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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州에 北韓軍 特殊部隊 投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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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州에 北韓軍 特殊部隊 投入됐다"


入力 2006.12.20 15:15 修正         윤경원 記者

北韓軍 特殊部隊 出身 脫北者 ´自由北韓軍人聯合´ 記者會見

"5.18 光州事態는 김정일 政權의 對南戰略 證明시키주는 現場"

北韓軍 特殊部隊 出身 脫北者들이 20日 光州民主化抗爭에 北韓軍이 介入했다는 記者會見을 하고 있다.

光州5.18民主化抗爭에 北韓軍 特殊部隊 1個 大隊가 投入됐다는 主張이 北韓軍 出身 脫北者들에 依해 提起돼 衝擊이 豫想된다.

北韓軍 特殊部隊 出身者들로 構成된 自由北韓軍人聯合은 20日 午前 서울 정동 세실세스토랑에서 記者會見을 열고 “5.18光州事態는 (北韓의)자유민주주의체제에 對한 白色테러이자 김정일 政權의 對南戰略을 證明시켜 주는 現場”이라고 말했다.

自由北韓軍人聯合 임천용 代表는 “光州事態의 發端과 始發點은 民主化蜂起였다고 認定하지만 수많은 人命이 無慘히 殺傷되고 끔찍하게 도륙당한 流血的인 事件은 김정일 政權에 依해 計劃的으로 만들어진 테러行爲”라고 밝혔다.

그는 그 證據로 ▲當時 蜂起狀況이 北韓으로 實時間 生中繼된 것 ▲蜂起者들이 뒤에서 銃에 맞아 죽은 것 ▲現在까지 未解明으로 남아있는 身元 未詳者 ▲電氣톱에 依해 頭蓋骨이 破壞된 屍體 ▲蜂起軍이 蜂起軍을 射殺한 것 ▲蜂起軍의 아지트와 蜂起軍이 奪取한 탱크·裝甲車·輪轉機再 안에서 大量 發見된 술甁의 眞意 ▲防衛産業體·監獄·放送局 等 國家機關 占據와 軍 能力을 超越해 全面戰을 不辭한 것 等을 言及했다.

그는 또 김일성·김정일 富者가 光州事件과 關聯한 發言을 했다며 入手內容을 밝히기도 했다.

林 代表에 따르면 김일성 主席은 “只今까지 南朝鮮을 解放시킬 수 있는 絶好의 機會를 세 番 놓쳤는데 그中에서 光州가 第一 아까워. 우리 準備가 너무 不足했고 태만했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金 主席이 1986年 1月 6日 平南도 德川 교도指導國本部에서 열린 指導國傘下 旅團長 政治委員을 위한 軍事政治일군 上學(授業)에서 發言한 內容이며 前 人民軍에 配布된 政治上學 資料에서 出處를 얻었다고 林 代表는 밝혔다.

또 김정일 國防委員長은 “光州에서 우리는 敎訓을 찾아야 한다. 이길 수 있었지만 結果는 鎭壓됐다. 땀이 적었고 訓鍊不足이다. 교도指導局은 南朝鮮解放의 前哨兵이다. 언제든지 나가라면 當場 나갈 수 있게 萬端의 動員準備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發言했다고 한다. 이는 金 委員長이 1982年 3月 北韓特典旅團들이 北部地區에서 벌린 雙方 게릴라 訓鍊場에서 發言한 것이며 出處는 교도指導國 各 旅團 參謀部 및 大隊參謀部라고 밝혔다.

林 代表는 當時 現場에 投入됐다 北韓으로 歸隊한 參加者들의 證言을 確保했다며 그들의 發言을 다음과 같이 公開했다.

A氏: <내가 참가했던="" 조는="" 시위대="" 쪽에="" 편입되어="" 행동했다.="" 반반씩="" 나뉘어="" 절반은="" 시위대="" 쪽에서="" 움직였고="" 절반은="" 계엄군="" 쪽에서="" 활동했다…우리="" 대대에서="" 나갔던="" 사람들="" 중에="" 창석이(당시="" 중대장),="" 광만이(정치지도원)를="" 포함해="" 세="" 명만="" 돌아왔다…생사람="" 죽이는="" 일을="" 처음="" 해봤다.=""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들을="" 내손으로="" 죽였다고="" 생각하니="" 끔찍할="" 정도였다…도망가는="" 여자들="" 등에다=""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 정말="" 떨리는="" 일이었다…우리는="" 공개적으로="" 나서지="" 못한다는="" 명령을="" 따라야="" 했다.="" 남조선="" 사방에서="" 들고="" 일어나서="" 지원세력이="" 몰려오면="" 될="" 수="" 도="" 있었는데="" 그="" 사람들="" 자체는="" 조직적인="" 단합이="" 없고="" 동내패거리="" 싸움식이었다.="" 우리가="" 드러나게="" 되면="" 일이="" 커지게="" 돼="" 있고="" 봉기의="" 성격이="" 바뀌었을="" 것이다.="">

B氏: <우리도 죽었지만="" 남조선="" 사람들이="" 정말="" 많이="" 죽었다.="" 그="" 사람들은="" 누구총알에="" 어떻게="" 죽었는지="" 모를="" 것이다.="" 양쪽을="" 교란하고="" 싸움을="" 붙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시위대들이="" 많이="" 죽이="" 않으면="" 일이="" 그렇게="" 커지기도="" 불가능했다.="" 괴뢰군이건="" 시위대건="" 양쪽에="" 피해가="" 생겨서="" 서로의="" 마찰이="" 커져야="" 의도대로="" 되는="" 일이었다.="">

C氏: <우리도 알="" 수="" 없는="" 별도의="" 특수조가="" 움직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들은="" 우리행동과="" 좀="" 다르게="" 현장의="" 분위기를="" 만드는="" 작업을="" 했을="" 것이다…우리가="" 갈="" 때는="" 공해상에="" 그쪽="" 애들="" 두="" 척의="" 뜨락선이="" 마중="" 나왔는데="" 사복을="" 입었고="" 밤이었기="" 때문에=""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林 代表는 “허울을 쓴 民主化 人士들이 北韓政權과 입을 맞추며 光州의 犧牲을 子時들의 政治的 自身으로 逆利用하고 特定集團의 象徵的인 業報로 煽動하고 있다”며 “破壞되는 國家事態 앞에서 더 以上 입을 다물면 안 된다는 생각에 記者會見을 열게 됐다”고 趣旨를 說明했다.

이날 北韓 社會安全部 大尉 出身 김용화 氏는 “蜂起 當時에 北韓 人民軍 中尉로 있었고 黃海北道 松林에 位置한 社會安全部 年俸部隊에서 自動車를 管理하며 人民軍의 輸送을 擔當했었다”며 “그 當時 ‘너구리 作戰’이라고 해서 大同江 下流를 따라 南韓軍의 옷을 입고 自動步銃을 들고 나가는 것을 數次例 目擊했다. 밤 1, 2時가 되면 10名 程度를 태운 배가 조용히 빠져나갔고 그때는 射擊中止 命令이 내려졌다”고 그 때 빠져나간 北韓軍들이 光州에 가기위한 것이라고 確信했다.

그는 “北韓에서는 光州事件은 北韓에서 計劃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여기 와서 그것을 民主化抗爭이라고 하는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北韓교도指導國 大尉出身의 최준일氏는 “北韓特殊部隊出身들은 光州事態에 北韓軍이 介入했다는 것을 거의 다 알고 있다”며 “그 當時 나는 完全 戰鬪態勢로 武裝한 채 光州事件에 對한 24時間 緊急速報 傳해 들으며 20餘日間 出戰命令 기다리고 있었다. 나중에야 相關들의 對話를 통해 特殊部隊 1大隊가 光州에 投入됐고 犧牲도 많았고 功勞도 있었다고 들었다. 3分의 1이 犧牲되고 나머지 2는 歸隊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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