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만   중국   일본 
가톨릭新聞

北韓軍 墓地에서

여러 해 前 김금화 만신이 弟子들을 데리고 坡州의 ‘敵軍墓地’에 가서 北韓 軍人들의 넋을 달래는 굿을 하는 光景을 記錄 映畫로 보았다. 만신은 아침부터 해가 빠질 때까지 氣盡脈盡할 程度로 춤을 추며 많은 무덤을 돌면서 애를 썼다. 어둑어둑해질 무렵 마침내 接神이 된 그의 입에서는 憤怒한 軍人들의 辱說이 쏟아져나왔다. 그리고 “오마니!”하고 울부짖는 少年의 목소리가 들렸다. 抑鬱함과 설움, 아픔과 그리움에 가득한 少年兵의 울부짖음은 한동안 내 귓가를 맴돌았다. 파주시 적성면 답곡리 山55番地에 있는 敵軍墓地는 이제 ‘北韓軍墓地’로 불린다. 같은 곳에 있던 中共軍(中國人民支援軍) 437名의 遺骸는 2014年 3月 以後 모두 送還되고 碑石만 남았다. 北韓軍의 墓石에는 이름과 階級, 戰死한 날짜와 場所가 標示되어 있고 이름이 없는 境遇도 많다. 1·21 事態를 비롯해 여러 時期에 南派된 ‘武裝共匪’들도 이곳에 묻혀 있다. 이름도 場所도 없이 人員數萬 標示된 最近의 무덤은 潛水艦 浸透 같은 事件으로 목숨을 잃은 北韓軍이 아닐까 斟酌한다. 몇 해 前부터는 議政府敎區가 慰靈의 달에 이곳에서 미사를 奉獻하고 있다. 미사를 드리면 保守 團體에서 와서 抗議와 示威를 하곤 했다. 왜 우리의 怨讐이자 主敵인 北韓 軍人들을 위해서 祈禱하느냐는 것이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 曺國을 元首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 맨주먹 붉은 피로 怨讐를 막아내어 / 발을 굴러 땅을 치며 義憤에 떤 날을…” 우리 世代는 어릴 때 6·25 노래를 數없이 불렀고 只今도 그 歌詞와 멜로디를 뚜렷이 記憶한다. 노래 속의 怨讐는 다름 아닌 우리 同族이자 兄弟였다. 歲月이 흐르고 情勢가 變하자 그 怨讐를 다시 겨레, 同胞, 民族으로 부르게 되었다. 南北 和解의 움직임은 1970年代에도 1980年代도 있었고 2000年代에 와서는 南北 頂上會談도 여러 次例 열렸다. 하지만 平和와 相生, 和解와 協力은 어느새 먼 이야기가 되었고 南北은 다시 怨讐처럼 으르렁거리며 恐喝과 脅迫의 言語를 濫發하고 있다. 北韓은 다시 或은 如前히 主敵으로 남았다. 戰爭은 人間의 가장 野蠻的이고 野獸的인 屬性을 드러내면서 自身과 相對 모두를 非人間化시킨다. 어쩌면 憎惡와 復讐는 容恕와 和解보다 더 原初的인 人間의 感情인지 모른다. 韓國 社會를 보면 戰爭의 傷處와 트라우마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代물림되는 듯하다. 그것이 제대로 治癒되지 않았기에 兄弟와 이웃에게 憎惡의 言語를 내뱉으며 對話가 斷絶되고 陣營論理가 强化되는 것은 아닐까? 이 땅의 그리스도人은 이 지긋지긋한 對決과 憎惡의 現實을 바꾸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서로가 被害者이면서 加害者였던 過去의 굴레를 벗어나 共同의 未來를 열어가기 위해 어떻게 ‘傷處받은 治癒者’가 될 수 있을까? 글 _ 신한열 프란치스코 搜査(떼第共同體 搜査·公益團體 이음새 代表)

2024-06-23

젊은이를 모으는 祕訣

聖 바오로 6歲 敎宗은 어느 날 떼提議 로제 修士에게 ‘靑年 司牧의 열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젊은이들과 疏通하고 그들에게 信仰을 傳하는 祕訣이나 方法을 말해달라는 것이었다. 68革命을 거치면서 유럽의 많은 젊은이들이 傳統과 權威를 拒否하며 敎會에서 멀어져 갈 때였다. 靑年들은 自由를 抑壓하는(것 같은) 政府와 아버지 그리고 敎會의 權威를 더 以上 當然視하지 않았고 ‘禁止를 禁止한다!’가 口號처럼 되었다. 敎會의 旣成世代는 여기에 큰 憂慮와 警告를 보냈고 그럴수록 靑年들과의 間隙은 더 깊어졌다. 그런데 急激한 世俗化의 물결 속에서도 떼制를 찾는 젊은이들은 漸漸 많아졌다. 敎宗의 質問도 그런 脈絡에서 나온 것이었다. 젊은이들을 모으는 어떤 특별한 方法도 없다고 생각한 로제 搜査는 여기에 卽答할 수 없었다. 떼第共同體는 젊은이들을 가르치려 하기보다 먼저 그들의 얘기를 들어주었고 單純하고 아름다운 共同祈禱에 招待했다. 水使들은 더 平等하고 自由로운 世上에 對한 靑年들의 熱望에 귀 기울이면서 이 땅을 모두에게 더 살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한 그들의 獻身을 激勵했다. 그때나 只今이나 떼提議 손님맞이 施設은 素朴하고 飮食은 조촐하다. 우리는 젊은이들을 있는 그대로 歡待하면서 그들의 苦悶과 아픔, 會議와 熱望을 忍耐롭게 들어주려 한다. 이런 私心 없는 傾聽이 聖 바오로 6歲 敎宗이 물었던 靑年 司牧의 열쇠일지 모르겠다. 가장 큰 國際 가톨릭 行事인 世界靑年大會(WYD)가 2027年 韓國에서 열리게 되었다. 主人公인 젊은이들을 招待하고 參與를 끌어내기 위해 智慧와 力量을 모아야 할 것이다. 敎會와 信仰이 靑年들의 優先順位에서 밀려나는 現實에서 WYD는 우리에게 큰 挑戰이자 機會다. 오늘날 靑年들의 눈에 비친 敎會는 어떤 모습일까? 敎會는 果然 모든 이를 위한 普遍的 友愛의 場所가 되고 있는가? 多樣性이 尊重받고 慶祝되는 곳인가? 敎會는 女性과 少數者들에게 安全한 空間인가? 敎會의 意思決定 過程에서 女性과 平信徒, 젊은이들의 位置는 어떠한가? WYD를 통해 젊은이들이 삶을 바꾸기를 期待하기보다 敎會가 젊어지려고 努力하는 것이 더 必要하지 않을까? 젊은이들을 敎會로 招待하는 것은 그들이 돌아온 蕩子처럼 敎會에 다시 나오기를 期待하는 것이 아니다. 老齡化하는 敎會에서 反省과 灰心이 必要한 사람은 靑年들보다 더 많은 責任을 진 聖職者와 修道者 그리고 平信徒 指導者들이다. 우리는 社會와 敎會 안에서 어떻게 福音을 살아가고 있는가? 젊은이들에게 어떤 삶의 模範을 보여주고 있는가? 우리는 삶의 意味를 찾는 젊은 벗들을 傾聽하며 同伴하고 있는가? 새萬金에서 열렸던 世界 잼버리처럼 WYD도 한여름에 進行된다. 빈틈없는 準備가 必要할 것이다. 더 重要한 質問은 이것이다. 韓國의 젊은이들에게 敎會는 어떤 場所인가? 글 _ 신한열 프란치스코 搜査(떼第共同體 搜査·公益團體 이음새 代表)

2024-06-16

함께 祈禱할 때

韓國그리스도교信仰과직제협의회가 創立 10周年을 맞았다. 韓國基督敎敎會協議會와 聖公會, 正敎會를 包含한 加入 敎團 그리고 韓國天主敎主敎會議가 함께하는 이 協議會는 그리스도人들의 一致와 敎派 사이 信仰의 親交를 도울 目的으로 始作되었다. 世界的인 次元에서도 가톨릭교회는 世界敎會協議會의(WCC)의 會員 敎團이 아니지만 ‘信仰과 職制’(Faith and Order)에는 正式 멤버로 參與하고 있다. 第2次 바티칸公議會 以後 韓國에서 展開된 一致運動의 歷史를 이어받은 信仰課職第協議會는 每年 一致週間의 祈禱會와 23回에 이른 一致포럼, 神學生 交流, 避靜과 巡禮, 音樂會와 文化祭 等 뜻깊은 活動을 벌여 왔다. 여기에는 가톨릭과 여러 改新敎會들이 參與한다. 하지만 韓國에서 그리스도人 一致運動은 信者 大衆으로 擴散되지 못했고 敎派들 사이의 障壁은 如前히 높다. 改新敎會와 信者들의 絶對 多數는 保守的이고 가톨릭교회에 對해 敵對的이거나 非友好的이다. 가톨릭信者들 亦是 改新敎와 改新敎人에 對해 否定的인 생각을 가진 境遇가 적지 않다. 共通的인 것은 서로에 對해 잘 모른다는 事實이다. 흔히 韓國 改新敎人들의 가톨릭에 對한 印象은 第2次 바티칸公議會 以前의 敎會 모습에 머물러 있다. 다른 宗敎에 對해서는 比較的 慣用的인 가톨릭信者들이 唯獨 改新敎人에 對해서는 排他的인 態度를 보이는 境遇가 種種 있다. 改新敎 牧師나 信者들이 가톨릭 機關이나 司祭, 修女, 信者들에게 ‘庶子(庶子)’ 待遇를 받는다는 이야기도 듣는다. 敎派 사이에 이런 間隙이 存在하는 韓國에서 그리스도人들이 便安하게 서로를 만나고 可能하면 함께 祈禱하는 機會가 많아지면 좋겠다. 公益團體 ‘이음새’는 改新敎와 가톨릭의 聖職者와 修道者들이 坡州 藝術人마을에 있는 展示場 兼 琉璃畫 攻防인 ‘有利再’에서 만나 藝術과 삶을 이야기하고 點心을 먹는 모임을 不定期的으로 열고 있다. 食事 後에는 近處 懺悔와 贖罪의 聖堂에 들러 暫時 沈默祈禱를 하고 헤어진다. 우리는 또 每달 둘째 金曜日 저녁, 가톨릭과 改新敎 몇몇 團體들과 함께 聖公會 서울大聖堂에서 ‘平和를 위한 祈禱’를 드린다. 떼制의 노래와 沈默을 곁들인 이 祈禱會에는 年齡과 國籍이 다양한 여러 敎派의 信者 80餘 名이 모인다. 지난해 9月 이곳으로 옮겨 오기 前까지는 예수회센터에서 平和祈禱를 했다. 除隊 쪽을 바라보며 모두 한 方向으로 앉아서 드리는 單純素朴한 默想祈禱 안에서 많은 이들은 ‘이미 이루어진 日치’를 經驗한다. 그리스도교 敎派들 사이에 敎理와 傳統의 差異가 있지만 우리를 하나로 모아 주는 것들이 나누는 것들보다 더 많고 重要하다. 分裂되고 쪼개진 이 韓半島에서 和解는 그리스도人의 使命이다. 예수님은 地上의 마지막 瞬間까지 弟子들이 하나가 되기를 祈禱하셨다. 世上이 믿을 수 있도록. 글 _ 신한열 프란치스코 搜査(떼第共同體 搜査·公益團體 이음새 代表)

2024-06-09

幸福하지 않아도 價値 있는 삶

우리 周圍에는 不安과 스트레스로 인한 睡眠 障礙로 苦生하는 사람이 뜻밖에 많다. 지난 몇 年 동안 憂鬱症으로 診療받는 患者가 繼續 늘어났다. 統計를 보면 2022年에 이미 100萬 名이 넘었고 그 가운데 20代 女性의 增加가 가장 눈에 띈다. 憂鬱症은 自殺 原因 가운데 첫 番째다. 견디기 힘든 苦痛의 어두운 터널 속에서 그 끝이 보이지 않아 極端的인 選擇을 하는 것이다. 憂鬱症을 오래 앓는 사람을 만나면 조심스러워진다. 나는 섣불리 判斷하거나 도움말을 주려 하지 않고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努力한다. 그런데 마음의 病을 앓는 사람은 그것을 털어놓기가 쉽지 않다. 가까운 사람들이 憂鬱症의 信號를 알아채지 못하거나 잘못된 反應을 보여서 病勢를 키우기도 한다. 病은 자랑하라고 하지만, 如前히 남아있는 精神病과 精神病院에 對한 否定的인 認識과 烙印찍기 때문에 治療를 回避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能力과 成就를 最高의 價値로 삼는 오늘의 韓國 社會에서 아프고 弱한 自身을 認定하기란 쉽지 않다. 自身이 안 괜찮고 힘들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큰 勇氣가 必要하다. 곁에 남아 自身을 支持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도움이 되고 孤立될수록 治療가 어렵다. 憂鬱症 患者 가운데 35%가 60代 以上이고 老人 憂鬱症도 增加 趨勢이지만 韓國은 靑少年 憂鬱症이 다른 나라에 비해 越等히 높다. 入試 地獄과 競爭의 重壓感에 맘껏 뛰놀지 못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憂鬱症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고 敎師나 聖職者, 首都者도 例外가 아니다. 특별한 原因이 없이 생기기도 한다. 專門家들은 自己 基準이 높고 남을 많이 의식하는 사람에게 더 쉽게 發病한다고 말한다. 이수연 作家는 甚한 憂鬱症과 自殺 衝動으로 스물세 살 때 閉鎖 病棟에 入院했다. 긴 入院 生活과 相談 治療, 入院과 退院을 反復하면서 그는 글을 썼다. 첫 에세이集 「조금 憂鬱하지만, 普通 사람입니다」(놀, 2018)에서 그는 幸福하지 않고 나아가지 못해도 살아갈 價値와 理由가 있다고 淡淡히 말한다. 이 鬪病記는 삶에 對한 어떤 愛着도 期待도 없이,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무섭고, 앞으로 나아지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갇힌 絶望的인 憂鬱症 患者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아무도 理解하지 못할 것 같은 아픔을 간직한 채 ‘흔들리고 망가져도 最善을 다해’ 살아간다. 그 過程에서 精神과 主治醫는 忍耐와 믿음을 가지고 그의 얘기를 傾聽하며 同伴했다. 그는 무너졌기에 새로워졌고, 自身과 苦痛을 겪는 이웃에게 말을 걸면서 創作活動을 活潑히 이어가고 있다. ‘마음의 感氣’를 앓으면서도 소리 내어 울지 못하는 사람이 如前히 많다. 우리는 아픈 사람을 異常한 사람으로 여겨 隔離하고 排除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社會의 認識과 態度를 바꿀 수 있을까? 글 _ 신한열 프란치스코 搜査(떼第共同體 搜査·公益團體 이음새 代表)

2024-06-02

대림동을 걸으며

公休日 午前 11時 大林驛 6番 出口. ‘多樣性의 큰 숲, 大林(大林)棟을 걷다’라는 一回性 모임에 열 名이 모였다. 碩博士 課程의 硏究者와 言論社에서 일하는 사람이 여럿이었고 在美僑胞와 中國系 美國印度 있었다. 中國 宣揚과 옌벤 出身의 在中同胞 留學生 두 사람이 案內와 解說을 맡았다. 서울 영등포구의 第一 南쪽에 있는 大林洞은 公園과 綠地가 가장 적은 洞네다. 1990年代까지 500名이 채 되지 않던 中國人 住民 數가 이제 1萬1000名이 넘는다. 全國에서 가장 큰 ‘차이나타운’李 된 이곳은 週末 流動 人口가 8萬 名에 이른다. 大林洞 길에는 換錢所와 비자 業務를 代行하는 旅行社가 많이 보인다. 大林驛 12番 出口에서 大林중앙시장으로 들어가면 中國말이 主로 들리고 中國式 食材料에 中國 香氣가 물씬 풍긴다. 프랜차이즈 商店이 거의 없고 個性있는 가게들이라 구경거리가 많다. 大林洞은 언제부턴가 犯罪의 溫床이라는 나쁜 이미지가 씌어졌다. 映畫 ‘犯罪都市’와 ‘靑年警察’의 背景이 大林洞이었다. ‘靑年警察’에서는 朝鮮族 組織暴力輩가 젊은 女性들을 拉致하여 卵子를 摘出해 賣買하고, 쓸모없다고 判斷되는 被害者들은 長期賣買 組織에 팔아넘기는 惡行을 저지른다. 大林洞이 ‘警察도 避하는 無法地帶’라는 臺詞도 나온다. 大林洞 住民과 移住民 團體는 “人種差別的 嫌惡表現物인 映畫 ‘靑年警察’ 上映으로 人格權과 差別받지 않을 權利 等의 侵害를 입었다”며 製作社 相對로 損害 賠償 請求 訴訟을 냈다. 1審에서 敗했지만 抗訴審에서 和解 勸告 決定이 나왔다. 結局 製作社가 公式 謝過를 하면서 마무리되었다. 大林2洞에 있는 대동초등학교는 移住 背景의 學生들이 90%가 넘는다. 中國人 學生이 많아지면서 韓國人 父母들이 子女들을 다른 學校로 轉學시켰고 또 入學도 꺼린다. 昨年 新入生은 모두 中國人이었다. 人口 絶壁 時代에 ‘이민청’ 設立이 발의되었지만 이름부터 出入國·移民管理廳이다. 移住民을 ‘管理’의 對象으로, 나쁘게는 潛在的 犯罪者로 보는 法務部의 視線이 깔려 있다. 언제까지 祖國(할아버지의 나라)에 오는 在中同胞들을 勞動力으로만 보고 그 子女들이 2等 市民으로 자라도록 放置할 것인가? 그들이 韓國 社會에 잘 適應해서 살 수 있도록 韓國語 授業과 韓國 社會 理解 敎育 等 社會統合 프로그램을 提供해야 한다. 그에 못지않게 重要한 것은 우리 社會에 스며든 中國人 嫌惡와 朝鮮族에 對한 偏見, 固定觀念을 넘어서는 것이다. 事實 多文化 理解 敎育은 先住民인 韓國人들에게 더 緊急히 必要하다. 大林2洞과 大林3棟을 걸은 우리는 숨은 맛집의 原形 食卓에 둘러앉았다. 가운데 琉璃 圓盤에 飮食을 올려두고 돌리면서 덜어 먹는 것이 처음인 사람도 있었다. 먹어보지 못했던 맛있는 中國 飮食을 먹으면서 大林洞이 親近해졌다. 글 _ 신한열 프란치스코 搜査(떼第共同體 搜査·公益團體 이음새 代表)

2024-05-26

요즘 젊은 것들은

60代에 들어선 내 親舊들은 요즘 靑年들이 일은 제대로 못하면서 自尊心만 세고, 勇氣와 冒險心이 없고, 獻身은 不足하고 計算的이라고 한다. 東西古今을 莫論하고 世代差는 늘 있어 왔다. 紀元前 1800年의 수메르 粘土板부터 只今까지 旣成世代가 젊은이들을 批判하며 恨歎한 記錄은 數없이 많다. 老人들의 蓄積된 經驗과 知識이 重要했던 農耕社會와 달리 科學 技術이 高度로 發達한 오늘날, 老人들은 疏外되기 十常이다. 老齡 人口는 急激히 늘어나지만 그들을 위한 자리는 줄고 있다. 우리 周圍에는 官公署나 食堂에 設置된 키오스크의 造作을 어려워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旣成世代는 MZ 世代에게 말을 건네기를 어려워한다. 태어날 때부터 個人用 컴퓨터와 인터넷, 携帶電話와 MP3 가 日常化된 環境에서 자라나 '디지털 네이티브’라고도 불리는 이 世代는 디지털 言語와 裝備를 特定 言語의 原語民처럼 自由自在로 驅使한다. 어떤 사람은 이들을 新世代가 아닌 '新人類'라고 일컫기도 한다. 알아듣기 힘든 줄임말을 濫發해서 이들이 “우리말을 하는 外國人 같다”는 사람도 있다. 그만큼 疏通하기 어렵다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數千 年 前에도 똑같은 말이 있었다는 事實을 알까? 젊은 世代 앞에서 “나 때는 말이야 ~” 하고 韻을 떼는 瞬間 꼰대 取扱을 받기 十常이다. 젊은이들이 보기에 나이든 사람들은 融通性이 不足하고 權威的이며 제대로 傾聽할 줄 모른다. 서로 다른 世代 사이에 感性이나 價値觀의 差異가 있는 것은 當然하다. 하지만 그 差異가 葛藤으로 이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自然스럽게 서로 어울릴 수 있는 時間과 자리가 더 必要하다. 내가 代表로 있는 ‘이음새’는 한 달에 한 番씩 여러 世代와 文化가 어우러져 함께 걷는다. 要컨대 같은 눈높이에서 便安하게 만나는 것이다. 人口 絶壁의 時代에 世代間 疏通은 漸漸 더 重要해진다. 이를 위해서는 나이든 사람이 젊은이들에게 무언가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 態度가 必要하다. 더 많이 들으려 하고 모르는 것에 對해 젊은이들에게 물어본다면 實際로 배우는 것도 있고 關係도 더 좋아질 것이다. 나이들수록 “입은 닫고 紙匣은 열어라'라는 말이 있는 理由다. 나이든 사람은 只今의 젊은이들이 내가 그들의 나이 때 했던 經驗을 똑같이 反復한다고 錯覺해서는 안 된다. 오늘의 大學과 韓國 社會는 30-40年 前과는 너무나 다르다. 우리의 經驗을 基準으로 젊은이들을 보아서는 안된다. 우리는 各各 다른 經驗을 안고서 오늘을 함께 살고 있는 同時代人이다. 氣候 災殃과 低出生 高齡化 時代의 挑戰에 責任있게 應答하기 위해서도 우리가 同僚라는 事實을 分明히 알고 處身하면 좋겠다. 그게 眞正 나잇값 하는 것이 아닐까? 글 _ 신한열 프란치스코 搜査(떼第共同體 搜査·公益團體 이음새 代表)

2024-05-19

敵對와 憎惡를 넘어서

民主主義의 꽃이라 불리는 選擧가 끝나고 몇 週가 흘렀다. 變化를 바라는 民心이 總選 結果에 分明히 나타났지만 現實 政治가 여기에 副應할지는 如前히 알 수 없다. 서로를 敵對視해 온 執權 勢力과 巨大 野黨이 머리를 맞대고 山積한 問題를 풀어나가는 것이 可能할까? 많은 사람은 對話와 妥協이 없고 一方的 疏通과 對決만 있는 韓國의 政治文化를 恨歎한다. 巨大 兩黨의 敵對的 共生이 持續되면서 다양한 목소리가 國會와 政治에 들어갈 餘地도 漸漸 줄었다. 陣營對決이 極端的으로 치닫는 것은 우리 社會 全體를 위해 不幸한 일이다. 敵對感과 憎惡는 政治뿐 아니라 우리 社會에 깊이 배어있는 DNA라고까지 말하는 사람도 있다. 韓國 社會 곳곳에는 敵對의 感情이 蔓延해 있다. 이제는 宗敎人들조차 그것을 當然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總選 過程은 안타깝게도 日常化된 憎惡와 敵對를 濾過하거나 昇華하지 못했다. 哲學者 김상봉 敎授는 이런 敵對感의 뿌리를 百年 前 日帝 治下에서 始作된 民族主義 陣營과 共産主義 陣營의 對立에서 찾는다. “3.1 運動 以後 激化된 左右 對立 속에서 敵에게도 理性과 良心이 있으리라는 믿음은 徐徐히 사라졌다.” (「靈性 없는 進步」 온뜰 2024, 以下 모든 人用). 이 두 陣營의 反目은 南北 分斷으로 이어졌고 解放 空間과 韓國戰爭 初期에 恣行된 民間人虐殺은 우리가 한 共同體에 屬한다는 믿음을 송두리째 없애 버렸다. 그 結果 “政治는 너와 내가 만나 우리가 되는 過程이 아니라 同志와 敵을 가르고, 그 敵對的 對立 속에서 勝利하고 權力을 爭取하는 것이 唯一한 現實的 目的이 되었다.” 金 敎授는 韓國의 進步 運動이 1980年代 以後 憤怒와 憎惡에 依해 推動되었다고 말하면서 아프게 指摘한다. “差異를 敵對的 分裂과 對立이 아니라 建設的 協同이 되게 하는 것은 全體에 對한 믿음이다. 그러나 世俗化된 進步 運動 속에서도 保守化된 信仰 속에서도 우리는 이제 더는 全體에 對한 믿음을 찾아볼 수 없다. 모두가 自己가 線이라 믿으면서 남을 惡이라 斷罪하고, 남과 싸워 이기는 일에만 汨沒한다.” 그에 따르면 “모두 全體로부터 離脫하여 치于져 있기 때문에 (...) 우리는 보다 높은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差異 속에서 敵對的으로 分裂한다.” 그래서 우리 時代의 分裂相을 治癒하려면 다름과 差異를 容認해야 한다. 그것은 “나와 다른 사람도 全體 속에서 나의 一部라는 믿음이 우리 마음에 뿌리내릴 때 可能할 것이다.” (111쪽) 形式的 民主主義는 成就했지만 敵對와 憎惡, 嫌惡와 排除가 고개를 드는 오늘날, 우리를 하나로 모아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을 찾아 注目하는 것이 敎會와 信者들에게 要求되는 課題다. 우리 時代의 豫言者다움은 거짓과 不義를 斷罪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다. 글 _ 신한열 프란치스코 搜査(떼第共同體 搜査·公益團體 이음새 代表)

2024-05-12

‘不法’인 사람은 없다

서울 鍾路5價의 한 빌딩 地下에 있는 서울 디아스포라 敎會는 敎人들 多數가 未登錄 필리핀 勞動者다. 韓國에 온 지 5年부터 25年이 넘는 사람들까지 多樣하다. 이들은 大部分 故國에 있는 父母의 醫療費와 子女 或은 동생들의 敎育費를 책임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일이 없는 週末과 저녁 時間에 殘業이나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한다. 每年 ‘不法’ 勞動者 特別團束 期間이 되면 이들은 緊張할 수밖에 없다. 摘發되어 罰金을 물고 추방당하면 다시 비자를 받아 韓國에 와서 일하는 것이 不可能하게 된다. 올봄에도 이렇게 韓國을 떠나는 敎人이 繼續 생기고 있다. 敎人이 團束에 붙잡혀 華城外國人保護所에 收監되면 정진우 擔任牧師는 會社를 찾아가 못 받은 賃金과 退職金을 받아내고 그가 살던 房에 가서 짐을 整理하고 保證金을 돌려받아 傳해 준다. 飛行機票도 追放되는 勞動者가 사야 한다. 그런데 어려운 會社 事情에 未登錄勞動者 雇用으로 罰金까지 물게 되었다며 退職金을 못 준다는 社長도 있다. 어떤 집主人은 外國人保護所에 抑留된 當事者와 連結해 주어도 鄭 牧師를 믿지 못해 다시 自己에게 直接 電話하라고 要求한다. 政府가 未登錄 移住民 團束을 强化하면서 人權 侵害도 잇달아 發生했다. 昨年 3月 大邱에서는 필리핀 勞動者들이 主日 禮拜를 보다가 토끼몰이式으로 警察에 逮捕되는 일이 벌어졌다. 11月에는 慶州의 工團에서는 法務部 男性 職員이 未登錄 移住 女性 勞動者의 목덜미를 붙잡고 作業場에서 끌어내는 映像이 國際的인 公憤을 자아내었다. 政府는 한쪽으로는 未登錄 移住勞動者들을 ‘不法’이라는 딱紙를 붙여 追放하면서 다른 한쪽으로는 每年 數千 名씩 外國人勞動者를 追加로 들여온다. 이른바 3D業種뿐 아니라 農漁村에도 이제는 外國人 勞動者가 없으면 일이 되지 않는 곳이 많다. 그런데 20年 넘게 施行되고 있는 ‘雇用許可制’는 勞動者가 일터를 選擇할 수 없게 만들어 未登錄 移住勞動者를 量産한다. 아무리 强力히 團束해도 未登錄 移住勞動者는 줄지 않고 法務部 統計에 따르면 現在 43萬 名을 헤아린다. 그들 가운데는 20年 넘게 韓國에 산 사람들도 많다. 이런 狀況에서 雇傭勞動部는 필리핀 家事도우미 100名이 7月에 入國해서 敎育과 訓鍊을 받고 빠르면 8月 末부터 서울 地域에서 일을 始作할 것이라고 發表했다. 家事 勞動과 돌봄 勞動의 增加하는 需要에 供給이 따라가지 못하기에 示範事業으로 해 본다는 것이다. 公論化 過程에서 勞動界와 人權團體의 反對와 批判도 적지 않았다. 外國人 勞動者가 오는 것은 勞動力에 앞서 무엇보다 사람이 오는 것이다. 未登錄 移住勞動者들은 우리 社會에 必要한 일을 하는 이웃이다. 그들이 社會의 一員으로서 우리와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제대로 된 移民 移住民 移住勞動者 政策이 切實히 必要하다. 글 _ 신한열 프란치스코 搜査(떼第共同體 搜査·公益團體 이음새 代表)

2024-05-05

눈물꽃 少年

박노해 詩人이 自轉 隨筆集 「눈물꽃 少年」(느린 걸음, 2024)으로 우리를 찾아왔다. 作家는 初等學生 時節로 되돌아가 그때의 눈으로 自身과 周邊의 사람들, 自然과 學校와 하느님을 바라보고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讀者는 가난과 缺乏과 熱望으로 가득 찬 時節을 살면서 自身의 길을 찾아가는 少年 ‘評이’(박노해의 本名은 박기평이다)의 이야기를 읽으며 이제는 사라진 自身의 幼年期와 잃어버린 純粹함을 追憶하게 된다. 그리고 잊고 있었던 童心이 深淵에서 깨어날 때 나는 只今 어디에 와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自問한다. 평이가 자라는 南道의 시골 마을 동강은 작은 宇宙다. 거기에는 信仰의 搖籃이었던 東江公所와 멕시코 宣敎師 호세 神父, 學校와 班 親舊들, 배고픔을 채우듯 많은 冊을 읽게 해 준 先生님과 圖書室, 밤하늘의 별들과 自然, 할머니와 어머니, 애틋한 첫사랑 女子애까지 있다. 作家는 오늘날 都市에서 쉽게 接할 수 없는 原形의 것들, ‘純粹하고 氣品 있는 흙 가슴의 사람들’을 召喚하면서 ‘이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가슴 시린 風景’을 그려낸다. 어린 평이는 벙어리 處女 軟餌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요, 입이 있어도 말 못하고 맘이 있어도 쓸 수가 없는 그런 사람의 입이 되고 글이 될라요.” 첫사랑 少女를 만나서는 “나처럼 외롭고 혼자인 사람들에게 親舊가 되어주고 (...) 눈물이 되고 힘이 되는 그런 詩를 쓰겠다”고 다짐한다. 「눈물꽃 少年」에는 後날 박노해 詩人의 삶과 文學을 만든 싹이 다 담겨 있다. 옳고 그름에 對한 直觀, 剛直함과 忍耐, 弱한 이들에 對한 關心을 아우르는 人間의 心性과 姿勢의 큰 部分은 幼年期에 形成된다. 그런데 近代化와 民主化를 이루며 쉼 없이 달려온 우리는 그 純粹한 눈길과 童心을 잃어버렸다. 어른들은 自身의 童心을 지워버렸을 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童心마저 타락시켰다. 將來 希望을 ‘建物主’라 말하는 初等學生이 다른 級友를 ‘빌거’(빌라에 사는 거지), ‘휴거’(賃貸아파트 휴먼시아에 사는 거지)라 卑下하게 만든 것은 누구일까? ‘不動産이 階級이 된 社會’에서 어른들은 初等學生을 對象으로 醫大 準備班을 만들어 善行學習을 시킨다. 그들은 알게 모르게 아이들에게 物神主義 俗物主義, 無限 競爭의 思考와 意識을 심어준다. “世上이 하루하루 독해지고 사나와지고, 露骨的인 低俗化와 淺薄性이 우리 靈魂을 병들게 하는 只今”, 作家는 “길잃은 날엔 自己 안의 少年 少女로 돌아가기를” 勸한다. 우리에게도 ‘靈魂의 純粹가 가장 빛나던 時間’이 있었다. 어린 時節의 天眞無垢함이 傷處받은 모습이 只今의 나다. 그래도 希望은 있다. 作家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앞을 向해 달려 나가는 永遠한 少年 少女가 우리 안에 살아 있다”고 속삭인다. 그 少年이 우리에게 눈물꽃을 건넨다. 글 _ 신한열 프란치스코(떼第共同體 搜査·公益團體 이음새 代表)

2024-04-28

잊지 않겠습니다

10年 前 4月, 歲月號 慘事 直後 가장 슬프고 가장 아픈 主님 復活 大祝日을 보냈다.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어떤 글도 쓰지 못한 보름의 時間이 지난 뒤에 뜰에 핀 錦囊花가 눈에 들어왔다. 錦囊花의 불어 이름은 ‘마리아의 心臟’(Coeur de Marie)이다. 꽃 模樣이 心臟에서 피나 눈물이 흐르는 것 같아서 ‘피 흘리는 心臟’(英語), ‘눈물 흘리는 心臟’(獨語)이라 명명했을 것이다. 아들이 十字架에 달려 죽는 모습을 본 어머니 마리아의 心臟에서 어찌 피눈물이 흐르지 않았을까. 歲月號 慘事 때 많은 사람이 제 子息을 잃은 것처럼 함께 울었다. 安全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수많은 約束이 있었고, ‘잊지 않겠다’, ‘가만히 있지 않겠다’, ‘끝까지 함께하겠다’는 다짐이 있었다. 하지만 時間이 지나면서 社會의 한便에서는 遺族들의 피맺힌 목소리에 귀를 닫고 노란 리본에조차 敵對感을 標示한다. 不便한 記憶들을 자꾸만 지우려는 사람들과 勢力에 거슬러 歲月號 遺家族들은 그저 被害者로 남아 있지 않고 積極的으로 災難을 社會化했다. 多數의 遺家族이 國家의 補償金을 拒否하고 國家를 相對로 損害賠償訴訟을 벌여 國家의 責任을 認定받았다. 그 賠償金을 出演해 財團을 세웠고 지난해 11月에는 다른 여러 災難 慘事의 被害者들과 連結網을 만들었다. 녹슨 세월호는 振作 引揚되었지만 새로운 ‘韓國號’는 아직도 眞髓되지 않았다. 共同體는 漸漸 破片化되고 個人들은 各自圖生의 길로 가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통해 모든 存在가 서로 連結되어 있다는 것이 明確해졌지만, 우리 社會는 거기서도 배우지 못했다. 日常의 回復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極度의 競爭과 效率 追求, 消費와 誇示의 時代로 되돌아갔다. 누군가는 세월호의 記憶을 지우려 했을 때 10·29 梨泰院 慘事가 일어났고 海兵隊 채상병의 죽음이 있었다. 氣候 危機와 結合된 災難 慘事도 繼續된다. 그래도 높은 사람들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歲月號 慘事 10週期를 맞아 가장 많이 喚起된 말은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다짐이다. 그리스도人은 記憶의 百姓이다. 復活의 證人인 弟子들은 스승 예수의 慘酷한 죽음을 記憶에서 지우지 않았다. 2000年 동안 우리는 十字架와 復活을 함께 記憶하고 慶祝한다. 聖經에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登場은 十字架 아래에서 눈물 흘리는 場面이 마지막이 아니다. 聖母님은 예수님의 復活 以後 始作된 예루살렘의 敎會, 그 새로운 共同體에 함께 계셨다. 歲月號 遺家族들은 깊은 아픔과 傷處를 딛고 일어나 같은 悲劇이 反復되지 않도록 모두가 安全한 社會를 만들기 위해 싸우며 새로운 韓國 共同體의 礎石을 놓고 있다. 10年이 흘렀지만 如前히 嗚咽하는 그분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오늘은 함께 울어야겠다. 錦囊花의 西洋말 이름처럼 눈물 흘리는 마리아의 마음으로. 글 _ 신한열 프란치스코(떼第共同體 搜査·公益團體 이음새 代表)

2024-04-21
記事 더보기 더보기아이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