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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열의 撮影 美學: 物質로 映畫 읽기] 카메라는 어디에 存在하는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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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열의 撮影 美學: 物質로 映畫 읽기] 카메라는 어디에 存在하는가?, <惡은 存在하지 않는다>
박홍열(撮影監督) 2024-05-15

다양한 媒體와 포맷이 汎濫하는 時代에 果然 우리는 이미지를 感覺하고 있는가. ‘박홍열의 撮影 美學: 物質로 映畫 읽기’는 敍事에 가려 보이지 않는 映畫 속 物質들로 映畫 읽기를 試圖한다. 빛, 色, 質感, 렌즈 等 撮影 道具들로 映畫를 感覺하며, 이미지를 感覺하기 爲해선 凝視와 觀照의 時間이 必要하다. 敍事와 談論을 벗어난 이미지들 사이에서 映畫 속 無數한 物質들이 만들어가는 또 다른 意味들의 世界를 만나본다.

河馬拘置 類스케 映畫에는 롱테이크가 많다. < 惡은 存在하지 않는다 >의 롱테이크는 旣存 映畫와 다른 位置에 있다. 이 映畫의 많은 롱테이크 畵面은 이미지를 收縮된 習慣으로 만들고 그 習慣들을 배반하기 위한 機制로서 作用한다. 카메라의 遲刻으로서만 捕捉할 수 있는 이미지들을 롱테이크로 보여주고, 한컷 안에 낯섦과 익숙해지는 낯섦을 다시 낯설게 하기 위해 렌즈의 光學的 性質을 活用한다. 컷과 컷을 廣角렌즈와 望遠렌즈의 物理的 性質과 컷의 길이로 衝突시킨다. 對象을 담고 있는 畵面의 몽타주가 아닌 렌즈의 物理的 衝突 몽타주를 만들어낸다. 人間의 知覺이 捕捉하는 視線이 아닌 카메라의 知覺이 捕捉한 이미지는 習慣化돼 무뎌진 우리의 感覺을 깨운다.

인트로에서 人間의 理性과 感覺으로 볼 수 없는 風景을 만나게 될 것을 宣言하듯 莊重한 클래식 音樂과 함께 職仰角 숏으로 길게 롱테이크를 보여준다. 하늘과 나무를 向한 職仰角 畵面은 人間의 身體構造와 物理的 視線으로는 볼 수 없다. 카메라만이 知覺할 수 있는 風景이다. 自然 속 모든 存在들을 다 담아내려는 듯, 이 映畫는 숲을 보여줄 때 깊은 深度의 와이드렌즈로 넓게 보여주고 있다. 모든 것이 鮮明하게 보이는 深度에 넓은 火角으로 보이는 나무숲은 더 깊고 길고 若干은 奇怪하게 보인다. 2分22秒 동안 보이던 나무 職仰角 숏이 멈추고 크레딧 타이틀이 10秒 程度가 떴다 사라진다. 音樂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다. 그리고 다시 職仰角 트래킹숏이 1分10秒 동안 이어진다. 中間에 畵面은 멈췄지만 音樂이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觀客의 無意識에 자리 잡은 이미지의 리듬은 이어서 흘러가고 있다. 그러다 갑자기 音樂이 멈추며 畵面도 함께 轉換된다. 트래킹숏이 아닌 停止된 숏이 登場한다. 우리는 先行한 이미지들의 無意識的 學習에 依해 習慣的으로 畵面이 이어지고 音樂도 이어질 것이라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우리가 無意識的으로 마음을 놓은 사이, 멈춰서는 音樂과 畵面의 움직임은 習慣에 依해 無感해진 感覺을 깨우는 ‘자연스럽지 않은’ 리듬의 轉換이다. 3分32秒 동안 이어지는 音樂이 멈춤과 同時에 하늘을 向한 긴 트래킹숏도 멈춘다, 이어지는 컷은 앞의 이미지들을 배반하듯 카메라가 90度 正面으로 回轉한다. 職仰角에서 90度 아이레벨 水平으로 내려온다. 와이드렌즈의 넓고 깊은 火角과 對象間의 間隔이 벌어진 깊은 深度의 롱테이크 畵面에서 望遠렌즈의 좁은 火角과 對象들의 間隔이 密着된 얕은 深度의 畵面으로 컷이 이어지며 두 畵面이 衝突한다. 그리고 얕은 深度의 나무만 보이던 畵面 下端에서 한 아이가 프레임인한다. 프레임 下端에서 아이의 프레임인은 하늘과 땅의 이미지의 衝突로 畵面 밖에서 또 다른 이미지를 生成해낸다. 다음 場面은 숲으로 들어가는 아이의 뒷모습 롱숏이다. 이 컷은 다시 깊은 深度의 넓은 火角에 와이드렌즈로 앞컷의 얕은 深度의 좁은 火角의 望遠숏과 衝突한다.

映畫가 始作되고 4分16秒 동안 大使 없는 畵面에서 카메라의 레벨과 렌즈의 火角, 深度의 몽타주만 보인다. 이 映畫의 인트로 風景은 人間을 넘어선 카메라의 感覺이다. 一般的인 映畫에서는 카메라가 映畫의 歡迎을 깨뜨리지 않도록 因果와 蓋然性으로 카메라의 存在를 지워나간다. 하지만 이 映畫는 카메라의 存在를 드러낸다. 非論理的이고 蓋然性 없는 컷들을 통해 카메라 存在가 認知되는 숏들을 配置함으로써 人間 知覺의 익숙함을 끊임없이 배반하고 警告한다.

< 惡은 存在하지 않는다 >에서 카메라가 觀客의 ‘自然스러운’ 感覺에 도끼를 내리꽂는 또 하나의 方式은 色이다. 이 映畫의 두드러지는 色을 꼽자면 블루다. 映畫에서 主人公 타쿠미의 딸 하나는 파란色 점퍼에 靑바지, 블루 系列의 帽子를 쓰고 있다. 포인트 色으로 노란色 掌匣은 블루를 强調하기 위한 補色으로 使用되고 있다. 主人公 타쿠미度 짙고 무거운 블루 系列의 上衣와 비니를 쓰고 있다. 마을 住民들도 다양한 블루 系統의 옷을 입고 있다. 여기까지는 ‘自然스러운’ 人間이 感覺 可能한 色이다. 이 映畫 안에는 人間에게 感覺되지 않는 方式으로 더 많은 블루가 存在한다. 타쿠미의 집도, 마을會館 周邊도, 숲 全體에도 블루가 자리 잡고 있다. 自然 全體에 빛 사이로 블루가 있다. 집 周邊에 있는 붉은色 工具와 裝備들은 自然의 그늘 속 블루를 더욱 强調한다. 存在하지만 知覺되지 않은 블루는 빛이 닿아 드러나는 곳에 自身을 位置시키는 代身 빛이 가려 생긴 그림자 속에 자리를 잡는다. 映畫 < 문라이트 > 카피, ‘어둠 속 가장 빛나는 블루’처럼 블루 色을 띠는 短波長은 밤에 더 많이 分布되어 빛을 띠지만, 낮에도 해가 닿지 않은 그늘이나 그림자에서 더 많이 分布되어 블루를 强調한다. 하지만 人間은 밤에도 낮의 그늘에서도 블루 빛을 볼 수 없다. 人間의 視知覺으로는 그 微細한 블루를 遲刻하기 어렵다. 하지만 카메라는 微細한 블루 波長의 빛을 知覺한다. 우리 옆에 恒常 存在하지만 人間의 視知覺으로 把握할 수 없는 色을 카메라는 遲刻해 스크린을 통해 그 存在들을 보여준다. < 惡은 存在하지 않는다 >에서도 블루는 스크린 위에서 色을 띠고 있지만 우리는 習慣的 知覺으로 보지 못한다. 映畫 全般에 깔린 블루가 映畫 後半에 해가 막 진 뒤 블루 빛 안개가 짙게 깔린 숲으로 우리를 案內할 때까지.

映畫 마지막 시퀀스 숲속 場面에는 블루 빛 푸른 안개가 가득하다. 낮의 그림자와 그늘 안의 블루가 해가 진 안개 속에서 온통 짙은 블루로 이어져 있다. 그 블루 속에서 타쿠미와 글램핑 職員은 하나를 찾고 있다. 그리고 파란色 옷을 입은 하나가 쓰러져 있다. 블루로 表現되는 自然과 타쿠미의 딸 하나(花)는 그 이름처럼 하나(one)인 것이다. 블루가 調和롭게 모여 살고 있는 自然 속에 螢光 朱黃色이 들어와 色의 調和와 均衡을 破壞한다. 블루人 타쿠미는 螢光 朱黃人 글램핑腸 職員을 쓰러뜨리고 블루의 調和와 色의 均衡을 回復하려 한다. 그리고 하나를 안고 숲으로 사라진다. 타쿠미와 하나가 들어간 달빛이 비추는 밤의 숲을 카메라가 첫 場面처럼 길게 트래킹한다. 어둠 속 온 世上이 블루로 가득하다. 그제야 우리는 이 映畫에서 카메라가 親切하게 보여주고 있는 블루를 비로소 認知한다.

善과 惡을 判斷하는 틀은 各自가 서 있는 位置에 固定되어 있다. 우리는 善과 惡을 담는 이미지도 固定된 表象으로 바라본다. 人間의 視知覺은 世上을 固定시켜 바라보려 한다. 하지만 카메라는 다르다. 끊임없이 變하고 運動하는 이미지를 그대로 담아낼 수 있다. < 惡은 存在하지 않는다 >는 카메라를 人間의 ‘自然스러운’ 感覺을 깨우는 位置에 놓고, 慣習的으로 固定되는 感覺을 解體시키며 映畫만의 固有한 運動性으로 善과 惡에 對한 心理的인 實在를 드러낸다. 惡의 存在에 對한 質問을 넘어 무엇이 惡의 存在를 發生시키는지를 人間의 知覺이 아닌 카메라의 遲刻을 통해 質問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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