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建國 以後 첫 女性 大法官 된 김영란 判事|新東亞

建國 以後 첫 女性 大法官 된 김영란 判事

“法院·家庭, 兩쪽 模範生 하느라 눈물 숱하게 떨궜어요”

  • 글: 황호택 동아일보 論說委員 hthwang@donga.com

    入力 2004-09-22 17: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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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絶對 孝婦 아니다, 주어진 條件에서 견딘 것뿐
    • 死刑制度 廢止는 當然, 終身刑으로도 ‘社會 防衛’ 可能
    • 國家保安法에 象徵性 附與하는 건 政黨間 對立과 理解의 問題
    • ‘政策法院’ 機能은 市民團體 要求 아닌 時代的 要求
    • 能力 없어 물 먹은 게 아니라 自己 하고 싶은 일 하는 男便이 좋다
    건국 이후 첫 여성 대법관 된 김영란 판사
    從來의 흐름대로라면 大法官은 司法試驗 12回(1970年 合格) 前後에서 나왔어야 한다. 金英蘭(金英蘭·48) 大法官은 1978年에 合格한 司法試驗 20回 出身이다. 無慮 8年 先輩들을 건너뛴 破格 人事였다. 그러나 大法院 속事情에 精通한 사람들은 “金 判事는 時期가 問題였지 반드시 大法官이 될 사람이었다”고 評했다.

    최종영 大法院長은 女性 法官 中에서 大法官이 나올 때가 됐다는 確固한 所信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建國 以後 첫 女性 大法官을 提請한 大法院長이라는 記錄을 남기려는 欲心이었을까. 그는 지난해 8月에도 憲法裁判所 裁判官으로 女性인 전효숙氏를 指名했다.

    外部에는 公開하지 않은 事項이지만, 崔 大法院長은 大法官 提請諮問委員會에 李榮愛 전수안 金英蘭氏 3名을 올렸다. 모두 女性 法官이다. 提請諮問位는 法曹界와 市民團體, 個人의 推薦을 더 받아 그中 金英蘭 전수안 박시환 이홍훈氏 4名을 골라냈다. 崔 大法院長은 이中에서 金英蘭氏를 盧武鉉 大統領에게 單獨 提請했다.

    國會에서 認准案이 壓倒的 多數(贊成 208票)의 贊成으로 通過된 날 男便인 강지원(55) 辯護士에게 電話를 걸었다. 마침 金 大法官과 함께 있다고 했다. 金 大法官이 “大法院에 나가지 않는 土曜日에 집에서 인터뷰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午前 9時에 瑕疵”고 提議하자 “집안이 너무 어질러져 있어 神經 쓰이는데…” 하면서도 同意했다.

    實例를 무릅쓰고 土曜日 아침 분당 新都市에 있는 金 大法官 집을 찾아갔다. 姜 辯護士는 없었다. 그는 每日 아침 KBS 1라디오에서 ‘安寧하십니까, 강지원입니다’라는 時事프로그램을 1年 넘게 進行하고 있다.



    최종영 大法院長이 單獨 提請

    判事들은 大法院 裁判硏究官을 하다 地方法院 部長判事로 昇進해간다. 裁判硏究官은 大部分 判事들이 經歷에서 지워버리고 싶어할 程度로 고달프다는 자리다. 金 大法官은 2年 任期의 大法院 裁判硏究官을 5年이나 했다. 이때 쌓은 實力과 誠實性은 大法官이 되는 데 밑받침이 됐다. 金 大法官이 裁判硏究官을 할 때 최종영 大法院長은 大法官과 法院行政處長을 번갈아 하고 있었다.

    -崔 大法院長이 大法官을 할 때 金 大法官이 裁判硏究官 時節에 올린 檢討報告書를 읽어볼 機會가 자주 있었겠군요.

    “靑瓦臺에서 任命狀을 받고 뵈었더니 말씀하시더라고요. 내가 썼던 檢討報告書 中에 只今도 기억나는 게 있다고.”

    -그때 實力을 인정받은 거로군요.

    “우리가 裁判硏究官으로 갈 때는 다 實力 있는 사람들로 뽑아간다고 했죠. 同期들이 地方法院 部長判事로 昇進해 갈 때도 나를 안 내보내고 2年間 더 硏究官 일을 시켰죠. 내가 同期들보다 1年 먼저 갔고 2年은 同期들하고 같이 있었고 2年은 同期들 떠난 後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5年이죠. 動機인 김수형氏(서울高法 部長判事)와 내가 最長記錄을 세웠는데 그 記錄이 아직 안 깨지고 있어요.”

    裁判硏究官에는 大法官에 專屬된 硏究官이 있고 共同 硏究官이 있는데 金 大法官은 共同 硏究官이었다. 共同 硏究官에게는 새로운 判例를 만드는 어려운 課題가 配當된다.

    -강병섭 前 서울中央地法院長은 法院을 떠나면서 司法府가 바깥바람에 흔들린다는 要旨의 發言을 했는데요.

    “大法院長이 時期的으로 女性 憲裁裁判官이나 女性 大法官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 지 오래라고 해요. 나도 新聞만 봐서 잘 모르겠지만 (강병섭 院長이) 무얼 抗議하는 것인지…. 人事聽聞會에서 逆差別이 아니냐고 質問하는 議員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提請過程에 市民團體의 입김이 作用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金 大法官은 大法官 提請候補가 發表된 後 辭表를 낸 李榮愛 前 春川地方法院腸(司試 13回)에 關한 言及은 避했다. 金 大法官의 경기여고 서울法大 先輩인 이영애氏는 전효숙 憲裁 裁判官 任命 때도 비켜갔으니 人事權者의 마음 밖에 있었다고 解釋해야 할 것 같다.

    -國會 人事聽聞會에서 가장 對答하기 難堪했던 質問은 어떤 거였습니까.

    “國家保安法, 親日眞相糾明法처럼 與野가 尖銳하게 對立하는 懸案에 關한 質問이었습니다. 判事가 분명한 意見을 公開하면 裁判에 어려움이 생깁니다. 判決의 說得力도 떨어집니다. 與黨 쪽에 가까운 答辯을 하면 政治的 中立性이 毁損돼 野黨 쪽에서는 내 判決을 信賴할 수 없다고 하겠죠.”

    -任命狀을 받은 直後 記者會見에서 “男便은 先入見에서 자유로운 사람이지만 媤父母 浮揚 等 어려운 部分이 있었다”고 말했는데요. 正確하게 무슨 意味입니까.

    “結婚 初에는 이 사람도 ‘男子는 이래야 된다’ ‘女子는 이래야 된다’는 固定觀念을 갖고 있더라고요.”

    金 大法官은 男便을 ‘이 사람’이라고 呼稱했다. 女性들이 다른 사람 앞에서 男便을 부르는 말은 ‘애 아빠’ ‘男便’ ‘우리 그이’ ‘新郞’ ‘自己’ 等으로 다양하다. ‘이 사람’이라는 呼稱을 쓰는 아내는 드문 便이다.

    “우리 社會에서는 아들과 딸을 키우는 方法이 다릅니다. 그런 敎育을 받고 자란 사람이 先入見에서 자유롭기는 어렵죠. 그런데 自己가 잘못됐다고 생각하니까 고치더라고요. 많이 달라졌어요. 옛날 黃 委員께서 보셨을 때 하고 只今은 달라지지 않았나요.

    옛날에 女子는 男子의 世界觀 속에 들어가 사는 거라는 固定觀念이 있었지요. 姜 辯護士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죠. 나는 男子가 그런 固定觀念을 갖고 있다는 것조차 잘 모르고 結婚했죠. 男便은 아니다 싶으니까 스스로 變하더라고요.

    며느리로서 媤父母 모시기가 힘들었어요. 그 過程에서 大家族 制度와 老人 問題도 생각하게 됐고 새로운 形態의 家族關係로 생각을 擴大해나갔죠.

    媤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男便이 ‘우리는 父母 모시는 노하우가 있지 않느냐’며 自己 父母를 모셨으니까 妻家 父母도 모시자고 하더군요. 親庭어머니도 健康이 안 좋거든요. 그 얘기를 親庭食口들한테 했더니 참 고마워하데요.”

    -男子들은 便하게 말하는 傾向이 있어요. 自己가 直接 수발을 들지 않으니까.

    “媤아버님이 癡呆를 6年 가까이 앓으셨거든요. 씻고 닦아드리는 일을 女子들은 힘에 부쳐 못하잖아요. 媤아버님이 옛날 분치고는 키가 크셨어요. 보성전문 籠球選手를 하셨대요. 男便보다 크셨어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많이 했죠.”

    應接室 壁에 2001年에 찍은 姜 辯護士의 어머니 이효임 女史의 未遂(米壽·88歲) 잔치 寫眞이 걸려 있다. 李 女史는 올 3月에 91歲로 世上을 떴다. 人生의 마지막 旅路(旅路)에서 2年 半 假量 자리保全을 했다.

    “넘어지셨다가 다친 뒤로 骨多孔症이 겹쳐 누워지내셨죠. 媤누이 집이 옆이거든요. 다치기 前에는 媤누이 집까지 걸어가셨는데…. 가끔 媤누이 집 가다가 길을 잃었지만 이 洞네에서는 어머님을 다 아니까 괜찮았어요. 分讓받아 10年 넘게 살고 있거든요.”

    -媤아버님이 癡呆를 앓으실 때는 어땠나요.

    “癡呆라는 病을 몰라 아버님이 처음에 異常한 行動을 하시는데 내가 ‘大體 아버님 왜 그러세요’ 하며 火도 내고 그랬어요. 안 그러던 분이 異常한 行動을 하셔서. 그 病을 잘 알았더라면 初期부터 對應을 잘했을 텐데…. 罪悚한 마음이 들어요. 媤父母를 모시다 보니 老人 問題를 많이 생각하게 됐어요. 老人도 아이와 똑같거든요. 保護해줘야 하고 外出할 때 모시고 나가야 되죠.”

    “點數 따지면 男便은 나보다 나은 사람”

    最近 美國 컬럼비아대 內科醫師 兼 醫學士(醫學史) 敎授인 바론 러너가 로널드 레이건 前 大統領의 死亡을 契機로 뉴욕타임스에 ‘긴 作別을 위한 計劃’이라는 칼럼을 寄稿했다. 낸시 레이건은 男便이 알츠하이머病에 걸린 後 줄기細胞 硏究를 支持하는 活動을 했다. 러너 敎授는 낸시가 한걸음 더 나아가 男便의 病이 進行된 過程과 家族들의 對應을 公開했어야 한다고 썼다. 그래야 같은 病을 앓는 患者와 家族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老人들이 癡呆에 걸리거나 擧動이 힘들어지면 西歐에서는 大槪 療養施設에 들어가잖아요. 우리나라에서는 父母가 그런 施設에 들어가면 子息들 體面이 깎인다는 社會的 認識이 있는데요.

    “아직 우리 父母님 世代는 施設에 들어갈 마음의 準備가 안 돼 있어요. 모셔보니까 家族의 사랑이 必要해요. 癡呆患者일수록 어린애하고 똑같아지니까요. 어린애가 엄마 찾고 엄마 등에 매달리듯이. 家族만이 그 兩班들을 幸福하게 해드릴 수 있더라고요. 그래서 딜레마예요.

    나는 마음의 準備를 하고 있죠. 우리 애들에게 내가 그렇게 되면 療養施設에 보내고 가끔 찾아온다고 約束하라고 했죠. 그랬더니 애들은 ‘엄마가 할머니 할아버지께 하는 거 봤으니까 우리가 모신다’고 말하지요. 父母 마음은 子息한테 짐을 주고 싶지 않은 거죠. 내가 해봤더니 家族의 사랑이 必要해요. 아기 같아져요. 내가 ‘왜 食事를 들지 않으시냐’고 조금 화내면 싫어하세요. 옆에서 노래 불러주면 좋아하시고요.

    어머니는 마지막 한 달 程度 거의 穀氣를 끊으셨어요. 다른 사람이 飮食을 먹여드리면 안 삼키고 다 뱉어내시는데 아들이 주면 잡수시더라고요. 그게 家族이 돌보는 것과 療養施設의 差異지요.”

    건국 이후 첫 여성 대법관 된 김영란 판사

    金英蘭 大法官은 女性인 自身을 大法官에 任命한 措置가 ‘大法院이 政策法院으로 가기 위한 意志의 表現’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마지막 段階엔 며느리도 못 알아보지 않던가요.

    “마지막에는 며느리와 孫子도 못 알아보셨어요. 그런데 當身 속으로 낳은 아들과 좋아하는 따님은 마지막까지도 느낌이 다른가 봐요. 人間이란 참 微妙해서 深層에 뭐가 있는지 우리는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사랑이 必要한데 나도 充分히 못 해드렸어요.”

    -江 辯護士가 외아들입니까.

    “4男3女 가운데 셋째아들입니다.”

    -셋째가 父母를 모셨군요.

    “큰아주버님이 外交官이라 外國에 主로 勤務하셨어요. 둘째아주버님도 建設會社에 勤務하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交通事故로 돌아가셨거든요. 막내아주버니도 外國에 있었죠. 우리밖에 없어서 結婚할 때부터 모시고 살았죠. 가끔 兄弟들이 들어왔다 나갔다 해도 다른 사람한테 맡기지 못하는 性格이에요. 나도 直接 하는 게 便해요. 性格이 自己 삶을 만드는 거예요.”

    -孝婦賞을 받아야겠어요.

    “絶對 안 받을 거예요. 宏壯히 힘들어하면서 모셨어요. 自進해서 한 일이 아니고 나한테 주어진 條件이니까 그냥 견뎌낸 거지, 絶對 孝婦 아닙니다. 내 性格이 주어진 條件이면 그냥 그 안에서 어떻게 解決해봐야지, 박차고 나와서 뒤집어엎는 건 못 해요.”

    -‘模範生 콤플렉스가 있어서 職場과 家庭에서 다 잘하려고 하는데 男便이 認定하지 않을 때는 全力을 다해서 싸웠다’는 이야기를 인터뷰에서 읽었어요. 模範生 콤플렉스라기보다는 模範生 강박증이라는 表現이 더 正確할 거 같네요.

    “남한테 야단맞는 것이 싫어 每事에 잘하려고 하지요. 自己檢閱이 剛한 거죠. 그게 참 괴롭더라고요. 나는 最善을 다해 잘하려고 하는데 男便이 信賴를 안 보내줄 때 싸웠죠. 男便은 自己 基準에서 보는 거죠. 男便이 願하는 사람으로 變하는 게 結婚은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내 자리 지키면서 내가 할 일만 最善을 다하면 된다고 생각했지요. 男便은 自己가 해달라는 것을 내가 안 해주고 固執을 부리면 처음엔 못 받아들이더라고요. 나중에는 自己도 抛棄했죠. 姜 辯護士도 靑少年 問題에 關心을 가지면서 제 子息도 父母 틀 안으로 들어오게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죠. 結果的으로 내가 이긴 거죠. 내가 더 固執이 센 건가요? 絶對 내가 그의 틀에 안 들어갔거든요.”

    -男性優越主義 敎育을 받고 자란 姜 辯護士가 女性과 社會에 對해 열린 態度를 갖게 된 것이 金 大法官의 影響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내가 獨自的인 人生觀, 世界觀, 라이프 스타일을 固執하니까 싫었겠죠. 그런데 이 사람 自體가 다른 사람의 것을 잘 받아들여요. 幅이 넓어요. 點數를 매기자면 나보다 나은 사람입니다.”

    “平生 웃겨주겠다”

    姜 辯護士가 서울地檢 刑事3部 檢査를 할 때 金 大法官은 옆房 檢事室에 時報로 勤務하고 있었다. 경기고와 서울대 政治學科 出身인 姜 辯護士는 行政考試에 合格해 關稅廳 公務院으로 釜山에서 勤務하다 다시 司法試驗을 치러 合格했다. 密輸 事件이 터졌을 때 部長檢査가 釜山稅關에 와서 搜査를 指揮하는 모습이 너무나 멋있어 보였단다. 18回 司法試驗에 首席合格한 姜 辯護士의 合格機가 ‘考試系’에 실렸다. 이 글을 金 大法官이 考試工夫할 때 읽었다. 7年 年上의 檢査가 純眞한 時報를 불러내 點心도 사주고 저녁도 사주며 ‘꼬셨다’(강 辯護士의 表現).

    -江 辯護士에게 ‘金 大法官을 만나면 어떤 質問을 할까요?’ 하고 물었더니 自己가 꼬실 때 印象이 어땠냐고 물어보라고 하더군요.

    “그게 궁금했나 보네. 사람을 잘 웃겼어요. 宏壯히 유머러스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自己가 平生 나를 웃겨주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結婚한 뒤 웃기는 일은 없고 하도 힘든 일만 생기길래 ‘平生 웃겨준다고 해놓고 約束을 어겼다’고 따졌어요. 웃기기는커녕 눈물만 떨구게 할 수 있냐고 한바탕 싸운 적이 있어요.”

    ‘왜 男子는 거짓말을 하고, 女子는 울까’의 共同 著者 앨런 피스와 바버라 피스는 ‘눈물은 아내들이 男便으로부터 뭔가 얻어내고 싶을 때 흔히 쓰는 情緖的인 恐喝脅迫(Emotional blackmail)이라고 定義한 바 있다. 女性들은 男便의 깊은 祕密, 脆弱點을 適切히 活用해 結局 恐喝에 屈服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눈물 떨굴 일이 자주 있었습니까.

    “父母님 모시고 애 둘을 키우는 데 判事 日까지 많잖아요. 褓따리 싸들고 와서 記錄 봐야죠. 判事 일을 男便이 도와줄 수 있나요. 만날 記錄을 싸들고 오는데 애들은 늦게 자요. 밤 12時에 재워놓고 그때부터 일 始作하죠. 집안에 뒤치다꺼리 할 것도 많고….”

    -職場女性이 媤父母 모시기가 普通 일은 아니죠.

    “媤父母 손님도 많이 오시고…. 祭祀 지내야죠. 도와줄 同壻들은 다 外國 나가 있죠. 秋夕 때 일 도와주는 아주머니도 집에 가고 혼자서 松편이란 걸 처음 빚었어요. 松편을 쪄놓고 나니 새벽 1時가 넘더라고요. 傷할까봐 松편을 시원한 데 내놓고는 밤새 잊어 그 다음날 아침에 茶禮 지내는데 床에 안 올렸어요. 얼마나 분한지 모르겠더라고요. 누구 잘못이라고 할 수도 없지요. 일이 많아서 그런 거니까. 親庭에서는 綠豆를 쪄서 속을 만들거든요. 나도 親庭에서 배운 대로 하느라고 綠豆를 쪘는데 돌을 일지 않아서 돌이 씹히는 거예요. 그래서 못 먹은 적도 있었죠. 失手가 많았어요.”

    강지원 金英蘭 夫婦는 嶺湖南 커플이다. 姜 辯護士는 아버지가 全南 莞島郡守로 있을 때 莞島에서 태어나 光州에서 初等學校에 다니다 上京했다. 金 大法官은 釜山에서 初等學校 6學年 1學期까지 다니다 公務員인 아버지가 서울로 轉勤 오는 바람에 서울로 올라왔다.

    -嶺湖南 커플로 살면서 逸話는 없습니까.

    “結婚할 때 兩쪽 집안에서 若干 말씀이 있었습니다. 風習이 다르니까 걱정했지요. 女子 立場에서 湖南 쪽 사람이 더 좋은 것도 있더라고요. 媤家 食口들이 모이면 시끌벅적해요. 재미있어요. 親庭食口들은 무덤덤하게 앉아 있어요. 別로 問題는 없어요. 같은 南쪽이니까 飮食 肝도 비슷하죠.”

    -人事聽聞會에서 刑事部 經歷이 2年밖에 안 된다고 트집을 잡았죠.

    “事實은 더 짧아요. 刑事裁判은 水原地法 抗訴部에서 6個月밖에 못 했어요. 그러나 내가 硏修院 敎授로 있을 때는 刑事法 講義를 했어요. 令狀擔當度 하고 卽決審判度 했습니다. 硏究官 時節에 刑事法 報告書도 썼습니다.”

    5共 때 刑事部 裁判을 했던 法官들은 時局事件으로 拘束된 學生들로부터 權力의 꼭두각시라는 批判을 들었다. 民主化를 要求하며 데모를 한 學生들에게 國家安全企劃部와 檢察이 定해준 대로 ‘正札制’ 判決이 내려질 때였다. 金 大法官은 이런 批判으로부터 자유로울까.

    “多幸히 6·29宣言 後에 刑事裁判을 했어요. 그러나 그런 問題에 對해서는 當時 判事로 있던 사람들이 다같이 苦惱해야 할 일이죠. 나는 안 맡았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判事는 어려운 法理 풀었을 때 보람”

    -死刑 判決을 내려본 적 있습니까.

    “刑事 抗訴部에서는 單獨事件만 다뤘습니다. 罪目이 詐欺 橫領 竊盜라서 死刑 때릴 일이 없었죠. 人事聽聞會에서 死刑을 窮極的으론 廢止해야 한다고 말한 게 그렇게 큰 反響을 일으킬지 몰랐어요.”

    -死刑制度를 없애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死刑은 社會를 防衛하기 爲한 制度입니다. 우리 刑事法은 應報刑(應報刑) 注意가 아닙니다. 예컨대 死刑 代身에 減刑이 안 되는 終身刑 制度를 導入할 수도 있겠죠. 完全히 隔離해서 社會防衛 目的을 達成할 수 있으면 되는 거지요. 왜 銃殺할 때 누구 銃에 맞아 죽는지 알 수 없게 여러 名이 쏘냔 말이죠. 判事들도 死刑宣告를 꺼리잖아요. 꺼림칙한 걸 파고들어가 社會防衛 目的에 忠實한지 따져보면 問題가 쉽게 풀리리라고 생각해요.”

    -20餘名을 連鎖殺人韓 유영철 같은 犯罪者를 死刑하지 않으면 어떻게 處罰해야 하죠?

    “徹底히 隔離하는 거죠. 그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그런 건지, 後天的으로 그렇게 된 건지는 모르지만 100% 그 사람 責任으로만 돌릴 수는 없어요. 社會構造的인 問題도 있고요. 그 사람한테 100% 責任지워서 死刑시켜버린다고 問題가 다 解決되는 것은 아니죠.

    死刑制度의 目的을 살펴봐야 합니다. 그러나 막상 裁判할 때 어떤 裁判部는 死刑을 容認하는데 나는 個人 信念에 따라 死刑 判決을 안 한다면 衡平性의 問題가 생기는 거죠.”

    -檢事 時報할 때 死刑執行을 參觀하지 않았나요.

    “只今은 死刑을 執行하지 않지만 김대중 政府 以前에는 間間이 했죠. 時報할 때 參觀할 機會가 있었지만 나는 안 갔어요. 그것도 목숨을 뺏는 건데 굳이 參觀하고 싶지 않더라고요. 剖檢(剖檢)은 지켜봤지만. 그때부터 只今까지 마음속으로 死刑執行이 果然 옳은가 하는 疑問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兩論(兩論)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죠. 내 意見일 뿐입니다.”

    -25年 法官生活에서 가장 보람을 느끼는 判決은 어떤 겁니까.

    “判事들은 어려운 法理를 풀어냈을 때 第一 보람을 느끼죠. 法曹 出入記者들이 재미있는 判決이라고 집어내는 거하고는 全혀 달라요.”

    -記者들은 아무래도 一般 國民의 關心을 불러일으킬 만한 素材를 찾죠.

    “法官이 無心코 한 判決을 興味있어 하더라고요. 내가 大法官으로 제청되기 直前에 宣告한 判決이 있습니다. 民法 損害賠償便에 보면 損害賠償을 해야 될 사람이 故意나 重過失이 아닐 境遇 損害賠償을 함으로써 生計維持가 어려울 때 減額(減額)해주는 條項이 있어요. 法官 職權으로는 못 하는데 被告가 減額 抗辯을 할 수 있죠. 實際 裁判에 適用된 케이스가 없더라고요. 被告가 여러 가지 生計가 어렵다는 主張을 하길래 그런저런 事由를 들어 半 程度 減額해줬죠. 大法院에 올라가 모델 케이스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上告를 안 하더라고요.”

    -人事聽聞會에서 戶主制를 廢止해야 한다는 見解를 밝히더군요. 戶主制가 우리 固有의 傳統이 아니고 日帝時代에 생긴 것이라죠.

    “여러 經路로 確認한 바에 依하면 只今의 戶主制는 日帝 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檮杌 김용옥 先生이 MBC에서 講義할 때 최한기 先生의 戶籍簿를 들고 나와서 說明한 적이 있어요. 최한기 先生의 胡適은 只今의 戶籍과는 다르더군요. 그 집에 사는 奴婢까지 다 記載돼 있어요. 우리나라 固有의 胡適은 稅金을 매기기 위한 目的이었다더군요. 只今처럼 家庭을 代表하는 抽象的인 濠洲가 아니었습니다. 只今의 戶主制는 女性의 權利를 侵害하는 象徵性만 있고 生活에서 實際的 意味는 없는 거죠.”

    “性(姓) 選擇의 自由는 좀 빠르다”

    -西洋女性이나 日本女性은 結婚하면 男便 姓을 따르잖아요. 子女들도 아버지 姓을 갖고요. 우리 女性은 結婚 前이나 後나 性이 그대로지만. 女權運動 하는 사람들 中에는 아버지 어머니 姓을 함께 따서 ‘김박’ ‘講誦’ 式으로 쓰는 사람들이 있어요. 弄談이지만 그런 式으로 3臺만 내려가면 性이 8者가 되게 생겼어요.

    “西歐나 日本에서는 性(姓) 選擇의 自由가 있어요. 母系 姓도 따를 수 있지만 大體로 父系 姓을 따르죠. 우리가 性 選擇의 自由를 주더라도 慣習上 거의 父系 姓을 따를 테니까 큰 混亂은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직 大多數 國民이 거기까지 說得이 안 돼 어려운 點이 있겠죠.”

    -金 大法官은 우리나라도 家族의 合意에 따라 어머니 姓을 따를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窮極的으로는 그렇게 갈 거 같아요. 全世界가 다 그렇게 하거든요. 戶主制 廢止 흐름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外國처럼 個人 戶籍簿를 두되 性 選擇의 自由는 나중에 論議하자는 흐름이 있습니다. 둘 다 한꺼번에 하자는 見解도 있고요. 나도 性 選擇의 自由까지 가는 건 좀 빠르다고 생각해요. 國民의 法感情을 無視할 수 없으니까.

    生物學的으로는 미토콘드리아에 있는 女性 DNA가 後孫으로 죽 連結되거든요. 이番에 수로왕國의 許氏들 미토콘드리아에 있는 DNA를 追跡하니까 海洋民族이라고 나왔잖아요.”

    미토콘드리아 DNA는 細胞質에만 存在해 細胞 核 DNA와 달리 卵子를 통해서만 遺傳된다. 유대人은 어머니가 유대人이어야 子女를 眞짜 유대人으로 認定한다. 數千年 동안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아 ‘어머니는 假짜가 있을 수 없지만 아버지는 假짜가 있을 수 있다’는 意識이 作用했을 것이다.

    “窮極的으로는 性 選擇의 自由까지 갈 거 같아요. 우리는 儒敎的 傳統이 많이 남아 있는 나라에 살기 때문에 國民의 法 感情을 說得하면서 가야지요.”

    -어머니 姓을 따를 수 있게 되면 男兒選好 思想도 깰 수 있지 않을까요. 딸이 낳은 子女도 親庭父母의 性을 물려받을 수 있다면 아들에 執着하는 社會 雰圍氣를 解消하는 데 도움이 될 거 같아요.

    “나도 딸만 둘입니다. 요즈음 딸 하나 둘로 그만두고 더 안 낳는 사람 많잖아요. 그런 사람들은 ‘性 選擇의 自由가 주어지면 孫子 孫女가 내 姓을 물려받을 수 있겠네’하고 좋아하더라고요.”

    聽聞會에서 나왔던 質問은 新聞에 報道됐기 때문에 重複을 避했다. 다만 國家保安法은 重要한 問題이고 人事聽聞會 以後 새로운 狀況이 發生한 터다. 國家人權委員會, 憲法裁判所, 大法院, 大統領의 見解가 各其 다르다.

    “刑法을 改正하면 된다고 主張하는 사람도 있고, 國家保安法을 改正하자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國家保安法을 代替立法하자는 意見도 있어요.

    나는 國家保安을 위해 處罰해야 하는 類型이 무엇인지부터 따져보고 接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國家保安을 위해 處罰해야 할 類型을 定하고 나면 刑法에 집어넣든지, 國家保安法을 改正하든지, 다른 特別法을 만들든지, 立法 技術上의 問題거든요. 이것이 純粹한 法律家로서 나의 立場이죠.

    刑法으로 處罰하든, 國家保安法으로 處罰하든 判事에게는 意味가 같아요. 國家保安法 自體에 象徵性을 附與하는 것은 政黨間 對立과 理解 問題라고 생각해요. 憲裁에서도 違憲이 아니라고 判斷한 것이지 이를 改正할 거냐, 代替할 거냐, 廢止할 거냐를 判斷한 것은 아니거든요. 우리 社會가 바뀌면 改正할 수 있는 거잖아요. 每事에 너무 對立하지 말고 說得의 政治를 摸索할 만큼 成熟한 社會가 됐다고 생각해요.”

    大統領(任期 5年)과 大法院長(6年)의 任期가 一致하지 않아 大統領은 前任 大統領이 임명한 大法院長과 함께 任期 初盤을 보내는 構造다. 최종영 大法院長의 任期는 來年 9月까지다. 來年에는 大法官 提請權을 가진 大法院長을 비롯해 변재승 유지담 윤재식 이용우 배기원 大法官이 退任한다. 司法府의 構成이 只今과는 크게 달라진다.

    -大法官이 되고 싶은 法官들이 任命權者인 大統領과 總選에서 多數黨이 된 열린우리당을 意識해 進步的인 判決을 한다는 憂慮가 保守 쪽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大法官 提請諮問위에 市民團體 代表가 들어가는 것에 對해서도 여러 意見이 있는데요.

    “大法院은 두 가지 役割을 합니다. 只今은 事件 處理에 바쁘지만 政策法院에 對한 期待가 큰 것 같아요. 政策法院 役割을 하려면 只今처럼 호모지니어스(Homogeneous·同質의)한 構成員으로는 어렵다는 視角이 있어요. 女性인 나를 임명한 것도 政策法院으로 가겠다는 意志의 所産이라고 생각합니다.

    政策法院으로 가자면 이른바 進步的 人士로만 構成하거나 只今처럼 커리어 시스템(Career system)의 頂點에 있는 사람들로만 構成해서는 안 되죠. 다양한 社會現象을 反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市民團體의 要求가 아니라 時代的 要求입니다. 法은 元來 保守的이어야 하잖아요. 只今보다 많이 變化하겠지만 法의 本質을 떠나 市民團體 입김에 左右되는 構成은 안 하겠죠. 그 程度로 大法院이 糧食이 없지는 않아요.”

    -이흥복 新任 서울中央地法員長이 就任辭에서 ‘司法府의 獨立과 權威를 毁損하는 勢力과 橫暴로부터 여러분을 保護하겠다’고 했는데요. 兩 側面이 있을 거 같아요. 司法府가 國民輿論과 동떨어져 存在할 수도 없고, 時流와 輿論에 迎合하는 것도 곤란하고….

    “그렇죠. 그 분은 나름대로 念慮를 表現한 거죠. 아까 말했듯이 來年 來後年 大法院 構成이 달라지니까 나름대로 司法府를 아끼는 忠情에서 ‘그래서는 안 된다’는 意思 表示를 한 거라고 생각해요. 나도 같은 생각이에요.”

    陪審制는 重要 事件에만 限定해야

    -美國映畫에는 陪審員 裁判을 素材로 한 興味津津한 映畫가 많잖아요. 시카고에서 惡名 높던 갱 알 카포네 裁判 때는 陪審員들이 組織員들로부터 脅迫을 받은 幾微가 보이니까 判事가 옆 法廷의 陪審員들과 卽刻 바꿔버리더군요. 알 카포네 前期에도 나와요. 司法改革委員會가 陪審裁判 導入을 檢討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美國에서도 陪審裁判은 全體 事件의 10%밖에 안 돼요. 그러나 國民을 司法에 참여시키는 象徵的 意味가 있을 것 같아요. 實際로 費用이 많이 들고 번거롭고 生業에 支障을 주니까 美國도 正말 重要한 裁判이 아니면 陪審裁判을 안 하는가 봐요. 辯護士들과 함께 陪審員을 選定하는 사람, 陪審員의 心理를 읽는 사람까지 있어요. 陪審員 選定을 專門으로 하는 女性 컨설턴트가 쓴 冊이 最近 飜譯돼 나왔더군요.”

    陪審員 選定 컨설턴트 兆-엘란 디미트리우스의 ‘사람 읽기(Reading people)’는 美國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다. 著者는 로스앤젤레스 黑人暴動의 發端이 됐던 로드니 킹 毆打 事件의 警察官들, 아내를 죽인 嫌疑를 받은 美式 蹴球選手 O J 심슨의 陪審員 選定에 參與해 被告人의 無罪評決을 끌어내는 데 寄與했다. 사람의 特徵, 옷차림, 말과 行動을 통해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생각을 把握하는 技法에 關한 冊이라 할 수 있다. 筆者도 인터뷰 技法 開發에 도움이 될 것 같아 熟讀했다.

    “陪審員 裁判에는 正말 공정한 裁判을 할 수 있는 사람을 選定하느냐, 나한테 유리하게 해줄 사람을 選定하느냐 하는 問題가 있죠. 모든 裁判을 다 陪審制로 하는 것은 浪費고요. 社會的으로 重要한 事件에 限定하는 게 좋아요. 國民에게 法治主義 敎育을 시키는 意味도 있죠. 判事들도 節次를 더 신중하게 進行할 테고…. 制度가 있다는 것 自體는 좋을 것 같아요. 司法改革委員會에서도 肯定的으로 導入을 檢討하는 거 같아요. 違憲 問題가 남아 있긴 해요. 憲法에 法官 資格을 갖춘 사람이 裁判을 할 수 있도록 돼 있거든요.”

    -陪審制가 有錢無罪(有錢無罪)의 傾向을 强化할 可能性도 있죠.

    “美國에서도 陪審裁判을 反對하는 專門家들이 있죠. 多數 意見은 그래도 있는 게 낫다는 거예요. 象徵的인 面이 있는 거 같아요. 있는 것하고, 없는 것하고는 差異가 있어요.”

    -住民 意思에 依한 判決은 移民者들로 構成된 美國社會의 特殊性에서 비롯된 制度라고 할 수 있겠죠.

    “英國에도 있던 制度이지만 美國에서 發達한 理由는 西部 開拓使와 關係가 있대요. 裁判할 사람이 없으니까 洞네 住民들이 陪審員으로 參與해 裁判하는 거죠. 美國이 聯邦의 領土를 넓히는 過程에서 發達한 거죠. 抑鬱한 王따 犧牲者도 많았답니다. 美國 東部의 魔女裁判은 有名하잖아요.”

    건국 이후 첫 여성 대법관 된 김영란 판사

    嶺湖南 커플인 金英蘭 大法官과 강지원 辯護士.

    金 大法官은 강금실 前 法務部長官, 조배숙 議員(열린우리당)과 경기여고 서울법대 同期同窓이다. 서울法大에 女學生이 적을 때라 경기여고 3총사는 늘 붙어다녔다. 司法試驗은 金 大法官이 法大 4學年 때인 1978年 가장 먼저 合格했고 조 議員은 1981年, 姜 前 長官은 1982年에 合格했다.

    -江 前 長官이 率直한 言行과 華奢한 패션으로 人氣를 끌었는데 갑자기 落馬했어요. 最近에 만나봤습니까.

    “네, 大法官 된 것을 祝賀해준다고 해서 만났죠.”

    -長官 물러난 것에 對해 本人은 뭐라던가요. 市中에 루머가 많아서….

    “本人도 正確한 理由는 잘 모르던데요. 湖南 出身 國防部 長官을 交替하면서 湖南쪽을 配慮하려다 보니 그만한 比重을 가진 法務部 長官을 湖南에 주려고 바꾼 걸로 理解하고 있던데요. 本人은 큰 懸案 없이 辭退하게 돼 너무 즐겁다고 했어요.”

    -檢察을 掌握하지 못하고, 檢察改革과 關聯해 大統領의 意中보다는 檢察便에 섰던 것이 更迭 理由가 됐다는 視角도 있어요.

    “檢察 掌握은 時代錯誤的인 말이죠. 강금실을 長官 시킨 것은 檢察을 掌握하라고 한 게 아니잖아요. 제대로 된 檢察을 만들려고 보낸 거지. 檢察內에서도 中間層 以下에서는 아주 좋아하더라고요. 檢察이 달라질 수 있었는데 아쉬움이 남아요.”

    -韓國의 保守的인 價値觀에서 나온 말이라 女權論者들이 들으면 火내겠지만 아무튼 ‘女子가 너무 똑똑하면 八字가 세다’는 말을 옛날 어른들이 했잖아요. 이 時代에는 안 맞는 얘기죠. 어찌됐건 두 同期生은 順坦한 家庭生活을 못 했는데 金 大法官은 媤父母까지 모시고 無難하게 산 것 같아요.

    “나도 順坦치만은 않았던 거죠. 弄談이지만 男便이 벌어다주는 돈 잘 쓰고 運動해 몸짱度 되고, 애들 敎育도 잘 시키는 걸 最高로 치는 認識은 如前히 남아 있어요. 내가 出世했는지는 모르지만 애들 敎育이며 여러 가지가 競爭力이 없어서 親舊들이 別로 부러워하지 않아요.”

    金 大法官은 두 딸을 모두 代案學校(人性 特性化 學校)에 보냈다. 큰딸 민형(21)은 全南 潭陽 한빛高等學校를 卒業하고 美國에 留學中이다. 막내딸 線形(17)은 분당의 都市型 代案學校인 이우학교에 다닌다. 아버지 姜 辯護士가 共同設立者다. 線型은 여름放學 동안에도 入試工夫는 안 하고 映畫를 찍으러 다니고 어머니 改良韓服을 만드느라 바빴다.

    姜 辯護士에게 이 인터뷰 며칠 前에 “왜 아이들을 모두 代案學校에 보냈느냐”고 묻자 “金 判事한테 물어봐요”라고 했다가 簡單히 說明했다.

    “우리 夫婦가 典型的인 엘리트 敎育을 받은 사람입니다. 아이들은 자유로운 學校에 보내서 個性을 살려주고 싶었습니다.”

    雰圍氣로 보건대 子女를 代案學校에 보낸 데는 金 大法官의 發言權이 더 셌던 것 같다.

    “人事聽聞會 委員들이 돈 많이 드는 貴族學校에 子女를 보냈다고 생각하던데 全혀 그게 아니고요. 그야말로 大學入試를 抛棄하고 애를 實驗的인 敎育으로 내몬 거죠. 나쁘게 말하면 못할 짓을 한 엄마예요. 社會 雰圍氣가 劃一的인 敎育을 强要하잖아요. 大學만 좋은 데 가면 되니까 中高校 時節은 擔保로 잡히죠. 애들한테 靑少年 時節을 돌려주고 싶더라고요. 苦悶하면서 正말 自己 길을 찾고, 슬퍼하고 즐거워하고, 이런 걸 다 겪어보게 하고 싶었습니다. 時間이 많이 걸리겠죠. 엄마가 쇼트 커트(short cut·지름길)로 가는 要領을 가르쳐줄 수도 있지요. 그러나 時間이 많이 걸리고, 스스로 苦生도 하고, 엄마가 나를 왜 이런 學校에 보냈나 하고 怨望할 수도 있지만, 그게 成長過程이라고 생각합니다. 全혀 後悔하지 않습니다. 애들이 옷도 만들고 農事도 짓고 사는 거죠. 勿論 工夫도 하지만.

    애들 學校 祝祭에 가보면 入試 때문에 壓迫받지 않고 몇 달 前부터 苦悶해 아이디어를 내 演劇도 하고, 詩도 쓰고, 背景音樂 錄音하고, 別짓 다해서 참 재미있게 해요.”

    -大學入試는 完全히 抛棄한 겁니까.

    “스스로 가고 싶으면 가겠죠. 갈 能力 있으면 가는 거죠. 다양한 社會에서 다양한 實驗을 하는 애들도 必要하잖아요. 失敗할 確率이 높죠. 쇼트 커트는 아니지만 거기서 人生을 배우는 거죠. 異常하게 애 아빠하고 나하고 그 點에서는 全幅的으로 意見이 같아요.”

    -두 분이 이른바 ‘KS’ 出身이고 司法考試에 合格, 우리 社會의 最高 엘리트 코스를 順坦하게 달려오다 보니 普通 사람들이 羨望하는 社會的 出世를 좀 시시하게 생각하는 傾向이 있는 건 아닐까요.

    “그게 아니죠. 無視하는 게 아니라 方向을 좀 달리 잡은 거죠. 出世나 名譽 같은 것보다 더 重要한 게 있는 거죠. 애들이 뭘 하고 살든 幸福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게 學習이 안 되면 經驗이 안 되는 거예요. 試驗에 合格하고 出世해야 幸福한 건가요. 밖에다 基準을 두니까 欲望이 限이 없어요. 그러면 幸福을 느낄 수 없어요.

    나도 그렇게 살았거든요. 恒常 不足해요. 그 다음 目標가 또 생기죠. 그래서 우리 애들은 成就追求的인 삶에서 벗어나 正말 幸福한 삶을 살게 해주고 싶었어요.”

    姜 辯護士도 檢査場을 거쳐 檢察 高位層으로 出世하는 코스를 스스로 마다하고 檢察에서 흔히 ‘물 먹는 자리’라고 하는 서울高等檢察廳 勤務를 自願해 靑少年 業務를 했다. 그러다 2002年 檢察을 떠나 後輩들과 法律事務所 ‘청지’를 設立해 代表로 있다.

    -江 辯護士는 行政 司法考試 量課에 合格했고 檢査를 志望했습니다. 그런 面에서 젊은 時節에는 出世志向的인 性向이 남보다 强했다고 보이는데….

    “건방진 얘기지만 能力이 없어서 물 먹은 게 아니라, 自己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잖아요. 나는 그게 재미있고 좋더라고요. 아주 創意的인 사람이거든요. 내가 到底히 따라갈 수 없는 部分이죠. 創意的인 사람은 創意的인 걸 하게 해야 能力發揮를 하거든요. 定해진 答이 있는 길을 가면 오히려 能力發揮를 못할 거 같더라고요. 正말로 能力發揮를 하면 우리 社會에 寄與하는 바가 훨씬 더 크잖아요. 남들 다 하는 檢察 엘리트 코스로 가지 않으니까 오히려 더 期待되더라고요.

    우리 애들도 定해진 코스로 안 보내니까 애가 어떻게 될지 궁금하고 재미있어요. 우스운 얘기지만 서울對 法大 1學年生 200餘名을 모아놓고 ‘法律文章론’을 講義하면서 ‘너희들은 父母의 想像力 缺乏으로 이 자리에 온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애가 뭘 할지 斟酌할 수 없는 狀態가 주는 즐거움이 있어요. 그게 社會에 寄與하는 바가 클 거라 생각해요.”

    -江 辯護士가 檢察에서 出世하는 코스를 버리고 ‘샛길’로 빠지려는, 人生觀의 轉換이 언제 온 겁니까.

    “自己도 過去에는 出世志向的이었다고 말해요. 保護觀察所藏하고 靑少年保護委員長 하면서 變한 거 같아요. 그때까지만 해도 別로 못 느꼈거든요. 靑少年들을 만나보면서 自己가 옛날에 出世하기 위해 抛棄했던 일들을 생각하게 된 거죠. 靑少年 時節에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려고 하는 거 같아요.”

    大學時節 꿈은 文學도

    -江 辯護士가 新聞에 쓴 글은 몇 番 봤습니다. 職業的인 글쟁이보다 오히려 잘 써요.

    “이 사람의 靑少年 時節 꿈이 新聞社 論說委員이었대요. 黃 委員처럼.”

    新聞社 論說委員 안 한 건 잘한 일이다. 何如튼 姜 辯護士는 單調로운 搜査, 起訴 業務를 하기엔 너무 재주가 많은 것 같다. 姜 辯護士는 最近 靑少年 音樂會에서 舞臺에 올라 이탈리아 歌曲 ‘불꺼진 窓’을 불렀다.

    “姜 辯護士가 高等學校 때 서울대 師大 白日場에서 장원한 글도 있어요. 글이 씩씩하더라고요. 나는 文學的인 글을 썼는데 이 사람은 志士的인 글을 썼더라고요.”

    -인터뷰 記事에서 읽었는데 高校와 大學時節의 꿈이 法官이 아니라 文學徒였다면서요. 家族의 勸誘로 法大를 擇했지만 文學을 繼續하겠다고 우기지 못한 게 후회스럽다고 했더군요.

    “나도 高等學校 때 白日場에서 壯元을 했거든요. 글 쓰는 뭔가를 할 거라는 漠然한 생각을 했던 거죠.”

    -判決文도 글쓰기 아닌가요.

    “判事도 글 쓰는 職業이죠. 나도 그렇게 말합니다. 다만 글 內容이 다르죠. 判事도 文章力이 좋은 사람이 하기가 수월해요.

    경기여고 때 成績이 좋았어요. 경기여고 先輩들 中에 서울대 社會系列에 들어간 사람이 딱 한 名 있었어요. 校長先生님이 올해는 꼭 社會系列 合格者를 내야겠다는 생각이 있으셨죠. 나는 人文系列로 가고 싶었는데 校長先生님과 아버지께서 成績이 아까우니까 그쪽으로 가보라고 했어요. 父母님 말씀을 拒逆 못해 一旦 社會系列로 갔어요. 나중에 社會科學大와 法大 中에서 選擇할 때도 葛藤이 있었어요. 나는 社會學을 하고 싶었죠.

    또 그냥 떠밀려서 法大에 갔거든요. 한동안 法律에 趣味가 안 붙었어요. 너무 하기가 싫은 거예요. 그러나 反省하고 2學年 겨울放學 때 民法 刑法 憲法 三科를 日獨하고 司法試驗을 한番 보자 한 것이 그만 合格이 된 거예요. 내가 철없이 이런 말을 하고 다니다 工夫 熱心히 해서 늦게 붙은 사람들을 約 오르게 했어요. 1次 붙은 게 아까워 3學年 겨울放學 때 2次를 工夫하기 始作했어요. 넉 달 工夫하고 4月에 合格했죠. 떨어지면 새로운 進路를 생각해볼 決心이었는데 合格했어요. 아슬아슬하게 붙었어요.”

    -天才네요.

    “短期 集中力이 있는 것 같아요. 天才는 아니고.”

    -所謂 成功한 사람들을 인터뷰하며 느낀 건데 좋아하는 걸 職業으로 選擇해야 成功할 確率이 높아요. 그런데 金 大法官은 싫어하는 걸 하면서도 成功할 수 있음을 보여준 事例 같아요.

    “재미없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온 건 事實이지만 내가 論理的으로 思考하는 素質은 있는 것 같아요. 哲學冊 읽기를 좋아합니다. 數學을 잘했어요. 어려운 問題를 論理的으로 풀어냈을 때 成就感이 큽니다. 내가 자꾸 ‘재미없다’면서도 잘 適應한 것은 나한테 法律的인 思考를 하는 素養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適性檢査를 해보면 數學者 哲學者 科學者로 나왔어요.”

    -文學을 했으면 失敗했을지도 모르죠.

    “只今 와서 생각하면 그래요. 趣味로는 좋은 冊 많이 읽곤 하지만. 男便이 만날 놀리는 게 인풋(input)은 많은데 아웃풋(output)은 안 된다고 해요. 男便이 골치 아픈 哲學冊 뭐하러 읽냐고 놀리는데 아웃풋하려면 안 읽어요. 그러자면 머리가 아프죠. 冊 自體의 論理的인 흐름에 푹 빠져요. 小說도 그 冊의 構成에 빠지고, 哲學冊도 論理를 展開해가는 過程을 즐기죠. 그러한 素質이 있기 때문에 단조로운 法官 生活을 견딘 것 같습니다.”

    -判決文 쓰기는 재미없지 않습니까.

    “率直히 재미는 없어요. 그렇지만 亂麻같이 얽혀 있는 事件을 解決하는 快感이 있어요. 내가 高等法院 部長判事를 하면서 陪席判事들이 가져온 結論을 檢討하다 보면 理論은 맞는데 뭔가 不公正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죠. 그러며 記錄을 가져오라고 해서 내가 다시 보거든요. 뭔가 合理的인 結論을 찾아낼 수 있는 論理를 開發해줘요. 그럴 때마다 너무 기뻐요. 나한테 그런 素質이 있나 봐요. 硏究官도 아마 그래서 오래 한 거 같습니다.”

    -文學徒였으니까 習作이 있겠군요.

    “短篇小說 두 篇이 校誌에 실린 적이 있습니다. 只今 보면 형편없겠죠. 保管하고 있지 않아요.”

    金 大法官이 大學 1學年 때 쓴 短篇小說이 ‘서울大’라는 校誌(校誌)에 실렸다. 司法試驗 合格韓 뒤에는 서울法大에서 發行하는 ‘피데스(Fides)’라는 校誌에 大學 1學年 때 썼던 小說이 실렸다. 金 大法官은 “누군가 찾아 읽어보면 우스울 것”이라며 밝히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서울大’에 실린 小說을 보고 國文科 전광용 敎授님이 부르시더라고요. 우리 戰後文學을 代表하는 小說家로 ‘꺼삐딴 리’ 같은 作品을 남기셨죠. 前 敎授님이 小說을 써보라고 그러셨어요. 내가 아마 小說을 썼다면 아주 論理的이고 딱딱한 걸 썼을 거예요. 小說家 최인훈 趙聖期氏가 서울法大 出身인데 論理的이고 文章이 딱딱해요.”

    小說 쓰면서 司法試驗 合格

    -感銘 깊게 읽은 文學作品이 있다면….

    “박경리氏의 ‘토지’가 좋아요. 두세 番 읽었어요. 다시 한番 읽고 싶어요. 文章이 고풍스럽고 優雅해요. 한番도 뵌 적은 없어요.”

    -江 辯護士가 어느 인터뷰에서 아내 흉을 본 게 있더군요. 冊을 이것저것 同時多發的으로 보는데 寢臺에 한 卷, 소파에 한 卷, 食卓에 한 卷 式으로 흩어져 있다고….

    “부엌에서 일할 때는 소프트한 小說을 읽습니다. 조용히 오래 내 時間을 가질 수 있을 때는 딱딱한 것을 읽죠. 旅行 갈 때도 딱딱한 것을 들고 가요. 소프트한 건 그날 밤에 다 읽어치우니까. 어떤 사람은 집에 書齋도 없냐고 하지만 書齋에서 읽는 冊이 따로 읽고 부엌에서 읽는 冊이 따로 있죠. 雜誌는 居室에서 TV 보면서 읽는 거고….”

    분당 新都市가 만들어질 때 分讓받아 入住했다는 複層아파트 2層을 書齋로 쓴다. 父母 모시고 살기 위해 넓은 坪數의 複層아파트를 分讓받았던 것 같다. 法律書籍을 中心으로 冊이 壁面을 가득 메웠다. 金 大法官은 “아래層에서 主로 生活하다 보니까 書齋에 차분히 앉아 있는 境遇는 別로 없다”고 말했다.

    應接室에는 音樂 CD가 많았다.

    “事務室에도 저만큼 있어요. 클래식 音樂을 좋아해요. 音樂을 들으면 마음이 安定돼요.”

    -젊을 때는 眼鏡을 쓰지 않았던 거 같은데….

    “콘택트 렌즈를 꼈죠.”

    筆者가 法曹擔當 올챙이 記者 時節에 姜 辯護士는 서울地檢 特殊部 檢事로 일했고 金 大法官은 서울民事地法 合議部 判事로 있었다. 판·檢査 커플 1號인 이들은 當時 西小門 法曹타운의 話題의 人物이었다.

    “硏究官 할 때 網膜炎을 앓았어요. 그 뒤로 렌즈 끼기가 겁나 眼鏡을 쓰기 始作했죠. 亂視도 있어요. 冊 읽을 때는 讀書用 眼鏡을 써요. 大法官들은 늘 눈의 健康을 念慮하죠. 記錄 보다가 나쁜 눈이 더 나빠지면 어쩌나 하고 걱정이 돼요.”

    速記士가 둘째딸 先兄이 만들었다는 韓服을 보여달라고 하자 金 大法官은 欌籠에서 빨간 저고리와 검정 치마를 꺼내들고 나왔다. 女子들은 關心事가 비슷하다. 딸이 東大門市場에서 천을 떠다 만든 옷이라고 했다.

    “딸이 ‘靑瓦臺에서 大法官 任命長 받는 날 입고 가면 좋을 텐데…’라고 말해 ‘엄마가 그럴 勇氣까지는 없다’고 對答했어요. 너무 잘 만들었어요. 선형이는 바느질에 趣味를 붙여 어른이 되면 옷修繕집을 하겠대요. 벌써부터 裁縫틀 사달라고 졸라요.”

    金 大法官은 엘리베이터 앞에 배웅 나와서도 딸 자랑을 멈추지 않았다. 筆者가 “아들만 둘이라서 그런 잔재미를 모르고 산다”고 하자 그女는 “아들은 열을 낳아도 이런 재미는 없을 거예요”하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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