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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新聞

2020年 코로나19 팬데믹의 餘波를 서울大敎區 主敎座鳴動本堂(主任 조성풍 아우구스티노 新婦) 學生 服事團度 避하지 못했다. 主日學校는 팬데믹으로 인해 서로 對面조차 못 하다 結局 없어졌고 複寫單元도 大幅 줄었다. 그럼에도 着實하게 本堂 服事團의 命脈을 이으며 司祭 聖所도 간직하고 있는 團員들이 있다. 鳴動本堂에서 ‘兄님 服事團’이라는 別名을 가진 複寫團長 백우현(다니엘·15)君과 장요셉(다니엘·15)·조예준(미카엘·14)君은 올해부터 나머지 5名의 服事團원을 이끌고 있다. 服事團에 들어가게 된 契機는 여느 複寫團員과 다를 바 없다. 장요셉軍은 “父母님 따라 聖堂을 나오다 보니 除隊 위에서 神父님을 돕는 複寫의 모습이 멋있고 보람돼 보였다”고 말했다. 主敎座本堂의 服事團이라는 自負心도 빼놓을 수는 없다. 將軍은 “미사에 複寫를 서고 끝나면 자랑스럽고 뿌듯한 마음이 들어 只今까지도 服事團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조군도 “아무래도 有名하고 큰 本堂이다보니 周邊에서는 그렇게 크고 雄壯한 곳에서 失手 없이 잘 하냐고 묻기도 한다”고 말하며 웃었다. 하지만 團長인 白軍과 將軍은 普通이라면 服事團을 卒業했을 學年인 高等學校 1學年이다. 그럼에도 團員이 8名에 不過한 本堂 狀況에서 服事團을 卒業하지 않고 奉仕하며 後輩 團員들을 챙긴다. 白軍은 “學校에서 聖堂에 다녔던 親舊들이 ‘아직도 服事團을 하고 있느냐’며 묻곤 한다”고 傳했다. 學業을 理由로 主日미사마저도 參禮하지 않는 靑少年이 太半인 現實에서 어쩌면 當然한 質問이다. 하지만 이들은 古參이라는 責任感에 말 그대로 ‘兄님’李 돼 服事團을 이끌고 있다. 팬데믹에 主日學校 사라졌지만 奉仕하는 責任感으로 命脈 이어오며 司祭 聖召의 꿈도 함께 키워 主日學校도 없다보니 自然스레 또래 聖堂 親舊들도 줄었다. 敎師들도 다른 團體로 흩어져 活動 中이다. 白軍은 “코로나 以後 主日學校가 없어진 게 學生이 줄어든 큰 理由인 것 같다”며 “우리 또래는 聖堂에 같이 갈 ‘짝’이 있어야 나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데, 같이 갈 親舊도 없는데다 聖堂에 나가더라도 또래들과 서로 親해질 機會가 없다”고 말했다. 歲 複寫團員은 異口同聲으로 主日學校는 아니더라도 聖堂 內에 靑少年들을 위한 施設이 마련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學生이 적으니 다른 學生들처럼 聖堂 밖에서 親舊들과 마음껏 놀고 싶지만, 막상 本堂의 不足한 服事團원을 생각하면 責任感이 앞선다. 中學校 3學年인 조군도 “내가 안 하면 後輩 5名만 남는데, 바로 밑 後輩가 이제 中學校 1學年”이라며 高等學生이 돼도 힘닿는 데까지 奉仕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들 세 名은 司祭 聖所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 服事團을 하며 神父님과 가까이 지내는 時間이 많다 보니 自然스럽게 司祭 聖所를 키웠다. 團長인 白軍은 “어른이 되면 다른 걸 떠나 말 그대로 ‘좋은 사람’李 되고 싶은데, 내가 본 神父님들은 어른 中에서도 가장 좋은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코로나19 팬데믹 當時 服事團은 다른 本堂들처럼 對面 會合조차 못 했다. 버티던 團員들 여럿度 結局 服事團을 떠났다. 남은 複寫 字母會員들의 懇切한 祈禱가 닿았는지 어려운 時期를 克服하고 이젠 司祭 聖所를 가진 團員들도 나왔다. 鳴動本堂 前例 擔當 李喆圭(아우구스티노) 神父는 “字母會員들께서는 어려울 때 恒常 祈禱하며 견디어 내시던 분들”이라며 “特히 코로나 때는 會合만이라도 할 수 있도록 祈禱하고 霧散되면 눈물을 흘리시기도 했는데, 그 懇切한 祈禱 德에 只今의 服事團이 있다고 본다”고 傳했다.

[몽골 민경화 記者] 예수님은 허름하고 陋醜한 구유에서 가장 弱한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셨다. 입을 것도, 먹을 것도 변변치 않은 갓난아기를 본 사람들은 自身이 가진 것을 나누고자 마음먹었을 것이다. 가장 낮은 곳에 계셨기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 사랑을 나누는 기쁨을 經驗할 수 있었다. 지난해 55歲 나이로 善終한 고(故) 김성현(스테파노) 神父는 몽골에서 宣敎한 23年 동안 우리 곁에 오신 예수님의 가난한 모습을 記憶하고 몽골人들에게 그런 예수님을 알려주고자 했다. 그가 世上을 떠나고 찾은 몽골에는 宣敎師의 業績과 같은 華麗한 聖堂이나 그럴싸한 學校 建物은 없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에게서 김성현 新婦가 더 값진 것을 남겼음을 傳해 들을 수 있었다. ■ 韓國에서 온 나의 아버지 “神父님은 아버지 같은 사람이 아니라 그냥 아버지였습니다.” “神父님은 父母가 없는 아이들의 빈자리를 채워 주신, 우리 아빠입니다.” “담배 피우실 때도, 걸어 다니실 때도 늘 祈禱하고 계시다고 느꼈어요. 神父님과 만나면 예수님이 다가오는 것 같았어요.” “神父님은 게르에서 불피워 밥을 지어 먹고 말 타고 羊을 돌보며 몽골 사람처럼 살았어요. 잠깐 들렀다 돌아가는 다른 外國人들과 달랐습니다.” 김성현 神父 善終 1週期를 두 달餘 앞둔 4月 1日, 몽골의 봄은 아직 차갑기만 했다. 草原의 봄은 더욱 荒凉했다. 아직 生命이 자라지 못한 草原에서는 먹지 못해 生命을 잃은 家畜들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몽골에서 스물두 番의 酷毒한 겨울을 버텼던 金 神父도 따뜻한 봄을 보지 못하고 世上을 떠났다. 하지만 그의 삶은 남은 사람들에게 봄을 膳物했다. 아버지의 든든함, 親舊의 便安함,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을 傳한 金 神父의 삶은 그가 世上을 떠난 뒤에도 몽골敎會에 生命을 불어넣고 있었다. 2000年 몽골에 到着해 2年 뒤 세운 港올 聖母昇天聖堂. 나그네가 쉬어가도록 門을 열어 놓는 몽골 傳統 家屋 게르처럼 金 神父는 가장 먼저 聖堂 門을 열었다. 가톨릭이라는 宗敎가 낯선 몽골에서 聖堂 門을 두드린 것은 가난하고 갈 곳 없는 이들이었다. 쓰레기를 주워 팔거나, 安全한 家庭의 울타리가 없는 아이들에게 金 神父는 “聖堂에서 같이 살자”고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12名의 아이들이 모였고 聖堂 한便에는 아이들의 寢室과 工夫房이 마련됐다. 그 瞬間 金 神父는 祈禱했다. “主님, 아이들을 보내 주십시오, 아이들과 平生 함께 살겠습니다. 이 아이들 中 몽골人 司祭가 한 名만 나오게 해주십시오.” ■ 하느님이 몽골에 보낸 膳物 聖堂을 짓고 安定된 共同體를 돌보며 숨을 돌릴 법한 瞬間, 그는 草原으로 向했다. 몽골에서 宣敎한 지 16年 만에 都心에서 200km 떨어진 에르덴산트로 떠난 것이다. 電氣나 물도 없이 劣惡한 環境에서 지내야 했던 時間을 金 神父는 “天國과 같았다”고 回想했다. 安息年과 國內硏修로 韓國에 있는 동안 韓國語敎師資格證을 딴 그는 에르덴산트에서 韓國語를 가르쳤다. 에르덴산트 사람들은 그를 ‘新婦’가 아닌 ‘金 先生님’이라고 불렀다. 그는 좋은 建物을 짓거나 草原에 없는 값비싼 物件을 내밀며 “하느님을 믿어라”라고 말하지 않았다. 平素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는 眞正한 親舊가 될 수 없다”고 했던 金 神父는 그들과 같은 옷을 입고 같은 飮食을 먹으며 함께 살았다. 가난한 이들 곁에 머물렀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는 누구보다 幸福하게 에르덴산트에 머물렀다. 에르덴산트에서 金 神父를 만났던 지엑멧 더르지氏는 “金 先生님은 줄곧 工夫와 일을 熱心히 해서 國家의 發展을 도와야 하고 아이들 工夫도 熱心히 시키라고 이야기해 주셨다”며 “우리는 家族이었기 때문에 只今도 先生님의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몽골 바잉허쇼 소피아 本堂 主任 노상민(토마스) 神父는 “資本主義가 擴散되면서 冷淡 敎友가 많아지자, 神父님은 새로운 宣敎 方法이 必要하셨다고 判斷하신 것 같다”며 “가난의 靈性을 살아가는 것이 宣敎 司祭의 使命이라는 생각에 몽골人들의 삶 안으로 들어가고자 에르덴산트로 떠나신 것”이라고 말했다. 生前에 金 神父는 가진 것이 없었다. 추운 나라에서 健康을 챙기라며 家族들이 사준 옷과 신발은 모두 몽골 아이들에게 나눠줬고, 韓國 가는 길에 辦公費를 아껴 산 膳物들은 韓國에 사는 몽골人들 것이었다. 그의 손에 남은 것이 없는 것 같았지만, 수많은 몽골 사람들이 곁에 남아 있었다. 寄宿舍에 살았던 아이들에게 金 神父는 “내가 죽으면 港올 聖堂에 功績碑를 세워달라”고 말했다. 어린 時節, 공세리聖堂 한便에 세워진 드비즈 神父의 功績碑를 보고 “이 심심한 곳에 왜 오셨지?”라며 宣敎 司祭를 꿈꿨던 自身의 過去가 몽골 信者들의 現在가 되길 바랐기 때문이다. 몽골에서 만난 信者들은 한결같이 “神父님이 아직도 내 옆에 살아계신 것 같다”고 말했다. 그 바람처럼 金 神父는 草原의 바람으로 몽골敎會와 몽골 信者들 곁에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鄰保 聖體 修道會(總奉仕者 한미란 사비나 修女) 서울 인보의 집(院長 홍미라 루치아 修女)은 2022年부터 서울 신림동과 水踰洞에서 火·金曜日 저녁 6時~9時까지 靑少年과 靑年들을 對象으로 無料 밥車를 運營 中이다. 考試院이나 원룸이 많은 新林洞 밥車에는 就業準備生들이, 娛樂 施設이 많은 水踰洞 밥車에는 主로 學校 밖, 家庭 밖 靑少年들이 밥車를 찾는다. 靑少年 週日을 맞아 오늘도 트럭을 모는 홍미라 修女와 백남실(모니카) 修女를 찾았다. 2022年부터 無料로 運營하며 就業準備生·學校 밖 靑少年 等 돌봄 必要한 階層에 食事 提供 “끊임없이 기다리며 사랑 傳해요” ■ 對話가 싹트는 곳, 밥床 “저도 修女님처럼 남에게 베풀고 싶어요. 본받고 싶습니다.” 聖 마티아 사도 祝日인 5月 14日. 이날 가장 먼저 밥車를 찾은 민희(22·假名)氏는 벌써 2年째 알고 지내는 修女들과 便安한 對話를 나누며 30分 넘게 밥을 먹었다. “네가 正말 最善을 다할 것 같으면 學院費도 대줄 수 있어.” 이런저런 이야기 中 生計에 對한 話題로 넘어가자, 修女들은 민희氏의 未來를 걱정하며 말을 건넸다. 민희氏는 恒常 善意로 對해주는 修女들에게 感動받는다며 飮食들을 한가득 싸서 돌아갔다. 靑少年과 靑年들이 찾는 밥車 메뉴는 토스트를 基本으로 每日 바뀐다. 오늘은 돈가스와 웨지감자, 오므라이스와 군饅頭다. 平素 아이들이 좋아하는 메뉴는 불고기덮밥, 김치볶음밥, 오징어덮밥, 海物찜 等이다. 特別式으로 여름 中엔 한 番씩 鐵板에 三겹살이나 목살을 구워주고 겨울에는 떡볶이에 魚묵을 準備하기도 한다. 아이들이 選好하는 메뉴를 準備하다 보니 늘 잘 먹는 모습을 보게 돼 보람이 있다. 하지만 단골 아이들이 한 番에 3人分씩 먹는 모습을 보면 예쁘고 氣分 좋은 한便, 마음이 아프다. 平凡한 家庭에서 父母의 돌봄을 充分히 받는 요즘 靑少年들은 아무리 成長기라고 해도 그 程度는 안 먹는데, 거리의 아이들은 마음의 虛飢가 합쳐져 그런 것 같아 더욱 안타깝다. “中2짜리 女子애가 어느 날 와서 落胎했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모르게 ‘修女님이 未婚母 施設 連結해 줄 수 있으니 다음에 이런 일 있으면 말해’라고 해줬죠.” 밥 먹으러 와서 이런저런 얘기를 便하게 하다 보니 생길 수 있는 일이었다. ■ 어려움 中에도 힘이 나는 理由 ‘돈이 없어서 어떡하지, 이러다 거덜 나겠다’고 생각할 때면, 하느님께서는 미리 알고 채워주신다. 쌀이 떨어졌다 싶으면 다음 날 神奇하게도 쌀이 들어온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다 채워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너희는 그냥 行하여라”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밥車를 後援해 주시는 분들이 다 餘裕가 있는 것은 아니다. 基礎受給者度 少額 後援을 해주고 있고, 廢止를 주워 판 돈을 보내 주는 사람도 있다. 어려움은 體力이다. 하루 終日 飮食을 만들고 整理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밥車의 特性上, 調理를 하면서 크고 작은 火傷과 傷處는 不知其數다. 큰 트럭을 運轉하다 보니 事故가 나기도 하는데, 한 番은 뺑소니를 치고 逃亡가는 運轉者를 붙잡은 적도 있다. 갑자기 지나거던 行人 한 名이 修女들에게 飮料水 두 캔을 쓰윽 내밀고는 웃으며 지나갔다. 飮料를 받은 洪 修女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런 분들이 間或 있으세요. 德分에 힘이 나죠.” ■ 信賴感이 形成될 때의 기쁨 洪 修女는 한 番씩 食材料를 빠뜨리고 올 때도 있다. 한 番은 材料를 直接 사러 가는 代身 진수(19·假名)君에게 修女院 法人 카드를 주며 “여기에 집도 살 수 있을 만큼 돈이 많은데 修女님이 진수 믿고 줄 테니까 鷄卵 한 판만 사다주렴”이라며 카드를 건넸다. 처음 진수는 알록달록한 머리에 거친 아이였다. 하지만 꼬박꼬박 밥을 먹으러 오면서 洪 修女와 진수 사이에 信賴感이 形成됐고, 카드를 선뜻 내주고 鷄卵을 付託할 程度로 믿게 됐다. 진수의 팔에 있는 自害 痕跡은 洪 修女에게도 아픈 傷處다. 只今은 잘 오지 않지만 洪 修女의 付託으로 生存 確認은 가끔 해주고 있는 것만으로도 고맙다. 오늘 밥車를 찾은 정운(30·假名)氏는 修女들이 꽉꽉 담아준 오므라이스며 돈가스 等을 챙기며 연신 感謝하다고 했다. “저는 基礎受給 靑年이라서 修女님들 밥車 德分에 살아갈 수가 있을 程度예요. 只今 生活이 너무 어려운데 正말 感謝해요.” 基本 메뉴 外에도 有名한 製빵師의 빵이라며 두세 個씩 챙겨주는 修女들의 손은 바빴다. ■ 여러 機關과 連繫하며 자리잡아 “安寧하세요 修女님, 여기 警察 될 親舊인데 잠깐 같이 일하게 돼서 人事드리러 왔습니다.” 밥車를 찾아온 거리相談 專門要員들이 修女들과 반갑게 人事했다. 2~3分 잠깐 나눴지만 함께 苦悶한 內容은 모두 保護받지 못하는 靑少年과 靑年들에 對한 것이었다. 5月 31日 신림역에서 聯合 거리相談을 進行한다는 情報도 共有했다. 洪 修女는 오늘 訪問한 擔當者와 連繫됐던 한 아이가 시골로 내려간다며 連絡 杜絶이 됐다는 提報도 했다. “한 아이에 對해서도 서로 役割이 달라 서울 A紙T(擔當 은성第 요셉 神父)라든가 서울市 靑少年 移動쉼터, 거리相談 等 여러 地域 團體와 連繫해 情報를 共有하면서 進行하고 있어요.” 처음엔 밥만 해주려 했다. 그런데 社會福祉士로 일했던 洪 修女 눈에 아이들의 여러 事情들이 안 보일 理가 없었다. 그렇게 아이들의 日常에도 도움을 주기 始作했다. 2022年 始作한 밥車는 자리 잡는 데 3年은 걸릴 것 같았지만 아이들의 입所聞과 여러 團體들과의 連繫로 1年 만에 어느 程度 터를 잡았고 이제는 3年 車가 됐다. ■ 아이들 곁에서 默默히 기다림 特히 마음을 열기 어려운 靑少年 司牧, 이에 對한 어려움을 洪 修女는 徐廷柱(1915~2000) 詩人의 '菊花 옆에서'라는 詩로 代身했다. ‘한 송이 菊花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 한 송이 菊花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힘들지만 아이들을 끊임없이 기다리는 時間, 聖母님처럼 바라보고 默默히 기다리는 時間을 뜻하는 것 같아요.” 2年 넘게 通姓名도 안 한 채 마음을 닫고 있다는 이들부터 檢定考試를 通過하거나 就業에 成功해 人事 온 이들까지. 修女들은 이 모두를 품어주며 그저 밥 먹고 가라고 토닥인다. ※ 問議: 02-793-9178 서울 인보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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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조르고 마렌高 樞機卿 인터뷰] “김성현 神父님의 삶은 몽골의 많은 이에게 빛이 되고 있습니다”

[몽골 민경화 記者] 몽골에 가톨릭교회의 씨앗이 뿌려진 것은 1992年이다. 原罪 없으신 聖母 성심 修道會(CICM) 宣敎師 로버트 神父와 웬體슬라誤 파딜랴 新婦, 길버트 神父가 울란바토르 市內의 한 호텔에서 첫 미사를 奉獻하며 몽골 宣敎의 始作을 알렸다. 첫해 20名의 몽골人 領洗者가 나왔지만, 國民의 50% 以上이 라마교를 믿는 몽골에서 가톨릭이 자리를 잡는 것은 碌碌지 않았다. 350萬 人口 中 가톨릭信者는 1400餘 名. 꾸준히 信仰生活을 하는 信者 數는 이보다 적지만 몽골 울란바토르지목區長 조르고 마렌高(Giorgio Marengo) 樞機卿은 “몽골敎會는 貴重한 膳物”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몽골 信者들의 獻身的인 믿음을 이끌어 낸 宣敎師로 고(故) 김성현(스테파노) 新婦를 指目했다. 瘠薄한 땅에서 宣敎 使命을 위해 孤軍奮鬪했던 두 聖職者가 그린 몽골敎會의 未來는 무엇이었을까. ■ 急激한 社會變化 속 몽골에 남은 작은 羊떼 社會主義國家였던 몽골은 1992年 資本主義를 導入하면서 急激한 社會變化를 겪었다. 遊牧生活을 했던 사람들은 都市로 몰려들었고 資本主義와 新自由主義에 물든 젊은이들은 傳統과 文化를 잃어갔다. 資本主義의 土臺가 없었던 狀況에서 생긴 急激한 變化는 富의 公平한 分配를 막았다. 뒤틀린 資本主義는 가난한 이들의 숨筒을 조였고 몽골 國民 3分의 1은 貧困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敎會가 몽골에 宣敎의 씨앗을 뿌린 理由 中 하나가 여기에 있다. 가난한 이들과 福音 안에서 同行하기 爲해서다. 1991年 敎皇廳이 몽골과 外交 關係를 樹立한 뒤 2002年 울란바토르指目謳歌 設定되면서 積極的인 福音化 活動을 펼쳤다. 2016年 첫 몽골人 司祭가 誕生했고 2021年 大田敎區에서 司祭品을 받은 饊子 자브 神父는 現在 몽골 울란바토르의 聖 베드로와 바오로 主敎座本堂에서 司牧하고 있다. 김성현 新婦가 몽골에 뿌린 福音의 씨앗은 饊子 神父라는 값진 열매를 맺고 몽골敎會에 活力을 불어넣고 있었다. 조르고 마렌高 樞機卿은 2003年 몽골에 到着했다. 東洋文化가 익숙하지 않았을 29살 젊은 司祭에게 몽골敎會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왔을까? “1990年代 初盤 政治 狀況이 急激하게 變하면서 몽골人들은 社會 全般의 變化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제가 到着했을 當時에도 혼란스러운 狀況은 繼續됐죠. 혼란스러운 가운데 있었던 敎會는 아주 작은 羊 떼에 不過했지만, 그들은 獻身的이면서 熱情的으로 믿음을 이어 나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몽골敎會 믿음이 가진 힘이 普遍敎會에 貴重한 膳物이 될 것이라고 믿어 疑心하지 않았습니다.” 信仰的으로 瘠薄한 가운데서도 熱情과 기쁨을 다해 信仰生活을 하는 몽골 信者들은 異邦人 司祭에게 “福音 宣布를 向한 新鮮한 熱情”을 膳物했다. 그리고 몽골 宣敎 旅程에 同行하고 있는 韓國人 司祭들, 特히 김성현 神父는 마렌高 樞機卿에게 各別한 存在로 남았다. 信者 極少數 몽골에서 福音化에 對한 새로운 答 찾으려 努力한 참 司祭 共同體 安定 後 信者 없는 草原으로 다시금 뛰어든 獻身 배워야 “宣敎는 가난 속에서 單純하게 살아가는 것”이라는 生前 말씀 가슴에 새겨 ■ 福音을 산 牧者, 몽골 敎會에 빛이 되다 마렌高 樞機卿보다 3年 먼저 몽골에서 宣敎하고 있었던 김성현 神父는 몽골人들 삶 속에서 福音을 實踐하며 그들의 마음속에 들어가 있었다. “몽골 사람들은 相對가 眞心인지 아닌지 아는 能力이 뛰어납니다. 그런 사람들이 김성현 神父님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온 것은 그 眞心을 느꼈기 때문이겠죠. 제가 처음 본 김성현 神父는 福音에 獻身하고 福音을 따르는 삶을 산 私製였습니다.” 4年間 애써서 港올 聖母昇天聖堂을 建築한 김성현 神父는 都心에서 200km假量 떨어진 草原 地域인 에르덴산트로 보내달라고 當時 지목區長에게 請했다. 安定的인 共同體가 꾸려진 狀況에서 信者가 없는 草原으로 가겠다는 金 神父의 決定은 선뜻 理解하기 어려웠다. “金 神父님은 몽골의 兄弟姊妹들에게 福音을 傳하기를 懇切히 願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사는 곳으로 들어가려고 決定한 것이죠. 에르덴산트에서 金 神父님을 만나 나눈 이야기가 記憶에 남습니다. 宣敎는 가난 속에서 單純하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우리가 어떻게 몽골 信者들이 삶 속에서 信仰을 表現할 수 있게 도울 수 있는지 論議를 한 經驗은 참 感謝한 時間이었습니다. 金 神父님은 이미 알거나 到着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恒常 現實에 挑戰하면서 福音化에 對한 새로운 答을 찾고자 努力했습니다.” 새로운 共同體를 만들기보다 그들 안으로 들어가 福音的인 삶을 살았던 金 神父는 “예수를 믿으라”는 말을 하지 않고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느낄 수 있게 했다. 그의 宣敎師로서의 力量을 눈여겨본 마렌高 樞機卿은 지목區長이 된 뒤 2020年 金 神父를 總代理로 임명했다. “宣敎 司祭에게 重要한 要素는 復活하신 主님에 對한 眞正한 證人이라는 眞情性입니다. 그런 意味에서 김성현 神父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훌륭한 模範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그가 일찍 世上을 떠난 것은 가슴 아프지만 그가 보여준 偉大한 證言은 決코 잊히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삶은 오늘도 몽골의 많은 사람들에게 빛을 비춰주고 있습니다.” ◆ 조르조 마렌高 樞機卿은 이탈리아 꼰솔라따 宣敎 修道會 出身이다. 1974年 태어나 2001年 司祭品을 받았다. 2006年 敎皇廳立 우르바노 大學校에서 宣敎學 博士 學位를 받고 2003年부터 몽골 宣敎를 始作했다. 꼰솔라따 宣敎 修道會 아시아地域 慘事 兼 몽골 支部長, 몽골 아르바이헤르 慈悲의 某後本堂 主任으로 活動했고 2020年 몽골 울란바토르지목區 第2代 지목區長에 任命됐다. 2022年에는 몽골敎會 最初의 樞機卿으로 서임됐다. 지목區는 宣敎地에 設立되는 地域敎會 組織으로 敎界 組織의 첫 段階다. 19世紀 中盤 생겨난 形態로, 獨立된 敎區와 달리 그 地域 宣敎를 맡은 宣敎會 또는 修道會의 一員에게 敎皇의 이름으로 指目區를 統治할 代理職權이 맡겨진다. 지목區長은 敎區長 主敎와 法律上 同等視되며, 主敎座 代身 準主敎座(Pro-cathedra)를 갖는다.

“함께 祈禱하고 行動하며 一致에 한 걸음 더”...信仰課職制, 第23回 韓國 그리스도人 一致 포럼 開催

天主敎와 改新敎 神學者, 一致運動 關係者들이 한자리에 모여 韓國 그리스도人 一致運動의 歷史와 흐름을 省察하고 向後 課題를 摸索하는 時間이 마련됐다. 韓國그리스도교信仰과직제협의회(공동의장 이용훈 마티아 主敎·김종생 牧師, 以下 信仰課職制)는 創立 10周年 記念日인 5月 22日 서울 鍾路 韓國基督敎會館에서 ‘韓國 그리스도人 一致運動의 살아있는 이야기’를 主題로 第23回 韓國 그리스도人 一致포럼을 開催했다. 基調 發題에 나선 장로회신학대學校 客員敎授 안교성 牧師는 改新敎 宣敎師의 入國으로 비롯된 ▲對峙機(1884~)와 ▲竝存機(1945~), 第2次 바티칸公議會 以後의 ▲대화기(1962~), 民主化 運動 時期의 ▲年代記(1970~)와 1998年 以後의 ▲一致基로 區分해 韓國 그리스도人 一致運動의 主要 흐름을 紹介했다. 安 牧師는 “그동안 一致運動의 機構化와 敎會 間 外的 運動에 注力한 나머지 一致運動의 大衆化와 民主化가 不足했다”고 指摘하고 “宗敎가 注入이나 解放의 段階를 넘어 自己를 찾아가는 巡禮가 되고 있는 時代 흐름에 발맞춰 (天主敎와 改新敎徒) 地圖 없는 巡禮의 길 위에서 友情을 쌓고 날로 새로워지는 一致運動에 나서야 한다”고 提言했다. ‘信仰課職制 創立宣言文에서 寶物 찾기’를 主題로 發題한 信仰課職制 全 共同事務局長 김태현 牧師는 “多樣性이 前提되지 않은 一致란 있을 수 없고 特히 그리스도人이라는 이름을 지키기 爲한 努力은 多樣性을 前提로 해야 한다”며 “이는 一致運動의 專擔 機構인 信仰課職制가 지키고 保障해야 할 重要한 原則”이라고 强調했다. 이어 金 牧師는 “信仰課職制는 一致運動의 土臺를 튼튼히 하고 앞으로 進行될 一致運動의 公論場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며 10周年을 맞이한 信仰課職制의 課題로 一致運動의 擴散을 위한 ▲함께 工夫하기, 그리스도의 香氣가 널리 퍼지도록 하는 創造的 行爲로서의 ▲함께 行動하기, 그리스도 안에서 이뤄진 一致를 經驗하며 우리를 支撐하는 힘이 될 ▲함께 祈禱하기를 提案했다. 信仰課職制 前 神學委員長 박태식 新婦(프란치스코 하비에르·大韓聖公會)는 ‘神學委員會의 過去와 未來’를 主題로 한 發題에서 “名實相符한 韓國 그리스도敎會의 代表的인 神學者 集團인 信仰課職制 神學委員會에서 敎會 一致를 위한 深度 있는 討論과 新鮮한 아이디어들이 提案되고 이를 實行에 옮긴 것은 그 自體로 큰 意味가 있다”며 “神學委員會 活動이 어떤 一致 對話보다 模範的이었던 理由는 各 敎壇을 代表하는 神學 專門家들이 他 宗敎 委員會들의 말을 귀 기울여 傾聽하고 尊重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고 傳했다. 이어 “코로나19로 敎勢가 縮小된 가톨릭, 改新敎가 모두 老人들의 敎會가 되고 結局 몇몇 大型敎會만 살아남는 悲劇的인 날이 올지 모른다”며 “이러한 狀況에서 韓國 그리스도敎會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後代에 알리고 다시금 어리석은 일이 벌어지는 것을 막아야 하는 것이 神學委員會의 責任이자 使命일 것”이라고 傳했다. 信仰課職制는 韓國 그리스도人들의 一致와 敎派 간 信仰的 親交, 그리스도人들이 福音的 삶을 살 수도 있도록 돕고자 2014年 5月 22日 創立했다. 現在 總會, 共同代表會議, 諮問會議人 中央委員會, 各 敎團 實務委員會, 神學委員會로 構成돼 있으며 天主敎와 改新敎 量 敎團 實務責任者가 共同 事務局長을 맡고 있다. 그리스도人 一致祈禱會, 一致포럼, 神學委員會, 神學生 交流모임, 一致避靜, 聖誕 祝賀 音樂會, 一致 巡禮 等 旣存 活動과 함께 一致아카데미와 에큐메니컬 文化藝術制를 企劃해 그리스도人 一致運動의 場을 넓혀가고 있다.

“배고픔보다 두려운 외로움…對話가 切實했죠”

“말벗이 돼 주시는 고마운 분들과 제 지난 날 幸福했던 이야기를 나누니, 오늘도 다시 힘내 살아갈 勇氣를 얻었습니다.” 5月 14日 서울 동자동 쪽방村 住民 李工律(요셉·82) 어르신의 집에서는 특별한 料理 敎室이 펼쳐졌다. 한때 中食, 樣式 等 못 하는 飮食이 없는 50餘 年 經歷 베테랑 料理師였던 어르신에게 서울가톨릭社會福祉會 傘下 가톨릭사랑平和의집(사무국장 윤병우 미카엘 神父, 以下 사랑平和의집) 情緖 支援 奉仕者들이 찾아와 당근을 가지런하게 채 써는 技術 等 料理師의 祕法을 배우며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웠다. 여느 쪽방村 住民처럼 찾아오는 이 하나 없이 살아가는 어르신은 “糖尿 合倂症으로 漸漸 壞死하는 두 발의 苦痛보다 힘든 건 斷絶”이라고 呼訴하며 “奉仕者들이 들를 때만큼은 幸福했던 그 時節로 돌아간다”고 말했다. 사랑平和의집은 2022年부터 이처럼 쪽방村 住民들에게 食事·物品 支援 外에도 情緖 支援 活動을 펼치고 있다. 도시락과 生必品을 傳하면서 짧게 安否 程度 묻는 게 아니라 住民 한 名 한 名 週期的으로 訪問해 20~30分씩 日常 對話를 나눈다. 住民들에게 가장 時急한 것은 斷絶에 對한 慰勞機 때문이다. 쪽방村 周圍에는 多樣한 同行食堂(쪽방村 住民에게 하루 한 끼 無料 提供하고자 서울市가 指定한 民間 食堂), 大型 給食所 等이 생기고 있어 굶는 住民은 없다. 住民들은 사람에게 받은 傷處 때문에 마음의 門을 닫는다. 父母에게 버림받고, 믿었던 이에게 詐欺를 當하고, 姑婦 葛藤처럼 放置됐던 些少한 家族 不和가 完全한 儀節로 이어지고 家出하는 等 過去는 그들을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집 밖을 나가기는커녕 하루에 20 單語 以上 말하지 않는 住民도 많다. 住民끼리도 서로 警戒해 쪽房村은 늘 孤獨死 危險群을 면치 못한다. 事務局長 윤병우 神父는 “다들 傷處가 깊어 儀禮的 人事만 할 뿐 住民끼리도 깊은 對話를 하지 못한다”며 “孤獨死에 가장 脆弱한 그들이 尊嚴을 잃는 것은 막아야 하기에 情緖的 同行을 最優先 目標”라고 傳했다. 奉仕者들은 住民들이 지난날 幸福했던 이야기를 꺼낼 수 있도록 다가간다. ‘나도 이렇게 近似한 人間이었지’라는 自矜心을 찾아주기 위해서다. 처음에는 門도 열어주지 않던 住民들은 어느새 肯定的 變化를 보인다. 奉仕者들에게 아끼는 物件을 보여주며 옛날이야기를 해주고, 가는 길을 배웅하기도 한다. 만나지 않던 벗에게 먼저 連絡하고 關係를 다시 始作하는 等 스스로 조금씩 斷絶을 克服하는 사람도 있다. “할머니 젊어서도 이렇게 예쁘셨네. 眞짜 ‘퍄오량’(漂亮, 예쁘다)해요~” 이날 奉仕者들은 中國에서 온 최복음(91) 할머니 집에도 들러 옛날 寫眞을 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落傷 憂慮로 房 밖을 나서지 못하는 할머니는 하루 4時間 程度 머무는 療養 保護士 外에는 아무도 찾는 이가 없다. 할머니는 “‘예쁘다’는 奉仕者들의 稱讚은 太初에 나를 사랑으로 빚으셨던 ‘하나님’ 恩惠를 생각나게 한다”며 “'자주 올게요'라는 奉仕者들 말처럼 다음 만남을 기다리겠다”고 傳했다. ※ 後援計座 - 우리銀行 1005-502-645252(預金主 天主敎서울大敎區維持財團) ※ 인스타그램 - www.instagram.com/catholiclp

‘서울 WYD’ 準備 敎區 實務責任者 첫 全國 모임

2027年 서울 世界靑年大會(World Youth Day, 以下 WYD) 準備를 위한 敎區 實務責任者 全國 모임 첫 會議가 5月 17日 서울 中國東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5層 大會議室에서 열렸다. 이날 會議에서는 ‘敎區 大會’(Days in Dioceses)의 準備에 對한 論議가 이뤄졌다. 會議는 올해 3月 主敎會議 春季 定期總會를 통해 敎區 大會 準備委員會 結成 等 準備 責任을 맡은 靑少年司牧委員會(委員長 김종강 主敎, 以下 委員會)가 主催했다. 김종강 主敎는 人事말을 통해 “敎區 大會는 世界 靑年들에게 韓國人 信仰의 모습과 그 實踐의 獨特함, 韓國的 그리스도교 文化와 靈性을 體驗시키는 機會를 만들어 주는 重要한 大會”라고 强調했다. 이어 “그들에게 어떤 것을 보여줄 수 있고 나눌 수 있는지 細密하게 準備해야 한다”고 力說했다. 金 主敎는 “各 敎區만의 特色을 잘 드러내는 敎區 大會가 된다면 世界 靑年들이 韓國이라는 나라에서 새로운 使命을 깨닫는 時間이 될 것”이라며 “그에 對한 苦悶부터 始作하는 이날 첫 會議가 그다음 實務的인 苦悶들이 擴張돼 나가는 마중물이 되길 바란다”고 傳했다. 會議에서는 委員會 總務 최인非 新婦(유스티盧·仁川敎區 靑少年司牧國 國葬)가 敎區 大會의 實際 運營 方式, 지난 敎區 大會들에서 마련됐던 프로그램 等에 對해 案內했다. 敎區 大會는 본 大會가 열리는 主催 敎區 以外의 地域 敎區에서 본 大會 開催 直前 4泊5日 또는 5泊6日 日程으로 열린다. 開幕미사, 敎皇 行事, 主敎들의 敎理敎育 等이 펼쳐지는 본 大會와 달리 參加者들이 現地 信者들과 信仰 交流를 하며 개최국 文化를 다양하고 自然스럽게 體驗한다는 데서 重要한 開催 意味를 지닌다. 서울大敎區 WYD 地域組織委員會 事務局 次長 김세진(모세) 神父는 敎區 大會의 司牧的 準備에 對해 발제했다. 金 神父는 敎區 大會 프로그램을 構築하는 基礎 槪念인 歡迎, 發見, 宣敎, 文化, 派遣에 對해 說明하고, 그것들이 實踐될 수 있는 奉仕 및 만남 프로그램, 地域 遺産 發見 等 具體的 活動들을 提案했다. 會議에 參席한 全國 16個 敎區 實務責任者들은 案件으로 ▲敎區 大會 準備委員會 組織 構成 및 役割 ▲敎區 大會 運營 期間 ▲準備 日程 等을 다루고 敎區別 準備 狀況을 共有했다.

綜合

서울 계성고 開校 80周年 聖母의 밤…“聖母님 品性 본받는 이 時代 ‘샛별’ 길러내”

서울 계성高等學校(敎藏 민혜숙 효임 골룸바 修女, 以下 계성고)는 5月 16日 開校 80周年을 記念하는 聖母의 밤 行事를 開催했다. 行事는 學生들이 聖母님과 같은 品性을 갖추도록 全人 敎育을 펼쳐온 敎職員, 배움을 삶으로 살아가는 學生·同門들과 기쁨을 나누며 聖母님께 感謝의 祈禱를 드리는 자리로 마련됐다. 校長 민혜숙 修女는 畜舍에서 “80年間 誕生하고 成長한 수많은 ‘샛별’(學生)이 社會와 世界 곳곳에서 사람들을 引導하는 빛이 되어 살았고 只今도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敎育의 땅에서 샛별들에게 더 以上 어둠 속에 있지 않고 빛 속에서 기쁨을 품게 하신 前職, 現職 先生님들이 흘리신 땀을 記憶하며 이 자리를 빌려 깊은 感謝의 人事를 드린다”고 傳했다. 第1部 祈禱의 밤에는 오랜 歲月 계성고를 사랑으로 보살피신 聖母님에게 感謝의 마음을 傳하는 獻花 및 初 奉獻이 이뤄졌다. 參席者들은 계성고가 앞으로도 世上에 빛이 되는 學生들을 한결같이 길러낼 수 있길 聖母님께 請願하는 默珠祈禱를 함께 바쳤다. 第2部 文化의 밤에는 敎師, 在學生과 卒業生, 學父母의 이야기 나눔이 이어졌다. 이들은 나눔에서 계성고 特有의 밝고 肯定的인 雰圍氣, 入試로 힘든 高校 時節을 보내는 學生들에게 創造主 하느님께서 附與하신 固有性을 尊重하는 敎育 精神이 하루 이틀이 아닌 오랜 時間을 통해 造成된 것임에 목소리를 모았다. 계성고 김홍주(베드로) 指導神父는 講論을 통해 “學校에서 常住하며 週末에도 學校를 위해 여러 일을 하는 修女님들, 獻身的이고 學生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敎職員들이 있기에 學生들이 빛나는 人間으로 成長하며 報答해 올 수 있었다”고 力說했다. 그러면서 “주어진 길을 謙遜하고도 勇氣 있게 걸어 가신 聖母님처럼 새로운 未來로 나아가자”고 傳했다. 1944年 서울 明洞에서 계성女子高等學校로 誕生한 계성고는 어두운 時代일수록 必要한 빛, 聖母의 象徵이자 太陽을 豫告하는 샛별(溪聲·啓星)로 學生들을 꾸준히 길러내 왔다. 智德體·靈性을 兼備한 全人的 人間 養成과 福音的 價値(사랑·正義·平和) 實踐을 目標로, 平和 感受性 咸陽, 統合 生態的 敎育, 世界 市民으로서 共存 力量을 심어주는 人性 授業을 敎育 重點 課題로 遂行하고 있다. 學校는 2016年 길음동으로 移轉하고 男女共學으로 轉換했다.

서울 영등포에 ‘구상詩人길’ 생겼다

求道者의 삶을 살았던 故(故) 구상 詩人(요한 洗禮者·1919~2004) 腺腫 20週期를 追念하며 그를 기리는 ‘구상詩人길’ 名譽道路가 5月 16日 생겼다. 서울 영등포區廳은 道路名住所法 第10條와 같은 法 施行令 第21條 規定에 根據해 永登浦區 住所情報委員會 審議를 거쳐 ‘구상詩人길’ 名譽道路를 指定했다. ‘구상詩人길’ 名譽道路는 63빌딩에서부터 麻布大橋 南端을 잇는 여의동로 區間까지다. 始作點인 63빌딩은 구상 詩人의 汝矣島示範아파트 書齋人 棺受財(觀水齋) 隣近이며, 終點인 麻布大橋 南端에는 第2世宗文化會館이 들어설 豫定이어서 ‘구상詩人길’ 名譽道路 指定의 文化的 波及力이 클 것으로 豫想된다. ‘구상詩人길’ 名譽道路 指定에 힘쓴 서울市 영등포구議會 박현우(안셀모) 議員은 “영등포를 代表하는 世界的 文人 구상 詩人을 한마음 한뜻으로 追念하고 함께 記憶할 수 있어 기쁘게 생각한다”며 “‘구상詩人길’ 名譽道路 指定은 구상 詩人과 그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文化를 통해 하나로 統合되고, 文化都市 영등포의 持續可能한 發展을 위한 象徵的 土臺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朴 議員은 “구상 詩人 記念事業을 擴大하고자 구상 詩人과 關聯性이 있는 地自體認 慶尙北道 漆谷郡, 大邱廣域市 中區와 영등포구가 姊妹結緣을 締結해 相互協力을 增進하는 方案을 積極 檢討하겠다”고 밝혔다. 漆谷郡에는 ‘構想文學觀’이 있고, 大邱 中區는 구상 詩人이 6·25戰爭 中 避難을 가 다른 藝術人들과 交流했던 곳이다.

“恩寵 請하기 前 合當한 마음가짐으로 功勞 쌓아요”

每週 金曜日 午後 4時, 서울 西小門밖네거리 殉敎聖地(主任 원종현 야고보 新婦) 性 丁夏祥 바오로 경당에서는 ‘功勞를 쌓기 위한 祈禱 모임’이 열린다. 지난 3月부터 始作된 모임은 聖地擔當 이형전(루카) 新婦 指導로 이뤄진다. 이 神父는 3時40分頃부터 祈禱 모임에 對한 案內를 始作한다. 企圖에 穩全히 集中할 수 있도록 돕는 呼吸法을 紹介하고 感謝 祈禱와 痛悔의 祈禱를 통해 平安한 마음으로 기쁘게 하느님과 對話할 수 있도록 마음을 준비시킨다. 呼吸은 머리를 쉬고 생각을 멈추는 作業이다. 感謝 祈禱는 日常 안에서 베풀어 주신 恩寵과 사랑을 느끼면서 하느님과 紐帶를 느끼도록 한다. 이는 痛悔로 連結된다. 많은 것을 베풀어 주셨음에도 하느님을 속상하게 해드렸던 것들에 對해 마음 아파하고 뉘우치는 祈禱를 바칠 때 祈禱의 次元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지난 5月 10日에는 60餘 名이 모여 이 新婦 說明 後 苦痛의 神秘 5段을 바쳤다. 以後에는 聖務日禱의 저녁祈禱를 바치며 모임을 마무리했다. 이 神父는 내내 자리를 지키며 祈禱에 함께했다. 거의 每週 祈禱에 參與한다는 한 信者는 “所願만을 비는 祈禱가 아니라 感謝와 痛悔의 祈禱를 통해 깊게 祈禱에 젖을 수 있는 姿勢를 배울 수 있어서 좋다”며 “神父님과 여러 信者가 함께 祈禱할 수 있어서 더 所重하다”고 所感을 밝혔다. 이 祈禱 모임은 이 新婦가 司祭生活을 통해 體驗한 祈禱 方法과 恩寵을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마련했다. 祈禱를 통해 어떤 恩寵을 求할 때는 祈禱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그 恩寵을 받을 수 있을 만큼 功勞를 쌓았을 때 祈禱가 이뤄지는 經驗을 傳하고 싶어서다. 모임은 1~2月, 7~8月을 除外한 8個月 동안 繼續된다. 形態는 定해져 있지 않고, 十字架의 길 等 多樣한 祈禱가 바쳐질 豫定이다. “重要한 것은 于先 하느님과 올바른 關係 안에 있어야 하는데, 憤怒하고 미워하고 怨望하는 狀態에서는 意味가 없다”고 强調한 이 神父는 “祈禱 모임을 통해 信者들이 正말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祈禱를 하고 그 祈禱를 통해 實質的이고 具體的인 恩寵을 體驗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어 “이로써 正말 하느님께 報答하려는 마음이 들어서 기꺼이 只今까지 容恕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내어주지 못한 사람에게 다가가는 變化가 일어나게 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