(丹毒)에 感染돼 世上을 버렸다. 유상규는 죽을 때까지 倒産의 뜻을 獻身的으로 實踐에 옮겼다.

    그의 葬禮는 마침 大田에서 出獄해 國內에 滯在 中이던 倒産이 主管했다. 當時 記錄에 따르면 그의 葬禮式엔 不法集會로 疑心받을 만큼 많은 親知와 同志가 모였으며 그의 恩師 五事와 마사루 敎授도 ‘슬픔에 떨리는 音聲’으로 調査를 朗讀했다 한다.

    도산 안창호와 태허 유상규

    島山 安昌浩(앞)를 中心으로 오른쪽부터 유상규, 전재순, 김복형

    太虛 유상규는 3男을 뒀으나 그가 죽은 後 長男 恐懾은 여덟 살의 나이로 연이어 病死했다. 뒤이어 長男이 된 옹攝氏는 競技中學을 거쳐 6·25 戰爭 때 空軍에 入隊, 1976年 空軍 施設監(准將)으로 除隊한 後 대림산업 副社長을 지냈으며 現在도 標準建築士事務所의 代表 建築士로 現業에 從事하고 있다. 筆者가 運 좋게 옹攝氏를 찾아낸 것은 그가 高齡임에도 業務上 컴퓨터에 能했기 때문이다. 筆者는 그의 이름을 인터넷에서 쉽게 發見할 수 있었다. 次男 종섭氏는 세브란스 醫大를 나와 연세대 醫大 藥理學 助敎授를 지낸 後 都彌(渡美)해 2002年에 他界했다.

    테許可 世上을 떠난 後 夫人은 30歲 靑孀寡婦의 몸으로 삯바느질과 下宿을 치며 어렵게 두 아들을 키웠다. 옹攝氏는 네 살 때 倒産과 興士團院이 함께 찍은 寫眞 맨 앞줄에 서 있었고, 어머니와 함께 島山의 病 問安을 간 적이 있다. 아마 現存 人物 中 倒産을 直接 눈으로 본 唯一한 李가 그일 것이다.

    옹攝氏가 ‘太虛(太虛)’가 곧 아버지라는 事實을 알기까진 많은 偶然이 함께 했다. 그는 故人의 遺品을 뒤지던 中 작은 쪽紙에서 ‘太虛’라는 單語를 發見했지만 當時에는 그게 무슨 意味인지 알지 못했다. 時間이 흘러서야 그 쪽紙가 집으로 찾아온 沈熏(沈熏·1901~1936, ‘상록수’의 作家)李 父親 앞으로 남긴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여러 文獻 속 ‘太虛’라는 筆名의 글이 모두 父親 유상규의 글이라는 게 確認되는 瞬間이었다. 以後 그는 獨立記念館의 도움을 얻어 찾은 父親의 原稿와 保管 中인 未發表 原告 一部를 묶어 電氣 ‘愛國志士 太虛 유상규(興士團)’를 最近 出刊했다.

    “政治人만이 爲人은 아니다”

    太虛가 남긴 글 中에 눈에 띄는 글이 있다. 1925年 5月 ‘동광’ 創刊號부터 1926年 12月 8號에 걸쳐 連載한 ‘放浪의 一便, 特異한 決心을 가지고 傷害를 떠나 나가사키, 오사카로 勞動生活을 體驗하던 作者의 回想記’라는 글이다. 이 連載物은 故人이 日本으로 건너가 막勞動을 하며 겪은 일을 적은 手記 形式의 글로, 當時 日本에 간 朝鮮 勞動者들의 삶이 具體的으로 描寫되어 있다. 1931年 7月(23號)에 실린 ‘피로 그린 手記 젊은 醫師와 三透寫’, 1931年 12月과 1932年 1月(29, 30號)에 쓴 ‘醫師平版機’는 當時 醫學界를 엿볼 수 있는 所重한 資料다.

    筆者는 그의 글을 찾는 過程에서 年譜비에 새로 새겨 넣을 만한 文句를 찾아보았다. 政治家나 文筆家가 아니라 行動의 志士였던 유상규의 글에는 緻密함은 있어도 政治性은 드러나 보이지 않았다.

    “우리 朝鮮 사람은 位인 或은 世界的 爲人이라면 곧 政治家를 聯想한다. 더군다나 近日의 新思潮로 인해서 爲人과 英雄의 意味를 混同해서 民衆時代에 矛盾되는 것으로 여겨 爲人을 否定하려는 傾向까지도 보인다. 이렇게 文化的으로 뒤떨어진 思想環境 속에서 科學的 位인, 그야말로 人類 永劫에 幸福을 주는 爲人이 자라나긴 고사하고, 싹트기도 바라기 힘들다고 보는 것이 當然하지 않을까.”(‘의사평판기’, 1931. 12 ‘동광’ 29號)

    ‘醫師平版機’의 序論 部分에 該當하는 이 글에서 筆者는 政治家만이 爲人이 아님을 說破한다. 各 分野에서 나름대로 最高의 實力을 硏磨해 그것이 自己實現에 그치지 않고 나라에 보탬이 되도록 하는 者는 모두 爲人이라 할 수 있다는 主張이다.

    國內 興士團 組織인 同友會는 ‘修養團體를 假裝한 獨立運動’ 嫌疑로 1937年 日帝에 依해 檢擧됐는데, 이때 붙잡힌 倒産은 서대문형무소에서 獄苦를 치르다 病患을 얻어 京城帝大附屬病院에 入院했다가 1938年 3月10日 60歲를 一期로 殞命했다. 島山의 屍身은 망우리公園 유상규의 墓地 바로 오른쪽 위에 묻혔다.

    그러나 只今 망우리墓地를 찾아 유상규의 무덤 오른쪽 위로 올라가면 島山의 墓는 오간 데 없고 墓가 있던 자리임을 알리는 墓誌石(墓址石)만 남아 있다. 앞面에 ‘島山 安昌浩 先生 墓地(墓址)’, 뒷面에는 ‘1973年 11月10日에 이 地點에서 서울特別市 강남구 압구정동 島山公園 內로 里長’이라고 씌어 있다. 筆者는 유상규 關聯 資料를 찾다가 島山 安昌浩 先生이 망우리 墓地에 묻힌 事緣을 ‘三千里’(1938. 5)에서 發見했다.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뒤늦게 밝혀진 島山의 遺言

    …六十 歲를 一期로 봄바람 아직도 찬 3月10日에 서울除隊 病院 逸失에서 이리하야 倒産은 이 世上을 下直했다. 여기에 附記할 것은 倒産은 돌아가기 前 며칠 前에 이런 말씀을 하였다.

    “나 죽거든 내 屍體를 故鄕에 街저가지 말고.”

    “그러면 엇더케 할래요.”

    “달리 先山 가튼데도 쓸 생각을 말고.”

    “서울에다 무더 주오.”

    “ … ”

    “共同墓地에다가…”

    “유상규軍이 눕語잇는 그겻 共同墓地에다가 무더주오.”

    伯氏와의 사이에 이런 對話가 있었다. 유상규란 京城儀典 靑年 敎授로 傷害 當時부터 倒産의 가장 사랑하든 愛弟子인데, 그만 年前에 서울서 작고하였다. 그날 葬禮式은 春園이 主宰하였다.’(1938. 5.1. ‘三千里’ 第10卷 第5號. ‘島山의 臨終, 서울 共同墓地에 묻어달라는 一言(一言)李 世上에 끼친 遺言’ 中에서)


    도산 안창호와 태허 유상규

    망우리公園에 있던 島山 安昌浩의 墓. 景氣中學校 時節 유상규의 長男 유옹섭이 찍은 寫眞이다.

    하지만 倒産이 이런 遺言을 했다는 事實을 記憶하는 사람은 없었다. 1973年 政府는 서울 江南에 새로 닦은 대로에 島山의 이름을 붙이고, 島山公園度 만들어 島山의 墓를 망우리墓地에서 移葬했다. 一部 記錄을 보면 “倒産이 망우리에 ‘假埋葬’됐다가 이제 便히 島山公園으로 이장하였다”라는 대목까지 보인다. 島山의 遺言을 알지 못했던 사람들은 里長 當時 아마 ‘이제 民族의 指導者 島山 安昌浩를 格에 맞게 잘 모시게 됐다’고 생각했을 터였다.

    버려진 倒産 墓터

    유상규의 長男 옹攝氏는 後에 父親의 資料를 整理하던 中 이 事實을 接하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島山의 里長이 推進될 當時만 해도 島山의 이런 遺言을 아는 父親 유상규의 同志 世代가 生存하던 때인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었는지, 또 그런 글이 씌어졌는지도 알 수 없었다. 어찌됐든 結果的으로 倒産의 屍身은 自身의 遺言이나 希望과는 關係없이 다른 곳으로 移葬된 셈이다.

    倒産과 太虛가 血緣의 父子之間과 다름없었음을 알 수 있는 글이 또 하나 있다. 興士團 同志 장리욱(1895~1983)이 지은 ‘島山의 人格과 生涯’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高 유상규 醫師는 倒産을 스승으로만이 아니라 分明히 어버이로 모셨다. 島山 앞에서의 行動擧止는 勿論이지만 倒産의 身上 모든 일에 對해서 갖는 柳君의 그 細心한 精誠은 훌륭한 ‘孝子’ 바로 그것이었다. 島山은 同志 柳君이 當身을 向해서 갖는 그 精誠어린 섬김에 對해서 가슴 깊이 고맙게 느끼고 있는 것은 勿論이다. 어느 機會에 나는 倒産을 모시고 大同江 下流 萬景臺에까지 나아갔던 일이 있다. 島山은 거기서 그렇게 멀지 않게 바라보이는 조그마한 果樹 밭 하나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이것은 유상규 君이 當身을 向해 갖고 있는 그 고마운 마음을 두 집 子女에게까지 傳해주고 싶어서 마련한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 過手 밭은 柳君의 맏아들(옹섭)과 島山의 둘째아들(弼善·1912~2001)의 이름으로 保管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도산 안창호와 태허 유상규

    太虛 유상규의 長男 유옹섭氏. 島山 安昌浩에 對해 새로운 證言을 했다.

    島山의 墓 移葬 問題는 故人과 遺族에게는 원통한 일이지만 되돌리기에는 行政節次上 不可能한 일이 되어버렸다. 이미 倒産은 個人의 倒産이 아니라 國民의 倒産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問題는 망우공원의 안창호 墓誌石이 全혀 管理되고 있지 않다는 事實이다. 島山의 墓誌石은 사람들이 붐비는 稜線 길 바로 아래에 位置해 있으면서도 수풀로 뒤덮여 全혀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러다 몇 年 前부터 옹攝氏가 父親 유상규의 墓를 伐草할 때마다 함께 손질하면서 一般人의 눈에 띄기 始作했다. 옹攝氏가 競技中學 時節에 찍은 倒産 墓 寫眞에서 當時 倒産 墓의 元來 碑石 模樣을 볼 수 있는데, 이 碑石은 아마 里長 때 땅에 묻혔을 것이다. 아무리 主人이 떠난 자리라지만 墓地터와 墓誌石의 管理가 이렇게 허술할 수는 없다.

    倒産이 망우리에 묻힌 後 수주일間 洋酒警察署는 墓地 入口에서 訪問客을 一一이 심문했고, 그 後 1年間이나 墓지기에게 島山의 墓를 묻는 者의 住所와 이름을 적게 했다. 日帝는 죽은 倒産을 무서워했고, 倒産을 찾는 國民의 마음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監視하지 않는 只今, 망우리墓地의 先賢들을 찾는 國民은 거의 없다. 國民의 精神이 그만큼 貧弱해진 것이거나, 나라가 無關心하니 國民도 모른체하는 것이리라. 或者는 구태여 무덤까지 찾아갈 必要가 있느냐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아는 것만큼 보이고 느낀 만큼 발걸음이 닿게 마련이다.

    죽은 者의 所願

    도산 안창호와 태허 유상규

    서울 江南 島山公園의 안창호 銅像.

    筆者는 數十 次例 망우리公園을 찾는 동안 日本人 餓死카와의 墓 앞에 놓인 꽃다발이 시든 것을 본적이 없다. 그만큼 餓死카와의 墓를 찾는 日本人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는 意味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무엇 하러 아무 볼 것도 없는 自國人의 墓를 찾아오는 것일까. 우리에게 망우리墓地는 그저 용마산 登山路나 自轉車로 循環路日 뿐인데 말이다. 登山을 하다, 自轉車를 타다 “어, 저분 무덤이 여기에 있었네”하고 지나치는 게 우리네 自畫像이다.

    이런 現實이 變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머지않아 다시 恥辱의 歷史를 되풀이할 수도 있다. 島山의 墓를 지키던 日帝는 이미 알고 있었다. 墓를 찾는 사람들의 마음이 合해지면 무서운 힘으로 變할 수 있다는 것을. 그러나 只今의 망우리를 찾는 日本人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韓國人들은 때가 지나면 故人의 墓地(精神)에 關心이 없다고. 島山의 墓터(墓址)는 이렇게 그가 가장 사랑했던 韓國民에게서 버림받고 있다.

    島山은 그가 願해서 망우리墓地에 묻힌 後 30年 만에 自身의 意志와 相關없이 移葬됐다. 그러나 그의 넋만은 康男으로 弛張되지 않았다. 죽은 倒産이 말을 할 수 있었다면? 移葬을 拒否했거나 親愛하는 유상규度 함께 데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후세인은? 도산대로를 裝飾할 島山의 有害가 重要했지, 島山의 말은 重要하지 않았다. 島山은 民衆과 같이 共同墓地에 묻히기를 所願했다. 世上은 산 者들의 것, 故人의 말은 世人의 必要에 따라 引用되고 때로는 默殺된다. 倒産이 떠난 자리에 홀로 남은 유상규의 墓碑가 只今 이토록 쓸쓸해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일까. 어버이처럼 사랑한 島山의 墓터가 저렇게 放置된 것을 바라보는 故人의 마음은 또 얼마나 애절할까.

    도산 안창호와 태허 유상규
    김영식

    1962年 釜山 出生

    中央大 日文科 卒業

    韓國미쓰비시상사 勤務

    現 支援商社 代表

    2002年 系間 리토피아 新人賞(수필), 2003年 文藝振興院 選定 優秀文學사이트(日本文學趣味)

    曆書 : 기러기(모리 오가이, 리토피아)


    옹攝氏는 지난해 國家로부터 아버지 유상규 先生을 國立墓地로 移葬할 수 있다는 許諾을 받았다. 建國訓長을 받은 愛國志士가 國立墓地에 묻히는 것은 當然한 일. 空軍 將星 出身인 옹攝氏도 國立墓地에 갈 資格이 있다. 富者가 國立墓地에 나란히 묻힐 수 있는 機會가 온 것이다. 富者가 함께 묻히니 좋고, 나라의 管理를 받게 되니 後孫들도 여러모로 便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父親의 墓를 當分間 망우리公園에 그대로 두기로 했다. 國立墓地로 가게 되면 自身과 後孫들은 좋지만, 精神的 父子 사이였던 倒産과 太虛는 永遠히 헤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自身과 後孫의 希望이나 便宜보다는 倒産에 對한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다. 비록 後孫들이 유상규 先生의 墓를 國立墓地로 移管해도 뭐라 할 순 없지만, 島山의 遺言을 알게 된 以上 倒産과 太虛의 넋까지 갈라놓을 수는 없는 일. 산 사람의 所願도 들어주는데 죽은 사람의 所願조차 無視하는 世態가 안타까울 뿐이다.



    댓글 0
    닫기

    매거진東亞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推薦記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