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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新聞

[알기 쉬운 미사 前例] 平和를 祈願하는 그리스도人

第1次 世界 어린이의 날(2024年 5月 25~26日) 談話에서 프란치스코 敎皇은 “어린이들은 ‘平和의 創造者’가 돼야 합니다”라고 하시고, “苦痛받는 또래 어린이들을 생각하며 더 以上 戰爭이 일어나지 않도록 平和를 위해 祈禱해달라”고 當付하셨습니다. 苦痛받는 어린이들을 위해 어른이 아니라 어린이에게 祈禱해달라고 當付하시는 敎皇의 말씀은 平和가 어느 特定 그룹이 아닌 모두의 課題이며, 가장 優先해야 하는 것은 바로 自身의 이웃과의 關係부터 始作해야 함을 깨닫게 합니다. 敎會는 領聖體를 準備하면서, 主님의 企圖 以後에 平和 禮式을 配置하여 平和는 바로 옆의 이웃부터 始作해서 널리 퍼져가야 한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이 禮式은 예수께서 山上 說敎에서 하느님께 禮物을 바치려면 먼저 兄弟와 和解하라는 가르침(마태 5,23-24 參照)에 따라 이미 2世紀부터 미사에 들어왔습니다. 155年頃 記錄된 유스티盧의 「護敎論」 第1卷 65章에서는 “우리 自身을 위해, 빛을 받은 이와 모든 곳의 다른 모든 이를 위해 함께 熱心히 祈禱합니다. … 祈禱가 끝나면 서로 입맞춤으로 人事합니다”라고 합니다. 곧 只今의 ‘普遍志向祈禱’를 하고 ‘平和 禮式’李 뒤따랐고 ‘禮物 奉獻’이 이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禮式 順序는 東方 前例에서 아직도 維持됩니다. 그러나 로마에서는 5世紀 初葉, 代 그레고리오 敎皇에 依해 오늘날의 자리인 ‘感謝 祈禱’ 後 ‘平和 禮式’을 配置했습니다. 그리고 中世에는 聖職者 中心으로 擧行되던 前例 傾向에 따라 이 禮式은 聖職者들끼리만 나누는 平和 禮式으로 變하고 말았습니다. 只今은 古代 傳統에 따라 平和 禮式을 빵 나눔과 分離시키고, 信者 모두가 參與하여 이웃과의 和解를 통한 領聖體 準備 性格을 분명하게 했습니다. 平和 禮式은 세 部分, 祈禱 招待文을 包含한 ‘平和의 祈禱’, 共同體를 위한 ‘平和의 起源’, ‘平和의 人士’로 進行됩니다. 司祭는 平和의 祈禱로 이끄는 招待文에서 “나는 너희에게 平和를 남기고 간다. 內 平和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는 平和에 關한 예수님의 約束을 確認합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平和’(샬롬)는 싸움이나 戰爭이 없는 것보다 훨씬 깊은 意味가 있습니다. 이 平和는 豫言者들이 豫告한 것과 같이 未來의 救援者, 메시아께서 이룩하실 平和로서 하느님과 人間 및 人間 相互間의 一致와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平和를 말합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平和’는 當身의 現存과 關聯됩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는 「요한 福音 註解」에서 “‘平和는 그리스도 自身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실 때 靈魂은 언제나 平穩을 누리기 때문입니다”라고 합니다. “主님의 平和가 恒常 여러분과 함께”라는 平和의 人事는 아우구스티노 時代 以前부터 前例에 들어왔습니다. 이 人事를 통해 敎會는 自身과 온 人類 家族의 平和와 一致를 祈願합니다. 또한 司祭가 敎友들을 向하여 팔을 벌리는 姿勢는 祈禱 勸告나 主禮 祈禱 때와 달리 敎友들을 抱擁하는 意味를 지니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人事하십시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 모두에게 平和가 있기를 빕니다”(1베드 5,14)에서 사랑의 입맞춤과 平和를 連結시킵니다. 2~3世紀 敎父들人 유스티盧와 히폴리土 等의 著書에서 이미 前例 禮式으로 紹介됩니다. 平和의 人事는 民族의 文化와 慣習에 따라 定할 수 있는데, ‘韓國 敎區들에서는 平和의 人事로 가벼운 節’을 하기로 했습니다(「로마미사경본 總指針」, 82項). 平和 禮式은 主님과 함께 그분의 平和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한 마중물입니다. 글 _ 윤종식 티모테오 新婦(가톨릭大學校 典禮學 敎授)

[허영엽 神父의 聖經 속 人物] 목숨을 걸고 正義를 외쳤던 아모스

中世 英國의 非人間化를 批判한 「유토피아」의 著者인 토마스 모어(1478~1535)는 英國人들이 尊敬하는 大法官이었다. 이미 王妃를 6名이나 廢位시키고 大部分 處刑시키는 不義한 君主였던 헨리 8世가 다시 王妃인 캐서린과 離婚하고 宮女와 結婚하려고 하자 토마스 母語는 國王이라도 國法을 어기면 안 된다고 하며 結局 大法官職을 辭職했다. 헨리 8世는 믿었던 토마스 母語를 런던탑에 가두었고 結局 反逆罪로 몰아 斷頭臺에서 處刑했다. 이때 斷頭臺에서 했던 토마스 모어의 말이 英國人들 사이에 오랫동안 膾炙되었다. 平素 유머를 즐겨하던 토마스 母語는 官吏에게 “목은 잘리더라도 罪 없는 鬚髥은 다치지 않게 해주게”하며 餘裕를 보였다. 그는 죽기 前 詩篇 “저의 罪에서 저를 말끔히 씻으시고 저의 잘못에서 저를 깨끗이 하소서”(54,4)를 마지막 祈禱로 바치며 壯烈하게 刑場의 이슬로 사라졌다. 토마스 모어의 正義와 勇氣는 只今도 英國人들의 記憶과 그들의 삶 속에 살아있다. 트코아의 牧羊業子 가운데 한 사람인 아모스는 어느 날 이스라엘이 沒落하는 幻視를 보았다. 이스라엘의 全 地域이 亡하고 불바다가 되어 百姓들은 困辱을 치르고 賃金과 官吏들은 捕虜로 잡혀간다는 內容이었다. 하느님은 아모스에게 自身의 말을 百姓에게 傳하라고 命令했다. 그러자 아모스는 平生 羊을 치고 나무를 가꿔서 먹고사는 無識하고 能力도 없는 一介 農夫의 말을 누가 귀담아듣겠냐며 부르심을 拒絶한다. 그러자 하느님은 아모스에게 當身의 말을 사람들에게 傳하는 심부름꾼이 되어 달라며 繼續 說得했다. 아모스는 어쩔 수 없이 하느님의 命令을 따르기로 했다. 아모스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事實 이스라엘은 軍事的으로나 經濟的으로 安定的인 時期였다. 그러나 物質이 풍요해질수록 精神은 墮落하여 社會의 紀綱이 흔들리고 있었는데, 指導者나 百姓들은 放心하고 있었다. 特히 指導者들은 술과 女子에 빠져 흥청거리며 政治는 뒷전이었다. 社會의 指導層이 썩고 腐敗하자 物質主義의 나쁜 물이 宗敎에도 물들어 갔다. 物質의 豐饒가 極盛을 부려 指導層이 腐敗할수록 一般 庶民들은 더 착취당하고 悲慘한 生活을 하게 된다. 힘 있는 者들이 마음대로 庶民들을 搾取하여 百姓들의 苦痛은 커져만 갔다. 아모스 豫言者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當時의 이스라엘의 僞善과 잘못에 對해 嚴하게 告發했다. 宗敎도 例外가 없었다. 이런 아모스의 豫言은 當時의 指導層들에게 큰 걸림돌이 되었다. 結局 司祭들은 아모스를 몰아내기 위해 謀陷과 攻擊을 敢行한다. 指導者는 무엇보다 쓴소리를 마다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現實은 正反對이다. 阿諂은 指導者에게 于先 듣기는 좋지만 結局 모두 破滅과 滅亡으로 이끈다. 어떤 攻擊과 謀陷에도 아모스는 堂堂했다. 보잘것없는 身分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傳했던 아모스야말로 참된 豫言者였다. 아모스는 목숨을 걸고 特別히 正義를 强調했다. 아모스같은 豫言者는 오늘날에도 꼭 必要한 人材이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新婦(서울大敎區 靈性心理相談敎育院長)

2024-06-16

[敎會 常識 팩트 체크] 典禮에 쓸 수 있는 樂器는 오르간뿐이다?

聖堂하면 떠오르는 樂器가 있습니다. 前例를 雄壯하고 아름답게 꾸며주는 오르간입니다. 큰 規模의 聖堂에 設置된 파이프 오르간이 아니더라도, 大部分의 聖堂에는 오르간이 設置돼 있습니다. 敎會는 오르간 祝福 禮式도 따로 擧行하는데요. 오르간 祝福 禮式은 「祝福 禮式」 中에서도 ‘前例와 信心을 위한 聖堂 器物 祝福 禮式’ 項目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洗禮대나 龕室, 聖堂門, 성화상, 十字架의 길 等 聖堂 안에서 信者들에게 重要한 것들을 祝福하는 禮式書들을 모은 곳에 오르간 祝福 禮式서도 있는 것이죠. 敎會는 「로마 미사 經本 總指針」에 “前例 擧行에 가장 어울리는 樂器는 오르간”이라면서 오르간을 “適當한 자리에 놓아 聖歌隊와 敎友들이 노래할 때에 도움이 되도록 하고 樂器만 연주하는 境遇에는 모든 이가 잘 들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明示할 程度로 오르간을 重要하게 여기고 있습니다.(393항, 313項 參照) 이처럼 敎會 안에서 오르간의 位相은 특별합니다. 第2次 바티칸公議會 敎父들은 “라틴 敎會에서 파이프 오르간은 傳統的인 樂器로서 크게 尊重돼야 한다”면서 “그 音響은 敎會 儀典에 놀라운 光彩를 더하고, 마음을 하느님께 드높이 힘차게 들어 올릴 수 있다”고 極讚하고 있습니다.(「전례헌장」 120項 參照) 이처럼 敎會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오르간이지만, 事實 敎會가 처음부터 前例에 오르간을 使用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初期에는 前例에 樂器를 導入하는 것을 警戒했습니다. 오르간 亦是 처음에는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9世紀 무렵부터 하나, 둘 敎會 안에 들어오기 始作했습니다. 西洋 敎會에서 처음으로 오르간이 設置된 곳은 獨逸의 아헨主敎座聖堂(812年)이라고 하는데요. 以後로도 오르간은 여러 聖堂에 널리 받아들여지면서 敎會 前例를 위한 重要한 樂器가 됐습니다. 그렇다면 前例 中 樂器 使用은 오르간만 可能한 것일까요? 오르간 말고 다른 樂器들도 前例 中에 使用할 수 있습니다. 다만 오르간과 달리 다른 樂器들은 一種의 許諾이 必要합니다. 前例憲章은 오르간 外의 다른 樂器들은 地域 敎會의 判斷과 同意에 따라 거룩한 用途에 적합하고 聖堂의 品位에 맞으며 信者들의 敎化에 도움이 된다면 前例에 받아들일 수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方針에 따라 韓國 敎區들도 오르간 外에 使用할 수 있는 樂器를 定하고 있습니다. 韓國 敎區들에서는 前例 中 管樂器와 絃樂器를 使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打樂器는 특별한 境遇에 愼重하게 檢討해 使用하도록 規定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重要한 오르간이지만, 그렇다고 前例 音樂에서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敎會는 前例 時期 中 待臨 時期에는 오르간과 다른 樂器를 연주하는 것을 節制하고, 絲蓴 時期에는 노래 伴奏에만 쓸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伴奏에만 쓸 수 있다는 것은 樂器만으로 音樂을 연주해서는 안 된다는 意味입니다. 前例 音樂에서 오르간 소리보다 重要한 것은 바로 하느님을 讚美하는 우리들의 ‘목소리’이기 때문입니다.

2024-06-16

[말씀默想] 年中 第11週日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宣布하신 福音의 中心 主題입니다.(마르 1,1 參照) 예수님께서는 누구나 自然 속에서 쉽게 發見할 수 있는 表象들을 ‘比喩’로 들어 ‘하느님 나라’를 說明해 주셨습니다.(마르 4,33 參照) 오늘 福音에서 두 가지 比喩를 만나는데, 그中 하나는 저절로 자라는 씨앗에 關한 比喩(마르 4,26-29)이고, 다른 하나는 겨자씨의 比喩(마르 4,30-32)입니다. ‘比喩’는 그리스어 ‘爬羅볼레’의 飜譯으로, 新約聖經에서 使用되는 ‘爬羅볼레’는 하느님의 統治 或은 行動과 緊密히 連結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聖經의 그리스語 飜譯本人 70인譯에서 登場하는 ‘爬羅볼레’는 히브리어 ‘마샬’에서 語源的 起源을 찾을 수 있는데, ‘마샬’은 ‘다스리다’라는 動詞와 聯關이 있습니다. 마르코 福音書 著者가 하느님 나라의 到來와 統治를 說明하기 위해 ‘比喩’의 形式을 使用한 理由는 ‘爬羅볼레’에 對한 히브리어의 語源的 起源으로 說明이 可能합니다. 먼저 첫 番째 比喩를 살펴봅시다.(마르 4,26-29) 어떤 한 사람이 땅에 씨앗을 뿌립니다. 그 사람은 以後 아무런 일을 하지 않지만, 씨앗은 成長하고 活動합니다. 씨앗에서 싹이 나고 자라나 줄기가 나고 열매를 맺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비록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느님의 말씀은 밭에 뿌려진 씨처럼 싹을 틔우고 줄기를 내고 이삭을 맺게 됩니다. 特別히 첫 番째 比喩에서는 마지막 審判의 날을 强調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收穫 때가 되어 穀食에 낫을 내는 農夫를 言及하며 決定的인 하느님 나라의 到來를 說明하고 계십니다. 요한 默示錄에서도 ‘主님의 날’에 對한 傳統的인 表現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낫을 大魚 收穫을 始作하십시오. 땅의 穀食이 무르익어 收穫할 때가 왔습니다.”(묵시 14,15) 이어서 두 番째 比喩를 살펴봅시다.(마르 4,30-32) 씨앗이 땅에 뿌려지고 그 위에서 싹이 자라나는 過程이 描寫되고 있습니다. 겨자씨는 直徑 2밀리미터보다 작은 씨앗이지만, 높이가 3미터에 이르는 커다란 나무로 成長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의 成長 過程 自體보다는 아주 작은 씨앗과 巨大한 나무를 比較하는데 焦點을 맞추면서 ‘하느님 나라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고자 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한 알의 작은 겨자씨처럼 當場에는 눈으로 보기 어려울지라도 나중에는 커다란 나무가 되어 이 世上 안에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로 成長하는 過程은 하나의 奇跡과도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自身의 活動 안에서 하느님께서 活動하신다고 確信하셨고, 이러한 確信을 바탕으로 自然 속 작은 것들 안에서 活動하시는 하느님을 讚美하셨습니다. 겨자씨가 자라나 새들이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된다는 比喩(마르 4,32)는 舊約聖經의 傳統, 特別히 에제키엘 豫言書의 比喩的 豫告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第1讀書(에制 17,22-24)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심으신 ‘향백나무의 꼭대기 順’에서 햇가지가 나고 열매를 맺으며 巨大한 나무로 자라나 온갖 새들과 들짐승이 깃들이게 될 것입니다. 향백나무는 새들과 들짐승이 깃들일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나무의 種類에 屬하는데, 木質이 堅固하고 곧게 자라는 特性이 있어 主로 建築資材로 使用되고 있습니다. ‘향백나무의 꼭대기 順’은 다윗의 後孫, 곧 바빌론 1次 流配 當時 끌려간 餘戶야킨 임금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에제키엘 豫言者는 향백나무에 關한 짧은 比喩를 통해 다윗 王朝의 回復과 繁榮을 豫告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향백나무의 가지에서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에제키엘 17張 23節의 말씀은 疑懼心을 불러 일으킵니다. 향백나무는 本來 열매를 맺는 나무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에제키엘 豫言書의 著者는 여기에서 하느님의 權能과 힘을 强調하고 있습니다. 향백나무는 果實樹가 아니지만 하느님께서 하고자 하신다면 향백나무도 열매를 맺는 奇跡을 보여줄 것이라는 事實을 알려주고자 합니다.(에제 36,35 參照) 오늘 讀書와 福音 말씀은 하느님을 生命을 主管하시는 創造主로 紹介합니다. 하느님 없이 世上 萬物은 生命을 維持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萬物을 創造하시고 보살피시며, 그 안에서 現存하고 계십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고 弱해 보이지만 마지막에는 巨大하고 剛한 것이 되면서, 이러한 신비롭고 놀라운 變化에서 우리는 驚異로운 하느님의 權能과 힘을 體驗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自然 속에 自身이 宣布한 하느님 나라의 眞理가 숨겨져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宣布하신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께서 直接 活動하시는 곳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매우 逆說的입니다. 人間의 知性을 超越하며 人間의 洞察과는 對照를 이룹니다. 이러한 理由로 하느님 나라는 늘 祕密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人間이 하느님 나라의 神祕를 理解하려면 하느님의 도우심, 곧 神的 啓示가 必要합니다. 하느님의 統治가 가져올 變化를 受容하려는 者는 神祕를 理解할 수 있지만, 抵抗하는 者에게 하느님 나라는 比喩로 남아있을 것입니다.(마르 4,11-12 參照) 比喩는 믿지 않는 이에게는 虛構일 수 있지만, 믿는 이에게는 하느님의 智慧이며 眞理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必要한 것은 萬物 안에서 現存하시고 活動하시는 하느님께 對한 믿음입니다. 바오로 使徒가 힘찬 語調로 告白한 그 믿음을 우리도 各自의 삶 안에서 告白합시다. “우리는 언제나 確信에 차 있습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2코린 5,6ㄴ-7) 글 _ 정진만 안젤로 新婦(수원가톨릭대學校 敎授)

2024-06-16

[알기 쉬운 미사 前例] 領聖體를 위한 準備 祈禱인 主님의 祈禱

“길동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못하고 兄을 兄이라 부르지 못하니”는 許筠의 「洪吉童傳」에 나오는 有名한 句節입니다. 이는 世上을 創造한 ‘全能하신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할 수 있음이 얼마나 幸福한 일인지를 새삼 깨닫게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他人으로부터, 特히 父母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지요. 그래서 自己 子女들의 이런 마음을 잘 헤아리는 父母는 子女가 行한 結果에 對해 認定해 주려고 努力합니다. 그런데 좋은 結果가 있을 때만 ‘稱讚’해 주는 父母보다, 子女가 어떤 일을 해 나가는 過程의 努力 自體에 焦點을 맞추어 ‘激勵’해 주는 父母의 子女가 훨씬 自尊感이 높다고 합니다. ‘結果’보다 ‘過程’을 보다 重要하게 여기는 하느님 아버지의 激勵를 잘 드러내는 것이 ‘主님의 祈禱’가 아닐까 합니다. ‘主님의 祈禱’는 그리스도와 이루는 一致로 가기 위한 旅程에서, 하느님에 對해 어떤 姿勢와 態度로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며 무엇보다 무엇을 請해야 하는지를 잘 가르쳐줍니다. 現行 미사에서 敎會는 主님께서 몸소 가르쳐주신 祈禱, 곧 마태오 福音(6,9-13)과 루카 福音(11,2-4)을 통해 우리에게 傳해진 主님의 氣道를 平和의 人事 前에 바칩니다. 이미 4世紀에 로마 敎會는 이 祈禱를 大部分의 東方과 다른 西方 敎會에서처럼 빵을 쪼갠 後에 朗讀했습니다. 性 그레고리오 敎皇(在位 590~604年)은 오늘날과 같은 方式으로 感謝 祈禱 다음으로 配置했는데, 그 理由는 主님의 祈禱가 感謝 祈禱의 完成을 이룬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敎父들은 이미 “오늘 저희에게 日用할 糧食을 주시고”를 日常生活에 必要한 糧食 外에 天上 樣式인 聖體로 여겼으며, “우리 罪를 容恕하시고”라는 훌륭한 請願을 領聖體 準備로 看做했습니다. 로마 敎會는 主님의 氣道를 ‘主禮者의 祈禱’로 삼아 私製 혼자 바쳤으며, 信者들은 마지막 請願人 “惡에서 求하소서”만 함께 바쳤습니다. 그런데 1964年 「前例 憲章」의 올바른 實踐을 위한 첫째 訓令 「世界 公議會」 48項은 이 祈禱를 共同體의 祈禱로 복귀시켰고, 祈禱 끝에 附屬祈禱가 이어지기 때문에 “아멘”은 削除했습니다. 그러나 司祭가 팔을 벌리고 祈禱하는 姿勢는 그대로 維持했습니다. 附屬祈禱는 이미 超世機 東方과 西方 前例에서 나타납니다. 附屬祈禱의 內容은 一般的으로 主님의 祈禱 마지막 두 請願人 “우리를 誘惑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와 “惡에서 求하소서”를 擴大한 內容으로, 모든 惡으로부터 解放과 現世의 平和를 祈願합니다. 眞正한 平和는 罪와 근심으로부터 人間을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지요. “하느님의 子女되어 救世主의 分付대로 삼가 아뢰오니”라는 勸告에서 알 수 있듯이 初 世紀부터 主님의 祈禱는 오직 洗禮받은 信者들만이 바칠 수 있는 信者 專用 祈禱입니다. 2世紀 初에 作成된 「디다케」 8章에서 그리스도人은 主님의 氣道를 ‘하루에 세 番’ 바치라고 합니다. 이에 따라 敎會는 聖務日禱의 아침과 저녁祈禱, 그리고 미사에서 主님의 祈禱를 바치도록 配置했습니다. 또한 信者 專用 기도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敎會가 옛 傳統인 ‘主님의 祈禱 授與式’을 現行 「어른 入校 禮式」에 復舊시켜서 ‘淨化와 照明의 期間’의 洗禮 前에 뽑힌 이들에게 ‘修鍊式과 授與式’에서 行한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뽑힌 이는 “하느님의 子女가 되는 새로운 精神을 더욱 깊이 깨닫고, 이 精神으로 特히 盛饌 모임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어른 入校 禮式」 25項) 글 _ 윤종식 티모테오 新婦(가톨릭大學校 典禮學 敎授)

2024-06-09

[허영엽 神父의 聖經 속 人物] 苦痛을 受容하고 克服한 義人 욥

“來日은 또 來日의 太陽이 떠오를 것이다.” 마가렛 미첼(1900-1949)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原作으로 만든 映畫에서 나오는 마지막 臺詞이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칠 때 絶望하지 않고 希望을 품고 견디면 分明히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座右銘같은 대목이다. 映畫의 主人公 스칼렛 오하라(俳優 비비안리 分)는 當時의 女性들과는 달리 外向的이며 매우 强靭한 性品을 가지고 있다. 그女는 아름다운 外貌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지만 利己心 때문에 結局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사랑하던 사람은 떠나고, 아이는 죽고, 戰爭으로 인해 그 풍요롭던 農場마저 廢墟가 된다. 그女가 엉망이 되어버린 農場의 흙을 한 줌 움켜쥐고 “모든 게 다 잘 될 거야. 來日은 또 來日의 太陽이 떠오를 테니까”라고 말하는 엔딩 場面이 오랜 時間이 흘러도 記憶의 殘像 속에 남아있다. 욥은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惡한 일을 거들떠보지 않는 信仰의 사람이었다. 하느님 앞에 天使들이 모여 있을 때 그中에 사탄도 끼어있었다. 하느님은 욥의 믿음을 稱讚하면서 욥은 眞實되고 穩全한 사람이라 稱讚했다. 그러자 사탄은 世上에서 自己가 願하는 것을 모두 가진 이가 하느님을 잘 섬기는 것은 當然하다며 그도 苦痛을 當하게 되면 하느님을 怨望할 것이라 斷言한다. 그러자 하느님은 욥을 試驗하도록 許諾했다. 첫 番째 試驗은 財物들에 對한 것이었다. 이웃 部族들이 와서 財産을 掠奪하고 일꾼들을 모두 죽였다. 그리고 벼락이 떨어져 羊 떼와 일꾼들이 모두 죽게 했다. 그리고 두 番째 試驗으로 집을 무너뜨려 子女들을 모두 죽였다. 이런 일을 當하자, 욥은 悔改의 標示로 겉옷을 찢고 머리를 깎았고 祈禱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태어난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主님께서 주셨다가 主님께서 가져가시니 主님의 이름은 讚美받으소서.”(욥 1,21) 사탄은 욥이 試驗에 넘어가지 않자, 욥이 머리에서 발바닥까지 甚한 부스럼이 나는 病을 앓게 했다. 욥은 잿더미에 앉아 깨진 질그릇 조각으로 몸을 긁었다. 그 모습이 너무 悲慘해 아내는 하느님을 詛呪하고 죽으라고 한다. 그러자 욥은 아내에게 우리가 하느님께 좋은 것을 받았다면 나쁜 것도 받아야 한다고 이른다. 욥은 이어지는 苦痛의 삶 속에서 한때는 흔들리기도 했지만, 人生의 神祕를 깨닫고 悔改했다. 욥은 苦痛을 통해 人生의 虛無와 人間의 無知를 徹底히 깨닫는다. 욥은 悔改를 通해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갈 수 있었다. 우리도 살다 보면 豫想하지 못했던 어려움을 많이 겪게 된다. 그럴 때 斷念하고 抛棄한다면 모든 것은 끝이다. 욥의 이야기를 통해 苦痛의 問題 解決과 우리의 마지막 希望이 어디에 있는지 잘 깨달아야 한다. ‘가시에 찔리지 않고 薔薇꽃을 모을 수 없다’는 外國 格言처럼 苦痛은 人生에서 避할 수 없다. 그래서 詩人 괴테는 “苦難이 있을 때마다 그것이 참된 人間이 되어 가는 過程임을 記憶해야 한다”고 人生에서 苦痛의 重要性을 强調한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新婦(서울大敎區 靈性心理相談敎育院長)

2024-06-09

[말씀默想] 年中 第10週日

오늘 福音은 律法敎師들과 예수님 家族들의 誤解와 臆測이 빚어낸 事件을 들려줍니다. 緊張感이 歷歷한 이 福音은 예수님께서 어느 집에 들어가시자 그곳으로 몰려든 많은 群衆 때문에 療飢할 時間마저 없었다고 알려줍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一行은 飮食을 들 수조차 없었다”(3,20)라는 表現 속에서 하느님 나라의 擴張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의 어느 집에 머물고 계실 때 두 集團의 사람들이 이 집으로 接近하며 이야기가 展開됩니다. 한 部類는 예루살렘에서 派遣된 예수 調査團 律法敎師들이고, 다른 한 部類는 예수님의 家族입니다. 두 部類는 서로 다른 用件을 가지고 왔지만, 目的은 예수님에 對한 抵抗이라는 共通點을 가지고 있습니다. 律法敎師들은 예수님께서 魔鬼의 우두머리인 베엘제불의 힘으로 사탄을 쫓아낸다며 誹謗합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이라는 엄청난 謀陷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中傷謀略과 예수님의 治癒 活動에 對한 敵對的 侮辱이 오히려 그분 治癒 奇跡의 歷史性을 證明하고 있습니다. 이 緊張은 한 段階 더 나아가 예수님 親戚들의 行動으로 擴大됩니다. 親戚들의 反應은 그분이 “미쳤다”(3,21)는 것입니다. ‘미쳤다’는 말을 直譯하면 ‘精神이 제자리에 서 있지 못하고 나갔다’라는 뜻으로 非正常的인 精神 狀態 곧 鬼神에 사로잡힌 狀態를 의미합니다. 及其也 親戚들은 “그분을 붙잡으러”(3,21) 나섰습니다. ‘붙든다’는 表現이 마르코복음에서 ‘逮捕하다’라는 否定的 意味로 여러 番 登場함을 볼 때 家族과의 날 선 緊張狀態를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親戚들은 그분이 ‘미쳤다’고 誤解하고 律法敎師들은 그분이 ‘鬼神들렸다’고 陰害합니다. 예수님께서는 親戚들에게 그 어떤 對應도 없이 ‘無視’하는 反應을 보이시지만, 律法敎師들에게는 날카로운 批判을 하시며 다른 듯 같은 反應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律法敎師들의 謀陷에 세 가지 反證으로 答辯하십니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3,23),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3,24),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3,25)라고 말씀하시며 그들 論理의 虛構性을 暴露하십니다. 나아가 예수께서는, 聖靈의 活動마저 바알의 도움으로 둔갑시키고 있는 그들에게, 露骨的이며 意圖的인 拒否는 容恕될 수 없다며 强勁하게 말씀하십니다. 이 이야기를 敍述하는 方式 또한 퍽 興味롭습니다. ‘집’을 둘러싸고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는데 어떤 이들은 집 안에 있고 어떤 이들은 집 밖에 머물고 있습니다. 집을 두고 ‘案’과 ‘밖’을 나누는 分離가 印象的입니다. 왜냐하면 집 안팎의 空間的 區分은 ‘內部人’과 ‘外部人’에 對한 날카로운 區分으로, 事件 展開의 有用한 階段 役割을 擔當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親戚과 律法敎師들이 예수님를 理解하지 못하는 ‘外部人’으로 대변된다면, 예수님과 함께 머물며 그분 “周圍에 앉은 사람들”(3,34)은 ‘內部人’으로 代表됩니다. 이러한 絶妙한 大邱는 著者가 어디에 무게를 두고 싶어하는지 斟酌하게 합니다. 外部人은 그야말로 집 밖에 있는 이들로서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고 距離두기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親戚들이 그러합니다. 血肉敵으로는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內部人’이지만, 그분을 理解하지 못하는 ‘外部人’이 되어버립니다. 律法敎師들 亦是 別般 다르지 않습니다. 宗敎的 中心地 예루살렘에서 왔으니 宗敎的 役割 遂行의 中心人으로서 ‘內部人’이라 自負할 수 있지만, 實狀은 예수님을 陰害하며 攻擊하는 이들로서 그분과 함께하지 않는 ‘外部人’이라 指稱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그는 魔鬼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魔鬼들을 쫓아낸다”(3,22)고 主張하며 하느님의 統治를 拒否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心理的 障壁뿐만이 아니라 律法敎師들과 親戚들은 外的으로도 집 안에 들어오지 않은 채, 집 밖에 서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밖에 서 있는’ 律法敎師들을 부르셔서 “比喩를 들어 말씀”(3,23)하셨고, 예수님의 親戚들은 “밖에 서서”(3,31) 예수를 부르기 때문입니다. 한바탕 舌戰이 끝난 後, 예수님께서는 當身 周圍에 둘러앉은 ‘內部人’들을 ‘하나’로 묶는 새로운 空間을 創出하십니다. 이른바 새로운 하느님 家族(Nova Familia Dei)으로서의 ‘새로운 範疇’입니다. 이 새로운 共同體는 血緣도, 律法 中心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實踐하는 사람의 모임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實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內部人’이며, ‘예수님과 함께하는 사람’이고, ‘새로운 하느님의 家族’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實踐한다는 것은 마르코에게 있어서 ‘죽기까지 그분을 따르는 일’입니다. 福音이 던지는 質問이 가슴에 匕首처럼 날아와 꽂힙니다. “當身은 外部人인가요? 內部人인가요? 아니면 內部人 같은 外部人입니까?” ‘內部人’이지만 ‘外部人’이 될 危險이 늘 도사리고 있기에 깨어있는 努力이 切實합니다. 글 _ 臨未熟 엘렉타 修女(툿찡 布敎 베네딕도修女會 大邱修女院)

2024-06-09

[敎會 常識 팩트 체크] ‘略式 提議’는 없다?

神父님 여러 名이 함께 미사를 執典하시는 모습을 보신 적이 있나요? 그럼 除隊 가운데 계시는 主禮 神父님과 함께 執典하시는 神父님들의 服裝이 다를 때가 있다는 걸 알아채셨을 것 같습니다. 主禮 神父님은 품이 큰 半圓形의 옷을 입고 있는 反面, 다른 神父님들은 발목까지 길게 늘어진 흰옷에 긴 띠를 목에 걸치고 계시기도 합니다. 一旦 主禮 神父님이 입으신 옷은 ‘祭儀’입니다. 그럼 다른 神父님들이 입고 계신 옷은 무엇일까요? 어떤 분은 神父님들의 이 옷을 두고 ‘略式 提議’라는 表現을 使用하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옷은 事實 ‘略式 提議’가 아니라 長白衣에 領帶를 걸친 것입니다. 長白衣는 司祭가 미사 때 갖춰야 할 肉身과 靈魂의 潔白을 象徵하는 옷입니다. 이름 그대로 옷자락이 긴(長), 흰(白)색의 옷(衣)입니다. 그리고 匠伯의 위로 목에 걸쳐 두르는 幅이 넓고 긴 띠는 領帶라고 부릅니다. 領帶는 司祭의 職責과 義務, 權限과 品位를 드러냅니다. 여러 前例 奉仕를 하면서 神父님의 前例服을 有心히 보신 분들은 “어? 長白衣는 이렇게 생기지 않았는데요?”라고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普通 提議 안에 입는 長白衣는 더 얇고 목 部分의 模樣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領帶만 걸쳐 입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長白衣를 一般 長白衣와 區分해서 ‘禮節 長白衣’라고 부릅니다. 祭儀는 長白衣와 領帶 위에 걸쳐 입는 옷으로, 예수님의 멍에를 象徵하는 前例福입니다. 무엇보다 “미사나 美社와 直接 連結된 다른 거룩한 禮式 때 主禮 司祭가 입어야 할 固有한 옷”(「로마 미사 經本 總指針」 337項)이기 때문에, 特別한 理由가 없다면 神父님들은 반드시 提議를 입고 미사를 執典하십니다. 그렇다면 禮節 長白衣는 어떤 境遇에 입을까요? 「로마 미사 經本 總指針」에는 “共同 執典者들 數는 많고 提議가 不足할 때와 같은 正當한 理由가 있으면 主禮者를 뺀 共同 執典者들은 匠伯의 위에 領帶만 메고 提議는 입지 않아도 된다”(209항)고 說明돼 있습니다. 미사 中 우리에겐 神父님의 提議만 보이지만, 神父님은 提議 안에도 여러 옷을 입고 있습니다. 方今 말씀드린 長白衣와 領帶 外에도 惡魔와의 鬪爭, 克己, 禁慾生活을 의미하는 ‘띠’, 어깨에 걸치는 長方形의 亞麻布로 ‘救援의 投球’를 象徵하는 ‘蓋頭布’도 着用합니다. 이 5가지 前例福에는 各各 前例服의 意味를 담은 祈禱文이 있는데요. 神父님들은 미사 前 이 前例服들을 하나씩 입을 때마다 各各에 該當하는 祈禱를 바칩니다. 이처럼 神父님들은 미사 때마다 겹겹이 옷을 입고 祭臺에 오르십니다. 勿論 이 모든 前例服은 神父님들의 平常服이라 할 수 있는 手段이나 클러지 셔츠 위에 입습니다. 神父님들이 恒常 前例服을 갖춰 입는 것은 거룩한 미사를 드리기 위해서겠지요. 날이 漸漸 더워져 옷차림을 가볍게 하고 聖堂을 찾는 분들도 많으실 것 같습니다. 神父님만큼 옷을 여러 겹 껴입지는 않더라도,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 마음으로 옷차림을 端正히 한다면 더 敬虔한 마음으로 미사에 參禮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2024-06-09

[말씀默想] 至極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聖體 聖血 大祝日

木曜日 아침, 學生들과 미사를 奉獻하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學生들이 미사를 기다립니다. 경당에 자리가 不足할 程度로 아이들이 몰려오곤 하는데요. 미사에 參禮한 學生들에게 핫도그나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주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生命의 빵’ 보다는 ‘間食’을 찾아서 오는 것이지요. 大部分의 아이들은 곧잘 두 손을 모으고 聖歌를 함께 부르며 祈禱 소리에 목소리를 보태곤 합니다만, 미사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但只 間食을 먹고 싶어서 온 아이들이다보니 가끔은 애를 먹기도 합니다.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아이도 있고 繼續해서 잡담하는 아이들도 있으니까요. 그런 모습을 보신 분들은 여쭈어보시곤 합니다. “神父님, 아이들이 이 미사의 意味를 알까요?” 아이들이 미사에 沒入하는 것 같지도 않고, 神父님 이야기도 잘 듣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게다가 間食費度 많이 드는데 굳이 이렇게 할 理由가 없지 않는가 하고 말이지요. 그럴 때면, 오늘 마주하는 福音 이야기를 마음에 다시 새깁니다. 마르코 福音史家는 그날 마지막 晩餐 이야기를 傳하고 있습니다. 그날은 예루살렘에 들어온 나흘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이집트 脫出을 記念하고 記憶하기 위해, 어린 羊을 잡아 피를 門설柱에 바르고 고기는 구워서 먹고, 1週日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었습니다. 파스카(페社흐)와 無酵節 祝祭인데요. 이 무렵이면 유다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몰려들기 때문에, 巡禮客들은 묵을 房을 찾기도 어려웠을 겁니다. 그런데 그 渦中에도 예수님 一行은 ‘큰 二層 房’을 마련합니다.(학자들은 이 房의 主人이 마르코 福音史家라 보았습니다만, 近來에는 使徒 요한이 屬한 私製家門의 別莊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支持하고 따르던 사람 中에는 그 程度 되는 實力者가 있었음을 생각할 만한 대목이지요. 晩餐에 參與한 弟子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기다리던 메시아가 오신다는 파스카 祝祭, 歡迎받으면서 들어온 예루살렘, 부러울 것 없이 큼직한 房에 모인 弟子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베드로의 壯談에서 유다의 背信에 이르기까지, 弟子들은 各自 저마다의 생각이 있었겠지요. 그 모두를 細細히 헤아릴 길은 없지만, 分明하게 斟酌해 볼 만한 것 하나가 있습니다. 그들 中 어느 누구도 예수님 마음과 같은 이들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들에게 빵과 葡萄酒의 모습으로, 當身을 내어주셨습니다. 弟子들은 모든 事件이 이루어지고 나서야, 뒤늦게 깨닫습니다. 함께 나누어 먹은 그 빵은 예수님의 부서진 마음 彫刻이었다는 것을. 함께 나누어 마신 그 盞은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弟子들은 그 晩餐을 行하고, 晩餐 때의 일을 입으로 말하고 글로 써서 우리에게 傳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그날의 그분을 記念하고 記憶해 왔습니다. 오늘의 우리도 말씀을 듣고 빵을 떼어 나누고 있습니다. 果然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聖餐禮에 參禮하고 있나요. 質問을 조금 바꾸어 보겠습니다. 聖體分配者는 聖體를 傳해드리면서 “그리스도의 몸”하고 招待하며, 聖體를 拜領받는 校友는 “아멘”하고 應答합니다. 그런데, 오늘만큼은 그 “아멘”이라는 對答은 할 수 없고, 여러분 各自가 나름대로 對答해야 한다면 어떻게 말하시겠습니까. “아멘” 外에 다른 對答이 떠오르지 않으시는가요. 다시 質問을 바꾸어 보겠습니다. 聖體를 받으면서 “아멘”하고 應答하실 때 果然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우리는 그 말그릇에 어떤 마음을 담고 있습니까.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몸” 그 한마디는 宣言이자 質問입니다. 이 동그란 밀떡의 模樣으로 주어진 것이 무엇인가. 이것을 받아먹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을 받아먹은 當身은 어떻게 살 것인가. “아멘”은 이 質問에 對한 應答을 아우릅니다. “아멘”은 믿음입니다. 이 작은 빵조각이 主님이라는 것을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아멘”은 同意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方式에 同意하는 것입니다. “아멘”은 記憶입니다. 主님께서 스스로 飮食이 되셨다는 것, 우리가 主님을 飮食으로 먹었고, 그래서 우리가 다시 살 수 있었다는 것을 記憶하는 것입니다. “아멘”은 省察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먹은 이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스스로 묻습니다. “아멘”은 다짐입니다. 예수님과 하나 된 우리는 이제 예수님을 實踐하기로 합니다. 적어도 그의 삶과 方式을 흉내내보기로 합니다. 어디 그뿐일까요. 그렇습니다. 聖餐禮에 參與하는 우리의 마음도 하나같지는 않겠지요. 때로는 質問과 疑心, 때로는 무심하고 冷淡한 마음, 때로는 限없이 기대고 싶은 마음도 “아멘” 말마디에 담아내겠지요. 우리는 그렇게 말로는 다할 수 없어, 우리 마음을 “아멘” 한마디에 담아내는 것이겠지요. 미사를 마치고 핫도그 配達을 기다리고 있는 어느 날에 누군가가 다시 물어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이제는 對答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勿論 핫도그에 담은 제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 같을 수는 없겠지만, 오랜 時間이 지난 뒤에 아이들이 無心히 핫도그를 먹다가, 불현듯 우리의 눈길과 사랑을 記憶하기를 바란다고요. 그때라도 아이들과 우리의 마음이 만난다면 그것으로 充分할 것이라고요. 只今은 어긋난 그 마음도 언젠가 結局 하나가 된다고 믿습니다. 弟子들은 뒤늦게 깨달았지만 그 사랑을 記憶하며 行하기 始作했고, 그것은 우리 亦是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모신 조각난 빵에는, 사랑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에 부서진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오늘도 그 빵을 모시며, 그 사랑을 조금 더 닮아가기를 希望합니다. 글 _ 전형천 미카엘 神父(대건중學校 校牧室長)

2024-06-02

[알기 쉬운 미사 前例] 性變化와 種

밀레의 그림 ‘만종’(晩鐘)의 뜻은 프랑스語 ‘L’Angelus’로 ‘三鐘祈禱’입니다. 들판에서 일하다가 聖堂 鐘소리를 듣고 祈禱하는 農夫 夫婦가 가운데 있고 한쪽에 聖堂의 鐘塔이 멀리 보이는 作品입니다. 이 그림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聖堂에서 울리는 鐘소리가 殷殷하게 들리는 듯합니다. ‘종’을 敎會에서 使用하게 된 것은 그리스도교 信仰이 自由를 얻은 313年 밀라노 勅令 以後로 推定됩니다. 라틴語로 ‘종’을 ‘campana’라고 부르는 理由는 當時 이탈리아 캄파나 地域에서 靑銅 産業이 發展했기에 그곳에서 種을 많이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비니아노 敎皇(在位 604-606年)李 처음으로 祈禱와 미사 時間에 聖堂 種을 울리도록 規定했습니다. 現在 미사 中 複寫가 작은 鐘을 使用하는 境遇는 聖變化와 關聯됩니다. 곧 敎會 共同體가 奉獻한 禮物인 빵과 葡萄酒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거룩하게 變化하는 祝聖의 瞬間들이지요. 빵과 葡萄酒가 聖體와 聖血로 變하는 築城 時點은 東方 前例와 西方 前例가 서로 다르게 解釋했습니다. 東方은 築城을 祈願하는 ‘聖靈 請願 祈禱’(epiclesis)를 聖體·聖血 祝聖의 重要한 要素로 생각했지만, 書房은 第2次 바티칸公議會 前까지 그리스도의 말씀인 ‘盛饌 제정문’으로 祝聖이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西方 敎會가 예수님 말씀에 重點을 두는 契機를 마련한 交付 中에 암브로시오 聖人이 있습니다. 그는 著書 「聖事論」에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築城 前에 빵은 그저 빵일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말씀이 말해지는 卽時 빵은 그리스도의 몸이다. … 葡萄酒와 물이 든 盞도 그리스도의 말씀 前에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말씀이 있는 卽時 그것은 百姓을 救援할 피가 된다.” 約 1600年 동안 로마 敎會의 唯一한 感謝 祈禱이고 現在의 ‘感謝 祈禱 第1樣式’인 ‘로마 專門’(Roman Canon)에는 聖靈이라는 單語가 마지막 榮光頌(Doxologia)을 除外하고는 보이지 않습니다. 비록 聖靈을 具體的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禮物에 對한 聖靈의 役割을 言及합니다. 盛饌 제정문을 하기 前에 하는 “週 하느님, 이 禮物을 너그러이 받아들이고 降服하시어 참되고 完全하며 合當한 祭物 사랑하시는 聖者 우리 主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하소서”라는 部分이지요. 第2次 바티칸公議會에서는 이브 콩가르를 비롯한 여러 神學者 硏究에 힘입어 ‘예수님의 盛饌 制定 말씀’과 함께 聖靈을 빵과 葡萄酒를 聖體·腥血로 변화시키는 祝聖의 主人公으로 認定했습니다. 그래서 로마 專門인 第1樣式 以外 나머지 樣式에는 ‘築城 起源 聖靈 請願 祈禱’가 包含되었으며, 이 瞬間에는 司祭가 禮物 위에 손을 펴 얹도록 했습니다. 그렇다면 미사에서 鐘을 치는 瞬間이 築城과 關聯 있다는 次元에서 볼 때, 基本的으로 세 番의 瞬間을 말할 수 있습니다. 聖靈 請願을 하며 司祭가 손을 禮物 위에 얹는 瞬間과 빵에 對한 예수님 말씀을 하고 祝聖된 빵을 들어 올리는 瞬間, 또 盞에 對한 예수님 말씀을 하고 祝聖된 피를 담은 盞을 들어 올리는 瞬間입니다. 이에 더하여 聖體와 聖血에 對해서 깊이 절을 하는 瞬間에 鐘을 칩니다. 이런 觀點에 볼 때, 司祭가 領聖體하는 瞬間에 치는 鐘은 아무 必要가 없습니다. ‘聖靈 請願 祈禱’와 ‘예수님의 盛饌 제정문’을 통하여 築城돼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된 聖體와 聖血을 들어 올릴 때, 가만히 보기만 하지 않고 性 비오 10世께서 알려주신 것처럼 토마스 使徒가 한 告白인 “저의 主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을 속으로 하면 좋겠습니다. 글 _ 윤종식 티모테오 新婦(가톨릭大學校 典禮學 敎授)

2024-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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