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良業 神父_정채석 作, 절두산 殉敎聖地 博物館 所藏
誕生과 成長
최양업 토마스 神父는 1821年 3月, 忠淸南道 靑陽의 다락골에 있는 새터 敎友村에서
崔敬煥 프란치스코
聖人과
이성례 마리아
복자의 長男으로 태어났다. 이곳에서 어린 時節을 보낸 최양업 토마스 神父는 迫害를 避해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던 父親을 따라다니다가 京畿道 富平乙 거쳐 安養에 있는 수리산으로 移住하여 살았다. 이 수리산 마을은 그 뒤 信者들이 하나둘 모여들면서 祕密 信仰 共同體로 變貌하였다.
이에 앞서, 朝鮮 代牧區의 傳敎를 委任받은 파리 外方 傳敎會에서는 宣敎師들을 韓國으로 派遣하려고 여러 가지로 努力하고 있었다. 그러나 國境 監視가 甚한데다가 迫害의 危險이 도사리고 있었으므로, 西洋 宣敎師가 韓國에 들어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難關을 克服하고 처음으로 朝鮮에 入國한 宣敎師는 프랑스 出身의 性
模倣 베드로
神父였다.
1835年 末, 朝鮮 天主敎會에서 派遣한 密使들의 案內로 入國한 모방 神父는 곧바로 全國의 信仰 共同體들을 巡廻하기 始作하였고, 이듬해 初에는 富平에 있는 崔敬煥 프란치스코의 집을 訪問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將來가 屬望되는 최양업 토마스를 韓國의 첫 神學生으로 選拔하였으니, 當時 그의 나이는 15歲였다.
神學生으로 選拔된 최양업 토마스는 1836年 2月 6日 서울의 모방 神父 宅에 到着하여 라틴語 授業을 받았다. 이어서 模倣 新婦가 神學生으로 揀擇한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3月 14日에,
金大建 안드레아
가 7月 11日에 各各 到着하여 함께 生活하였다.
마카오 儒學과 副題 敍品
崔 토마스는 1836年 12月 2日, 同僚 神學生들과 함께 聖經에 손을 얹고 殉名을 誓約하고, 다음 날 마카오 留學길에 올랐다. 그리고 中國 大陸을 南下하여 다음 해 6月 7日에는 마카오에 있던 파리 外方 全敎會 極東 代表部에 到着하였으며, 이때부터 그곳에 臨時로 設立된 神學校에서 工夫를 始作하였다.
마카오에서의 留學 生活은 1842年까지 繼續되었는데, 1837年 11月에는 同僚인 최방제 프란치스코가 熱病으로 死亡하는 아픔을 겪었고, 1839年에는 마카오의 騷擾 때문에 필리핀의 마닐라로 場所를 옮겨 授業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다가 같은 해 末에 마카오로 돌아왔다.
그러나 神學生 崔 토마스는 아직 工夫가 끝나기도 前인 1842年 4月에 마카오를 떠나게 되었다. 韓國과의 通商 條約을 願하는 프랑스 艦隊에서 通譯者를 必要로 했기 때문이다. 이때 極東 代表部의 長上인 리브와(Libois) 나폴레옹 神父는 迫害로 끊어진 朝鮮 天主敎會와의 連絡을 期待하고 崔 토마스와 金 안드레아를 各各 다른 프랑스 艦隊에 乘船토록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艦隊가 南京에 到着한 다음에 더 以上의 北進을 願하지 않게 되자, 崔 토마스와 金 안드레아는 프랑스 艦隊에서 내려 搖動으로 가게 되었다. 朝鮮으로 들어가고자 入國路를 探索하기 위해서였다.
以後 최양업 토마스는 滿洲의 소팔가자로 居處를 옮겨 朝鮮 代牧區의 副主敎人 페레올(Ferréol) 요한 主敎에게 繼續 授業을 받았고, 1843年에는 리브와 神父를 통해 프랑스 파리의 無染 聖母 聖心會에 加入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祖國에서 일어난 迫害와 殉敎者들의 消息을 들었다. 이때 그는 프랑스로 歸國해 있던 스승 르그레즈와(Legrégeois) 베드로 新婦에게 書翰을 보내 다음과 같이 自身의 心情을 이야기하였다.
"저는 우리 父母님과 兄弟들을 따라서 功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저의 身世가 참으로 딱합니다. 그리스도 勇士들의 그처럼 壯熱限 戰爭에 저는 參與하지 못하였으니 말입니다. 正말 저는 부끄럽습니다! 이렇듯이 훌륭한 내 同胞들이며, 이렇듯이 勇敢한 내 겨레인데, 저는 아직도 너무나 軟弱하고 未熟함 속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仁慈하신 하느님 아버지, 當身 종들의 피가 呼訴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어 當身의 넘치는 慈悲와 當身 팔의 全能을 보이소서. 언제쯤이나 저도, 神父님들의 그다지도 엄청난 勞苦와 저의 兄弟들의 苦難에 參與하기에 合當한 者가 되어, 그리스도의 受難에 不足한 것을 채워, 救援 事業을 完成할 수 있을까요?"
神學 授業을 繼續하던 최양업 토마스는 1844年 12月 10日頃에, 同僚 金大建 안드레아와 함께 페레올 主敎에게 副祭品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金大建 안드레아 副題가, 司祭品을 받고서 페레올 主敎, 性 다블뤼(Daveluy) 안토니오 神父와 함께 韓國에 入國한 뒤에도, 소팔가자에 남아 있으면서 매스트르(Maistre) 요셉 神父와 함께 歸國路를 찾고자 持續的으로 努力하였다.
私製 殊品과 歸國
歸國路를 探索하는 동안 崔 토마스 副題는 朝鮮 天主敎會의 密使들을 만나, 1846年의 迫害와 同僚 金大建 안드레아 神父의 殉敎 消息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스승 르그레즈와 新婦에게 書翰을 보내 祖國에서의 애통한 消息을 알렸다.
"마침내 지루했던 기나긴 捕虜 生活에서 解放되고, 저의 同胞들한테 迎接을 받으리라 希望하면서 크게 기쁜 마음으로 勇躍하여 변문(韓中 國境의 城門)까지 갔습니다. 그러나 변문에 到着하여 보니, 이 希望이 散散이 무너졌습니다. 너무나 悲慘한 消息에 驚愕하였고, 저와 曺國 全體의 可憐한 處地가 慰勞받을 수 없을 만큼 哀痛하였습니다. …… 特히 저의 가장 親愛하는 同僚 안드레아 神父의 죽음은 新婦님께도 悲痛한 消息일 것입니다."
朝鮮 天主敎會 密使들의 挽留로 歸國을 抛棄한 崔 토마스 副題는 極東 代表部가 移轉해 있던 홍콩에 到着한 뒤에 ‘韓國 殉敎者들의 行跡’을 라틴語로 飜譯하였다. 그리고 한便으로는 歸國로 探索을 위해 努力하였으며, 1847年 8月에는 프랑스 軍艦을 타고 朝鮮 海岸에 到着하였지만 密使들을 만나지 못하여 歸國에 失敗하고 말았다.
다시 上海로 居處를 옮긴 최양업 토마스 副題는 1849年 4月 15日, 마침내 傷害 腸가루(또는 書架會) 聖堂에서 司祭品을 받았다. 이때 그에게 司祭品을 준 사람은 예수회원으로 江南 代牧區長으로 있던 마레스카(Maresca) 主敎였다.
司祭品을 받은 최양업 토마스 神父는 그해 5月에 傷害를 出發하여 中國 요동 地方으로 가서 城
베르뇌(Berneux) 시메온
新婦 아래서 司牧 活動을 始作하였다. 그러다가 11月에는 매스트르 神父를 다시 만나 歸國을 試圖한 끝에, 12月 3日 朝鮮 天主敎會의 密使들을 만나 歸國하게 되었다. 이때 매스트르 神父는 發覺될 危險이 있었으므로 朝鮮에 入國하지 못하였다.
司牧 活動과 腺腫
歸國하자마자 최양업 토마스 神父는 페레올 主敎와
다블뤼
神父를 만난 뒤, 各處에 숨어 있는 信者들을 巡訪하기 始作하였는데, 1850年 初부터 6個月 동안 5個 도, 5千 餘 里를 걸어다니며 信者 3,815名의 信者를 訪問하였다. 以後 鎭川 배티를 司牧 中心地로 삼게 되었다.
이러한 司牧 活動은 11年 6個月餘 동안 꾸준히 繼續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休息 期間을 利用하여 漢文 敎理書와 祈禱書를 한글로 飜譯하였고, 宣敎師들의 朝鮮 入國을 도왔으며, 神學生들을 말레이 半島에 있는 페낭(Penang) 神學校로 보냈고, 殉敎者들에 對한 記錄을 蒐集하였다.
勿論 全國에 散在해 있는 信者들을 巡訪하기란 쉽지 않았다. 途中에 崔 토마스 神父는 西洋人으로 誤認을 받아 마을에서 쫓겨나기도 했고, 捕卒들의 襲擊으로 죽을 危險에 處하기도 하였다. 特히 1859年에는 巡訪 途中에 發覺되어 捕卒과 外交人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酒幕에서 쫓겨나 半쯤 裸體가 된 몸으로 눈 쌓인 밤을 헤맨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그의 信仰과 祖國愛, 그리고 信者들에 對한 愛情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1860年의 庚申迫害 때, 최양업 토마스 神父는 몇 名의 信者들과 함께 慶尙南道의 한 모퉁이에 갇혀서 代牧區長 베르뇌 主敎나 다른 宣敎師들과 連絡이 끊긴 채 지내야만 하였다. 이때 그는 스승 르그레즈와 新婦에게 다시 書翰을 보내 自身의 處地를 說明하고, 다음과 같이 朝鮮 天主敎會를 도와주십사고 付託하였다.
"우리를 患難에서 求하소서. 엄청난 患難이 우리에게 너무도 모질게 덮쳐 왔습니다. 元首들이 우리에게 달려들고 있습니다. 當身의 보배로운 피로 贖良하신 當身의 遺産을 파멸시키려 덤벼들고 있습니다. 當身께서 높으신 데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들을 對抗하여 설 수가 없습니다.
至極히 敬愛하는 神父님들께서 烈節韓 祈禱로 우리를 위하여 全能하신 하느님과 聖母님께 도움을 얻어 주시기를 請합니다.
이것이 저의 마지막 下直 人事가 될 듯합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繼續 追跡하는 包圍網을 빠져 나갈 수 있는 希望이 없습니다. 이 불쌍하고 可憐한 우리 布敎地를 여러 神父님들의 끈질긴 念慮와 지칠 줄 모르는 愛德에 거듭거듭 맡깁니다."
多幸히 최양업 토마스 神父는 갇혀 있던 곳을 빠져나와 慶尙道 南部 地方의 司牧 訪問을 다 마친 다음, 베르뇌 主敎에게 성무 執行 結果를 報告하고자 길을 나섰다. 그러나 過勞에다 장티푸스까지 덮쳐 1861年 6月 15日에 聞慶 또는 鎭川 敎友村에서 腺腫하고 말았으니, 이때 그의 나이 40歲였다.
이 消息을 들은 베르뇌 主敎는, 파리 外方 傳敎會의 神學校 校長인 알브랑(Albrand) 新婦에게 보낸 書翰에서, 다음과 같이 최양업 토마스 神父의 信心과 熱心, 그리고 平素에 보여 준 司祭로서의 分別力을 稱頌하고, 同時에 그를 잃은 아쉬움을 表示하였다.
"崔 토마스 神父는 神心, 靈魂의 救援을 위한 불과 같은 熱心, 그리고 無限히 貴重한 일에서는 훌륭한 分別力으로 우리에게 그렇게도 貴重한 存在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唯一한 韓國人 神父 崔 토마스 神父가 救援의 열매를 풍성히 맺은 成事 執行 뒤에, 내게 自身의 業績을 報告하려고 서울에 오던 中, 지난 6月 世上을 떠났습니다.
이 착한 新婦가 處해 있는 危險에 對한 消息을 맨 처음 받은 푸르티에(Pourthi
é)
神父는 그에게 마지막 聖事를 줄 수 있을 만큼 일찍 到着했습니다. 그러나 그 新婦는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죽어가는 그의 입술에서 아직 새어나오는 말이 但只 두 마디 있었으니, 그것은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이었습니다. …… 崔 토마스 神父는 12年間 거룩한 司祭의 모든 本分을 至極히 正確하게 지킴으로써 사람들을 感化시키고, 成功的으로 靈魂 救援에 힘쓰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저를 難處하게 합니다. 그가 聖務를 執行하던 區域에는 커다란 危險을 무릅쓰지 않고는, 西洋 사람이 뚫고 들어가기 어려운 많은 마을들이 包含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를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신 主님께서 우리에게 必要한 것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이 書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최양업 토마스 神父가 배론 神學校에서 170-180里 支店에서 死境을 헤매고 있을 때, 그 當時 神學校에 있던 푸르티에 新婦가 이 消息을 듣게 되었다. 그는 곧장 崔 토마스 新婦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그가 들을 수 있는 말은 아주 熱誠的으로 부르는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뿐이었다. 최양업 토마스 新婦의 腺腫 뒤, 5個月이 지난 다음, 베르뇌 主敎의 主禮로 崔 神父의 葬禮가 盛大하게 치러졌고, 그의 屍身은 배론 神學校 뒷山에 安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