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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祭의 해에 돌아보는 司祭] 私製 이태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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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祭의 해에 돌아보는 司祭] 私製 이태석 (2)

이태영 新婦(꼰벤뚜알 프란치스코 修道會·이태석 神父 兄)
入力일 2010-06-08 受精일 2010-06-08 發行日 2010-06-13 第 2701號 7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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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에 應答한 삶
이태석 神父는 音樂的 才能도 타고났다. 初等學校 時節부터 쉬운 童謠를 作曲했으며, 中學生 때에는 釜山市에서 作曲部門 大賞을 받기도 했었다. 그가 中學生 때 지은 ‘默想’이라는 曲과 ‘슈쿠란 바바’(하느님 感謝합니다)라는 曲은 이태석 新婦의 삶을 端的으로 드러내 주고 있다.

♪ 默想

十字架 앞에 꿇어 주께 물었네. 오~오~오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이들,

銃부리 앞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이들을 왜 當身은 보고만 있냐고.

눈물을 흘리면서 주께 물었네.

世上엔 罪人들과 닫힌 監獄이 있어야만 하고,

人間은 苦痛 속에서 煩悶해야 하느냐고.

조용한 沈默 속에서 主님 말씀하셨지.

사랑, 사랑, 사랑 오직 서로 사랑하라고.

난 永遠히 祈禱하리라. 世界平和 위해.

난 사랑하리라. 내 모든 것 바쳐.

自身의 祈禱였던 노래 歌詞처럼 이태석 神父는 醫師이면서 新婦가 된 後 곧 바로 사랑의 삶을 위해 아프리카 手段의 톤즈로 떠나가 마지막 남은 生을 投身하게 된다.

이태석 新婦가 이처럼 하느님의 사랑 實踐에 모든 것을 投身했던 것은 그의 聖所와도 깊은 關聯이 있다. 그가 聖召를 생각하게 된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마태복음 25張의 最後의 審判에 나오는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이 말씀을 그는 恒常 記憶하며 살았다고 한다. 또 다른 하나는 中學校 1學年이었을 무렵에 聖堂에서 보았던 ‘다미안 新婦’ 映畫였다.

그가 新婦가 된 後 아프리카 手段으로 가겠다고 家族에게 自身의 뜻을 밝히자 한 누나가 그에게 물었다.

“韓國에도 어려운 壁紙가 많은데 왜 꼭 아프리카로 가야만 하나?”

이태석 神父의 對答은 다음과 같았다.

“그곳에는 아무도 가려는 사람이 없기에 나라도 가야 한다.”

手段의 톤즈에서 司牧하던 中 20年 동안이나 內戰에 휩싸였던 南北 手段이 2005年에 平和協定을 맺었다는 消息을 듣고 感激에 싸여 ‘슈쿠란 바바’(하느님 感謝합니다)라는 짧으면서도 매우 感動的인 曲을 짓게 된다.

自身이 살고, 또한 누리고 싶었던 하느님께서 주시는 ‘平和’의 가장 큰 障礙物이었던 ‘戰爭’李 一時的으로나마 멈췄다는 消息에 感激에 겨워 지었던 노래이다. 하느님 사랑에 投身했던 自身의 삶에 對한 하느님의 應答에 感謝의 讚美를 드렸던 것이다. 마치 監査로 自身의 삶을 마무리하는 것처럼.

이태석 神父의 삶이 아름답게 빛날 수 있었던 것은 醫師이면서 神父였던 그의 身分보다도 하느님의 부르심에 單純하고 純粹하게 應答함으로써 사람에게 奉仕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프리카 手段 아이들로 構成된 브라스밴드와 이태석 神父.

이태영 新婦(꼰벤뚜알 프란치스코 修道會·이태석 神父 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