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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新聞

[말씀默想] 年中 第11週日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宣布하신 福音의 中心 主題입니다.(마르 1,1 參照) 예수님께서는 누구나 自然 속에서 쉽게 發見할 수 있는 表象들을 ‘比喩’로 들어 ‘하느님 나라’를 說明해 주셨습니다.(마르 4,33 參照) 오늘 福音에서 두 가지 比喩를 만나는데, 그中 하나는 저절로 자라는 씨앗에 關한 比喩(마르 4,26-29)이고, 다른 하나는 겨자씨의 比喩(마르 4,30-32)입니다. ‘比喩’는 그리스어 ‘爬羅볼레’의 飜譯으로, 新約聖經에서 使用되는 ‘爬羅볼레’는 하느님의 統治 或은 行動과 緊密히 連結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聖經의 그리스語 飜譯本人 70인譯에서 登場하는 ‘爬羅볼레’는 히브리어 ‘마샬’에서 語源的 起源을 찾을 수 있는데, ‘마샬’은 ‘다스리다’라는 動詞와 聯關이 있습니다. 마르코 福音書 著者가 하느님 나라의 到來와 統治를 說明하기 위해 ‘比喩’의 形式을 使用한 理由는 ‘爬羅볼레’에 對한 히브리어의 語源的 起源으로 說明이 可能합니다. 먼저 첫 番째 比喩를 살펴봅시다.(마르 4,26-29) 어떤 한 사람이 땅에 씨앗을 뿌립니다. 그 사람은 以後 아무런 일을 하지 않지만, 씨앗은 成長하고 活動합니다. 씨앗에서 싹이 나고 자라나 줄기가 나고 열매를 맺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비록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느님의 말씀은 밭에 뿌려진 씨처럼 싹을 틔우고 줄기를 내고 이삭을 맺게 됩니다. 特別히 첫 番째 比喩에서는 마지막 審判의 날을 强調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收穫 때가 되어 穀食에 낫을 내는 農夫를 言及하며 決定的인 하느님 나라의 到來를 說明하고 계십니다. 요한 默示錄에서도 ‘主님의 날’에 對한 傳統的인 表現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낫을 大魚 收穫을 始作하십시오. 땅의 穀食이 무르익어 收穫할 때가 왔습니다.”(묵시 14,15) 이어서 두 番째 比喩를 살펴봅시다.(마르 4,30-32) 씨앗이 땅에 뿌려지고 그 위에서 싹이 자라나는 過程이 描寫되고 있습니다. 겨자씨는 直徑 2밀리미터보다 작은 씨앗이지만, 높이가 3미터에 이르는 커다란 나무로 成長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의 成長 過程 自體보다는 아주 작은 씨앗과 巨大한 나무를 比較하는데 焦點을 맞추면서 ‘하느님 나라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고자 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한 알의 작은 겨자씨처럼 當場에는 눈으로 보기 어려울지라도 나중에는 커다란 나무가 되어 이 世上 안에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로 成長하는 過程은 하나의 奇跡과도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自身의 活動 안에서 하느님께서 活動하신다고 確信하셨고, 이러한 確信을 바탕으로 自然 속 작은 것들 안에서 活動하시는 하느님을 讚美하셨습니다. 겨자씨가 자라나 새들이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된다는 比喩(마르 4,32)는 舊約聖經의 傳統, 特別히 에제키엘 豫言書의 比喩的 豫告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第1讀書(에制 17,22-24)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심으신 ‘향백나무의 꼭대기 順’에서 햇가지가 나고 열매를 맺으며 巨大한 나무로 자라나 온갖 새들과 들짐승이 깃들이게 될 것입니다. 향백나무는 새들과 들짐승이 깃들일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나무의 種類에 屬하는데, 木質이 堅固하고 곧게 자라는 特性이 있어 主로 建築資材로 使用되고 있습니다. ‘향백나무의 꼭대기 順’은 다윗의 後孫, 곧 바빌론 1次 流配 當時 끌려간 餘戶야킨 임금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에제키엘 豫言者는 향백나무에 關한 짧은 比喩를 통해 다윗 王朝의 回復과 繁榮을 豫告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향백나무의 가지에서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에제키엘 17張 23節의 말씀은 疑懼心을 불러 일으킵니다. 향백나무는 本來 열매를 맺는 나무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에제키엘 豫言書의 著者는 여기에서 하느님의 權能과 힘을 强調하고 있습니다. 향백나무는 果實樹가 아니지만 하느님께서 하고자 하신다면 향백나무도 열매를 맺는 奇跡을 보여줄 것이라는 事實을 알려주고자 합니다.(에제 36,35 參照) 오늘 讀書와 福音 말씀은 하느님을 生命을 主管하시는 創造主로 紹介합니다. 하느님 없이 世上 萬物은 生命을 維持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萬物을 創造하시고 보살피시며, 그 안에서 現存하고 계십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고 弱해 보이지만 마지막에는 巨大하고 剛한 것이 되면서, 이러한 신비롭고 놀라운 變化에서 우리는 驚異로운 하느님의 權能과 힘을 體驗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自然 속에 自身이 宣布한 하느님 나라의 眞理가 숨겨져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宣布하신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께서 直接 活動하시는 곳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매우 逆說的입니다. 人間의 知性을 超越하며 人間의 洞察과는 對照를 이룹니다. 이러한 理由로 하느님 나라는 늘 祕密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人間이 하느님 나라의 神祕를 理解하려면 하느님의 도우심, 곧 神的 啓示가 必要합니다. 하느님의 統治가 가져올 變化를 受容하려는 者는 神祕를 理解할 수 있지만, 抵抗하는 者에게 하느님 나라는 比喩로 남아있을 것입니다.(마르 4,11-12 參照) 比喩는 믿지 않는 이에게는 虛構일 수 있지만, 믿는 이에게는 하느님의 智慧이며 眞理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必要한 것은 萬物 안에서 現存하시고 活動하시는 하느님께 對한 믿음입니다. 바오로 使徒가 힘찬 語調로 告白한 그 믿음을 우리도 各自의 삶 안에서 告白합시다. “우리는 언제나 確信에 차 있습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2코린 5,6ㄴ-7) 글 _ 정진만 안젤로 新婦(수원가톨릭대學校 敎授)

2024-06-16

[말씀默想] 年中 第10週日

오늘 福音은 律法敎師들과 예수님 家族들의 誤解와 臆測이 빚어낸 事件을 들려줍니다. 緊張感이 歷歷한 이 福音은 예수님께서 어느 집에 들어가시자 그곳으로 몰려든 많은 群衆 때문에 療飢할 時間마저 없었다고 알려줍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一行은 飮食을 들 수조차 없었다”(3,20)라는 表現 속에서 하느님 나라의 擴張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의 어느 집에 머물고 계실 때 두 集團의 사람들이 이 집으로 接近하며 이야기가 展開됩니다. 한 部類는 예루살렘에서 派遣된 예수 調査團 律法敎師들이고, 다른 한 部類는 예수님의 家族입니다. 두 部類는 서로 다른 用件을 가지고 왔지만, 目的은 예수님에 對한 抵抗이라는 共通點을 가지고 있습니다. 律法敎師들은 예수님께서 魔鬼의 우두머리인 베엘제불의 힘으로 사탄을 쫓아낸다며 誹謗합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이라는 엄청난 謀陷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中傷謀略과 예수님의 治癒 活動에 對한 敵對的 侮辱이 오히려 그분 治癒 奇跡의 歷史性을 證明하고 있습니다. 이 緊張은 한 段階 더 나아가 예수님 親戚들의 行動으로 擴大됩니다. 親戚들의 反應은 그분이 “미쳤다”(3,21)는 것입니다. ‘미쳤다’는 말을 直譯하면 ‘精神이 제자리에 서 있지 못하고 나갔다’라는 뜻으로 非正常的인 精神 狀態 곧 鬼神에 사로잡힌 狀態를 의미합니다. 及其也 親戚들은 “그분을 붙잡으러”(3,21) 나섰습니다. ‘붙든다’는 表現이 마르코복음에서 ‘逮捕하다’라는 否定的 意味로 여러 番 登場함을 볼 때 家族과의 날 선 緊張狀態를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親戚들은 그분이 ‘미쳤다’고 誤解하고 律法敎師들은 그분이 ‘鬼神들렸다’고 陰害합니다. 예수님께서는 親戚들에게 그 어떤 對應도 없이 ‘無視’하는 反應을 보이시지만, 律法敎師들에게는 날카로운 批判을 하시며 다른 듯 같은 反應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律法敎師들의 謀陷에 세 가지 反證으로 答辯하십니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3,23),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3,24),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3,25)라고 말씀하시며 그들 論理의 虛構性을 暴露하십니다. 나아가 예수께서는, 聖靈의 活動마저 바알의 도움으로 둔갑시키고 있는 그들에게, 露骨的이며 意圖的인 拒否는 容恕될 수 없다며 强勁하게 말씀하십니다. 이 이야기를 敍述하는 方式 또한 퍽 興味롭습니다. ‘집’을 둘러싸고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는데 어떤 이들은 집 안에 있고 어떤 이들은 집 밖에 머물고 있습니다. 집을 두고 ‘案’과 ‘밖’을 나누는 分離가 印象的입니다. 왜냐하면 집 안팎의 空間的 區分은 ‘內部人’과 ‘外部人’에 對한 날카로운 區分으로, 事件 展開의 有用한 階段 役割을 擔當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親戚과 律法敎師들이 예수님를 理解하지 못하는 ‘外部人’으로 대변된다면, 예수님과 함께 머물며 그분 “周圍에 앉은 사람들”(3,34)은 ‘內部人’으로 代表됩니다. 이러한 絶妙한 大邱는 著者가 어디에 무게를 두고 싶어하는지 斟酌하게 합니다. 外部人은 그야말로 집 밖에 있는 이들로서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고 距離두기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親戚들이 그러합니다. 血肉敵으로는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內部人’이지만, 그분을 理解하지 못하는 ‘外部人’이 되어버립니다. 律法敎師들 亦是 別般 다르지 않습니다. 宗敎的 中心地 예루살렘에서 왔으니 宗敎的 役割 遂行의 中心人으로서 ‘內部人’이라 自負할 수 있지만, 實狀은 예수님을 陰害하며 攻擊하는 이들로서 그분과 함께하지 않는 ‘外部人’이라 指稱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그는 魔鬼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魔鬼들을 쫓아낸다”(3,22)고 主張하며 하느님의 統治를 拒否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心理的 障壁뿐만이 아니라 律法敎師들과 親戚들은 外的으로도 집 안에 들어오지 않은 채, 집 밖에 서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밖에 서 있는’ 律法敎師들을 부르셔서 “比喩를 들어 말씀”(3,23)하셨고, 예수님의 親戚들은 “밖에 서서”(3,31) 예수를 부르기 때문입니다. 한바탕 舌戰이 끝난 後, 예수님께서는 當身 周圍에 둘러앉은 ‘內部人’들을 ‘하나’로 묶는 새로운 空間을 創出하십니다. 이른바 새로운 하느님 家族(Nova Familia Dei)으로서의 ‘새로운 範疇’입니다. 이 새로운 共同體는 血緣도, 律法 中心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實踐하는 사람의 모임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實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內部人’이며, ‘예수님과 함께하는 사람’이고, ‘새로운 하느님의 家族’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實踐한다는 것은 마르코에게 있어서 ‘죽기까지 그분을 따르는 일’입니다. 福音이 던지는 質問이 가슴에 匕首처럼 날아와 꽂힙니다. “當身은 外部人인가요? 內部人인가요? 아니면 內部人 같은 外部人입니까?” ‘內部人’이지만 ‘外部人’이 될 危險이 늘 도사리고 있기에 깨어있는 努力이 切實합니다. 글 _ 臨未熟 엘렉타 修女(툿찡 布敎 베네딕도修女會 大邱修女院)

2024-06-09

[말씀默想] 至極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聖體 聖血 大祝日

木曜日 아침, 學生들과 미사를 奉獻하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學生들이 미사를 기다립니다. 경당에 자리가 不足할 程度로 아이들이 몰려오곤 하는데요. 미사에 參禮한 學生들에게 핫도그나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주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生命의 빵’ 보다는 ‘間食’을 찾아서 오는 것이지요. 大部分의 아이들은 곧잘 두 손을 모으고 聖歌를 함께 부르며 祈禱 소리에 목소리를 보태곤 합니다만, 미사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但只 間食을 먹고 싶어서 온 아이들이다보니 가끔은 애를 먹기도 합니다.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아이도 있고 繼續해서 잡담하는 아이들도 있으니까요. 그런 모습을 보신 분들은 여쭈어보시곤 합니다. “神父님, 아이들이 이 미사의 意味를 알까요?” 아이들이 미사에 沒入하는 것 같지도 않고, 神父님 이야기도 잘 듣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게다가 間食費度 많이 드는데 굳이 이렇게 할 理由가 없지 않는가 하고 말이지요. 그럴 때면, 오늘 마주하는 福音 이야기를 마음에 다시 새깁니다. 마르코 福音史家는 그날 마지막 晩餐 이야기를 傳하고 있습니다. 그날은 예루살렘에 들어온 나흘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이집트 脫出을 記念하고 記憶하기 위해, 어린 羊을 잡아 피를 門설柱에 바르고 고기는 구워서 먹고, 1週日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었습니다. 파스카(페社흐)와 無酵節 祝祭인데요. 이 무렵이면 유다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몰려들기 때문에, 巡禮客들은 묵을 房을 찾기도 어려웠을 겁니다. 그런데 그 渦中에도 예수님 一行은 ‘큰 二層 房’을 마련합니다.(학자들은 이 房의 主人이 마르코 福音史家라 보았습니다만, 近來에는 使徒 요한이 屬한 私製家門의 別莊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支持하고 따르던 사람 中에는 그 程度 되는 實力者가 있었음을 생각할 만한 대목이지요. 晩餐에 參與한 弟子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기다리던 메시아가 오신다는 파스카 祝祭, 歡迎받으면서 들어온 예루살렘, 부러울 것 없이 큼직한 房에 모인 弟子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베드로의 壯談에서 유다의 背信에 이르기까지, 弟子들은 各自 저마다의 생각이 있었겠지요. 그 모두를 細細히 헤아릴 길은 없지만, 分明하게 斟酌해 볼 만한 것 하나가 있습니다. 그들 中 어느 누구도 예수님 마음과 같은 이들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들에게 빵과 葡萄酒의 모습으로, 當身을 내어주셨습니다. 弟子들은 모든 事件이 이루어지고 나서야, 뒤늦게 깨닫습니다. 함께 나누어 먹은 그 빵은 예수님의 부서진 마음 彫刻이었다는 것을. 함께 나누어 마신 그 盞은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弟子들은 그 晩餐을 行하고, 晩餐 때의 일을 입으로 말하고 글로 써서 우리에게 傳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그날의 그분을 記念하고 記憶해 왔습니다. 오늘의 우리도 말씀을 듣고 빵을 떼어 나누고 있습니다. 果然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聖餐禮에 參禮하고 있나요. 質問을 조금 바꾸어 보겠습니다. 聖體分配者는 聖體를 傳해드리면서 “그리스도의 몸”하고 招待하며, 聖體를 拜領받는 校友는 “아멘”하고 應答합니다. 그런데, 오늘만큼은 그 “아멘”이라는 對答은 할 수 없고, 여러분 各自가 나름대로 對答해야 한다면 어떻게 말하시겠습니까. “아멘” 外에 다른 對答이 떠오르지 않으시는가요. 다시 質問을 바꾸어 보겠습니다. 聖體를 받으면서 “아멘”하고 應答하실 때 果然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우리는 그 말그릇에 어떤 마음을 담고 있습니까.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몸” 그 한마디는 宣言이자 質問입니다. 이 동그란 밀떡의 模樣으로 주어진 것이 무엇인가. 이것을 받아먹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을 받아먹은 當身은 어떻게 살 것인가. “아멘”은 이 質問에 對한 應答을 아우릅니다. “아멘”은 믿음입니다. 이 작은 빵조각이 主님이라는 것을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아멘”은 同意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方式에 同意하는 것입니다. “아멘”은 記憶입니다. 主님께서 스스로 飮食이 되셨다는 것, 우리가 主님을 飮食으로 먹었고, 그래서 우리가 다시 살 수 있었다는 것을 記憶하는 것입니다. “아멘”은 省察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먹은 이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스스로 묻습니다. “아멘”은 다짐입니다. 예수님과 하나 된 우리는 이제 예수님을 實踐하기로 합니다. 적어도 그의 삶과 方式을 흉내내보기로 합니다. 어디 그뿐일까요. 그렇습니다. 聖餐禮에 參與하는 우리의 마음도 하나같지는 않겠지요. 때로는 質問과 疑心, 때로는 무심하고 冷淡한 마음, 때로는 限없이 기대고 싶은 마음도 “아멘” 말마디에 담아내겠지요. 우리는 그렇게 말로는 다할 수 없어, 우리 마음을 “아멘” 한마디에 담아내는 것이겠지요. 미사를 마치고 핫도그 配達을 기다리고 있는 어느 날에 누군가가 다시 물어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이제는 對答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勿論 핫도그에 담은 제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 같을 수는 없겠지만, 오랜 時間이 지난 뒤에 아이들이 無心히 핫도그를 먹다가, 불현듯 우리의 눈길과 사랑을 記憶하기를 바란다고요. 그때라도 아이들과 우리의 마음이 만난다면 그것으로 充分할 것이라고요. 只今은 어긋난 그 마음도 언젠가 結局 하나가 된다고 믿습니다. 弟子들은 뒤늦게 깨달았지만 그 사랑을 記憶하며 行하기 始作했고, 그것은 우리 亦是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모신 조각난 빵에는, 사랑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에 부서진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오늘도 그 빵을 모시며, 그 사랑을 조금 더 닮아가기를 希望합니다. 글 _ 전형천 미카엘 神父(대건중學校 校牧室長)

2024-06-02

[말씀默想] 聖靈 降臨 大祝日

오늘은 聖靈 降臨 大祝日입니다. 復活 第7週間이 끝나고 맞이하는 主日, 곧 主님 復活 大祝日 後 49日이 되는 날에 敎會는 聖靈께서 한자리에 모여 있던 弟子들에게 내려오신 事件을 記念합니다. 使徒行傳 著者는 五旬節에 일어난 聖靈 降臨 事件을 人間이 體驗할 수 있는 現象들로 描寫하고 있습니다. 한便으로 聖靈께서 내려오심은 귀로 들을 수 있는 現象입니다. “거센 바람이 부는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사도 2,2) 또한 聖靈 降臨은 눈으로도 볼 수 있는 現象입니다. “불꽃 模樣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各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사도 2,3) 여기에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바람’과 ‘불꽃’은 聖靈의 活動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現存을 象徵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696項 參照) 히브리인들에게 이날은 ‘五旬節’ 祝祭입니다. 그들은 과월절 첫날에서 일곱 主幹이 지난 時半 달(5月) 6日에 祝祭를 지냈는데. 이 五旬節 祝祭는 農耕民族이었던 가나안人들이 첫 番째 보릿단을 收穫할 때 지냈던 麥秋節에서 비롯됐습니다(신명 16,9-13; 레위 23,15-16). 히브리인들은 이날 함께 모여 하느님께서 노아와 맺으신 契約을 되새기고, 또한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시나이 山에서 律法을 주신 事件을 記念했습니다. 聖靈 降臨 事件으로 五旬節은 그리스도人들에게 ‘새로운’ 날이 됐습니다. 使徒들에게 聖靈이 내려오심으로써 그리스도의 파스카 事件이 完成됐기 때문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731項 參照). 使徒들은 聖靈으로 充滿해져 모든 民族들에게 福音을 宣布하기 위해서 派遣됐습니다. 그리스도人들에게 이날은 노아와의 契約 또는 시나이山의 契約을 記念하는 五旬節 祝祭日이 아니라 敎會의 始作을 알리는 聖靈 降臨 大祝日입니다. 五旬節에 聖靈께서 내려오심으로써 예수님의 죽음과 復活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偉業이 널리 알려지게 됐으며, 이는 모든 民族들에게 기쁜 消息이 됐습니다.(「강론지침」 56項 參照) 留學時節, 제가 居住하던 敎區에서는 每年 聖靈 降臨 大祝日에 司祭敍品式을 擧行했습니다. 그 當時에는 聖靈 降臨 大祝日에 司祭敍品式이 擧行되는 事實에 특별한 意味 附與를 하지 않았습니다. 聖靈 降臨 大祝日을 보내면서 그 理由를 다시 한番 생각해봅니다. 아마도 祭臺 앞에 엎드려 敍品을 받은 이들이 聖靈을 받고 派遣을 받아 하느님께서 아들 예수님께 맡기신 救援의 使命, 곧 使徒들에게, 그리고 使徒들을 通해 後任者들에게 委任된 하느님의 일을 遂行하도록 특별한 恩寵을 請하는 바람이 담겨 있지 않을까요? 聖靈 降臨 大祝日 미사典禮에서 宣布되는 福音은 五旬節의 聖靈 降臨 事件과 直接的 聯關性이 없어 보입니다. 이 點은 興味롭습니다. 오늘 福音은 復活하신 예수님께서 弟子들에게 나타나신 여러 事件 中 하나를 傳해주는데, 이미 復活 第2週日에 宣布됐던 福音 말씀으로 오늘 福音은 그 前半部에 該當합니다.(요한 20,19-31) 요한福音書 著者에 따르면, 復活하신 예수님께서는 週間 첫날 저녁에 유다人들이 두려워 숨어있던 弟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平和를 빌어주면서 숨을 내쉬어 ‘聖靈’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聖靈을 받아라.”(요한 20,22) 여기에서는 ‘숨을 내쉬다’ 或은 ‘숨을 불어넣다’라고 飜譯할 수 있는 그리스語 動詞 ‘엠퓌사오’가 使用되고 있는데, 이 單語는 舊約聖經의 創造 이야기에서도 發見됩니다.(칠십인역) “그때에 州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生命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生命體가 되었다.”(창세 2,7) 創造主이신 하느님께서 첫 番째로 사람을 만드시면서 當身의 靈을 불어넣어 生命을 주신 것처럼(지혜 15,11 參照), 예수님께서는 復活, 곧 새로운 創造를 통해 弟子들에게 聖靈을 불어넣어 生命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聖靈 降臨 大祝日에 復活하신 예수님의 發現 이야기가 ‘福音’으로 宣布되는 理由는 무엇일까요? 그 理由를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 番째 理由는 “週間 첫날 저녁”에 일어난 事件이 五旬節에 完成된다는 事實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敵對者들의 손에 넘겨지시기 前에 當身의 弟子들에게 ‘保護者’를 보내주시겠다고 約束하셨고(요한 14,15-31 參照), 이 約束은 週間 첫날에 弟子들에게 나타나시어 “聖靈을 받아라.”라고 말씀하시며 成就됐습니다. 復活하신 예수님 約束이 成就됐음은 五旬節에 弟子들이 모인 곳에서 다시 한番 確認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聖靈을 받은 弟子들은 世上으로 派遣을 받습니다. 그들의 使命은 믿는 이들을 救援으로 引導하는 것입니다.(요한 6,39-40.57 參照) 弟子들은 復活하신 예수님으로부터 聖靈을 받았기에, 누군가의 罪를 容恕할 수 있는 權限 또한 받았습니다. 復活하신 예수님의 發現 이야기가 聖靈 降臨 大祝日의 福音으로 配定된 두 番째 理由는 聖靈 降臨 事件이 復活 事件이라는 事實을 確認해 주기 위함입니다. 復活 第2週日에 宣布된 福音이 聖靈 降臨 大祝日에 다시 한番 宣布됨으로써 聖靈 降臨은 그리스도의 復活과 分離된 事件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파스카를 完成하는 事件임이 證明됩니다. 50日 前 파스카 聖夜 미사에서 ‘알렐루야’를 다함께 노래 부르며 始作된 復活祝祭가 어느덧 끝나갑니다. 그러나 復活의 祝祭는 聖靈 降臨 大祝日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聖靈 降臨 大祝日은 祝祭의 새로운 始作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祝祭는 主님께서 當身의 充滿함에서 豐盛하게 部語주신 聖靈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祝祭입니다. 우리 各自의 삶이 파스카의 神祕를 살아가는 證據가 될 수 있도록 聖靈의 恩寵을 請하며 祈禱합시다. “오소서, 聖靈님, 믿는 이들의 마음을 聖靈으로 가득 채우시어, 그들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성령 降臨 大祝日 福音歡呼송) 글 _ 정진만 안젤로 新婦(수원가톨릭대學校 敎授)

2024-05-19

[말씀默想] 主님 昇天 大祝日·弘報 主日

오늘은 主님 昇天 大祝日이며, 大衆媒體를 통한 效果的인 敎會 使徒職 遂行을 强化하기 위해 制定된 弘報 主日입니다. 主님 昇天 大祝日이 弘報 主日로 制定된 理由를 操心스럽게 斟酌해보자면, 主님께서 昇天하시기 前 “모든 被造物에게 福音을 宣布하여라”(마르 16,15)는 特別使命을 弟子들에게 내리신 때문일 것입니다. 弟子들은 主님의 復活과 昇天으로 人間의 品位를 들어 높이新 하느님께 希望을 두고, 모든 이들에게 福音을 宣布하도록 ‘福音 弘報大使’로 부름받았습니다. 가톨릭新聞社路부터 ‘말씀默想’ 原稿請託을 받고 망설일 무렵, 親舊 修女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修女님 母親 고 분다(베네딕打) 어르신은 시골 작은 洞네에 사시는 與件上 主日미사를 大體로 公所禮節로 하셔야 하는데, 不足한 部分 때문에 每週 가톨릭新聞을 꼭 읽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가톨릭 弘報 媒體에 對한 地平이 넓어진 瞬間인 것은 勿論, 가톨릭新聞이 遂行하는 ‘집 안으로 찾아가는 敎會’ 役割이 强烈하게 다가왔었습니다. 主님 昇天 大祝日은 主님께서 降服하시며 하늘로 오르신 事件으로, 언제나 함께하시겠다는 約束을 주신 永遠한 祝福의 福音입니다. 아울러 福音書의 마지막 部分을 裝飾하는 主님의 昇天은 復活 事件의 完結입니다. 그런데 主님 昇天과 같은 重要한 事件에 對하여 福音書가 每週 적은 紙面만 割愛하고 있다는 것이 조금은 疑訝합니다. 마르코복음의 昇天 이야기는 單 한 句節에 不過하고 마태오와 요한福音은 昇天 이야기를 아예 省略했으며, 루카福音 亦是 後續冊人 使徒行傳에 留保한 탓인지 매우 짤막하게 記錄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 簡潔한 敍述에도 不拘하고 新約聖經이 들려주는 主님 昇天 이야기를 要約하면 重要한 메시지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昇天은 主님의 地上 使命의 完成으로 使徒들 앞에서 일어난 公開的 事件입니다. 使徒行傳에서 主님 昇天은 主님 再臨의 約束과 더불어 聖靈의 約束까지도 주어집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듣게 되는 마르코복음은 昇天하시는 主님께서 使徒들과 우리 모두를 福音宣布 弘報大使로 委囑하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復活하신 主님께서 弟子들을 찾아오신 理由는 그들에게 ‘새로운 使命’을 附與하기 위함임을 確認할 수 있습니다. 그 使命은 世上을 向해 기쁜 消息을 宣布(16,15)하라는 것입니다. 事實 마르코복음에 나타나는 復活 메시지 全體는 다른 이를 向한 기쁜 消息의 宣布에 있습니다. 무덤에서 天使로부터 예수님의 復活 消息이 女人들에게 宣布되고, 女人들은 弟子들에게 傳해야 하는 責任을 附與받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復活 體驗과 主님 復活 消息은 宣敎라는 使命으로 歸結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마르코복음은 復活하신 예수께서 昇天 後 하느님 오른便에 앉으셨음을 알려줍니다. ‘하느님 오른便에 앉으셨다’는 事實은 最初의 殉敎者 스테파노와 使徒信經이 宣布하지만, 福音書에서는 마르코만이 傳하는 事件입니다. 詩篇(2篇과 110篇)의 말씀을 상기시키는 이 句節을 마르코가 傳하는 理由는, 예수께서 하느님의 외아들이심을 確證하고, 그분이 宇宙의 統治者가 되심을 보여주기 위한 것 같습니다. 昇天하심으로 主님의 일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늘에 계시면서, 同時에 宣敎 使命을 遂行하는 이들과 함께하시며 다섯 表徵으로 保證人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魔鬼가 쫓겨나고, 새로운 言語를 말하고, 손으로 뱀을 잡고 毒을 마셔도 無害하며, 病者들을 治癒하는 놀라운 利敵들이 그 保證입니다.(16,17-18) 이것은 예수께서 이 世上에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弟子들은 이 모든 일을 直接 目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脈絡에서 본다면 예수님의 命令은 單純한 命令이 아니라 當身께서 하시던 일을 委任하신다는 意味일 것입니다. 當身이 하셨던 貴한 일을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이렇듯 主님은 不在하면서도 存在하는 驚異로운 方式으로 늘 우리와 함께하시며, 거리를 克服하고 계십니다. 마르코복음은 主님 昇天 後 弟子들이 곳곳에 福音을 宣布하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派遣받은 弟子들이 表徵과 더불어 世上을 변화시키는 일을 始作하기 때문입니다.(16,20) 主님의 約束이 그들에게 크고 大膽한 配布를 膳物한 듯 보입니다. 奇跡의 첫째 目的은 奇跡 그 自體에 있지 않고 사람들이 福音을 믿도록 도움을 주는 데 있습니다. 이제 그들은 敎會의 卓越한 本보기로, 그분의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宣敎 使命은 예수님의 마지막 命令이라는 根源에 닿아있습니다. ‘온 世上에 가서 福音을 宣布하라’는 말씀에서 우리의 宣敎地가 ‘온 世上’임을 確認합니다. 地域과 對象의 制限 없이 온 世上이 우리의 일터인 것입니다. 그러나 銘心해야 할 한 가지는, 말씀의 첫 番째 宣布 對象은 언제나 ‘나’ 自身이라는 事實입니다. 福音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當身은 福音의 證據者입니까? 傍觀者입니까?’ 例外 없이 適用되는 이 使命을 애써 外面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 우리의 存在가 말씀이 宣布되는 現場 속에 있는지 되짚어 보아야겠습니다. 主님 昇天 大祝日에 우리 삶의 指標를 再正立하는 恩寵을 빕니다. 글 _ 臨未熟 엘렉타 修女(툿찡 布敎 베네딕도修女會 大邱修女院)

2024-05-12

[말씀默想] 復活 第6週日·生命 週日

最後의 晩餐에서 남겨주셨던 主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새로운 誡命, 사랑의 誡命입니다: “이것이 나의 誡命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命令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이 예쁘고 따뜻한 말씀조차도, 어떤 日常 앞에서는 서운하게 들리는 날이 있습니다. 敎務室 자리 건너便에는 安全生活部長 先生님이 계십니다. 學生들의 葛藤이나 逸脫을 擔當하는 분이시지요. 예전에는 學生主任이라고 불리던 그런 役割이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건너便 자리에서 한숨 소리가 들릴 때마다 오늘 또 무슨 일이 있구나 싶습니다. 先生님들의 懇切한 마음에도 不拘하고 아이들의 葛藤과 逸脫은 끊이지 않습니다. 先生님들의 懇切한 마음과 아이들의 마음이 어긋나는 그런 瞬間들이지요. 先生님의 한숨은 失敗한 사랑의 울음소리처럼 들려서 저조차도 속이 傷합니다. 本堂 司牧者로 살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가끔은 좋은 마음으로 奉仕하겠다고 만난 사람들끼리 서로 마음을 할퀴고 찾아오곤 했습니다. 是是非非를 가려달라는 이야기 앞에 말門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어떤 決定은 누군가에게는 公正과 定義이겠으나, 反對便에서는 排除이고 偏愛로 비치겠지요. 이 사람도 제 신자고 저 사람도 제 信者인데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럴 때면 ‘서로 사랑하라’는 主님의 말씀이 채찍처럼 느껴졌습니다. 果然 이 말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 걸까. 그저 ‘사랑하라’ 하셨다면 될 일을, 굳이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理由는 무엇이었을까. 이 아름다운 말씀이 서운한 날에는 묻고 또 물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사랑의 誡命에다 默想이랍시고 말을 덧대는 것이 몹시 부끄럽습니다. 할 수 있다면, 오히려 沈默을 지키고 싶습니다. 道理 없이 말해야 한다면 다시 묻고 싶습니다. 어떤 물음이 可能할까요. 그러나 어떻게 물어보든 그 質問은 예수님이나 요한 福音史家를 만났던 사람들이 던졌던 質問과 닮아있을 것만 같습니다. 主님이 주신 誡命을, 우리에게 傳해주고 있는 요한을 생각합니다. 젊은 時節 요한은 스승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와 함께하며 배웠습니다. 요한은 묻고 예수님은 答하셨습니다. 그리고 歲月이 한참 흘러 요한은 老年을 맞았습니다. 兄弟들은 모두 殉敎했고, 그는 홀로 世上에 남아 主님에 對해 말해야 했습니다. 스승과 함께한 時間보다 한참을 더 살아낸 요한에게, 사람들이 묻습니다. 무언가 가르쳐주기를 請했습니다. 質問을 하던 靑年 요한은, 이제 唯一한 使徒로서 答해야 했습니다. 傳해오는 이야기에 依하면, 요한은 그렇게 質問을 받을 때마다, 다른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겨우 몸을 일으킨 뒤에 아주 짧게 말했다고 합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十字架로 나아가던 스승의 가르침을, 죽음을 앞둔 요한이 反復하고 있습니다. 가장 사랑받았던 弟子 요한이 이제 스승의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傳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라”는 요한의 對答에 많은 사람들은 ‘또 사랑이냐?’하고 푸념했다고 합니다. 요한은 그 가르침이야말로 가장 重要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겠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요한에게 다른 이야기를 期待했나 봅니다. 어쩌면 요한조차도 失敗했는지 모릅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던 그 瞬間에도, 사람들의 마음은 엇갈려나갔으니까요. 생각해 보면 언제나 그랬습니다. 水難을 앞痘神 마지막 食事 자리에서도, 몸과 피를 내어주시면서 모든 것을 쏟아 내시며 사랑하실 때도, 그야말로 當身이 親舊라고 부르시는 弟子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시는 바로 그 저녁에도 그랬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기러 나갔고, 나머지 弟子들은 도망갔으며,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番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받은 그날에도, 예수님의 한결같은 마음과는 달리, 弟子들의 마음은 四方八方으로 흩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한결같았지만, 예수님과 弟子들은 ‘서로’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 참 쉽지 않습니다. 내가 마주한 當身에게 무엇이 必要한지, 當身이 무엇을 願하는지 늘 苦悶해야 하지요. 그렇게 每 瞬間 사랑을 苦悶하는 것도 버거울 때가 많은데,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렵습니까. 主님과 弟子들, 사랑의 使徒 요한과 사람들 사이에서도 어려웠던 그 사랑은, 우리에게도 아득히 멀게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우리는 主님 말씀에 따라 사랑을 試圖하겠지요. 그리고 그만큼 자주 서로 사랑하는 데 失敗할 겁니다. 그러나 失敗할 일이라 해서 試圖조차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말이 都大體 무슨 意味가 있을까요. 主님께서는 “서로 사랑하여라”는 가르침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고 덧붙여 놓으셨지요. 사랑의 誡命 안에, 이미 主님의 사랑 告白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의 誡命을 지키는 것은 主님 사랑에 對한 應答이겠지요. 서로 사랑하는 데 지치지 않기를 希望합니다. 서로에 對한 사랑이 멈추지 않기를 懇切히 祈禱합니다. 우리의 사랑이 主님의 사랑을 닮기를 懇切히 바랍니다. 글 _ 전형천 미카엘 神父(대건중學校 校牧室長)

2024-05-05

[말씀默想] 復活 第4週日·聖所 週日

오늘 復活 第4週日에 敎會는 착한 牧者의 比喩를 ‘福音’으로 宣布합니다. 復活 第2週日과 제3주일의 福音이 復活하신 예수님과 弟子들의 만남, 곧 復活하신 예수님의 發現 事件이었다면, 復活 第4週日에는 牧者에 關한 比喩를 福音 말씀으로 듣게 됩니다.(「미사독서 目錄指針」 100項 參照) 典禮曆에 따라 每年 宣布되는 福音 內容이 달라지는데, 올해의 福音은 요한 10,11-18입니다(가해: 요한 10,1-10; 다해: 요한 10,27-30) 예수님께서는 自己 自身을 ‘착한 牧者’로 紹介하십니다. “나는 착한 牧者다.”(요한 10,11.14) 예수님의 ‘착함’은 倫理的 或은 道德的 行爲의 結果로 評價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自己 羊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착한 牧者’입니다. 그분의 犧牲的 죽음으로 舊怨, 곧 生命을 膳物로 받게 되었습니다. “내놓다”를 뜻하는 그리스어 ‘디테미’는 오늘 福音에서도 자주 使用되고 있는데(요한 10,11.15.17.18), 이 單語는 요한福音書 著者가 즐겨 使用하고 있습니다.(요한 13,37; 15,13; 1요한 3.16) 牧者의 重要한 任務 中 하나는 自身이 管理하는 羊들을 獅子나 곰과 같은 猛獸로부터 保護하는 것입니다. 羊들의 生命을 保護하기 위하여 목숨을 내어줄 準備가 되어 있는 牧者(1事務 17,34-35; 理事 31,4)는 自己 목숨을 내놓는 예수님과 같습니다. 착한 牧者이신 예수님은 삯꾼과는 다릅니다. 삯꾼은 羊들에게 關心이 없기에, 羊들이 이리의 거센 攻擊을 받더라도 羊들을 버리고 도망갑니다. 그러나 착한 牧者는 自己 羊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습니다. 착한 牧者는 羊들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알다”를 뜻하는 그리스語 動詞 ‘基노스코’는 牧者와 量의 關係를 說明하고 있습니다. “牧者가 羊들을 안다.”라고 할 때, 牧者는 羊들에 對한 情報를 知識的 次元에서 蒐集하는 것이 아니라 相互 疏通의 體驗을 통해 自身의 羊들과 人格的 一致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牧者는 羊들을 알고 羊들은 목자를 알 때, 이러한 ‘앎’李 바탕이 되어 牧者는 自己 羊들을 爲해 기꺼이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습니다. 羊들을 위한 牧者의 犧牲的 죽음은 牧者가 보여줄 수 있는 最高 사랑의 表現이며, 이를 通해 牧者의 存在 理由와 使命이 드러납니다. 예수님과 自身을 따르는 이들, 곧 弟子들을 牧者와 羊에 比喩하는 方法은 우리에게 낯설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우리의 文化는 農耕 社會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農耕 民族은 어느 한 場所에 定着하여 農事를 지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百姓은 遊牧民으로서 한 곳에 오랜 時間 동안 머물지 않고 羊들의 먹이를 찾아 돌아다닙니다. 遊牧 民族인 이스라엘 百姓들에게 牧者와 羊의 比喩는 예수님과 그의 弟子들의 關係를 說明하기에 適切해 보입니다. 舊約聖經의 著者들은 여러 곳에서 하느님을 이스라엘 百姓의 ‘牧者’로 描寫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豫言者는 나라를 잃고 바빌론으로 끌려가 어둠의 時間을 보내고 있던 이스라엘 百姓들에게 하느님을 ‘百姓의 牧者’로 提示하면서 그들에게 希望의 빛을 비추어 주고자 했습니다. “이스라엘을 흩으신 분께서 그들을 모아들이시고 牧者가 自己 羊 떼를 지키듯 그들을 지켜주시리라.”(예레 31,10. 參照: 예레 23,3; 理事 40,11) 에제키엘 豫言者 亦是 이스라엘 百姓을 보살피는 하느님의 모습을 羊 떼를 돌보는 牧者에 比喩하여 描寫하였습니다.(에제 34,11-16 參照) 요한 10章에서 使用된 牧者와 羊의 比喩는 舊約聖經, 特別히 에제키엘 豫言書의 傳統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요한福音書 著者는 ‘착한 牧者’의 이미지로 예수님을 百姓을 위한 메시아로서의 牧者의 모습과 連結시키고 있습니다. 羊들을 위한 牧者의 죽음과 사랑을 紹介하는 牧者와 羊의 比喩는 예수님의 十字架 죽음을 說明하는 가르침으로 理解합니다. 하지만 復活 時期의 週日에 宣布되는 福音 말씀인데도 예수님의 죽음에 對한 暗示를 包含함으로써 오늘 福音이 우리에게 混亂을 줄 수도 있습니다. 요한福音 10張의 牧者 比喩는 十字架의 그림자를 비추는 復活의 빛을 默想하도록 우리를 招待하고 있습니다. 10章 17節의 말씀이 이러한 默想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착한 牧者는 自己 羊들을 위하여 목숨을 기꺼이 내놓지만, 착한 牧者를 사랑하시는, 곧 예수님과 緊密한 關係를 맺고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다시 살려주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베드로는 이스라엘 百姓의 指導者와 元老들 앞에서 하느님께서 이루신 일, 곧 그리스도의 復活 事件을 힘주어 宣布하고 있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곧 여러분이 十字架에 못 박았지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여러분 앞에 穩全한 몸으로 서게 되었습니다.”(사도 4,10) 착한 牧者의 比喩가 우리를 위한 기쁜 消息으로 宣布되는 오늘은 聖所 主日입니다. 하느님의 所重한 膳物인 거룩한 부르심에 應答하는 이들을 위해서 特別히 祈禱하는 날입니다. “收穫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나 收穫할 밭의 主人님께 일꾼을 보내 주십사고 請하여라.”(마태 9,37-38) 60年 前 이 말씀을 默想하시면서 聖所 週日을 制定하셨던 聖 바오로 6歲 敎皇님의 勸告는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울려 퍼져야 합니다. 성소자의 數가 急速하게 줄어들고 있는 只今, 착한 牧者이신 예수님을 닮아 自身을 犧牲하면서 敎會를 위해 奉仕할 수 있는 성소자들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우리 함께 두 손 모아 祈禱합시다. 글 _ 정진만 안젤로 新婦(수원가톨릭대學校 敎授)

2024-04-21

[말씀默想] 復活 第3週日

오늘 福音은, 엠마오로 가던 두 弟子가 復活하신 主님을 만났던 이야기로 復活 體驗 가운데에서 가장 有名하고도 아름다운 內容입니다. 두 弟子 가운데 한 사람의 이름은 ‘클레오파스’이지만 다른 弟子의 이름은 알 수 없습니다. 著者 루카는 두 弟子의 身元보다는 그들의 行爲에 더 많은 關心을 기울입니다. 그들이 함께 길을 가며 近來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에 對해 차근차근 復棋하고 있었고, 또 沈痛한 表情을 하고 있었다고 細密히 傳해줍니다. 絶望感에 捕獲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이들의 모습은 흔하고 자잘한 우리 人生살이와 많이 닮아 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불쑥 나타나셔서 그들과 同行하시는데, 그러한 예수님의 모습이 두 가지 動詞로 表現되고 있습니다. ‘가까이 가셨다’ 그리고 ‘함께 걸으셨다’입니다. 復活하신 主님은 受難의 時間에 도망갔던 弟子들, 두려움에 숨어 있는 弟子들 그리고 무덤 곁에서 울고 있는 마리아를 먼저 찾아가셨음을 聖經은 들려줍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弟子의 境遇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이 먼저 다가가셨고, 絶望에 끌려 들어간 그들에게 먼저 말씀을 건네십니다. 우리 亦是 絶望과 失意에 휩싸여 엠마오로 내려가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먼저 가까이 다가오시고 우리와 함께 同行하신다는 것은 그늘 드리운 삶에 큰 慰安이 되어 줍니다. 生面不知 낯선 이가 ‘무슨 일이냐?’며 던지는 質問에 啞然한 表情을 감추지 못한 두 弟子는 걸음을 멈춥니다. 그들은 그가 며칠 동안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을 모르는 唯一한 사람일 것이라는 볼멘소리를 합니다. 弟子들은 낯선 이가 탐탁지 않았지만, 그분의 거듭된 質問에 그間 세간을 뜨겁게 달궜던 ‘나자렛 사람 예수’에 關한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루카 福音史家는 그들의 입을 빌려 예수께서 “行動과 말씀에 힘이 있는 豫言者”(24,19)이셨음을, 또 그분이 어떤 죽음을 맞이하셨는지 그 都市와 온 이스라엘이 알고 있음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그들은 예수께 걸었던 期待와 悲劇的 最後가 빚어낸 絶望感과 挫折까지 속마음을 모두 비워냅니다. 덧붙여 女子 몇몇이 傳해준 復活 小食과 빈 무덤이 招來한 不安과 혼돈스러움도 쏟아내었습니다. 그러자 낯선 同行者 예수께서는 “모세와 모든 豫言書를 두루 引用하여 聖經 全體에 걸쳐 當身에 關한 記錄들을 그들에게 說明”(24,27)하시며 그들의 鈍한 마음을 두드리십니다. 그분 가르침의 核心은 “그리스도는 그러한 苦難을 겪고 서야 榮光 속에 들어가신다”(24,26)는 것입니다. 얽힌 타래를 풀어내는 가르침으로 그들 마음에 아슬아슬한 希望이 始作되려는 刹那, 目的地 엠마오에 到着했습니다. 적잖이 印象的이었던 낯선 이가 더 먼 길을 가려는 듯 하자 그들이 그분을 붙잡습니다. 弟子들의 變化가 漸進的으로 보여집니다. 그들은 凡常치 않은 氣運과 魅力을 지닌 낯선 이와 함께 食卓에 앉았습니다. 그분이 “빵을 들고 讚美의 祈禱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시는”(24,30) 모습에 지난 記憶이 되살아났고, 그 瞬間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루카는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보았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다고 했음에 注意를 기울일 必要가 있습니다. 그들의 ‘알아봄’은 視覺的 作用을 통한 알아봄이 아니라 理性的 作用을 통한 알아봄입니다. 弟子들의 알아봄과 同時에 예수께서 그들의 視野에서 사라지셨지만, 主님은 이제 그 神祕로운 晩餐을 통하여 그들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분을 알아봄은 갑자기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變化의 始作은 그들이 낯섦을 받아들인 데에 있습니다. 이 낯섦과의 만남은 아직 治癒되지 않은 傷痕의 意味를 深度 깊고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들의 告白에서 보듯이 이미 길에서 가르침을 들을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기 始作했고 決定的으로 晩餐의 ‘親交’에서 마음의 눈이 열렸습니다. 復活하신 예수님이 갑자기 사라지셨다는 것은 復活의 主님을 생생한 體驗으로 만나지만, 視覺的으로 制限된 存在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存在로 만나게 됨을 의미합니다. 이제 復活하신 主님은 낯선 이에게서도, 외로운 이웃에게서도 만날 수 있는 幅을 넓혀 주십니다. 客觀的이고 破片的 理解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具體的이고 日常的인 삶 속에서 經驗되고 만날 수 있는 분이 되셨습니다. 두 弟子는 卽時 絶望으로 떠나왔던 곳으로 되돌아갑니다. 예수님께 일어난 逆轉이 弟子들에게도 일어났음을 봅니다. 그들이 到着해 보니 다른 弟子들 亦是 復活하신 主님에 對한 경이로운 體驗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이로써 서로가 서로에게 復活의 證人이 되기 始作하였습니다. 이렇듯 復活 體驗은 共同體를 形成합니다. 떠나갔던 弟子들을 되돌아오게 하고, 自身의 體驗을 함께 나누는 가운데 復活 信仰의 이야기는 더욱 생생해지고 豐盛해짐을 雄辯的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亦是 復活의 證人으로 招待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聖經을 풀이해 주셨을 때 그들 마음이 뜨거워진 것처럼, 우리도 말씀 안에서 마음 뜨거워지는 날들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글 _ 臨未熟 엘렉타 修女(툿찡 布敎 베네딕도修女會 大邱修女院)

2024-04-14

[말씀默想] 復活 第2週日, 하느님의 慈悲 週日

■ 어떤 疑心을 對하는 態度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 자리에 없어 主님을 만나지 못했던 토마스가 모진 말을 내뱉습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直接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決코 믿지 못하겠소.” 여드레 뒤에 다시 나타나신 主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疑心을 버리고 믿어라.” 그제야 토마스는 告白합니다. “저의 主님! 저의 하느님!” 西洋말에 ‘Doubting Thomas’라는 表現이 있습니다. ‘疑心하는 토마스’라는 말이지요. 決定的인 證據나 體驗 없이는 어떤 것도 믿으려 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랍니다. 그렇습니다. 이 이야기 하나로 토마스는 不信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表現은 조금 不便합니다. 토마스를 그저 疑心 많은 사람으로만 記憶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토마스의 疑心을 이렇게 戱畫化해도 되는지 묻고 싶습니다. 어쩌면 토마스가 疑心할 수 밖에 없는 理由가 있지 않을까요. ■ 疑心의 理由 傳承에 依하면 토마스 使徒는 後日 印度까지 가서 福音을 傳했다고 합니다. 프랑스에서 工夫를 할 때 引渡 神父님을 만난 적이 있는데요, 그때 같이 工夫하던 프랑스 神學生이 弄談을 건넸습니다. “印度의 守護聖人이 토마스이니, 아마 印度 信仰共同體는 疑心이 많지 않나?” 웃자고 던진 말에 神父님께서는 죽자고 答하셨습니다. 神父님께서는 꽤나 眞摯한 表情으로 答을 주셨지요. 아버지를 무척 사랑하는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가 자는 동안 바쁜 아버지가 急히 집을 다녀갔다고 해봅시다. 아침에 일어난 아이에게 다른 家族 모두가 엊저녁에 아버지가 다녀가셨다고 아무리 아이에게 말해도, 아이는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요. 或 믿는다고 해도 서운하게 생각할 것이라고요. 그러니까, 印度敎會 사람들은 疑心하는 토마스의 이야기를, 오히려 主님께 對한 사랑이 아이와 같이 깨끗하고 懇切해서, 生떼를 쓰는 모습으로 理解하고 있었습니다. 事實 토마스는 예수님께 뜨겁고 忠實한 사람이었습니다. 요한福音 11章에서, 예수님께서 유다脂肪으로 가시겠다고 하자 弟子들은 말립니다. 그곳에서 유다人들이 예수님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토마스는 오히려 다른 弟子들을 督勵합니다.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 弟子들이 主님의 빈 무덤을 보고도 두려워 숨어있을 때, 토마스는 그곳에 없었습니다. 福音은 토마스가 무엇을 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만, 다른 弟子들이 죽음이 두려워 숨었을 때 토마스는 밖으로 나가서 무엇이라도 해보려고 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네 福音書 全體를 통틀어 보아도, 예수님의 面前에서 “하느님”이라고 告白한 사람은 토마스가 唯一합니다. 果然 토마스의 疑心을 不輕하다 하겠습니까. 그 疑心을 부끄러워할 수 있는 사람은 토마스 自己 自身 밖에 없지 않을까요. 오히려 우리가 記憶해야 하는 것은 토마스의 뜨거운 熱情과 純粹한 사랑이 아닐까요. ■ 疑心도 쓸모가 있나요 우리는 使徒들이 건넨 이야기를 傳해 들었고, 使徒들처럼 예수님을 主님으로, 하느님으로 告白합니다. 使徒들처럼, 週間 첫날 바로 이 週日에 함께 모여 말씀을 듣고 聖體를 모십니다. 그렇게 우리의 마음도 토마스와 같이 뜨겁고 純粹하기를 希望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努力과 希望의 裏面에는 疑心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토마스처럼 主님의 傷處를 直接 보고 만져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시 한番 물어볼 수도 있겠습니다. 正말 主님의 傷處를 直接 보고 만질 수 있다면 우리의 믿음은 더 굳건하게 되기는 하는 걸까요. 토마스가 疑心했다면, 우리도 疑心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렇습니다. 信仰 안에서 한 사람은 하느님을 마주합니다. 특정한 時間과 空間에 갇힌 사람. 어떤 狀況과 思考方式을 넘어설 수 없는 사람이, ‘時間과 時代’를 超越하신 하느님을 마주합니다. 疑心이 하나도 없는 것이 異常한 일입니다. 疑心은 너무도 當然한 것입니다. 오히려 疑心은 無限者 하느님을 마주한 유한자 人間의 權利입니다. 우리는 信仰의 旅程을 걷는 동안 自身의 疑心을 견뎌내야 합니다. 同時에 그 疑心을 道具 삼아 하느님께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疑心은 믿음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主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幸福하다.” 그리고 요한 福音史家는 이 不便한 이야기를 記錄하는 自身의 意圖를 덧붙입니다. “이것들을 記錄한 目的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生命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主님께서는 當身의 傷處를 내보이셨던 것처럼, 토마스는 自身의 부끄러운 疑心을 우리에게 내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모든 것을 記錄하여, 우리를 믿음에로 이끌고 있습니다. 글 _ 전형천 미카엘 神父(대건중學校 校牧室長)

2024-04-07

[말씀 默想] 主님 復活 大祝日

主님 復活 大祝日입니다. 모두가 예수님의 復活을 祝賀하고 함께 기뻐합니다. 그런데, 復活을 傳하는 福音書의 첫 이야기는 좀 異常합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復活하셔서 사람들이 놀라고 모두 歡呼하는, 그런 기쁨과 驚歎이 드러나는 이야기가 아니고 아주 淡淡하게 ‘빈 무덤’에 對해 말하는 것으로 그칩니다. 네 福音書 모두가 이를 共通的으로 報道하고 있습니다. 主님 復活 大祝日 낮미사 福音은 매우 單純하면서도 復活의 感動과는 無關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週間 첫날, 卽 유다人들의 安息日 다음 날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으로 갑니다. 그런데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어서 놀라고 두려워서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弟子에게 달려가서 알립니다. 弟子들도 예수님의 屍身이 없는 빈 무덤을 보고 놀라고 혼란스러웠으나 예수님의 復活을 깨닫지는 못했다고 福音은 傳합니다. 왜 이런 이야기로 復活에 對한 福音이 始作할까요? 가장 먼저 무덤으로 간 마리아 막달레나에 對해 默想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悲慘하게 돌아가신 衝擊이 사라지지 않았을 터인데 그女는 ‘아직도 어두울 때’ 무덤으로 갑니다. 어떤 마음에서 그女는 이렇게 이른 時間에 무덤으로 발걸음을 向했을까요? 어쩌면 소리 내어 주검 앞에서 痛哭하지 못해서 或은 그리움에 눈물지으며 못다 한 이야기를 들려주러 갔을지도 모릅니다. 絶望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을 잊지 않고 어둠이 채 가기도 前에 무덤으로 예수님을 찾아간 그女는 누구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하고 尊敬한 弟子입니다. 이런 眞實한 사랑이 復活한 예수님을 가장 먼저 體驗하게 하는 原動力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女가 처음 마주한 것은 텅 빈 무덤입니다. 당혹스럽습니다. 누가 先生님의 屍身을 훔쳐 갔는지 두려움도 듭니다. 죽어서조차 先生님은 反對者들에게 標的이 되어 害코지당한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女는 두려움과 混亂 속에서 베드로와 다른 弟子들에게 달려갑니다. 弟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이들 亦是 混亂과 두려움 속에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큰 歡呼를 받으며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들어온 記憶이 아직 생생한데 갑작스럽게 벌어진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茫然自失하며 絶望感에 빠져 있습니다. 또한 自身들도 죽을 수 있다는 恐怖로 떨고 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마리아 막달레나가 외칩니다. “누가 主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베드로와 다른 弟子가 무덤으로 뛰어가 보니 女人의 말처럼 무덤이 비어있습니다. 들어가 보니 屍體가 그냥 없어진 것이 아니고 手巾과 亞麻布가 개켜 놓여 있었습니다. 이들은 더욱 混亂에 빠집니다. 弟子들은 예수님이 復活하신다는 聖經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고 福音은 이야기합니다. 弟子들은 왜 예수님이 復活하실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고, 復活에 對한 첫 證言은 復活하신 예수를 目擊한 것이 아니라 ‘빈 무덤’일까요? 弟子들이 復活을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은 예수님의 十字架 죽음을 제대로 理解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復活은 十字架와 分離해서 理解할 수 없습니다. 弟子들은 熱心히 예수님을 믿고 따랐지만 예수님을 穩全히 理解하지 못했기에 그분의 죽음도 理解할 수 없었습니다. 當時 유다인 大部分의 期待처럼 弟子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고 따른 것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가르쳐주셨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解放시킬 政治的 指導者로 期待한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누가 윗자리를 차지할 것인지를 놓고 다툴 뿐 아니라(루카 22, 24) 제베데오 아들들의 어머니는 아들들의 좋은 자리를 미리 付託합니다(마태 20, 20~21). 그렇게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政治的 指導者로서 百姓들을 統治할 것을 期待했으나 이런 期待가 完全히 무너지고 예수님은 無氣力하게 죽음을 맞이합니다. 예수님은 十字架에서조차 하느님을 信賴하고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十字架는 人間으로 살면서 얼마나 하느님을 믿고 사랑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事件이자 同時에 하느님이 人間을 얼마나 사랑하시기에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無力하게 우리의 罪와 어둠을 끌어안아 주시는 지를 보여준 事件입니다. 弟子들은 예수님이 살아간 사랑의 삶을 理解하지 못했기에 그분이 왜 十字架에 달리신지를 理解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죽음은 徹底한 失敗이며, 그 죽음과 함께 自身들의 期待와 欲望도 失敗로 끝났습니다. 그들은 絶望과 죽음 너머에 있는 예수님을 全혀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빈 무덤’은 예수님이 있어야 할 자리가 ‘죽음’李 아님을 말해줍니다. 그분의 人生이 弟子들의 생각처럼 失敗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고 살아간 사랑이 現實的 힘 앞에서 無力해 보이지만 끝내 勝利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表徵이 빈 무덤입니다. ‘빈 무덤’은 또한 예수님의 새로운 招待입니다. 混亂과 두려움 속에 있는 弟子들에게 예수님의 삶이야말로 하느님이 願한 삶이고 하느님께 가는 길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招待입니다. 우리는 ‘빈 무덤’을 默想하면서 世上의 判斷과 달리 結局 사랑이 죽음을 이기고 우리를 救援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事件이 ‘예수님의 復活’임을 깨닫게 됩니다. 정호승 詩人의 詩 ‘봄길’이 떠오릅니다. 詩에는 다음과 같은 句節이 나옵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限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예수님의 復活은 모든 希望이 사라지고, 사랑이 失敗했다고 느끼는 十字架를 통해 하느님께 가는 길이 있고, 그런 사랑의 길은 우리가 避해야 할 苦痛의 旅程이 아니라 하느님이 同伴하는 따뜻한 봄길이라고 詩人은 말하는 것 같습니다. 復活의 기쁨과 따뜻함을 우리 모두가 體驗하고 누리기를 祈禱합니다. 글 _ 현재우 에드몬드(한국평團協 平信徒使徒職硏究所 所長)

2024-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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