最後의 晩餐에서 남겨주셨던 主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새로운 誡命, 사랑의 誡命입니다: “이것이 나의 誡命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命令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이 예쁘고 따뜻한 말씀조차도, 어떤 日常 앞에서는 서운하게 들리는 날이 있습니다. 敎務室 자리 건너便에는 安全生活部長 先生님이 계십니다. 學生들의 葛藤이나 逸脫을 擔當하는 분이시지요. 예전에는 學生主任이라고 불리던 그런 役割이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건너便 자리에서 한숨 소리가 들릴 때마다 오늘 또 무슨 일이 있구나 싶습니다. 先生님들의 懇切한 마음에도 不拘하고 아이들의 葛藤과 逸脫은 끊이지 않습니다. 先生님들의 懇切한 마음과 아이들의 마음이 어긋나는 그런 瞬間들이지요. 先生님의 한숨은 失敗한 사랑의 울음소리처럼 들려서 저조차도 속이 傷합니다. 本堂 司牧者로 살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가끔은 좋은 마음으로 奉仕하겠다고 만난 사람들끼리 서로 마음을 할퀴고 찾아오곤 했습니다. 是是非非를 가려달라는 이야기 앞에 말門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어떤 決定은 누군가에게는 公正과 定義이겠으나, 反對便에서는 排除이고 偏愛로 비치겠지요. 이 사람도 제 신자고 저 사람도 제 信者인데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럴 때면 ‘서로 사랑하라’는 主님의 말씀이 채찍처럼 느껴졌습니다. 果然 이 말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 걸까. 그저 ‘사랑하라’ 하셨다면 될 일을, 굳이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理由는 무엇이었을까. 이 아름다운 말씀이 서운한 날에는 묻고 또 물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사랑의 誡命에다 默想이랍시고 말을 덧대는 것이 몹시 부끄럽습니다. 할 수 있다면, 오히려 沈默을 지키고 싶습니다. 道理 없이 말해야 한다면 다시 묻고 싶습니다. 어떤 물음이 可能할까요. 그러나 어떻게 물어보든 그 質問은 예수님이나 요한 福音史家를 만났던 사람들이 던졌던 質問과 닮아있을 것만 같습니다. 主님이 주신 誡命을, 우리에게 傳해주고 있는 요한을 생각합니다. 젊은 時節 요한은 스승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와 함께하며 배웠습니다. 요한은 묻고 예수님은 答하셨습니다. 그리고 歲月이 한참 흘러 요한은 老年을 맞았습니다. 兄弟들은 모두 殉敎했고, 그는 홀로 世上에 남아 主님에 對해 말해야 했습니다. 스승과 함께한 時間보다 한참을 더 살아낸 요한에게, 사람들이 묻습니다. 무언가 가르쳐주기를 請했습니다. 質問을 하던 靑年 요한은, 이제 唯一한 使徒로서 答해야 했습니다. 傳해오는 이야기에 依하면, 요한은 그렇게 質問을 받을 때마다, 다른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겨우 몸을 일으킨 뒤에 아주 짧게 말했다고 합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十字架로 나아가던 스승의 가르침을, 죽음을 앞둔 요한이 反復하고 있습니다. 가장 사랑받았던 弟子 요한이 이제 스승의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傳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라”는 요한의 對答에 많은 사람들은 ‘또 사랑이냐?’하고 푸념했다고 합니다. 요한은 그 가르침이야말로 가장 重要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겠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요한에게 다른 이야기를 期待했나 봅니다. 어쩌면 요한조차도 失敗했는지 모릅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던 그 瞬間에도, 사람들의 마음은 엇갈려나갔으니까요. 생각해 보면 언제나 그랬습니다. 水難을 앞痘神 마지막 食事 자리에서도, 몸과 피를 내어주시면서 모든 것을 쏟아 내시며 사랑하실 때도, 그야말로 當身이 親舊라고 부르시는 弟子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시는 바로 그 저녁에도 그랬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기러 나갔고, 나머지 弟子들은 도망갔으며,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番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받은 그날에도, 예수님의 한결같은 마음과는 달리, 弟子들의 마음은 四方八方으로 흩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한결같았지만, 예수님과 弟子들은 ‘서로’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 참 쉽지 않습니다. 내가 마주한 當身에게 무엇이 必要한지, 當身이 무엇을 願하는지 늘 苦悶해야 하지요. 그렇게 每 瞬間 사랑을 苦悶하는 것도 버거울 때가 많은데,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렵습니까. 主님과 弟子들, 사랑의 使徒 요한과 사람들 사이에서도 어려웠던 그 사랑은, 우리에게도 아득히 멀게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우리는 主님 말씀에 따라 사랑을 試圖하겠지요. 그리고 그만큼 자주 서로 사랑하는 데 失敗할 겁니다. 그러나 失敗할 일이라 해서 試圖조차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말이 都大體 무슨 意味가 있을까요. 主님께서는 “서로 사랑하여라”는 가르침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고 덧붙여 놓으셨지요. 사랑의 誡命 안에, 이미 主님의 사랑 告白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의 誡命을 지키는 것은 主님 사랑에 對한 應答이겠지요. 서로 사랑하는 데 지치지 않기를 希望합니다. 서로에 對한 사랑이 멈추지 않기를 懇切히 祈禱합니다. 우리의 사랑이 主님의 사랑을 닮기를 懇切히 바랍니다. 글 _ 전형천 미카엘 神父(대건중學校 校牧室長)
2024-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